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무엇인가? --- 神學 斷想 1
신학이란 신(theos)과 말(logos)의 결합어이다. 즉 신을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은 각 시대마다 그에 맞는 적절한 소명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소명을 정확하고 깊이있게, 역사 책임적 과제를 설정하고 구체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봉사할지에 대해서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성경을 정확하고 바르게 알기 위하여 신학을 공부한다. 일반적으로 신학은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실천신학으로 나누어서 학습하게 된다. ‘오직 성서로'라고 외친 복음주의자들의 의로움을 경외한다. 그들의 통찰력에 감사할 따름이다. 일점 일획 까지 성경전체가 성령의 역사로 기록된 것을 믿지 않고서는 성경을 통한 감동과 그에 따른 삶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이 쓰여진 이후 수천년동안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구절들까지 최근의 과학적 연구의 성과로 그 내용이 진실이었음이 속속 드러남을 보면서 성경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없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것이며 이것이 인간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인간 구원의 메시지임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관으로 일하고 있던 49세때 흉노를 토벌하던 이릉의 사건에 연루, 누명을 쓰고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는다. 이때 그는 "하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부르짖으면서 이후 여생을 전국을 돌며 자료를 수집, 역사상 최고의 사서 "史記"를 저술하는데 투신한다. 이른바 '사마천의 사기'이다. 그가 알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은 계시는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신가?'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마천이 만약 우리의 하나님을 알았다면 신학의 위대한 전제인 하나님께서 존재하고 계시며 하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신적인 말씀 속에서 계시하시면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공의롭고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시대는 다르지만 그가 성경을 접하고 읽고 연구했더라면 로마서 5장 3~4절 말씀에 큰 위안을 얻었을것 같다.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교회를 다니지 않던 때에(다니고 있었더라도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신앙의 단계가 초등학문의 수준에 머물고 있을때) 친구들과 종교문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지면 늘 등장하는 주제가 삼위일체론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AD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령의 온전한 신성을 선언하여 삼위일체론이 정통신앙으로 인정된 것과 관련해서 일종의 정치적인 회의에서 정통과 이단을 구획하는 것일 뿐 이런 문제들이 종교의 본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졌음과 그러한 공의회조차도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결과였던 것 같다. 지금도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규정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대표적으로 창세기 1:26의 '우리라는 복수개념' 요한복음 14:26에서 말하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등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성령의 신성과 관련해서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즉, 구속사역, 구원의 계획 속에서 성령 하나님을 이해하여야 하며, 성도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성령이 실제로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면, 우리가 성령에 참여함으로써 신적인 본질을 공유하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종교가 그 위에 설 수 없을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유의지이며 창조된 세상으로부터도 초월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즉, 창조의 교리는 성서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완성하시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바 ‘볼트만’은 특히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창조교리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들과 구별하게 해주며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창조교리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성서의 다른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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