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서론
가. 문제 제기 나. 목적 진술
2. 개인 구원과정에서의 성령의 역할
가. 개인 구원에서의 성령의 정체성
나. 개인 구원 과정에서의 성령의 역할
1) 회심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
2) 성화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
3) 영화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
다. 종말론적 구원론과의 관계
3. 결론
4. 참고문헌
개인구원 과정에서의 성령의 역할
1. 서론
가. 문제제기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구원을 기본으로 하여 타 종교와는 차별화되는 종교이다.[1]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정확한 정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 과정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서 구원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감안, 개인 구원과정에 대한 정의와 함께 그 순서, 각 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심층적으로 조명해보기로 한다.
나. 목적 진술
개인 구원과정에서 성령의 역할을 조명하고 각 구원 단계에서 우리의 실천적 과제를 도출해내며 종말론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개인구원과 종말과의 관계를 도출한다. 아울러 본 논문에서는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구원과정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 철학 이론을 도입하여 정통신학의 구원론과 비교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2. 개인 구원 과정에서의 성령의 역할
가. 개인 구원과정에서의 성령의 정체성
여기서는 성령론 전체 중에서 개인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만을 상세하게 고찰해 볼 것인데 구원 과정과 관련하여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① 의인과 동시 중생하며 여기서부터 초기의 성화가 시작되며, ② 그후 신자로서의 회개와 믿음으로 온전한 성화, 곧 성결하여지며, 마침내 ③ 영화의 단계를 포함하며, 이는 종말론적인 목표를 향해서 계속 상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2] 여기서는 개인 구원의 단계를 대별하여 회심으로부터 시작해서 지속적인 구원 과정으로서의 성화, 영화로 나누되 칭의는 회심에 포함하고 중생 및 양자됨의 단계는 성화에 포함하여 살펴본다.
개인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이라는 주제를 논의하기 위해 먼저 성령을 정체성을 살펴보면 성령은 창조시부터 하나님의 대리역할을 하였으며 그 존재는 인간 생명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하였고 생명을 지탱시키는 존재로서 성령의 임재는 성령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임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자원들을 제공하여 주었다. 선지자들은 성령을 온전하게 체험하게 될 장차 도래할 시대를 예견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성령은 종말론적으로 존재하였다. 예수는 바로 성부로부터 오는 성령을 사람들이 영접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리하여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일회성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초월적인 영역에 존재하던 하나님의 영이 세상 속으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내재적 삼위일체로서 성령은 성령의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인정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성부와 성자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결합하기 위해 성령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랑”으로서의 성령이 성부, 성자와 함께 완전한 하나님 이시며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가 완전한 인격체이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도 완전한 인격체인 것이다. 경세적 삼위일체의 개념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사를 이루고 완성시키는 실제적 사역을 감당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전면적으로 개입되어 있으며 모든 생명 속에 편재해 있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능력이다. 믿는 자들 안에 들어와 계신 성령은 우리의 삶을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든다. 성령은 만유에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며 우리로 하여금 천국 경험을 하게 해준다. 이로써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지금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며,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종말론적 공동체의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나. 개인 구원과정에서의 성령의 역할
1) 회심(회개와 믿음)에서의 성령의 역할
성서는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강조한다. 구원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이 놓여 있는 영원한 맥락의 한복판에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 우리가 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본질상 관계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우리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시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악된 인간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교제에 동참하게 한다.[3] 그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나와야 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신비로운 위격인 성령은 은밀하고 조용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위를 우리로 하여금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성경과 함께 우리의 경험은 구원이 즉각적이기도 하며 또한 점진적이기도 함을 보여준다.[4] 심지어 우리는 이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성령은 회심과정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 인간사자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과 우리의 마음을 밝혀서 복음 안의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고 각 개인에게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성령은 회심 체험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요한은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라고 하여 예수께서 성령이 이러한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죄의 깨달음에 대하여 성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성령은 또한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도록 부르시는 역할을 인간 사자들을 통해 중재해 준다. 바울은 회심으로 이끄는 과정을 역순으로 간략하게 서술한다(롬 10:1-15) : 개인의 응답, 믿음, 들음, 전함, 사자들을 보냄. 이처럼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듣게 하는 것이 필수적인 첫 절차이다. 이 때 그 역할을 맡고 있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존 웨슬리는 “우리의 의가 되신 주”라는 설교에서 믿기 전의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회개는 그가 말하는 감리교회 세가지 큰 교리, 즉 회개, 신앙, 성결에서 신앙의 문간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이는 구원의 문인 신앙으로 들어갈 수 없다.[5]
회심에서 성령의 사역은 인간 사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그것을 듣는 자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이해력을 제공해 주는 역할도 한다. 바울은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라고 하여 이러한 역사를 천지창조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십자가의 대속 죽음 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누가는 루디아의 회심사건에서 이러한 역학을 단순 명료하게 표현한다.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존 웨슬리에 따르면 믿음은 의인의 유일한 길이지만 회개와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필요함을 강조함으로 복음주의적 개혁자들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신앙 지상주의의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믿기 전의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회개는 그가 말하는 감리교회 세가지 큰 교리 즉 회개, 신앙, 성결에서 신앙의 문간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이는 구원의 문인 신앙으로 들어갈 수 없다. 또한 회개와 동시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강조하면서도 조건부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회개와 그 열매는 다만 간접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믿음은 직접적으로 필요하다”고 분명히 구분한다.[6]
성령은 회개와 믿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권능인데 회심 과정에서 각 개인에게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성령의 조명사역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과정이었다면 성령의 능력 주심은 우리의 ‘의지’와 연관되어 있다. 죄의 종 노릇 하는 우리는 성령의 부르심에 자유롭게 순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도움아래 우리는 그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는데 인간 사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그 메시지를 통하여 듣는 자가 응답할 수 있게 역사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회심을 통하여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인도한다. 우리 마음 속에 새로운 영적인 생명이 창조되는 것이다. 성령은 회심을 통하여 칭의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인 지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임재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며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하나님 및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우리에게 필수 불가결한 섬기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1] 김동호, 「삶이 바닥부터 흔들릴 때」(서울, 바이블리더스,2007), 9
[2]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2007), 174
[3] 스탠리 그렌츠, 「조직신학」 신옥수 옮김 (파주: CH북스, 2017), 646
[4]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173
[5]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171~172
[6]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171~2
한편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 회개와 관련해서 ‘마음의 변화 (메타노이아 : 회개)를 통해서 ‘선에 대한 성향’을 자라게 할 수 있고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사람의 결단으로 이 회개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도덕법칙과 나의 행위, 좀 더 궁극적인 목표로 지향하는 ‘거룩함’에 도달한다는 것이다.[1] 따라서 그는 악은 인간이 자유를 바탕으로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인간의 힘으로 죄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성화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바울의 고백과는 차이를 보인다(롬 7:23-25). 칸트의 주장은 윤리적 삶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성화과정과 일부 유사한 듯이 보이지만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등 구원의 주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실제 사역을 성령께서 담당하신다는 것을 도외시한 철학이론으로 기독교리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이론인 것이다. 칸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면서도 이렇게 구원론과 관련 철학적으로 다른 주장을 한 것이다. 바울은 칭의라는 용어를 믿음 생활의 시작과 최종적 완성 모두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다. 칭의는 복잡하고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최후의 심판을 예시하고 마지막에 있을 무죄선고를 앞당겨서 평결한다. 따라서 의롭게 된 신자들이 누리는 기독교적 실존은 장차 완성될 형벌의 용서에 대한 예시이자 미리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며 또한 종말론적이고 최종적인 무죄 평결에 대한 현재적 보증이다.[2]
2) 성화 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를 닮게 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맞도록 살게 해주는 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인도하는 성화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하신다. 성령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 안에 실현 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신다. 성화에는 지위적 성화와 상태적 성화가 있다. 지위적 성화는 우리가 그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인 반면에 상태적 성화는 우리가 성령과 합력해서 필사적인 노력으로 우리의 죄를 씻고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성령의 인도 하에 생겨나는 것이다. 결국 이것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의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존 웨슬리는 “사람이 칭의될 때 그는 거듭나게 되며 성령으로 났기 때문에 그것은 성화의 완성은 아닐지라도 성화의 문에 들어간 것은 틀림없다. 인간 영혼이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인간의 주체성의 내면으로부터 활동하는 것은 성령이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를 살리시며 성화시키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고난이라는 우리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자신인데, 곧 성령이신 하나님이시다. 성화는 성령이신 하나님의 행위인데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영혼을 죄로부터 해방하시며 성령 충만에 의한 사랑으로 온전케 하시는 은총이다.”[3] 라고 주장하였다.
성화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다. 이 과정에서 성령은 우리의 자발적인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이 부분이 어떤 면에서는 구약의 ‘거룩’보다 신약의 ‘성화’가 훨씬 더 어려울 수도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다’는 의미에서의 거룩은 레위기에서 정한 규정대로 하면 되고 횟수도 정해져 있는데 비해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매일 새롭게 되어야 하고 상상으로도 죄를 범해서는 안되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완전한 성화는 '죽음이 임박' 해서나 혹은 '죽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의 말씀이 무색해 진다. 즉 성서는 이러한 성화과정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은 성령이 죄와 영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하면서(갈 5:17) 우리의 영적인 병기(엡 6:10-17) 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활용하여야 한다(벧후 1:3)고 설파하고 있다. 이처럼 성화과정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육체에 거하고 있는 죄(악)와의 싸움을 해야 한다. 로마서 6장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게 하지 말고”라 하여 성화과정에서 끊임없이 죄와 싸워야 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인간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데 근본 악은 감성이나 자연적인 경향성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 경향성 그 자체는 도덕적으로 볼 때는 중성적이며 근본 악은 자유롭게 선택된, 법칙에 위배되는 준칙에 의거한다. 악의 성향이 실제로 있다는 것은 인간의 태도에 대한 경험을 통해 입증된다. 악은 모든 도덕 준칙의 근거를 오염시킨다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따라서 바울이 발견한 것처럼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악한 원리와 선한 원리 간의 싸움이 전개된다”고[4] 하여 바울과 유사한 논리를 전개한다.
또한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서 성경을 읽되 깊이 묵상하고 은혜를 사모하며 읽어야만 한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감동과 은혜를 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참으로 성령 충만한 삶이 되고 무슨 생각을 하든지 영의 생각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성경을 떠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길은 없으며 성경을 떠나서는 영의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이다.[5]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최종 목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완전한 성화”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앱 4:14) 까지 도달 하게 하는 것으로 언제 우리가 여기에 도달하는지에 대해 신학사적인 논쟁이 있어 왔는데 여기서는 존 웨슬리의 주장과 함께 사도 바울의 견해를 살펴보되 성령이 역사하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짚어보도록 한다.
① 존 웨슬리는 완전주의로 불리우는데 그는 구원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며, 따라서 마음 속에 일어나는 어떠한 변화도 성령의 역사라는 점을 믿었다. 웨슬리에 의하면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도 크리스천이 아니다. 그는 성결이나 기독자 완전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웅대한 구원역사는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현실의 삶 속에서 “온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②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신약성서는 현세에서 완전한 성화에 도달한다는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그 반대로 일생을 통하여 자기가 완전한 성화에 도달했다는 것을 부인하였는데(빌 3:12,14),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바울은 여기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성령으로 충만할 것(엡 5:18), 성령을 따라 살아갈 것 (갈 5: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 (갈 5:25), 성령의 불을 소멸하지 말 것(살전 5:19)을 권면하였다. 바울은 현재로서는 자신이 추구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없다는 쓰라린 체험을 견뎌내야 했다. 왜냐하면 완전함을 요구한 율법 – 바울이 중생한 사람으로서 즐거워한 율법(롬 7:22) – 은 완전함을 이루는데는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가장 깊은 자아, 진정한 “나”) 하나님의 법(명령)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6]
3) 영화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
성화 과정은 일생 동안 매일 매일 갱신되면서 진행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과 관련된 우리의 체험을 종말론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 마지막 궁극적인 체험을 “영화(glorification)”라고 하는데 이 영화는 성령이 우리를 회심케 하여 완전한 성화를 이루게 하여 우리의 구원을 종말론적으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와 관련하여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많은 언급을 하지 않고 있으나 바울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라고 하여 사실에 대해 확신함으로 인해 과거시제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과거시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① 한가지는 전통적인 해석방법으로 이를 미래에 확정적으로 일어날 사건이기 때문에 구원의 종말론적 확신에 근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론인데 이것은 베드로가 온전한 구원이 종말론적 사건 때까지 우리를 위해 보존되어 있다고 말한 것(벧전 1:3-5)과 일맥 상통한다. 결국 이 이론은 성화과정이 일생 동안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가 개인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와 관련된 우리의 체험의 궁극적인 측면(영화)을 바라보게 되어 우리의 구원이 공동체적인 실재라고 주장하고 있다.[7]
② 또 한가지의 해석방법은 ‘영화롭게 하셨다’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존 웨슬리의 주장처럼 ‘현세에서 완전한 구원이 가능’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성경에서 이 구원의 시기의 문제는 명확하지 않고 아주 모호하게 기술을 해놓아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구원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시간 개념을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지만 하늘나라에는 시간이 없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것이므로 시간이 없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도 없다. 따라서 비록 일시적일 수는 있어도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얼마든지 올 수 있으며 그것은 오늘 우리 삶의 자리를 살펴서 알 수 있는데 오늘 우리 자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으면 구원을 얻은 것으로 영화롭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도 실제 활동주체는 모든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성령이시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때”에 천국 백성을 최종 변화시키는 일을 마무리 하실 것이다(롬 8:11,13-17). 그 때에 성령은 우리를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존 전체를 포함할 것 (요일 3:2)이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여(갈 5:22-23)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물리적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고 선언하였으며 요한의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 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지나갔음이러라”(계 21:4)는 선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기독자 완전이나 온전한 성화, 성결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개념상의 차이는 있다. 대체로 구분되는 점은 성화는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체험적인 의미가 강하며, 성결은 온전한 성화의 경험을 통해 정결케 된 결과적 상태를 뜻하며 기독자 완전은 신앙인의 인격적인 성숙을 주로 의미 한다. 린드스트롬은 기독자 완전이란 인격의 완전이며 이는 곧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개념상의 차이를 볼 때 온전한 성화의 경험을 통해 성결케 되어 기독자 완전의 보다 높은 정도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세에서의 완전은 끝이 아니다. 완전한 자라도 계속 은혜 안에서 성장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최종적인 의인을 얻어야 한다. 이를 최종적인 안전 또는 영화라고 한다. 현재 우리는 성결해도 연약성을 지니며 무지나 실수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다. 비록 육체가 죄는 아닐지라도 육체 안에 있는 동안은 죄의 가능성은 상존한다.[8]
[1] 강영안, 「강교수의 철학이야기」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5), 246~7
[2] 알리스터 맥그레스, 김기철 역「신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 2017), 772
[3]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56~7.
[4] 호남신학대학교, 「신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386
[5] 김동호, 「삶이 바닥부터 흔들릴 때」, 84
[6]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정옥배 옮김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8), 409.
[7] 스탠리 그렌츠, 「조직신학」 신옥수 옮김 , 643
[8]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224
현재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는 자는 장차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을 것이요 지상에서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천상에서도 천국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이미 현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들어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있지만 지금 여기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 가운데서 살고 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이며, 그것이 하늘나라라고 불리우는 것이 그것이 (어느 정도) 영혼 안에 열려진 하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현재 있는 것과 장차 올 것 즉 ‘지금’과 ‘아직 아니’의 사이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현재의 삶이 앞으로 도래할 영원한 세상을 위한 훈련도장이요 준비장소이다. 현재의 삶은 “거주민이 아니라 영원한 거처로 가는 도중에 이방인과 나그네로서 며칠 혹은 몇 해 동안 지나가는 장소임을 분명이 인식해야 한다. 웨슬리에 있어성화는 현재의 칭의 즉 현재의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성화가 최후 심판에 있어서의 궁극의인과 궁극구원의 필요 조건이 된다.[1]
여기서는 구원론의 영화와 유사한 개념인 스피노자의 ‘최고 선’ 철학과 비교해 보기로 한다. 그에 따르면 신은 인격이 전혀 없는 ‘자연’이며,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구원을 기대한 처소는 철학이었다. 그것도 고 중세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철학이 아니라 갈릴레이가 제창한 ‘새로운 과학’에 적합한 철학을 통해 구원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① 참된 선은 존재하는가 ②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오직 그것만으로 영혼이 자극될 수 있는가 ③ 그것을 발견하여 얻은 뒤로는 그것을 통해 ‘영원토록 지속적인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탐구하기로 했는데 기독교의 영화의 개념으로는 ‘최고 선’을 상정하고 성령의 개념으로는 이성과 도덕을 설정했는데 이 이성과 도덕(윤리적 삶의 실천)을 통해 ‘최고 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얼핏 보면 기독교의 구원론과 유사한 것 같으나 기독교의 구원론이 경세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속사를 설파한 데 비해 스피노자는 사람 자신의 이성과 도덕을 주장한 점에서 완전 다른 것이다.[2]
가. 개인 구원의 종말론적인 특징
구원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이 놓여 있는 영원한 맥락의 한복판에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 우리가 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본질상 관계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우리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시기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구원을 종말론적으로 방향 설정한다는 것은 구원의 순서와 관련된 유일하게 적절한 출발점이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 체험 전체는 하나님의 자신의 목적성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구원의 순서의 엄밀하게 신학적인 요소들이 뒤따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성을 “예정”이라고 말한다. 예정은 “영원한 생명 또는 영원한 사망을 위한 개개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신자들을 그의 구원 사역의 최종적인 목표(영화)로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도이다. 우리는 “그의 아들을 닮아가도록 예정되어”있다. 그리고 영화를 이루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인 우리에 대한 그의 미리 아심, 영원한 아심으로부터 생겨난다.[3]
하나님의 의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선택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적 이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한다. 그러므로 선택은 공동체와 결부되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통합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에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위임하셨다(마 28:16-20). 따라서 우리는 도처의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공동체의 도래를 통하여 절정에 달하게 될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에 기여하는 일에 초대한다. 최후의 추수에서 절정에 달하게 될 역사의 전개는 누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고, 누가 영원한 공동체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를 결정해 준다. 성도의 견인은 성령의 임재가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을 보장해 준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루이스 벌코프는 견인을 “신자의 마음속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계속되어 완성에 이르게 하기 위한, 신자 속에서의 성령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정의한다. 자신 안에서 성령이 진정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부르심에 충실한 상태로 “달려갈 길을 마칠 것”이다.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은 언젠가는 믿음으로 되돌아올 것인데 이는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그의 구원 사역을 완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그들은 결코 그들의 배교 행위로부터 돌이키거나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를 통해서 그들은 결코 진정으로 회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라는 성경의 언급들은 의미심장하다.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러한 권면들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따라서 계속해서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능력을 주시는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임재는 그들이 “달려갈 길을 마치고”의로운 재판장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을 때에 분명하게 드러난다(딤후 4:8). 기독교의 역사관은 반드시 종말이 있는 역사관이다. 성경은 인간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 회복과 완성이라는 계획에 성령이 역사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종말론적 구속의 역사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4]
3. 결론
경세적 삼위일체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사를 완성시키는 전 과정을 담당하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능력으로 창조 창조 행위에 전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모든 피조물에 편만한 존재이다. 오직 성령에 의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게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종말론적 공동체의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회심 과정에서 우리는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성령께서 조명하시어서 우리는 ‘마음’을 열었으며 우리의 ‘의지’는 성령께서 주신 능력이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부르심에 거역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인간 사자로 하여금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어 듣는 자가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신다. 이때 역사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회심할 때 우리는 거듭난다. 우리 마음 속에 새로운 영적인 생명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으로 인한 칭의라고 부른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인 지위가 변화된 것이며 성령의 임재는 우리에게 순종할 자유를 가져다 주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성화과정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성령께 협력해야 한다. 구약의 ‘거룩’보다 신약의 ‘성화’가 훨씬 더 어려울 수 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에서 정한 규정대로 하는 거룩이 겉으로의 거룩이라면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매일 새롭게 되며 상상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는 진정한 거룩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완전한 성화는 '죽음이 임박' 해서나 혹은 '죽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존 웨슬리처럼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어떻게 이해하든지 이러한 성화 과정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와 영적인 전쟁을 벌이고 계신 성령을 도와 영적인 병기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활용해서 강력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는 일생 동안 갱신되면서 진행된 성화가 종말론적 구속사의 마지막 궁극적인 체험을 의미하는데 이 영화는 성령이 우리를 회심케 하여 완전한 성화를 이루게 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 때에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완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를 닮은 모습으로 바뀔 것인데 거기에는 성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물리적 신체까지 변화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고 선언하였다.
성경의 역사를 종말론적인 구원사라고 한다. 성령께서는 이 모든 과정을 구체적으로 주도하신다. 역사는 하나님의 의도 아래 일직선으로 구원 목적 으로 순서 지어졌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종말론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결연한 의도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예정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도라는 관점에서 성도 개개인은 각자 구원을 이루겠지만 하나님의 의도라는 관점에서 ‘우리’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통합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에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위임하셨다. ‘땅끝까지 전도하라’는 사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공동체를 통해 클라이맥스에 달하게 되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일이 된다. 우리는 도처의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공동체의 도래를 통하여 절정에 달하게 될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에 기여하는 일에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여야 한다. 끝.
[1]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350, 352
[2] 철학이야기(스피노자)
[3] 스탠리 그렌츠, 「조직신학」 신옥수 옮김 , 637, 639
[4] 주해홍, 「말씀이 삶이 되어」 (서울: ㈜ 도서출판 에스라, 2018),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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