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찰스콜슨 저/정영만 역

기독교 저술가로서 범죄인 등 소외된 계층의 복음전파와 사회개혁에 앞장서 온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펼치면서 성경 속의 진리들이 삶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기독교적 세계관이 우리의 삶에 가이드맵이 될 수 있을지, 문화를 재건하여 모든 세계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광채를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변을 해준다. 또한 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함으로써 기독교문화를 건설하는 데 충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논리와 실례를 들어서 이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 세계관은 왜 중요한가

1부는 한 마디로 세계관에 대해 정의하고 올바른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이 왜 중요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세계관이란 것은 아주 실제적인 것으로 이 세상에 대한 신념의 총합이고 우리의 일상적인 결정과 행동을 지시 하는 커다란 그림이다. 그래서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른 여러 가치관과   갈등 속에 있는 모습을 조명하고 불신 시대 속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어떻게 수립하며 이에 대한 실천적 자세를 어떻게 갖추어 나갈지를 알려준다.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성경이 삶의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기독교는 모든 현실을 보고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세계관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진리이며 다른 모든 것의 뿌리가 된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궁극적인 현실이다. 오늘날의 도전들로는 큰 범주로 말하면 유신론과 무신론의 차이이다. 궁극적 실재가 하나님인가 우주인가로 나뉘는 것이다. 뉴에이지 같은 종교는 영적인 것이 원래 자연 안에   완전히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도덕적 상대주의, 문화다원론, 현세주의 등이 나온다. 오늘날의 지배적인 세계관은 자연주의이고, 이것이 후기 기독교적이고 포스트모던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다. 이들은 기독교의 진리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진리를 거부한다. 모든 사상은 단지  계급이나 성별, 인종에 따라 만들어진 사회적 구축물이라고 생각한다. 불신의 시대에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이 상식과 가장 진보된 과학에 부합되는 최고의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임을  역설해야 하며 이 영적인 싸움에 맞게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이다.  

2)    2: 창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누구인가?

저자는 제 2부에서 많은 예화와 함께 자연주의와 기독교 유신론을 정교하게 비교하면서  설명하는데 빅뱅이론, 열역학법칙, DNA 분석, 원자의 구조 등 자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이 역설적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설계대로 창조되었음을 입증함으로써 저자는 서로 대치되는 두 세계관의 거대하고 숙명적인 투쟁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의 완전성을 논증한다. 자연주의는 태초에 입자들과 맹목적이고 논리도 없는 자연법칙만이 존재했고 자연은 양자적인 변이를 통해 무에서 우주를 창조해 내었다고 주장한다. 자연주의는 어디서나 과학을 주장하고 있고 일반인들은 과학적이라는 것에 속아서 자연주의 이론을 교과서적으로 세뇌 당한다. 그러나 열역학 제 1법칙(질량보존의 법칙)은 물질이 저절로 생겨날 수 없으며, 물질이 스스로 만들어질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엔트로피의 법칙(감쇠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열역학 제 2법칙은 우주는 서서히 붕괴를 향해, 즉 돌이킬 수 없는 어두움과 파괴를 향해 준엄하게  움직여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유신론의 종말론적 구속 역사이다빅뱅이론 역시 과학 자체가 우주는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자연주의 철학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빅뱅이론은 우주가 시간 속의 어떤 유한한 순간에 빛과 에너지의 번쩍임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성경속의 내용은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진리임이 밝혀진다. 다윈주의는 참으로 인류 역사에 경악할 만한 족적을 남겼다. 이것은 자연주의 세계관을  지탱하는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근거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 설계되었다는 것이 계속 증명이 되고 있다. DNA에 유전적 정보가 있다는 것이 바로 설계설을 뒷받침해준다. 과학자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빛으로 왔으나 어둠이 빛을 깨닫지(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구절을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그저 이론적인 차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관의 거대한 충돌이다. 우주가 맹목적인 물질의 힘에 지배 받고   있는지 아니면 사랑과 빛의 창조주에 의해 지배 받고 있는지를 결정하는 문제인 것이다. 기독교는 개인의 경건과 집단적 예배라는 좁은 개념으로 정의되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모든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관점이며 완전한 세계관이기도 하다. 세계관이 과학적인 증거와 일치하는지 여부, 인간의 존엄성, 생명의 궁극적인 의미, 인간이 가는 길,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 등을 통해 어떤 세계관을 택해야 하는지가 자명해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많은 역설적인 진리 중 하나는 가장 큰 역경이 가장 큰 복을 가져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도하신대로 정확히 만드신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목적에 맞게 정확히 만드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완벽 하게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를 창조한 방식에 있어서 완벽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번쩍이는 빛으로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시어 열린 체계 속에서 질서 있게 운행하도록 하셨고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여 인격, 자기 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갖게 하면서 주변 세계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하셨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선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고 있으며 역사는 종말론적으로 일직선으로 흐른다.   

3)    3: 타락 이 세상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한 타락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과 죄와 악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하나님은과연 살아 계신가? 하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저자는  3부에서 이러한 인간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벗어난 잘못된 유토피아를 추구해왔으며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죄와 악의 근원을 탐구하고 어떻게 이것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양괄식으로 제시해 준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왜 이 세상의 죄와 악을 종식시키지 않으시는가? 라고 질문을던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자라는 독특한 존엄성을 우리에게 부여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과 선이라는 하나님의 빛을 거부하여 세상의 죽음과 악이라는 어둠에 내주었다. 이에 더해 창조라는 성경적 진리를 무시하고 자연이, 우주가 우리를 창조하였다고 하여 이성을 숭배하는 교만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을 떠나 좀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추구하다가 모든 것을 상실하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었으나 역시 바람에 나부끼는 꺼풀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이러한 세계관은 선을 말하였지만 악을 풀어놓았으며 이성은 계몽을 약속했지만 어두움 속으로 인간을 밀어 넣었다. 인간의 죄를 부인하는 이러한 사상들은 인류에게 엄청난 후 폭풍을 몰아온다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피의 혁명을 유발한다. 이러한 패턴이 칼 마르크스의 전체주의에서도  나타난다. 이렇듯 죄를 부인하는 것이 파시즘의 뿌리이다.

죄를 부인하고 잘못된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죄를 직시하지 못하고 범죄의 책임을 빈곤과 그 밖의 사회 병리에 떠넘기면서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죄를 부인한다는 것은 인간을 위하는 교리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품격을 떨어뜨리고 파괴한다. 그것은 우리를 더 큰 힘에 사로잡힌 인질로 폄하시킨다. 인간의 죄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에서 유토피아적 이념이 시작된다. 이로써 우리는 죄를 다룰 능력을 상실하게 되며 결국에는 죄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다시 죄에 굴복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도덕적 책임이라는 개념이 없다. 모든 악을 사회적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죄에 대한  책임 회피 의식이 있다. 유토피아적 틀은 진정한 악과 효과적으로 씨름하기 위해서 필요한 개념적인 도구를 박탈해 버렸다. 우리가 악을 이름 붙이거나 확인할 수 없다면, 악을 다룰 능력을 상실하게 되며 결국에는 악의 치명적인 영향력을 더 크게 만든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본래 그의 창조 역시 선했다. 하나님은 악의 창시자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악을 창조하셨다면, 본질상 그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하고 선이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죄의 근원은 하나님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고 계시지만 고통을 통해 인간을 자신에게 되돌아 오도록 하기 위해 용인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정의로운 만큼 자비로 우셔서 엄청난 반전을 계획하셨는데 그 분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사람들의 빛이 되어 주시었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인 것이다.  

4)    4: 구속 세상을 고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은 교회에 대한 환멸로 하나님 대신 다른 것들을 찾게 된다. 절대자에 대해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가 서구 인식론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물질 만능, 과학, 각종 해방구호, 섹스탐닉, 인류의 영적 진화 등을 찾아 헤매게 된다. 결국에 가서는 이 모든 것이 허공에 이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좌절하게 된다. 저자는 4부에서 하나님을 떠나 다른 구원을 찾아 다니다 절망에 빠지는 역사를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오직 기독교만이 진정한    구원, 즉 원래의 창조상태로의 회복과 하나님과의 영원한 화해를 이루는 길임을 밝히고 있다. 모든 인간 정신활동에 대한 체계는 구원을 제시하고 각기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되었는가인간이 처한 기본적인 딜레마에 대한 분석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 우리가 사는 목적은 물질적인  이득을 얻는 것이며 성취와 진급, 육신적인 쾌락 등이 전부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된다. 이는  갈증이 난다고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된다. 권력이 있은들, 소유가 많아도 그것이 우리를 그 다음 세상으로 데려가지는 못한다. 흔히 에스컬레이터 신화라고 하는 19세기 진보의 신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종말론적 새 창조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과 재능의 결과로 이 땅에서의 유토피아를 향해 진화하고 있다는 잘못된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처참한 재난과 실패로 귀결된 마르크스주의는 아직도 각종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는 악령이다.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론적으로 그들 자신도 잘못인 줄 알면서도 욕구의 분출을 위해 이론을 합리화하였다. 이들의 이론은 에덴동산에서의 사탄의 유혹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성의 해방을 통한 구원이라는 것이다. 성해방주의자들의 근저에는 일종의 종교적인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성의 해방을 통해 새로운 인류의 출현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삶이 자신들이 주장한 삶과는 철저하게 배치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들의 주장은 온갖 부작용을 낳았고 아직도 학교의 성교육의 근간이 되고 있다과학적 유토피아주의는 찰스 다윈이 자연도태에 의한 진화론을 발표하고 나서 과학을 통한   진보라는 종교로 탄생되었다. 진보에 대한 신앙은 이 우주가 목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면서 창조와 섭리의 교리를 대체했다. 바르게 이해하면 과학은 하나님의 세계를 탐구하는 놀라운 도구가 될 수 있다. 고고학이나 과학의 발달로 성경 말씀이 사실과 과학에 근거하여  기술되었음을 밝히는 많은 증거가 있다. 우주적 영에 녹아 들자는 뉴에이지 역시 우리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의미에 대해 어떤 기초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그 근저에 깔린 범신론은 기실 매 시대마다 가면을 바꾸어 쓰고 나오는 악몽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벗어나 스스로 신이 되려 하는 인간 타락의 또 다른 모습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인간 구원의 유일하고 실제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다. 인간 딜레마를  정확히 진단하고 치유책을 제시하며 인간이 지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며 이 모든 이론이 역사적 진리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힌다. 종말론적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던 대로 회복시킨다는 원리이다. 우리의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원상회복시킨다는 의미이다. 영원히 죽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가슴 벅찬 복음인 것이다.  

5)    5: 회복 그리스도인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까지 창조, 타락, 구속에 관한 세계관을 고찰해보았는데 비기독교적 세계관의 문제점을   적시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의 우월적인 지위를 밝혔다. 저자는 제 5부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면서 추구하신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달성하기 위한 신도들의 회복에 대해 논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적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 나갈지와 기독교인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고 방황해왔다. 이제 사람들은 도덕률은 개인의선택에 대한 자의적인 제약이 아니라 사회의 붕괴를 막는 보호장치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많은 실험결과를 통해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모든 면에서 건강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밝혀준다. 이와 더불어 신앙의 유익은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말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비참한 사람은 진리를 알면서도 그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성경에서 결혼은 아주 풍부한 영적인 상징과 의미, 즉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간의 관계를   반영하는 신비의 거울 임을 발견하게 된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은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언급하면서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5:31-32)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거한다. 성서 신학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이미지를 남편과 아내 사이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심오한 신비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성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는 수많은 악한 결과들은 성경의 성 관념에 비추어 극복해야 한다. 창조에 대한 그릇된 관점은 근대 공교육에 만연해 있는 개념적이고도 도덕적인 상대주의로 곧장 나아갔다. 죄와 타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상실된 것 또한 큰 재난이었다. 공교육에 있어기독교적 교리를 도입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홈스쿨링을 하면서 자녀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을 주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된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은 성스러운 일이다. 성경은 자유롭고 번성하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성경내에서 사유재산권은 보장되고 있으며 부의 축적 자체를 나쁘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부는 충실한 신앙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은 부 자체를 목적으로 보는 것, 또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억압하고 잔인해지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린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를 돌볼 때 그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의 책임감을 강화시켜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경제적 성공은 도덕성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법 위에는 영원한 법인 하나님의 법이 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창조론을 폐기하고 진화론을 택함에 따라 잘못된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가장 잘 지켜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상위법에 대한 헌신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법에 어긋나는 법이나 행동에 저항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모든 과학의 기초는 성경으로부터 나왔다. 기독교인들은 과학의 본래의 자기 역할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탐구하고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고 복리를 증진시킬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과학적 자연주의의 모순된 논리를 갈파해야 한다.

하나님을 우주 그 자체로 대체하고 또한사람이 단세포로부터 우연히 생겨난 이상한 존재라고 설명함으로써 과학 자체를 오도한다자연주의자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연의 힘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사상이 인간의 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적인 작용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과학주의 자체도 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며 무시되어야 한다고 하는 모순에 도달한다올바른 과학적 지식은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해내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복음전도자들뿐 아니라 예술가들도 그들의 예술로 자신의 삶이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증거해야 하며 예술이 하나님의 진리를 보다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창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교회는 이들의 작품활동에 영적인 자양분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예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 있는 구조와 조화에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예술의 기본적인 근거는 창조 교리 안에 있다. 그리스도인 음악가가 작곡한 대중음악이나 기독교 작가가 쓴 베스트셀러,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전달하고 있을 수 있다. 불신자들은 기독교를 종교라는 이름으로 동떨어진 한 부분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이 관심 갖고 사는 모든 것들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적합한 세계관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그 말씀을 살아내려는 용기가 있는 사람은 문화를 구원할 수 있고, 심지어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도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세계관이라면 반드시 대답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어떤 경쟁적인 다른 세계관보다 신뢰할 만한 대답을 제시한다. 그 질문들이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인간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안내해 준다. 기독교는 실재에 대한 정확한 지도이며, 우리는 점차 다른 모든  세계관이 헛되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세상을 치료할 유일한 해결책은 영적인 것이다. 전에 원수였던 사람을 위해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추구하면서 용서, 참회, 그리고 회복하는 일이다. 기독교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공급해준다. 우리는 기독교가 인생의 모든 면을 포괄하는 온전한 세계관으로, 인간의 모든 노력에 대한 바른 틀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리적 도덕적 질서를 이해하며, 우리 이웃들을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진리를 주장하며, 모든 생활에서 진리를 따라 담대하고 즐겁게 살아가야 한다. 기독교는 타락한 세상이라는 그릇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세계관이며, 우리가 매일 매일 그것을 적용하려고 씨름하는 관계 속에서 가장 생생하게 나타난다. 모든 진리와 생명의 저자이신 하나님께는 어떤 말로도 우리의 모든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구원을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그분의 함께 하시는 은혜로 살도록 기초를 제공하셨다는 엄청난 놀라움에 사로잡힌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임과 동시에 이고 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우리의 삶에서 그의 실천적 적용에 힘쓰면서 확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 리뷰 > 

평가

저자는 우선 성서 신학적 차원에서 책의 순서를 정한다. 먼저 인간이 현대 세계를 살기  위해 세계관이 왜 중요한지로  시작해서 창조-타락-구속의 순서로 설명을 해나간다. 창조와 관련한 과학적 자연주의와 창조론의 영원한 평행선을 저자는 최상위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고 한다. 과학의 역설이다. 타락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떠난 많은 가치관들이 그릇된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위안보다는 저주의 고통속에 있음을 실증한다. 그럼으로써 인류는 뉴에이지나 성적인 탐닉이나 우상숭배 등으로 이를 극복하려    하지만 이것은 갈증이 난다고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대사회의 여러가지 다양한 세계관을 열거하여 비교, 분석, 비판하고  몇 가지 사회과학적 잣대를 대입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그 해결 책임을 논리적으로 실증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점에서 우리에게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저자는 복음전파와 사회개혁에 헌신해 온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우는 템플턴 상을 받을 만큼 모범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살아온 진정한 기독교인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객관성이 확보 되었는지의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1) 단점

저자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방대한 분량에 수많은 예화를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지나치게 방대한 분량이며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평이한 서술로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방대한 분량은 시간을 소모시킬 뿐이다. 예를 들어서 제 30장의 케이오 펀치 부분과 제 43장 기적의 손길 등의 부분은 없어도  논리 전개가 어렵지  않게 진행될 수 있다. 꼭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 편집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책의 구성상 제 4부와 제 5부의 구분이 논리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중복되는 부분도 있으며 꼭 다루어야 할 것이 빠진 경우도 있다. 4부에서 이미 구원과 구속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5부에서 구원에 관한 언급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전체적인 편집에서 구속과 구원에 대한 개념을 한 곳에 정리하고 다른 곳에는 이 개념에 근거하여 실천적  적용을 심도 있게 다루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저자는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세속화 과정은 이제 멈춰서고 있으며, 새천년은 세계사의 비 세속화를 특징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낙관론에는 논리적인 설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하다. 뉴에이지 사상이나 포스트 모더니즘 등은 오히려 극단적 세속주의의 면모를 보이면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으며 이런 사상들은 점점 진화하면서 더욱 기괴한 모습으로 기승을 부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의 제목을 통해 저자가 이런 저런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기독교를 믿으라고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제목을 보고 절대 이 책을 사지 않을 것이다. 종교서적인만큼 오히려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한 제목을 뽑았더라면 내용의 전달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했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서 제목을 절망의 늪에서 바라보는 한줄기 빛이라거나 인간 실존에 침투한 로고스 등으로 설정했으면 비신도와 그리스도인 고객 모두에게 더욱 흥미를 유발했을 것이다. 또한 구성이나 스토리의 전개에 있어서도 논리상의 반전  이라든지 복선을 설정하여 독자가 기독교적 가치관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좀 더 세심한 주의를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에서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다른 가치관 들과 비교하면서 서술했는데 가치관의 비교에사용된 준거틀을 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 시킬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서 ① 신 또는 궁극적  실재의 본질과 속성 ② 우주의 본질 ③ 인간의  본성 ④ 인간 사망시 일어나는 일 ⑤ 지식의 근거 ⑥ 윤리의 기초 ⑦ 역사의 의미 등으로 명제를 정하여 여기에 맞추어서 여타  세계관과  비교 분석하였으면 독자들에게 더욱 호소력 있게 들렸을 것이다.

2)    장점

이 책의 구성은 성서신학적인 주제에 따른 것이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  만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최대한 쉽게 설명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읽어 나가는 과정에 자신의 세계관을 찾아이를 수정하거나 체계화시켜 나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논리 전개를 통해 타 세계관의 논리적 모순과 세계관으로서의 위치, 사조의 흐름에 따른 역사분석 등을   날카롭게 지적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연주의와 기독교 유신론을 중점적으로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빅뱅이론, 열역학법칙, DNA  분석, 원자의 구조 등 자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은 고도화될 수록 이 세상이 하나님이 설계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 역설적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설계대로 창조되었음을 입증함으로써 저자는 서로 대치되는 두 세계관의 거대하고 숙명적인 투쟁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의 완전한 승리를 확신한다. 자연주의라는 용어에는  과학적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과학적이라고 하면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확인된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사로잡혀 있다. 계몽주의 시대 과학의 발달은 이성만능주의를 만들어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데 일조했지만 최근의 과학적인 성과는 성경을 증명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되고 있다. 열역학 제 1법칙(질량보존의 법칙)은 물질은 창조될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하고 열역학 2법칙은 우주는 최초의 완전한 상태에서 일직선적으로 붕괴되어 감을 알려 주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기독교 유신론의 종말론적 구속역사라는 점을 논증한다.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자연주의, 뉴에이지, 포스트 모더니즘 등이 구원으로 제시 하는 현대 유토피아적인 세계관이 구원이 아닌 파멸에 이르는 길임을 논증하고 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서 계몽주의는 우리의 죄 된 속성을 부인함으로써 생겨나는 유토피아 신화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독재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적시하였고  16장에서는 멕과 그녀의 가족들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 좀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추구하다가 모든 것을 상실하는 사람들의 예를 보여준다. 이렇게 현대 유토피아주의 세계관은 이성적이고 지속성 있는 삶의 체계를 산출해 내지 못하고 우리에게 최고의 악을 풀어놓는다. 계몽을 약속하지만 어두움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책의 적용

1) 자신에게 적용

우리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우리의 가치관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강요에 의해서도 아니고 또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는 증거한다. 창세전에 이미 택정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도하신 대로 정확히 만드신다. 우리는 부름을 받은 존재로서 그   분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이 드러낸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 추측할 수 밖에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를 창조한 방식에 있어서 완벽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를 범할 것을 알고 계시면서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이 세상의 죄와 악을 심어 놓으셨는가? 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자라는 독특한 존엄성을 우리에게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어둠의 권세인 죽음과  악에 내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원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죄와 악을 직시하여야 한다. 본문에서 언급한대로 죄를 부인하고 잘못된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으로 인해 죄를 직시하지 못하고 범죄의 책임을 빈곤과 그 밖의 사회 병리에 떠넘기면서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죄를 부인한다는 것은 마치 인간을 위하는 교리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큰 힘에 사로잡힌 인질로 폄하시킨다. 인간의 죄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에서 유토피아적 이념이 시작된다. 이로써 우리는 죄를  다룰 능력을 상실하게 되며 결국에는 죄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다시 죄에 굴복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무장하여 죄성을 극복하여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성이 신앙을 지배하면서 절대적인 존재를 우주로 보느냐 하나님으로 보느냐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고 양자가 각각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며 현대 사조를 형성해온 것으로 보인다. 중세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기독교 유신론은 도전없이 누구나 받아 들일수 있는 사상이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화되면서부터 여러가지 다른 사조들이 명멸해왔다. 우리는 우선 하나님이 궁극적인 실체라는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에  편재해 계시는 전능하신 분이다. 우리는 그 분의 위엄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을 때까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 실존에 침투해 들어와 계시다. 어둠을 밝히는   성육신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닫힌 공간이었던 우주를 열린 공간으로 변화시키신 것이다.   우리 기독교에는 결정론이라는 것이 없다. 인간은 결정론적으로 정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그분의 인류 구속의 원대한 계획에 동참하여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극복하며 성화과정을 통해 영화에 이르도록 하여야 한다.     

2) 가족에게 적용

지금 대부분의 학교는 다윈의 진화론을 우선 교육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다윈의 진화론을 사실로 알고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라는 것을 믿지 않을 때 무척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나 자신도 40대 후반에 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뉴에이지의 SF 스토리에 매료되어 있었고 신비주의에 경도되어 그릇된 믿음을 가졌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시키는 것을 조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나름대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 놓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창조과학회는 과학적으로 우주 및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성경적인 증거임을 속속 밝히고 있다. 그들의 활동이나 이론이 100% 정확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고 있다. 나 자신도 그들의 논리를 들어보면서 기독교적 가치관이 우주와 세상에 대해 유일하게 올바른 해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내용을 믿는 자에게나 불신자에게 널리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대 주권자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논리적으로 모순이 많은 기독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으로 납득 갈만한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빅뱅이론은 우주가 최초에 번쩍이는 섬광으로 시작해서 팽창해 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는 구절과 매우 닮아 있다. 성경의 말씀들 중 상당부분을 과학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 성인보다도 훨씬 인간적이고 근본적인 고통들에 쉽게 노출  된다. 욕망, 허무, 사랑 등에 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들이 납득 가능하도록  성경적인 설명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다른 세계관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본 교재에 나오듯이 유토피아적 세계관이 인간을 얼마나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는지를 설명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느끼게 하여 그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진정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논리적 으로 설명해 주어 올바른 기독교적 가치관을 갖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2)    교회에게 적용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적 유신론이 유일한 가치 있는 세계관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톨릭의 부패와 모순으로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고전주의, 인문주의의   조류 안에서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인간은 교회에 대한 환멸로 하나님 대신 다른 것들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서구 인식론은 절대자에 대해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서부터 출발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단이나 불신자들의 공격이라기 보다는 교회내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을 믿다가 실망하고 떠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구원받은 사람들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들 역시 끊임 없이 하나님 대신 물질 만능, 과학, 각종  해방구호, 섹스탐닉, 인류의 영적 진화 등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좌절하게 된다. 저자는 4부 에서 하나님을 떠나 다른 구원을 찾아 다니다 절망에 빠지는 실례를 들고 오직 기독교만이 진정한 구원, 즉 창조상태로의 회복과 하나님과의 영원한 화해를 이루는 길임을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 1 5절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하고 있다. 또한 1 10-11절은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하고 있다. 실제로 보면 빛을 빛으로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나 혹은 세상을 살면서 겪을 수 있다. 유대인의 왕이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사실을 서기관들은 바로 알고 동박박사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맞이하러 가지 않는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메시아가 오면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기 때문에  오시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오늘 현대교회의 상황도 비슷하다. 교회는 예수님이 재림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만 재림하면 교회는 더 이상의 기득권을 누리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기 보다는 어두움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상당수의 교회가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방조하면서 교회 성장에만 메달려 목회활동을 하는 세태와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3)    사회에게 적용

오늘날 지배적인 세계관은 과학적 자연주의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부정하는 후기 기독교적이고 포스트모던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다. 이들은 기독교의 진리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진리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알 필요가 없다고 까지 생각하고 거부한다. 모든 사상은 단지 계급이나 성별, 인종에 따라 만들어진 사회적 구축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불가측하며 믿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오직 기독교적 세계관만이 상식과 가장 진보된 과학에 부합되는 최고의 대답임을 제시하고 역설해야 하며 이 영적인 싸움에 맞는 대응을 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교리상 공동체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개인의 경건과 집단적 예배라는 좁은 개념으로 정의되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읽어 보아도 혼자 독거하며 연구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얘기는 없다. 모든 기독교인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뛰어들어 문화를 바꾸 어야 하며 예수님을 증거하여야 한다. 전 사회에 기독교는 모든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관점이며 완전한 세계관이라는 것을 알려야 하며 이 세계관이 과학적인 증거와 일치하는지를 홍보하고, 인간의 존엄성, 생명의 궁극적인 의미, 인간이 가는 길,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 등을 통해 어떤 세계관을 택해야 하는지를 역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많은 진리 중 하나는 가장 큰 역경이 가장 큰 복을 가져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이다. 역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설파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섬광으로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시어 경륜적 삼위일체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여 인격, 자기 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갖게 하면서 주변 세계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선이 라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고 있으며 종말론적 구원사적으로 흐르는 역사에 동참하도록 사회를 설득하여 공동체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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