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1)    1 : 인간 정신 생활의 한 차원인 종교

종교가 인간 정신의 한 측면이란 신념에 대한 신학적 비판자들과 과학적 비판자들은 종교를 인간이 신적 존재자들과 맺는 관계로 정의하는데 그 신적 존재자들의 실존을 신학적 비판자들은 긍정하고 과학적 비판자들은 부인한다. 만약 신이 실존하는지 실존하지 않는지 묻는 물음으로  시작한다면, 결코 신에게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신은 실존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보다 신에게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종교는 인간 정신 생활에 있는 특수한 기능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 기능에 있는 깊이의 차원이다. 종교는 모든 곳, 즉 인간 정신생활의 모든 기능의 깊이를 보금자리로 삼는다. 또한 종교는 그 단어의 가장 광범위하고 기본적 의미에서 궁극적 관심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 관심은 인간  정신의 모든 창조적 기능에서 나타난다. 궁극적 진지함으로 종교를 거부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궁극적 진지함이란, 혹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상태가 그 자체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 정신 생활의 실체, 근거, 깊이이다. 이것이 인간 정신의 종교적 측면이다. 종교영역과 세속 영역 두 영역 가운데 어느 것도 서로에게서 분리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두 영역이 서로에게서 분리된 실존 자체가 비상사태라는 것과 둘 다 넓은 의미의 종교에, 궁극적 관심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정도에 따라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갈등은 극복되고, 종교가 인간 정신 생활에서 즉 그 깊이에서 종교의 참된 자리를 재발견한다. 바로 그 깊이를 통해서 종교는 인간 정신의 모든 기능에 실체, 궁극적 의미, 판단, 창조적 용기를 제공한다.  

2)    2 : 종교철학의 두 유형

우리가 신에게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존재론적 유형은 소외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이 방식을 따르면 인간은 신을 발견할 때 자기를 발견한다. 즉 인간은 자기를 무한히 초월하면서도 자기와 동일한 어떤 것, 그것으로부터 자신이 소외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에서 결코 분리된 적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발견한다. 또 한가지는 우주론적 방식인데 이는 낯선 이를 만나는 방식으로 이 방식을 따르면 인간은 신을 만날 때 낯선 이를 만난다. 그 만남은 우연적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서로에게 속해 있지 않다. 잠정적, 미확정적 토대 위에서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만난 그 낯선 이에 관해서 아무런 확실성이 없다. 그는 사라질 수도 있고, 그의 본성에 관해 단지 개연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3)    3 : 시간과 공간의 투쟁 .

    시간과 공간은 투쟁하는 힘들로, 살아 있는 존재자들로, 자체의 힘을 가진 주체들로 다뤄져야 한다. 물론 이것은 진술을 위한 방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시간과 공간은 실존하는 모든 것이, 유한한 영역 전체가 종속되는 실존의 주요 구조들이기 때문에 이 방식이야말로 정당하다. 실존한다는 것은 유한함 혹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실존, 즉 인간의 몸과 정신을 포함하는 보편적 실존의 힘이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간만으로도 시간을 측정할 수 있고, 시간만으로도 공간을 측정할 수 있다. 운동은 생명의 보편적 특징으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정신은 시간에 결속되어 있는 듯 보이는 것으로, 실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현체가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공간을 필요로 한다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역사는 대체로 공간과 시간의 투쟁에 의해서 결정된다. 방향성 없는 시간은 공간의 완전한 지배를 받는 시간이다. 따라서, 시간의 첫 번째 승리는 생명의 과정이 탄생에서 죽음으로 진행된다는 것, 성장과 쇠퇴가 되돌려질 수 없는 방향성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영역에서 노인은 다시 젊어질 수 없다. 그렇지만 공간의 우월함은 여전하다. 생명 과정은 되돌려질 수 없지만 반복될 수는 있다. 각각의 개별적 생명은 탄생과 죽음, 성장과 쇠퇴의 법칙을 반복한다. 시간의 방향성은 지속적 반복이라는 순환운동에 의해 그 힘을 상실한다. 순환은 공간의 우월함을 가장 잘 표현하는 상징으로, 생명의 영역에서는 극복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시간의  최종적 승리가 가능하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지향하며 행동할 수 있다. 인간은 역사를 가질 수가 있고 또한 가족과 민족의 비극적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떤 새로운 것을 지향하면서 반복의 순환을 돌파할 수 있다. 인간은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의  잠재적 승리를 드러내지만, 항상 현실적 승리를 보여 주지는 못한다. 자연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던 일이 인간과 역사에서는 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공간의 힘은 대단하며 언제나 창조와 파괴 둘 다에 작용한다. 공간은 약간의 흙 이상을 의미한다. “서로 곁에 있음이라는 특징을 가진 모든 것이 공간에 포함된다. 현대 민족주의는 공간이 시간을 지배하는, 다신론이 일상적 실재인, 현실적 형식이다. 공간이 우세할 경우 인간적 실존은 비극적이다. 그리스 철학이 불변하는 존재자의 궁극적 상징으로 발견한 것은 공간의 가장 완벽한 재현인 구 혹은 원이었다신비주의에서 시간과 공간은 어떠한가? 신비주의는 공간의 우세함에서 벗어나는 실재적 도피책이 아니다. 신비주의는 시간과 공간을 소멸시키지만 그렇게 하면서 주장하는 기본적 전제는  시간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고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종속되어 있고, 어떤 새로운 창조물도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시간을 초월하며 시간의 어떤 단계로부터도 항상 독립적이다. 구원은 모든 시간적 현재를 초월 하는 영원한 현재이다. 신비주의는 공간의 우세함을 보여주는 가장 교묘한 형식이다. 신비주의는 역사를 부인하는 가장 교묘한 형식으로, 역사의 의미를 부인하는 가운데 시간의 의미도 부인한다. 신비주의는 공간과 공간의 부정 사이에서 일어난 상승작용이지만 시간의 긍정은 아니었다. 자연뿐 아니라 초자연도 시간을 공간에 종속시킨다시간의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그분이 최종 목표를 향해 역사 속에서 행동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예언자주의에서 역사는 보편적 역사이다. 선교에는 분열되지 않은 인간 의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보편적인 주장이 있다. 시간은 역사 속에서 완성되며 역사는 보편적 하나님 나라에서, 정의와 평화의 나라에서 완성된다. 2 이사야의 역사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기 민족의 불의 때문에 그 민족을 벌하고자 이방민족을 부르시는데, 이는 하나님을 보편적   하나님으로 격상했다. 비극과 불의는 공간의 신들에게 속한다. 하지만 역사의 완성과 정의는 하나님에게 속하는데, 그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해 행동하면서 자신의 우주에 있는 분열된 공간을 사랑으로 연합시키신다유대 민족은 모든 시대에 걸쳐 지속되는 시간과 공간의 영구적 투쟁을 재현한다. 그들은   다른 민족과 같이 공간의 민족으로 간주되었을 때 비극적 숙명을 가졌지만, 시간의 민족으로 간주되었을 때 비극을 초월했다.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분리된 것은 시간의 완성에서 유대교가  공간을, 즉 그 민족의 법을 선택했기 때문인데, 그 법은 결코 모든 민족의 법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교회는 언제나 자신의 예언자적 정신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신들이 힘을 가지고 있는 한 회당의 전통에 포함되어 있는 예언자적 정신이 필요하며, 유대교의 역사적 숙명에 관한 첫 번째 기독교적 해석자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상정한 것처럼 역사의 종말 때까지 중요하다. 회당과 교회는 우리 시대에 공간의 신들에 반대하여 시간의 하나님을 지지하는 투쟁 속에서 연합해야 한다. 만약 이런 연합이 일어난다면, 만약 역사의 주를 위해 또한 그분의 정의와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사람이 박해와 순교 중에도 연합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투쟁에서 영원한 승리는 시간의 승리로 그리고 역사의 주인인 한 분 하나님의 승리로 다시 한 번 드러날 것이다.

4)     4 : 종교적 문화분석의 여러 측면들 . 

만약 우리가 지상계명에서 종교 개념을 이끌어 낸다면, 종교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며 또 그래야만 하는 것에 관해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 과의 결속을 성공적으로 유지했고, 그리스도로서의 자신을 위해 예수로서의 자신을 희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현하는 새로운 실재를 창조했다. 실존적 종교 개념의 두 번째 결과는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 영역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은 분리된 영역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서로 독립되어 있고 이것이 인간의 곤경을 규정하는데 그 곤경은 자신의 참된 존재에서 소외된 인간의 상황이며 종교가 특수한 영역으로 실존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 상태에 대한 가장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결과는 종교 및 문화와   관계가 있는데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종교는 문화의 의미를 제공하는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기본적 관심이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들의 총체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그런 고찰은 종교와 문화라는 이원론의 확립을 분명하게 방지한다. 인간 정신 생활의 모든 행위는 발설되거나 발설되지 않은 언어로 수행된다는 사실이 이 주장의 충분한 증거이다. 언어는 가장 기본적 문화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양식을 읽을 수 있는 자는  그것의 궁극적 관심을, 그것의 종교적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현대 문화에서 산업사회는 지배적 정신이며 이에 저항하는 정신은 인간의 현실적 곤경에   관한 실존주의적 분석의 정신이다.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두 가지 주요 특징은 첫째로 인간의   활동들이 자기가 포함되어 있는 자신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기술적으로 변형하는 일에 집중되어 인간과 실재의 만남에서 깊이의 차원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며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유한한 상호관련들의 체계는 자족적이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신은 잉여적 존재가 되었고, 우주는 우주의 주인인 인간에게 맡겨졌다. 이 상황은 산업사회의 두 번째 특징으로 귀결된다.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자유주의와 정통주의가 중요하지 않은 투쟁에 관여하고 있었던 반면,역사적 섭리는 종교와 현대 문화를 관련시키는 다른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준비는 산업문명의 심층에서 수행되었는데 때론 가장 반 종교적 의미에서 산업문명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 일을 수행했다. 이것은 실존주의라고 알려진 거대한 운동으로서 파스칼이 시작했고 19세기의 예언자적 사상가들 몇몇에 의해서 수행되었으며 20세기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종교의 형식은 문화이다. 첫째로, 이 사실은 종교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경우에 특히 명확하다. 성경 언어를 포함한 모든 언어는 수많은 문화적 창조행위의 결과이다. 언어는 인간에게 보편자를 주는데 그 보편자의 힘으로 인간은 기술문명과 정신적 내용이라는 주어진 세계 위에 세계들을  창조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세계들의 발전은 언어의 발전을 결정한다. 둘째로, 종교에서 문화적 창조물을 사용하는 두 번째 본보기는 종교예술이다. 종교 예술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어야 하는 하나의 원리는 예술적 정직성의 원리이다. 예술양식이 정직한 것은 그것이 예술가의 실제 상황과 그가 속한 시대의 문화적 실제 상황을 표현하는 경우에만 그렇다. 세 번째의 본보기로는 인지  영역에서 취할 수 있으며 모든 문화 영역에서 수행된 실존적 분석의 방대하고 심오한 자료를   사용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치료 심리학이 포함된다. 기독교가 자신의 궁극적인 관심을 표현한  상징을 가지고 실존적 분석을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라는 선포뿐 아니라 현대 문화 에서 재발견된 인간의 곤경에도 적합한 방법이다. 교회는 인간의 실존 자체에 내포된 질문에, 이 실존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이 일을 감당하는 방법들 중 하나는 전도이다. 전도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의 생명을 표현하는 상징이 인간 존재자의 실존에 내포되어 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기독교가 교리적 혹은 제의적 혹은 도덕적 율법의 조합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치유의 실재가 출현함으로써 율법이 정복되었다는 좋은 소식이라고 사람들이 느껴야만 한다. 가시적 교회는 가끔씩 표면화되는 잠재적 교회의 목소리들을 통해 교회 자체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지 깨닫고 비록 그 목소리가 교회에 적대적으로 보일지라도 수용해야 한다. 교회는 문화를 심판하는데 교회 자체의 생활 형식을 포함하여 그렇게 한다. 교회의 종교적인 실체가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교회의 형식은 문화에 의해서 창조되기 때문이다. 교회와 문화는 서로에게 속해 있지 별개로 있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그 둘을 포함하면서 또한 그 둘을 초월한다.   

5)     5 : 종교언어의 본성

미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상징의 의미에 관해 많은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사실에 내포되어 있는 더 심도 깊은, 부정적이기도 하고 긍정적이기도 한 것의 징후이다. 종교 언어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 다섯 단계를 거치고자 하는데 첫 번째 단계는 상징과 기호에 관한 논의로 본다. 상징과 기호에 있는 본질적 동일성은 그것들이 자신을 넘어서 지시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상징이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닌, 자신이 나타내는 그 힘과 의미에 참여  하는 어떤 것인데 이것이 상징의 기능이라면 상징이 다른 상징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상징에는 특별한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은 꼭 그것이며 더 혹은 덜 적합한 상징으로 대체될 수 없다. 세 번째로는 종교적 상징의 본성인데 종교적 상징은 모든 상징이 하는 역할과 정확하게 같은 일을 수행한다. 궁극적 실재의 차원은 거룩함의 차원이므로 종교적 상징은 거룩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로는 종교적 상징의 수준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초월적 수준과 내재적 수준이 있다. 초월적 수준에 관한 기본적 상징은 하나님 자신이며 신의 성질, 속성은 당신이 신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것,  신은 사랑이다”, “신은 자비이다”, “신은 힘이다”, “신은 전지하다”, “신은 편재한다”, “신은 전능하다 등이다. 또한 초월적 수준의 또 다른 요소는 신의 행위이다. 내재적 수준은 신적인 것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출현하는 수준인데 이 수준에는 무엇보다도 신적인 것의 육화, 즉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다른 존재자들, 신적 존재자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날 때 다른 존재자로 바뀌는 육화(성육신)가 있다. 또한 성례전의 경우는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환경에서 거룩한 것의 담지자가 되는 어떤 실재로서 이런 의미에서 성만찬은 상징적이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상징의 진리에 대해 고찰해 보면 종교는 모호하며 모든 종교적 상징은  우상화될 수 있고 마성화될 수 있고 자체를 궁극적 유효성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적 교리나 어떤 종교적 제의도 궁극적이지 않다. 만약 기독교가 기독교의 종교적 상징들 중에 다른 어떤 진리보다도 더 우월한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십자가라는 상징,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6)     6 : 개신교와 예술양식 .

    모든 예술작품은 세 가지 요소, 즉 주제, 형식, 양식을 보여 준다. 주제는 인간 정신이 감각적 심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잠재적으로 일치한다. 그것은 결코 선이나 악, 아름다움이나 추함, 온전함이나 파편화, 인간이나 비인간, 신적인 것이나 마성적인 것 같은 다른 성질들로 제한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주제가 모든 예술가에 의해서 혹은 모든 예술 시대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형식과 양식에 의해 좌우되는 선택의 원리가 있다.  예술적 창작품은 형식으로 결정되는데 그 형식은 소리, 단어, , 색 같은 특정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그 재료들을 독립적 작품으로 격상시킨다. 이런 이유로 다른 모든 창작품에서와 같이 모든 예술적 창작품에서 형식은 존재론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존재 자체의 구조적 요소들에 속하며, 어떤 것이 그것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어떤 것에게 그것의 독특성과 보편성을, 존재 전체 안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특별한 자리를, 그것의 표현력을 부여한다. 하지만 형식 자체는 양식에 의해서 제한된다. 양식은 처음에 옷, , 정원 등에서 변화하는 유행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었지만, 예술적 생산 영역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되었고 심지어 철학, 정치학 등과의 관계  에서도 사용되었다. 양식은 어떤 독특한 방식으로 한 시대의 수많은 창작품들을 규정한다. 바로 그 형식 때문에 창작품들은 창작품이 된다. 바로 그 양식 때문에 그 창작품들은 공통적인 것을 가지게 된다. 양식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동일한 양식의 창작품들에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철학 양식에 관한 유명한 분석에서 독일 철학자 딜타이는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실재론을 구분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양식과 관련해서 시각 예술에 직접 적용될 수 있는 네 가지의 양식적 열쇠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관념론적 요소, 실재론적 요소, 주관적 요소, 객관적 요소이다. 모든 예술 작업에는 네 가지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들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이 우월한 상태로 있다양식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종교 일반과, 특히 개신교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특정한 양식이 다른 양식보다 종교적 주제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가? 특정한 양식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고  다른 양식은 본질적으로 세속적인가? 이와 관련한 대답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한 예술적 표현을 배제하는 양식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것은 사물이나 경험의 어떠한 특별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양식과 주제 사이에 명확한 적합성과 비적합성이 있다.  과로, 한 양식적 요소가 우세한지 혹은 여러 양식적 요소들이 조합되는지에 따라서 선호하는 주제가 달라지고, 이는 양식의 의미 분석을 위해 도상학이 강조되게 한다. 위대한 종교 예술이 창조되었던 모든 시대 양식에서 표현적 요소가 우세했다는 것과, 비록 어떤 종교 전통의 재료가 사용되지 않는다 해도 표현적 요소의 지배를 받는 양식에는 직접적으로 종교적 영향력이 있었다.모두 종교적 상징을 표현하는 데 똑같이 적합하지는 않다. 현대 예술에서 표현적 양식의 우세함은 종교 예술의 재탄생을 위한 기회이다. 다양한 양식이 모두 종교적 상징을 표현하는 데 똑같이 적합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양식들은 적합하다. 우리는 종교 예술이 오늘날의 예술에서 표현적 양식을 통해 새롭게 부상한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7)     7 : 실존철학 : 그 역사적 의미

    모든 실존철학자가 반대한 것은 서구 산업사회와 그 철학적 대표자들이 발전시킨, 사상과  삶의 합리적 체계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 체계의 함의는 점차 분명해졌다. 그 함의는 개인의 자유, 인격적 결단, 유기적 공동체를 파괴하는 듯 보이는 논리적 혹은 자연주의적 기제이며, 생명의 활동력을 약화시키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계산과 통제의 대상으로 변형하는 분석적 합리주의이며, 인간과 세계를 그 창조적 근원과 실존의 궁극적 신비로부터 단절시킨 세속화된  인본주의다. 모든 유럽 국가에서 시인과 예술가들이 지지한 실존철학자들은 삶의 이 자기-소외적 형식에 대한 접근법을 의식적으로나 잠재의식적으로 각성했다. 만약 철학을 인간의 자기 실존  해석으로 간주하면 그들은 철학을 매우 풍성하게 한 것이고, 20세기 유럽의 혁명을 위한 지성적 도구와 정신적 상징을 만들어 준 것이다19세기적 상황에서 종교는 그 비매개성을 상실했다. 즉 종교는 인간의 삶에 의심할 수 없는 의미의 방향성과 적절성을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 비매개성에서 상실된 것을 헤겔은 의식적 재해석을 통해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부흥신학에 의해, 한편으론 철학적 실증주의에 의해 공격받았다. 실존철학자들은 재해석, 부흥 신학, 실증주의의 범위를 초월하는 삶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비매개적 경험을,  주관성을 지향했다. 그들은 존재의 창조적 영역을 발견하고자 했으며, 그 영역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구별보다 선행하거나 넘어서는 것이었다실존적 태도와 그 철학적 표현의 양극성이 실존주의 운동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때로는 실존적 요소가 지배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철학적 요소가 지배적이기도 하다. 그들 모두에게서  비판적 관심이 지배적이다. 그들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역사적 운명에 저항하고 있고, 운명에 저항함으로써 그 운명의 완성을 심화시키고 있다. 실존주의는 서구 산업사회 안에서 일어난, 그리고 그 사회에 저항하며 일어난 거대한 혁명의 표현으로, 그 혁명은 19세기에 준비되었으며 20세기에 수행되고 있다.     

8)     8 : 실존철학과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의미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작품에는 심층심리학적 내용이 상당히 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할수 있기 위해서는,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에 공통의 뿌리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존주의는 자유의 가능성과 위험,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죄책까지 모든 면에서 비존재의 위협을 드러낸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인간의 실존적 곤경의 특성이고, 이 점에서 심층심리학과 실존주의는 일치한다. 실존적 구조는 가장 정교한 기술로도 치유될 수 없는 구원의 대상이다. 심층심리학은 먼저 종교문학에서 찾을 수 있는 엄청난 심층심리학적 내용을 재발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영혼의 움직임에 관한 거의 모든 통찰을 이 종교 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라는 단어의 의미를 재발견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자신의 본질적 존재로부터의 분리, 소외이다. 세 번째로 심층심리학은 인간의 의식과 결단을 결정하는 마성적 구조를 신학이 재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 네 번째는 도덕주의가 기독교 신학에서 폭넓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주의에 대한 요구는 신학이 그 전체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거대 형식들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정신분석학이 조직신학에 끼친 영향은 정신분석학이 인간 곤경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실존에 내포되어 있는 질문을 제기하는데 조직신학은 종교적 상징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 리뷰 > 

1.    서 평

인간 정신 생활의 한 차원으로서의 종교의 본질을 규명하고 인간 정신은 종교를 바탕으로 한다고 볼 수 있는데 종교는 그 궁극적인 측면에서 인간 정신의 기저에서 창조적 활동을 이끌고 있으며 인간 정신의 기능에 실체, 궁극적 의미, 판단, 창조적 용기를 제공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종교를 철학, 예술 등과 같이 나열하는 인간 정신작용의 한 분야로 생각해왔던 것을 바꾸어 주는, 종교의 본질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분석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또 종교철학을 두 유형으로 분류하여 소외를 극복하는 방식인 존재론적 방법과 미지의 존재를 만나는 방식인 우주론적 방법으로 구분하고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비교하면서 두 방식을 비교,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 둘은 결국 신인식의 비매개성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고 보여지며 현대 종교철학에서는 두 유형이 갈등과 혼합을 이루며 발전해 나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폴 틸리히는 실존한다는 것을 유한함 혹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정의하는데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역사는 대체로 공간과 시간의 투쟁에 의해서 결정된 것으로 보고 공간과 이교주의 대 시간과 하나님의 대결에서 비극과 불의는 공간의 신들에게 속하지만 역사적 완성과 정의는 하나님에게 속하는데 그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해 행동하면서 자신의  우주에 있는 분열된 공간을 사랑으로 연합시키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독특한 시각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종말론적 구속사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다른 차원에서의 투쟁 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보이며 인간에게는 시간의 최종적 증거가 가능하므로 자신의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지향하며 행동할 수 있다라는 말은 인간이 순교 등을 통해 공간에 예속되는 순환을 끊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파악된다.     

종교적 문화분석과 관련 종교와 문화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실체가 종교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라는 것과 관련 종교와 문화를 아리스토텔레스적 일원론적으로 파악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종교적 문화분석으로 종교언어적 측면, 종교예술적 측면, 인지영역으로서의 치료 심리학적 측면으로 나누고 결국 이러한 모든 작업은 종교를 인간의 실존적 측면과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상징을 존재의 매개로 간주하는 폴 틸리히의 견해가  반영된 이론으로 교회와 문화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하나님 나라는 이 둘을 포함하는 동시에 이 둘로부터 초월해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5장에서는 종교언어의 본질을 상징으로 파악한다. 존재의 매개로 보기 때문에 존재자와 존재 사이에 이성적인 구조를 강하게 설정했으며 언어를 존재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간주하는 하이데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기독교의 가장 우월한 상징으로 십자가를 설정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세 가지 요소, 즉 주제, 형식, 양식을 보여 준다. 폴 틸리히는 이 중에서도 양식의 해독은 예술 자체이고, 모든 예술처럼 대담하면서도 위험한 문제로 보고 있다. 그는 철학양식으로 예술 양식을 구분하고 예술 양식의 이면에는 각기 다른 철학 양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명쾌한 설명은 이 이론을 접하기 전까지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의아케 할 정도로 당연하다. 또한 그는 양식과 주제 사이에 명확한 적합성과 비적합성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는 표현적 요소를 중시하는 현대 예술의 특성이 종교 예술을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는 좋은 조건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내재적인 요소가 결국 표현적인 요소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종교적인 상징을 부여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경제적으로 산업화와 철학적으로 합리성, 인본주의 등을 실존주의자들은 반대한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20세기 유럽의 혁명을 위한 지성적 도구와 정신적 상징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이는 19세기적 상황에서 종교가 직접 인간 삶에 의심할 수 없는 의미의 방향성과 적절성을 제공할 수 없게 되면서 주관성을 지향하게 된 결과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신학을 목표로 고민한 것은 아니 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신학적 세계관 구축에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 되었다. 이는 저자가 지적한 대로 숙명적으로 인간의 실존에 접근하려다 보니 모든 정신기능의 궁극에 위치한 종교에 도달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심층심리학)에는 공통의 뿌리가 있다. 실존적 구조는 가장 정교한   기술로도 치유될 수 없는 구원이 대상이다. 심층심리학을 통해서 우리는 종교문학을 재발견한다. 영혼의 움직임에 관한 거의 모든 통찰을 이 종교 문학에서 찾을 수 있으며 두 번째로는 라는 것이 자신의 본질적 존재로부터의 분리, 소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죄라는 점을 알게 해준 것이다. 세 번째로 심층심리학은 인간의 의식과 결단을 결정하는  마성적 구조를 신학이 재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로써 우리가 결단을 통해 믿음을 선택하는 그 정신적 구조가 분석된 것이다. 네 번째는 도덕주의가 기독교 신학에서 폭넓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주의에 대한 요구는 신학이 그 전체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거대 형식들 중 하나였다. 이 역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이론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끝으로, 정신분석학이 조직신학에 끼친 영향은 종교적 상징이  인간 실존에 내포되어 있는 표현이라는 점인데 이런 점에서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징을 올바로 해석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2.    난해구절과 그 해석

1)     3장에서 표현하는 은 어떤 의미로 씌였는가?

본문에서 시간과 공간은 투쟁하는 들로, 살아 있는 존재자들로, 자체의 을 가진 주체들로 다루어져야 한다  공간의 은 대단하며 언제나 창조와 파괴 둘 다에 작용한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저자는 제 3장에서 시간과 공간을 인격화시켜 자체적으로 움직 이는 생물로 파악하고 있으며 시간의 하나님과 공간의 이교신들의 투쟁으로 설정하고 있고 또 다른 본문에서 운동은 생명의 보편적 특징으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란 방향성과 운동성을 갖는 에너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2)     6장의 표현은 무엇을 뜻하는가?

 6장에서 저자는 표현, 표현력, 표현적 요소, 표현적 양식 등 표현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주요 구절들을 살펴보면 형식은 존재론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존재 자체의 표현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한 예술적 표현을 배제하는  양식은 없다는 것이다”, “위대한 종교 예술이 창조되었던 모든 시대 양식에서 표현적 요소가 우세했다는 것과, 비록 어떤 종교 전통의 재료가 사용되지 않는다 해도 표현적 요소의 지배를 받는 양식에는 직접적으로 종교적 영향력이 있었다. 모두 종교적 상징을 표현하는 데 똑같이 적합하지는 않다. 현대 예술에서 표현적 양식의 우세함은 종교 예술의 재탄생을 위한 기회이다. 다양한 양식이 모두 종교적 상징을 표현하는데 똑같이 적합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양식들은 적합하다 등의 구절에서 표현이 무엇인지를 정의하지 않고는 제 6장을 이해할 수 없는데 본문 자체만으로는 그 의미하는 바를 파악할 수 없지만 폴 틸리히가 존재자와 존재의 기반에 이성적인 구조를 강하게 설정하고 상징을 존재의 매개로 본다는 점에서 제 6장에서의 표현이란 상징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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