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근대에 대한 반성

철학은 그렇게 신비로운 것도, 반드시 어려운 것도, 터무니 없는 것도, 그렇다고 무의미  하여 버려야 할 것도 아니다.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악기를 하나 배우는 데도 몇 년간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데 하물며 삶과 인간과 세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일을 쉽사리 익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오해이다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신앙을 정당화하고 변호하기 위해서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중세 신학이 신앙을 이론화하고 체계화하는 수단으로 철학을 사용하고자 했다면 근대 이후의 신학은 대체로 철학이 앞서 닦은 길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현대 철학의 흐름을 잘 파악하면 현대 신학의 논지도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철학은   믿음의 조건이 될 수 없을 뿐 더러 신앙을 정당화하거나 변호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철학은 기독교 신앙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알게 해주고 신앙을 체계적으로 이해   하고자 한 신학에 서양 철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야 한다. 신론 뿐만 아니라 인간론, 우주론, 교회론 등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신앙의 이해에 철학적 영향이 엄청나게 많이 스며 들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철학을 통해 얻은 또 다른 유익은 어떤 하나의 철학을 절대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철학을 피하기 위해서도 철학을 알아야 한다. 만일 철학을 알지 못하면 거의 예외 없이 어떤 철학에 붙잡혀 있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사회 운동가들, 신학자들, 목회자들에게서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의식적으로 어떤 철학을 따르는 것보다 이런 경우가 더 해로울 수 있다신앙이란 감정이나 의지의 작용일 뿐만 아니라 지성을 포함한 전인격을 바쳐 참여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신뢰하고,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고, 그 가운데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삶이다. 철학은 이와 달리 지적이고 이론적이며 반성적인 작업이다. 철학은 언제나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신앙을 전제하고 있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할 수도 있고 기독교 유신론적 관점에서 철학을 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 à 의심을 거쳐 확실성으로

데카르트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것은 지금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할 수 없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지금 존재한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생각한다가 아니라 내가 지금 생각한다”,”내가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결국 일인칭 단수, 시제는 현재형,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데카르트는 어떤 지식이라도, 신뢰할 수 있는 지식 즉 과학적 지식으로 인정받으려면 동일한 방법으로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이 방법을 네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명증성의 규칙으로 확실하게 알 때 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것이고 둘째,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분해의 규칙).” 셋째, “생각들을 순서대로 이끌어 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대상에서 시작하여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을 인식하는 데까지 이를 것(합성의 규칙 또는 종합의 규칙).” 넷째, “아무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열거의 규칙 또는 매거의 규칙)”이다데카르트는 새롭게 등장한 과학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갈등을 철학적으로 화해시키고자 애썼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신 존재 증명은 나의 사유와 존재의 확실성에서 출발한다. 나의 사유와 존재의 확실성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신실성에 의존한다는 말인데 우리는 여기서 인식의 순서에 따른 접근법과 존재의 순서에 따른 접근법으로 나눌 수 있다. 존재의 순서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먼저고 인식의 순서로는 내가 먼저라는 것이다여러 측면에서 데카르트는 비판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는 전통주의자라는 이유에서 였는데 사회변혁에는 무관심한 채 오직 참된 명제들만 끌어 모으는 일에 집착한 비실천적 이론가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환경론자들의 비판으로 그가 인간 중심주의에 빠져서 자연을 철저히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프로이트와 라캉 같은 정신분석 학자들의 비판으로 이들은 존재와 사유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데카르트가 말하려는 것은, 애초에 나를 무한한 능력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동일한 능력으로 나를 보존하시며 또한 앞으로도 보존하실 것이기 때문에 나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사실  이다. 하나님이 없다면 나의 존재 자체가 가능하지 않으며 나의 존재가 없다면 나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는 정신의 눈으로 나 자신을 향하면 나는 불완전하고 다른 누군가에 의존하며  끊임 없이 더 크고 더 좋은 분을 바라고 있음을 이해할 뿐 아니라, 동시에 내가 의존하고 있는 분은 이 더욱 큰 것을 모두 무한정적으로 또 가능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한하게 갖고 계신 분이며 이 분이 곧 하나님임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여 내가 있다는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가능함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파스칼 à 생각하는 갈대의 비참과 행복

파스칼은 근대 철학자 중에서 이성만이 유일한 인도자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태도도 실제로 실험을 통해서 어떤 이론이 참된지를 확증하고자 했다. 수학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 교통수단과 체계를 고안할 만큼 실제적인 사람이었다.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여긴 그의 신앙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도 하다그는 또한 또 다른 인식능력인 판단력을 강조했는데 이는 근대의 객관주의적, 탈 인격적 과학 개념에 대항해서 과학적 지식이 지닌 인격적인 차원을 강조한 마이클 폴라니의 암묵지란 개념이 파스칼의 섬세의 정신과 흡사하다. 기하학적, 수학적, 과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몸을 통해,”암묵적으로, 자연스럽게,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고형성되는 지식의 차원이 있다. 마찬가지로 참된 진실을 아는 데는 수학이나 과학이 아닌, 또 다른 이성, 또 다른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사람은 갈대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알 수 있다는 것, 모른다는 것조차 알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존엄성을 구성한다고 보고 공간, 크기, 지속과 같은 측면에서 보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온 우주를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는 생각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고도 하였다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존재, 위대하면서도 그 비참함을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 이것이 파스칼이 본 인간 상황이다. 불균형, 모순, 불안정, 이와 같은 것들이 인간의 현실적 존재를 규정짓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한에 비해서는 무, 무에 비해서는 전체, 무와 전체 사이의 중간자. 양극을 이해하는 데서 무한히 떨어진 인간에게는 사물의 종국도 그 근원도 다같이 헤아릴 수 없는 비밀 속에 숨겨져 있다. 행복은 오직 우리를 창조하고 보존하시는 하나님께 있다고 파스칼은 단정한다.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고 우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을 겸손하게 섬길 수 있다. “자기의 비참을 모르고 하나임을 아는 것은 오만을 자아낸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불러 일으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중간을 이룬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비참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다다를 수 없으며, 진리의 영상을 느끼면서도 허위밖에는 가지지 못하였다. 완전히 모를 수도 없고 확실히 알 수도 없는 만큼 우리가 어떤 정도의 완전에 있었는데 불행히도 거기서 떨어졌다는 것은 명백하다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가치를 올바로 매길 수 있음을 파스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스스로 높이면 낮춰 버리고 사람이 스스로 낮추면 나는 높여 준다.”고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스피노자 à 신 없이 신 안에 사는 삶 .

데카르트가 관심을 가진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과 세계를 근거 짓는 궁극적 기반으로서의   하나님이었다면 파스칼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역사 속에 동참하며  고난 받는 백성과 함께 하는 약속의 하나님이었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사고방식을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이 네덜란드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이다. 어떤 시간적 관점이나 역사적 관점에서 사고하기 보다는 그야말로 시간과 역사, 어떤 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영원의 관점에서생각해  보려고 했던 철학자이다. 그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은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이다. 사실 이 말은 마르틴 루터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은 인격이 전혀 없는 자연이며,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구원을 기대한 처소는 철학이었다. 그것도 고 중세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철학이  아니라 갈릴레이가 제창한 새로운 과학에 적합한 철학을 통해 구원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① 참된 선은 존재하는가 ②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오직 그것만으로 영혼이 자극될 수 있는가③ 그것을 발견하여 얻은 뒤로는 그것을 통해 영원토록 지속적인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하는 것을 탐구하기로 하고 최고 선을 최종 목표로 한다.

그는 특이하게 신 즉 자연에 대한 인식의 전형을 근대 자연과학에서 찾았다. 스피노자가  문제 삼은 것은 모든 것을 목적론적 또는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이었는데 인간 중심적, 의인론적 신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는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파악될 수도 없다는 명제를 증명한 뒤, 곧장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는 명제를 내세운다. 신 외에는 아무런 실체도 존재하지 않고, 신 외에 존재하는 것은 양태뿐이며, 양태는 실체 없이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는 것이죠. 신은 신 이외, 신의 양태로서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자의 존재 근거인 동시에 인식 근거라고 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스피노자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생성하는 모든 것은 오직 신의 무한한 본성의 법칙에 의해서 생기고 또 신의 본질의 필연성으로부터 생긴다고 결론짓는다. 결국 스피노자의 종교비판의 핵심은 ① 종교현상은 자연 현상처럼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 ② 종교적 권위의 원천인 성경도 다른 책과 동일한 방식으로 읽어야 하며 성경의  목적은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식제공이 아니라 경건한 삶의 실천을 유도하는 데 있다고 본 것 ③ 신앙과 지식은 엄밀히 분리되며 신앙은 오직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 것 등이다. 19세기 이후에 유행한 고등비평, 기독교의 본질을 윤리적 삶의 실천에서 찾은 19세기의 자유주의, 그리고 20세기에 볼트만 등을 통해 실천된 기독교 신앙의 탈신화화 작업, 이 세 가지 사조의 선구자가 바로 스피노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이 모두 근대적 이성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을 보았기 때문에 나왔던 결과인 것이다. 

홉스 à 국가 안에서의 인간의 행복

홉스는 종교뿐만 아니라 도덕도 안전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 최초의 근대 정치철학자이다. 정치 문제를 과학적 합리성에 기초해서 풀어 보려고 했던     철학자이다. 홉스는 갈릴레이의 자연철학(물리학)적 관점을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확대, 해석했는데 그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물체 밖에 없고 이것을 지배하는 원리는 운동이다. ‘국가라는 것도  인공적으로 만든 거대한 물체로서 운동의 원리는 돌이나 비행기에 적용될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도 적용된다고 본 것이다근대 물리학자들은 운동을 두 가지의 힘, 즉 당기는 힘인 인력과 밀어내는 힘인 척력으로  설명한다. 홉스는 이 원리를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는데 적용한다. 존재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을 욕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기피하는 것, 이 두가지 정서 사이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행동이 생긴다는 것인데 욕망과 기피 또는 희망과 두려움, 이 두 가지 정서가 인간을 지배한다고 본 것이다. 사회를 형성하고 국가를 만들고 정치를 하는 인간의 모습을 욕망과 기피, 희망과 두려움으로 본 것은 성경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이성을 고작해야 계산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나에게 유리한 것은 더하고 불리한 것은 빼는 능력, 즉 덧셈과 뺄셈 능력이라는 것인데 이성을 거느리고 이용하는 게 정념 이라는 것이다. 정념은 앞에서 이야기한 욕망과 기피, 희망과 두려움 등을 말하는 것이다. 정념 에는 선천적인 것도 있고 후천적인 것도 있는데 예컨대 식욕이나 배설욕, 수면욕이나 성욕 같은 것이 누구나 타고나는 것이라면 특정 대상에 대한 기호는 환경적 요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일 수 있으며 인간의 정념, 즉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과 희망을 주는 것을 잘 연구해야 비로소 안전한 사회를 구축할 전략을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그는 시민사회 또는 국가조직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인격적, 도덕적 변화나 신분에 걸맞는 행동, 이타적 삶의 태도를 내세우지 않는다. 홉스의 철학 전체를 꿰고 있는 원리는 운동의 원리이다. 그는 운동을 추동하는 힘을 노력또는 욕구라고 불렀다. 자신을 보존하고자 끊임 없이 애쓰는 모습을 일컫는 것인데 운동의 법칙에  종속된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예외 없이 자기 보존 욕구로 살아간다.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은 바로 사물의 현실적 본질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은 가감 없이 홉스의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다. 홉스의 정치 이론은 바로 이러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인간, 철저하게 정념에 의해 지배 받는 인간,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인간, 이 인간으로부터 홉스는 국가라는 인위적인 인격체를 구성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가 합법적 종교로 수용되고 최고 지도자가 기독교인이라면 이 때는 최고 주권자가 국가 뿐 아니라 교회의 일에서도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이프니츠 à 이 세계는 가능한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문두스 옵티무스’, 즉 가능한 세계(하나님이 만들 수있는 세계) 가운데 가장 좋은 세계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 완선,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보았다하나님에게는 보편적인 의지만 있을 뿐 개별적인 의지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전체적으로 무엇을 원할 뿐 어떤 하나만을 개별적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처음부터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선택하고 조정해 두실 뿐 개별적으로 간섭하시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거울처럼 반영되고 있기 때문에 예외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하나님이 개별사건에 직접 개입하시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통상적 의미의 이적이 부인되는데 우리가 이적이라 부르는 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것을 이적이라 부르는 것은 일어난 이유와 과정을 우리의 제한된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이 세계는 우연적이다. 이 세계가 우연적이라고 해서 세계가 우연히, 저절로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세계가 우연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계가 선택되었다는 말인데 만일 이 세계가 그 자체로 필연적이라면 이 세계는 창조주의 뜻과 상관없이 현재 있는 이 모습 이대로 영원 전부터 있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우연적이라는 말은 이 세계가 반드시 있어야 했기 때문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를 만드셨는가? 여기에는  한가지 전제가 있는데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있다면 그 사물이나 사건이 존재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충족이유율이다. 우리처럼 유한한 인간이 그 이유를 분석해서 찾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분석해서 읽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다논리적으로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어떤 세계가 다른 세계보다 더 좋은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 라이프니츠는 다양성과 질서의 결합을 바로 그 기준으로 제안한다. “하나님은 가장 완전한 세계, 다시 말해 그 가설로는 가장 단순하고 그 현상으로는 가장 풍부한 세계를 창조하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내용은 가장 풍부하고 다양하면서 그것을 통일하는 법칙은 가장 단순하고 최소한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가장 좋은 세계라는 것이다. 최소한의 법칙으로 최대한의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가장 좋은 이론이고 최소한의 법과 질서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국가가 최선의 국가이듯이, 다양성은 극대화하면서 그것을 통일하고 있는 법칙은 가장 단순한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는 또 죄와 관련하여 인간의 불순종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면 고통은 없었을 것인데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로 지어져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존 로크 à 의견 차이를 조정할 수 있는 방법  

로크는 다원주의적 상황을 꿰뚫어 보고 그것에 철학적 반응을 보인 최초의 근대 철학자  이다. 당시는 정치체제나 종교 다원화의 시대였고 단순한 다원화가 아니라 피를 흘리며 싸웠다.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그는 유럽에 최종 조정자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의 관심은 도덕과 종교의 문제였는데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반목, 개신교 안에 있는 종교적 열광주의자들의 움직임, 로크는 이러한 것들이 지속적인 사회적 불안의 요인이 된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불안 요소를 지식 이론으로 극복해 보려는 것이 그의 저서 도덕과 계시종교의 원리의 실천적 목적이었다. 존 로크는 분명히 경험론자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성을 불신한 것은 아니다. 인간 정념이 빚어 내는 구체적인 삶과 정치 현실과 관련해서 이성주의자 스피노자가 누구보다 경험을 중시한 것처럼, 영국 경험론의 아버지로 분류되는 로크는 엄밀한 경험적 지식에 매이지 않고 도덕과 종교와 관련해서 이성의 역할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그는 지식이란 관념들의 결합과 일치 또는 불일치와 모순에 대한 지각이며 지식은 오직  이것만으로 성립한다고 하였다. 또한 확실성이 보장될 수 있는 지식은 오직 직관과 증명을   통한 지식이고 그 외 다른 것은 단순한 의견이나 신앙일 뿐 지식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지식의 분야에서는 다원주의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하였다. 또 그는 어떤 명제에 대한 동의는 그것이 계시임을 입증해주는 증거를 넘어서지 않을 때 합리적일 수 있다고 한다. 신앙조차도 그것이 보여주는 증거를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말이다이성이 최종 재판관이며 우리의 안내자여야 한다는 로크의 주장은 종교와 정치 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계몽 철학자로서 제시한 분쟁 해결의 방안이었다. 이성을 내세운다고 해서 이성이 곧 모든 믿음의 원천이어야 한다거나 기초라는 말은 아니다. 믿음이 근거를 둔 것  혹은 믿음이 비롯된 것은 이성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믿음과 관련된 문제는 이성을 안내자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칸트와 마찬가지로 로크도 책에 의존하는 것을 대단히 경계하였다. 그는 책이 지식의 수단임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아무런 검증 없이 저자가 그렇게 말했다는 이유로 책의 내용을 믿는 다면 독자의 믿음은 저자의 앎에 비해 언제나 열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보는 것이므로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기까지, 우리 자신의 지성으로 파악하기까지는 우리는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일도 실제로 생각해 봄으로써 가능하다고 로크는 강조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실행해 봄으로써 참된 것을 알고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교육 및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버클리 à 상식을 회복하기 위한 철학

버클리는 성공회 신부였는데 그는 선교사 훈련을 위해 버뮤다에 신학교를 설립할 계획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아일랜드에서 5년동안 체류하기도 했고 생애의 후반에는 아일랜드 클로인의 주교로서 교인들의 영적 복지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신체적 복지를 위해 애썼다. 대학에  있있을 때 그는 철학이 아니라 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저작들을 보면그가 끝까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서 철학적 문제를 다루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철학을 업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철학은 그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버클리는 근대 자연과학을 뒷받침하고 있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발견했는데 사물 가운데 실재하는 것은 제 1성질에 해당하는 것(크기, 모양, 공간 점유, 운동    가능성)뿐이고 맛, 소리, 냄새 등은 인식 주체의 주관적인 느낌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주관을 통해 채색되고 굴절된 관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실재하는 그 배후의 세계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 채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제 2성질과 제 1성질을 지닌 사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밖에서 주어진 영향에 따라 정지해 있거나 운동할 것인데 이것이 옳다면 우리는 전혀 의식할 수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의식되지 않는 실체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고 상정해야 한다.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얼핏 보아 비상식적인 이 주장은, 모든 사물은 그것을 지각하는 정신과의 관련성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지탱하시고 세상 어느 곳에나 현존하신다는 믿음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이를 ‘비물질론’ 또는 ‘비유물론’이라고 한다. ‘자존적인 물질’ 다시 말해  다른 정신적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물질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버클리는 자연이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존재임을 거부한다. 스스로 그러한 존재 스스로 자기 자신인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스스로 계신 분이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다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존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그런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는 자연, 인간의 지식 그리고 하나님 모두 어떤 의미에서 인격적임을 주장하고자 했다. 근대 과학은 자연에 내재된 목적을 제거해 버렸는데 인간은 소나 개 혹은 돼지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종속된 존재가 되었고 인간적 요소, 가치관, 세계관, 욕망과 의도는 배제되고, 지식은 사물의 객관적인 반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고 해도 자연 법칙에 모든 것을 내 맡긴 채 한가하게 쉬고 있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버클리는 실체라 할 수 있는 것은 인격을 가진 인간과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밖에 없고 이 실체를 떠나선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à 회의론과 일상적 삶

중세철학은 믿음에서 시작하고 근대철학은 의심에서 시작한다라는 말이 있다. 중세철학의   문을 열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말했고 영국 켄터베리의 주교였던  안셀무스도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신앙은 지성을 추구한다고 했다. 믿음은 종교적 지식뿐만 아니라 사람과 관련된 지식이나 사물에 대한 지식에도 전제되어 있다는 생각이 여기에 깔려 있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은 발생의 조건’, ‘지각의 조건’, ‘확인의 조건’, ‘이해의 조건이 함께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어떤 사건을 교통사고로 이야기할 수 있다. 지식을 구성하고 있는 이 기능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고, 또한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데이비드 흄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의심을 품으면서 데카르트처럼 진리를 찾는 확실한 방법으로 의심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경험론의 근본 주장을  철저히 밀고 갈 때 회의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흄은 인간에 대한 과학을 세워 보고자 한 철학자였다. 뉴턴이 이른바 자연철학에서 거둔  성과를 도덕철학분야, 즉 인간에 관한 과학에서 거두고 싶어했다. 인간을 연구하되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태어난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고자 했는데 이 모든 것은 철학적 인간학에서  그 기초를 얻어야 하고, 철학적 인간학은 경험을 통해 얻은 자료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흄의 생각이었다. 그는 인간의 지식 체계 전체를 새롭게 조정하려고 했으며 인간 본성을 올바  르게 이해하는 것이 지식의 문제, 도덕의 문제, 정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로 본 것이다. 흄은 경험과 동떨어진, 어떤 선험적인 것은 배제한다. 이성으로 이 관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인데 경험만이 이 관계를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반복된 경험을 토대로 현재와 미래에 동일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추측은 잘못될 수 있다.  그는 신학과 종교 전통에 근거한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이것을 대치할 수 있는 일종의 비판적 형이상학을 모색했다. 사물과 자아와 신의 존재에 대해서 오직 이성으로부터 그토록  확실하게 말하는 것을 막아 보자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그는 회의론자로 나타난다. 최종적인 판단을 주저하는 사람이라는 것인데 이성적 추론으로 우리의 지식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회의를 표시한 것이다. 흄은 허구에는 의지가 개입하지만 믿음에는 의지가 개입할 틈이 없다고 하면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믿음, 예컨대 이 길을 따라가면 지하철을 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그렇게 믿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복된 경험을 통해서 믿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느낌은 지성이나 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생존해야하는 인간의 본능, 인간의 정념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흄의 생각이다. 그는 칸트가 생각한 것처럼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일하게 라고 부를 수 있는 인격적 주체를 흄은 수용하지 않는다.

칸트 à 이성이 던지는 세 질문

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칸트는 항상 스스로 생각하라는 준칙이 계몽이라고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이성 자체가 칸트에게는 진리의 최고이자 최후의 시금석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이성 외에는 어떤 것도, 예컨대 국가 권력이나 종교적 전통 또는 신비적 체험이라 해도 진리의 최종 판단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비판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럼에 불구하고 칸트는 이성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와 인간의 도덕적 결함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악을 향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것이 근본악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본다면, 악에 집착하는 성향이 인간에게 내재한다는 것은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다무엇이 앎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무엇이고, 그 대상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만일 우리에게 앎이 가능하다면 그 앎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로 다시 정리해볼 수 있다. 그에게 문제가 된 것은 지식 가운데서도 형이상학과 관련된 것인데 그의 전략은, 보편 타당한 지식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해서 그 지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 무엇인가를 탐사하는 것인데 자신이 이성비판을 통해서 인간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임을 보여 주었다고 주장한다. 흄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인간을 단순히 세계 안에 있는 존재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념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표상과 개념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통해 세계를 빚어 가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세계를 만들고 조직하는 원리가 인간주체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 조직원리는 한편으로는 시간과 공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 지성의 능동적 행위에 바탕을 둔 범주입니다이렇게 사물과 사건을 서술하는 기본적인 사고틀을 범주라고 부르는데 이 범주를 사용해서 사물이나 사건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지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지성의 통제 아래 감각을 통해 들어온 것들을 이어주는 능력을 상상력이라 부른다.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사유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이 감각을 통해서 주어져야 하고 감각을 통해 주어진 것은 개념을 통해 사유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은 감각적 경험과 개념적 사고의 종합을 통해서 비로소 생성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철학사에서 흔히 칸트의 지식 이론을 일컬어 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여기서 우리는 지식과 관련해서 두 가지 서로 관련된 제한과 배제를 볼 수 있는데 먼저 우리의 사유가 객관적인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영역은 오직 감각적 경험의 영역에 제한되고 지식의 타당성 영역을 현상계에 제한할 때 앞에서 말한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지식의 영역에서 제한한다.

 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말은 내가 인간답게 살자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안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선과 악의 기준에서 보자면 나의 생존에 기여하는 것은 선이고 생존을 해치는 것은 악이라고 보는 입장은 홉스나 스피노자에게서 볼 수 있는데 일종의 사회계약으로 본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위를 선하거나 악하게 하는 것은 도덕법칙이다. 그는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 명령은 가언 명령이라 부르고 조건 없이 절대적인 명령을 정언 명령이라고 한다. 진정으로 도덕적 명령, 다시 말해 도덕법칙이 될 수 있는 것은 정언 명령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와 관련된 실천은 오직 정언 명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으로서 중요한 것은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정언 명령이다. 흔히 보편화의 원칙이라 부르는 것인데 두번째의 원칙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는 것입니다. ‘인격성의 원칙또는 목적성의 원칙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다.   나는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는가?

그의 세 번째 물음은 실천적인 동시에 이론적인 물음이다. 그가 내리는 결론은 만일 내가  도덕적 용기를 가지고 산다면 나는 그 덕에 상응하는 행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적으로 산다고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다. 다시 말해 덕에 상응하는 행복이 자연 질서 속에  균등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인데 칸트는 이에 대해 실제로 행복이 이 땅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세에라도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거룩한 존재는 오직 순수 이성에 의해 이지가 움직이는 존재를 말한다. ‘은 바로 이 도덕적 갈등 상황과 관련되는데 덕은 감성의 저항에 대항해서 그것을 억누를 수 있는 도덕적 힘 또는 용기를 뜻한다. ‘불멸하는 영혼은 이 도덕적 완전성을 향해서 무한한 진보를 수행할   자이다. 영혼의 불멸성은,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나아가야 할 인간의 도덕적 소명으로부터 귀결되는 요청입니다. 무한한 도덕적 진보를 이룰 도덕 주체의 영혼이 죽지 않고 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때, 그 때 최고의 선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덕의 실현과 관련해서 영혼의 불멸성이 요청되듯이 행복과 관련해서는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따라서 선과 악에 비례해서 각각 보상할 뿐 아니라 세계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고 관리하는 창조주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돌아가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치할 뿐 아니라 역사의 사건과 우연적인 인간사 전체를 알고 있고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전능자의 존재를 가정할 때 비로소 도덕적 세계라는 이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궁극적으로 선하게 통치하는 신의 존재와 현세를 이어 계속되는 내세의 삶은 만일 우리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산다면 반드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된다.

< 리뷰 > 

장점  

어려운 철학이론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최대한 쉬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게다가 한글이 원본이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근대철학을 논함으로써 크리스찬들이 철학을 어떻게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철학자들을 신앙과 결부시켜서 그들의 철학을 검증하고 있으므로 철학수업에 우선 읽어야 할 책으로 생각된다. 일반철학의 가장 어려운 부분의 하나인 칸트철학 이론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함에 따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칸트의 철학을 3가지 물음 즉,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는가로 구분하고 각기 정통기독교 신앙과 비교하면서  풀어놓아서 크리스천으로서 칸트철학의 기본을 쉽게 알 수 있도록 기술되었다. 제목 그대로 이야기속에 철학이론을 녹여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거부감을 줄여준다. 더 읽고 생각하기를 매장 끝에 배치함으로써 본격적인 철학이론을 더 공부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다음 단계의 서적소개를 하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할만하다.

단점

저자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자신이 직접 원전을 읽지 않은 철학자는 다루지 않다 보니 서문에서 얘기한 쉽게 쓰면서도 서양 근세 철학사의 깊이와 넓이를 체험할 수 있게쓰겠다고 했으나 넓이 부분이 부족하게 되었다칼럼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철학개론과 같이 철학의 큰 흐름을 잡기에는 뭔가가 좀부족한 책이다. 철학이론을 쉽게 풀어 쓴 것은 좋은데 그러다 보니 철학용어 사용 등을 지나치게 자제함으로써 책을 다 읽어도 철학용어를 사용한 논리적용이나 대화가 쉽지 않다. 복잡한 도표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필요한 사람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사람이 참고할 수 있게 철학용어나 철학사조를 도표화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 해놓는 서비스가 아쉽다.

적용

1. 개인에게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 참여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고 있다.  성경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기 위해서 죄와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 철학은 우리에게 삶이 무엇인가. 인생은, 죽음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있게 성찰해 보게 하는 도구이다. 이것을 통해서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고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재검토해 볼 수 있다. 또한 어떠한 하나의 철학에 사상적인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철학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2. 교회에서

철학공부는 하면 할수록 필요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철학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종교를 더 잘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대부분의 기독교 이론은 철학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교회내에서 지도자로서 위치에 있을 때 신도들의 종교관을 확립해주기 위해서도 철학의 기본을 잘 알고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신학을 탄탄하게 바쳐줄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이러한 교회내에서의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철학은 종교와 함께 사물의 궁극적 실체를 파악하고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노력이므로 교회공동체내에서도  기독교적 철학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좋다.

3. 사회에서

물질만능주의의 현실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이상학의  양대 분야, 즉 종교와 함께 철학적 역량을 기르는 것은 우리의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이다. 종교와 철학은 바로 그 출발점과 목표에서 만물의 근원의 정체와 원리를 밝힘으로써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모색해 보려는 공통적 과제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이후 400여년간 때를 기다리시면서 헬레니즘, 즉 헬라어가 준비되는 시기를 기다리셨듯이 헬레니즘 철학이 그 안에서 꽃을 피운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그리스도교인 들로 하여금 성서 자체와 또한 이의 다른 지식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추구 하도록 했던 철학적인 태도가 그들에게 없었다면 역시 신학이라는 학문은 성립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비신도나 타종교 신봉자에게 전도를 할 때 성경 말씀을 가지고 바로 접근할 때 거부감을 줄 소지가 많다. 이 때 누구나 학교에서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가벼운 철학적 주제를 가지고 접근할 때 훨씬 부드럽게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도 기독교리 형성과정에서의 철학의 역할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이해력을 길러나가야 하며 교리의 바탕이 되는 철학적 사고를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게시물(포스팅) 다국어성경연구소(多國語聖經硏究所, Multilingual Bible Institute) 사적인 저작권이 있는 (사진 포함)입니다무단 복제와 배포, 가공이 불가하지만 자료의 출처와 URL을 명기할 경우 사용이 가능합니다 연구소는 선교활동을 위한 다국어 성경읽기(聖經通讀, Reading the Bible)운동과 미전도 소수민족의 성경 번역사업을 지원하는 기관입니다성경읽기를 위한 성경 히브리어(Hebrew) , 성경 헬라어 (Greek)강좌와  함께 고전 라틴어 (Latin)의 강의도 개설(online offline 가능)이 되어 있습니다또한 어린이부터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정철 BIBLE ENGLISH 시스템을 통한  영어 강좌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본 게시물(포스팅)은 영어(English), 중국어(Chinese), 일본어(Japanese), 한국어(Korean)의 4개국어로 번역이 되어 전세계로 서비스되어 기독교 선교사명을 활발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선교활동  제휴 문의usedslr@gmail.com, 홈페이지(homepage) http://www.nkmissio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