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방언(γλῶσσα)’에 대한 학문적 선행 연구
그 동안 “γλῶσσα”의 해석을 놓고 학자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여왔다. 논쟁의 핵심은 현대교회의 방언이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과 같은 것이냐에 관한 것일 수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의 “방언”(γλῶσσα)이 한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전제한 데서 비롯된 논란이다. 신약성경 전체를 놓고 “γλῶσσα”가 단수와 복수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 면서 동시에 쓰인 경우는 고린도전서 14장 밖에는 없다. 심지어 같은 고린도전서 12장, 13장 용례도 복수명사로만 사용된다. 따라서 Chapter 2에서 학문적 선행연구를 살펴본 뒤 Chapter 3에서 신약성경 전체와 고린도 전서, 특히 14장에서의 용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현대교회의 방언”과 고린도교회의 “방언”(γλῶσσα)이 어떠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검증해 보기로 한다.
초대교회 시대의 방언은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이었는가, 아니면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였는가? 혹은 둘 다로 했는가? 현대교회의 방언현상은 외국어인가, 무아경 속의 황홀한 소리인가, “반복되는 뜻 모를 소리인가? 이러한 판단이 방언 논란의 핵심이다. 방언의 언어나 성격에 대한 연구는 그 현상 자체에 대한 이해와 현대 방언운동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 필요하다.
Ⅰ.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로 보는 설
이 설은 고린도전서 14:2;14절과 같이 명백히 외국어가 아닌 “방언”(γλῶσσα)을 예로 들어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이 아니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황홀경의 발화(천사의 언어)” 또는 부정적인 의미의 “반복되는 뜻 모를 소리”로 보는 설이다. 특히 “14장 2절은 기도 중에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말하는 것을 뜻한다고 하는데, 즉 세상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1] 고린도전서 전체의 “방언”(γλῶσσα)은 “황홀경의 발화”(반복되는 뜻 모를 소리 포함)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고린도전서의 “방언” (γλῶσσα)의 의미를 전부 한 가지 뜻으로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잘 못 해석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 최초로 방언 연구로 미국 오랄 로버츠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동찬 목사는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쓰인 “방언”(γλῶσσα)을 전부 “이해할 수 없는 발성” (unintelligible utterance)으로 보고 이것에 대해 “은사로서의 외국어”로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는 “고린도전서의 방언(복수형)을 ‘외국어들’이라고 번역할 경우 성경적 사례나 교회사적인 사례에 적용해 볼 때 넌센스가 발생하게 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서 방언은 이해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2] 그러나 고린도 전서의 “방언”(γλῶσσα)을 전부 이해할 수 없는 발성(unitelligible utterance) 으로 해석하면 문맥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서 고린도 전서 13장 1절에서 말한 “내가 사람의 모든 방언과”와 같이 외국어 임이 분명한 구절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으며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어떤 때는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어떤 때는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부분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샌더스(J. Oswald Sanders) 역시 고린도교회의 “방언”(γλῶσσα)을 부정적인 의미 에서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로 보고 있다. 그는 이에 더하여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방언과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을 일일이 대조하여 두 가지의 방언이 전혀 다른 현상임을 증명하려 했다. “오순절의 방언은 사람을 향해 말했다(행 2:6).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하나님만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고전 14: 2;9).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표징이었다(고전 14:22). 오순절의 방언은 온전한 조화가 있었다 (행 2:1-4).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혼란을 야기시켰다.”[3] 고린도교회의 “방언” (γλῶσσα)이 교회 내에 극심한 혼란을 일으키는 원흉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대로 따른다면 12장에서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14장 39절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라”고 한 바울의 표현을 해석할 수 없다.
이상훈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이 두 가지가 다르 다고 주장하는데, 첫 번째로 오순절의 방언은 베드로가 “구약(요엘 2장 28)의 성취”라고 지지하였으나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바울이 그와는 정 반대의 태도로 제재하고 있으며 두 번째로는 방언에 대한 통역이 “번역” (translation)이 아니라 “해석”(interpretation)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린도전서 전체의 방언” (γλῶσσα) 을 ‘an unknown tongue’라고 간주한다.[4] 그러나 바울은 “an unknown tongue의 경우만 일부 부정적으로 말했을 뿐, 12장 및 13장 1절의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및 “천사 들의 언어”의 경우는 긍정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주장은 전체가 아닌 단편적인 견해로 봐야 한다. 또한 그가 “해석” (interprettation) 이라고 표현한 헬라어 “ἑρμηνεία”는 “해석”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지만 “번역”(translation)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무리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훈 역시 고린도전서의 “방언” (γλῶσσα)이 오직 한 가지의 뜻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보았을 뿐이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방언”(γλῶσσα)에 대해 학술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학문적 관점에서 다시 방언을 평가하는 흐름이 생겼다. 언어학적 관점에서 본 방언 연구에서는 방언이 이미 알려져 있는 외국어인 언어인지 언어가 아닌 지에 대해 파악 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한 연구에 따르면 방언을 할 때 언어와 사고를 담당하는 좌뇌보다 감정, 의지, 상상, 공간지각을 담당하는 우뇌가 더 활성화됨을 밝혀 냈다고 한다. 우측 두뇌를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방언은 언어가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5] 학습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언은 자연언어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언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언어가 아니라고 할 수 없어 유사언어라는 표현도 쓰고 “천사의 언어”, “천상의 언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유명복은 “방언은 학습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방언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학습을 통해서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성령의 감동으로 받아야 한다.”[6]고 주장한다. 이것을 “황홀경의 발화”로 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을 보면 “방언”(γλῶσσα)을 “천사의 언어”라고 해석할 소지가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라고 하고 있다.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은사로서의 외국어”뿐 아니라 “황홀경의 발화”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아주 중요한 표현 으로 봐야 한다. 그는 “알 수 없는 뜻 모를 소리(an unknown tongue)”를 “천사의 언어로서 황홀경의 발화”와 “반복되는 뜻 모를 소리”로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증거 구절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단수로서의 “방언”(γλῶσσα)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과 다르다는 점이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분명한 “은사 로서의 외국어”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 특히, 14장에서 단수로 쓰인 “방언”(γλῶσσα)에 대해서는 잘 살펴야 한다.
이상의 이론들을 검토해본 결과 고린도교회의 “방언”(γλῶσσα)은 “은사로서 외국어”나 “천사들의 언어”와 같이 복수로 쓰인 긍정적인 측면과 단수로 쓰여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반복되는 뜻 모를 소리”의 두 가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KJV는 “방언”(γλῶσσα)이 단수로 쓰인 경우 헬라어 원문에 없는 ‘unknown’을 붙여서 풀이하였다(고전 14:2, 13, 14, 19, 27). 그런데 26절의 경우에는 단수임에도 unknown을 붙이지 않은 것은 특이하다. 이 점은 Chapter 3에서 세밀하게 그 이유를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Ⅱ. “외국어”로 보는 설
이 설을 취하는 사람들은 신학성경의 “방언”(γλῶσσα)은 전부 “은사로서의 외국어”를 의미하므로 현대교회의 방언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
대부분의 중세교부들은 “은사로서의 외국어 설”을 취한다. 교부 이레네우스 (Irenaeus), 오리겐(Origen), 어거스틴(Augustine) 등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을 주장하는 반면 터툴리안(Tertullian)의 경우 외국어 방언과 함께 영적 감동속의 찬양과 비전, 기도들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런 은사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가르침, 교훈에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 “사람과 천사의 언어”라는 표현과 14장 4절에서 “뜻 모를 소리”인 단수로서의 “방언”(γλῶσσα)이 “개인에게 유익이 된다”는 표현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사도 바울도 일부 견해(긍정적인 측면)에 있어서 터툴리안(Tertullian)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캘빈은 「신약성경 주석」에서 “바울의 요점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외국어를 의미한다.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한 이유는 아무도 그 뜻을 알아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8] 라고 주장하면서 “γλώσσῃ”(고전 14:2)를 외국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은사로서의 ‘γλωσσῶν”(고전 12:10)도 복수형태 로서 외국어이다. 단수, 복수에 관계없이 다 ‘외국어’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것이다.
권기현은 고린도교회의 방언과 관련,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해석을 잘 못함으로 인해 외국어인 “방언”(γλῶσσα)을 “알아 들을 수 없는 신비로운 천상의 언어” 라는 전혀 가능성 없는 오역을 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고린도 전서 14장 2절의 해석인데 그는 방언은 ‘비밀로’ 말하는 것이지 ‘비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 “비밀”은 헬라어로 “μυστήριον”의 복수형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그 핵심적 내용으로 하는 복음 또는 이와 정면으로 대조되는 거짓 복음(살후 2:7;계 17:5)과 자주 동격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라면서 신약성경 전체에서 사용되는 “방언”은 전부 “은사로서의 외국어”라고 주장한다.[9] 즉, 복음과 관련이 있는 어휘라고 보는 것이다.
데이어(Joseph H. Thayer)는 “방언”(γλῶσσα)을 다른 민족들의 언어와 달리 한 특정한 백성에 의해 사용되는 언어로 보았다. 이 논리는 “현대교회의 방언 현상”에서 간혹 어느 소수 족속의 언어였음이 판명되는 경우도 있어서 그럴 듯 하다. 그는 또 덧붙여 말하기를, 그것은 “무아경에 몰두하여 자신의 이성과 의식을 지배하지 못한 채,
이상한 말들과 함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영적 감정들을 토로하는 사람들의 은사”라고 하면서 “그것은 귀에 거슬리고 모호하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키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말들”[10] 이라고 하였는데 “방언”(γλῶσσα)을 잘 알려지지 않은 특정 족속의 언어라면서 이를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마키(R. G. Gromacki)는 많은 현대의 방언 옹호자들이 사도행전의 “방언” (γλῶσσα)은 외국어 방언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고린도전서에서는 “an unknown tongue”와 “외국어들”, 두 가지로 쓰였다고 주장한다고 부정적으로 비판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14장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의 “방언”(γλῶσσα)은 외국어를 말한다고 주장하면서 킹제임스버전(KJV)의 해석 방식에 반대한다.
KJV에 “알 수 없는” (unknown) 이라는 형용사가 번역자들에 의해 삽입된 것은 아주 잘 못되었다. 영어본문에서 그것은 이태릭체로 나타나는데, 이 경우 그것은 그 단어가 본래 헬라어 본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역자 들은 고린도인들의 방언 현상이 알 수 없는 무아경적인 말로 이루어졌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의 말을 첨가하였다. 실제로, 이 절은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 그 말하는 자의 말을 이해하는 자가 아무도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11]
그는 KJV의 번역을 비판하고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γλῶσσα)을 전부 외국어로 봐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14장 2절의 방언(γλῶσσα) 역시 교회내 신도들이 모르는 외국어였을 뿐 “무아경적인 말이나 언어”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견 일리가 있는 듯이 보일지 몰라도 고린도전서 13장 1절의 “내가 천사들의 언어를 할지 라도”와 14장에서의 “방언” (γλῶσσα)이 단수와 복수로 분명히 나뉘어져 쓰인 것에 대해서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칼빈(J. Calvin)은 “방언” (γλῶσσα)을 외국어 은사라고 보았다. 노우호 목사는 이러한 칼빈의 말을 예로 들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방언들을 통역하라고 한 것을 보면 외국의 언어나 특정지역의 지방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라고 인식을 했던 것이다”[12] 라고 하면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는 고린도교회에 부정적인 의미의 “뜻 모를 이상한 소리”를 외국어라고 생각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받아들이기 다소 힘든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에서만 1년 반 정도 기간의 사역을 통해 고린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개인적이고 세부적인 잘못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γλῶσσα)을 단수와 복수로 정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면서 격려와 훈계를 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교회내에서 외국어를 많이 쓴다는 것과 알 수 없는 무아지경에서 황홀경의 소리도 하는데 질서가 없이 혼란한 상황이어서 지침을 정해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에서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면서 “방언” (γλῶσσα)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결론적으로 14장 26절이하에서 “교회내에서 질서 있게 하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질서”에 관한 이야기는 고린도후서 12장 20절 “교회내 무질서가 있을까 두렵다”는 구절에 다시 나타난다.
Ⅲ. 두 가지 의미가 혼재한다고 보는 설
이 설에 따르면 바울은 외국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an unknown tongue에 관련해서는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γλῶσσα)을 ‘뜻 모를 소리(an unknown tongue)’와 ‘외국어(languages) 로 구분하여 사용하는 대표적인 영어 버전이 킹제임스버전(KJV)이다. 이것은 잘 알려진 바대로 “텍스투스 리셉투스”(TR1550MR)를 근거로 해서 번역한 것인데, TR1550MR는 라틴어역(Vulgate) 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기준으로 해서 제작된 성경이다. KJV에서 단수로 사용된 고전 14:2, 13, 14, 19, 27에서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an unknown”을 붙여서 번역하고 있다. “방언” 이 단수로 쓰였을 때는 “뜻 모를 소리”로, 복수로 쓰였을 때는 외국어 (언어들)로 번역한 것이다.
에봇 스미스(Abbott Smith)는 신약성경에 쓰인 방언(γλῶσσα)을 비교적 폭 넓게 사용한 것으로 이해했다. 즉, 언어의 기관(혀), 사람의 언어(외국어)와 함께 “영적인 무아경에서 말해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로 정의함[13]으로써 다른 견해들보다 포괄 적인 입장을 취했다.
노우호는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교인이 말하는 아무도 알아 들을 수 없이 하나님께 혼자 말하는 뜻 모를 소리(an unknown tongue)는 단수로 사용하고 자신이 말하는 외국어들은 복수로 구분 하여 사용하고 있다.”[14]라고 하였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언”(γλῶσσα)을 단수와 복수로 구분하는 것은 소수 의견이며 무리가 있는 해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킹제임스(KJV)가 분명히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여 해석하고 있고 여러 문맥으로 보아 상당히 일리 있는 번역인 듯 하다. 왜냐하면 다른 많은 의견들이 고린도교회의 “방언” (γλῶσσα)을 전부 동일한 개념이라고 가정함으로써 해석의 오류가 생겼기 때문에 이것이 “은사로서의 외국어”(12장 10절), “천사의 언어” (13장 1절), “반복되는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 (14장 2절)로 해석을 하여야 비로소 신약성경내 여러 곳에서 등장 하는 “방언” (γλῶσσα)의 문맥과 맞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1절에서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여 “외국어들”이라는 말로 분명히 해석되는 예를 들고 있는 점이다.
여기까지 신약성경내에서의 “방언”(γλῶσσα)의 의미에 대한 선행연구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방언”(γλῶσσα)이 “황홀경의 발화(뜻 모를 소리)”로 보는 설과 “외국어”로 보는 설, “두 가지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는 설로 나누어서 살펴 보았다. 각각의 이론은 나름대로의 논리와 주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어떤 설도 현대교회의 “방언” (γλῶσσα)현상의 의미에 대해서 확실한 논거를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Chapter 3에서는 신약성경 전체(일부 구약성경도 포함)의 용례를 살펴 보고, 특히 고린도 전서 14장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15]
[1] 목회와 신학 편집팀, 「고린도전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서원), 182-183.
[2] 김동찬, 「누가 방언을 금하는가」 (서울 : 베다니 출판사, 2016), 194-195.
[3] J.Oswald Sanders, 「성령과 그의 은사」, 권혁봉 역 (서울 : 요단 출판사, 1990), 193.
[4] 이상훈, 「신약에서 본 방언현상」, 기독교사상 69.6 (대한기독교서회), 71-77.
[5] 김동찬, 「방언 바로 알기」 (서울: 베다니출판사, 2015), 149.
[6] 유명복, 「언어학적 관점에서 본 방언」, 기독교교육정보, 제 33집 (서울 : 한국기독교교육정보 학회, 2012), 235.
[7] 배종열,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타난 “신령한 것”」, 개신논집 제18집 (2018.09), p.54-82 개신 대학원대학교 출판부.
[8] 존 칼빈, 「신약성경주석 제 8권」 (서울 : 성서교재간행사, 1980), 388
[9] 권기현, 「방언은 지상에서 사용되지 않는 천상의 언어인가?」, 진리와 학문의 세계 제 23권 (경산: 달구벌 기독학술연구회, 2011), 166-175.
[10] Joseph H. Thay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Edinbugh: T.&T. Clark, 1954), p.118
[11] Robert G. Gromacki, 86-87.
[12] 노우호, 「방언을 검증하자」 (산청: 에스라하우스, 2014), 76.
[13] G. Abbott-Smith, A Manual Greek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Edinbugh : T.&T. Clark, 1954), p.93.
[14] 노우호, 「방언을 검증하자」, 124.
[15]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 고린도 사회가 국제무역항으로서 많은 외국인들이 출입하면서 온갖 종류의 외국어가 서로 섞인 상태로 하는 말, 일종의 복잡하게 섞인 외국어이지만 “an unknown tongue”처럼 들리는 말도 분명 있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지만 이것을 “은사로서의 외국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an unknown tongue”에 포함하여 분류하기로 한다.
선교활동등 제휴 문의: usedslr@gmail.com, YouTube: 다언어성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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