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믿음의 최고가 되고 싶다」

(박민희 저)

요약

「나도 믿음의 최고가 되고 싶다」(부제: 영적 성숙을 위한 성찰)는 전체적으로 구성이 탄탄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논지가 분명하다. 목회자로서 삶에 녹아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수필형태로 잔잔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책을 파트별로 순차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 1부: 믿음은 확신이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명을 주실 때 자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이전부터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라는 종교적 함의가 담겨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며 우리를 포함한 모든 만물은 그가 지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뿌리가 되는 “성경”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반면에 창조론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 대부분 창조론과 대비되는 진화론을 신봉하지만 과학적으로 비교해보아도 진화론은 창조론보다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진화론의 핵심인 태초의 생명체가 탄생되는 것과 종간의 변이가 이루어지는 것을 화석으로도 이론으로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가설일 뿐인 것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그 근거로 삼기에는 그 책이 지닌 모순이 너무 많다. 사람은 관계적 존재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모든 관계의 토대요 출발점인 것이다. 이것이 관계적 삶과 관련하여 성서가 말하는 바다. 믿음은 하나의 증거인데 그것은 구체적이고 유형적이어서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이 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사랑, 행복 등이 그것이다. 믿음도 그와 같이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어떤 것이다. 영적 지식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믿음이라는 신앙 지식의 방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계를 지으셨다는 것을 안다. 성서는 그에 대한 증거이다.

익숙함은 계속해서 익숙해진 방향을 향해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익숙함은 신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익숙함을 향한 계속적인 여정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익숙해질수록 세상과는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세상과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익숙한 삶은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통해서 깊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삶의 연수가 더해질수록, 세상을 향해서는 익숙해지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향해서는 더욱 익숙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믿음의 줄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우리의 내명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정 존재하고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분이라면, 자신을 알리고 또 느끼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삶이 분명히 있다. 성서 속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증언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런 사실을 확증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느낀다. 느끼는 믿음이 커질수록 우리의 믿음은 깊어지게 된다.

건축은 신앙 생활에도 중요한 유비(analogy)를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건축이 집이나 건물을 짓는 일이라면 신앙생활은 믿음을 세우고 믿음의 집을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일종의 건축이며 믿음 안에서 우리의 매일의 삶은 믿음의 건축의 과정이다. 믿음의 관점에서 믿음의 건축환경은 신앙공동체이다. 믿음의 설계도는 성서,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위에 무리 자신을 건축하는 일보다 우리의 삶을 안전하고 의미 있고 보람있게 만드는 일은 없다. 믿음의 집을 짓는 일은 복되다.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는 믿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믿음 생각을 믿음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 그리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예배와 교제하는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들이며 하나님은 그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는 분이다. 발견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우리 인간은 발견의 객체이며 대상이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 되고 구원을 얻는 복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기 원한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 어떻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이 안에는 기독교 신앙의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온 마음을 다하여 신앙 고백적으로 드려야 한다. 그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로 기도하는 사람의 바른 태도이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우리의 기도가 당장 또는 살아가는 동안 응답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기도는 헛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최고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기도의 가치와 능력을 잘 알고 있다.

제 2부: 믿음은 행복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시는 계획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실천적 응답도 한 몫 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능력을 신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멍에를 메우셨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셨다면, 우리는 홀로 앉아서 잠잠히 기다릴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애굽을 나오기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두 가지의 책임이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것에 대한 예식을 지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신앙은 그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삶 속에 살아 있게 되었다. 기억은 충실한 신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또한 중요하다. 성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을 순례여행에 비유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중에서도 동행하고 계신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으면 예수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면서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 이보다 행복한 삶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훈련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훈련은 반복의 과정을 거친다.

지루하게 여겨질 만큼 한 것을 하고 또 한다. 그것이 몸에 밸 때까지 한다. 그래서 실전에 임할 때 자연스러워진다. 반복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하나의 자세를 형성한다. 그런 자세가 좋은 성과를 가져온다. 영적훈련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영적 훈련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열정은 희망이 있을 때 품을 수 있는 것이다. 희망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열정의 삶을 살 수 있다. 열정을 낳는 것은 바로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궁극적인 희망을 두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 희망은 가장 큰 절망이 된다. 그 희망너머에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에 궁극적인 희망을 두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 희망은 가장 확실하고 견고한 희망이 된다. 작은 일 하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성실히 행함으로써 우리 인생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 하나님은 매일 우리에게 하루의 삶을 선물로 주신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해 하나님께 충실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작은 일은 큰 가치를 지닌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작은 일 하나가 큰 일이 될 수 있다. 작은 실천 하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큰 실천이 될 수 있다.

제 3부: 믿음은 삶이다

코람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의 면전을 뜻하는 이 말은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성서가 말하는 피조물인 인간의 현실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늘에 계시며, 동시에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 존재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마주 대하여 서서 보고 계심을 의식하면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은 믿음의 최고가 되는 삶이며,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삶이다. 죄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그 생명의 수혜자인 우리와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다시 말하면,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떠나 죽음에 처하게 한다. 반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가 그 은혜에 바르게 응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 은혜에 맞게 바꿀 때 그 때부터 우리 안에서 바르게 작용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으로 눌린 사람들을 자유케 하셨다. 예수님은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자유와 해방의 사역이다. 성서에서 구원은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가? 하나님은 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다시 섬기고,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 살아 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인간의 자유는 본래 하나님 안에서 자유이며 하나님을 위한 자유이다. 그래서 그것은 책임적인 자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물으실 것이다.

제 4부 : 믿음은 희망이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시민권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그 나라의 왕으로 섬겨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다. 그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신앙생활에서 기본을 잘 닦고 또 기본에 충실해야 평생을 바르고 성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또한 실천을 필요로 한다. 믿음의 최고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기본을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 능숙하고 성숙한 신앙을 지향할 때, 비로소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삶에는 유혹이 있다. 우리에게 유혹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오는 유혹에 넘어가느냐, 그것을 물리치느냐 하는 것이다. 유혹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떠나도록 하기 위해 사탄이 사용하는 중요한 방법들 중 하나이다. 시험은 통과해야 하지만, 유혹은 물리쳐야 한다. 유혹을 통과하려고 그 유혹에 맞서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다. 요셉처럼, 유혹의 자리는 피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면,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계속될 수 있다.

무언가에 자신을 바치며 사는 삶은 고귀하고 아름답다. 복음에 자신을 바치며 사는 삶이라면 더욱 그렇다. 헌신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자기 몸을 드리는 것이다. 이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한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며 인정하신다. 복음에 헌신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들의 삶은 단연 믿음의 최고가 되는 삶이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기독교 신앙의 성서적, 신학적 바탕이다. 그것은 성서의 중심주제이며, 성서 이야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관통하는 핵심 적인 주제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지음 받았다. 인간이 자신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했을 때, 인간과 창조세계에 찾아온 것이 영적인 죽음과 고통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가까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회개와 믿음을 제시하셨다 회개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계심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평가

저자는 본인이 직접 삶에서 체험한 믿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것을 현실에 대입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설파한다. 우리는 아직 신학도의 입장에서 여러가지가 부족해서 그렇게 되기는 힘들지만 목회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고 역사는 경륜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인류 구속사의 일부라는 것이 다 보이고 그것을 글로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이 책을 숙독하면서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자신을 성찰해 나가며 자녀들에게 부모의 사랑보다도 훨씬 더 뛰어 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하는 한편 우리가 교회공동체와 함께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서평자의 입장에서는 본서가 기독교적 세계관에 치우쳐 논리의 오류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합리적 객관성이 확보 되었는지의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1) 단점

저자는 이 책에서 믿음 안에서 믿음은 확신이고 행복이며 삶 자체일 뿐만 아니라 희망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크리스천이라면 충분히 받아 들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줄거리이지만 비신자들이라면 별로 반갑지 않고 잘못된 종교적인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비신도들의 관점에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게 순차적으로 신앙의 강도를 높여나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권의 책으로 비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래전에 읽었던 미우라 아야꼬의 「신약성서 입문」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그 때 이후로도 15년 뒤에나 교회에 출석하여 세례를 받았으니까 당시는 전혀 기독교적 개념이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미션스쿨을 다니던 친구가 다른 일로 바쁘게 되어 학교에서 내준 독서보고 과제를 대신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한 적이 있다. 놀라웁게도 그 책을 읽으면서 어떤 한 대목에서 왜 크리스천들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고 비합리적인 것 같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되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인류를 위하여 값없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논리가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젠가는 교회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비로서 하게 되었으며 이후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아내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믿음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2) 장점

이 책은 구성적인 면에서 돋보인다. 내용의 짜임새도 탄탄하지만 4부 36장으로 정확한 나누기를 하고 있고 각 장이 길지 않고 부담이 없어서 적어도 크리스천이라면 편한 마음으로 기차여행을 하면서 읽어봄직한 책이다. 성경구절을 포함한 인용문이나 예시 등도 저자의 주장을 뚜렷하게 뒷받침해준다. 내용상 앞뒤 문맥이 연결성을 가지고 있어서 강의를 듣는 것보다도 저자의 의도가 훨씬 선명하게 전달이 된다. 전편을 통해 성경말씀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성경 읽기를 좋아하고 또한 신학도로서 공부로서 성경구절을 암송해야 하며 필요한 성경구절을 적소에 사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많은 도움이 된다. 이러한 신학 에세이는 영적인 측면에서 양식도 되지만 지적인 측면에서도 자산을 쌓아 나갈 수 있다. 신학교에 입학해서 3년간 공부를 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현실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성경구절이 떠오르는 일이 많아졌다. 정말감사한 일이다. 은퇴 후 다른 친구들이 모여서 화투나 당구로 소일하고 있을 때 우리는 감동하며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인 것이다.

이 책은 본 과목의 수강목표인 기독교적 성찰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신학적 성찰」의 기술을 번역한 권수영 교수는 “이 시대의 신학도들이 신학이라는 방대한 학문을 마스터하려는 무모한 생각보다 먼저 일상의 사소한 경험들을 신학적으로 사고하고 성찰하는 법부터 배워야 함은 우리 신학계의 절실한 과제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부터 오는 무궁한 지평과 내 자신이 현재 지금 자신이 선 자리에서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지평을 새로운 의미로 융합해내는 것이 바로 신학적 성찰”이라고 한다. 이런 개념을 이 책에 적용하면 전편을 통해 기독교적 성찰이 깔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의 삶의 모든 부분에 신학적 성찰을 통한 세계관의 구현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수필형식의 실제 체험담이므로 간증을 듣는 것 같이 곳곳에 감동이 있다. 아이가 사고로 입원하면서 부모로서 겪는 고통과 미지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극복해가면서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군생활의 식기 닦기를 마음 닦기와 비교하여 마음에 낀 때를 하나님 말씀으로 청결하게 닦아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군대를 다녀 온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라고 한다. 식기 세척으로 때를 벗은 식기처럼, 수건을 벗은 것같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바라 볼 그날을 기다려 본다.

3. 적용

1) 자신에게 적용

저자는 4장에서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믿음의 줄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내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이다”고 서술하고 있다. 삶에서 하나님이 임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뭔지는 모르지만 절대 존재가 있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 왔었다. 아마 유치한 단계의 종교적인 신앙이었을 텐데 지금 돌이켜 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절대자에 대한 숭배나 의식 등이 있다는 것이 신학적으로 증명이 된다. 참으로 그렇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절대자를 숭배하는 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람의 일생은 운명론에서 얘기하는 결정론이 아니고 자기의 운명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한다. 운명과 팔자가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인생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여 그 집은 이미 지어져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속박한다. 그 정해진 팔자를 고치려면 복채를 내라고 하고 굿을 해야 한다면서 금전을 요구, 사람들을 운명에 예속된 종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 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하나님께서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에베소서 1:4–5) 하신 것이다. 악령이 아닌 하나님께 우리를 의탁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자의반 타의반으로 캐나다에 오기 전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하는 것 같은 현상이 계속 있어 왔다. 그것은 설명하기가 좀 애매한데 생활하는 과정에서 같은 배열의 숫자가 늘 주위에 맴돌고 있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깨닫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쯤 전부터이다. 예를 들어서 자가 운전을 하는 중에 차량 번호판이 같은 배열로 구성되는 차량들과 수시로 마주친다든지 확률상으로 의도적이 아니고는 발생할 수 없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경험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물어본 적이 없어서 기회가 되면 이러한 경험을 공론화해 볼 생각이다. 나는 이때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고 생각도 해본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 1)라고 하는데 이러한 우연적인 번호의 배열은 과연 내가 모르는 어떤 실상을 암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2) 가족에게 적용

아직 아이가 어려서 아이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습관을 들여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한다. 특별히 예민한 시기의 아이라서 더욱 신경이 쓰인다.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은 물론 가족 전체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믿음을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믿음 생활을 굳건 하게 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도출해 보았다. 우선 삶의 모든 과정에서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여부를 묻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이 한 생은 흘러갈 것이고 우리는 본향에 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오랜 시간을 직장생활이나 개인사업을 하면서 금전을 추구해왔지만 그 추구한 금전도 풍족하지 않고 또한 사람의 일생에서 진정 으로 소중한 가치, 믿음, 사랑, 희생, 헌신 등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해결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지금과 같이 역병이 창궐하는 세상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다행히 신학교에 들어와서 성경을 펼치지 않는 날이 한 번도 없는 듯하다. 과제나 언어적인 차원이기도 하지만 항상 성경을 펼치고 부분적이라도 읽어야 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인생의 모든 해답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현재의 상황이 요한계시록의 7년환란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게 옳든 옳지 않든 우리는 성경에서 해답과 위안을 찾을 수 있다. 불안해 할 바에는 성경을 더 연구할 것이다. 세 번째로는 기도생활을 습관화해야 한다. 사실 혼자 기도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조금하다 보면 더 기도할 거리가 없어지는 건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라고 한다.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을 위해서라도 기도를 길고 간절하게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기도거리가 없을 때 성경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려움에 봉착할 때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그대로 순종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서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서원을 하고 순종하였을 때 그로부터 얻어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상급은 또한 엄청날 것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면서 가족들에게도 하나님을 믿는 굳은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교회(사회))에게 적용

27장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서술 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는 본래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이며 하나님을 위한 자유라는 것이다.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그에 따른 책임이 따라야 한다. 자유에 책임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그 자유는 방종으로 흐르게 되기 때문에 자유를 누리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 작금의 북한 및 매국노들의 죄악상을 바라보면서 자유사회에서 태어나 숨쉬고 살 수 있는 것에 대한 벅찬 기쁨을 가눌 수 없다.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우한폐렴은 매국노들이 세계 교란을 위해서 조작해낸 사건으로 보인다. 그 징후를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한 연구소에서 실수로 유출된 것도 아닌 것이다. 또한 거대한 우상숭배 덩어리인 북한의 지하교인들에 대한 탄압, 공산주의의 종교탄압 및 파룬궁 신자, 위구르족을 잡아놓고 저지르는 장기적출 등의 반인륜범죄 등 참혹한 실상에 대해 세계는 언제까지 침묵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런 침묵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인가.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정산을 하실 것이다. 우리의 자유는 억압 속에서 자유를 잃고 종 노릇 하는 사람들의 구속을 풀어주는 데도 사용되어야 할 것이며, 정치적으로 나라를 공산당에게 넘기려 하는 자들을 견제하고 색출해내는 데도 사용되어야 한다. 학창시절을 제외하고는 나는 의도적으로 정치를 멀리하여 왔다. 좌우 어느 쪽에서 정권을 잡던지 부패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조국의 현실은 우리가 알면서도 매국노들에게 나라가 넘어갈 것 같은 위기의식이 들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도 크리스천도 함구해서는 안될 이유가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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