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울다」

(제럴드 싯처 저/이현우역)

요약

이 책은 정상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한 사람이 큰 사고를 통해 가족을 잃고 상실을 경험한 뒤 자신에의 깊은 종교적 성찰을 통해 삶의 희망을 되찾아 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처음부터 배치함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궁금증과 함께 긴박감을 유지해간다. 이 책 전반에 기독교적 진리가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상실, 회복, 구원, 사랑, 용서, 이러한 모든 기독교적 성찰이 저자와 그가 예로 든 사람들의 상실의 고통에 녹아 들어 삶과 하나님이 하나로 엮인다. 저자는 워싱턴 스포캔에 있는 휘트워스 대학(Whitworth college)에서 종교ㆍ철학 교수로 1989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에는 아이오와 주 오렌지시티에서 대학 교목으로,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목사로 사역했다. 풀러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를 받았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자는 대부분 학생들이 기독교를 삶의 중심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극히 일부분(은사주의 신앙, 금욕 신앙)만 차지하는 것을 발견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은 귀납법적 논리로 읽어 갈수록 기독교적 세계관이 강화된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 1장 : 끝, 그리고 시작

어느 주말, 저자는 온 가족이 원주민인 인디언 마을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나들이를 다녀 오는 길에 음주운전자로 인해 큰 사고를 당한 뒤 모친, 아내, 아이까지 세명이 죽는 끔찍한 상실을 경험한다. 울부짖음, 비명,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구겨진 차체, 식구들의 찢겨진 몸뚱이, 그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고, 다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아직 책임져야할 세 아이가 남아 있었다. 삶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끔찍한 비극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그와 가족을 향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고통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서 거기에서 빠져나갈 여러 가지 대안들을 모색했다. 하나의 대안만이 남았다. 그는 그가 고통을 겪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 2장 : 상실을 비교할 수 있는가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상실로 고통 당한다는 의미이다. 상실은 또 순환한다. 변화란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엇인가를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겪은 상실은 치명적 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다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상실을 겪는다. 불치의 병, 이혼, 강간, 정서적인 학대, 오랜 실직 등 이런 상실이 일어났을 때 우리 삶은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맞이 한다. 그리고 그것을 수치화 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을 벗어난 잘못된 질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누구의 것이 더 나쁜가”가 아니라 “고통에서 어떤 의미를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고통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

제 3장 : 어둠 속으로 들어가다

가족을 죽게 만들었던 사고 장면은 마치 가장 잔인한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공포 영화처럼 계속해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면서 그는 미치기 직전까지 갔다. 그는 이전에 그와 같은 고뇌와 공허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비록 그 환상이 그의 최후에 대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그때 그라는 존재가 짙은 어둠 속에 갇혀 버렸 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맞닥뜨려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비록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지을 힘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상실이란 것이 피해가거나 회피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 도망치기보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가 경험한 상실이 그를 어디로 데리고 가든 무조건 피하려 들기보다, 상실에 따른 고통이 그를 어떤 모양으로 변하게 하든 순응하기로 했다. 고통을 마주 서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비록 죽음을 경험했지만, 또한 전에는 가능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여러 방식을 통해서 삶을 경험했다. 어둠이 지나고 난 다음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있을 때 고통속에 있으면서 그 고통 속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슬픔이 그의 영혼 속에 들어와 영구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고통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갈수록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삶,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는 걸 조금씩 배워갔다. 영혼은 고통을 통해 부쩍 자랄 수 있다. 영혼이 상실을 겪음으로써 한 단계 올라섰을 때, 우리 영혼은 다시금 커다란 기쁨과 힘과 평화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제 4장 : 소리없는 고통의 비명소리를 듣다.

고통은 살아 있다는 확실한 징표다. 죽은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영혼에서 똑같이 일어난다. 삶이 주는 기쁨이 지극했다면 상실에 따르는 고통도 그와 맞먹는다. 잃어버린 대상이 그만큼 가치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고통을 당했을 때 그것을 애써 피하려고만 하면 그들의 영혼은 궁극적으로는 고통에 반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장 가능성을 놓치고 만다. 그도 이런 반응이 자신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더욱이 그런 반응이 ‘회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단계”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진실이 아님을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다. 상실의 핵심부에는 우리가 유한한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두려운 진실이 존재한다. 우리는 티끌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제 5장 : 광막한 바다를 혼자서 항해하다

사고 첫 해 동안에 그는 승진이나 신망을 쌓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거나 일 자체에 진보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의 일을 감당했다.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추스르고,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방향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은혜의 선물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희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겪는 상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그러나 삶은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

제 6장 : 익숙한 자아와 결별하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은 대개는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자아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에 대한 인식은 마치 무의식적인 반사작용처럼 다가온다. 그는 그가 겪은 상실로 인해 그의 기대를 높게 유지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사고가 나기 전의 그의 삶을 더 좋아한다. 따라서 지금의 그의 삶 역시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데 별로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는 그가 처한 상황을 껴안으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정체성을 얻으려면 우리를 도울, 우리보다 위대한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능히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이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공적과 권력 위에 서지 않고 오직 은혜 위해 서는 사람이 되도록 도우실 수 있다. 우리는 비록 몸은 상하고, 생각은 혼란스럽고, 감정은 곤란을 겪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로서 사랑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삶이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복된 삶이 될 수 있는 희망을 여전히 품을 수 있다.

제 7장 : 일상이 멈춰버리다

우리의 삶은 연속적인 영화필름과 같다. 그런데 상실은 우리 삶을 스냅사진처럼 만들어 버린다. 움직임이 멈추고, 모든 것이 정지된다. 우리는 예전에는 존재했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우리 삶의 연속적인 활동사진을 회고하듯 날마다 사진앨범을 들여다 보게 된다. 삶은 과정이다. 삶은 한순간에 모두 일어나는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연속적 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상실은 일상을 갑작스럽게 정지시킨다. 모든 사람은 결점이 있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관계가 불완전한 한가지 이유인 것이다. 관계의 상실을 경험할 때, 그것은 소중하면서 동시에 불완전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한 되돌릴 수 없는 상실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구원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은 상실을 놓아줌으로써 상실이 그들 삶에 가져다주는 좋은 영향들을 껴안아야 한다. 그들은 뒤에 놓인 것들은 초월하고 앞에 놓인 것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변화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개인적인 변화를 꾀해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온다.

제 8장 : 상실은 아무 때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상실은 우리가 살아온 세상을 일순간 차갑고 악의 가득한 곳으로 바꾼다. 그것은 마치 아무런 예고나 사전 계획이나 타당한 이유 없이 무수한 원자들이 충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이 종종 무작위로 일어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임의성이 주는 공포는 하나님의 신비에 가득한 목적 속에 덮이고 만다. 결국 우리 삶은 좋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며, 거기까지 가려면 우리는 반드시 어려움을 만나야 하고 때로는 길을 돌아서 가야 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제아무리 끔찍한 경험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 사건들을 연쇄적으로 일어나도록 하는 방아쇠 역할을 함으로써 미래 세대들이 복을 누리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상실은 임의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을 뛰넘는 어떤 거대한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다.

제 9장 : 왜 나는 아닌가

상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공평함이라는 개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우리 대부분은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자기가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실제로 삶의 많은 시간 동안 그 일에 성공한다. 서구 문명 속에서 우리가 재주껏 소유하고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을 얻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고가 일어난 후 그는 곧바로 세상에 편만해 있는 고통과 비로소 접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완전하게 공평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기대감이 갖는 문제는 그런 세상속에서는 은혜도 없다는 것이다. 지난 3년간 그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또 갈망한다는 점이다. 은혜는 그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찾아왔다. 그날 사고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살아 계신 실체로 그에게 다가오셨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이전보다 잘 드러나지는 않아도 훨씬 강해졌다. 은혜가 있는 세상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 이상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할 것이며,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함 없다.

제 10장 : 용서하고 기억하라

정의는 항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쁜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고도 잘 지낸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분노, 슬픔, 또는 정의에 대한 갈망과는 다르다. 그것은 역병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용서는 상처를 주는 대신에 치유를 가져온다. 깨진 관계를 회복시킨다. 그러나 용서하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용서는 결국 그것을 베푼이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용서를 통해 우주를 운행하신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가해진 행악과 마주할 수 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는 상실을 겪은 뒤에는 어디로 향하든 매번 하나님께로 달려갔다는 걸 알게 된다. 그가 겪은 고통의 임의성을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그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안고 씨름했다.

제 11장 : 하나님이 침묵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다스리신다. 그분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철저하게 통제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 야웨(Yahweh)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 계시는 분이고, 궁극적인 실체이며, 주권자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다스리는 완전한 권세를 소유하고 계신다. 무신론이 의미하는 내용은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렵긴 해도, 무신론을 믿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무신론은 우리가 상실을 겪으면서 갖게 되는 느낌을 인정하는 데 필요한, 현실을 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우리에게서 앗아간다. 슬픔, 분노, 우울, 이런 감정들은 정당한 이유를 가진 채 영혼 에서 나오는 진실한 표현들이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한다. 그 선택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분이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당신에게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의심과 믿음을 모두 품을 수 있는 머리와, 슬픔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가슴과, 하나님을 맞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의지를 안고서 자유로이 나아간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던 절벽은 여전히 나를 압도하며 높이 서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곳을 바라보며 안전감을 느끼고 한편으로 경외감에 가득 차게 된다.

제 12장 : 죽음은 최후 승자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과 맞닥뜨렸을 때, 자신들의 운명과는 상관없이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 다른 이들은 가능한 모든 쾌락에 자신들을 내맡기거나 안전감을 얻으려고 되도록 많은 권력을 끌어모음으로써 오직 그 순간만을 즐기며 살아간다. 또 다른 이들은 삶이 허무하다고 보고 자살이라는 방법을 써서 삶을 순식간에 끝내 버린다.

어떤 기적도 최종적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지 못한다. 따라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 우리에게는 기적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삶을 영구적으로 새롭게 하는 부활이 필요하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원수가 결정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패배하고 말 그런 삶을 갈망한다.

제 13장 : 상처 입은 공동체

상실이라는 괴로움은 고독한 경험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혼자서 그것을 마주쳐야 하는 이유가 된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줄 수 없다. 우리를 대신할 수 없다. 또 우리 안에 있는 고통을 줄여줄 수 없다.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게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전의 상실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 깊이 사랑하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새로워진 기력과 헌신을 모아 사랑을 끌어안음으로써 자신들이 경험한 상실에 반응해야 한다. 상심한 상태에서 사랑하려고 하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실로 고통을 겪으면서 성숙한 사랑은 더욱 진실한 사랑이 될 수 있다. 상심을 겪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외부에서 사랑의 원천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본질상 사랑이기 때문이다. 상심과 사랑을 함께 묶는 것이 다소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함께 한다.

제 14장 :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음악은 그의 영혼을 달래주었다. 그는 이때 음악이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어루만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고 이후 몇 달 동안 그는 밤이 되면 포레와 바흐의 음악을 들었고, 어느 때는 동이 틀 무렵까지 듣기도 했다. 이들의 음악은 고뇌하는 그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 은유와 이미지로 구성된 시들은 그의 슬픔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유익했다. 하루는 어느 청교도가 자신의 아이를 땅에 묻은 후에 썼다는 시 한편을 한 학생이 들려주었다. 이 시의 저자가 자신의 슬픔을 형상화하는 데 사용한 단어들은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사람들이 상실을 겪고 나서 보다 원대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모습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음주운전을 반대하는 어머니 모임의 설립자는 음주 운전자가 일으킨 사고로 자녀를 잃은 부인이다. 수감자와 그 가족을 돕기 위해 결성된 “프리즌 펠러우쉽”의 설립자도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해본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다. 그들은 지금 우리만 외롭게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며 그 고통 또한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의 마지막 말은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 마지막 단어인 하나님 속에는 이 땅에서의 삶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삶도 들어 있다. 요한계시록은 고난 받고 죽임 당한 모든 이들을 예수님께서 친히 끌어안고 회복 시키시는 미래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고 상처를 싸매어 주신다. 그런 다음 지극한 기쁨과 눈부신 광채와 평화가 있는 그분의 영원한 나라로 맞아들이신다.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바로 천국임을 새삼 고백한다. 천국은 우리의 참된 본향이다.

제 15장 : 미래는 나에게 달렸다

지난날 어둠을 마주하고, 상실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죽음 한 가운데서 삶을 확인하기 위해 그 자신을 그토록 많이 쏟아 부어야 했던 때 느꼈던 자각과 원기를 지금은 많이 잃어버리고 있다. 그 때의 사고가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그때만큼 상한 심정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그토록 온전해지는 경험을 다시 해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가 얼마나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인지 그때만큼 절절하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전까지는 서로 상극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슬픔과 기쁨, 고통과 즐거움, 죽음과 삶이 거대한 하나의 총합체를 이루는 일부분이 되었으며 그의 영혼은 한층 성장했다. 살아있는 동안, 그는 가능한 한 기쁘게, 평화스럽게, 그리고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싶다. 그의 유업은 그가 살아가야 할 길을 알려줄 것이고, 그는 그것을 지켜나가는 걸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재앙처럼 끔찍한 상실을 당한 모든 이들이 느끼는 최고의 도전은 한편으로는 상실의 어둠을 마주하면서, 새로워진 생명력과 감사를 안고 살아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상실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다. 그분이야 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고,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유일한 분이다.

평가

저자는 본인이 직접 겪은 상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설파한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기억 뒤에 자학하고 중독되며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는 삶을 살 수도 있고 깊은 성찰을 통해 하나님께 귀의하는 삶이 있으며 이에 대한 선택은 자신과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숙독하면서 많은 공감을 느꼈으며 나에게 다가 왔던, 어쩌면 앞으로 숙명적으로 다가 올지도 모를 예정되어 있는 혹은 임의의 상실에 대해서 종교적 평안을 느낄수 있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서평자의 입장에서는 한편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객관성이 확보 되었는지의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1) 단점

저자는 상실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치료받는 과정을 차분하게 서술 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책의 줄거리에 공감하면서 그 논리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신도들의 경우라면 상실과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이 왜 결국 하나님으로 귀결되는지에 대해서 상당한 비약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기독교인이라 가져다 붙였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신도들의 관점에서도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 것이다. 자신이 당한 사고와 느꼈던 좌절, 상실감, 이러한 내용이 계속 반복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구성상 사고, 좌절, 상실감, 회복, 희망, 구원, 예수님의 고난, 하나님에 대한 신뢰 등 일련의 과정이 좀 더 체계적으로 구성이 되었더라면 훨씬 설득력 있는 스토리 전개가 되었을 것이다. 좌절과 상실 뒤 회복이 된 것처럼 서술되었는데 뒷 장 으로 넘어가면서 다시 좌절로부터 회복으로 되돌아 오는 등 중언부언이 되고 있다. 이것은 15개 장으로 이루어진 책의 구성을 큰 틀에서 1,2,3부와 같이 묶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복되는 부분도 있으며 꼭 다루어야 할 것이 빠진 경우도 있다. 전체적인 편집에서 상실과 좌절 대한 내용을 한 곳에 정리하고 다른 곳에는 이 것에 근거하여 절망에 빠지는 경우와 이를 딛고 희망을 발견하는 두 길을 제시 한 뒤 이러한 모든 고난은 우연이 아니며 하나님의 거대한 인류구속의 역사안에서 경륜적 섭리이고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는 큰 흐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2) 장점

이 책은 특이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독서를 하면서 우리는 마치 유체이탈을 한 상태에서 우리의 상실된 삶을 바라보는 느낌을 가지게 해준다. 우리의 삶이 객관적으로 우리와 괴리된 상태로 보여지는 것이다.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저자가 깊은 성찰을 통해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였더라면 이렇게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독백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처절한 좌절과 극복의 의지 속에서 어둠과 빛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만이 쏟을 수 있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 빛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한다. 저자의 말처럼 고통의 계곡은 곧 영혼을 빚는 계곡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불행이었을 개인적 사고로 인한 상실을 직면하여 고통스러운 성찰을 함으 로써 회복하고 한층 성숙하게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상실을 겪었던 독자라면 겪었던 대로, 아직 경험하지 못한 독자라면 필연적으로 훗날 겪게 될 일을 미리 겪는 간접경험으로 이 책은 독자들에게 유익을 주고 있다. 그리고 용기를 주고 있는데 그것은 본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한다. 히브리서 12장 8절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하고 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저자는 자신의 주변의 많은 상실의 예를 들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논리를 실증적으로 주장한다. 독자는 이러한 다양한 예로부터 상실이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상실이 닥쳤을 때 우리의 하나님 역시 고통을 몸소 겪으 셨고 그 고통을 잘 알고 계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조차도 주권적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 주권이 축복임을 알게 해주시는 것이다.

3. 적용

1) 자신에게 적용

저자는 8장에서 “고통은 그것이 아무 법칙 없이 임의로 찾아올 때 가장 격렬하다”고 하면서 위험한 등반을 하다가 추락한 경우를 예로 들면서 임의성이 가지는 공포를 설명하고 있다. 나는 과거에 겪었던 추락사고를 떠올렸다. 어느 주말 오전, 설악의 신선한 공기를 즐기면서 우리 팀은 작은 봉우리를 올랐다. 장비를 차고 오르는, “프리 등반”보다는 조금 쉬우면서, 자칫하면 큰 사고를 부르는 위험한 “인공등반”이라는 기법으로 절벽을 오르는 중이었다. 그때 돌 틈에 끼어 넣어 놓았던 지지대가 빠지면서 내 몸은 천길 계곡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목이 부러지면서 즉사할 수 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살 수 있는 확률은 아무리 따져 보아도 “제로(0)” 였다. 구사일생. 헬멧이 튀면서 목을 보호했고, 지면에 닿는 순간 오른 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손목은 부러진 대신 척추는 우그러지는 정도로 그쳤고, 돌이 널려 있는 계곡이었는데, 추락한 장소만큼은 알갱이 돌도 없는 상태였다. 긴긴 추락의 시간, 그 아뜩한 순간에 나는 아홉살 난 딸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다행히 6개월정도의 치료과정에서 완벽히 회복이 되지는 못했지만 척추가 으스 러진 상태에서 아문 정도로 해결이 되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대형사고, 이후 나는 이러한 임의의 상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생에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암벽등반은 위험하지만 가슴 벅찬 매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길이 내 길이 아니었음을 알리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더 큰 상실을 불러 오기 전에 나는 곧 그 길을 포기하였다.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다시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몇 차례의 사인(?)을 주셨다. 이렇듯이 우연으로 보이는 사고 및 상실 말고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상실을 마주친다. 급작스러운 죽음이든, 자연사이든 우리 모두는 죽음과 마주해야 한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아내가 먼저, 혹은 내가 먼저 죽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받아 들일 수 있다거나, 슬픔이나 불편이 덜 하다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젊었을 때 겪는 것과 똑같거나 그 이상으로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내 상실을 내려놓고 죽음이 최후 승자가 아님을, 우리의 구주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영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2) 가족에게 적용

아이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 성인보다도 훨씬 인간적이고 근본적인 고통들에 쉽게 노출된다. 욕망, 허무, 사랑 등에 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들이 납득 가능하도록 성경적인 설명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다른 세계관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느끼게 하여 그들이 평생을 살아 가면서 진정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어 올바른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믿는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비슷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기꺼이 자기의 목숨까지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부모는 때로 너무나 약한 존재이며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하여 자신들 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때로는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것이다. 자녀들에게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의 문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살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아내는 한 평생 남편을 의지하고 산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남녀관계 그 자체를 말한다고 한다.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모든 관계의 시발점이 되는 남녀관계가 그 만큼 인간에게 있어서 기본적이고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부부관계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금슬이 좋은 노부부가 한 편이 죽었을 때 따라 죽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게 보는 모습이다. 이러한 상실에 대한 지속적이며 숙명적인 위협과 그것을 성찰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문제는 핵가족으로서 자녀와 아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님, 형제, 친척과 친지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상실을 통해 하나님을 찾아 가는 과정임을 주변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바로 전도이다.

교회(사회))에게 적용

교회에서, 기도 모임에서, 성경공부의 강당에서 사람들은 상실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다. 사실 독실한 기독교인의 기도에 상실로 인한 고통의 치유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대교회는 이러한 상실 치유의 장으로서는 그렇게 활용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교회는 이렇게 비탄과 상심에 빠져 있는 교인들을 위한 체계적인 상담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상실을 경험하고 간절히 기도하여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어야 한다. 기독교는 교리상 공동체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개인의 경건과 집단적 예배라는 좁은 개념으로 정의되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읽어 보아도 혼자 독거하며 연구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얘기는 없다. 모든 교회는 중보기도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인의 상실을 치유해야 한다. 사실 사회에서도 이러한 상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구를 만들어서 도와 주는 기구들이 있다. 청소년 상담이나 자살 방지 상담 전화 운영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시스템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결국 종교적인 치유가 그 답이 될 것이다. 질곡의 심연에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선택의 과정 속에서 그분이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고 자신에게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맞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의지를 안고서 그분께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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