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사이어 저 / 김헌수 역

요약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펼치면서 영미 복음주의 운동의 확산을 주도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근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사상의 흐름을 분석하고 개념을 규정하면서 유신론에 기반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준다. 1976년 초판이 발행된 이래 그 이후에도 뉴에이지와 포스트 모던 사상을 추가해서 개정판을 내었으므로 현대사상을 망라하여 기독교적 세계관을 도출해 낸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 세계관의 차이

1장은 한 마디로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타인의 세계관과 비교해 보고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할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세계관을 정의하고 각 세계관별로 7가지 준거틀을 제시해서 여기에 대입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세계관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실재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의 의식 여부나 일관성  여부와 관계없이 보유하고 있는 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 일련의 전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 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세계관을 7가지 명제, 7가지 준거틀에 맞춰정의할 수 있는데 ① 신 또는 궁극적 실재의 본질과 속성 ② 우주의 본질 ③ 인간의 본성 ④ 인간 사망시일어 나는 일 ⑤ 지식의 근거 ⑥ 윤리의 기초 ⑦ 역사의 의미 등이다.     

2)    2: 하나님의 장엄으로 가득 찬 우주 - 기독교 유신론

저자는 결론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세계관은 기독교 유신론이라는 전제하에서 이 책을 저술 하였다. 첫번째 소개하는  세계관으로 기독교 유신론을 설명하고 10검토된 삶에서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는 방식으로 편집하였다. 기독교 유신론이야 말로 검토된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유신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격이시며,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전지하시고주권자이시며 선이시다. 또한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시어 개방 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제로 운행하도록 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인격, 자기 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지니면서 주변 세계와 하나님과 교통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훼손되었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역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윤리는 초월적이며  선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고 역사는 종말론적으로 일직선으로 흐른다.   

3)    3: 시계와 같은 우주 - 이신론

과학의 발달에 따라 우주에 관한 지식이 급속도로 넓혀지면서 권위의 기반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로부터 인간의 이성이나 직관 등으로 옮겨가는 시대가 되었다. 우주를 거대한 시계로 보고 하나님을 그 시계의 제조자로 간주한 것이다. 유신론에 따르면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방치한 상태이며 이러한 우주는 폐쇄된 체계 안에서 인과율의 일치체이므로 기적은 없다. 이에 따라 인간은 인격체이긴 하지만 우주의 한 부품일 뿐이며 우주는 아주 정상적인 상태로 인간은 우주를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우주가 운행하는 하나님의 일반계시로서 윤리를 이해하면 되며 역사는 창조시에 그 과정이 정해졌기에 직선적으로 흐른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자연에서 구했기 때문에 역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신론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고 보기 때문에 윤리가 설 자리가 없음에 불구하고 윤리학에 깊은 관심을 갖는 모순을 보였으며 인식론적 측면에서 개별에서 보편을 추출하려고 하였지만 그에 수반되는 무한한 지성은 확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이 안되고 폐쇄된 우주에서 인간 존재의 중요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한 사조로 이러한 내적인 모순으로 곧바로 자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세계관이었을 뿐이다.  

4)    4: 유한한 우주의 침묵 - 자연주의

이신론을 통해서 자연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 내리게 된 것이다. 자연주의의 영향하에서 발생한 진화론과 물질론에 의해 인류  역사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러면서도 자연주의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현대에도 그 망령이 종종 살아나온다. 저자는 하나님을 부정한 자연주의의 두 가지 실례로 세속적 인문 주의와 마르크스 주의를 들고 있으며 마르크스 주의의 기독교 이단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연주의는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물질만이 영원히 존재하며 우주는 폐쇄 체계 속에서 원인에 따른 결과에 따라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이란 복잡한 기계이며 이에 내재한 인격이란 인류가 아직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화학적물리적 성질의 상호관계로 이해한다인간은 물질로 구성되었으므로 사망시에 인간도 소멸하며 역사는 인과율에 따른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지만 최종 목적은 따로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따라 윤리도 인간에 종속된 것이며 인간의 발생과 함께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자연주의의 주장대로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가치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그처럼 불분명한기원을 가진 존재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연주의 내부에서도 견해가 불일치한다. 자연주의의 일관성 없는 논리적 모순에 불구하고 자연주의는  현대의 대부분의 과학적 연구의 틀을 제공한다. 자연주의는 하나님을 없애고 인간의 이성만을 중시하다가 진화론이나 물질론 같은 회복할 수 없는 오류를 인류역사에 선사하였다. 이것의 필연적인 귀결이 허무주의이다.  

5)    5: 零點(영점) - 허무주의    

허무주의는 모든 것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하는데 의미 있는 것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고 본다. 저자는 허무주의를 철학 사조가 아닌 하나의 감정으로 볼 수도 있으나 허무주의도 분명히 역사적인 사조이고 20세기와 21세기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 한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저자는 허무주의를 분석하면서 다른 장에서처럼 7가지 준거틀을 적용하지 않고 주로 자연주의와의 비교를 통해 자연주의가 어떻게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는 가에 초점을 맞춘다. 자연주의의 물질론과 폐쇄된 인과율의 법칙은 인류로 하여금 희망을 잃게 만들었다. 또한 인식과 지식조차 물질 작용의 결과인데 이 우연의 산물인 뇌가 존재의 원천이 참임을 실제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순을 낳는다. 다윈의 자연주의가 참이라고 할지라도 그 이론을 증명 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신빙성을 확립하는 방법조차 전혀 없다. 자연주의 윤리적 상대주의의  논리로 보면 그 틀 이외의 것에서 그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를 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의 죽음, 초월자의 상실, 우주의 폐쇄성 등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면 결국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니체와 헤밍웨이의 자살 등을 통해 우리는 허무  주의의 심각한 종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절망의 깊이와 그들의 예술을 이해해야 현대의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6)    6: 허무주의를 넘어서 - 실존주의    

저자는 6장에서 실존주의를 허무주의를 초월하기 위한 방법으로 탄생한 것으로 실로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이 의미가 없다면 무의미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미있게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으로 정의한다. 실존주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누지만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이며 특히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유신론과 어떻게 다른 지에 대해서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우주에는 물질과 인간 둘이 존재하는데 두 세계가 불일치하며 인간은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자신을 현재 상태로 빚어낼 수 있으며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롭다궁극적인 부조리는 죽음인데 생에 대한 사랑과 죽음의 확실성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독립된 세계관이라기 보다는 유신론의 특정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 의식을 가졌을 때 자신을 발견하는 그 위치를 중시한다. 인격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강조하며 지식은 주관적이며 삼위일체론과 같이 완전한 진리는 종종 역설적이라고 하였고 성경에 기록된 사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바로 선한 생활에 대한 성경의 모범들과 도덕에 대한 영원한 진리들이라고 표현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주관주의적 경향에 서서 종교를 역사에서 분리해서 그 내적 의미에 관심을 기울였다.

7)    7: 동양으로의 여행 - 동양 범신론적 일신론      

7장에서 저자는 동양 사상으로서 서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범신론적 일원론을 소개하고 있다. 이 곳에서 동양 사상을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으로 침투해 들어  와서 이미 서양화 되어 가고 있는 그러한 사상의 흐름을 고찰해 보고자 한 것이다. 동양 범신론적 일원론은 인간의 영혼은 우주의 영혼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존재하는 것은 궁극적 실재이며 그것은 모든 구분을 초월하며 현상적 계층제가 있다. 많은 것들은 이 궁극적 실재로 향한다. 인간은 가장 진실되고 충만한 존재로서 비인격인데 그는 인격, 지식, 선악을 초월하여 우주와의 합일을 체험한다. 죽음은 개인적, 인격적 존재의 종말이지만 인간의 본성에 관한 본질적인 것은 불변한다고 하며 유일자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인데 시간은 비실재이며 역사는 순환하는 것으로 본다. 동서양은 사상이나 종교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다. 어떠한 경우든 이렇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대화를 해나가면서 양자간에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야 한다. 우리가 세계관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양  사상에도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8)    8: 또 하나의 우주 - 뉴에이지      

저자에 의하면 뉴에이지 사상은 인류의 희망을 진화론적 모델에 두고 새로운 인류가 출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개개인에게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신비한 경험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이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연주의와 동양의 범신론, 애니미즘 등이 결합되어 있으며 고대의 영지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 저자는 특별히  뉴에이지에 대한 개관과 함께 부정적인 견해를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뉴에이지에 있어서 존재의 본질과 관계없이 최고의 실재는 자아이다. 우주는 자아 속에서통일되어 있으며 일반적인 의식 속에서 볼 수 있는 우주가 있고 신접한 상태와 같이 특수한  의식 속에서 볼 수 있는 우주가 있다. 이 안에서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도덕성 같은 보통의  범주들은 사라진다. 육체의 죽음은 자아의 종말이 아니며 우주 의식을 경험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며 생명은 순환한다. 실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새로운 의식의 상태에서 인식되는 존재와 사물들이 ① 자아와 떨어져 있다고 보는 비학적 해석 ② 그 존재와 사물들을 의식하는 자아의 반영으로 보는 환각 해석 ③ 우주 의식이 실재에 대한 수많은 특수한 모형중 하나를 사용하는 정신의 의식적인 행동이라는 개념적 상대주의 해석이 있다. 뉴에이지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님이 없고 우주는 닫혀 있다고 보는 점이다. 또한 애니미즘에서 차용한 악령들을 인정한다. 이 사상은 고차원의 진리라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실재에 대한 설명으로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념의 논리적인 결론은 일종의 인식론적 허무주의다. 우리는 결코 실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자아도 지향한다. 또한 우리 세계의 통일성과 함께 지식도 가져다 주는  체계를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이 사상은 차원 낮은 신비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9)    9: 사라진 지평선 -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용어는 현대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지만 이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 담론이나 하나의 세계관은 더 이상 존재치 않으며 모든 이야기가 똑같이 타당하고 그 타당성은 그 이야기에 따라 사는 공동체에 의해 확증된다고 한다. 본래 건축학에서 잡탕식으로 꾸며낸 데서 유래한 이 용어는 통합되지 않은 부분들, 상대주의, 애매모호한 혼합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상은 존재라는 1차적인 문제가 존재에서 인식을 거쳐 의미 구성으로 변천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실재 자체에 관한 진리를 우리는 영원히 알지 못하며 단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 목적에 걸맞는 언어를 구성함으로써 진리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이 믿게 될 때 그것을 들려주는 이야기꾼은 남을 지배하는 권력을 얻게 된다. 인간은 자신을 묘사하는 언어에 의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윤리 역시 언어적 구성물로서 한 사회가 선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면 다 사회적 선이 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체로 낙관적 자연주의를 정확히 비판했으며 언어가 권력과 연루되어 있다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인다. 또한 사회적 조건이 우리의 인식 작용을 좌지우지 한다고 함으로써 인간이 가진 제한성을 깨닫게 해준다그러나 모든 거대 담론을 부정한다고 하는 그 역시 거대담론일 뿐이며 우리가 실재에 접근할 수 없다는 관념과 우리가 실재에 관한 이야기만 들려줄 수 있다는 관념은 서로 모순된다. 또한 언어는 모호하지 않은 주장을 표명할 수 없다는 주장을 언어로 표현할 경우 그 속에 해결 불가능한 역설이 내포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충족성에 대한 비판은 또한 그에 기초한다. 논리적으로 오류인 것이다.

10) 10: 검토된 삶

저자는 10장에서 그동안 살펴본 각종 세계관들 중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한 조건을  네 가지로 분석하고 기독교 유신론이야 말로 이 네 가지 조건을 다 갖추어서 인간이 의미와  중요성을 찾을 수 있는 준거틀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올바른 세계관이 갖추어야할 조건은 첫째로 일관성 있는 내적인 지적 통일성이며 둘째 우리가 마주치는 실제의 자료를 모두 포함할 수 있어야 하고 세번째로 적절한 세계관은 그것이 설명하겠다고 주장한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 실존이 마주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주관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확실히 진리는 궁극적 만족을 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독교 유신론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의문점과 다듬어 지지 않은 이론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유신론은 왜 그러한 문제점들이 있는지를 초월하신 하나님안에서 다 해결된다고 설명해주고 있다. 기독교 유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어느 한 개인이 지적 세계관을 갖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하고 인격적인 우주의 주재께 인격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검토된 삶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평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대사회의 세계관을 망라하여 비교, 분석, 비판하고 여러가지 실질적이고 사회과학적인 준거틀을 대입함으로써 초월하신 하나님, 즉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분으로서 그 분 안에서 모든 이성, 모든 선, 모든 소망, 모든 실재, 모든 구분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기독교적 유신론적 세계관이야 말로 가장 바람직한 세계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 점에서 우리에게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탁월한 논리로 이 시대의 세계관을 통찰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초판을 발행한 뒤 수십년 동안 동 분야에게 그가 현대인의 세계관 형성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앞서 요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다양한 세계관에 일곱 가지 준거틀을 대입하여  분석한 뒤에 다양한 세계관이 있는 것 같지만, 내면을 들여다 보면 제한된 수의 세계관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제 1의 실재(궁극적 실재)의 본질과 속성)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기본적 대답만 있을 뿐인데 즉 영원토록 자존하는 것은 우주이거나 아니면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논리다. 또한 올바른 세계관의 선택에 있어서 네 가지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논리적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관련된 모든 자료가 포함 되어야 하며 자체 논리가 스스로 설명 가능하여야 하고 주관적으로 만족을 주는 세계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객관성이 확보되었는지의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1) 단점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중에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해당 예화에 익숙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스토리가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화는 또 다른 숙제가 된다. 예를 들어 허무주의에 관한 설명에서  저자는 로버트 파라 카폰의 작품을 예화로 들고 있는데 독자는 해당 예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다른 시간과 정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누구나 금새 이해하기 쉬운 자기만의 스토리로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책의 제목만으로도 저자가 올바른 가치관을 기독교 유신론으로 귀결시키려 한다는것을 알 수 있다. 뻔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구성 및 논리상의 반전이라든지 플롯의  짜임새라든지 하는 재미가 결여되어 있다. 또한 일곱가지 명제에 대입하여 각 세계관을 분석 하였는데 이 준거틀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저자는 이에 대해 각 세계관의 본질을 최소화한 매우 간결한 명제 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또한 그 순서에 있어서도 신 또는 궁극적 실재의 본질과 속성을 첫 번째로 했지만 다른 세계관, 예를 들어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같이 인간이 존재 하는 것을 제 1의 명제로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적 기술에 낯선 독자를 위해 준거틀에 대한 간단한 개념적, 기술적 소개와 또 다른 준거틀과의 비교 분석이 있었더라면 훨씬 더 호소력 있게 설명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다른 세계관들을 비판하면서 자체의 논리적인 모순 때문에 해당 가치관이 수용할 만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저자가 추천하는 기독교적 유신론에서도 실제 유신론은 의문점들과 거친 부분들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논리 전개에 있어서도 약점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사상에 대한 모순을 지적한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차라리 기독교적 유신론이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이러한 모순이 초월적인 존재(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추가되는 사상의 흐름을 포함해서 부분 수정을 하면서 개정판을 내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초판 때 구성  했던 방법을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했다고 봐야 한다. , 세월이 흐르면서 추가 작업을 하다 보니 전체적인 통일성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서 저자는 뉴에이지 운동과 관련, 책의 초판이 발행될 당시에는 뉴에이지의 통일된 개념 자체가 없었는데 나중에 구체화 되고 보니 영지주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초판을 발행할 당시 뉴 에이지 사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있었더라면 초판부터 이 책의 구성이나 논리는 달라졌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저자 자신의 사고도 변화할 수 밖에 없어서 일정 시점에서는 자신의  통일된 논리를 주장해야 하는데 초판을 어느 정도는 유지해야 하므로 개념상 빠지는 부분들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한 권의 책으로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완전히 다르게 저술한 것에 비해  완성도가 아무래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2)    장점

저자는 결론적으로 기독교적 유신론을 최상의 세계관으로 주장한다. 저자가 1장에서 먼저 밝힌 것처럼 이 책의 목적이 다양한 세계관을 분석, 비교하여 저자의 세계관인 기독교적 유신론으로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을 읽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발견하거나 수정하거나 또는 더 명확히 갖추어 가게 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책의 구성면에서와 타 세계관의 논리적 모순과 역사적 위치 등을 날카롭게 지적함 으로써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우선 전체 구성에 있어서 첫 번째 세계관으로 기독교적 유신론의 핵심을 설파하고 다양한 세계관을 분석 비교한 뒤 마지막에 종합적인 결론을 짓고 있다. 두 번째로 해박한 지식으로 여러 세계관들의 논리적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는데 예를 들어 뉴에이지 사상이 우주의 의식이라는 것이 악령과의 접신상태임을 암시하는 설명 등이 그것이다. 이신론을 통해서 이신론의 역사적 역할, 즉 궁극적 실재가 하나님에서 물질로 바뀌는 과도기적 역할에 대해서 적시하고 있는 점과 타 세계관을 분석, 비평하는데 있어서 각각의 근현대 철학사조를 기독교적인 관점을 일단 배제한 채 함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였는데 예를 들어 저자는 허무주의를 기술하면서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그 탄생배경이나 자연주의와의 연관성 등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현대사회의 복잡한 인간 내면에 있는 허무주의의 그림자를 그려내고 있다. 자칫 관념적으로 흐를 수 있는 세계관의 분석을 구체적이고 일목요연한 평이한 문체로 서술하여 초신자나 일반인에게도 어렵지 않게 지식을 전달하고 있는데 특히 허무주의나 실존주의 등 철학적 난제로 볼 수 있는 개념을 일곱가지 준거틀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 뒤에 네 가지 필터링으로 결론을 자연스럽게 유도한 것 등은 탁월한 장점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사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적인 방법이라 할지라도 전문적인 식견이 없이 이것을 적확하게 적용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저자의 노력과 지적 능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철학적 기반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철학지식이 실제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기독교적 통찰력과 함께 유려한 문체로 독자로 하여금  세상의 어떠한 사조라도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해주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주며 복음의 핵심을 설파하여 감동을 선사함으로써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 다가가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이 책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기독교적 유신론으로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지만 반드시 이러한 결론이 아니더라도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동양의 범신론적 일신론, 뉴에이지,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의 모든 사상의 흐름을 망라하여 비교, 분석, 정리,  비판하고 있으므로 이 책이 숙독만으로도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대부분 갖출 수가 있다. 자신의 세계관 정립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토론을 위해서도, 또한  복음을 전파하는데도 필요한 시대정신을 통찰하게 해주는 귀한 도서이다.  

적용

1) 개인에게

우리가 자신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세계관을 비교, 검토하여 체계적으로 정리, 합리적이고 가치관을 점검하고 정립한다. 우리가 자신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세계관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세계관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돌이켜 보면 중세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기독교 유신론은 다른 사조로부터 도전을 받는 일이 없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화되면서부터 여러가지 다른 사조들이 명멸해왔다. 우리는 우선 하나님이 초월자로서 궁극적 실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이고 만물을 꿰뚫어 보시며 전능하신 분이다. 우리는 그 분의 위엄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을 때까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는 닫혀 있는 곳이 아니고 열려있는 공간이다. 이신론에서 얘기하는거대한 시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 실존에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열려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는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결정론적으로 정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인류 구속의 원대한 계획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이것은 인간은 인격을 지니며 자신이 사는 우주로 부터 초월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허무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므로 항상 우리들과 소통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정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직접 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주를 바라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시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1 5절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고 있다. 죽지 않아도 되었던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의 타락으로 인해 죽어야 하는 존재로, 일시적인 존재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죽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원대한 계획을 수립해 놓으셨다. 세례를 받은 뒤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극복하며 성화과정을 통해 영화에 이르도록 하여야 한다.  

2) 가족에게

다른 가치관을 논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올바른 삶임을 가르쳐야 한다. 언뜻  보아서 앞뒤가 맞지 않는 기독교리를 알아 듣기 쉬운 말로 표현하여 자녀로 하여금 다른 세계관이 갖추지 못한 논리적 일관성이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 또한 학계의 여러 자료와 실제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증거 등을 망라해서 보여주어야  한다. 필요하면   과학적 탐구와 비판적 분석을 병행한다. 예를 들어서 다윈의 진화론이 갖고 있는 허구라든지 뉴에이지가 갖고 있는 악령의 실재라든지를 설명해주는 방법 등을 통해서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욕망, 허무, 사랑 등에 관한 모든 문제를 기독교적 유신론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다른 세계관으로는 이러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깨우쳐 준다. 이와 함께 확실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진리는 우리에게 만족을 선사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분께 인격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죄를 극복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을 인식하는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3)    교회에서

서구의 사조에서 자연주의, 허무주의로 이어지는 암울한 시대에 동양의 신비주의가 그 틈을파고 들었다. 제임스 헤릭은 뉴에이지 운동의 뿌리가 고대 영지주의에 두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뉴에이지 운동을 보고 있노라면 애니미즘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이들은 종교통합주의를 주장하고 모든 신은 다 같은 신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기독교계는 뉴에이지의  먹이감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하나님이 기록하신 성경을 거대담론을 언어와 상징으로 표현한 권력놀음이라고 주장 하고 있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실재와 부합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하면서 실용적 진리만이 유일한 종류의 진리라고 하는 종교적 상대주의를 표방한다. 교회는 이러한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힘을 잃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며 인간 실존에 침투해 들어오셔서 인류 구원의 원대한 계획을 실행해 가고 계시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능력과 지혜와 지식의 근원이시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악한 영들은 일곱 길로 달아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죽음, 이성의 죽음, 진리의 죽음, 자아의 죽음 등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망에 빠져 좌절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반영한다이에 대한 치료는 오직 기독교적 유신론에 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야 한다. 우리는 핵 시대를 살아가면서 삶의 온갖 변화와 불확실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여전히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하심을 지닌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  들에 대해 우리는 성서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결하여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그들 주위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정돈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안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환경을 조정하신다는 생각은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다.

4)    사회에서

사회에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비신자들도 있으며 또한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세계관은 이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적인 이론이 있어야 한다. 자연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기상천외한 반역사적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다윈 이전에 많은 사람들은 우주의 기원보다도 인간의 기원이 스스로 생성되기 시작했다고 믿으면서 다윈이 이를 체계화해서 진화론을 구축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최초의 생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이 이론이 처음 나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과학계를 지배하는 사상이 되었다. 자연주의의 또 다른 망령은 마르크스를 거쳐 공산주의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오류성 여부를 떠나서 엄청나게 많은 수의 인류에게 재앙이 되었다. 이들은 세상을 물질로 보고 경제적인 요소가 역사의 기본적인 결정인자이며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인식한다. 공산주의를 통해 이전 모든 사회에 존재했던 소외는 극복되고 새롭고 높은 차원의 세상이 도래한다고 보는 것이다. 한반도는 이 공산주의의 기괴한 변형인 북한이라는 체제를  낳았 으며  우리는 이들과 마주하고 살고 있다. 고 황장엽씨는 주체사상이 기독교 이론을 원용하여 만든 것이라고 실토한 바  있다. 저자도 지적한 대로 이들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독교의 비전과 상응한다. 의식 있는 사람들은 힘을 합쳐서 다윈의 진화론이 내용 없는 허구라는 점을 실증해야 한다. 한국의 창조과학회의 활동을 보면 의미 있는 창조론의 과학적 증명을 해내고 있다. 북한은 역사이래 최악의 우상숭배 국가이다. 한반도에 이러한 국가가 잠시라도 존재케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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