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성찰의 기술(요점 정리)

신학서적 리뷰 2020. 2. 15. 21:14 Posted by forest38

「신학적 성찰의 기술」 요점정리

(패트리샤 오코넬 킬런 · 존 드비어 공저/권수영 외 2인 옮김)

시작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은 회상되고 체화된다. 그래서 더 깊은 의미를 탐색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사건이 지니는 의미의 가장 깊은 수준을 발생 즉시 측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의 사건들이 어떠한 방어적 태도 없이 성찰 될 때 예수가 말한 비유들처럼 우리에게 하나의 비유가 될 수 있다. 비유는 놀라운 변환을 통해 우리를 그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우리를 흔들어 다른 것을 경험하게 하고, 삶의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한다. 비유는 통찰의 풍성한 자원들이며, 변화로의 초대장이다. 신학적 성찰을 통해 우리의 삶은 비유와 같이 될 수 있다. 신학적 성찰은 지혜와 삶의 방향을 일러주는 주된 원천으로서 기독교 전통 유산에 의존하여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 경험의 성육신(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현존하심)적이고, 섭리(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심)적이며 계시(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의 근원)적인 성격을 갖는다.

믿음으로 가는 길을 찾아

< 신학적 성찰의 필요성 >

전통적으로 인간은 삶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종교적인 전통, 즉 기독교와 기독교적 유산에서 찾아왔다. 하지만 과연 다원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그러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에 기독교적 전통과 지혜가 이러한 질문에 올바른 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종교적 지혜와 가치에 바탕을 두고 전체적인 패턴을 성찰하는 진정한 삶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떠나서가 아니라 그 세상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찾는 것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신학적 성찰을 통해 의미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대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 여정에서의 대화 상대인 기독교적 유산, 문화 그리고 오늘날의 신앙 공동체와 친밀감을 갖게 될 것이다.

< 확실성의 관점 >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실성이 통제해 왔는데, 이것을 우리의 삶이 흔들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이상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지게 된다. 이때 우리는 완전히 달리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필요하다. 확실성이라는 관점으로 기독교적 유산에 접근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접근을 하게 되면 결코 우리가 읽고 있는 21세기의 전제, 가치, 세계관을 성서적 자원과 신학적 전통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성서와 전통에 접근할 때 실제로는 우리가 이미 가진 전제와 해석적 입장이 반영된 방식으로 접근 함에도 불구, 우리는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있는 중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우리의 삶에 성서적 혹은 종교적 진리를 매우 단순하게 적용하도록 하는 기독교 전통에 대한 접근은 신학적 성찰을 방해한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두려워하면서 획일화된 기독교의 문화적 일치로 도피하려는 시도는 오늘날의 세계에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 진정한 신학적 성찰은 의식적으로 우리의 현재적 삶을 위해 전통을 해석 하고, 또한 전통을 위해 우리의 삶을 해석한다.

< 자기 확신의 관점 >

통제 속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은 자기 확신의 관점이 가진 매우 유혹적인 측면 중 하나이다. 이러한 관점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종종 자신만을 위한 관심사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이것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우리가 욕망하는 목표를 제대로 이루어낼 수 있는지 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가 자기 확신의 관점을 가지게 되면 과도한 확신과 통제를 하도록 유혹 받게 된다. 우리가 상황과 공동체에 의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인식하는 것을 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확신의 관점에서 살아갈 때 사람들은 종종 확실성을 확보 하기 위하여 전통에 의지하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오래된 외부적 권위에 복종시키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확신이라는 관점이 자기 의존을 통한 확실성의 추구라는 것이다.

< 신학적 성찰의 필요성 >

확실성과 자기 확신이라는 배타적 관점들은 우리가 반성적이고 헌신적이며 자비 로운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들은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고,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힘, 가치, 역할 등의 특별한 위치를 옹호하기 위하여 상황 과는 상관없는 몇몇 전통의 가르침들을 반복하도록 한다. 그것들은 같은 목적으로 전통의 다른 측면들을 무시한다. 진정한 신학적 성찰이 없다면 기독교인들은 개인적 성숙을 이룰 수 없으며 우리 에게 걸맞은 통전성을 가질 수 없다. 지성과 감성, 인식과 행위를 포함하는 신학적 성찰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의 훈련을 제공한다. 우리는 진정한 신학적 성찰 없이 그리스도인에게 걸맞은 사역을 온전히 해낼 수 없다. 제 1세계의 문화적 가치들이 점차 인본주의적 비전과 기독교적 비전 모두를 약화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통전적이며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을 주장하고 표현해야 한다.

< 탐구의 관점 >

확실성과 자기 확신이라는 배타적 관점을 대신할 대안은 탐구의 관점이다. 간혹 우리는 선입견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즉각적인 반응을 하려 하는 습관적 경향으로부터 벗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혼란스러움을 경험할 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지 않고 눈을 가린 채 헤매는 경향이 있다. 현실을 깨닫기 전에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다시 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길을 찾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주목하고 집중하는 것이다.

신학적 성찰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이 신앙의 선진들을 위해 그들의 시대 속에서 작용했던 것처럼 그것이 우리의 시대 안에서도 유효하다고 믿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믿는다면 우리 삶의 경험과 기독교적 전통사이의 대화는 매우 진솔하고 진실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는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가오는 질문들에 우선순위를 부여할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 요약 >

신학적 성찰은 삶의 경험과 기독교적 유산이 가진 지혜가 대화하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성장시킨다. 기독교적 성찰을 하기 위해 우리는 개인적 경험과 세계, 종교적 유산이 가진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확실성과 자기 확신의 관점은 이러한 우리의 능력을 차단시켜 버린다. 그러나 탐구의 관점은 그것을 가능 하게 한다. 변혁적인 신학 성찰은 이러한 탐구의 관점 안에서 이루어진다.

통찰을 향한 움직임 : 지혜에 이르는 인간과정

< 경험 >

경험을 정의하기

경험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들이다. 적극적이든 수동적이든 우리가 참여자 일 때 발생한다. 그리고 경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발현되는 감정, 생각, 태도, 희망 등을 의미하는 내적 차원들을 가지고 있다.

경험 안으로 들어가기

우리의 경험에 다시 들어감으로써 성찰을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성찰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실제 경험 안에서 우리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경험의 내적, 외적 차원을 알아차리고 그 두 영역을 정확하게 묘사하려 하는 주의 깊은 시도를 포함한다. 통찰로의 움직임 첫 번째 단계에서 유보해야 하는 질문은 바로 “왜”이다.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건의 해석을 가져온다. 무엇이든 우리가 초기에 해석을 시작할 때 그 해석은 대체로 적당하지도 않고 만족스럽지도 않다. 우리가 그 상황을 성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급하게 “왜”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려 할 때 실제 경험은 은폐된다. 이것은 우리를 너무 이른 시기에 사건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발생한 일을 쉽게 합리화시켜 버린다. 이것은 또한 경험이 가진 계시적 힘을 제거해 버린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경험 속에서 진중하게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고 머물러 있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사건 대신에 해석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판단 없이 우리의 경험 안에 머물러 있기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경험에 대한 섣부른 해석을 자주 한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나 작은 토론 그룹 안에서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상기시켜 보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을 때 지루했다거나 화가 나거나 짜증나 있는 스스로를 발견해 본 경험이 있는가? 만약 당신이 그랬다면 당신은 경험으로부터 일찌감치 멀리 떨어져서 합리화에 사로잡힌 태도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듣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풍부한 묘사와 판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은 영적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훈련이며 반드시 연습해야 하는 일이다. 성찰을 할 때 우리는 해석과정을 늦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 사건을 단지 기술하길 원한다. 그 순간에 우리는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거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기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 감정 >

감정을 정의하기

우리가 경험으로 들어가 그 경험을 어떠한 판단 없이 세밀하게 기술하려 할 때 우리는 그 경험이 감정들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감정은 우리의 실재에 반응하고 느끼는 우리의 능력이 육화된 영혼이다. 이것은 우리 본성이 가진 본질 이다. 우리의 감정들은 의미를 향한 인간의 욕구를 예증하는 것인데 이러한 욕구는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실재를 좀 더 친밀하게 알고자 하는 욕구이자 하나님을 좀 더 온전히 알고자 하는 욕구이다. 우리는 때때로 감정을 기술할 때의 해석적 판단에 혼란을 느낀다. 이것은 통찰을 향한 움직임을 중단시키는데 그것이 우리가 진정한 감정과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성찰에서의 감정

상황에 반응하는 감정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하더라도 잠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는 너무 강력해서 이것이 성찰을 방해할 수도 있다. 습관적인 해석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너무 성급하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경험을 잘 못 해석하게 만든다. 우리가 스스로를 감정에 직면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감정을 성찰 과정의 한 부분으로 여기지 않을 때, 우리는 경험이 진정한 의미를 간과하게 된다. 진정한 의미는 성찰로부터 드러난다. 그것은 결코 한 가지 경험의 의미를 취한 결과가 아니며, 그것을 다른 것과 접목시킨 결과도 아니다.

통찰을 향한 움직임에서, 우리가 감정과 직면하게 되는 이 시점에서 수행해야 할 과제는 수용적으로 그 감정들에 주의를 집중하고 그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환영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메시지를 담고 있는 감정은 그 내용이 유쾌한 것일 수도 있고 매우 불편한 것일 수도 있다. 이 같은 성찰에 있어서 우리는 감정을 문제로 파악하거나,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 감정에 이름 붙이기 : 영적 훈련

이 시대에 필수적인 기독교 금욕주의의 실천은 우리가 명확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어떠한 판단도 없이 감정에 이름을 부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원초적으로 우리 감정에 공포를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음 에도 불구하고 통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비통제성은 감정을 무서운 것이거나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 고통이나 적대감 또는 기쁨 등의 강렬한 감정 경험은 통제력의 상실과 취약성, 초월적 힘이라는 인식을 우리에게 가져온다.

 

만약 우리가 통제를 높이 평가함으로써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분노와 우울을 느끼게 만든다면, 그것을 우리로부터 삶의 기쁨을 앗아갈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문제로서 인식할 때 우리는 그것을 피하고자 한다. 만약 무엇인가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면, 마치 그것이 우리 소유인 양 우리는 그것을 계속하려고 노력하고 집착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피하고 싶은 감정을 나쁘다 하고, 가지고 싶은 감정을 좋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적절히 그러한 감정을 피하거나 경험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피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감정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성을 소멸시키며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능력을 방해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성찰 능력을 차단시키기 때문이다.

♣ 감정에 주목하고, 그것에 이름 붙이는 것을 연습하기

잠시 동안 숨을 깊이 내 쉬고 조용해진 가운데 당신 몸의 신체감각들에 주목해보라. 발끝에서부터 상체 중심을 통해 흐르는 감각에서부터 눈과 머리까지의 신체 감각들을 어떤 단어들로 묘사할 수 있을까? 당신의 몸이 당신의 감정에 정확하게 이름 붙이도록 하는 것은 당신이 감정 안에서 허덕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상황 안에서 통찰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다음 번에 어떤 판단의 잣대를 가지고 당신의 감정에 대한 질문에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멈춰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지금 반응하는 나의 신체감각은 무엇인가?

이러한 감정들에 집중하기 : 이미지에서 감정으로 여행하기

이미지는 신체감각을 넘어 한 단계 더 나아가 틀을 형성함으로써 우리의 질문을 상징화한다. 감정이 우리의 질문을 구체화시킬 때, 그리고 그것을 이미지의 수준으로 변화시킬 때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 다시 들어가는 것과 우리의 감정에 직면하는 것은 위험하면서도 온전한 희망을 경험하는 것이다. 감정없이 바라보기라는 문제는 제 1세계 주류 문화의 특성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객관성과 통제를 가치 있게 평가하고 주로 회피나 부정을 통해 감정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통찰을 향한 움직임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체화된 삶을 통해, 그리고 신체와 마음을 경직시켜 우리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밀어내는 것을 그만둘 때 드러 나는 감정을 통해, 우리를 통찰로 이끌어간다. 그 누구도 감정을 느끼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현명해 질 수 없다.

♣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는 연습하기

당신이 당신 인생에서 분노나 공포에 사로잡혔던 순간을 회상해보라 그것은 어떠했는가?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는가?

이러한 감정들에 집중하기 : 이미지에서 감정으로 여행하기

당신이 당신 인생에서 분노나 공포에 사로잡혔던 순간을 회상해보라. 그것은 어떠했는가?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는가? 당신은 당신이 느꼈던 감정에 대해 공포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그 감정을 부정했는가? 당신이 그 감정과 거리를 두려고 했을 때 무엇이 발생했는가? 강렬한 긍정적 감정이 생겼을 때를 상기해보라. 무엇이 발생했으며 그 감정이 스쳐갈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당신의 하루 중 10분 동안, 반복되는 일상의 과정으로 당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라.

< 이미지 >

이미지를 정의하기

우리는 상상의 언어로 감정을 형상화하고 그 감정의 소리를 듣는다. 보통의 대화에서 이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종교적 · 문학적 전통은 이 과정에 부각된다.

이러한 예시에서의 이미지들은 통찰을 위한 움직임에 있어서 상상력의 힘이 가진 중요성을 드러낸다. 이미지들은 시각적이거나, 촉각적이거나, 후각적이거나 청각적이거나 혹은 이것들의 조합이 될 수 있다.

이미지의 작용

이미지들은 여기서 마치 언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한 단어를 그와 유사한 의미를 가졌으면서도 그 자신만의 독특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과 비교할 수 있을 때, 그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다. 한 특정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정의들과 유사어의 관계들로 구성된 ‘정황’(context)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에게 경험과의 감정적 연결을 제공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성찰적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이미지는 경험에 내재한 감정 안에 존재하는 삶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본래의 사건에 정서적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또한 이미지는 경험이 주는 감정의 즉각적 강렬함으로부터 우리를 살짝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우리의 주의를 경험의 의미로 향하도록 만든다.

< 통찰 >

숙고하기와 질문하기 : 이미지는 통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미지는 상황의 다양한 측면들이 통전성을 가지도록 통합시키며 동시에 우리가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개방시킨다. 이미지는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 도록 함으로써 우리를 삶에 대한 습관적 해석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이미지는 우리가 숙고할 수 있도록 초청한다. 상황을 포착하고, 강화하며, 변화 시키는 이미지의 능력은 그 이미지들을 강력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미지를 통하여 상황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는데 본래의 서사적 구조 에서 상징적 구조로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핵심을 포착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미지는 통찰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는 본래의 상황을 다르게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관점으로 우리의 상황을 인도한다. 우리는 이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 자신을 새로운 통찰, 새로운 깨달음과 변화, 잠재적인 계시적 사실에 개방되도록 만든다. 통찰은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함으로써 촉발되는 것이다. 통찰이 발생할 때 그러한 과정이 어디에서 발생하던지 간에, 우리는 단어나 상징 속에서 그것을 포착하여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당신의 삶 속에서의 이미지와 통찰

당신이 삶 속에서 경험했던 두 가지 의미 있었던 통찰을 상기해보라. 이것들이 어떻게 당신에게로 왔는가? 어떤 감정이 그것들에 수반되었는가? 당신의 기억에서 무엇이 이러한 통찰을 붙잡고 있는 것인가? 이 통찰들을 기억하는 데 있어 그와 연계된 이미지가 작용하였는가?

< 행동 >

만약 우리가 의지가 있다면, 통찰은 행동을 촉발한다

우리가 배움의 결과로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통찰은 불완전하다. 기독교적 방식 자체는 앎 혹은 이해를 고양시키는 따위의 문자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취한 진리가 성육화되어 우리가 세계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의 과정이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통찰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서 그것을 받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새로운 영토로 옮겨 가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개방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통찰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신중하게 새로운 행동을 계획하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질문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결정해온 것을 행동으로 따를 필요가 있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 우리 삶에서의 행동을 위한 통찰

당신 삶 속에서 통찰에 따라 행동하려 했고, 몇 가지 방식으로 당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려 했던 때를 떠올려보라. 당신은 성공했었는가? 당신은 이러한 변화를 전적으로 당신 스스로 이루었는가? 당신이 삶 속에서 변화를 만들려 할 때 어떤 감정이 일어났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 요약 >

인간에게 있어서 의미에 대한 욕구는 물리적 생존을 위한 욕구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것들을 이해하고 우리 삶의 통전성, 일관성, 중요성을 반영하는 해석적 패턴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고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삶을 향한 의지는 위축되고 만다. 이것은 우리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행위를 좀 더 잘 분별하 도록 만든다. 깨달음을 위한 통찰을 향한 움직임은 우리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신학적 대화를 하도록 만든다.

인간성찰의 한 형태로서의 신학

< 인간성찰에 있어서의 신학의 자리매김 >

통찰을 향한 움직임은 우리가 어떻게 삶 속에서 새로운 이해에 이르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우리가 일어나는 사건들을 자기의식 없이 직관적으로 생각하든 그 상황들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든지 간에 우리는 이것을 통해 새로운 인식과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통찰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의 묵상과 깊은 사고가 우리를 삶의 의미들로 이끄는 것이다. 기독교적 유산은 삶의 경험들과 우리의 성찰을 통합시킬 수 있는 종교적인 지혜를 제공한다. 우리 삶의 경험 속에 드러난 의미를 우리의 기독교적 유산에서 나온 지혜에 사려 깊게 통합시킬 때, 우리는 그것을 신학적 성찰이라고 부를 수 있다.

< 관점과 신학적 성찰 >

통찰은 우리의 삶을 기독교적 유산에 비추어볼 때 발생하는데, 우리가 성찰 가운데 채택하게 되는 관점은 바로 통찰의 질과 신뢰성에 영향을 미친다. 확실성의 관점과 자기 확신의 관점은 성찰을 방해하며, 진부한 통찰과 빈약한 이해로 이끈다. 반면 탐구의 관점은 심층적 성찰을 격려하고, 놀라운 통찰과 변혁적 이해로 이끈다. 확실성의 관점을 가지고 성찰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의미나 놀라움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이러한 방식으로 성찰할 때 어떠한 변화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신학적 성찰은 우리 입안에서 곰팡내 나는 맛을 남기고, 우리의 가슴 속에 무기력감을 남긴다. 우리가 기독교적 유산의 지혜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권한 부여를 경험하고 변혁적 통찰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유산을 탐구적 관점에서 비롯된 통찰로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종교적 유산과 우리 자신의 경험 모두를 이해하는 것이 전 생애에 걸친 신앙여정의 과정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성찰하는 상황의 모든 차원들을 기꺼이 재경험한다. 우리는 우리의 해석적 틀이 개정될 필요가 있다는 가능성에 개방되어 성찰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우리는 성찰과 경험에 의해 변화되어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지혜의 자원인 기독교 전통이라는 풍성한 유산에 의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기독교 전통이 우리의 특정한 경험에 어떤 말을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그것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진리의 적용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 으로 말해주는 해방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탐구적 관점에서 비롯된 성찰은 자신의 경험과 기독교적인 종교 유산 안으로 동시에 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탐구적 관점안에 이 양자, 즉 경험과 기독교적 종교유산의 진정한 대화가 존재한다. 이러한 과정은 행동과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새로운 통찰과 새로운 이해를 향해 열려 있다. 진정한 신학적 성찰은 이러한 탐구적 관점 안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종교적 유산을 성찰의 과정 속으로 가져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 신학적 성찰 >

신학적 성찰은 우리의 종교적 유산, 기독교적 유산을 탐구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성찰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이것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피정을 하는 동안이나 하이킹 중일 때 우리는 초월적 차원에 의해 감동을 받게 되어 자동적으로 우리 경험을 해석하기 위하여 기독교적 전통의 이미지와 개념으로 움직여 간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종교적 유산과 삶의 경험을 성찰로 이끄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훈련은 우리가 사용하는 성찰적 과정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훈련은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을 열 수 있다. 훈련된 성찰은 우리의 유산에 대한 이해와 기독교인으로의 특별한 소명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자연적인 신학적 성찰에서 벗어나 좀 더 신중하고 훈련된 신학적 찰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좀 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이 세가지 방식 속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확장시키고 정교하게 함으로써 신학적 성찰을 위한 틀에 이르게 된다. 이 세 가지 변화는 ① 경험의 개념을 확장 시키기 ② 무엇을 성찰할지를 결정하기 ③ 사려 깊게 종교적 유산과 성찰을 통합 시키기를 포함한다.

< 신학적 성찰을 위하여 경험을 확장시키기 >

경험은 우리가 직접적인 참여자가 되는 사건들과 우리가 수동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사건들을 포함한다. 모든 사건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의 상호 관계를 포함한다. 경험은 한 개인과 타자들, 장소들, 사건들, 물질적 조건들, 그 사람의 정체성과 정황, 세계를 구성하는 문화적 요소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관계의 흐름이다. 경험은 우리가 물에 사는 물고기라 가정한다면 우리가 헤엄치고 있는 강물과 같은 것이다.

행동(살아 있는 이야기)

통찰을 향한 움직임에 있어서 우리는 경험과 살아 있는 이야기의 특정한 부분에 집중함으로써 성찰을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이루는 이야기들 혹은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살아 있는 이야기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행동과 그와 상관관계를 가진 생각, 감정, 전망을 포함한다. 이러한 생각과 감정이 인식의 전면에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이야기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야기를 행동 자원 이라고 부른다. 통찰을 향한 움직임을 위해 바로 이러한 자원을 가지고 시작한다.

전통

우리의 종교적 전통은 경험의 또 다른 측면을 포함한다. 이러한 전통자원은 권위 있는 성서, 교의적 가르침, 교단과 관련된 지도자들의 이야기, 성인들, 교회의 역사, 교회의 공적 문서 등을 포함한다. 신약복음서는 이러한 자원의 일부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 또한 하나의 전설이 된 성 크리스토퍼의 이야기 등도 이러한 자원의 일부이다. 그런데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성서는 이러한 전통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기독교로 회심한 사람에게 있어서 기독교와 그들의 토착 종교의 전통은 신학적 성찰을 위한 권위 있는 자원이 될 수 있다. 다른 종교 전통으로 회심한 기독교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 간의 대화는 여러 개의 권위 있는 종교 전통 자원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21세기의 상황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사람들은 복수의 종교 전통자원 안에서 신학적 성찰을 만들어낼 것이다.

문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경험의 한 부분이 문화이다. 문화는 무척 크고 압도적인 자원이기 때문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쉽게 들여다보기 위하여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좁은 의미로 정의되는 문화, 곧 상징, 규범, 전제, 가치, 과학, 인공물 그리고 인간집단의 철학 ② 인간 집단 내의 구조화된 상호작용의 패턴, 즉 경제적 상호관계 및 정치체계, 교육 체계, 법, 가족을 구성하는 방식 등 사회적 구조 ③ 기독교인들이 이제야 관심을 쏟기 시작하는 물리적 환경, 즉 인구, 쓰레기, 상업폐기물, 핵폐기물, 공기의 청정도, 야생 밀림의 보존과 같은 이슈들이다. 이중 두번째인 사회적 구조들에 근원적으로 집중하면서 시작되는 신학적 성찰의 방식을 사회분석(social analysis)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신학적 성찰의 방식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일상의 삶을 구성하는 사회적 구조를 인식하고 깨닫는 방법과 그것들을 복음의 빛 아래에서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다.

위치

행동, 전통, 문화와 달리 모든 사람들은 어떠한 위치를 점한다. 이것이 경험의 네 번째 측면이다. 위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논쟁 중에 근거로 삼는 태도, 의견, 믿음, 신념을 가리킨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통상 적인 해석이나 우리 문화 속의 어떤 것에 대한 해석, 우리 전통에 대한 해석 등을 정확히 표현하려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성찰하기 위하여 우리의 역할을 깨닫게 되면 위치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위치는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다. 우리의 위치를 드러내고 변화시키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신앙적 성장의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위치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그 반대로 그것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치는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행동, 전통, 문화 그리고 위치는 신학의 네 가지 자원을 가리킨다. 이 네 가지 자원은 경험의 여러 측면들이다. 즉 개인과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의 흐름, 장소, 사건, 물질적 조건, 사람들의 정체성, 상황, 세계를 구성하는 문화적 요소가 그것들이다. 이 네 가지 자원은 성찰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경험 속에 흘러가고 있는 구성 요소들을 분리시키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성찰을 위하여 경험의 흐름은 멈춰져야 한다. 우리는 경험 전체를 성찰할 수 없다. 우리는 경험을 성찰하기 위하여 경험의 다룰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하다. 따라서 경험을 성찰할 때 우리는 하나의 사건 또는 이슈를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경험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사람, 장소, 사건, 그 밖의 요소들 간의 상호 관계라 할 수 있는 강의 흐름으로 표현할 수 있다. 경험은 항상 내적 차원과 외적 차원을 가지며, 항상 주어진 순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을 성찰이 가능하도록 여러 측면으로 나눈다 하더라도, 어떤 특별한 사건의 의미는 오직 우리가 이러한 측면들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자원들과 그 자원들의 상호적 관계에 집중할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 성찰을 위해 경험의 중요한 이슈에 이름 붙이기 >

우리는 선택되어진 사건의 중요한 이슈를 문제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경험의 중심문제, 긴장,이슈, 주제, 무제, 놀라움을 이르는 말이다. 왜 선량한 아이가 고통을 받는가? 나는 어떻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과 내가 선택한 직장에서 성공하고 싶은 바람을 모두 이룰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약물 의존에 빠져 있는 배우자와 함께 살 수 있는가? 왜 유해 폐기물 소각로는 불공평하게도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 주변에 위치하는가? 이 산을 아름답게 만드는 근원은 무엇인가? 문제의 핵심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탐구와 해석을 이끄는 것이다. 성찰을 위해 문제의 핵심이나 사건의 진원지를 확인하는 것을 배우고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정교한 과정이다. 여기서 경험을 조심스럽게 비판 없이 기술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종종 사건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우리는 스스로를 문제의 핵심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는 또한 상황의 감정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신학적 성찰을 위한 경험의 요소를 명확히 드러내길 원한다. 이러한 감정적 에너지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상황에 대한 우리의 전체적 혹은 체화된 반응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한 관대하면서도 비판적이지 않은 자세로 이야기 하는 것은 이러한 에너지가 잘 드러나도록 만든다.

< 문제의 핵심을 기독교 유산의 지혜와 대화시키기 >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 우리는 경험을 기독교 유산으로 가져오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힘이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성찰의 방향을 제시한다. 우리는 신앙의 선진들이 가졌던 지혜를 통해 우리의 통찰을 발전시키고 검증하길 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 행동, 사건에 대한 전망과 종교적 전통의 믿음, 행동, 선망이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원한다. 성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 민간전승, 역사적 사건들 등 유산으로부터 발생한 모든 것들은 새롭게 해석될 수 있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좀 더 풍성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는 사건에 대한 이전의 해석들을 무분별하게 강화하며 우리의 경험을 전통에 억지도 대입하려고 하는 유혹은 언제나 존재한다.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두려움, 자존심, 소심함과 같은 것들은 한쪽으로 제쳐두고, 새로운 이해를 위해 대화의 주된 문제를 부각시켜야 한다. 진정한 대화는 놀라움과 기쁨과 냉정함으로 가득한 상호적 움직임이다. 이것이 우리가 문제의 핵심 혹은 가장 에너지가 충만한 사건의 초점을 기독교 유산의 지혜와 대화시킬 때 목표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과 종교적 유산의 지혜 사이에 대화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대해 기술적 이름을 붙인 것이 상관관계(correlation)이다. 두 개를 함께 접목시키는 것과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을 상관관계라고 생각 하면 된다.

< 성찰의 열매 거두기 >

경험과 기독교 유산 사이의 대화인 신학적 성찰은 다른 모든 대화들과 같이 결말이 있다. 일과 가족이 주는 압박과 식욕과 수면욕 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과 같다. 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대화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온 진리를 오랫동안 생생하게 기억하기도 한다. 어느 때는 우리가 저널이나 일기장에 새로운 통찰을 쓸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대화의 결과로서 새로운 방식 속에 행동하면서 새로운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진정한 통찰은 우리의 두려움을 잠재운다. 진정한 통찰은 우리를 타인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우리 자신을 비난하도록 만드는 데 사용해왔던 판단들을 해체시켜 버린다. 진정한 통찰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확하게 인지하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포함한 실재를 좀 더 정직하게 보도록 만든다. 우리가 하나님의 힘과 사랑을 좀 더 명확하게 보고 느낀다면 타인과 함께 느끼는 공감의 느낌이 발현될 것이다.

< 성찰을 위한 틀 >

경험의 몇 가지 측면에 집중하기

문제의 핵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경험을 기술하기

기독교 유산의 지혜와 대화하면서 문제의 핵심을 탐색하기

이러한 대화 속에서 삶의 새로운 진실과 의미를 드러내기

< 신학적 성찰을 경험하기 >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체화할 수 있는 삶의 사건이 당신의 마음 속에 떠오를 때까지 다음의 질문에 머무르라.

중심감정을 발견해보라.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를 때까지 그러한 감정들이 당신의 몸에 스며들게 하고 그것이 서서히 숨 쉬게 하라. 당신에게 떠오른 이미지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 는가? 당신에게 떠오른 이미지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장소로 당신에게 어디를 제안하고 있는가? 다시 당신의 이미지를 가지고 고요하게 앉아 있으라. 성서에 나오는 어떤 이야기, 본문, 주제가 떠오르는가? 하나의 성경구절이 떠올랐다면 그것을 읽으라. 이러한 전통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미지로 두 질문에 대해 대답한 것과 전통으로 두 질문에 대답한 것을 비교하라. 이미지로부터 나온 대답들과 전통으로부터 나온 대답들 사이의 대화는 당신을 어떤 식으로 놀라게 하고 각성시키는가?

< 통찰을 향한 움직임으로부터 신학적 성찰까지를 잇기 >

행동 자원의 살아 있는 이야기들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질문은 기독교적 주제와 제자도에 초점을 맞춘다. 이야기에서 비롯된 핵심 감정이나 이미지를 탐색하기 위한 질문들은 이러한 성찰을 신학적으로 만든다. 성찰의 과정은 경험과 전통을 잇는 명확한 가교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틀이 신학적 성찰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만든다.

개인의 신학적 성찰

< 자신의 방식으로 신학적 성찰 실천하기 >

정직성

정직성(honesty)은 신학적 성찰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정직성은 필수적인데, 그것은 신학적 성찰에서 환상이나 자기기만, 또는 인간이 주저할 만한 어떤 것도 없이 우리의 경험을 들여다보는 첫 번째 걸음이기 때문 이다. 우리의 경험을 감지하거나 기술하도록 배우는 일은 힘든 일이다. 우리의 경험을 마지 못해서 감지하는 것은 원죄로부터 내려오는 유산의 일부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결점이어서 우리의 존재에 관해 불안과 두려움을 준다. 만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술한다면, 정직하게 기술하라.

신학적 성찰은 우리를 초청해서 강화의 순례를 감당할 것을 요청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과 모호함을 극복하고 이 여행을 감당한다면, 또한 경험을 기술하고 다시 들어갈 수 있기만 한다면, 삶은 보석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틀림없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삶이기에, 이것이야말로 아직 던져보지 못한 질문을 찾게 하며, 알고 있으나 깨닫지는 못하고 있는 답변들에 대한 단서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인간의 마음에서 올라오게 되며, 의미 추구의 본능에 의해 축적된다. 이것들이 신학적 성찰의 근본을 이룬다.

시간

신학적 성찰을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한 기술적인 실행이 우리의 존재에 스며들 때가지는 배우고 정련하는 과정을 겪는다. 머리와 가슴의 훈련된 성찰 습관은 존재를 꿰뚫어서 우리 정체성과 행동의 일부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의 기술은 그룹이 함께 긴 시간 속에 훈련할 때, 좀 더 잘 배우고 익힐 수 있다. 만일 이런 그룹이 불가능하다면, 각 개인들은 이 책의 자료들을 사용해서 신학적 성찰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의 헌신을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가 빠른 답변과 급격한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사는 문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법을 배우고 신앙생활에 성찰을 녹여 넣기란, 춤이나 악기를 배우는 것처럼 시간이 걸린다. 이 과정이 쉬워 보여도, 처음엔 서툴고 또한 좌절하나, 후에 흥미진진해 진다. 그리고서야 편안해질 것이다. 마치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든든한 신앙적 자원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공부, 기도, 대인관계 기술들

신학적 성찰은 공부와 기도, 그리고 대인관계 기술들에 기반을 둔다. 우리가 신학적 성찰을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일부로 삼았을 때,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적 유산에 대해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 성서, 교회사나 예전 속 종교적 전통에 대한 공부 없이, 신학적 성찰을 한다면, 개인이나 그룹의 지식적 수준을 넘어서 깊어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신학적 성찰은 개인적 혹은 공동체의 기도에 그 뿌리를 둔다. 신학적 성찰은 기본적인 대인관계 기술들을 전제로 한다. 성찰할 수 있는 존재의 일부분은 “나”라고 말하게 한다. 따라서 진정한 신학적 성찰은 우리를 하나님과 기독교 전통에 대해 개별화 되고 사적인 관계로 이끌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을 피하기 위해 종교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신학적 성찰은 일상의 삶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의 유일성과 한계들 그리고 풍성함과 함께 말이다. 오직 여기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

< 개인적 성찰을 위한 지침 >

신학적 성찰을 향한 우리의 태도

신학적 성찰은 다양한 차원에서 울 안에서 작용하는 과정이다. 종종 통찰과 감각적 변화가 즉각적인 지각 아래의 깊은 차원에서 벌어진다. “빠른 교정”(quick fix)을 기대하거나 어떤 상황에나 해당하는 “즉각적인 해결”(immediate solution)을 바라는 것은 성찰적 과정을 벗어나게 해서, 더 깊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성장의 가능성을 잘라내어 버린다.

성찰에 형과 틀 만들기

각자가 사용하는 신학적 성찰의 특정한 방식에 관계없이, 우리는 성찰 중 일어날 수 있는 감정, 이미지, 통찰, 숙고들에 대해서 형과 틀을 만들어야 한다. 외재화(exteriorizing)는 성찰의 열매들을 기억하고 흡수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것은 우리의 해석적 틀에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경험의 의미들을 만들어 가는 데 신뢰할 만한 전략으로 발전될 수 있다.

성찰을 위해서 문제의 핵심 파악하기

무비판적으로 경험을 이야기하는 연습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이야기하고 확실히 규명하는 첫걸음이 된다. 성찰 중 다가오는 사건을 묘사해서 기술해보면 그 상황 속에서 우리의 판단을 알아차리게 된다.

성찰의 리듬

때로 신학적 성찰을 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서서 망설 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도 문제이 핵심 중에 잡아낸 이미지가 너무도 강력 해서 더 기도하도록 이끌리거나, 우리가 이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밀려 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성찰 모으기

개인의 신학적 성찰에서 일어나는 통찰과 의향들을 영적인 친구들, 안내자 혹은 신앙 그룹과 가능한 방법으로 적절하게 나누는 것은 무척 좋은 일이다.

근본적 지침

우리는 탐구하는 자세로 스스로 경험하여서 신학적 성찰로 다가가기를 원한다. 신학적 성찰을 하는 데 있어서 목적하는 바는 경험과 기독교적 전통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다. 탐구의 자세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놀라운 선물들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통찰을 행하기 >

기도

통찰은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 통찰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고 해도 말이다. 기독교 전통은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 감사의 기도를 먼저 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하셨음을 상기시킨다.

계획

어떻게 통찰을 실행할지를 계획하는데 한가지 단순한 방법은 통찰의 결과로 행할 수 있는 가능한 행동을 모두 적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각각의 행동들을 검증해 본다. 그 행동이 구체적인가? 관찰 가능한가? 현실적인가? 만일 필요하다면 이러한 질문을 묻고 난 뒤, 행동의 목록을 수정한다.

사람들

우리의 삶은 모두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수십 가지 요청으로 가득 차 있다. 만일 우리가 신학적 성찰로부터 얻은 통찰에 근거해서 행동하기로 결심했다면, 시험 삼아 만든 계획에 대한 점검 능력을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한 바로 그 지점이다.

< 개인의 신학적 성찰 >

신학적 성찰에는 다음에 나오는 아홉 과정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신학적 성찰의 기본적 틀에서 발전된 것이다. 이는 경험 속 몇 가지 측면에 집중하고 문제의 핵심을 규명하며, 기독교 전통의 지혜를 통해서 그 문제들을 다뤄주며 일상의 삶에 있어서 새로운 의미와 진실들을 적용해 나가는 것이다.

삶의 상황으로 시작하기

전통으로 시작하기 1

이 성찰은 기독교 전통의 일부분들과 함께 행해질 수 있다. 예컨대, 성자들의 이야기, 교회사의 사건들이 자료가 된다.

전통으로 시작하기 2

성서의 이야기로 그 이야기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경건 서적을 읽으면서 묵상과 성찰을 하는 것은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문화적 텍스트로 시작하기 1

슬로건, 광고, 소설, 수필, 위대한 그림들, 사회적 기관들, 사회적 갈등, 삼림 등이나 혹은 문화적 소재들은 성찰을 하는 데 있어서 출발점을 제공한다.

문화적 텍스트로 시작하기 2

문화적 텍스트들로부터 시작된 성찰은 문화적 정황으로부터 전통과 우리의 경험으로 흘러 들어간다.

주제로 시작하기

때로 어떤 주제가 우리의 삶 속에서 떠올라 성찰로 초대하기도 한다. 교회력에 따른 특정한 절기, 중요한 삶의 전환점, 그리고 다른 사건들은 우리의 주의를 탄생, 중생, 슬픔, 창조성, 관계 등 특정한 주제에 집중하게 한다.

개인적 위치로 시작하기

위치라는 말은 우리가 기꺼이 방어하고자 하는 확신들이다. 신앙 여정의 어떤 부분들은 우리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하도록 한다.

종교적 경험으로 시작하기

종교적 경험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자연, 위대한 예술 이나 음악, 책, 개인적 투쟁 그리고 더 많은 상호교류들이 종교적 경험을 깨운다.

다른 사람의 신학 서적 읽기

신학, 영성, 그리고 사역에 관한 책과 글들은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이의 신학 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입장과 관련해서 저자의 위치와 입장을 따라 가는 것이다.

♣ 신학 서적을 비판적으로 읽기

신학서적을 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일관성(coherence)과 적절성(adequacy)의 개념을 포함한다. 일관성은 본문의 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적절성은 저자가 어떻게 자기의 위치를 표현했는가에 관해서 언급하다.

♣ 신학서적과 창의적으로 대화하기

창의적인 대화를 위해서 다음의 질문이 필요하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계획에 적합한 통찰들, 적용점들, 혹은 접근방식들이 무엇인가? 이러한 통찰 이나 적용점들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신학적 성찰 그룹 인도

< 사역자원으로서 신학적 성찰 >

신학적 성찰은 삶을 변화시킨다. 신학적 성찰 훈련들은 우리로 섬광과 같은 신학적 통찰을 얻을 수 있게도 하지만 그것은 점차 경험을 지각하고 해석하는 지속적 틀로 움직여간다. 그것은 우리가 과거의 경험을 신앙의 빛 아래에서 더욱 적절히 재해석하려는 것을 그치고, 일상의 삶을 더욱 신앙적으로 살아가게끔 초대하는 것이다. 신학적 성찰은 우리를 더디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만성적 수치심과 불안 너머로, 은혜의 풍토를 조성해서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지도급 위치에 있는 사역자들은 신학적 성찰을 사용하는 방법에 관하여 배워야 한다는 특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전문적인 팀을 이끌어가고 봉사자들을 조직하고 지원할 수 있다. 또는 사업, 농업, 정부, 교육, 복지 그리고 예술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영적 여정을 함께 하기도 한다.

< 신학적 성찰을 인도하기 전 준비사항들 >

신학적 성찰 : 종교적 성숙을 향한 부름

다른 사람의 신학적 성찰을 인도하는 일은 결코 가볍게 다뤄져서는 안된다. 사람들을 신앙의 여정의 부분으로서 신학적 성찰을 하도록 초대한다는 것은, 그들과 자신의 신앙 전통과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라서 타인에게 이 여정을 시작하도록 요청하기에 앞서, 우리는 자신들의 동기와 헌신을 명백하게 살펴야 한다. 그룹을 인도하는 데 있어 복잡한 기대와 동기들을 가지고 신학적 성찰로 이끄는 일은 실로 힘겨운 과업일 수 있다. 가끔씩 참여하는 사람들이 “옳은(right) 결과를 이루는 수행을 했는가에 대한 선입관을 갖기도 한다. 진정한 성찰을 하는 데 지름길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기독교 전통이 자동적으로 자신들의 입장, 즉 하나님에 관해서나 사회에서의 여성의 직업, 지위, 그 밖의 것들을 확고하게 붙들어 주지 않으면 몹시도 불편해 한다. 그들은 이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 단 하나의 적절한 기독교적 답변이란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 가면서, 깊은 혼란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신학적 성찰로 부르는 상황적 요인들

사람들을 신학적 성찰을 향한 여정으로 초대할 때, 촉진자들(facilitator)은 반드시 헌신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앞의 장에서 정직, 시간, 공부, 기도, 대인관계 기술들을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밝혔었다. 신학적 성찰의 촉진자들은 자기 자신과 신학적 성찰을 촉진시키는 참여자들과 관련하여 좀 더 정확하고 솔직한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 촉진자는 그 그룹이 공부, 기도, 그리고 대인관계 기술을 발달시켜 신학적 성찰의 질을 높이는 데 특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공중 기도와 그룹원들을 지지하는 것에 있어서 모델이 되고, 신학적 성찰의 에너지 자원이자 토대를 제공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촉진자가 효과적인 상호작용 기술을 반영하는 규범들을 세우고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 신학적 성찰을 사용하는 지침들 >

사람(People)

사람들은 신학적 성찰을 한다. 만일 우리가 이 활동 속에서 그룹을 인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며, 그들에 대해서 무엇을 또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그들은 추상적이고 상상력을 사용하는 사고를 편안하게 사용하는가? 대인 관계적 기술들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함께 신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들의 미묘한 차이까지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목적(Purpose)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 목적을 분명하고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종종 어렵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목적이 명확할수록, 우리는 적절한 성찰적 설계를 선택할 수 있게 되고, 사람들을 인도하는 과정 중에 다림줄처럼 도움이 된다. 어떤 신학적 성찰도 우리의 목표는 맥락을 조성하는 것이다.

변수들(Parameters)

변수들은 특정 그룹이 신학적 성찰을 하는 데 있어서 탄력성 있는 경계나 제한점을 말한다. 멤버들은 서로를 알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 낯선가? 대규모 그룹이 되어야 하는가 혹은 소그룹이어야 하는가? 사람들의 바깥 삶에서 그룹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이렇게 주어진 질문들에 답변하는 일은 어떤 종류의 성찰적 설계가 적절한지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제시한다.

임재(Presence)

신학적 성찰은 촉진자의 에너지와 집중된 임재를 요청한다. 만일 우리가 아주 큰 그룹과 작업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작업표를 나눠주거나 개인 일지를 통하여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도록 하거나 혹은 서로가 친밀하게 머물면서 해야만 하는 일 없이 성찰적 과정을 이끌 수 있다.

과정(Process)

사람들, 목적, 변수들 그리고 임재를 일단 고려했다면, 우리는 신학적 성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특정한 과정이나 설계를 고르거나 발전시킬 준비가 되었다. 그 설계는 우리가 함께 작업해 나갈 사람들에게 반드시 적절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제한점들, 즉 그룹 크기, 시간 제한과 같은 것들도 고려해야 한다.

< 더 큰 상황을 기억하기 >

그룹과 신학적 성찰을 하는 데 사용되는 설계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룹을 촉진시키고 이끌어갈 기술에 대한 자원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신학적 성찰은 대부분 그룹에서 어떻게 함께 작업하는지, 함께 명확하게 말하는지, 서로를 어떻게 지지하며 도전하는지를 가장 자유스럽게 배워가도록 하는 과정이다.

신학적 성찰을 촉진하는 것은 숙련된 실천(artful practice)이다. 우리는 성찰을 위해 훌륭한 설계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설계가 실제로 신학적 성찰이 아닐 수 있다. 신학적 성찰에서 촉진자가 해야 할 주된 업무는 진정 그룹을 사려깊게 올바른 신학적 성찰로 안내하는 것이다.

신학적 성찰을 위한 설계 만들기

< 경험에 집중하거나 자원으로부터 자료를 규명하고 선택하기 >

구별되지 않은 경험은 너무 광범위해서 보람 있는 성찰의 주제로 삼기가 어렵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경험들을 주로 자원(sources)으로 알려진 어떤 경험의 측면들(aspects)로 나누어 놓는다. 자원은 우리가 신학적 성찰에 편입시키기를 원하는 관련 있는 데이터를 제공한다. 신학적 성찰을 위한 설계는 자원들에서 취한 자료에 집중하면서 시작할 수 있다. 신학적 성찰을 위한 목적, 변수들 그리고 사람들의 고려를 따지다 보면 시작할 수 있는 적절한 지점을 만나게 된다. 설계를 만드는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경험으로 향하도록 만들기 위해 어떠한 질문들을 구성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 문제의 핵심을 규명하기 또는 성찰의 핵심을 규명하기 >

일단 어떤 자원을 사용할지, 어떻게 데이터를 규정하고 선택할지, 그리고 어떤 자원을 가지고 성찰을 시작할지를 결정하고 나면, 다음 단계는 각 개인과 그룹이 문제의 핵심을 어떻게 규명하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없지만, 더 풍성한 성찰 과정에 도움이 되도록 말할 수 있는 지침들은 존재한다. 성찰을 위해서 이미 겪은 핵심을 언급하려면 그 경험의 정서적 에너지들을 붙들어 두어야만 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는 경험들을 성찰 하고 있는 것이다.

< 대화 일으키기 혹은 자원으로부터의 자료와 상관관계 짓기 >

상관관계를 정의하기

상관관계(correlation)란 경험을 기독교 전통의 지혜와 대화로 이끌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경험과 전통 사이에 주고받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으로 자원으로 부터의 자료를 함께 직조하지 않으면, 우리의 성찰은 지루하고 현학적인 것이 될 것이다. 경험과 전통, 양 방향으로 경이로움과 통찰들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서는 마술책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 가에 대한 이야기 모음이고, 그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 기독교인과 이방인들을 다루는 이야기다. 사실 성서 그 자체로도 신학적 성찰의 결과물이다. 교인들은 성서 안에 자신들의 경험적 의미를 밝혀냈던 것이다.

상관관계를 위한 전략들

두 개 이상의 자원으로부터 자료를 연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각각의 자원으로부터 취한 주제를 탐색하는 질문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을 대조하고, 발전시키며 광범위하게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서 대화는 진전된다. 여기에는 행위자원, 전통자원, 문화자원, 행동자원이 있다. 성찰은 이 모든 자원들로부터 시작된 질문들을 비교하고, 대조하고, 발전시키며 그리고 광범위 하게 반응하는 방식에 의해 계속된다. 여기에 소명과 부르심의 주제에 대해서 일반적인 질문들과의 상관관계를 위한 주제 구성의 두 번째 예가 있다. 우선 행위와 전통의 자원에서 꺼낸 자료들이 규명되어야 하고, 소명과 부르심의 주제와 관련된 질문들을 선택해서 사용해야 한다.

< 새로운 진리와 생의 의미 규명하기 >

신학적 성찰을 위한 설계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이 단계의 중심 과제는 참여자로 그들이 성찰 과정에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환적인 순서로서 그룹이 상관관계라는 탐색적인 대화로부터 나와서 판단하고 명료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신학적 성찰은 우리 신앙을 만들어 가는 데 다양한 수준에서 끝나기 때문에 우리는 통찰과 이해가 지속해서 발전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더 성찰된 것을 가지고 돌아와 그룹의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그것을 체화하는 데 좋은 방법이다. 촉진자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신학적 성찰하기는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무엇이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심오하거나 지각을 움직이는 것일 필요는 없다. 질문, 기도문, 이미지 혹은 변화된 위치가 그렇게 할 것이다. 때로는 성찰로부터 취하는 것들이 명백한 변화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 설계를 빌려오거나 만들기 >

신학적 성찰을 위해 과정을 조성하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것보다 쉽다. 특정한 과정이 끝난 뒤 정기적으로 회고하면 우리가 자기 의식화의 방법론을 발달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신학적 성찰을 위해 가용한 자원들을 파악하는 것도 방법론적 레파토리를 풍성하게 한다. 적어도 프로그램을 많이 연구하면 함축된 신학적 성찰에 개입할 수 있다. 문화 자원의 측면에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신학적 성찰을 하게 될 때 사회적 분석에 관한 중요한 문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결론

기독교인은 신학적 성찰로 부름 받았다. 우리의 삶을 기독교 전통과 대화하도록 가져가는 기술적인 실행은 우리뿐 아니라 전통을 위해서도 훌륭한 통찰을 자라게 한다. 우리는 탐구적인 자세로 우리의 삶과 기독교 유산들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우리의 경험에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면서 종교적 전통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고 신뢰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은 삶의 경험과 종교 유산이 가져오는 진솔한 대화를 통한 통찰들을 환영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확실성(certitude)과 자기 확신(self-assurance)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요구한다. 이는 우리가 그토록 강하게 붙들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손해를 끼쳤던 신념과 신조를 새롭게 개정한다. 무엇보다도 신학적 성찰은 우리를 진리, 의미와 함께 묶어두어, 어느 개인이나 세대가 이해했던 것보다 더 깊어지게 한다. 이를 통해서 전통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복음을 세상과 나눌 수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전통은 죽게 될 것이고,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신학적 성찰로 부름을 받는 것은 이질적인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삶에 있어서 진솔하고 풍부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에 반응하는 것이다. 섬세하고 자각적인 신학적 성찰은 의미를 찾는 일상적인 방법을 세워나간다. 이 책은 신학적 성찰이 통찰을 향한 움직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신학적 성찰을 위한 틀을 찾아서 기독교인들이 다양한 자원들을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신학적 성찰의 과정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그러한 성찰이 경험과 전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 의해 사용될 수 있게 했다. 결국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전통 두 가지 모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통합적 접근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기독교 유산의 능력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귀한 열쇠가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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