종교개혁사(롤란트 베인턴 저)

신학서적 리뷰 2020. 6. 28. 07:24 Posted by forest38

종교개혁사(롤란트 베인턴 저)

홍치모/이훈영 역(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 내용 요약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의 말기, 각 분야에서 큰 변란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발생하였다. 르네상스는 기독교적 고대보다는 고전적 고대에 대한 열심을 표방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출현한 민족주의는 신성로마제국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교황의 신권체제를 약화시켰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종교의 부흥운동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공격의 표적은 오직 교황의 신권 체제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그의 노력은 중세 초기의 교회를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할 경우 복원되어야 하는 교회의 본래 모습은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나 심지어 바울서신과 복음서에 나오는 모습이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근본적 논조는 타락하지 않은 원초적 기독교의 회복이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 국가의 쇄신자였다.

그러나 교회는 중세기간 동안의 모든 모순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중 면죄부는 교회 부패의 절정이었다. 잉여 공로는 하나님의 보물창고에 저장되어 있는데 교황은 이를 자기 죄의 값을 치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자유로이 전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교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민중을 착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 루터의 신앙 ]

가톨릭적 해석자들은 종교개혁은 중세 후기의 병폐들의 교정이 아니라 연장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은 규율을 부활시키는 대신 제거한 것인데 예컨대 성직자들의 축첩을 성직자들의 결혼으로 대체시켰다는 것이다. 다른 가톨릭 역사가들은 개신교를 탐욕과 정욕을 근절하려는 정직한 시도로 간주했지만 그 열심이 지나친 나머지 교권에 대한 불복종으로 끝났다고 보았다.

루터가 철학은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다고 항상 변함없이 주장한 게 사실이지만 종교개혁은 후기 스콜라주의의 철학과 이성에 대한 경시 사상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공격의 표적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병폐가 아니라 가톨릭교 그 자체가 복음에 대한 병폐로서 그의 공격의 표적이었던 것이다. 그의 판단으로는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성을 너무 낮게 생각하고 인간의 가치와 잠재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교회는 신자들이 지나치게 만족감에 빠지거나 은총의 수단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주눅들이 않도록 하기 위해 공포심과 소망을 번갈아 가면서 이용했다. 절망에 빠질 정도로 섬뜩한 색깔로 지옥을 묘사한 다음에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연옥이 소개되곤 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층인데 낙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서 정화작용을 계속하는 장소였다.

루터는 그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아 인간의 본성 자체가 너무 타락해 있어서 근본적인 개조를 필요로 한다는 이유 때문에 범죄란 개별적으로 다룰 수 없고 또한 아무리 훌륭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 특수한 경우가 요구하는 수준에는 미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넘친다거나 다른 데 전용이 가능한 선행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루터가 그 신학을 공부하였던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자신에게 법이 되신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운명은 불확정적이며 하나님의 결정은 종잡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인간의 운명은 선악간에 미리 예정되었지만 인간은 그 향방을 알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 정죄된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정죄된 것이다. 구원된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하든 구원을 받는다.

루터는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무죄하시나 인간은 추악하다. 하나님은 강하시지만 인간은 연약하다. 그에 대한 답변은 그는 죄없는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이로써 우리 모두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고 인간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할 만큼 인간과의 일체감을 가지실 정도로 죄 많은 인류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는 것이다.

루터는 성서에 몰두하였으며 일천년 동안 그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던 사람들 중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용서의 기적이 갖는 의미를 체험하였으며 믿음과 신뢰, 오직 이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이야 말로 루터가 그토록 이성을 비하했던 이유이며, 이성을 인간의 마음의 척도로 이해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 루터의 개혁 ]

루터는 가톨릭 신학의 한 유형인 어거스틴주의와 또 다른 유형인 토마스주의를 서로 싸움 붙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가정했지만 그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부여한 능력으로 자기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 이성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루터는 교황과 교회회의의 무오성을 전부 부정하였다. 공로저축설의 경우는 교회법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결국 교회법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권위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중세 후기의 분파들로부터 종말론과 예정론이라는 두 파괴적인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보강되었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지칭하며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것이다.

다른 사상으로서 진정한 교회는 오직 예정된 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상이 있는데 그 사상은 오직 예정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방법이 있을 경우에만 위협적이 되는데 루터는 선택된 자들로 구성된 교회는 사람들에 의해 멸시와 거부를 당하고 세상에서 박해 받고 은폐될 수 밖에 없다는 점 이외에는 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가톨릭의 부패를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한 루터의 개혁은 점차 경직된 성서주의(Biblicism)의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에게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성육신, 십자가, 부활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의미하였다. 이 계시는 시간적으로 예수의 역사적 생애에 의해 제약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존하시며 또한 인간들의 마음 속에 항상 임재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의 현현은 성육신을 통해서였다.

미사의 경우 루터는 집요하게 이는 희생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성찬의 원어는 유카리스트(eucharist)인데 이는 곧 감사를 의미하며 그 원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루터는 화체설을 부정했는데 떡과 포도주가 하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하다는 것을 부정했으나 실질적이고 육체적인 임재는 부정하지 않았다.

중세 성기 이래로 성례의 숫자는 혼인, 신품, 종부, 견진, 고해, 미사, 세례의 7가지로 정해졌다. 루터는 성찬과 세례의 두 가지로 줄였는데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불가시적 은총의 외적 표지이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루터는 국가는 그 자체의 영역내에서는 교회의 간섭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상은 중세에 독일 황제들이 교황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지지했고 단테가 유창한 필치로 옹호했던 교회와 국가간의 병립이었다. 그의 실천가능 여부는 입증되지 않았다. 루터는 황제교황주의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 제네바 개혁교회: 칼빈주의 ]

칼빈주의는 불어권 스위스인 제네바에서 시작되었는데 종교에 외형적 수단을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색하였고 성상이 거부되었으며 음악은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신성공동체의 개념을 좀 더 대규모로 이해했으며 성찬을 영적 교제의 통로로 이해한 점은 루터파와 비슷했고 또한 칼빈파의 시편 찬송은 루터파의 성가곡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를 확신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재세례파의 교회관과, 좀 더 뚜렷한 것으로 엄격한 치리를 요구하는 그들의 태도는 칼빈주의에게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

칼빈주의는 활동적이었다. 왜냐하면 칼빈주의자들은 행동해야 할 필요성과 행동 역량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 화약 이후에는 안정된 지위를 누리게 되면서 신앙적 긴장이 풀려 버린 루터파나 또한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나 간신히 살아남는데 급급했던 재세례파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었다. 칼빈주의는 앞서의 사상들을 취합하기도 하고 독자적인 주장도 했다.

그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수세기 동안 개신교의 상당한 지역에서 마치 가톨릭 세계에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Sentences가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Thomas Aquinas의 Summa 조차 이에 비견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장황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의 필체는 간결하고 종합적이고 명쾌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신론, 인간론, 교회론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칼빈주의가 개신교이 가장 활발한 교파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칼빈주의의 추진력은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낙관론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칼빈의 인간관은 루터파나 재세례파에 못지않게 어둡고, 심지어 더욱 파괴적인 감이 있다. 그는 인간을 타락된 존재로 묘사한다.

비록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 반드시 돼지우리같이 될 필연적 이유는 없지만 그것은 결코 낙원이 될 수 없다. 재세례파는 그와 유사한 분석으로부터 교회가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논리를 끌어냈고 루터는 단지 체념섞인 참여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사회 영역내에서 활동하도록 단호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용기에는 ‘예정론’이라는 낙관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서의 위대한 구절은 “네 죄가 사함을 입었느니라”라면 칼빈에게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였다. 칼빈과 루터는 모두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압도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만 루터는 이를 사죄의 기적을 강조하는데 이용했고 칼빈은 신적 계획의 견고성에 대한 확신의 원천으로 이해했다. 그 결과 기독교강요에서는 이신칭의 항목에 앞서 하나님의 주권 항목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주님의 신속한 재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최후의 대환난을 불명확한 미래의 일로 미루었다. 루터는 역상의 종말이 자신의 죽음 이전에 올 것을 열심히 기대하였고 재세례파는 종종 날짜를 정하곤 했다. 그러나 칼빈은 주님의 위대하고 임박한 날을 지상에서 실현될 신성공동체의 꿈으로 대체시켰다. 그 건립은 인간 곧 하나님이 선택한 도구인 선민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위대한 명령을 지키는 데 실패했고 하나님은 그들 대신 새로운 이스라엘인 기독교회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그 교회 역시 변절하였고 이제는 정선된 소수의 무리들, 즉 선민들에게만 소명이 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다시 한번 선택된 자들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지에 관한 방법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루터는 이를 아는 듯이 행세하지 않았다. 뮌처는 영으로 안다고 했고, 쯔빙글리는 믿음으로 안다고 했으며, 재세례파들은 생활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알 길은 없다고 하면서 재세례파처럼 가라지는 없이 오직 밀만 있는 교회를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쯔빙글리의 기준과 재세례파의 기준을 받아들였다. 그는 여기에 세번째 기준(성례전에의 참여)을 덧붙였는데, 이로써 루터와 심지어 가톨릭측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칼빈이 생각하기에 성례전은 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의 통로이자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교제의 표현이다. 인간의 주된 목적은 자기를 구원하거나 그의 구원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어쨌든 인간은 이미 구원받았든지 버림받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므로 이를 놓고 걱정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이었다. 칼빈으로서는 선택 교리는 형언할 수 없는 위안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체의 근심을 제거하고 인간을 자신에 대한 염려로부터 해방하여 주권자 하나님을 위해 불굴의 봉사를 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 자유신령파 ]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 유형들과는 상이한 또 다른 형태를 나았는데 그 특징은 신비주의와 합리주의였다.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중요성은 후대에 엄청나게 유행했던 사상들을 선도했다는데 있다.

이들 자유신령파가 지지했던 신비주의와 합리주의는 모두 기독교 전통속에 뿌리박은 것으로서 하나같이 성과가 크면서도 동시에 탈선가능성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신비주의를 단순히 따스한 개인적 신앙 체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생명력 있는 기독교의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좀더 전문적인 견지에서 신성과 인성이 합일을 목표로 삼는 하나의 종교 유형으로 볼 경우에는 기독교를 강화하는 동시에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공존하게 된다. 인간이 신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개념은 베드로후서에서 찾아볼 수 있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고 말한 한 이교 시인의 말을 호의적으로 인용할 수 있었다.

기욤포스텔은 고대 동방의 비전의 신비적 지식의 비밀을 구명하려는 열망으로 히브리어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행의 도중에 외경이 야고보 복음서를 발견했고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아람어를 익혔다. 모든 진리의 통합과 모든 신앙의 궁극적 조화를 꾀하는 르네상스적 신앙은 그로 하여금 모든 종교의 일치를 이룩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당시에 이단으로 의심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이 후대에 끼친 엄청난 영향으로 인해서 신학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폴란드는 반삼위일체론과 재세례주의가 다양하게 조합된 집단들의 일대 거점이 되었다. 아 나라에거 일어난 운동은 파우스투스 소치누스 또는 소지니의 이름을 붙여 소지니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분명히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폴란드 여왕보나 스포르차의 호의로 이탈리아인들의 이주가 촉진되었다.

자유신령파는 비록 조직된 운동의 형태로는 거의 남긴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탐구, 신비적 경건, 신앙의 자유 등에서 다른 개신교 단체들에 그 나름의 각인을 남겼다. 계몽주의 시대는 그들을 거의 자기들의 사상적 선배로 인정하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분명히 그들의 신세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2. 리뷰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개념과는 다르게 다양한 형태의 종교개혁이 있었고 이러한 다양성은 현대 신학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패러다임들이 하나님의 복음과 어떻게 연결되고 또한 연결시켜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개혁을 어떻게 진행했으며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그들의 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선 종교개혁의 양대 거두라고 할 수 있는 루터파와 칼빈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면밀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루터가 처음에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잘못된 신앙을 교정하려는 것으로서 일이 그처럼 커지게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루터는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주이자들과 맞서야 했고 한편으로는 급진주의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자신들을 이미 ‘창세전부터 예정되어 있는’ 신도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보다 더 과감한 개혁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면서 이신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사랑의 행함이나 거룩한 삶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는 비난이 있는데 칼빈주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더불어 거룩한 생활을 통한 성화를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결코 편향된 가르침이 아니라 균형 잡힌 사상임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성화에의 강조는 그가 주장하는 ‘예정론’과는 논리적으로 배치되는 부분이 있어서 신학적으로 더 깊이 연구해야 하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가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성령에 의지하고 기독교적 확신으로 과감히 개혁하고 고쳐 나간 것은 참으로 위대한 공헌이라고 봐야 한다. 칼빈주의는 현실에 더욱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특별히 역사적으로는 소수파로 분류되고 있는 재세례파와 신비주의 등이 후대에 미친 엄청난 영향을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데 이들을 통해서 신학적 사상이 풍부해졌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수많은 이단교파가 이러한 이론 들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결국 이러한 선별적 능력은 이러한 좋은 서적을 광범위하게 탐독하여 지식을 함양해야 하는 것이다.

3. 생각의 충돌

저자인 롤란드 베인튼(R.H.Bainton)의 종교개혁사는 자신이 수십년간 강의한 것을 압축한 것으로 종교개혁의 역사가 녹아 있다. 그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해주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이번 강좌에서 중시하고 있는 루터파와 칼빈주의의 심화과정이나 비교 등은 상대적으로 많이 취급하고 있지 않아서 좀 아쉬운 감이 있다. 때문에 다른 교재로 보충을 하여야 했다.

역사적으로 루터파와 칼빈파가 대립이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루터의 입장에서는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당시 로마 가톨릭의 부패에 정면으로 맞섰던 것으로서 그러한 실제 행동의 와중에서 교리적으로 후대에 비판을 받는 부분은 어떻게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구원의 믿음에서 나온다는 그의 탁월한 안목이나 목숨을 건 소신 등을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칼빈주의는 교회와 학교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분야에 걸친 개혁운동이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부의 균등한 분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부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칼빈의 ‘직업소명설’도 이러한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입장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칼빈이 얘기하는 ‘섭리’란 결정론이나 운명론이 아닌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허용하고 이 자유와 책임과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는 것인데 이 이론은 결국 신도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끊임없이 성화과정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 과정은 죽기 직전까지라고 하는 조직신학의 논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독교강요는 오늘날의 신학으로 보아도 명쾌하고 탁월한 것이 틀림 없다. 아마도 그 때 당시로서는 참신한 신학이론이었을 텐데 단숨에 명쾌하게 신학 이론을 정립하고 제도적으로 완비된 교회조직의 이론적인 기반이 되었다.

그가 운영한 제네바 아카데미는 종교개혁 사상 특히 개혁교회 전통을 온 유럽으로 전파하는 요람이었는데 유럽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제네바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배운 개혁교회의 이상을 실현하였으며, 이를 통해 개혁교회 전통은 명실상부한 국제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 아카데미의 두드러진 특징중 하나가 인문학과 교양에 대한 강조였다고 한다. 특별계시뿐 아니라 일반계시도 중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4. 풀리지 않는 의문

로마가톨릭의 부패를 극복하고 새로이 탄생한 개혁주의적 신학이 여전히 분파 주의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일러니이다. 복음전파를 아직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내에 있는 갈등이다. 정통교단내에서도 통일되지 않는 수많은 논쟁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외적으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고민 해야 한다. 이 문제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개인 신앙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회의감하고도 연결이 된다. 교회는 개인 신앙의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공동체의 구원’을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종교개혁사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현대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많은 묵상과 학습, 그리고 실천적 삶까지 수반되어야 한다.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 스스로 부족한 점을 채우고 행실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지 자격이나 소명부터 점검해본 뒤 실천해야 한다.

또한 신학이론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칼빈은 ‘예정론’을 주장하면서도 또한 실천적인 ‘성화과정’을 강조한다. 교수님께서 강의에서도 설명 하신 바 같이 이것이 변증법적인 논리이며 결정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난해하다. 로마서 7장 8장을 읽다가 느끼던 논리의 비약을 다시 여기서도 마주하게 된다. 어떤 연결고리가 있어야 이 의문이 풀리는가.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결국 완성되지 않지만 인간적인 노력을 끝까지 기울여야 한다는 논리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결코 달성할 수 없지만 죽을 때까지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서 철학과 신학을 좀 더 공부해야 한다는 필요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고 현대 신학은 어거스틴에 대한 주석이라는 말이 있다. 철학과 신학이 플라톤과 어거스틴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는 말인 동시에 또 그들의 영향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일 것이고 또한 플라톤과 어거스틴을 모르고는 철학도, 신학도 기반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종교개혁사를 배우면서 어거스틴을 연구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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