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ert L. Wolters : 알버트 월터스외 1/ 양성만 외 1

알버스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출간된지 30여년이 지나도록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개혁주의적 대안과 그 성경적 기초를 제시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구조와 방향이란 화두를 꺼내면서 구조란 창조자에 의해 의도된 방향을 얘기하는데 다시 말해 창조자의 원래 창조 의도에 더 가깝게 가도록, 구속 받고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 관점을 그는 자신의 스승인 에반 루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구조를 다른 말로 하면 창조의 원구조라고도 할 수 있고 방향은    왜곡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통틀어 가르치는 말로 이해해도 된다고 한다. 이 책은 포괄적문화와 정통 기독교의  기본요소를 결합시켜 세계를 봐야 할 필요가 커져 가면서 일종의 영적 공백 상태에 있던 세상에 개혁주의라는 성경적 세계관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창조의 범위, 타락이 미친 영향,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란      창조의 모든 부분과 전 문화 영역을 그리스도안에서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제 1장에서 성경적 세계관의 내용을 설명하고 우리가 성경에 순종하고자 할 때 그 내용이 우리 생활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뿐만 아니라 그 특징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올바른 세계관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밝히고 성경이 그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준거틀이 된다는 점을 논증한다. 또한 신학과 철학이 세계관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분석한다. 세계관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다. ‘사물들  이란 말은 우리 신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지칭할 수 있으며 세계관은 개인의 신념의 문제이며 한 개인의 확신(conviction)과 관련된 것이고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하여 갖는 근본적 신념들은 하나의 틀이나 유형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세계관은 우리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인간은 이와 같은 방향감각이나 인도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식욕이나 성욕보다도 삶을 인도하는 관점을 더 근본적으로 필요로 한다.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노동, 사회집단, 교육과 같은  소위 세속적 문제들도 포함한다.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문화의 전 영역과 연관시켜야 한다. 신학과 철학은 세계관을 과학적으로 다듬은 결과물이다. 기독교 철학은 성경의 기본적인 범주들에 비추어서 피조물을 보고, 기독교 신학은 피조물의 기본적인 범주들에 비추어 성경을 본다. 성경에 기초를 둔 세계관을 종종 개신교 종교개혁에서 이름을 따서 개혁주의적세계관이라 부른다. 개혁주의적 세계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적 신앙 고백의 모든 주요한 용어들을  보편적이고 포괄적 의미로 이해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종교적이며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이고 비속한 영역으로 나누려고 한다. 이는 이원론적 세계관의 변형으로서 우주의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는 개혁주의 세계관의 통합적 관점과 대조된다.  

2)    2: 창조

저자는 제 2장에서 창조에 포함된 여러 가지 측면을 논의하고 있다. 창조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구별해주는 가장 원초적인 주장이다. 먼저 저자는 창조를 법의 측면에서 두가지로 살펴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 과 연결시키는 한편 창조를 법과 우주의 상호관계로 보았을 때 창조의 범위는 훨씬 커짐을 지적한다. 특별히 창조를 통한 계시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 우리의 기독교적 가치관을 정립해나갈 것을 권면하고 창조는 유기체적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 발전해 감을 논증한다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 행위 전체를 가리켜 법이라고 한다. 이것은 구속 사역과는 구별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매우 풍부하고 폭넓은 범위를 가진다. 하나님이 자신의 법을 우주에 부과하시는 방식, 그의 뜻이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은 다음  두 가지이다. 그 분은 매개자 없이 직접 그렇게 하거나 인간이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렇게 하신다. 따라서 두 종류의 법이 존재하는데 자연법칙과 규범이 그것이다. 자연법칙과  규범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지만 그것들은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그분의 보편적인 법에 속한다. 창조의 법 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구별은 일반법과 특별법의 구별로서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일반법과 함께 모세의 이집트인 살인과 같은 특별법적 상황이 존재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법과 깊이 관련시키고 있다. 사람이 범죄하여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에 왜곡된 모습이 없었다. 혼돈하다는 것은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핵심에 있었다.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말씀은 또한 그 아들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법의 전 영역에 깊이 참여하신다. 그는 창조와 재창조 모두의 중보자이다. 창조를 법과 우주의 상호 관계로 이해한다면 창조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범위를 가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규례는 사회 구조와 예술의 세계, 사업과 상업 영역에까지 미친다. 인간 문명은 그 전체가 규범화 되어 있으며 우리는 모든 곳에서 한계와 예법과 표준과 기준을 발견한다. 인간 삶의 그 어떤 부분도 창조된 질서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존재와 행위 전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서나 성에도 규범이 있다. 우리의 사고는 사고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언어는 의미론적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것이 주어진 하나님의 법에 종속되며 모든 것이 피조성을 갖고 있다. 신학자들이 자연적 삶이라고 부르는 모든 분야들이 피조적 실제의 부분들인 것이다.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억누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고 알지만 이 지식을 왜곡하고 변형한다. 정의와 신실성, 청지기직과 경외에 대한 창조 규범을 하나님이 분명한 언어로 주신 적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규범적인 행동기준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하다. 요컨대 하나님의 법의 특정 측면이라고 불렀던 것, 즉 하나님의 인도 혹은 소명을 가리킨다고 이해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빛 속에서만 창조 세계의 규범성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다. 성경의 빛은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해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은 일반 계시와 달리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자연의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명쾌함이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 작업을 실행해 주셨지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하나님의 법의 지배는 자연계에서는 직접적이지만 문화와 사회의 영역에서는 매개적이다. 자연법칙은 소위 제 2창조에서 하나님이 직접 발전시킨 땅을 지배하고, 규범은 제 3창조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전시키시는 땅을 지배한다. 여덟번에 걸친 “…이 있으라라는 창조 명령이 동물과 식물과 광물에 부과된 창조의 법을 대표한다면, 4중적 문화명령은 사회와 문화에 부과된 창조의 법을 대표한다. 창세기 2장은 이것은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여기서 톨레도트(תּוֹלֵדוֹת)는 복수형으로 쓰여 내력, 족보, 역사 등의 뜻으로 “…에서부터 발생하는 역사적 발전상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란, 자연적 차원이든 인간적 차원이든 창조의 모체 안에 숨겨져 있는 가능성들을   대대로 드러내고 개발하는 과정이다. 창조 세계란 한번 만들어진 다음에 고스란히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는 성장하고 개발되며 이 성장과 개발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 속에  함축된 발전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창조의 법은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구현 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반면 우리가 사람의 역사 즉 문화와 사회의 개발 과정이 창조와 창조의 발전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안다면, 범죄로 인한 탈선에도 불구하고 태초부터 그것들이 하나님의 우주를 향한 계획안에 있었고 우리가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청사진의 일부 라는 것을 안다면 정치나 영화, 컴퓨터 공학, 사업 경영, 경제, 스카이  다이빙과 같은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새 땅에서의 삶은 이  땅에서의 삶과 비교해볼 때 마치 번데기에서 나온 현란한 빛깔의 나비와 같이 아름다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그처럼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류가 그것을 더럽혔을 때 그것을 폐기하기로 작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 그것을 다시 새롭고 선하게 만들기로 하셨다. 창조 세계가 선하다는 사실은 또한 우리가 줄곧 가정해 온 다른 사실, 즉 법의 지배가 하나님의 피조물, 특히 남자와 여자들에 대한 어떤 구속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자유롭고 건강한 직무수행을 가능케 해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여기서  법이란 먼저 창조의 법 즉 세계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지혜가 정한 질서를 의미하지만, ‘실정법즉 창조의 규범들이 국가, 교회, 가족, 결혼, 예술, 산업 등 여타 모든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실정된 법도 다 포함한다고 보아야 한다.  

3)     3 : 타락

개혁주의 세계관의 핵심은 창조, 타락, 구속이다. 저자는 제 3장에서 먼저 타락의 범위를 지정하고 죄가 원래의 선한 창조 세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밝히는데 이 과정에서 본 책의 중심 주제인 구조와 방향에 대해 개념정리를 하는 한편 죄와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결론적으로 세상은 창조세계가 죄로 인해 왜곡된 것임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인류 전체 뿐 아니라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과 경고를 무시한  아담의 실패에 연루되어 있다. 이 세상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타락의 결과들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결혼이라는 창조 제도는 현대 서구에서 심각하게 공격받고 있다. 이혼과   연속적인 결혼은 인간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왜곡하고 위반하는 예들이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므로, 악이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 대적한다. 창조세계 전체가 언젠가는 해방되겠지만 반 규범성과 왜곡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만일 아담의 범죄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모든 창조 세계의 타락을 가져왔다면, 이러한  타락이 원래 선한 창조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죄는 창조를 파괴한 것도 창조와 동일시되는 것도 아니다. 죄악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에 대한   그 분의 한결 같은 신실함을 무효로 돌릴 만한 힘이 없다. 죄는 창조세계의 낯선 침입자로서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는 전적으로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속에 죄의 존재를 허용하는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죄가 근본적으로 언어 도단적이고 신성 모독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채, 죄의 책임을 우리 자신이 아닌 창조주께 돌리는 행위다. 구조는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구조는 창조의 법, 달리 말하자면 다양한 창조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그 근거를 둔다. 이는 서양 철학의 전통이 자주 본체나 본질, 본성이란 말로 가리켜 왔던 실체를 지칭한다. 반면에 방향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 혹은 변질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한다. 모든 창조 세계에 주어진 구조는 그 방향이 뒤틀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그 구조는 악이 초래한 타락과 속박에 한계를 그어 준다. 구조는 결코 잘못된 방향에 의해 말살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향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창조 구조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시는 분이다. 세상이란 그리스도 밖에서 죄의 지배를 받는, 구속받지 못한 삶의 총체를 가리킨다. 성경의 세속적인 생활 양식에 대한 거부를 마치 타계적인 생활 양식을 권면하는 것으로 잘 못 이해한다. 죄를 범하는 행위가 사탄의 속박 아래에서 이루어지지만, “마귀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했다는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사탄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창조세계가 변질되어 신음하도록 만든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우리는 타락이 지상에 속한 창조의 전 영역에 영향 끼치고 있으며 죄는 창조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창조 세계의 기생충이라는 사실, 죄가 온 땅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모든 사물을 더럽게 만들어 세상적인’, ‘세속적인’, ‘땅의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이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고대한다.

4)     4 : 구속

저자는 구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이라고 규정하면서 제 4장에서 본서의 중간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첫째, 창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둘째, 타락은 창조 세계에 한 구석도 빠짐 없이 철저히 영향을 미친다. 셋째,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구속은 회복, 즉 창조에다 어떤 것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손상되지 않은 창조 세계의   선한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 회복은 창조세계의 어떤 영역에 국한되기보다 창조 세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회복 곧 구원이 새로운 무엇을 가져 온다기 보다 창조 세계의 삶에 이전에 없었던 영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차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이전부터 계속 존재하던 것에 새로운 생명과 생동감을 불어 넣는 것이다. 은혜는 자연을 회복한다. 즉 자연을 온전하게 만든다. 구속의 범위는 타락의 범위만큼 넓고 모든 창조세계를 포괄한다. 창조 세계에 속한 것 가운데 이 두 대적 간의 전쟁에 영향을 받지 않는 중립적인   요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곳에서 인간의 죄성은 타락시키고 왜곡시킨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는 죄악의 패배와 창조의 회복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계시인 신약 성경 전체의 핵심주제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  에게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2:28)라고 하셨다. 진정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현존해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 나라가 언제 임하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1라고 대답하셨다. 헬라어 ‘ἐντός’ within의 뜻 보다는 among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속이나 바리새인들 사이가 아니라 그 바리새인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통해 임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 또 그 나라의 도래는 아직 완료된 실재가 아님을 가르치셨다. 므나 비유( 19:11-27)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최종적으로 세상이 새롭게(중생) 것을 기대하면서 그 나라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창조 세계의 질병과 악마화에 대항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적 신앙은 역사적으로 진보적이며 결코 반동적이지 않다. 그것은 인류 역사를 동산에서 도시로 가는 움직임으로 보며, 근본적으로 그런 움직임을 긍정한다. 여기서 개략적으로 살펴본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우리가 구속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상에 대한 개념이 그랬던 것처럼, 그 나라의 범위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나라의 범위를 제한 하려는 뿌리 깊은 성향이 있는데, 이는 세상을 성스러운 영역과 속된 영역으로 나누려는 끈질긴 속성과 비슷하다. 이러한 제한적 속성을 보여주는 가장 일반적인 예는 경건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경건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 경건의 영역, 즉 영혼의 내면 생활로 국한한다. 그들은 누가복음 17:21 보라,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among you)있다”(NEB) 라고 번역 하기보다 너희 안에(within)”(KJV)라고 번역하기를 선호한다.   

5)     5 : 구조와 방향의 구분    

저자는 제 5장에서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중심적 주제들과 관련하여 기독교적 세계관이 어떻게 성경을 믿는 백성들의 신념을 형성시켜 주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함의를 밝히고 있다.  개혁주의의 의미를 밝히면서 결국 개혁은 내적인 재생 , ‘성화라고 결론을 내린다. 현대의 혼란스러운 가치관의 혼동시대에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바로 구조와 방향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구조란 창조된 사물의 본질, 즉 하나님의 창조의 법에 의해 창조된 사물을 말하며 방향이란 범죄로 인해 그 구조적인 규례로부터 일탈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그 구조적 규례에 다시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삶의 모든 분야를 분석할 때 개혁주의는 이 성경적 구별을 일관성 있게 적용한다. 개혁은 성별이 아니라 성화를 의미한다. 성별은 외적인 갱신을 의미하고 성화는 내적인 갱신을 의미한다. 개혁이라는 말이 내적인 재생으로서의 성화를 가리키는 단어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할을 통한 창조의 회복을 말할 경우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분명히 성화다. 성화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와 승리를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창조를 죄로부터 정화하시는 과정이다. 이처럼 개혁은 일차적으로 성화를 의미한다. 개혁의 두 번째 특징은 이 성화의 방법이 폭력적 전복이 아니라 점진적인 갱신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성별은 사물의 내면을 건드리지 않고 혁명은 사물을 제거하는 데 비해, 개혁은 그것의 내면 깊숙이 파고 들어가 대상을 갱신하고 성화시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깨끗하게 하고 개혁하는 것이다. 창조에 관한 논의에서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여러 사회적 제도들이 창조의 영역에 속한  다는 원리는 두루 적용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각 사회제도가 다른 사회제도로부터의 간섭을 막아내고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 또한 창조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참여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삶, 특별히 감정적인 부분에 까지도 영향을 미침은 당연하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분별력과 인간 본성에 관한 성숙한 통찰력으로 윤리적 회색지대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6)     6 : 결론

기독교적 분석과 성찰의 기초가 되는 성경의 이중적 강조점,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주적재창조는 이전에 인본주의적 범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었던 세계를 이제는 기독교 유신론적인 가치관이라는 전신갑주를 입은, 신선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지금까지 살펴본 개혁주의 세계관 자체가 성경적 관점의 기본 통찰들을 다른 학문과 상관있는 체계적인 철학의 기초와 연결시켜 줄 수 있는 개혁주의적 철학을 요구한다. 세계관은 철학적 범주들을 매개로 하여 학문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광대한 창조의 일부에 불과하며 복음에 입각한 세계관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어느 영역에서 부르심을 받았든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여 현실세계에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야 말로 매우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평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대사회의 세계관을 망라하여 비교, 분석, 비판하고 여러가지 실질적이고 사회과학적인 준거틀을 대입함으로써 초월하신 하나님, 즉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분으로서 그 분 안에서 모든 이성, 모든 선, 모든 소망, 모든    실재, 모든 구분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기독교적 유신론적 세계관이야 말로 가장 바람직한 세계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 점에서 우리에게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탁월한 논리로 이 시대의 세계관을 통찰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초판을 발행한 뒤 수십년 동안 동 분야에 그가 현대인의 세계관 형성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앞서 요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다양한 세계관에 구조와 방향이라는 준거틀을 대입하여 분석한 뒤 또한 다양한 세계관이 있는 것 같지만, 내면을 들여다 보면 제한된 수의 세계관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제 1의 실재(궁극적 실재)의 본질과 속성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기본적 대답만 있을 뿐인데 즉 영원토록 자존하는 것은 우주이거나 아니면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논리다. 또한 올바른 세계관의 선택에 있어서 네 가지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논리적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관련된 모든 자료가 포함 되어야 하며 자체 논리가 스스로 설명 가능하여야 하고 주관적 으로 만족을 주는 세계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객관성이 확보되었는지의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1) 단점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원어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중에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해당 원어에 익숙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단어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원어는 또 다른 숙제가 된다.    예를 들어 너희 안에에 관한 설명에서  저자는 원어 ‘ἐντός’를 설명하고 있는데 원어에 생소한 독자에게는 이것은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교양 서적의 형태를 띠고 있는 책이므로 누구나 금새 이해하기 쉬운 현대어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에 원어를 사용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차라리 전문적으로 확실하게 설명하고    정확한 원어로 표현해서 원어 공부를 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 많은 신학관련 서적들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다. 우리는 책의 제목만으로도 저자가 올바른 가치관을 성도들의 성화과정으로 귀결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뻔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구성 및 논리상의 반전이라든지  플롯의 짜임새라든지 하는 재미가 결여되어 있다. 또한 구조와 방향이라는 명제에 대입하여   창조, 타락, 구속을 분석 하였는데 이 준거틀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저자는 이에 대해 구조와 방향을 구별해 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과업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여 신선하게 자신의 논리를 주장한 장점이 있지만 결국 성화과정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조금 진부한 측면이 없지 않다. 조직신학적 결론 말고 또 다른 자신만의 주장이 있었더라면 더 호소력 있게 설명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세계관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면서 철학과 신학, 과학 등 학문이 세계관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고찰하고 있지만 다른 세계관들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적 유신론과 대척관계에  있는 자연주의를 소개하고 비판하면서 그에 기반해서 성경적 세계관을 장점을 돋보이게 해야 하는데 이러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독단적인 주장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저자는 초판이 출간된 지 20년이 지나 확대개정판으로 낼 때 저자가 N.T. 라이트, 레슬리 뉴비긴 등의 학자들과 나눈    대화의 결실로서, 초판 이후 제기된 비판적 논점들을 수용하여  내러티브와 선교라는 맥락에서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접접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추가하게 된 내용은 초판 내용과는 좀 통일성이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내러 티브와 선교라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거라면 본문 안에 녹여 놓았어야 마땅했다. 그러면 이 책의 구성이나 논리는 달라졌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저자 자신의 사고도 변화할 수 밖에 없어서 일정 시점에서는 자신의 통일된 논리를 주장해야 하는데 초판을 어느 정도 유지해야 하므로 개념상 빠지는 부분들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한 권의 책으로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완전히 다르게 저술한 것에 비해  완성도가 아무래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2)    장점

이 책에는 그의 교육 배경인 신칼빈주의가 그대로 녹아 있다. 신칼빈주의는 창조 세계가 특정한 방향으로 돌아가도록 창조된, 다양하면서도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구조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렇게 신칼빈주의가 주장  하는 구조와 방향이라는 신선한 통찰을 기독교적 유신론안에 녹여 놓았다. 더구나 이 책에서 구사한 간결체 형태의 서술로 군더더기 없이 무엇이든 분명한 결론을 짓는 듯한 문체는 저자의 논조를 강하게 어필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저자의  주장에 확신을 갖게 만들어 준다. 어떤 책들보다도 논리가 명쾌하다. 본서는 성적 범죄 문제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방향을 제시해준다. 하나님은 정상적인  성적결합을 제외한 모든 것을 단호히 금지하셨다. 그래서 저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모든 성적인 문제와 그 해결방법을 성경을 자세히 검토 해서 적용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충고와 관련 성경내에서 성적인 문제를 고찰해 보면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해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5:31-32) 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언한다. 이와 관련  우리는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어떻게 조명해 주고 있는지를 성경 안에서 고찰하여  해답을 찾아야 하는데 이 책은 이러한 성적 궁금증을 탐구해가는데 조언을 해준다. 창타구가 복음주의 세계에서 광범위한 방향전환을 일으킬 만큼 성공적이 된 이유는 성속의 분리라는 이원론을 무너뜨렸다는 점이다. 이는 가히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성경을 문화에 적용했으며 책을 구성하는 철학적 체계를 성경에서 따왔다. 내용을 보면 많은 성경주석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잠언과 베드로후서의 구절을 통해 이런 식의 철학적 적용을 거부하는 이들과 이원론에 빠진 이들을 설득하고 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책이 설명하는 철학적 전통이 분명한 성경적 기초에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적용

1) 개인에게

저자는 결론적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성화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영원히 살 수 있게 창조되었던 우리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존재로, 한시적인 가련한 존재로 바뀌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죽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종말론적 구속사라는 반전을 계획하고 계셨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뒤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극복하며 성화과정을 통해 영화에 이르도록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웁게도 천지창조 자체를 인간 구속의 역사와 연결시키신 흔적이 보인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우선 족보(복수형), 계보를 뜻하는 תוֹלְדוֹת(톨레도트)를 창세기 안에서 찾아 보면 창 2:4(천지  창조 내력),  5:1(아담 자손),  6:9(노아의 족보),  10:32(그 백성 들의 족보), 11:10(셈의 족보),  25:13(그 세대),  37:2(야곱의 족보) 에 나오는데 한글 번역으로는 족보, 세대, 계보, 자손, 후손, 내력, 대략 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지만(실제로 한글 개역개정판에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원어로 분명히 같은 단어를 쓰는 것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인류의 족보와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천지창조는 인류 구속의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2:4)라고 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거룩한 선포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과 같이 세계관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다. 이 틀의 바탕에 성경을 놓아야 한다. 이 틀을 종교적으로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삼각 모양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스펙트럼으로 나뉘는 것과  같이 성경을 통해 우주의 모든 체계를 바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서 다양한 세계관을 비교, 검토하여 체계적으로 정리, 합리적인 가치관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자연주의나 뉴에이지,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유신론을 더 확고하게 정립하기 위해 다른 세계관을 비교하고 검토해야 한다.

3) 가족에게

저자는 이 책에서 구조와 방향이라는 신개념을 도입하여 창조, 타락, 구속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신선한 시도이다. 이러한 준거틀 안에서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올바른 삶임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 조차도 성경적으로 근거를 두어야 한다. 언뜻 보아서 앞뒤가 맞지 않는 기독교리를 알아 듣기 쉬운 말로 표현하여 자녀로 하여금 다른 세계관이 갖추지 못한 놀라운 합리성이 있음을 증명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화두를 문화 전반으로 확대하여 해석한다. 자녀에게 현재의 모든 문화상황을 대입하여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개혁주의적 세계관은 쉽게 흔들리는 청소년기의 자녀를 믿음의 은혜 안에 있을 수 있도록 해줄수 있다. 청소년기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 허무, 사랑 등에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한 올바른 가치관과 그에 따른 실천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알려주어야 한다. 진리와 사랑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2)    교회에서

우리는 교회밖에서보다 교회내에서 더욱 깨어 있어야 하며 믿지 않는 자들 틈에서보다   믿음의 형제들에게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화 시대에 우리의 신앙은 이미 오염되어 있다. 우리의 신앙은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확고하게 구축하여야 흔들리지 않는다. 저자의 이 이론은 교회 밖에서 보다 교회 안에서 일차적으로 효용성이 있다.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의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고  인도해  주어야 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어떤 목사들은 신앙을 자꾸 이성과는 상반되는 신비한 어떤 으로 표현하면서 신도들을   인도한다. 그런 목사들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설교, 자신의 주석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도록 하고, 자기 자신은 안주한다. 평신도들이 성경에 눈을 뜨고 신학에 관심을 보이면 오히려 손사래를 흔들며 교회성장에 도움이 안되는 복잡한  문제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목사를 따르라고 한다. 아예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그냥 주욱 읽어서 은혜 받도록 하거나 원시적인 Q.T. 하도록 해야지,  이상 성경공부를 하게 해서는  된다는 목사들도 있다. 이리하여 너무나 많은 평신도들이 성경과 신학에 있어서, 개혁주의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있어서, 무식 대중의 상태에 묶여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적 세계관이 제대로 정립된 교회는 이단에 휩쓸리지 않는다. 비단 이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연주의, 허무주의, 동양의 신비주의, 뉴에이지, 종교 다원론 등의 문제점을 정확히 진단하고 이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무신론자들에게 우리는 절대주권자인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구원을 위한 일직선적 역사를 경륜하고 계신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은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적 유신론을 확립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4)    사회에서

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전통적인 이원론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때 악도 심어 놓으신 것처럼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죄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구조에 포함되지 않은 낯선 침입자일 뿐이다. 창조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죄는 창조세계의 낯선 침입자로서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는 전적으로 거리가 멀다. 하나님이 죄를 창조세계에 포함하셨다는 얘기는 우리가 죄를 짓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후안무치한 태도인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효과적으로 헬레니즘의 이원론을 배격하여 설명한다. 저자는 이 책의 타락 성적인 타락 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성적인 문란은 인간을 위해 남녀간에  사랑과 헌신으로 한 몸이 되라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왜곡하고 조롱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 1 23~26절의 성적인 타락과 우상숭배와의 관련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 구절은 번갈아 가면서 우상숭배와 육체적 타락을  두 번에 걸쳐 설명하면서 우상숭배, 즉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사람들을 정욕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고 강조 한다. 바울은 우상 숭배의 배후에는 사탄, 즉 어둠의 영과 타락한 세상 권세가 존재 한다고 설명한다(고전 10:19–22).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말을 따름으로써 영적인 간음을 행했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우매해지면서 우상숭배를 하게 된다. 이로인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육체적 타락이라는 질곡에 넘겨주시고 또한 역리적인 육체적 타락까지 이르게 하신다. 개혁주의적 세계관은 포스트모더니즘의 4차 산업혁명 시기를 기독교가 주도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강력한 신념이다. SNS 등 커뮤니케이션의 폭발적 증가는 젊은이들을 다시 신앙으로 이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물질만능의 4차 산업혁명의 시기에 오히려 사람들은  영성 있는 목회에 더욱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대에는 영성이 최고의 무기 임을 적극적으로 인식시켜야 한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말처럼 우리 기독교는 역사상 최고의 기회를 맞고 있다완벽한 영성 및 공감은 예수님과 성경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거룩한 복음으로 혁명적인 기술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세상을 더욱 넓게 펼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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