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란 무엇인가

1. 서론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학에 이성이 개입되고, 다른 학문이 세분화되면서 신학도 다양한 분야로 전문화되고 여러 가지 방법론이 발전되었다. 이에 따라 직관적이고 통찰력 있는 신학에 대한 이해는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다른 학문도 그렇지만 신학도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목회 현장에 있는 분들이나 이미 오래전에 신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 지속적으로 이러한 변화하는 학문을 따라가지 못해서 겪는 어려움이 클 수 있으며 또한 이제 막 신학공부를 시작한 신학도들이 신학의 전반적인 아웃라인을 잡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현재 국내에서 신학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를 알기 쉽게 서술하여 신학의 제 분야에 대한 이해와 함께 신학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인식을 도모하고자 한다.

2. 본론

[ 신학이란 무엇인가 ]

신학은 시대를 외면하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이론으로만 학습하는 신학은 죽은 학문인 것이다. 신학은 그 시대를 해석하고 생명을 불어 넣으며 시대는 신학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적 책임을 부과한다신학(theology)는 신(theos)과 말(logos)이라는 두 헬라어의 결합이다. 즉 신을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신학이라는 용어는 초기 교부시대에서부터 사용되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신학은 주제별로 체계화가 이루어진다. 기독론, 삼위일체론, 교회론, 성령론, 구원론, 종말론과 같은 교의가 체계화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학문의 분야로서 체계화 시킨 대표적인 저서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는 신학에 대한 이해가 학문전반, 사회의 구조, 자연과학의 발전 등 다양한 측면에서 큰 시대적 변화를 야기한다. 신학을 특별하게 취급하기 보다는 종교학의 한 분야로 취급하는 곳이 많아졌다신학은 두가지 측면에서 해석하기 어려운데 첫째, 신학의 대상과 관련이 있는데 신학에서 은 단순히 인간의 인식 대상이 아니라 항상 살아 있는 존재로서 스스로 주체가 된다. 둘째, 신학은 학문성과 신앙의 고백적 측면을 동시에 지닌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에 대한 신앙과 연관됨과 동시에 학문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다른 분야와 관계될 수 밖에 없다신학은 신앙을 배제할 수 없다. 신앙 없이 신학에 정당한 관심을 가질수 없고 신학에 대한 열정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신학은 교회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다.. 신학이 교회와 분리되면 추상적이 되고 사변적이 된다. 신학은 순수이론 작업으로 머물 수 없고 항사아 교회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며 역사 속에서의 실천과 연결된 신학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계시와 종교를 구별하면서, 기독교의 진리 진술의 토대인 계시를 일반적인 종교라는 개념과 구별하기도 한다.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기독교가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적 개방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동질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에 달려있다. 대화를 위해서는 타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존중의 자세도 있어야 한다. 신학은 또한 학문으로서의 기능을 가지므로 신학적 주제에 대해 타학문과 상호 연계하여 연구하여야 한다.

신학에는 대표적으로 네 분야가 있는데 첫째, 성서신학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으로 나뉘는데 언어오아 본문에 대한 연구가 기본이 된다. 언어는 사고와 개념에 우선되고 사고의 형성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그러므로 신학도는 성서의 본문을 원어로 읽고 이해할 뿐 아니라 다양한 본문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을 잘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언어에 대한 이해와 석의에 대한 능력이 필요하다. 둘째, 역사신학은 기독교가 창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철저히 역사적인 방향성을 가진 종교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기독교 진리는 역사 속에서 진리가 드러나고, 이는 다시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확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간 세대에 교회가 어떻게 진리에 대한 진술을 했는지를 구체적 정황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중요한 길이다. 셋째, 조직신학은 성서신학 등에서 연구된 다양한 발견과 결과들을 체계화하는 작업니다. 조직신학은 변증적인 역할을 가진다. 즉 조직신학은 성서, 교회, 기독교 전체에 대해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고 그 타당성을 변증할 의무를 가진다. 또한 조직신학은 기독교와 각 시대의 관계를 설정해주어야 한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의 의미를 제시하는 일이다. 넷째, 실천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교회현장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역할을 한다. 신앙은 언제나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진다. 현대에는 실천신학은 단지 목회자 양성과 교회내에서 사용될 수 있는 실용적인 차원의 학문이라는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실천신학이 교회 현장 뿐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는 바른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공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지고 있다.

[ 구약학의 흐름과 미래 ]

구약학에서는 무엇보다도 구약 본문을 통해 시대마다 필요한 말씀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야 말로 구약학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길이 된다. 이 일을 위해 구약학자들은 지금과 앞날의 시대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그에 걸맞은 메시지를 구약성서에서 찾아내어 제시하는 데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1947년 쿰란 사본이 발견된 뒤부터 칠십인역 연구가 강화되고 마소라 본문의 비중이 다소 떨어지고 있다. 그 전에는 히브리어 사본 가운데 마소라 본문에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했으나 지금은 여러 전통 본문 가운데 하나로 의미가 상대화 되었다히브리어 구약성서 제 5은 여러 고전어로 된 약어와 마소라 주 등을 영어로 풀이해놓아 일반 신학도들도 여렵지 않게 읽을 수 있게 배려된 친절한 성서이다. 그러나 완성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히브리어 성서 제 4판 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칠십인역에 들어있는 외경과 종래의 마소라 본문과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널리 알려졌을 때 평신도들 뿐만 아니라 일반 목회자들, 심지어는 신학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날 텐데 이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는데에 있다. 또한 영어와 히브리어 대조성서로 Jewish Publication Society Hebrew English Tanakh(1999)가 나와 있다구약 연구에 쓸 수 있는 사전들로는 히브리어 사전과 구약 신학용어사전, 성서 백과사전, 신학백과사전이 여럿 출간되어 있는데 구약성서 히브리어 사전(BDB)이 있고 최근의 사전으로 독일어로 1967-1996년에 걸쳐 여섯 권으로 나온 구약성서 히브리어 · 아람어 사전HAL(=KBL)이 있습니다. 그 영어 번역본인 HALOT은 이제 히브리어 본문을 읽는 데 없어서는 안될 기본참고서이다. 구약 신학용어사전으로는 구약 신학용어사전(ThWAT,영문 번역판 : TDOT)이 있으며 백과사전으로는 1990대 초에 앵커 성서사전(ABD)이 있다.

구약 생성사 관련 뮌스터 오경 모델은 아브라함, 야곱, 요셉, 출애굽, 가나안 정복 이야기와 언약의 책이 따로따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주전 700년경 예루살렘에서 하나의 역사 이야기로 한데 묶여졌고 거기에 이르나 창세기 2-8장 핵심 부분과 신명기-열왕기하의 핵심 부분이 덧붙으면서 주전 586년 뒤에 포로기 역사서가 생겨 났으며 주전 520년 이후에는 제사장 자료가 더해져서 창세기-열왕기에 이르는 포로기 이후 큰 역사서가 이루어진 뒤에 주전 400년 경에 마침내 오경과 전기 예언서, 곧 신명기-열왕기하가 나뉘어 지게 되면서 오경을 모세의 율법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의 최종 단계에서 신명기 전통 신학과 제사장 전통 신학을 비롯한 여러 전통이 뒤섞였다고 한다. 이를 테면 언약신학의 경우에 신명기 전통에서는 언약을 이스라엘의 순종이라는 조건과 어느 정도 관련시키지만, 제사장 전통에서는 언약을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베푸신 처사로 제시하고 있다. 이리하여 오경은 적어도 주전 900~400년의 기간, 500여 년의 기간에 걸쳐 이스라엘 사회 안에 벌어진 다양한 신앙과 신학이 서로 충돌하고 대화하면서 이루어진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구약성서를 히브리어 본문으로 자세히 읽어보면 오늘 우리로서는 밝혀낼 수 없는 숱한 사람들이 그 나름대로 본문의 형성에 이바지했으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특히 편집비평이 새롭게 강화되고 있는 이즘의 경향은, 하나님이 몇몇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만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이 세상에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옛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에 속했던 평범한 사람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들이 그런 놀라운 과정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경전 형성 과정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맡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한다바람직한 미래의 구약학과 관련 무엇보다도 구약 본문을 통해 시대마다 필요한 말씀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 듣기 위해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야 말로 구약학의 미래를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길이 된다. 또 앞으로는 개인과 공동체가 처한 지역 상황과 세계 상황을 늘 염두에 두면서 구약학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곧 한편으로는 전 세계에 공통된 위기 상황에 대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각 개별지역에 특수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비록 오래 전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다양한 삶의 현실에서 다양하게 형성되어온 구약 신앙의 여러 가르침을 오늘의 현실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히브리어를 익히기가 쉽지 않고, 내용이 방대하고 복잡할 뿐 아니라 너무 오래 전에 생겨나서 일반사람들이 어려워하지만 상황이 이러할수록 구약학을 더 깊고 더 넓게 연구하여 구약학이 기독교 신학과 신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알려주는 것 또한 구약학 과제중 하나다.

[ 한국의 현실에서 본 신약학 ]

신학생은 물론 한국 교회는 성서학과 신약학적 연구들의 결과들을 주목하고, 그것들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근거로서 신학을 올바로 세워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현실에서도 성서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책이 아니라 도리어 무고한 자들을 억압하는 무서운 무기가 될 것 이기 때문이다종교개혁가들의 주장과 같이 성서를 그대로 믿을 것이냐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역사비판학적 성서방법론이 주장하듯이 성서가 일점일획도 가감이 없이 무오한 하나님의 원형적인 계시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손에 의해 기록된 역사적 산물로 볼 것이냐는 개인의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은 성서 안에서 서로 상이한 본문과 편집들을 연구하여 그 본문이 본래 의도하는 바를 찾아 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9세기말 근본주의적이며 문자적인 성서관을 가진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을 전수 받은 한국 교회와 신학은 이러한 성서해석 방법들을 외면하고 이단적이고 불신앙적이라고까지 매도함으로써 문제를 야기한다고 보는 것이다신학이란 그때그때의 시대적 상황이 안고 있는 과제에 대한 진실한 접근을 요구하는데 한국의 신학자로서 한국의 민중사관을 도외시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 이야기나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국여성신학은 1980년 독재정권자들에 의한 광주학살 사건을 기점으로 태동한 것으로 서구 여성신학과는 또 다른 상황에서 강대국의 침탈과 분단상황에서 고난당하는 한국 여성들의 삶을 문제삼는다. 그리고 성서를 민중 중의 민중인 한국 여성민중의 시각으로 다시 읽고 재해석하면서 한국의 민중여성들이야말로 한반도의 역사를 지탱해온 역사의 주체이며 한국교회를 세우고 섬기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선두에 서서 일해왔음을 증언한다.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와의 관계에 있어서 예언과 성취’, ‘율법과 복음의 도식으로 보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기독교의 반유대주의는 실제로는 성서적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예수의 적대자로 묘사된 유대인은 히틀러 치하에서 무고하게 살해당한 그 유대인도, 오늘날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니며 신약성서시대에 로마 제국하에서 북쪽 갈릴리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멸시하고 죄인으로 매도하던 남쪽 예루살렘이 권력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오늘의 상황에서 보면 제국의 지배와 분단하에서 고난받는 동족을 외면하고 성서의 몇구절을 내세워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일 수도 있다기독교 신앙을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성서 언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익히고, 신약학의 배경사 연구와 다양한 성서해석 방법을 통해서 본문을 올바로 주석해내야 한다. 성서의 배경이 되는 구약, 유대교, 그리스, 헬레니즘의 사상들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교회는 성서학과 신약학적 연구들의 결과들을 주목하고 그것들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근거로서 신학을 올바로 세워가야 한다신학은 성서본문을 해석하되 오늘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제시하여야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도 성서에 명확한 근거를 두고 해석해야 한다. 한국여성신학이나 민중신학 등이 독재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시각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 황장엽 선생의 말대로 북한의 김일성주의는 수령 무오론등 일종의 기독교 이단이라고 한다. 성서를 제멋대로 해석해서 정치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든지의 행동이 북한의 김일성주의와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다 성서의 올바른 해석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각기 자신의 입장에서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우리는 신학도로서 반드시 중간자적 입장에서 어느쪽의 주장이 성서에 정확히 근거하여 객관적,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또한 2,000년 전에 기록된 성서가 21세기 오늘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진리와 답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하는가를 찾아내는 것도 신학도들의 과제이다. 성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해 오시는가를 증언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같지 않더라도 성서가 이야기하는 진리는 마찬가지이므로 우리는 성서해석학을 통해 이것을 찾아내야지 수천년 전의 이야기라 현실과는 맞지 않으므로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이단의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생각한다.

[ 조직신학의 특징, 주제 및 전망 ]

조직신학은 기독교 사상과 교의이다. 조직신학은 성서에 대한 체계적 지식일 뿐 아니라 인간과 세상과 역사가 질문하는 문제에 대해 답을 주는 신학이다. 조직신학은 교회의 설교와 교육의 주제와 내용이고 교회가 세워가야할 하나님 나라의 지식이다. 그런 까닭에 조직신학은 세상의 학문과 대화해야 하고 세상의 학문의 바른 길을 인도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조직신학이라는 표현에서 조직이라는 용어는 학문의 영역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방법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곧 조직이라는 말은 조직신학의 작업에서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체계화시키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체계화시키는 것은 조직신학의 중요한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고, 조직신학의 학문적 영역은 기독교 사상이다. 조직신학은 전 세계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믿고 전하고자 하는 사상의 총화이다조직신학은 성서의 체계적 지식을 갖추는데 필요한 학문이다. 성서의 한두구절만으로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성서 전체의 내용을 상호 모순 없이 체계화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성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정보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언급하고 있지만 야고보서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조직신학은 이런 것에 대한 해답을 준다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라는 개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성서에서 찾으려하면 너무 다양한 언급들이 있어서 이에 대한 해석을 하기가 어렵다. 죽은 자들은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가 역사의 마지막 날 예수의 재림의 날에 부활한다는 표현도 있고, 죽음에서 즉각적으로 부활을 경험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구절도 있다.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서 죽은 자의 영혼이 즉각적으로 천국으로 간다고 믿고 있다.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갖고 있는 개인의 질문에 대한 답은 교회의 교리서에서 직접 얻은 것이지 성서에서 직접 얻은 것은 아니다. 성서학이 달라지면 조직신학의 답도 달라진다. 안식일이 토요일인데 왜 주일에 예배를 드리느냐라든지 유아세례가 가능하냐 라든지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으면 인간이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이 왜 필요하냐의 문제도 조직신학이 답을 하는 것이다. 조직신학은 개인이 질문하는 모든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을 하려는 학문이다조직신학은 세상과 역사가 질문하는 문제에 대해 답해야 한다. 진화론은 잘못되었는가?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문제들이다. 성서 속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성서가 저술될 당시의 이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서속에서 직접적인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조직신학이 답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신학은 성서를 기초로 해서 오늘의 세상과 역사가 질문하는 수많은 문제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이 질문들은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고 이 답을 위해 조직신학은 존재한다.

개인이 질문하는 문제에 대한 특정교회의 답이 교의이고 세상과 역사가 질문하는 질문에 대한 교회의 답도 교의이다. 특정교회가 자신의 입장에서 성서의 내용을 체계화시키고 개인과 세상과 역사의 질문을 깊이 고려해서 최종적인 답을 한 것이 그 교회의 교의이다. 물론 이 교회의 교의들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러한 교회의 교의들은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교회의 교의들 사이의 논쟁은 불가피하다. 조직신학은 세계 교회들의 교의들을 연구해서 최종적인 바른 답을 하려고 하는 학문이다. 특정교회가 자신들의 교의만을 절대화하면 그 교회 안에서는 조직신학이 발전하기 어렵다. 조직신학의 발전은 진리를 찾는 과정이고 끊임없이 발전되어야 한다. 한국의 일부 교단에서는 교권으로 조직신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막는 위험한 일이다설교의 주제와 내용은 조직신학이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교의는 설교의 내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설교의 내용은 성서라고 생각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는 설교의 주제와 내용이 흘러나온 원천이다. 그런데 설교의 주제와 내용은 교회의 교의이고 조직신학이다. 설교는 지금 여기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조직신학은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학문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교육 지도자들은 조직신학이 교회의 교육의 주제와 내용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성서를 암기하는 것이나 과거의 교리를 암기하는 것이 교회교육의 핵심이 아니다. 교회교육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인데 곧, 오늘의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가르침의 근원은 성서이고 주제와 내용은 조직신학이며 방법은 실천신학이다초대교회의 신학은 변증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변증학이란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일반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학문이다. 이 변증학을 계승하고 있는 학문의 분야가 조직신학이다. 조직신학은 무신론과 싸우는 제일선에 있는 신학이다. 조직신학은 무신론과 싸우는 제일선에 서 있는 신학이다. 조직신학의 가르침이 날카롭지 못하면 교회는 무신론을 방어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이는 즉시 교회의 위기로 나타난다. 이단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교회는 수많은 이단으로 말미암아 수없이 위기에 봉착한 바 있다. 이단을 극복하는 것은 조직신학의 깊은 가르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단들이 모두 성서를 인용하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깊은 체계적 지식이 없이는 이단을 극복하기 어렵다. 한국교회가 성서공부는 많이 하는데도 이단 극복이 안 되는 이유는 조직신학교육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조직신학과 교회의 교의에 대한 교육강화를 통해 이단에 대처해야 한다.

[ 교회사란 무엇인가 ]

교회인식의 새로움, 교회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전혀 새롭게 고안해낸 관점이 아니라 사도시대의 교회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며, 또 오늘날 모더니즘적 세계관인 기계적 사고양식을 지양하며 유기체적 세계관과 상통하기도 한다. 교회 인식의 새로움을 통해서 교회사 서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개발된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한 역사를 서술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역사는 신앙과 신학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어 왔다. 그래서 교회사 안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교훈과 의미가 가득 차 있다. 교회사를 이해하는 여러 관점들 중에는 교회사를 선교의 역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사실상 교회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선교하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선교하지 않았다면 교회는 오늘날 세계적인 공동체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또한 우리는 열린 자세로 상호 대화를 통해서 세계 보편 종교가 된 기독교의 현주소를 보면서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과 특성을 우선적으로 찾아보는 교회사 연구 방식, ‘glocalization’을 추구해야 한다. 자신의 역사를 먼저 철저하게 파악하고 규명함으로써 세계사적이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적인 자리매김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문제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부터 있어 왔던 문제들의 재현일 뿐인 것이다.

신학은 교회사를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역사를 구속사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가 어떠한 경로로든 교회사와 연관되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구약과 신약학이 제대로 되려면 시대사 연구가 그 바탕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반드시 역사적인 방법으로 다루어 져야 한다는 뜻이다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교회의 역사와 불가분적인 관계를 설정해준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하나님을 설명하고, 그의 선하신 행동을 가르치며, 예배와 선포를 통해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모든 신학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는 필수적인 연구과제이다. 신학하는 이가 반드시 터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루시는 방법을 읽는 안목이다교회사학자의 우선적인 과제는 성경에 증언된 하나님의 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계시가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또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선포된 말씀을 하여, 말씀 사건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반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세계교회사와 함께 우리는 한국 교회사를 아울러 면밀히 연구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선교사가 전래하기 전에 자생적으로 신도들이 형성되었고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엄청난 대부흥을 경험하였으며 인구 대비 최다 선교사 파견 등 기독교 역사상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구한말 대외투쟁,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 독재정권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현재도 기독교의 중요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사의 연구를 통해 바른 기독교관을 정립하도록 노력하여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통해 이루려 하시는 뜻을 파악하여 실현하여야 한다신학의 한 영역으로서 교회사를 공부하는 뜻은 첫째, 다른 학문의 영역에 역사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필요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탐구하고자 하는 일차적 본체인 넓은 의미의 교회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겪어 왔는지를 시대를 뛰어넘어서라도 경험하자는 것이 교회사를 공부하는 일차적 목표이다.

둘째는 도대체 올바른 교회의 개념과 모델이 어떤 것이냐?’하는 질문이 2,000년 역사속에서 끊이지 않았다는 데에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교회상과 가시적 조직체로서의 교회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믿는다는 일이 언제나 진행형인 것처럼, 교회의 모습도 현재적 완성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로 되어 가고 있는 진행형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역사를 탐구하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의 교회를 찾아가는 일과 같다2,000년 기독교회의 역사는 또한 성경의 역사와도 일치한다. 교회의 역사는 본질보다는 제도와 외형적인 일에 몰두하여 왔다. 그럴 때마다 등장하는 것이 개혁의 목소리이다. 성서에서 예언자가 등장하는 것처럼, 교회사 가운데에는 언제나 개혁의 외침이 있었다교회의 역사는 개혁의 역사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개혁 정신, 사도 바울의 개혁적인 사상, 어거스틴의 사상, 교회 개혁을 향한 수도사들의 노력, 위대한 종교개혁자들, 경건주의자들 모두가 교회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신앙 여정을 탐구하는 뜻은 과거의 잘못을 오늘에 반복하지 않으려 함이요, 오늘 교회의 모습을 진단하고 참교회상을 추구하자는 데 있다이제 한국은 통일을 대비해야 한다. 통일을 대비하는 한국에 있어서 기독교 정신의 바른 정립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이러한 바른 정립을 위해서는 세계교회사에서의 한국교회 역사의 위치를 정확히 자리매김하고 바른 기독교관을 정립하는 것이 시급한 것이다.

[ 실천신학이란 무엇인가 ]

실천신학운동은 단순히 사중구조에서의 목회학의 재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서학, 역사신학, 조직신학으로 대분류되던 기존의 신학 교과과정에 설교학과 예배학, 기독교교육학과 기독상담학을 부가하고 강조하는 세부전공 분류의 변화가 실천신학의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다 입체적이고 실천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신학하기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실천신학운동은 전개되어야 한다가장 바람직한 목회의 실천은 그 공동체가 속한 지역과 문화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지역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변화와 기대를 품어내는 공동체가 변혁을 위한 해방적인 실천을 감당해낼 수 있다. 모든 신학이 현장적이듯이 모든 실천과 변혁도 현장적이기 때문이다.

[ 선교학에 대한 이해와 선교신학의 유형 ]

선교학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이루는 모든 이론과 시런을 비판적, 체계적,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교학은 모든 교회와 기독교인이 공동으로 짊어져야 할 과제이다. 특히 선교학은 모든 신학 분야와 학문 분야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만남을 통해 변화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지향한다선교신학은 실천신학으로 선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는 독일 선교학자인 테오 준더마이어가 말한 네 가지 선교신학의 유형을 바탕으로 하여 모두 여섯 개의 선교 신학유형을 제시하는데 곧, 회심유형, 이식유형, 구원사적 유형, 약속사적, 유형, 의사소통 유형, 해석학적 유형이 그것이다또한 선교는 무엇보다도 통전적으로 이해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교회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과 문화적 대응에 민감하기를 요구하며, 더 나아가 선교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선교신학은 에큐메니칼 노선과 복음주의 노선으로 양분되어 있다. 큰 틀에서 보아 전자는 세계교회협의회(1948년 창설)를 중심으로, 후자는 로잔 대회(1974년 시작)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에큐메니칼 노선은 대체로 복음주의가 보여 주는 이원론적인 면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데 즉, 영혼과 육체, 종교와 문화, 개인과 공동체, 교회와 세계, 구원과 해방 등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이웃과의 관계 사이에 나타나는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을 선교의 주요 과제로 삼는다. 복음은 교회와 구원 받은 개인뿐 아니라 인간 세계의 모든 부분과 관련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은 1910년 스코틀랜드 애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인데 세계복음화를 그 이상으로 천명하였다. 이에 반해 복음주의 노선은 복음의 일차적 관심을 개인의 영혼 구원에 둔다. 복음주의자들이 사회 구조의 변화에 무관심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들은 대체로 사회 변화는 전도의 결과로 이루어진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최근 들어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와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여 주고 있지만, 전도의 우위성에 대한 주장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를 위한 국제대회에서는 그 이전에 열린 여러 선교대회를 규모면에서 압도할 뿐 아니라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분명히 밝힌 대회로 평가된다. 그러나 로잔 대회가 복음 전도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사회참여가 필요하다고 인정하였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주장한 사회, 정치적 해방이나 구원의 인간화를 수용한 것은 아니었으며 복음 전도의 우선순위를 포기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3. 결론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의 훈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살게 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 하셨으나 이들은 선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부응하지 못한다그들은 거룩과 공의로 옷을 입고 하나님 백성의 역할(제사장)을 수행하여야 하였지만 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썪은 베띠의 비유로 예레미야는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의 심판을 경고한다하나님께서는 우선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살 수 있는 땅을 주셨는데 약속된 땅을 주시고 그 땅의 모든 것을 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이를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이 잉태되었던 것이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상당부분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을 비롯한 토속신을 섬기다가 징계를 당하는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멸하라는 명령을 거역한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범죄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선지자, 예언자들의 경고 및 예언을 보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약속, 특히 메시아의 출현에 대해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신학에서도 최근의 추세는 구약신학을 신약신학, 더 나아가서 성서해석사와 조직신학까지 관련시켜서 다룰 것을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신학의 각 분야가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양하고 신구약의 유기적인 해석을 할 것에 대한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 신학은 중세 십자군 전쟁이 실패하고 인류가 중세의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반성과 더불어 인문주의 문예부흥, 계몽철학,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태동되고 발전되어 왔다. 교회는 성서의 원어 연구 등을 통해 중세의 교리에서 해방되어 종교개혁운동으로 활로를 모색하였다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독일인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원어로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 그 은혜를 통하여 죄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근거로 히브리어 및 헬라어를 읽는 것이 개혁지도자가 가져야 할 위대한 책임과 특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하나님나라는 구약부터 신약을 거쳐 새창조에 이르는 노정에서 일관되게 깔려 있는 기독교 이론의 밑바탕이다. 구약에서의 언약부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까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이끌고 이루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선택받은 민족이었으나 디아스포라로 전세계에 흩어졌지만 이것은 인류의 구원을 세계만방, 땅끝까지 전파하려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근거한 것이었다

사복음서에서 공관복음 세 책은 예수님을 목격한 것을 증언한 복음서이며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그 목격한 것을 묵상한 결과를 복음서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복음서의 가장 놀라운 소식은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계획이라고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에게 가장 어필하고 있으며 마가복음은 이방인 특히 로마인에게 어필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논리적인 그리스인들에게 어필하는 점이 크며 요한복음은 요한의 묵상인 만큼 모든 인류를 향한 통합적인 복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사도행전은 누가행전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누가의 저술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하나의 세트로 보아 누가복음을 읽고 사도행전을 읽을 때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부분이 있다. 사도행전은 역사서로 보아야 하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책을 합하면 신약전체의 30%를 차지한다. 누가에 의하면 복음은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에서 오히려 십자가 이후 그 복음이 유대에서 로마까지 어떻게 퍼져나갔는지를 생동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사실상 바울과 베드로 두 사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토라는 왜 존재했는가. 토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지만 이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는 교육의 하나의 과정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훈련시키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도 한번도 토라를 제대로 지켜본 적이 없다. 인간은 아무도 의로운 사람이 없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으로 보아야 한다. 토라의 기능은 한시적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토라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을 거룩한 것이라고 했다. 토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예비적 과정으로 토라시대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성령과 동행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면 토라는 자동으로 따라 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하나님 만나는 경험이 다시 필요하다. 바울은 교회시대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새창조로 넘어간다토라 시대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이 있었다. 두 번째 아담을 통해 인류의 구원과 새창조를 이룬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모형인데 약속을 믿는자를 구원한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율법을 향한 열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선포한다. 삶의 변화가 토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성령의 법이 생명의 법인 것이다 신학은 성서본문을 해석하되 그 내용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본문에서 저자는 지나치게 한쪽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슈가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성서적으로 명확한 근거하에 주장하여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용공, 좌파들의 주장과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 한국여성신학이나 민중신학 등이 독재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갖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니라 성서의 해석을 정치적인 시각으로 노선에 맞게 고쳐서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또한 2,000년 전에 기록된 성서가 21세기 오늘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진리와 답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하는가를 찾아내는 것도 신학도들의 과제이다. 성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해 오시는가를 증언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같지 않더라도 성서가 이야기하는 진리는 마찬가지이므로 우리는 성서해석학을 통해 이것을 찾아내야지 수천년 전의 이야기라 현실과는 맞지 않으므로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이단의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생각한다.

회심 유형과 이식 유형의 문제점은 제도적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점이다. 그 다음에 불신자를 선교의 단순한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다오늘의 한국 교회 선교 이해는 대개 회심, 이식 유형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을 그가 사는 문화와 역사와 정체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점과 제도 교회의 소속원으로서의 의미부여를 극복해야 할 과제가 한국 교회에 놓여 있다. 아울러 복음 전도를 통한 회심의 경시나 가시적 교회의 중요성과 교회 설립과 확산의 약화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교회 없는 신학이나 선교 없는 신앙은 기독교의 정체성 보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구원사적 유형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교회중심적 선교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신학적 과제를 안고 있다. 아울러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회봉사에 대한 이해를 선교의 테두리내에서 파악하고 실천하는 선교의 확대를 어떻게 실현하는가 하는 점이다약속사적 유형이 교회 중심적 선교이 배타성과 세상에 대한 관심의 약화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높이 살 만하나 반대로 교회를 약화시키고 교회 무용론으로까지 확대된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교회와 선교는 결코 이율배반적인 대립자가 아니다. 교회 없는 선교를 생각할 수 없듯이 선교 없는 교회 또한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의사소통 유형의 과제는 전파와 적응은 함께 모든 기독교 신앙의 이중적인 기원과 원인을 지시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하나는 인간의 증거와 전통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선택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해석학적 유형은 기존의 서구 중심적 혹은 선교사 중심적인 일방적인 복음의 문화 이식과 주입과 문화가 복음을 해석하는 극단적인 상황화와 문화화 모델을 극복하려는 점에서 훌륭하지만 전세계 교회의 해석학적 공동체라는 것은 아직도 구호성의 외침으로 남아있고 여전히 개신교는 교단, 교파, 선교단체 등으로 분열되어 세상의 아픔에 동참하고 세상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성육신적 선교에 못미치고 있는 현실에서 너무 이상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이제 선교는 선교의 종교성을 회복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선교는 프로젝트나 선전이 아니고 선교사는 사업가나 의료인이나 교육자로서만 이미지가 고착된다면 구도자와 종교인으로서의 접촉점은 상실되고 복음 진리의 선교는 지체되거나 거부될 것이다에큐메니칼 노선과 복음주의 노선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은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WCC에서 접신행위등을 자행한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한 일로 보아야 하며 이러한 비성경적인 노선을 교회의 일치라는 것은 무리한 주장인 것이다신학도는 이 시대를 준비하고 대비해야 한다.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없이 맞이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믿는 성서는 미래가 단순히 흘러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을 증거해준다.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것을 인식하는 의식을 예언자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 민족은 명실 공해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시기가 오고 있다. 우리는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길러야 하고 통일을 대비하는 신학을 준비해야 한다. 신학이 바로 설 때 이 시대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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