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倫理意識

신학일반/신학 산책 2020. 4. 24. 04:33 Posted by forest38

그리스도인(목회자 포함)의 윤리의식(倫理意識)

 1.    서론

우리 안의 죄성을 극복하는 문제와 관련해서은혜만을 가지고 죄성을 덮으려고 하니 이것이 해결될 수 없다. 내가 스스로 자각하여 바뀌려고 하지 않는 한 죄성은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말이다. 이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연결시켜 보면 목회자의 성 윤리의식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내 안에 있는 죄성을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1:23~26까지의 말씀에는 성적타락이 우상숭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구절이 있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 몇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5:31-32) 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칼 바르트의 견해로 기억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이 '남녀의 관계' 자체를 의미한다는 말은 묵상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왜 수치와 두려움으로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렸는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모 이단교파가 제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명확한 반박논리를 정통교리로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도 연구대상이다. 영적인 간음과 육적인 간음은 어떤 관계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간음을 더 큰 범죄로 보시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상숭배를 영적인 간음이라고 전제하는 한도내에서의 논리이다. 앞서의 로마서 구절에서 영적인 간음을 범한 인간을 육체적 타락에 내던지셨다고 해서 선후로 보아 영적인 간음이 육체적 타락의 원인이 되며 또한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라는 구절로 비추어 보아 원래 인간은 원초적으로정욕의 죄를 짓는 존재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영적인 간음을 하지 않으면, 즉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바라보고 성령의 열매를 바라고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면 육체적으로 타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되며 오직 성령의 은사만이 육체적 타락을 막아 줄 수 있다고 해석을 해보았는데 강의 내용을 첨가하자면 여기에  인간 자신의 뼈를 깎는 노력이 동반해야 한다고 할 수 있겠다.

2.    본론

1)    그리스도인과 정의

목회자가 설교나 교단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강요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나 자신도 목회자나 교수도 아니지만 오랫동안 정치적인 논의는 피해 왔다. 좌파나 우파나 집권후에 저지르는 비리나 탐욕을 수 없이 봐왔기에 누구 편도 들고 싶지 않아서이다. 심지어 투표조차도 일부러 안한 적도 더러 있다. 그런데 마침 목회자의 정치윤리(정의와 불의)를 주제로 토론하는 이 시점에 국내상황과 관련하여 우려스러운 일이 워낙 많아서 몇 가지 정치적인 문제를 현실에 대입하여 생각해 보았다. 군사독재를 경험하고 80년대를 전후해서 대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대체로 극좌나 중도좌파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민주화된 정부에서 이러한 편향적 시각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인 것 같다. 오히려 자유야 말로 우리가 수호해야 할 가치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의나 자유는 하나님안에서 성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의로움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선택은 이러한 의로움이 구현되는, 하나님을 믿는 자유를 보장받는 선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 세상을 위기의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있는 종교탄압자들은 종교자유의 최대 적이다. 이들이 세상을 교란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들은 여러 정황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실수도 아닌 것이다. 백 번 양보하여 이것이 그들의 조작이 아니라고 해도 수억명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범죄들로만도 이들을 천인공노할 범죄자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북한의 인권문제와 더불어 세계는 언제까지 종교탄압자들을 두고 보아야 하는가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이에 대한 침묵의 대가를 하나님 앞에서 치르게 될 것이다.

2)    임신중절(낙태)의 문제

임신중절(낙태)의 문제는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당사자들에게는 큰 상실로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신학이라기 보다는 목회상담적 접근이라 문외한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안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다. 단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법적인 문제는 시대에 따라 국가에 따라 달라지고 있으니 논외로 친다고 해도 윤리적으로는 마땅히 당사자(태아 포함)의 관계적, 상황적 현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주변적 논리 위에 성경 말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여러 구절을 통해 태아는 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인격성을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중심축으로 하여 다른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처럼 당위적으로는 임신중절은 태아라는 인격체를 죽이는 것이라 안되는 일이므로 사전예방이 최선의 방책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실제 결과에 대해서는 사후대책, 즉 치유를 통해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치유책으로 제도적 장치와 법적 장치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이에 대한 종교적 치유가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임신당사자들의 의사가 출산(불행이 예상되는)이나 낙태를 결정한다고 보았을 때 사후에 슬퍼하고 위로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낙태를 결정할 경우에도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자신들의 결정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여야 한다. 매 건에 대해 우리는 우선 인권보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그의 은혜와 자비를 구해야 한다. 이것은 이혼, 사별 등 다른 모든 상실과 함께 온전히 당사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다. 제럴드  싯처는 "이러한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위대한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 제기에 능히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 분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3)    그리스도인과 이단논쟁

이단과 사이비의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훨씬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한국교회의 폭발적 부흥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작금의 신천지 등 이단은 한국 이단계보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정통 교리를 연구하여 대처를 잘 하여야 신도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단, 사이비의 문제는 공부해보면 금방 잘못된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몽매함만 깨우치면 되지만 정통으로 분류되는 교단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종교일치운동(애큐메니컬)에의 무분별한 참여, 성령으로부터 온 것 같지 않은 방언 현상의 창궐, 교회의 성장 제일주의, 교단간의 이기적 분열, 목회자와 신도간 파벌싸움 등 공동체의 신앙생활이 개인의 신앙에 오히려 해가 될 것 같은 상황이다. 사실 이렇게 혼란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이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해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 이제 신학공부를 해왔는데 오히려 성경에 대한 갈증이 훨씬 심해진 것 같다. 보다 많은 시간을 성경 읽기에 할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경 자체를 읽고 주요부분을 암기하고 라틴어까지는 무리일지 모르겠지만 성경원어인 헬라어, 히브리어만도 제대로 성경해석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성경읽기(암송 포함), 성경원어에 기초가 탄탄하면 그 위에 성경해석을 위한 여러 과목들은 독학으로도 가능할 수도 있다.

4)    그리스도인과 가정폭력, 결혼과 이혼

그리스도인(목회자 포함)의 가정폭력, 결혼, 이혼이라는 문제는 특별히 목회윤리 차원 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 이 문제가 목회윤리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성직자(제사장)라는 구별된 개념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텐데 그렇게 본다면 목회자는 무흠결이어야 하고 신성한 존재이므로 가정폭력이나 비정상적인 결혼, 이혼 등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면 파문이나 지위 박탈 등 엄격한 정죄의 결론 밖에 내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교의 전통은 목회자나 교사 등도 신도들 중 적임자를 선정하여 그 직을 맡기는 하나의 직분을 의미한다고 한다. 물론 그 경우에도 엄격한 선발 기준이 있다고 하지만 일반 성도들 중의 하나, 즉 보통 인간임을 전제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정폭력, 결혼, 이혼이라는 문제도 일반 성도들과 똑 같은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더구나 목회자 커플의 일방 당사자가 비신자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다만 신실한 목회자라면 가정생활도 충실하게 수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존경받는 목회자나 신실한 교회 장로, 권사분들의 부부 사이가 원만 하고 자녀가 축복 받아 잘 자라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봐 왔다. 감사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가정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우선 당사자 스스로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위로해야 하며 교회 공동체에서 목회자 가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 보살펴 주고 배려해 주고, 기도하는 과정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그리스도인과 4차 산업혁명 시대

대중문화는 현 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이며 매스미디어는 그 문화를 효과적 으로 전달하고 있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가 기독교 문화와 공존할 수 있는가가 토론의 핵심인 것 같다. 여기에는 교회음악을 대중음악으로 대체할 수 있느냐의 여부, 교회당에서의 설교 대신 인터넷 설교로 마찬가지의 효과를 볼 수 있는지의 여부, 성경책 대신 어플로 보아도 되느냐의 여부, 인공지능이 설교자가 될 수 있느냐 등 현재진행적인 많은 문제 들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자랐던 시대를 비교해보면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그 자체로서 가치 판단을 할 것이 아니라 본래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배치되는 지의 여부를 살펴보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올바른 신앙이 유지되는 한 어떠한 문화나 방식은 지엽적인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신앙관이 정립된 상황에서 첨단 과학기술은 오히려 폭발적인 전도의 도구가 될 수 있고 소외된 현대인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효과적인 사이버 공간에서의 피난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활용하기 나름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도래할 새 세상이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4차 산업혁명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활용하여야 한다. 인공지능의 시대같이 비인간적인 현상이 올수록 오히려 영적인 리더가 더욱 필요하게 된다는 예측이 많다. 세상에 문제가 많아질수록 교회가, 영적 리더가 할 일은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이 상식과 가장 진보된 과학에 부합하는 최상의 선택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더 빨리 임하기를 기대한다.

6)    그리스도인과 성적소수(동성애)의 문제

동성간의 성행위에 대해서 로마서 1 23~27절은 다른 문란한 성적 타락과 함께 설명을 한다. 성적인 문란이나 기형적인 성행위 등에 대해서 원인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들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번갈아 가면서 우상숭배와 육체적 타락을 두 번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서 반복하여 기술하는 것은 강조를 뜻한다고 배웠다.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이 인간들을 정욕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라고 한다. 특별히 남자들끼리의 행위를 "역리", "부끄러운 일" 등으로 표현하면서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동성애라는 정상적이지 않은 현상도 성적타락 중의 하나인데 이러한 성적 타락에 대해 성경에서 얘기하는 바를 살펴보다 보니 몇 구절이 찾아진다.바울은 우상 숭배의 배후에는 사탄, 즉 어둠의 영과 타락한 세상 권세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고전 10:19–22).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하나님께 범죄했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우매해지면서 우상숭배를 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육체적 타락에 넘어 가도록 놓아 두시고 또한 역리적인 육체적 타락에 까지 이르게 하신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적 타락의 최정점에 동성애가 있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서도 우리는 성적인 관계라는 것이 영적으로 무엇인지 조차도 사실 모른다. 하지만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또한 성경은 남녀간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5:31-32) 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명한다. 이처럼 "이성애"와 함께 "동성애"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훨씬 많은 학습을 한 후에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7)    그리스도인과 돈, 명예, 그리고 영적 탈진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으로서 명예나 영적탈진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면 돈(금전)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목회를 지속할 수 있느냐 그만 두느냐의 문제이므로 훨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사실 많지 않은 것 같다. 늦은 나이에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내에서 줄곧 여러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많이 봐왔다. 심지어는 장로파, 목사파로 나뉘어 서로 소송전을 벌이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도 하지 않을 행위들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 금전적인 문제였는데 이렇게 한 번 싸움이 벌어지고 나면 다시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 하다. 교회를 떠나고 끝나면 다행인데 인력을 동원해서 상대 파벌의 강대상을 점령하고 예배당을 지키고 서서 예배를 훼방하거나 하는 일까지 비일비재 했다. 돈도 돈이지만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이 일반 신도들을 더 힘들게 한다. 이런 분쟁은 한국에서의 일이었는데 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라 목회자에게 사례금을 못 준다거나 선교, 교육, 구제 등 각종 교회활동을 돈이 없어서 못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돈을 엉뚱한 곳에 쓴다고 법적 소송이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각자 자기들 돈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데 캐나다에 와서 보니 이민 교회의 현실은 대부분 금전적으로도 힘들고 교인들도 적어서 목회자들이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다. 큰 교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교인부족으로 어려워 한다. 변호사 합동사무실 같이 합동교회를 만들어서 대표목사 아래 여러 목사님들이 각 분야를 담당하여 운영하는, 목사그룹으로 구성된 교회를 운영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8)    그리스도인과 성윤리

최근 목회자의 성윤리 세미나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점과 대책을 살펴보았다. 전문 직업군 중에 성윤리, 성범죄 관련 문제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케이스가 목회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교육등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예방과 사후 대책 역시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한다. 어떤 분은 "이진 아웃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회자도 인간으로서의 약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유혹 받을 수도 있고 스스로 탈선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행위가 반복되는 경우라면 상습이며 병으로 보아야 하므로 목회직을 맡으면 안되고 이미 목회직에 있는 사람이라면 빨리 물러나서 다른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한다. 그러나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아서 오랫동안 사역해 온 직업으로서의 목회직을 단번에 떠나기도 어려울 것이고 또한 교단에서도 여러 사정을 고려해 엄정한 처벌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 성에 대한 욕망은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모두는 회심이전이나 이후를 막론하고 마음으로라도 이미 범죄 하였으며 앞으로도 범죄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딜레마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7:23)"라고 통찰하고 있다. 결국 목회자의 성윤리문제를 풀어나가는 핵심은 목회자의 윤리에 맡기는 것 보다는 시스템으로 갖추 어야 할 것 같다. 목회자의 건강한 부부관계와 함께 예방교육의 강화, 그리고 목회자가 탈선하고 타락할 수 있는 자리 자체를 피하는 것 등은 흔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예방책이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목회자 자신이 항상 죄인임을 인식하고 통렬한 회개와 자기반성을 통한 간절한 기도가 유일한 내적 해결책일 것이다.

3.    결론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길에 접어든 이상목회윤리가 아닌신앙윤리로라도 이 문제를 심도 있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사실 다루어지는 많은 주제들, 예를 들어목회자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윤리적 삶에 진실하고 당당해야 한다거나자신의 삶에 더 크고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등의 주제는 범인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이다. 목회소명과 연결되어 있는 목회윤리의 엄격성과 중대성을 생각한다면 목회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 알 것이다. 이런 문제를 놓고 교인들끼리나 신학도들끼리 많은 토론도 해봐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잘 이루어지지않고 원칙적인 얘기들만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에는 우선 성경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 우리는 많이 배워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총체적인 하나님의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 중에목회윤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 같다. 아마도 초인적인 내면적 싸움을 필요로 한다는 말일 것이다. 헨리 나우엔의 말은 치유에는 인간적인 한계가 있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 지는데 아직 책을 읽지 않았으나 내용이 기대가 된다. 이미 타락했으나 치유를 통해 소외를 무너뜨리며 인간간 관계를 회복하고 나아가 하나님과 다른 인간과의 깨어진 관계(죄성)를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줄 뿐이라는 말을목회윤리에 적용한다면 결국 윤리를 지키는데도 인간적인 한계가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는 완벽한 윤리적 완성자라기 보다는 상처받고 좌절하면서 깨달아 가는 존재로생각해 볼 수 있겠다. 사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공포 앞에 윤리이든 도덕이든 더욱 무력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 겪어야 할 것은 사도 바울과 같이 현실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매진하는 것인데 이러한 중압감에 인간은 자신의 생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진다. 아멘.

 

 

 게시물(포스팅) 다국어성경연구소(多國語聖經硏究所, Multilingual Bible Institute) 사적인 저작권이 있는 (사진 포함)입니다무단 복제와 배포, 가공이 불가하지만 자료의 출처와 URL을 명기할 경우 사용이 가능합니다 연구소는 선교활동을 위한 다국어 성경읽기(聖經通讀, Reading the Bible)운동과 미전도 소수민족의 성경 번역사업을 지원하는 기관입니다성경읽기를 위한 성경 히브리어(Hebrew) , 성경 헬라어 (Greek)강좌와  함께 고전 라틴어 (Latin)의 강의도 개설(online offline 가능)이 되어 있습니다또한 어린이부터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정철 BIBLE ENGLISH 시스템을 통한  영어 강좌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본 게시물(포스팅)은 영어(English), 중국어(Chinese), 일본어(Japanese), 한국어(Korean)의 4개국어로 번역이 되어 전세계로 서비스되어 기독교 선교사명을 활발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선교활동  제휴 문의usedslr@gmail.com, 홈페이지(homepage) http://www.nkmissio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