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레니즘이 유대교에 미친 영향

- 참고도서 : 마틴헹엘 저/임진수 역 신구약 중간사

- 참고도서 : D.S.RUSSELL Between the Testaments

- 참고도서 : 존 브라이크 저/박문제 역 이스라엘 역사

- 참고도서 : 가톨릭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성서

 

< 목차 >

1.  문제의 제기

2.  헬레니즘이 유대교에 끼친 영향

1)     알렉산더의 원정과 팔레스타인(B.C. 333/331)

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통치

3)     셀류코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

4)     마카베오 혁명과 묵시문학, 수전절의 유래

5)     하스몬 왕조 시대 종파의 고착화와 유대교 사상의 변천

6)     유대교를 제외한 철학, 종교, 문학, 언어 문제로서의 헬라화

3.   기독교의 산파가 유대교 

 

 

1.   문제의 제기   

말라기의 마지막 경고를 보면 "시내산 언약을 기억하라(4:4)"라고 한다. 이것을 다시표현하면 율법을 지키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서 율법을 내려 주셨으며 또 말라기 이후 400여년의 기간 동안에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 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율법공동체인 유대교를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침묵기라고 하는 헬레니즘 시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신 기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갈라  디아서 4 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라고 시작하는데 여기서 는 헬라어 "카이로스"와 상대되는 개념인 "크로노스" 로 일정한 기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것을 직역하면 "시간의 충만함이 와서"로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 말라기 이후 침묵하신 400여년간 역사를 주관하시어 메시아를 보내셨다. 이처럼 성경적 증거 ( 7:14 )와 역사의 전개(헬라시대와 로마시대)를 거쳐서 하나님께서는 세계 언어로서 헬라어를 통용시키고 제국을 활용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방에 전파하신다.

헬레니즘 시대의 일정기간 동안 유대인들에 관한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구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늦게 쓴 부분들과 정경에 속하지 않는 유대인 저작들도 직접적 역사적 지식은 대단히 부족하다[1]. 이 시기의 역사 연구는 마카베오서 같은 외경에 상당 부분 의존해왔다. 여기서는 유대교의 태동과 형성과정과 관련하여 알렉산더의 등장과 이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류코스 왕조 시대, 로마의 등장과 발전, 마카베오 혁명과 하스몬 왕조 시대 등 역사의 흐름과 함께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헬레니즘이 유대교에 끼친 영향을 위주로 분석하여  유대교가 어떠한 형태로 완성되었으며 유대교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돌아선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그러했는가. 그것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또 이것이 기독교의 탄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추적해보도록 한다.

2.    헬레니즘이 유대교에 끼친 영향

유대인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헬라화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하였는데 헬라는 새로운 그리스에 의해 확장  되었으며, 점차 야만인의 세계를 헬라화하였다. 그리고 평화의 감시자는 그들에게 해당하는 지역을 할당해 주었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헬라화의 문화 프로그램은 로마 시대에서야 비로소 인정받는 보편적인 유산이 된다.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상호간의 융합이라는 주제는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하며 모순적인 현상들을 말한다. 따라서 우선은 그 현상을 통해서 논쟁이 되는 다양한 개념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것들과 연결된 헬레니즘헬라화의 현상들을 보다 세밀하게 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2].

유대인은 포로기 시대를 거치면서 그 이전의 민족국가와 제도 등은 이미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여야 했고 재건공동체로서 유대감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그들의 정신적 유대감인 율법을 도구로 하여 율법공동체로서의 유대교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 공동체가 마침내 유대교라는 율법공동체로  일관성 있게 나아가게 된 기초를 놓은 것은 에스라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B.C. 4세기와 3세기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헬레니즘은 필연적으로 유대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마침내 이에 대한 저항의 결과로 나타난 마카베오 혁명시기와 하스몬 왕조 시기에  유대교라고 특징 지울 수 있는 일련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  알렉산더의 원정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은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헬라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 왔다. 이것이 B.C. 5세기, 4세기에 들어와 더욱 빈번해 졌다. 간접적이긴 하나 유대인들이 불가피하게 헬라 정신과 접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헬라 정신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3]

전세계를 통일하여 하나의 언어, 하나의 관습과 헬라적 도시의 건설 등 범헬라적인 이상을 구현하려는 포부를 가졌던 알렉산더는 B.C.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패퇴시키고 이집트를 정복한다. 이 과정에서 유다와 사마리아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내륙지방은 알렉산더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알렉산더는 B.C.323년 바벨론에서 죽었지만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오리엔트는 급속한 헬레니즘이 시작되었다[4].  

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통치시대와 알렉산드리아 문학  

알렉산더 사후 그의 왕국 중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동쪽 지역은 시리아 일대의 셀류코스 왕조와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분할된다. 알렉산드리아를 거점으로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팔레스타인을 거의 한 세기 동안 통치한다. 이들은 유다의 내정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온순한 신민으로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살았을 것이다. 이집트의 유대인들은 이내 헬라어를 그들의 모국어로 삼았다. 헬라제국 시대 이전부터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이집트, 바벨론 각 지역에 흩어져 있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알렉산더와 그 후계자에 의해 가속화되어서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숫자가 훨씬 많게 되었다[5]. 히브리어는 적어도 B.C. 2세기 말까지 계속 사용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디아스포라 사회에서는 명맥이 끊어져 갔을 것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이 경제적인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면서  여러 문화가 혼합되고 있었다. 헬레니즘의 지배조직이 지방까지 미쳤으며 그리스의 상인과 관료들은 팔레스타인의 작은 농가에까지 이르렀다. 사마리아 지역은 용병들이 이주함에  따라 헬라화의 영향으로 점차 디오니소스에게 제사를 드리게 되며, 특히 필라델피아 유모가 헬레니즘화됨으로써 셈족 여신에 대한 숭배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 보면 팔레스타인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다양성으로 인해 쉽게 통일되지 못했다. 토착민의 귀족정치는 한편으로 새로운 지배자들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귀족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위치를 보다 개선해 나갔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경제적 도약에 참여하였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헬레니즘적인 지도층의 삶의 방식에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6].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시대에 이르러 문학의 중심지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유대인들은 일찍부터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헬라시대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프톨레미 우스 2(B.C. 285-247)는 먼저 모세오경의 번역부터 시작해서 이후 구약의 다른 부분으로 확대되었다. 이 번역본이 70인역(Septuagint)이다. 70인역이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초대교회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경이 헬라어로 존재하게 되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의사 소통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놓고 또한 유대인들의 정신에  헬라 사상이 더욱 강력한 영향을 미칠 길도 마련한 것이었다. 물론 후대에 이것은 기독교의 전파를 촉진시켰다. 이 시기에 헬레니즘이 유대인 사상가들의 사고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미쳤던 것인데 헬레니즘 문화에 살고 있으면서 그 문화를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러한 것에 휩쓸려 종교적 원칙을 타협하지 않았지만, 거기에 휩쓸려 도덕적으로 몹시 타락한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실제로 헬라 문화를 부러워 하고 거기에 몰두 하여 자기들의 고유한 율법과 관습을 거북하게 여긴 사람들이 많았다.

70인역과 더불어 우리가 주목할만한 또 한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바울과 동시대 사람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이다. 그는 히브리어 성경과 문학 그리고 헬라문학에도 정통한  학자였는데 성서신학과 그리스 철학의 진리를 일치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여러 해석을 자유롭게 시도했는데 당시에도 정통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의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정립 시도는 그 이후 나타날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7].

3)  셀류코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남북왕조간의 각축은 안티오쿠스 3세가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고 아시아로부터 몰아냈을 때(B.C.198) 최종적으로 결판이 났다. 이후부터 셀류코스 제국은 팔레스타인을 병합하였다. 안티오쿠스 4(이후 에피파네스’) 시대에 유대교의 헬라주의자  들은 헬라화에 입각한 개혁을 현실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비유대교적이며 헬라화된 주변세계와 보다 밀접한 경제, 정치, 문화적인 접촉을 가지면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들의 상황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에피파네스의 여러가지 종교탄압적인 정책들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격류에 휘말리게  된다. 우선 그는 로마로부터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 자기 백성들을 통일 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절감했고, 한편 재정난으로 인하여 새로운 재원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탐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의 재물에도 눈독을 들이게 되었고 이것은 유대교 금지령의 한 원인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정치적 통일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도시들에 대해 헬라의 도시국가와 같은 특권을 허용하고 헬라적인 모든 요소를 장려하였다. 이 정책에는 제우스 신 및 헬라의 여러 신들에 대한 숭배와  함께 자기 자신을 제우스 신의 가시적인 화신으로 신격화하여 숭배한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매우 신중하게 추진되기는 했지만 조상의 신앙에 충실했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킬 것이 분명한 그런 정책들이었다.  

이 시기의 유대인들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겼는데 대 제사장직을 에워싸고 암투가 벌어졌으니, 야손은 뇌물로 대제사장직에 오른 뒤 적극적인 헬레니즘화 정책을 추진하여 예루살렘에 헬라식 운동경기장을 건립하고 젊은이들을 거기에 등록하였다. 더 많은 뇌물로 야손을 밀어내고 대제사장직에 오른 메넬라우스는 에피파네스의 성전약탈을 묵인하고 여호와를 제우스와 동일시하여 예배하는 한편 왕을 제우스의 현현으로 숭배하는  제의로 재편하려고 하였다. 독실한 유대인이 충격과 공포로 반항하자 에피파네스는 사실상 유대교의 모든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정기적인 제사는 물론이고 안식일과 전통적인 절기를 금지하고 율법 사본들이 파기되었으며 어린이들의 할례도 금지되었다.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했고 이중 어느 하나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졌다. 이교  제단들이 세워졌고 그 제단들에서 부정한 짐승들이 제물로 바쳐졌다[8]. 결국 B.C.167 12월에 올림푸스 제우스신의 제의가 예루살렘 성전에 도입되었다. 사마리아의 성전도 마찬가지로 제우스 크세니우스에게 봉헌되었다(마카베오 261-31). 헬레니즘화한 유대인들은 왕의 칙령을 환영하였고, 한편 그 밖의 사람들은 자진해서거나 무서워서 그들의 뒤를 따르며 조상의 신앙을 저버렸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추종을 거부하고 율법을 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선택하였다.(마카베오 11:43-62f)

마카베오 2 9장에는 이 가증한 왕, 에피파네스가 하나님께 어떠한 형벌을 받아 고통속에서 죽어 가는지가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는 내장이 썩고 몸의 뼈마디가 모두 어긋난  가운데 구더기가 눈에서 기어 나오는 상태로 아주 서서히 죽어가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요한, 야고보 등을 죽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헤롯 아그립바가 벌레 먹혀 죽은 것과 비견될 수 있다. 가증한 자들을 최악의 형벌로 벌레를 사용해 죽이시는  절대 권능자의 진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사도행전 12:23, NKRV)

 


[1]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파주: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출판그룹, 2016), 559

[2] 마틴 헹엘, 「신구약 중간사」 임진수 옮김 (파주: 주 살림출판사, 2006), 92

[3]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559

[4]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569~71

[5] D.S RUSSEL, BETWEEN THE TESTMENT(USA : SCM Press Ltd., 1965), 14-5

[6] 마틴 헹엘, 신구약 중간사, 임진수 역, 92

[7] D.S RUSSEL, BETWEEN THE TESTMENT, 15-18 

[8]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580~84

 

4)  마카베오 혁명과 묵시문학, 수전절의 유래

왕의 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의 핵은 하시딤(율법에 충실한 자들)으로 알려진 집단이었는데, 아마 이들로부터 후에 바리새파와 엣세네파가 나온 것 같다. 박해를 통해 유대인들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적지 않은 수였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가공할 박해였다. 유대인들이 무장 봉기로 치닫게 된 것은 불가피했다. 바야흐로 마카베오 혁명의 불길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치솟았다.

혁명은 시골 산마을에 있는 모데인이라는 마을에 악명 높은 포고령을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 폭발하였다. 맛다디아라는 제사장 가계 사람이 왕의 관리가 포고령을 강제로 집행하기 위해 모데인에 당도해서 이교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자리에서 왕명을 따르겠다고 하는 자를 죽여버리고 관리도 죽여버렸다. 그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수백명의 용사들이 합세하여 에피파네스의 주력부대가 빠진 틈을 타서 대승을 거두고 성전이 모독된 달로부터 꼭 3년이 되는 B.C.164 12월에 축제의 큰 기쁨 속에 성전은 다시 봉헌되었다. 이렇게 구약시대 말기에 종교적 독립을 위한 유대인들의 투쟁은 성공적인 출발을 보인 셈이었다. 그것은 영광의 순간들만이 아니라 숱한 좌절과 실망으로 점철된 기나긴 투쟁이었지만, 결국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치권을 가져다 주었고 이후 79년간 하스몬 왕조가 통치한다.

구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늦게 편찬된 다니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무서운 위급사태에 대응하여 말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하시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자기 힘이 닿는 대로 모든 수단을 다해서 왕의 정책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 속에서 그들의 율법과 유대인 됨, 그들의 신앙을 고수하면서 저항하도록 용기를 북돋우어 주려고 했다. 이 선견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다 예정된  대로 진행되며 어김이 없다는 것, 그리고 현재의 고통은 하나님의 목적이 개가를 올릴 날이 가까웠음을 알려주는 것임을 자기 백성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했다.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이러한 확신 속에서 선견자는 자기 동포들로 하여금 굳게 서도록 격려하였다. 실제로 영웅적 순교자들의 운명에 대한 성찰이 유대 사상안에  내세에 관한 믿음을 확고히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거의 의심할 수 없다[1]. 만일 다니엘서의 사자굴 이야기나 풀무불 이야기가 역사적 필요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면 성경의 축자적 해석의 오류를 증명할 강한 반론적 증거가 될 것이다.   

신구약 중간기에 또 다른 절기가 생겼는데, 그것은 성전을 정화한 역사를 기념하는 수전절(요 10:22)이다.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기와 날짜가 겹치곤 하는 이 수전절(하누카)은 지금도 유대인들에게는 장막절 이상으로 중요한 절기이다. B.C.164년에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청결케 하고 난 다음에 성전촛대에 불을 밝히려고 했다. 거룩한 감람 유가 하루를 밝힐 분량밖에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하루치 감람유가 팔일 동안 불을 밝혔다고 한다. 이것을 기념하여  생겨난 절기가 수전절인데 일명 ‘빛의 절기’라고 부른다. 이렇듯   포로기 이후에 생긴 절기들은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일에 일조했다[2].

5)  하스몬 왕조 시대 종파의 고착화와 유대교 사상의 변천

하스몬 왕조를 연 시몬은 B.C. 135년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유대의 통지차 겸 대사제가 되었다. 요한 힐카누스는 율법주의자 였던 하시딤들을 내치고 현실주의자인 사두개인들을 중용했다. 이 때 쫒겨난 하시딤들은 이후 바리  새파가 되었다. B.C. 104년 요한 힐카누스가 사망하고 그 아들인 아리스토불로스가 왕위를 이어받은 후 우여곡절 끝에 알렉산드로스 야나이가 왕위에 올라 전성기를 열지만 이전에 쫒겨났던 바리새파가 항거하다가 800명이 십자가 처형을 받는다. 남은 이들은 유대광야로 도망쳐서 엣세네파에 합류한다. 그자 죽자 부인인 살로메 알렉산드리아는 장남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에 앉힌다. 사두개파를 규합한 그의 동생 아리스토 불로스 2세가 왕이 되고 힐카누스 2세는 바리새파를 규합하여 대제사장직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 두 형제를 제거 하고 로마의 도움을 얻어 왕위에 오른자가 이두메인 안티파트로스였다. 로마는 B.C. 37년 그의 아들 헤롯을 분봉왕으로 임명함으로써 유다는 로마의 분봉왕령이 되었다. 이 자가  솔로몬 성전을 모방해 헤롯성전을 지은 헤롯대왕이다.  

유대교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유대교가 헬레니즘적 제의로 변질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헬레니즘화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유대교는 크게 네 종파로 나뉘어 지며 가장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집단이 바리새파인데 이들은 율법에 대하여 열심을 내고 헬레니즘과의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았던 집단인  하시딤파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바리새파는 귀족계급도 아니고 제사장 파벌도 아니었지만 도덕적으로 진지하였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존경을 받았다. 셀류코스 왕조와 손잡은  제사장 귀족계급들과 세속의 귀족계급이 사두개파의 세력 배경이었는데 이들은 바로 셀류코스 왕조 시대에 헬레니즘에 상당히 물든 계층이었다. 이들은 토라의 권위만을 인정하였고 서기관들에 의해 발전된 일단의 구전 율법에는 아무런 권위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부활신앙, 사후의 상벌, 마귀론과 천사론, 묵시 문학적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전반적으로 거부하였다.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며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살았던 엣세네파 같은 종파들이 있었는데 쿰란 종파는 엣세네파였다. 이들도 하시딤파의  전통을 이어 받았을 것이지만 하스몬 왕조가의 대제사장을 겸한 왕들에 대해서는 화해의  여지가 없는 입장을 취했다. 하스몬왕조의 제사장직을 불법적이며 배교적인 것으로 간주  했던 묵시문학에 경도된 사람들이 그들과 제휴했다. 그들은 모든 예언이 자기 시대에 실현되고 있다고 확신하고 광야에서 수도원과 같은 생활을 했다. 유대교의 활로가 호전적인 민족주의 노선을 따르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마카베오 혁명의  중추였고 그 투쟁을 단순히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더 나아가 민족의 독립을 위한  전면전으로 전환시켰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신약시대에 이르러 열심당이라는 당파로 출현  한다. 이들은 광적으로 용감하고 무모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러 오실 것을 확신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어떠한 강적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당파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네 당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당시 유대인구에 비해  극소수였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당시 총인구 5~60만명중 이 네 당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30,000~35,000명 정도였다. 바리새인의 수가 전체인구의 5%정도고 사두개인과 에세네파를 합쳐서 2%정도의 수준이었으므로 그들이 유대인 전체의 대표성을 띤 것은 아니었다[3].

유대교는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본질적 요소에서는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에피파네스의 박해는 무죄한 사람도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논리를 사탄의 소행으로 돌림으로써 사탄에 대한 정의가 확고하게 된 것으로 보이고 이것은 나중에 기독교에도 영향을 준다. 또한 부활신앙에도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현실에서 이유 없이 당하는 무자비한 고통을 하나님께서 내세에서 다 갚아주신다고 믿어야 그 고통을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헬레니즘은 다른 한 측면에서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조장하였을 것이다. 강요되는 이방종교에 굴복할 수 없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에 악착같이 매달렸을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위가 전적으로 그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율법주의로 고착화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6)  유대교를 제외한 철학, 종교, 문학, 언어문제로서의 헬라화

헬레니즘 시대의 헬라화의 문제는 매우 강한 정치적 요소와 함께 철학, 문학, 종교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헬라인들은 에피쿠로스를 보편주의적인 스토아 철학과 비교하여  참된 헬레니즘의 철학자로 내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스토아의 세계시민정신은 시대 흐름에 따라 결국에는 보다 영향력이 커졌다. 이것은 세계시민정신이 헬레니즘 군주들의 요구,   다양한 면모를 지닌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통합해야만 하는 요구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종교에 대한 관심은 헬레니즘의 군주들이 와해되면서 보다 강하게 일어났다. 디오니소스는 당시 그리스 밖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 신이었다. 그것은 예술과 문학을 통해 아시아까지 퍼지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이 종교에 심취한 추종자였다. 그는 또한 고대 모든 신들과 더불어 오랫동안 예루살렘의 유대교 신과 결합되기도 하였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교가 이를 위험한 경쟁자로 보았는데 70인 역에서 집필자들은 그들이 증오하는 가나안 제사들을 디오니소스 종교에서 유래하는 개념을 가지고 해석하고자 하였다.

B.C. 2세기부터 두 문화를 결합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는데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문학 혹은 예루살렘 개혁의 시도 등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합이라는 실제적인 완성에 이르게 된다. B.C. 4세기와 3 세기에는 헬라화되는데 사회적인 장벽이 있었지만 B.C. 2세기와 세기에 이르러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히브리어 지혜문학 안에도 부분적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이 나타나며 그리스 사상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밝혀진다. 이 사상은 무엇보다도 논란이 되고 있는 전도서에 해당하는데 그 작품은 아마도 B.C.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의 통치하의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철학의 영향 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 책은 어떤 면에서 초기 헬레니즘의 계몽정신을  호흡하고 있다. 유대교의 묵시사상의 번영은 B.C.2세기부터 디아스포라 세계에 급속하게 확산되었으며 헬레 니즘 세계에서 계시종교의 개혁과 평행을 이루면서 지속되었다[4].

헬라화를 위한 최초의 가장 중요한 진보는 개인들이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이었다. 헬레니즘 문화를 위한 최후의 토대는 갈라지고 서로 투쟁해야 했던 정치권력이 아니라 공통의 언어였다. 따라서 그리스어는 야만족이었던 로마인들과 파르티아인들이 헬레니즘 군주체제에 대한 승리 이후 그 종말을 보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 유지되었고 로마 평화의 보호를 받으며 그 완성을 보았다.

3.   기독교의 산파가 된 유대교

유대교가 형성되었지만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망하고 전세계로 흩어진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여기서 처음에 제기한 문제 하나님께서는 400여년의 침묵의 기간을 사용하면서까지 왜 유대교를 허락하시었을까?”라는 의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포로귀환기에 윤곽을 드러낸 유대교는 헬레니즘에 한편으로는 저항하면서 한편으로는 융합하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유대인으로서 헬라제국에 살면서 헬레니즘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교리가 형성, 발전되고 종파가 갈리면서 체계화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파의 형성은 별개의 철학이나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안에서의 파벌의 갈림이며 배교자나 전혀 관심이 없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율법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사두개파 사람들중 일부가 속된 마음을 갖고 있기는 했었지만 전체적으로 모두 종말론적인 대망과 민족주의적 열정을 품고 있었다. 각 분파의 차이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종말론을 어느 정도 강조할 것이냐, 메시아를 비롯한 민족의 장래 소망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불과하였다.  

유대교는 종말론적 구원으로 그 율법공동체를 구원하지 못했다. 사두개인들은 세속화된  친헬레니즘을 추구하면서 외면 당하였고 엣세네파나 열심당의 호전주의도 해답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민족이 파멸을 초래하였고 그들이 기대했던 종말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대교가 실제로 살아남은 것은 바리새파식의 규범적 유대교, 즉 율법 뿐이다. 이것은 물론 율법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들에게 구약의 소망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소망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유대인의 그 왕을 한없이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을 때 대대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교라는 테두리에 남아 있지만 당시부터 지속적으로 기독교로 전향하는 구원  받는 유대인들이 있다. 또한 아직 유대교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도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다른 히브리 저작들을 통해서도 기독교는 아직도 유대교의 영향력  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유대교는 그 자체로서는 실패한 종교였지만 기독교를 낳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산파 역할을 하고 지속적으로 사후관리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 으로 말하면 구약은 유대인들에게는 실패한 구속사였지만 구주를 믿는 우리 신도들에게는 그 실패한 구속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구속사가 되어 실제적인 체험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 신약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율법을 대신하는 믿음의 구원을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의 고백(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 들인 신도들에게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 실존에 침투해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다.   

 

[1]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584~88

[2] 재경안, “교회력 따라가보기: 성경절기  지금도 유효한가?” 매거진 Re(전남 여수시 충민로 175: 그라티아, 2015), 63

[3] D.S RUSSEL, BETWEEN THE TESTMENT (USA : SCM Press Ltd., 1965), 48-9

[4] 마틴 헹엘, 신구약 중간사, 임진수 역, 118

< 알렉산드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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