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안자료 요한복음 1, 2

신학서적 리뷰 2020. 2. 9. 03:54 Posted by forest38

OO교회 주일 신앙강좌 요한복음 1                        인도: OOO 전도사

1.    빛으로 오신 하나님

개역개정과 KJS, NIV, ASV 등이 이해하다’, ‘깨닫다’, ‘이해하다로 번역하고 있고 새번역, NRT, NRSV 등이 이기다’,  ‘끄다등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καταλαμβάνω 어원이 되는 λαμβάνω붙잡다’, ‘취하다’, ‘영접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2차적인 파생의미로 이해하다’, ‘깨닫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실제로 이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용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가 주장한 대로 정황상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어원과   용례상으로 깨닫다로 번역하여야 한다. 또한 요한복음 19~10절에도 Ἦν τὸ φῶς τὸ ἀληθινόν, ὃ φωτίζει πάντα ἄνθρωπον, ἐρχόμενον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ἐν τῷ κόσμῳ ἦν, καὶ ὁ κόσμος διʼ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ὁ κόσμος αὐτὸν οὐκ ἔγνω.” (NA28) 라고 하여 말씀이  되신 하나님이 세상에 빛으로 왔는데 어둠이  빛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을 재차 분명히 전하고 있다. 여기서 ‘ἔγνω(기본형 γινώσκω)에 대해서는 모든 역본이 다 이해하다’, ‘깨닫다로 일치된 번역을 하고 있다. 따라서 1  5절을 이기다로 번역하는 것은 단어의 의미로 보나 문맥으로 보나 오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경구절이 두 가지를 다 의미한다고 하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서 불합리하다. 

요한복음 19절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본문이 속한 요한복음 11절에서 18절까지는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 적인 방법으로 변형의 틀을 가지고 하늘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언어와 방법을 통해 그 당시 문화 속에서 새롭게 하늘의 메시지를 해석하여 들려 주신 사건이 이른바 성육신 사건인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으로 묘사했다. 요한문헌을 읽다 보면 이 저작들이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과학으로 빛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알려진 바로는 빛의 특성 중 여러가지가 성경 말씀을 증명해 준다. 빅뱅이론은 우주가 창조될 때 섬광과 같은 한 줄기 빛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며, 만일 광속으로 이동하는 좌표계가 있다면 지구에서 볼 때 그 시간은 무한대가 된다고 한다. ‘빛이 있으라라든지 영생이라든지 하는 성경말씀들이 이해되는 것이다. 이처럼 빛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가 있다. 이런 면에서 요한복음이 성육신 사건을 으로 오셨다고 표현한 것은 절묘한 비유이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빛은 그 빛이 자연적인 것이든 초자연적인 것이든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구절은 특별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에서 세상에 와서비추는과 같은 단어를 현재시제로 사용한다. 영어도 불변의 진리를 표현할 때 현재형으로 쓴다. 빛은 시제가 없이 영원불변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 지금도 비추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천지창조 당시 하나님께서는 섬광으로 빛을 주셨고 생명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어둠과 죽음으로 바꾼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직접 빛이 되셔서 인간세상에 침투하신다. 이 빛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기도 하고 깨달았으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분의 진노를 살만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현상에 대해 112절에서 놀라운 자비를 베푸신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여 빛을 빛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자녀로 삼으신다고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에 굴복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들을 자신에게 되돌아 오도록 하기 위해 획기적인 반전을 계획하신 것이다. 그 분 자신을 희생하여서 사람들의 빛이 되어 주셨으니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인 것이다. 우리는 오직 죄를 자복하고 주  예수를 구주로 받아 들이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변함 없이 생명의 빛으로 우리 각자를 비추어 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성육신 사건으로 빛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도 했고 그것을 알면서도 받아 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 알면서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가 예수님 당시 상황에서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시오.

- 요한은 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으로 묘사했는가?  

 

OO교회 주일 신앙강좌 요한복음 2                        인도: OOO 전도사

1.    유대인의 그 왕이신 예수님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한복음 18:33, NKRV)

저자는 요한복음 18~19장의 빌라도의 재판과정을 설명하면서 “the king (ὁ βασιλεὺς) “a king(βασιλεὺς) ”의 설명을 빠트리고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구약성경이 지칭하는 ‘그 왕(the king)’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다윗 왕조를 재건할 사람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고 빌라도는 예수께 “the king”과  “a king”을 혼용해서 질문을 했는데 “the king”이냐의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았으나 “a king”이냐에는 “진리를 가져온 왕(a king)”이라고 답변하신다. 빌라도는 로마인으로서 정관사가 없는 라틴어를 구사하는 인물이다. 그가 the king과 a king의 유대적 개념을 알고 행동했는지는 본문상으로 분명하지 않으나 결과적으로 그가 만든 명패에 “유대인의 왕(the king) 나사렛 예수”라고 기록했고 유대인들은 이를 “자칭 유대인의 왕(a king)”으로 써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한다. 진리에 속하지 않은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압력에 못 이겨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한다. 빌라도는 십자가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의 죄목을 쓴 패를 붙인다.

빌라도는 이 패를 죄목으로 기록했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심으로써 확인할 진리(요 20:28)를 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요한복음적 역설이다. 이스라엘은 예수께서 다윗 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하지 않았다 하여 거짓 메시아라고 죽였지만, 예수는 자신의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고 그들 위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참 메시아이고 참 이스라엘 왕이었다. 다윗 왕조가 그림자로 그려내려 했던 실체인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참 메시아적 왕이었다. 예수는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들려 올려짐으로써 자신의 메시아적 과업을 완성하고 메시아적 왕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들려 올려짐은 예수의 수난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영광(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정체가 드러남)이다. 이것을 두고 예수는 자기가 다니엘 7장에 예언된 “그 ‘사람의 아들’ ”(단 7:13)로서 하나님의 새 백성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단 7:18, 22, 28)을 창조하기 위해 ‘들려 올려져야 한다’고 예고했던 것이다(요 3:14; 8:28; 12:32, 34).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온 세상 사람이 다 알아볼 수 있도록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쓴다. 하나님 백성의 언어인 히브리어, 로마 제국 언어인 로마어, 문명권 언어인 헬라어로 기록하여 세상의 대표격인 빌라도가 예수를 온 세상 왕으로 선포한 것이다. 여기 또한 요한복음적 역설이 있다.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은,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 중 그를 믿는 자들과 로마어와 헬라어를 쓰는 사람 중 그를 믿는 자들, 즉 세계 만방의 모든 족속 중 그를 믿는 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임을 고백하는 나다나엘 같은 자로서, 불신앙의 유대인(야곱의 자손)을 대치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요 1:45–51). 그들은 예수께서 예고한 대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들려 올려짐으로써 모든 민족과 모든 방언에서 예수 자신이 끌어 모으는 자들이다(요 12:32).

< 유대인의 그 왕(the king) 나자렛 예수 >

l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the king’ ‘a king’의 개념구분을 하고 예수께 질문을 하였는가?

l  빌라도는 왜 그가 만든 명패에 “유대인의 왕(the king) 나사렛 예수”라고 기록했는가?  

l  유대인들은 이를 “자칭 유대인의 왕(a king)”으로 써야 한다고 요구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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