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을 개혁하라!

신학일반/교회의 개혁 2020. 7. 14. 01:12 Posted by forest38

 

종교개혁을 개혁하라 !

 

Ⅰ. 서론​

일반적으로 전통은 역사적으로 전승된 물질문화, 사고와 행위양식,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 인상, 갖가지 상징군으로 이해되고 개혁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 고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영어에서 reformation은 ‘변화’의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는 개념이라고 한다. 본 페이퍼에서는 이러한 전통과 개혁이라는 가치 판단을 종교개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Ⅱ. 본론​

전통의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는 역사적으로 전승된 물질문화, 사고와 행위양식,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 인상, 갖가지 상징군을 의미한다. 전통은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화를 주관적으로 재평가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단순한 인습이나 누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조의 좋은 전통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나쁜 전통에서는 과감히 탈피하여야 한다. 전통과 개혁의 논의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톨릭에 대항하여 벌인 종교개혁이 그 좋은 예이다. 종교개혁의 격랑 속에 로마 가톨릭은 자체 淨化를 한답시고 트랜트 공의회(1545~1563, 제 19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개최하여 나름대로 개혁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적 결정만 내렸을 따름이다. 로마 가톨릭은 7개의 성례전을 제정하고 주로 형식에 얽매이는 종교 제전을 행하다가 개혁주의의 공격을 받았으나 지금도 그 형식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그 전통을 개혁한 것이 개혁주의 신앙이었는데 그 개혁주의 신앙도 후대에 이르러 많은 변천을 하면서 16세기의 개혁주의의 모델은 그 이후의 신학사조가 보았을 땐 또한 전통이 되었다. 따라서 전통이란 어떠한 시대나 지역범위에서 결정되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끊임 없이 변화하는 문화나 제도에 속해 있는 어떠한 관념이나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전통에 대한 생각은 좋은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할 뿐 아니라 나쁜 전통을 현실에 대입하여 과감히 개혁하고 폐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례전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중요한 가치판단이었다. 부정적인 측면이 많았지만 로마 가톨릭은 사도시대의 전승을 나름대로 정립하여 의식을 만들었고 그것이 종교개혁가들의 눈에는 누습으로 비춰진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누습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결국 루터와 쯔빙 글리의 성만찬에 대한 해석도 또 다른 전통과 개혁이라는 다툼이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과 개혁이라는 구분선 보다는 올바른 준거기준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직분의 동등성(한 직분이 다른 직분을 지배하지 않는다)과 고유성(한 직분이 다른 직분을 침범하지 않는다)을 강조한다. 직분의 핵심은 ‘역할과 기능’에 있지 서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장로교의 전통은 목회자나 교사 등도 신도들 중 적임자를 선정하여 그 직을 맡기는 하나의 직분을 의미한다고 한다. 물론 그 경우에도 엄격한 선발 기준이 있다고 하지만 일반 성도들 중의 하나, 즉 보통 인간임을 전제하는 말일 것이다. 현대 한국교회는 이러한 장로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전통은 새로운 개혁에 의해 비판받고 교정받는다. 그러나 그 개혁은 전통, 곧 원래의 변형되지 않은 전통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노력일 뿐이다. 16세기를 발칵 뒤집어 놓은 루터의 개혁사상은 실상 알고 보면 오히려 초대교회의 전통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결국 그의 개혁 이론은 현실 정치세력에 의해 이용당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개혁이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 고치는 것을 말한다. 특별히 기독교 역사에서는 종교개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개혁이란 16세기 유럽에서 로마가톨릭 교회 교리의 오류와 윤리적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서 일어났던 신앙의 혁신운동이었다. 당시 종교개혁가들의 개혁운동은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칼”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목숨을 내어 놓고 도전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개혁하고자 했던 것은 새로운 종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의미의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종교 개혁에서 말하는 ‘개혁’이란 ‘처음의 올바른 것을 되찾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기존의 모든 신학사조를 전통으로 분류하고 현재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개혁으로 이해한다. 교리적으로 잘못되고 그릇된 것은 성경 안에서 개혁되어져야 하고 매일 매일 바뀌어져야 한다. 우리의 대부분의 개혁적 사고는 개별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신학을 정립하고 그것이 성경에 비추어 올바른 것인지를 끊임없이 점검하면서 교회공동체를 통해 검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신자들이나 신앙의 단계가 낮은 신도의 경우는 목회자의 지도에 따라 안내를 받아야 하지만 어느 정도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올바른 신학 정립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서의 개혁이란 것은 매일 죽고 매일 다시 태어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회심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이미 마음속으로라도 범죄한 인간들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단지 매일 죽고 다시 매일 그리스도안에서 태어남으로써 점차 변화 되어야 것이다. 한편으로는 개혁이라는 용어에는 ‘급진적’ 이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단번에 변화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 다시 뉘우치고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우리의 상황이라고 볼 때 매일 반복되는 뉘우침을 통해 어느 순간에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단번에’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내 직분에 대한 개혁은 먼저 말씀에 있어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주석과 묵상을 통해 바르게 이해하고 끝없는 공부가 이루어져야 한다. 목사의 계속된 공부는 그래서 중요하다. 또한 성례문제에 있어서는 치리장로의 역할이 강조되는데 누가 성찬과 세례에 참여할 것인지를 심사해야 하고 이에 따라 장로의 심방이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사실 지금의 교회에서는 성찬식 조차도 어떤 사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확실히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명확히 개념을 잡아주어야 할 것 이다. 종교개혁자 들은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신자들의 삶을 권면하고 때로는 비판을 했다. 이런 교회적 전통은 사실 고린도 전서를 읽어봐도 잘 나타나 있다. 권징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현대교회에서도 이를 엄격히 시행해야 하는 데 결국 개혁이란 초대 교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에서 개혁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우리는 개혁을 해야 하는가? 종교개혁은 서구에서 일어난 그들의 종교 개혁이었다. 우리 교회가 스스로를 개혁한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주 나중에 그들이 이룩한 개신교를 받아 들였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이를 개혁해야 한다. 복음을 기복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교회 성장에만 몰두하는 교단, 신앙인지 미신인지 분간이 안가는 기도 행태 등을 개혁해야 한다.​

Ⅲ. 결론​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빈처럼 순수한 신앙적 열정에서 시작되고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 화형이나 교수형을 감당한 사람들도 많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의 세속적 이익에 영합하기 위해서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혹자는 개신교 운동 자체를 라틴족에 대항한 튜튼족의 저항이라고 보기도 하고 로마에 대한 항거가 경제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아마도 종교 개혁은 다양한 요인들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일 것이다.

로마가톨릭의 역사를 보면, 7~8세기 이전부터 이미 초대교회의 신양적 열정이 변질되어 부패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면벌부는 그 부패가 종기처럼 부어 오른 것일 뿐이었다. 종교개혁의 씨앗은 4~5세기부터 뿌려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중세라고 해서 모두 부패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대표적으로 수도원운동이 있다. 루터도 수도사 출신임을 상기해야 한다. 루터와 칼빈 등 개혁주의자들의 개혁은 결국 현실적으로는 대부분 경제주체들의 이해관계로 귀결되었다. 진정한 의미의 개혁은 각 개별 신자들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결국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당시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정의 분야까지 총체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부산물이었다. 신앙과 경건은 일신 전속적인, 그것도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내적 성찰이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부패를 개혁하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분명 개혁가들은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개혁을 진행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개혁을 단지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산으로부터 근본 원리를 찾아내어 우리 상황 가운데 적응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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