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사(롤란트 베인턴 저)

홍치모/이훈영 역(크리스찬 다이제스트)

[ 제네바 개혁교회: 칼빈주의 ]

칼빈주의는 불어권 스위스인 제네바에서 시작되었는데 종교에 외형적 수단을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색하였고 성상이 거부되었으며 음악은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신성공동체의 개념을 좀 더 대규모로 이해했으며 성찬을 영적 교제의 통로로 이해한 점은 루터파와 비슷했고 또한 칼빈파의 시편 찬송은 루터파의 성가곡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를 확신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재세례파의 교회관과, 좀 더 뚜렷한 것으로 엄격한 치리를 요구하는 그들의 태도는 칼빈주의에게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 칼빈주의는 활동적이었다. 왜냐하면 칼빈주의자들은 행동해야 할 필요성과 행동 역량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 화약 이후에는 안정된 지위를 누리게 되면서 신앙적 긴장이 풀려 버린 루터파나 또한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나 간신히 살아남는데 급급했던 재세례파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었다. 칼빈주의는 앞서의 사상들을 취합하기도 하고 독자적인 주장도 했다. 그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수세기 동안 개신교의 상당한 지역에서 마치 가톨릭 세계에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Sentences가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Thomas Aquinas의 Summa 조차 이에 비견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장황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의 필체는 간결하고 종합적이고 명쾌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신론, 인간론, 교회론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칼빈주의가 개신교이 가장 활발한 교파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칼빈주의의 추진력은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낙관론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칼빈의 인간관은 루터파나 재세례파에 못지않게 어둡고, 심지어 더욱 파괴적인 감이 있다. 그는 인간을 타락된 존재로 묘사한다. 비록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 반드시 돼지우리같이 될 필연적 이유는 없지만 그것은 결코 낙원이 될 수 없다. 재세례파는 그와 유사한 분석으로부터 교회가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논리를 끌어냈고 루터는 단지 체념섞인 참여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사회 영역내에서 활동하도록 단호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용기에는 ‘예정론’이라는 낙관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서의 위대한 구절은 “네 죄가 사함을 입었느니라”라면 칼빈에게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였다. 칼빈과 루터는 모두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압도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만 루터는 이를 사죄의 기적을 강조하는데 이용했고 칼빈은 신적 계획의 견고성에 대한 확신의 원천으로 이해했다. 그 결과 기독교강요에서는 이신칭의 항목에 앞서 하나님의 주권 항목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주님의 신속한 재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최후의 대환난을 불명확한 미래의 일로 미루었다. 루터는 역상의 종말이 자신의 죽음 이전에 올 것을 열심히 기대하였고 재세례파는 종종 날짜를 정하곤 했다. 그러나 칼빈은 주님의 위대하고 임박한 날을 지상에서 실현될 신성공동체의 꿈으로 대체시켰다. 그 건립은 인간 곧 하나님이 선택한 도구인 선민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위대한 명령을 지키는 데 실패했고 하나님은 그들 대신 새로운 이스라엘인 기독교회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그 교회 역시 변절하였고 이제는 정선된 소수의 무리들, 즉 선민들에게만 소명이 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다시 한번 선택된 자들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지에 관한 방법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루터는 이를 아는 듯이 행세하지 않았다. 뮌처는 영으로 안다고 했고, 쯔빙글리는 믿음으로 안다고 했으며, 재세례파들은 생활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알 길은 없다고 하면서 재세례파처럼 가라지는 없이 오직 밀만 있는 교회를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쯔빙글리의 기준과 재세례파의 기준을 받아들였다. 그는 여기에 세번째 기준(성례전에의 참여)을 덧붙였는데, 이로써 루터와 심지어 가톨릭측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칼빈이 생각하기에 성례전은 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의 통로이자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교제의 표현이다. 인간의 주된 목적은 자기를 구원하거나 그의 구원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어쨌든 인간은 이미 구원받았든지 버림받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므로 이를 놓고 걱정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이었다. 칼빈으로서는 선택 교리는 형언할 수 없는 위안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체의 근심을 제거하고 인간을 자신에 대한 염려로부터 해방하여 주권자 하나님을 위해 불굴의 봉사를 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 자유신령파 ]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 유형들과는 상이한 또 다른 형태를 나았는데 그 특징은 신비주의와 합리주의였다.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중요성은 후대에 엄청나게 유행했던 사상들을 선도했다는데 있다. 이들 자유신령파가 지지했던 신비주의와 합리주의는 모두 기독교 전통속에 뿌리박은 것으로서 하나같이 성과가 크면서도 동시에 탈선가능성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신비주의를 단순히 따스한 개인적 신앙 체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생명력 있는 기독교의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좀더 전문적인 견지에서 신성과 인성이 합일을 목표로 삼는 하나의 종교 유형으로 볼 경우에는 기독교를 강화하는 동시에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공존하게 된다. 인간이 신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개념은 베드로후서에서 찾아볼 수 있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고 말한 한 이교 시인의 말을 호의적으로 인용할 수 있었다. 기욤포스텔은 고대 동방의 비전의 신비적 지식의 비밀을 구명하려는 열망으로 히브리어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행의 도중에 외경이 야고보 복음서를 발견했고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아람어를 익혔다. 모든 진리의 통합과 모든 신앙의 궁극적 조화를 꾀하는 르네상스적 신앙은 그로 하여금 모든 종교의 일치를 이룩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당시에 이단으로 의심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이 후대에 끼친 엄청난 영향으로 인해서 신학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폴란드는 반삼위일체론과 재세례주의가 다양하게 조합된 집단들의 일대 거점이 되었다. 아 나라에거 일어난 운동은 파우스투스 소치누스 또는 소지니의 이름을 붙여 소지니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분명히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폴란드 여왕보나 스포르차의 호의로 이탈리아인들의 이주가 촉진되었다. 자유신령파는 비록 조직된 운동의 형태로는 거의 남긴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탐구, 신비적 경건, 신앙의 자유 등에서 다른 개신교 단체들에 그 나름의 각인을 남겼다. 계몽주의 시대는 그들을 거의 자기들의 사상적 선배로 인정하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분명히 그들의 신세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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