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1.    서론

1)    문제의 제기

2)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3)    연구의 방법과 범위

2.    기독교적 세계관의 이해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기독교 유신론적 세계관의 구조

3)    세계관의 실천적 의미

3.    본론

1)    고린도교회의 당시 시대상황 분석

2)    고린도전서의 저술 배경 및 목적

3)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세계관

4)    현대교회의 문제점과 대책

4.    결론

< 참고문헌 >

 

1.    서론

1)    문제의 제기  

현대교회는 실로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분파로 인한 갈등과 세상법정에서의 송사, 음행 문제, 우상숭배, ‘외국어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로서의 방언(γλῶσσα)의 난무, 교회의 무질서 등등 현대교회에서 벌어질 수 있고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수 많은 문제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지는 제반 문제에 대해 이에 대한 견해와 해결책을 제시한 고린도전서의 분석을 통해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재발견하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도바울은 초기 기독교 신학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의 세계관 자체가 기독교 신학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고린도교회의 문제점과 대책을 적시하여 보낸 고린도전서는 현대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세계관(가치관)을 일정한 준거틀에 맞추어서 분석하고 이를 현대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에 대입해봄으로써 해결책을 찾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해석상에 논란이 많은 현대교회의 방언(γλῶσσα)에 대해 사도 바울의 견해가 어떠하였으며 그것이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지 여부를 도출해낼 것이다.  

2)    연구의 목적

필자는 한국교회내 분란으로 사분오열되어 다니던 교회를 못 다니게 된 경우를 한국에서도 겪었고 캐나다에서도 겪었다. 고린도교회는 현대교회에서 발견되는 모든 문제, 즉 분파, 음행, 알 수 없는 소리로서의 방언 등을 안고 있는 데다가 해결책까지도 제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 전서의 당시 시대상황을 분석해보고 바울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 또는 가치관을 분석함으로써 현대교회가 겪고 있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고린도교회의 방언 문제 등 실로 중요한 여러가지 해석들이 나올 수 있어서 가치 있는 연구가 될 전망이다. 여기서는 12~14장까지 은사와 관련한 바울의 견해, 특히 14장에 나오는 방언(γλῶσσα)과 관련한 바울의 시각에 대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바울의 여러가지 교회의 문제를 대하는 시각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적으로 교회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그 대책을 찾는 것을 본 논문의 목적으로 한다.

3)    연구의 방법과 범위   

본 논문에서는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현대교회의 은사 문제, 특히 방언 현상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위해 먼저 고린도교회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고린도전서를 저술한 이유를 고찰해 볼 것이며 사도 바울의 세계관을 고린도전서를 위주로 준거틀(제임스 사이어의 7가지 측면)에 대입해 탐구한 뒤에 현대교회의 문제점들과 그 대책을 살펴보는데 특히 12~14장의 성령의 은사에 대해 바울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으며 외국어뜻 모를 소리로서의 방언(γλῶσσα )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를 통해 현대교회에 만연해 있는 방언현상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그것의 정체가 뭔지를 고찰해 볼 것이다. 이렇게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세계관을 분석할 것이지만 일부 세계관은 로마서 등 여타 성구를 참고함으로써 고린도전서가 다 커버하지 못하는 바울의 세계관의 문제를 고찰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현대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것인데 본 논문에서는 특별히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쓰인 γλῶσσα의 단수, 복수로 의미가 갈리는 것을  집중분석하여 명쾌한 성경적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2.    기독교적 세계관의 이해  

1)    세계관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세계관이란 한 사람이 자신의 삶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을 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이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실제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이든 비일관적이든) 보유 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다.”[1] 라고 정의한다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궁극적 절대 주권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 ②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③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④ 죽음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⑤ 지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⑥ 윤리는 무엇을 기초로 하고 있는가 ⑦ 역사는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라고 볼 수 있다.  

세계관이란 것은 아주 실제적인 것으로 이 세상에 대한 신념의 총합이고 우리의 일상적인 결정과 행동을 지시하는 커다란 그림이다. 그래서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른 여러 가치관과 갈등 속에 있는 모습을 조명하고 불신 시대 속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어떻게 수립하며 이에 대한 실천적 자세를 어떻게 갖추어 나갈지를 알려줄 뿐 아니라 그것을 지속시켜 준다. 세계관은 우리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인간은 이와 같은 방향감각이나 인도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식욕이나 성욕보다도 삶을 인도하는 관점을 더 근본적으로 필요로 한다.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노동, 사회집단, 교육과 같은 소위 세속적 문제들도 포함한다.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문화의 전 영역으로 확장하여 연관시켜야 하는 것이다.[2]

2)    기독교 유신론적 세계관의 구조와 방향

기독교적 세계관을 분석해보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창조, 타락, 구속이 그것  인데 알버트 월터스는 구조와 방향 이란 화두를 꺼내면서 구조란 창조자에 의해 의도된 방향을 얘기하는데 다시 말해 창조자의 원래 창조 의도에 더 가깝게 가도록, 구속 받고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 관점을 그는 자신의 스승인 에반 루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구조를 다른 말로 하면 창조의 원구조라고도 할 수 있고 방향은 왜곡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통틀어 가르치는 말로 이해해도 된다고 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제공하는데, 이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도 성경적이다. 세계의 현상들을 구조와 방향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곧 성경의 교정렌즈를 통해서 실재를 본다는 것인데, 이 교정렌즈는 어느 곳에서나  선한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가 그것을 회복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3]

3)    우리 삶에의 실천적 대입  

세계관은 우리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인간은 이와 같은 방향감각이나 인도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식욕이나 성욕 보다도 삶을 인도하는 관점을 더 근본적으로 필요로 한다.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빛이 삼각 프리즘을 통과하여 그 색깔을 드러내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노동, 사회집단, 교육과 같은 소위 세속적 문제들도 포함한다.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문화의 전 영역과 연관시켜야 한다.[4]

3.    고린도교회의 당시 시대상황 분석

1)    고린도교회의 당시 시대상황 분석

고린도는 헬라어 읽기로 ‘코린도스’(Κόρινθος)이며 ‘뿔’이란 뜻이다. 항구 도시로 성경 시대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해상 교통과 무역 중심지였고, 동시에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각 나라와 민족의 우상들이 총집결된 현란한 우상 도시였다. 한창 번성할 때는 2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이곳에서 고대 운동 경기 등이 치뤄지기도 했다. 또 고린도에는 대략 1천 명 정도의 신전 여사제(창녀)를 거느리고 있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어 온갖 음행이 자행되기도 했다. 학문(철학)과 우상 숭배가 극명하게 대립되며 조화를 이루던 고린도에 사도 바울이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제2차 선교여행 때였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 → 베뢰아 [5]→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본도 출신의 신실한 전도자요 천막 제조업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도움을 받으며 고린도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였다. 고린도에서 마게도냐로부터 온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고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으로 복음 사역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행 18:1–8).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18개월을 체류하며 사역하였다(행 18:11). 고대 세계에서 고린도는 지중해 연안을 항해하는 헬라, 애굽, 시리아, 가나안, 아시아 출신 선원들이 모두 다 체류하는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마치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자연히 타락한 문화와 가증스런 이방 종교들의 집산지가 될 수밖에 없었고, 항상 요란하고 시끄러웠다. 게다가 항구 도시의 특성상 고린도 사람들은 격정적이고 다혈질 적인 성향이 강했다.[6] 이들은 여러 언어가 섞인 외국어를 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2)    고린도전서의 저술 배경 및 목적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령의 은사를 그들의 헬라적 이원론적 사고로 이해한 데 있었던 것 같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영과 물질(육)을 엄격히 가르는 헬라적 이원론에 젖어 있어서, 바울 복음의 “시간적 이원론”을 “본질적 이원론”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자신들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 하늘의 축복된 삶을 현재 완전히 획득하는 것으로 보고, 성령의 은사들이 이러한 견해를 확인해 주는 것으로 이해 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장차 도래하리라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이미 얻은 것으로 믿고 지금 벌써 그 속에서 왕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고전 4:8). 그들은 또 자신들이 성령을 받아 육신의 제약을 벗어난 영적 존재들이 된 것으로 믿었다(고전 3:1). 그들은 세례 때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고 부활하였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그들 중 방언과 같이 현저히 나타나는 은사들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자신들이 받은 은사들을 서로에게 자랑하며, 교만과 멸시, 시기와 분쟁의 분위기를 만들고 예배 때 그 방언과 예언을 경쟁적으로 해대어 일대 혼돈을 빚곤 하였다(고전 12~14장). 성령을 통하여 얻은 “지식”으로 그들은 우상(곧 이방인들의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우상의 신전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참여하고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자유를 만끽했다(고전 8, 10장). 그들은 그들의 영혼이 벌써 하늘의 구원을 얻었으므로 그들의 몸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 시절의 문란한 성생활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문란한 고린도의 이방인들조차 할 수 없는 짓까지도 하게 된 것이다(고전 5:1~11; 6:12).[7]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질서를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저술 배경 및 목적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고린도에 보낸 서신의 수가 몇 개며 고린도전서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폭넓게 제시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게 다섯 통의 편지를 쓴 걸로 보인다. 첫 번째 편지는 고린도전서 5:9에 언급된 ‘이전 편지’(지금은 없어진)이고,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고린도전서가 뒤따른다. 세 번째 편지는 고린도후서 2:3–4, 7:8, 12에서 말하여지는 (고린도 교인들로 근심하게 한-역주) ‘통렬한’ 편지이고, 네 번째 편지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고린도후서 1–9장이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편지는 사실상 고린도후서 10–13장에 보존되어 있다.[8]물론 서신의 수에 대해 여러가지 반론이 있다. 두 통이라든지 세 통이라든지, 그러나 어떤 설을 취하든지 고린도전서내에 있는 내용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보낸 편지이다.(고전 1:2) 여기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은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의 모습을 잘 지적하고 있다. 교회란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았으며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세속에 물들면 하나님의 교회일 수가 없을 것이고 교회는 오히려 세상을 변혁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1]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김헌수역 (서울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7), 23.

[2]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양성만·홍병룡 역 (서울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7), 28-34.

[3] 알버트 월터스, 177-178.

[4] 알버트 월터스, 28-34.

[5] 가스펠서브, 성경문화배경 (서울 : 생명의 말씀사), 1579-1580.

[6] 가스펠서브, 성경문화배경

[7]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 (서울 : 두란노아카데미, 2008), 21–24.

[8] 크루즈 콜린, 고린도후서 왕인성 역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39–40.

3)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세계관(가치관)

서론에서 밝힌대로 여기서는 제임스 사이어의 세계관에 대한 7가지 준거틀에 맞추어서 고린도 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세계관(가치관)을 고찰할 것인데 고린도 전서만으로 부족할 경우에 한하여 필요에 따라서 로마서 등 여타 성구도 같이 인용하기로 한다.

a. 궁극적 절대 주권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

바울은 궁극적 절대 주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 주시는 하나님(고전 1:3) 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심(1:2)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삼위의 인격 이시며,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전지하시고, 주권자 이시며 선이시다.[1]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도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1:1) 바울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물이었다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어서 우리를 부르시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다(1:9).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에 나타나셔서 우리에게는 구원이 되시었다(1:18). 이 세상의 모든 지혜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1:21).

b.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울은 로마서 1 19~20절을 통해 우주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자신을 계시 하셨는데 사람은 그가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을 환히 드러내 주셨다고 한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게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모든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는데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시며,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살피신다(고전 2:10).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사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특성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데 첫째로 우주를 질서 정연하게 창조하셨다는 것과 그 체계가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주가 프로그램화 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주 운행의 전개 유형에 끊임없이 관여하신다. 만일에 우주에 질서가 없다면 우리의 결정은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의 결정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2]   

c.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이다. 창세기 1 1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 죽음이 들어왔다. 고린도 전서 15 21절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온다고 하면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하고  있다. , 인간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죄를 지어 죽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존재인 것이므로 죄를 자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인간 타락의 중심에는 죄의 근원인 우상숭배가 있다. 바울은 광야에서 멸망한 이유를 우상숭배한 결과로 경고한다 (고전 10:5-7). 우상숭배는 성적인 타락과 연결된다. “하나님  께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성적인 죄에게 넘겨주신다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신자들은 특히 성적 순결의 측면에서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언급[3]하고 있는데 로마서 1 23~26절이 번갈아 가면서 우상숭배와   육체적 타락을 두 번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  라서가 아니라 우상 숭배, 즉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정욕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버려 두다로 쓰인 헬라어 παραδίδωμι 내어 주다로 번역해야 한다. ‘그냥 놔두다라는 의미가 아닌 적극적으로 죄에 빠지도록 하였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숭배라는 잘못을 저지른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음란과 정욕에 빠지도록 하셨는지를 확인해 봐야한다.

바울은 우상 숭배의 배후에는 사탄, 즉 어둠의 영과 타락한 세상 권세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고전 10:19–22).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말을 따름으로써 영적인 간음을 행했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우매해지면서 우상숭배를 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육체적 타락에 넘어 가도록 놓아 두시고 또한 역리적인 육체적 타락까지 이르게 하신다.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5:31-32) 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거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왜 수치와 두려움으로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렸는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

d. 죽음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죽음 뒤에 있을 부활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은 썩을 것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며,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난다. 또한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것으로서 육신의 죽음 뒤에 우리는 다 잠들 것이 아니고 다 변화할 터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도리 것이고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51~2)이라고 한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비록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훼손되었다. 한편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하시고 선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시작하셨다. 물론 인간은 이 구속의 사실을 접하고 그 구속을 거부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사망시 인간은 변형된다.하나님과 그분 백성의 상태와 같이 영화된 존재로 변하여 하나님과 같이 살게 되거나 영원히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지옥에서 사는 존재로 변하게 된다.[4]

e. 지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아담과 하와가 행한 반역 행위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죽음에서 그치지 않고 그 후손들을 긴 세월 동안   인격적, 사회적, 자연적 혼란에 빠트렸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형상이 모든 면에서 훼손되었다. 인격의 면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능력이나 지성의 지시대로 자유로이 자신의 길을 결정할 능력을 상실했다. 인간의 지성 역시 손상되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주위 세계에 대해 완전히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없으며, 논증 역시 항상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으로 구속될 수 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와 무한한 은총으로 사람들은 새 생활의 가능성을 얻었다.[5]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모든 지식이나 지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고 한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이고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는데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고전 1:21)이라고 하였다이에 덧붙여 사도 바울은 여러가지 신령한 은사 역시 같은 성령을 통해서 온다고 주장한다(고전 12:4).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시는데(12:8),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12:7)이라고 결론짓는다.

f. 윤리는 무엇을 기초로 하고 있는가

윤리는 초월적이며 선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의  유일한 원천이시다. 물질세계 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서도 오직 하나님이 원천이시다. 하나님은 선이시며, 이 속성을 인간에게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율법과 도덕의 원칙에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역시 본질적으로 도덕적 존재이며, 우리 행동에 도덕적 범주가 반영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6] 바울은 자신이 삯을 받지 않고 헌신하는 것 그 자체를 자신이 보상받을 덕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독백한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819)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 하는데 이러한 의식을 갖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한다(9:16).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윤리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며 하나님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g. 역사는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일직선적 종말론적 구속사를 경륜하고 계신다. 창세기 2 4절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놀라웁게도 천지창조 자체를 인간 구속의 역사와 연결시키신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우선 족보 (복수형), 계보를 뜻하는 תוֹלְדוֹת(톨레도트)를 창세기 안에서 찾아 보면 창 2:4(천지 창조 내력),  5:1(아담 자손),  6:9(노아의 족보),  10:32(그 백성 들의 족보), 11:10(셈의 족보),  25:13(그 세대),  7:2  (야곱의 족보) 에 나오는데 한글 번역으로는 족보, 세대, 계보, 자손, 후손, 내력, 대략 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지만(실제로 한글 개역개정판에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원어로 분명히 같은 단어를 쓰는 것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인류의 족보와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천지창조는 인류 구속의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2:4)라고 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거룩한 선포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바울은 종말론적 구속사를 설명하면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고전 15:22)이라고 하고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인데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며(고전 15:23) 그 때가 마지막인데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모든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24)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진다 (13:10)고 하면서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지나,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사랑은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한량없이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ἀγάπη)이다.

4)    현대교회의 문제점과 대책 

< 분파의 문제 >

서로 다른 생각으로 다투고 있는 고린도교회 신도들에게 바울은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쳐 달라고 간곡히 당부한다(1:10).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받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자들의 모임이며, 그러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교회가 분파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여러 갈래로 찢는 행위이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몸을 부인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와의 세례를 통한 연합을 부인하는 행위이다.[1]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느냐라고 통렬하게 질문하면서 신도들 간에 화합할 것을 당부하였다.

< 음행의 문제 >                      

바울은 고린도 전서 5장에서 음행과 관련하여 신랄한 어조로 비판을 하고 있는데 마침 고린도교회에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신도가 있다고 하여 교회에서 이를 쫒아 내지 않은 것을 신랄히 비판한다(2). 그러면서 신도라 하는 어떤 사람이 음행하는 사람이거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거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사람을 중상하는 사람이거나, 술 취하는 사람이거나, 사람을 중상하는 사람이거나, 약탈하는 사람이면, 함께 먹지도 말라고 경고하면서(11) 그 음행한 자를 내쫓으라고 다시 한번 독촉한다(13).

< 우상숭배의 문제 >

바울은 10장에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불순종하여 벌 받은 것을 하나 하나 거론하면서 고린도교회의  우상숭배 문제를 경고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우상숭배하고 간음하며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 파멸을 맞은 것을 예로 들며 서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여기서 서 있다는 표현은 믿음 안에서 있다는 표현으로 한 번 세례를 받았다고 영구히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계속 의지하고 순종하는 믿음의 관계 속에서 만이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상숭배를 멀리하라”(10장 14절). 바울은 7절 에서 언급한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이제 본격적으로 펼친다. 여기서 우상숭배란 신전 제사에 참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신전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성찬식에 참여하는 예로 들어 설명한다. 여기서 멀리하다는 헬라어 퓨고(φεύγω)는 ‘도망가다’, ‘피하다’라는 뜻이므로 바울은 “우상숭배로부터 도망가라”고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는 곳이나 계제를 적극적 으로 피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2]

< 은사의 남용의 문제 >

12장을 은사장이라고 한다. 교회는 획일성을 추구하지 않고 다양성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추구하는 곳이다. 그래서 은사가 다양하게 주어지고, 주어진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모두 귀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어떤 은사를 받았는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12장 1~2절에서 바울은 신령한 은사에 대해 고린도 교회교인들이 알기를 원한다면서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 벙어리 우상들에 의하여 휩쓸려 갔었다.”고 한다. 이 구절은 고린도교회의 은사, 특히 방언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울은 진정한 성령의 현상[3]/역사/은사를 인식함에 있어 먼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그릇된 시금석 될 말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신비스럽고 초자연적인 것 같은 체험이나 황홀경의 체험 등을 성령의 현상이나 역사의 체험으로 생각한다.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여 신비스러운 황홀경에 빠진 상태에서 하는 방언이나 예언을 성령의 특별한 나타남이요 역사라고 열광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투어 방언하고 예언하여 교회의 예배가 혼돈에 빠지곤 하였다. 이것은 고린도를 포함한 전체 헬라 세계에서 신의 영이 임하여 일으킨다고 본 황홀상태를 높이 평가하고, 황홀경에 빠진 상태에서 디오니소스(Dionysos) 같은 신을 예배하던 전통의 반영이었다.[4] 이로 미루어 분명히 고린도 전서 14절에는 ‘외국어’로서의 방언과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황홀경의 발화?)”로서의 방언이 같이 쓰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쓰인 방언(γλῶσσα) 외국어만이라는 주장을 일축하는 것이다.

< 은사로서의 방언(γλῶσσα)에 대한 고찰 >

바울은 12장 은사장과 14장 예언을 권고하고 방언(γλῶσσα)의 남용으로 인한 교회의 무질서를 질책하는 한 가운데 13장에서 돌연 사랑을 예찬한다.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는 자세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령의 은사이며 사랑을 가진 자는 자랑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주장하지도 않을 것이고 경쟁을 조장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예언의 은사를 우선적인 성령의 은사로 부각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언의 은사는 예언하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회중 전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다고 한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하나님의 가족 전체에 유익을 주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사랑의 자세를 가지고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때에라야 은사를 소유한 사람에게 그 은사가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만약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과시하거나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은사는 사랑이 바탕이 된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달성되는 하나님과 협력 관계는 결국 가족 전체를 이롭게 할 것이다.[5] 결론적으로 바울은 은사는 사랑 안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며 또한 방언이 “외국어”이든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이든 사랑과 질서 안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현대교회에 만연하여 있는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γλῶσσα)에 대한 그의 견해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γλῶσσα가 복수로 쓰일 때 외국어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단수로 쓰일 때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로 씌였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세 번의 방언(γλῶσσα)이 전부 복수명사로 쓰인 것으로 증명된다. 이렇게  γλῶσσα의 단수와 복수 문제에 대한 해석을 혼동해서 온갖 종류의 해석이 난무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도 당시 고린도가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각 지방에서 외국인이 빈번하게 왕래하여 여러 외국어가 불규칙하게 혼합된 지방언어라는 설도 있고 현대 교회에서의 뜻 없이 반복되는 음절로 기도하는 “방언”현상이라는 설도 있다. 사도 바울은 최소한 9개국어 이상은 했을 것이고 이 외국어 능력은 당시로서 온 세계  였던 지중해 연안에서의 그의  역사적 선교에 없어서는 안될 은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여러 외국어를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만(18) 만 마디 외국어보다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했다(19).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사람이 모두 외국어를 할 수 있기를 바랬으나 그것이 통역이 되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다면 그 보다는 예언이 더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5) 외국어 하는 것은 막지는 말되 예언하기를 열심히 구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37). 그러면서 그는 만약에 자신이 고린도 신도들에게  외국어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을 전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유익이 안되지 않겠냐고 반문하면서(6) 온 교회 신도들이 모여서 외국어로 말하고 있으면, 초신자 들이 미쳤다고 할 것(23)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외국어를하는 것 자체는 은사이지만 교회안에서는 그것보다 예언을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반면에 unknown tongue으로서의 γλῶσσα에 대해서는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god, θεός)에게 말하는 것인데 영(spirit, πνεῦμα)으로 비밀을 말하지만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한다(2)”고 하고   자기에게만 덕을 끼칠 뿐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끼친다(4)”고 하였다. 또한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몰라서 말을 해도 어떻게 남에게 전달 되겠는가(9)라고 반문하고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할 것(13)이며 방언으로 말할 때는 둘 또는 많아야 셋이서 말하되 차례로 하고 한사람은 통역을 하라(27)고 하면서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하지 말고 집에서 자신과 하나님에게 할 것(28)을 권면한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했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내가 만일(ἐάν)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하면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내 마음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할 것(14)이라고 하고 교회에서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할 바에는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 하기를 원한다(19).”고 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하고 있는 unknown tongue에 대해 정확히 그것이 뭔지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일단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 현상을 대하고 있지만 확실치 않기 때문에 통역이 있을 경우에는 해도 좋지만 제한적으로 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을 함이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줄 알고 방언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적인 행위(privacy)이므로 금할 것까지는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1] 김세윤, 47.

[2] 김세윤, 245–246.

[3] 김세윤, 308–309. 

[5] 데이비드 A. 드실바, 신약개론 박상민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773–775.

결론

본 논문에서는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현대교회의 은사 문제, 특히 방언 현상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위해 먼저 고린도교회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고린도전서를 저술한 이유를 고찰해 보았으며 사도 바울의 세계관을 고린도전서를 위주로 준거틀에 대입해 탐구하였고 특히 12~14장의 성령의 은사에 대해 바울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으며 외국어 뜻 모를 소리로서의 방언(γλῶσσα )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를 자세하게 살펴봄으로써 현대교회에 만연해 있는 방언현상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그것의 정체가 뭔지를 고찰해 보았다. 이 문제의 중요도에 비추어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unknown tongue 자기에게 덕을 끼친다”(4)는 구절과 관련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고로 번역이 되어야 할 것인데 바울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일부에서 주장하는 현대교회의 방언현상에 대한 방언 악령설은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한 것 같고 오히려 황홀경의 발화가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본 소고를 바탕으로 앞으로 현대교회의 방언현상이 어떤 것인지, 당시 고린도교회의 “unknown tongue”과 같은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많은 획기적 연구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

 

 < 참고 문헌 >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김헌수 역.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7.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양성만·홍병룡 역.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7.

가스펠서브. 「성경문화배경」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15.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8.

크루즈 콜린. 고린도후서」 왕인성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토마스 슈라이너. 「신약신학」 임범진 역. 서울 : 부흥과 개혁사, 2017.

윤석준. 「한국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이야기」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1.

스탠리 그렌츠. 「조직신학」 신옥수 역. 파주: CH북스, 2017.

알리스터 맥그레스. 「신학이란 무엇인가」 김기철 역. 서울: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 2017.

호남신학대학교. 「신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2007.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정옥배 옮김.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8.

주해홍. 「말씀이 삶이 되어」 서울: ㈜ 도서출판 에스라, 2018.

노르만 가이슬러. 「기독교 철학개론」 위거찬 역.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디오게네스 알렌. 「신학 이해를 위한 철학」 정재현 역. 서울: 기독교서회, 2018.

강영안. 「강교수의 철학이야기」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5.

윌 듀랜트. 임헌영 역, 「철학이야기」 서울: 동서문화사, 2016.

김지찬, 「구약개론」 서울: 대한예수회 장로회총회, 2009.

박형용. 「성경해석의 원리」 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14.

정병준. 「한권으로 읽는 기독교 역사와 사상」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6.

김동호. 「삶이 바닥부터 흔들릴 때」 서울: 바이블리더스, 2007.

이성호. 「교회의 직분자가 알아야 할 7가지 서울 : 세움북스, 2017.

 

 

 게시물(포스팅) 다국어성경연구소(多國語聖經硏究所, Multilingual Bible Institute) 사적인 저작권이 있는 (사진 포함)입니다무단 복제와 배포, 가공이 불가하지만 자료의 출처와 URL을 명기할 경우 사용이 가능합니다 연구소는 선교활동을 위한 다국어 성경읽기(聖經通讀, Reading the Bible)운동과 미전도 소수민족의 성경 번역사업을 지원하는 기관입니다성경읽기를 위한 성경 히브리어(Hebrew) , 성경 헬라어 (Greek)강좌와  함께 고전 라틴어 (Latin)의 강의도 개설(online offline 가능)이 되어 있습니다또한 어린이부터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정철 BIBLE ENGLISH 시스템을 통한  영어 강좌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본 게시물(포스팅)은 영어(English), 중국어(Chinese), 일본어(Japanese), 한국어(Korean)의 4개국어로 번역이 되어 전세계로 서비스되어 기독교 선교사명을 활발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선교활동  제휴 문의usedslr@gmail.com, 홈페이지(homepage) http://www.nkmissio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