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vin J. Vanhoozer, Owen Strachan/ 박세혁 역

제의 제기

그리스도인으로서, 신학도로서 신학은 실천을 전제로 하는 학문이다.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목회자의 사역에서 신학은 그 자체로서 신학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목회사역과 자신의 삶에서 목회자는 이미 공인이므로 그는 올바른 신학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을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삶에 찌든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게 하실 뿐 아니라 아침마다 나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 듣게 하신다고 하였다. 목회자의 사명은 이 세상을 신학으로 재해석해서 학자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신학으로 단련되지 않은 목회는 개인과 사회의 분리, 신앙과 실천의 분리, 삶과 죽음의 괴리만을 남길 뿐이다. 많은 목회자들은 신학교를 졸업하는 즉시 신학서적을 손에서 놓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교재 요약

1부 : 성서신학과 역사신학

< 예언자, 제사장, 왕 – 목회직에 관한 간략한 성서신학 >

목회현장에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침투해 계신 하나님과 현실의 왕들의 권세간에 벌어지는 일정 구역에서의 영적 전쟁이다. 예를 들어, 제사장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종결되고 성취되었다. 그러나 옛 언약에서 제사장과 예언자, 왕이 담당했던 사역의 핵심요소는 새 언약에서 목회직으로 이전되었다. 즉, 목회자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약 담당자로서의 직무를 맡고 있다. 제사장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종결되고 성취되었다. 그러나 옛 언약에서 제사장과 예언자, 왕이 담당했던 사역의 핵심요소는 새 언약에서 목회직으로 이전되었다. 즉, 목회자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약 담당자로서의 직무를 맡고 있다. 성서적 견지에서 제사장의 성별됨은 어떤 의미에서도 도피가 아니다. 사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사역에 뛰어들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봐야 것이다. 따라서 제사장의 목회는 소망의 사역이다. 제사장은 물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정화의 약속을 통해 민족에게 은혜를 제공했다.

우리는 예언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매개하는 사람,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 후히 베푸시는, 심지어깜짝 놀라게 하는 은혜의 전령이 바로 예언자였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선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하는 변하는 시대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는 지상의 권력을 행사하는 지위를 가짐으로써가 아니라 백성의 고통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들을 섬긴다. 온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인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은 신약의 목회자와 비견된다. 제사장의 사역은 율법을 가르치고 수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목회 사역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그분이 선한 목자임을 배운다. 목회자는 방어 작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양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음으로써 양떼를 보호한다. 목회자는 교회를 위한 성별된 삶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옛 언약의 제사장과 비슷하다. 목회자라고 해서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것은 아니다. 목회를 한다고 해서 개인적 불완전함이나 약점이 제거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더 커진다. 목회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기 전에 먼저 그 은혜를 구해야만 한다. 목회자는 사람들과 분리되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 살며 움직이고 그들이 세속적 삶이 아니라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상담하고 심방하고 훈련시킨다. 은혜의 목회는 목회자를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

피 흘림의 제사는 이미 끝났다. 하지만 설교와 교육, 상담, 훈련, 심방 등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목회자는 자신보다 먼저 은혜를 전했던 제사장처럼 사람들에게 은혜의 양식, 즉 모든 생명을 위한 그리스도의 전부를 제시한다.

제사장으로서의 목회자가 은혜를 전하였듯이 왕으로서의 목회자는 지혜를 전해야 하며 예언자로서의 목회자는 진리를 전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모든 목회자들은 그들을 제거하려시도하는 죄와 사탄이라는 원수의 위협 속에서 맡은 일을 한다. 어떤 경우든 모든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섬기고 이 진리로부터 위대한 소망을 얻는 특권을 누린다.

< 학자와 성인 – 목회직의 간략한 역사 >

북아프리카의 목회자 히포의 아우구스트누스는 교회사의 첫 500면에서 가장 중요한 주교 중 한 사람이었다. 목회의 일차적 대상은 복음이 필요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한가롭게 신학적 몽상을 즐길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목회하기 위해 공부해야 했으며 그가 보기에 목회란 곧 교육이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비밀을 맡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직업이라기보다는 직분이다. 직분이라는 말은 목회직을 귀하게 여기고 그 직분을 거룩하고도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 직분은 사람이 택하는 게 아니다. 이 직분은 주께 부름 받고 교회에 의해 임명 받는 것이다. 목회자의 일은 정말로 심각한 일인 동시에 생명을 주는 일이다. 율법과 복음을 잘못 이해한다면, 우리는 ‘참된 신학’으로부터 멀어져 그리스도를 모호하게 만드는 셈이다. 그분의 의로운 사역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모든 능력을 구한다. 칼빈은 목회직을 정의하면서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섬김의 효과와 능력을 성서와 연결시킨다. 목회자로서 그는 성서를 전적으로 신뢰했으며 세상이 권세를 지닌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성서 앞에서 책임져야 한다고 믿었다. 칼빈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주된 수단은 설교였으며, 그는 강해설교를 통해 성서의 여러 책을 연속해서 설교했으며 간결하지만 깊은 연구에 기초해서 본문을 해석했다.

청교도들은 목회사역이 신학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교회의 삶 속에서 성서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라는 부르심이라고 생각했다. 이 청교도의 후예로서 미국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인 에드워즈는 강력한 목회를 이끌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는 힘은 그분 안에만 있는 ’다양한 탁월성’과의 놀라운 만남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에드 워즈는 청중에게 그리스도와 친구가 되고 ‘최고 수준’의 감정과 행복을 경험하라고 말했다. 목회사역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목회직이 맞고 있는 현대의 위기는 신학적 후퇴라고 묘사할 수 있다. 신학자들도 이런 거대한 문화적 변화로 인해 고통을 겪었지만 목회자들은 그보다 훨씬 큰 어려움을 겪었다. 신학은 이전처럼 보편적인 지식인의 학문이 아니라 전문적인 학문이 되었다. 고백적 전통을 제외하면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목회직은 신학적 직분으로서의 성격을 대체로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변화 앞에서 일부 목회자들은 역사적인 목회자 모형을 회복하여 현대인이 떼어낸 것을 고쳐보려고 하였다. 헤럴드 존 오켕가는 논리적 교리에 기초한 길고 지적 야심이 큰 설교를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삶과 사상의 영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신학 사역을 중심으로 삼는 목회직의 역사적 모형을 회복하기 원했다. 그는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성서를 깊이 연구하고 해석하는 일에 집중했다. 말씀이 사람들을 영적으로 먹인다고 믿었으며 신학적 목회직에 전념했다.

오늘날 복음적인 교회들이 쇠락의 위협에 직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속화 하는 사회와 때로는 목회자의 상속권을 고기 한 점과 기꺼이 바꾸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안에도 위대한 희망이 가까이 와 있다. 불을 지닌 새로운 세대의 목회자들이 신학과 실천적 목회를 결합시키고 있다. 목회자로서 우리가 하는 사역과 교회로서 우리가 하는 사역은 우리 모두가 신학자라는 전제와 그렇다면 우리가 좋은 신학자가 되기 위해 마땅히 노력해야 한다는 확신에 기초한다.

2부 : 조직신학과 실천신학

< 복음의 기분 – 목회자/신학자의 목적 >

목회자-신학자는 기분을 바꿔주는 약이 아니라 기분을 바꾸는 현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셨으며 그 안에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복된 소식을 제공함으로써 영혼을 치유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전달하고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사람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성서적, 신학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말씀을 전달한다. 직설법은 세계가 특정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는 화자의 믿음을 표현한다. 신학에서는 많은 어법이 필요하지만, 복음은 직설법이다. 네 번째 복음서의 대부분은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행하셨는지에 대한 증언을 직설법으로 기록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요 20:31)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의 있음을 마치 있는 것처럼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종말론적 직설법이다.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온전히 존재하지는 않는 바를 가리킨다. 제자들이 아직 그리스도의 형상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성령 덕분에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을 누리고 있다.

신학자는 그리스도라는 특수한 한 가지와 관련지어 일반적인 것들(새로워진 창조질서)에 관해 말하는 보편적 지식인이다. 신학자는 음식을 대접하듯이 다른 이들에게 말씀을 대접하여 그들이 더 쉽게 그것을 소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을 하기 위해 목회자-신학자는 성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세상,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적용되어야 할 세상도 읽어야 한다. 문화 독해력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왕국을 위한 효과적이고 문화적인 참여자가 되기 위해 그들의 일상적 문화에 관해 알고 있어야 하는 바를 가리킨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세우기 위해 그들에게 이해 사역을 하는 공공신학자이다. 소설 읽기는 우리가 우리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동일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많은 목회신학 책보다 인류에게 감명을 준 소설을 읽음으로써 목회자의 삶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 소설은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문화 전체를 이해하게 해 준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목회자-신학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마음이나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바울은 겸손을 그 특징으로 꼽는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라 날마다 옛 자아에 대해 죽는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집의 장인들 : 목회자/신학자의 활동 >

목회자는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때문에 공공신학자이다. 그의 특수한 소명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 든든히 세우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교회를 기르는 사람,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베드로의 쌍둥이 고백의 형식과 내용, 즉, 영생의 근원인 예수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 그리스도는 모든 목회자-신학자를 위한 본보기이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영혼, 즉 한 사람의 자아나 내적 삶을 돌보는 감독이시다. 선한 목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으로서 우리는 하나의 모범적인 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목회사역의 자료는 양과 염소의 피가 아니라 말과 사람들이다. 목회자-신학자는 넓은 의미에서 전도자다.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자들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제자들이 복음의 낯설고 새로운 세상 안에 살도록 하기 위해서 말을 사용한다. 말과 삶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를 전하는 일이다.

목회자-신학자가 제공해야 하는 바는 그저 좋은 기분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소식,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풍성한 위로다. 설교는 말씀 사역의 유일한 형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목회자-신학자의 가장 특징적인 활동이자 가장 중요한 활동중 하나다. 설교는 목회사역의 총체가 아니지만 그 축소판이다. 모든 목회자는 교리문답 교사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령이 메스로 수술하듯거짓 가르침을 제거하고 교리문답의 정맥주사로 그것을 건전한 교리로 대체하는 수술실 이다.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를 새롭게 깨달은 교회라는 몸은 교리가 지성안 에서만 헛도는 대신 혈류를 타고 흐르게 된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 이야기의 요약이자 그분이 성취하신 현실의 맛보기이다. 주의 만찬을 집례하는 것은 동작은 단순하지만 그 의미는 너무나도 정교한 공공신학의 행위다. 목회자-신학자는 매주 주의 만찬을 집례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신학적 보물을 캐내어야 한다. 그것은 복음의 요약이자 현실의 목회, 교회에 관한 진리의 재현이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십자가의 지혜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실천해 보이는 공동체이다. 교회의 실존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에 관한 두 주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데 첫째로 기쁨에 찬 인내에 근거한 논증이며 둘째로 사귐의 확장에 근거한 논증을 구현한다. 교회의 공동생활이 얼마나 건강한가는 그 교회가 복음을 얼마나 온전히 증언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 본질을 구현할 때 교회는 실현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조물이 된다.

소감 : 목회와 신학의 조화(신학자로서의 목회자)

목회자가 목회 사역을 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현실 권력과의 영적 전쟁이다. 예를 들어, 제사장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종결되고 성취되었다. 그러나 구약에서의 제사장과 예언자, 왕이 담당했던 사역은 새 언약하에서 목회자에게 부여된 임무이다. 즉, 신약 시대 목회자는 공공 신학자로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를 중재해준다. 목회자로서 신학도 로서 우리는 구약의 제사장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그들의 장점을 흡수하고 또한 단점을 찾아내어 현실에 적용하여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준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재해석 하여야 한다. 고대 제사장이 일반 백성과 구별되었던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별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었다고 봐야 한다. 구별은 현실에서 괴리된 도피가 아니라 영적으로 다른 갑옷을 입고 구원사역에 뛰어 들라는 소명이었다. 성서적 견지에서 제사장이 백성들과 성별됨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 받은 자들의 실천적 사역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예언한다는 것은 창세전부터 변치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기반으로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백성들에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일 뿐인 목회자는 먼저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지하여 사역하여야 한다. 목회자로서 끊임없이 회개하지만 다시 순환되는 죄의 고리에 대한 참담한 자각을 하여야 하며 고대의 제사장을 본받아 자기를 희생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용서에만 의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어떻게 목회사역을 감당하려는가? “ 하고 묻는다면 오직 “그리스도”라고 답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야 하는 것이므로 그 사역은 목회자의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 스도의 것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목회는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존하여야 하는 것이다. 원래 종말이라는 개념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한 점 숨김없이 드러나는 상태를 말한 다고 한다. 그 앞에서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개하고 다시 범죄하고 하는 과정 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아주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죄성을 긁어 낼 때 비로소 회개나 참회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소명으로서 목회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가장 강하신 때가 바로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음을 했을 때였다. 그것은 자신을 번제로 드림으로써 새 언약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한다. 지혜 롭게 자신을 다 내려놓고 약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죽기까지 낮아지고 사랑함으로써 강한 자가 되시었듯이 목회자는 이것을 본보기로서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이 영광과 아름다움임을 알게 될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많은 목이 곧은 목회자들은 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목회를 곧 교육으로 간주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신학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필수적으로 여겼다. 이것이 직분이라는 용어와 결합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교육하고 전달하는 신분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목회자는 지혜로운 신학자였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거룩한 구별로 나타나게 된 사람들이었다. 배우는 것이 누적이 되면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위대한 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이자 신학자가 성서의 올바른 해독을 위해서 기울여야 하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일곱집사를 새로 뽑아서 그들에게 교회 일을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데 전념한다. 오직 성서만이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증언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고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그가 이룩한 대속 죽음과 부활이라는 엄청난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성서를 알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해 우리는 성서를 공부해야 하고 이것을 목회현장과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신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을 성서적으로 대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성서가 신학의 핵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성서를 무시한 작금의 북미 교회 목회의 부정적 결과를 살펴보라. 신학자는 그리스도라는 일반적인 차원과는 다른 특수한 원리를 새로워진 창조질서라는 보편적인 가지에 접목시키는 공공의 지식인이다. 신학자는 초대교회 이래 사도들의 전승으로 이어 지는 성서적 진리를 다른 이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녹여주는 역할을 한다. 목회자-신학자는 당대문화를 해독할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소설을 통해 인간 해독력을 양성해야 한다. 역설적 으로 세속적인 현대소설은 그리스도와 분리된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다. 선교사가 그 나라의 언어 뿐만 아니라 문학을 깊이 있게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게 된다.

목회자는 다양한 이유로 많은 분량의 독서를 하여야 한다. 목회자의 인생 경험이 모든 신도들을 아우를 수 있는 풍부함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는 힘든다. 목회자는 십자가의 복음을 일반 신도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해독하기 위해서는 신문과 잡지를 읽어야 하고 시와 소설을 통해서 동시대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많은 경우 설교는 하나의 예화로부터 시작한다. 노련한 설교자는 훌륭한 예화를 많은 소스로부터 공급받는다.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살았던 그 귀중한 자료를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신학자로서의 목회자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위선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아를 죽임으로써 스스로 죄를 감당할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변해야 한다. 그가 대중 앞에서 설교를 할 때 그가 죄에 미약할지라도 성령께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역사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정치가는 정치로, 시인은 시로, 장수는 전쟁의 승패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는 설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성서 해독력을 통해서 정경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밝힘으로써 신학을 해독한다. 설교는 보혜사로서 항상 곁에 계시지만 우리의 실존 너머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설교를 통해 목회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복음을 새겨 넣는 것이다.

진선미는 이러한 설교를 설명해주는 데 적합한 개념이다. 복음의 진리는 참됨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성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타락하였고 그것을 다시 하나님의 구원역사라는 원대한 경륜적 구속사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성서가 단지 합리적인 것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성서의 가르침은 분명 선에 근거하고 있다. 대속의 피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피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자비와 긍휼은 분명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이에 더하여 새 언약에는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도 내포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희생은 삶을 더할 수 없이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 이 아름다움은 자신을 희생하여 한없이 낮아짐 으로써 엄청난 기쁨으로 넘치게 하는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는 성서 계시라는 거대 담론을 통해 일직선적 종말론적 구속사를 선포하는 자이다. 목회자는 성서를 통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거대담론과 구별된 개별본문을 해석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신학을 떠난 목회자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이유다. 역사적으로 봐도 위대한 목회자는 지혜로운 신학자였다. 현대사회의 전문직종으로서의 목사직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니다. 소명을 받은 거룩한 직분으로서의 목회자는 올바른 신학으로 무장하여 그리 스도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자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신학적 지식이 부족하거나 교회가 신학을 가르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어떻게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게 할 것이며 복음으로 뭉쳐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게 할 것인다.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은 교리적 진실을 필요로 한다. 피상적인 이세상은 깊이 있는 예배를 필요로 한다. 선하고 거룩한 생각을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이 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많은 노력은 헛수고가 될 뿐이다. 목회자는 이러한 모든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신학을 통해 성서적으로 묵상하고 해석한다. 신학적으로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힘은 신학을 포함한 주변 학문에 대한 독서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힘이 드러날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의 선진들이 가졌던 신학적인 지혜를 통해 우리의 통찰을 발전시키고 검증하길 원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예배, 기도, 예전 등 모든 것이 신학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이렇게 신학적인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주시는 사랑을 인식하고 그의 한량 없는 사랑을 찬양하기 위해서다.

비평 : 본 교재의 독특성 및 장단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목회자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공동체를 위한 보편적 지식인, 공공신학자의 소명을 되찾고자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목회직을 정의하기 위해 초대교회부터 현대사회까지의 교회사를 비교, 분석, 비판하고 여러가지 현실적인 준거틀을 대입함으로써 신학자로 서의 목회자를 정의하려고 노력하였다. 초월하신 하나님, 즉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분으로서 그 분 안에서 모든 이성, 모든 선, 모든 소망, 모든 실재, 모든 구분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목회자가 신학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탁월한 논리로 주장하고 있다. 앞서 요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오늘날 복음적인 교회들이 쇠락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규정하고 세속화하는 사회와 비열한 목회자의 야합이 난무하는 교회안에도 위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불을 지닌 새로운 세대의 목회자들이 신학과 실천적 목회를 결합시키고 있는데 있다고 전제하면서 목회자-신학자는 기분을 바꿔주는 약이 아니라 기분을 바꾸는 현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셨으며 그 안에서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복된 소식을 제공함으로써 영혼을 치유한다고 통찰한다. 또한 저자는 목회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전달하고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사람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성서적, 신학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말씀을 전달한다고 하면서 신학과 목회는 결합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객관성이 확보 되지 않아 주관적인 생각에 그치고 있는지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1) 단점

저자는 이 책에서 아주 다양한 신학자들과 협력하여 한 권의 책을 완성함으로써 넓은 스펙트럼으로 자신의 주장을 검증하고 있다. 그 중에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다양한 저자들의 글로 인하여 일관성이 없고 이리 저리 주제를 찾아 헤매게 하는 단점이 있다. 어쨌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목회자는 신학자로서의 소양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므로 한 두사람의 집중적이고 전문적인 논리 전개가 더 나았을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완전히 다르게 저술한 것에 비해 완성도가 아무래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독자는 책의 제목만으로 보아 저자가 목회자란 무엇인가를 논하면서 목회윤리라든지 소명이라든지를 논할 것으로 생각되기 쉬울 것인데 사실은 목회자가 신학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결론에 조금은 당황스러워 한다. 제목을 통해 어떤 신학도는 이 책을 읽고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판단해 보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논리는 폭이 좁아졌고 어쩌면 목회자가 신학적인 소양이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일 뿐이다. 여기에는 구성 및 논리상의 반전이라든지 플롯의 짜임새라 든지 하는 재미가 결여되어 있다. 또한 목회현장에서 실제로 사역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저자의 주장처럼 독서와 공부를 강조하는데 있어서 이 주장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결국 목회자-신학자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여 신선하게 자신의 논리를 주장한 장점이 있지만 결국 공부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조금 진부한 측면이 없지 않다. 목회윤리를 포함한 보다 포괄적인 주제를 설정하였더라면 더 호소력 있게 설명되었을 것 같다.

2) 장점

이 책은 현대 교회의 목회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다. 신학은 실종 되었고 윤리는 바닥에 떨어졌으며 교회가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줘야 하는 이러한 현실을 과거의 위대한 목회자들이 지혜로운 신학자 였음을 밝힘으로써 문제 해결을 정확하게 진단하였으며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본서는 목회자가 어떻게 인문학적인 소양을 길러야 하며 신학적인 성찰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아주 구체적으로 방향을 제시해준다. 예를 들어서 목회자가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을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을 하고 있다. 저자의 이야기처럼 현대 소설은 그리스도와 분리된 삶이 얼마나 처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문학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이고 목회자들에게도 문화 전체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목회자로 하여금 많은 독서와 학습을 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해 준다. 많은 목회자나 신학도들은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단지 목회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다고 볼 수 없음을 갈파한다. 목회를 한다고 해서 개인적 불완전함이나 약점이 제거되기는 커녕 더 악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목회자들은 도망치지 말고 그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서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목회자는 그가 보살피는 양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며 사람들에게 성서의 계시를 알려 주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회자는 원죄로 인해 완전한 인간일 수 없으며 끊임없이 죄를 짓고 또 회개하고 한 없이 낮은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 임을 알려줌으로써 죄인이라 할지라도 소명에 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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