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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

요한복음, 요한 1,2,3, 요한계시록을 요한문헌이라고 합니다. 이 문헌들은 기본적으로 사도요한의 증언을 토대로 에베소 지방에서 형성된 요한 공동체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유대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헬라적 관점에서 기술된 책입니다. 요한문헌을 읽다 보면 이 저작들이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빛에 대해 묵상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빛을 주제로 설교문을 작성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원문을 주해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살펴본 뒤 성경 안에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를 찾아보았습니다. 과학적인 의미에서 빛은 광선이며 일종의 전파로 직진성이 있는 엄청난 속도 에너지를 가진 물질입니다. 이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를 놓고 과학계에서는 아직도 격렬한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과학적으로 빛의 실체를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은 어둠을 밝혀 주기도 하고 세상 만물에 색을 입혀 주기도 합니다. 스펙트럼을 통과한 빛은 일곱빛깔의 무지개색으로 나뉘어 집니다. ‘빅뱅이론은 우주가 어떤 섬광으로  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창세기 13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의 말씀과 많이 닮아 있지요. 저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더 연구하는 과정에 있으며 오늘 설교에 그동안 묵상했던 내용을 반영했습니다. 이 연구가 진행되면서 제 2, 3의 빛에 대한 설교문을 만들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말씀, 즉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상징적 표현이라 과학, 물리에서 말하는 빛과는 다르다고 봐야겠지만 말씀이나 하나님 등을 사물에 빗댄다면 만큼 좋은 비유도 찾아보기 힘들겠지요.  

[ 성경내에서의 쟁점과 해석 ]  

오늘 설교 본문인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에서 깨닫지 못하더라의 Greek 원어 카타람바노 (καταλαμβάνω)는 취하다, 영접하다의 원형 동사 람바노(λαμβάνω)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 대한 해석을 놓고 개역개정과 KJS, NIV, ASV 등이 ‘이해하다’, ‘깨닫다’, ‘인지하다’로 번역하고 있고 새번역, NRT, NRSV 등이‘  이기다’, ‘끄’ 등의 해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0~12절은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γινώσκω)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해서 여기서 영접하다라는 단어로 파라람바노(παραλαμβάνω)와 람바노(λαμβάνω)와 같은 동사원형을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15절은 하나님이 빛으로 오셨지만 어두움이 그것을 받아들이지(영접하지) 않았다고 번역해야 합니다이렇게 번역했을 때 요한복음 11절부터 12절까지는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깨닫다’’이해하다로 번역하려면 110절의 그노스코(γινώσκω)카타람바노 (καταλαμβάνω)로 사용했어야 합니다 . 그래서 요한복음 11절부터 12절까지는 하나님이신 말씀(logos)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 빛으로 왔는데 사람들이 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세례요한을 증인으로 보냈다.(영접하라고) 그가 세상에 있었으며 세상은 그에 의해 창조된 것인데 세상은 그가 누군지를 알지(γινώσκω) 못했다(다른 차원이므로). 그가 자기 땅에 왔는데 (빛으로)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빛을 받아들이는 (영접하는)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실 원어 분석이 어떻게 되었든지 여기서의 결론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로 볼 수 있습니다.    

[ 세상에서의 문제 ]

실제로 보면 빛을 빛으로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나 혹은 세상을 살면서 겪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사실을 서기관들은 바로 알고 동박박사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맞이하러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메시아가  오면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기 때문에 오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늘 현대교회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만 재림하면 교회는 더 이상의 기득권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기 보다는 어두움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당수의 교회가 영을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는데, 어쩌면 알면서도 방조하면서 교회 신도의 증가를 목회의 성공으로 간주하는 세태와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성경내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아직 십자가의 얘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 자체가 십자가의 대속에 못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지창조 당시 하나님께서는 섬광으로 빛을 주셨고 생명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어둠과 죽음으로 바꿉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직접 빛이 되셔서 인간세상에 침투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저는 개를 좋아하는데 제가 초등학교때는 지금 같은 고급견은 아마도 한국 최상류층 정도나 키울 수    있는 존재였고 보통 잡종견을 집에서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를 데리고 같이 잠자고 뽀뽀하고 하면서 지냈는데  어느날 얘가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며칠 동안을 학교 끝나고 울면서 찾아 다녔습니다. 저는 어릴 때 세검정이라고 하는 평창동 아래 홍은동 쪽에 살았는데 당시에는 개장수가 끌고 가기도 하고 그저 일반인이 계곡에서 잡아  먹으려고 잡아가는 경우가 흔했지요.  그 이후로 제가 보신탕집을 보면 속이 메슥거리면서 밥을 잘 못 먹었어요. 사회  생활하면서 애로사항이 좀 있었지요. 직장에서 상사가 보신탕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 거절하면 좀 좋지 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시절이라, 어떤 사람은 보신탕을 못 먹는데 핑계를 대기를 아버지 유언이라고 하는 사람도 봤어요. 저는 아버지가 지금도 정정하게 살아계시니 그 핑계를 댈 수도 없었지요. 아뭏튼 그렇게 개를 사랑했는데도 저보고 개가      되라고 하면 그건 아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되신 겁니다. 우리를 구속하시려고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

요한복음 110절에서 12절을 보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인간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신 것을 사람 들이 알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심으로써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선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종말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많은 종말적 증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당시부터 인류 구속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창세기 25절을  보면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고 했는데 여기서 내력은 히브리어 톨레도트(תוֹלְדוֹת)를 창세기 안에서 찾아 보면 족보나 세대로 나오는데 한글 번역으로는 족보세대, 계보, 자손, 후손,내력, 대략 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한글 개역개정판에서 다양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원어로 분명히 같은 단어를 쓰는 것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인류의 족보와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천지창조는 인류구속의 역사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거룩한 선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에 굴복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고통을 통해 인간을 자신에게 되돌아 오도록 하기 위해 용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정의로운 만큼 자비로우셔서 엄청난 반전을 계획하셨는데 그 분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사람들의 빛이 되어 주시었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아멘.

 

설교본문 : 시편 136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도입부 ]

시편 136편은 후렴구인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로 유명하다. 아마 당시에 제사장 같은 예배 인도자가 앞부분을 말하면 회중들이 후렴구로 응답했던 것으로 보이며 하나의 예배절차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고 이것을 신실하게 지키고 계시다. 창조이전부터 백성을 택정하시어 경륜적 삼위일체로 종말론적 구속사역을 하고 계신 것이다. 136편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한 백성들의 감사와 찬양이라는 주제로 읽어야 한다.

[ 성경내에서의 쟁점과 해석 ]

1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2, 3절에서는 다른 모든 신들을 뛰어 넘는 신들의 신임을 선포한다. 성경은 하나님외에도 신이 있다는 것을 여러 군데서 알려준다. 그 모든 신들중에 하나님이 최고임을 찬양하는 것이다. 4-9절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찬양한다. 5절에 지혜로 하늘은 지으셨다는 구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을 읽어 보면 성경구절들이 단순히 상징적인 내용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신학 등은 성경을 구절대로 해석할 생각을 하지 말고 자꾸 다른 해석을 가미하도록 강요한다. 10-15절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위대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10가지의 재앙으로 완악한 바로를 제압하고 출애굽시킨 사건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16절은 광야에서의 사건들이다. 이것은 모세오경의 출애굽기 중간부터 신명기 후반 까지의 부분에 해당한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해내신다. 거기에는 만나가 있었고 메추라기가 있었다.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17-22절에서 시편 기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가나안에 정착 하게 하신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10명의 정탐꾼들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 대노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적으로 아무리 두려운 일이 있어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면 해결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23-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긍휼을 주셨음을 선포한다.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해주시고 거져주셨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여야 하며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해야 한다.

[ 성경내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

하나님의 자비는 사실 창세전부터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시편 136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구속사역을 설파한다. 이러한 긍휼과 은혜를 입혀서 예배를 드리자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늘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하면서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은 찬양을 놓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시편기자는 이러한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미래의 인류 구속의 은혜를 암시한다. 시편 136편에는 아직 십자가의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훗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십자가의 대속을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십자가의 대속 사건을    제외하고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이라는 드라마에서 완성이 된다. 시편 136편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성육신 사건과 연결해서 볼 때 비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목적을 알 수 있게 된다.

[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 감사와 찬송으로 응답한다 ]

감사는 성숙한 인간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성이다. 감사에는 악과 불의가 존재 하는 세상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감사는 우리가 갖가지 고난과 비극을 겪을 때 느끼곤 하는 절망감과 무력감에 대한 해독제로서,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러한 감사를 실천하여 자신의 말과 모범으로 주변사람 들에게 이것을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수한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더욱 깊이 자각할 수 있게 된다. 감사하는 태도는 가정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감사는 부부관계로부터 시작된 인간관계로 확대된다.관계는 창조질서의 기본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처음부터 창조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다. 사람들 간의 수평적인 사랑의 관계는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인류 구원계획의 일부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과의 관계 회복일 것이다. 타락으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복원은 감사이다.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원활한 소통을 해야 하며, 상대방 이야기에 기울일 알아야 하고, 갈등의 원인분석과 그에 대한 현명한 해결, 친밀감의 유지, 자신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이타심 배양, 실천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과정으로서의 용서와 화해와 더불어 임의적 혹은 예정된 상실에 대한 극복 등이 있다. 결론적으로 감사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 있다. 분이야 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있고, 그렇게 하기를 간절하게 원하시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현재 세계에 창궐하는 전염병 사태,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의 끈을 놓쳐서는 안된다. 하나님 앞에 상실을 내려 놓고 죽음이 최후 승자가 아님을, 우리의 구주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눌 있는 영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임을 믿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감사는 선한 동기를 더욱 강화하는 능력이 있고 잘못되고 악한 동기를 약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상처에 대한 치유가 쉽지 않은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에 있다. 감사는 상대방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더 큰 유익을 준다. 교육적으로 보면 감사하는 태도는 가정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일생을 통해 영혼을 치료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할 것이다. 감사를 통해 우리는 상실을 이겨낼 수 있다. 상처 입은 관계는 감사와 사랑이라는 해독제를 통해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느낌으로써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진정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올바른 결정을 하여야 하는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믿는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의 문제는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해소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우리가 시편 136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에 굴복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인간들을 자신에게 되돌아 오도록 하기 위해 긍휼을 베풀고 은혜로써 용인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정의로운 만큼 자비로우셔서 엄청난 반전을 계획하셨는데 그 분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사람들의 빛이 되어 주시었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인 것이다. 아멘.

성령의 탄식( 8:29~30)

  1. 서론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구원과 거리가 먼 신앙생활은 헛된 믿음이며 그것이 없는 신학공부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라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면서 현재 내 삶의 자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는 M.Div 2년차로 졸업까지 1년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히 신학생의 신분으로 있을 때 적어도 제 나름의 개인 구원관을 정립한 뒤 남은 생애 동안 제 자신을 구원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가정을, 사회를, 세상을 구원하는데 일조해 보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일반적인 목회자들의 설교 형식보다는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진정한 개인 구원을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를 같이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2. 구원론과 관련한 로마서 소개

    구원과정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크게 나누어 보면 회심(회개와 믿음)-성화-영화의 단계입니다. 여기서 칭의는 회심에 포함시키고 중생이나 양자됨은 성화과정에 포함시킵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된 회심을 통해 예수님을 닮는 과정인 성화과정을 거쳐서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영화의 순서입니다. 일반적으로 현세에서의 완전한 성화, 영화를 달성 하지 못하며 죽기 직전에나 혹은 죽은 뒤에야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현세에서 완전한 성화가 가능하다고 하며 또한 죽기 직전을 죽기 전 10년전, 20년전 혹은 40년전 쯤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기 때문에 완전성화가 현세에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이 통일된 이론은 아닙니다. 완전성화, 곧 영화가 현세에 이루어 질 수 있느냐의 문제와관련하여 오늘 성경 본문인 로마서 8 30절을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었느니라라고 하여 하늘나라에서 체험하는 영화를 이미 받은 것으로 과거 시제로 쓴 것에 대해 바울이 미래에 일어날 것을 확신해서 그저 과거시제로 말했을 뿐이라고 보통 설명을 하는데 이 표현을 말 그대로 이미 영화롭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해석은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이 구원의 시기의 문제는 명확하지 않고 아주 모호하게 기술을 해놓아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주제입니다. 구원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시간 개념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시간이 있지만 하늘나라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것이므로 시간이 없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도 없습니다. 따라서 비록 일시적일 수는 있어도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얼마든지 올 수 있으며 그것은 오늘 내 삶의 자리를 살펴서 알 수 있는데 오늘 내 자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으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구원론과 관련한 대표적 성경은 로마서입니다. 이 시대에 전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로 손꼽히는 제임스 패커성경 안의 모든 길은 로마서로 통하며, 성경 에서 제시하는 모든 관점은 로마서에서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는데 로마서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사고 친다는 말이지요) 이 로마서를 크게 깨우치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고 인류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기리라고 확신합니다. 실제로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를 연구하여 쓴 주석에서 로마서 서문은 종교개혁의 신앙과 사상의 선언문이라고 까지 평가 받고 있고 스터디 그룹에서 이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다가 존 웨슬리는 뜨거운 것이 올라오면서 성령 체험을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특별히 개인 구원과 관련해서는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에 현대신학의 구원론 전체가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이 로마서의 구원론과 관련하여 제 나름의 구원관을 도출해 보기 위해서 특별히 주석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여러버전의 성경으로만 면밀하게 분석하고 묵상하여 개인 구원과 관련하여 다음의 3가지 사항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지속적으로 매일 수행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3. 구원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3가지를 명심하고 지켜야 합니다

  1. 먼저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성서를 통한 위대한 회심에는 성 어거스틴, 루터의 회심, 존 웨슬리의 회심이 유명합니다. ‘sola Script’(오직 성서) 라고 외친 종교개혁가들은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성서의 지식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수 없다고 알려줍니다. 구원의 확신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룰 수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성서를 통해서 만이 가능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오직 하나의 목적과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는 과정에서 기독자 완전, 즉 완전 성화의 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와 성령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성서 안에 성령이 담겨 있는 것이라 성서는 영적 생명을 창조하고 지탱시키는 성령의 사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통해 예수 그리 스도를 증거하고, 신자들의 삶을 인도하며, 교회 속에서 권위를 행사합니다. 또한 성령은 성서를 도구로 하여 하나님말씀을 전하므로 성서 말씀을 따르는 것은 구원을 향한 필요조건이 됩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신앙에 필요한 자양분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합니다.

  2. 이렇게 성서를 통해 회심이 이루어지면 구원은 시작된 것으로 보는데 두 번째로 우리는 성화과정에 들어섭니다. 성화과정은 매일 매일 죄와의 격렬한 싸움을 통해서 단계적 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의 죄와의 담대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죄의 본질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이 죄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여기서 인격화 되어 있는 죄는 살아 있는 생물로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 안에 성령이 살아 계시듯이 죄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 23절에서처럼 죄는 사람을 휘감아 죽음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죽음을 가지고 인간을 종으로 다스리기도 합니다. 성령이 인간의 영생을 위한 무기요, 보혜사인 것과 같이 죄는 사망을 위한 무기요 사망의 강력한 후원자입니다. 로마서 7 5절 말씀을 보면 죄는 율법을 근거로 한 우리의 죄책감을 노려 우리의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열매를 맺게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가지고도 우리를 죽입니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를 포기하게 하기 위해 죄가 교활하게 율법을 이용한다는 뜻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는 이미 죄와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이기셨으며 우리는 그 주님과 연합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6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게 하지 말고라 하여 성화과정에서 끊임없이 죄와 싸워야 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죄와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한지 바울 사도는 로마서 7 23~25절에서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하면서 자신의 육체가 죄를 이길 수 없음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자기가 완전한 성화, 즉 영화에 도달했음을 부인했지만 끝까지 죄와의 치열한 싸움을 지속하였고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디모데 후서 4 7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 후서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바울의 마지막 서신서로 순교 당하기 직전 로마의 마메틴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기록한 유언과 같은 서신 입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죄로 인해 우리가 현세에서 영화에는 도달하지 못하지만 죄를 향한 담대한 싸움을 통해 우리는 주 안에서 결코 정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8:1), 어느 누구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 ( 8:39)이라고 확신합니다. 로마서 8장은 로마서 1~7장에 대한 결론, 즉 완전한 성화인 영화에 대한 개인 구원의 완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8장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확정적으로 정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을 것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등 바울의 삶 전체를 면밀히 살펴보면 바울은 내적으로 자신의 죄와의 싸움을 위해 결국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을 의미하는 순교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묵상해 보게 됩니다. 자신 안의 죄성을 극복하지 못한 그는 빌립보서 1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은 유익함이라고 하였고 디모데후서 4 6절에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등과 같이 죽음을 각오한 전장터의 장수 같은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죽음으로 죄와의 치열한 투쟁을 해야 합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구원의 전 과정에서 역사하고 계십 니다. 성화 역시 성령이신 하나님의 행위인데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영혼을 죄로부터 해방하시고, 성령 충만에 의한 사랑으로 온전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은 물거품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께 매달려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 하나님께 우리의 구원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이미 성령께서는 어머니 같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성부 하나님께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성령의 탄식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한심해서 탄식하신다는 말인데 기도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말이죠. 사도 바울과 같은 성자의 기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중언부언인 모양인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기도방법을 잘 모를 때는 주님께서 알려주신 주 기도문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 우리 역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죄를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매달려야 합니다. 이러한 간구를 통해 아름다운 9가지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 결론과 마무리

    이상으로 말씀을 마치기로 하고 지금부터 각자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죄와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1분간만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 (통성기도 1)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인된 우리를 창세전부터 택정하시어서 우리를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우리를 또한 영화롭게 해주시었으니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 친히 성령을 통해 내려 주신 성경말씀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이에 굴복하지 않도록, 이미 약속해주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성령의 무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갈 길을 마치고””믿음을 지키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주 안에서 결코 정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도의 거룩한 견인을 ……. 성령으로 붙들어 주시옵고 말씀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마치는 기도) 주께서 허락하신 이 아름다운 공동체 캐나다 크리스천 칼리지 한인 학부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통해 매일 죄와의 담대한 전쟁을 수행할 것이오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넘치도록 부어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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