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서론

1 : 철학의 정의

철학공부는 논리적으로 그 분야에 대한 정의와 함께 시작한다. 철학을 제 과학의 여왕 이라고 하는데 또 다른 사람들은 철학이 과학이라는 주장을 철저히 부인한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 우리에게 세계의 궁극적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무지한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 “반성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금언이 종종 인용되는데 그는 이상적인 철학자나 애지자의 체현이었다철학적 탐구는 대략 B.C. 600년경 그리이스 식민지 밀레투스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개념분석이란 철학의 유일한 관심이 개념의 분석적인 탐구에 있다는 말을 요약한 것이다. 철학의 임무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용어를 정의하는 것이며, 제개념의 어법을 명료히 하는 것이다. 분석적 탐구의 중요한 영역들은 각각 명료화를 필요로 하는 기본용어와 원리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탐구들은 종종 메타 철학적이라고 불린다. 이에 비해 사변철학은 철학 연구의 두 번째 가지이다. 분석철학이 지식의 토대를 분석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데 비해 사변철학은 적어도 그것의 궁극적인 형태에서는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실재관들에 대한 개념적인 연구의 결과를 종합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몇몇 사변철학은 보다 엄격한 분석철학과는 상관없는 두 가지 관심을 가진다. 첫째는 실재에 대한 단일하고도 전포괄적인 견해에 대한 모든 지식을 통합하려는 시도이며, 둘째는 종교적, 도덕적, 미적 가치의 통합된 체계를 간명하게 말하려는 노력이다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철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공부할 책임을 느끼고 있다. 철학은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도전하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기독교는 기독교에 대항하여 설치된 지적 도전에 용감하게 대적할 수 있다. 그러한 도전의 결과는 신앙의 상실이 아니라 이성으로 잘 다듬어지고 성숙한 신앙을 대단히 귀중하게 소유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 하게도 너무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에 해로운 그런 믿음들을 고수하고자 하며, 그리고 이런 사실조차 깨닫고 있지 못하다.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이고 철학도 진리 탐구의 하나의 탐색이므로 철학은 우리가 신과 신이 만든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2 : 철학의 분야

철학자가 기독교 윤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보통 기독교인들의 행위를 이끌어 나가는 법칙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철학자는 그 말을 보다 확장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그 용어를 철학의 한 분야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철학은 거의 모든 학문에 걸쳐져 있다. 특히 종교철학과 관련 그 특징적인 문제들은, 현존하는 종교에 대한 집중적이고 이성적인 세밀한 검토로부터 발생하는데 종교철학자는 일반적으로 이런 행위들이 끝나는 지점에서 자신의 연구를 시작한다. 종교철학에서는 보통 종교 자체의 본질에 관한 것을 연구하고 신의 존재 여부 및 신의 속성에 관하여 연구한다. 또한 종교언어에 관하여 고찰하고 악에 관한 문제도 중요 부분이다이 외에도 철학의 중요한 분과들로는 윤리학, 과학철학,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등 거의  모든 학문을 포괄한다. 윤리학은 올바른 행동을 통제하는 의무와 규범의 본질을 연구하며 종교 철학과 과학철학은 각각의 자기 분야의 개념들과 방법론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반면 논리학은 논증의 정확한 규칙을 다룬다. 지식이론은 인식론의 또 다른 명칭이며, 형이상학은 실재나 존재에 관한 연구분야이다.

3 : 철학 방법론

철학 방법론은 고대에 제논의 귀류법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의 방법이 있으며 현대로 와서는 베이컨의 귀납법과 함께 과학적인 방법들이 사용되고 훗셀이 창시한 현상학적인 방법은 인간의 근본적인 자각에 대한 전 이론적인 접근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이다. 또한 분석적인 방법으로 명료화 방법은 철학적인 난제들이 언어의 분석에 의해서 해결해보려 하는 것인데 인간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를 법제화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우리는 어떤 것이 의미되어 있는가를 주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료화는 사실상 그 어떤 진리 탐구에 있어서도 열쇠가 되는 요소인데 왜냐하면 모호함은 혼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철학은 하는 데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우리가 모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일반적인 철학자들과 특수한 기독교 철학자들 중의 그 어느 쪽도, 어떤 방법이 종교신앙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일치하지 못한다. 사실 어떤 기독교 철학자들은 신앙우위적이어서 종교신앙을 정당화해 주는 합리적인 방법이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어떤 철학적인 방법론도 신적인 계시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성한 성경에서 그 자신을 계시한 신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믿음이다. 기독교 신자가 어떻게 이 믿음을 정당화할 것인가 하는 것은 내적인 문제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은 신의 계시의 불가능성을 법제화하는 철학자 들을 모두 다 실패할 운명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철학의 임무는 신지식에 대한 논증과 모든 자만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고후 10:5)   

4 : 철학의 도구

철학은 논증과 관련 되어 있어서 논증이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정의 내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논증의 종류로는 귀납적 논증과 연역적 논증이 있는데 귀납적인 논증에서는 전제는 결론을 위한 증거를 주기를 주장한다. 어떤 훌륭한 귀납적인 논증은 고도의 적합한 결론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 결론이 실현될 것인지 혹은 진실일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납적인 논증은 적절하다거나 부적절하다고 말해질 수도 있고, 진실이 아니라거나 거짓이라고 말해진다. 한편 연역적 논증에서 만약 근거가 확실하다면 전제는 결론을 보장한다. 그것은 만약 전제가 진실이라면, 결론은 논리적인 필연성에 따라 진실이며 결코 거짓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은 단지 그 형식의 덕택으로 이루어 진다.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은 타당성, 건전성, 결정적인 논증, 믿을만한 논증 등이다철학자의 일차적인 도구는 논리이다. 그것은 적절한 논증을 위해 필요한 규칙을 다룬다.  우리는 연역적인 논증과 귀납적인 논증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전제와 결론에 대한 상관  관계라는 사실을 보았다. 귀납적인 논증에서 전제는 단지 적절한 결론을 얻기 위해 도움이 된다. 한편으로 만약 논증이 타당하고 전제가 참이라면, 전제는 연역적인 논증에서 결론의   진실성을 보장한다.

5 : 철학의 도전

철학자는 꾸준히 생활을 반성한다. 그는 비판적인 사고 그리고 명료하고 올바른 사고에 관심이 있다. 철학은 음으로 양으로 기독교인을 위한 특별한 도전장을 던진다. 철학에의 철저한 인지가 없다면,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들의 지적인 유희에 놀아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그 도전은 진리의 체계를 정립하고 또 오류의 체계를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비기독교인들을 내동댕이 치는 것이다기독교인은 무지한 믿음에 대해서는 정신적인 보상을 받지 못한다. 믿음은 이성보다 더 가치있는 것일는지 모르나 이성은 보다 고귀하다. 루이스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이제 무지하고 고지식하다는 것은 우리의 무기를 버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비호할 방어물이 없는 교육받지 못한 우리의 동지를 배반하는 것이고, 또한 이방인의 지적인 공격에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비유로써도 옳지 못한 철학에 대항해야 함으로 참된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철학의 도움이 없이는 조직신학을 전개할 수가 없다. 성경은 기독교 신학을 위한 기초적인 자료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신학은 그것이 체계화되기 전까지는 체계적이지 못하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여러 철학적인 과정의 결과이다. 기독교리를 건설하는 이런 긍정적인 역할 외에도 철학은 부정적인 역할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 체계로부터 이러한 모순을 배제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믿음의 체계화나 기독교 신앙의 변호를 위한 철학적 논증에서 철학을 이용한다. 그는 기독교적 시각을 다른 세계관과 상호 교류하기 위해 철학을 필요로 한다.

2부 인식이란 무엇인가?

6 : 우리는 알 수 있을까 ? .

    회의주의는 ① 철저하고 완전한 회의주의 ② 완화된 회의주의 등으로 로 나뉜다. 철저하고 완전한 회의주의는 인간은 모든 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으나,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안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하는 부류의 회의주의자들이다. 완화된 회의주의는 직접적인 경험을 뛰어넘는 지식의 주장을 부정함으로써 특징 지워지는데 그것은 몇 가지 제한된 지식의 종류를 인정한다. 인간의 능력은 불완전하고 타락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틀림없이 확실한 지식은 인간에 의해서는 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칸트는 지식이 가능한가?” 라는 물음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칸트는 중간입장이었는데 그는 인간의 인식론적 관점을 변화시켰는데 인식자가 이전에 생각했었던 것으로서 사물을 따르지는 않는다고 가정하고 인식된 사물이 인식자를 따른다고 하여 그는 지식이 가능한 사물의 범위에서 그것은 정신을 따른다고 가정했다. 한편 반회의주의자들은 회의주의가 ① 이성적인 면에서 일관성이 없으며 ② 무의미하고 ③ 상식에 어긋날 뿐 아니라 ④ 언어와 갈등 관계에 있으며 ⑤ 귀납의 결과가 아니므로 귀납법을  이성적으로 정당하다고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식론자들은 회의주의가 이성적인 근거와 실제적인 근거 위에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회의주의의 강점은 인간이 아무것도 증명해 보일 수 없는 영역에서 독단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그 힘에 있다. 회의주의는 두 가지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데 하나는 자기들이 안다고 하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합당한 근거를 인식론자들이 가지고 있는가?”란 질문이고 또하나는 인간의 체계에 모순이나 불합리한 측면들이 있는가?”하는 질문이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지식의 체계는 아마 참일 수 없을 것이다. 회의주의는 인식론적인 유도의 첫 걸음이다.    

7 :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이 장에서는 우리의 신념과 지식의 원천이나 기원을 알아보는데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 직관적인 통찰, 이성, 감각적인 경험 등 이런 원천들은 신념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는 대응하는 다섯 가지 논리나 기준으로 발전한다. 여기에는 신앙이나 권위주의와 함께 주관주의, 합리주의, 경험주의, 실용주의가 있다신앙이나 타인의 증언은 과거에 관해 우리가 알려고 할 때 그 지식이 일차적인 원천이 되는것이고 직관은 윤리학과 형이상학 약간 뿐만 아니라 미적인 감각과 기호 감각의 근거인 것이다. 이성은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이성은 상호 모순되는 신념들이 도저히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또한 그것은 수학, 논리학 그리고 일반 개념들에 관한 우리  신념들의 원천이다. 경험은 이성에다가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첨가해 준다.

8 : 확실성이란 가능한가 ?

확실성의 추구는 일식론의 역사에서 커다랗고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많은 철학자들은 확실성이나 의심할 여지 없음이 지식의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진정한 지식이란 항상 영원한 동시에 확실한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에 관한 지식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확실성이 인식론에 중요한 역할을 명시했었음에 반해, 그 확실성의 본질은 철학자에 따라 다양했다인간의 지식은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오류 가능한 것이며 개연적인 것이다. 단지 신만이 필연적으로 틀림 없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신에 대한 지식은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고 진실한가? 아니면 그것은 개연성이 다양한 정도를 가진 진실과 허위, 지식과 의견의 혼합체인가? 성경 속에서 전달된 신지식이 틀림 없다는 것은 우리의 견고한 확신이다. 해답은 성경이 신의 본성의 일부분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어떤 속성들 속에서 발견된다. 신의 속성들 중에는 전지, 진리, 완전한 선, 전능 등이 있다. 이들 속성 각각은 우리가 강조하는 것들에 결정적인 것이다. 신은 이 진리를 가지고 있고 만약 그것을 전달할 동기와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신은 그것을 인간에게 전달할 능력을 결여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신의 계시의 의심할 여지 없음과 틀림 없음을 부정할 그럴 듯한 이유는 확실히 대답된 것처럼 보인다.

9 : 우리는 외부세계를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

우리가 지각할 때 그 지각내용은 실재론, 이원론, 관념론이 있다. 실재론은 주체와 객체와의 관련성을 해석하는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한 방법은 어떤 관찰자와도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써 모든 경험된 객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실재론은 물질 대상들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정신에 현저하지만, 그것들이 정신과는 독립해 있고 또 정신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이고 원시적인 실재론에 동의한다. 현상론은 에이어의 철학에서 시작된 이원론의 특별한 형태의 명칭인데 그는 첫째로 감각자료에 대한 진술은 사물들이 관찰자에게 어떻게 보이고 나타나느냐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에, 그런 진술은 교정할 수 없든지 틀림 없는 것이며 둘째로 감각자료 언어의 도입이 외부 세계의 존재 여부와 더불어 존재한다면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떤 철학자들은 세계가 전적으로 물질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다른 철학자들은 진리는 비물질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 관념론은 대상(특히 물질적인 대상)은 그것에 대한 어떤 의식과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관점으로써 정의된다. 따라서 모든 실재는 의식적인 존재들과 그들의 상태들에로 배타적으로 단축되어진다. 이 입장은 약한 형태와 강한 형태로 나누어 진다여기서 우리는 물질세계와 지각주체의 독립성과 본질에 관한 세 가지 관점을 검토했다. 실재론은 말하기를 우리는 직접적으로 독립적이고 물질적이고 외적인 세계와 접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원론은 두 개의 영역(즉 하나의 관념, 인상, 감각자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물질대상의 존재)을 주장한다. 관념론은 모든 세계를 주관이나 주관성의 영역으로 축소시킨다. 극단적인 형태에서는 자아까지도 이 영역으로 할당된다.          

10 : 신념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

철학자들은 신념이나 진리 자체만으로는 지각에 충분하지 않으며 최소한 그 신념을 옹호해 주거나 정당화해 줄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당화란 옳게 되고 지식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신념의 필수조건이지만, 그것 만이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식론적인 정당화의 두 가지 대인적인 논리나 구조가 있는데 그것은 기초주의와 결합주의나 맥락주의다기초주의란 그 기초가 나머지를 모두 지탱시켜 주지만, 그 자체는 아무런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지식의 구조가 있다는 견해이다. 인식론적으로 기본적인 신념이나 명제는 정당화 피라미드의 최하단을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의 정당화는 직접적이라고 말해지며 또 그것은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인 지식을 구성한다. 그들은 다른 철학자에 의해 본질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일견에 정당화된 본질적으로 믿을 수 있는신념이라고 불리워 졌다. 어쨌든 그들은 모든 지식이 올라설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다. 반면 기초주의의 중요한 대안은 결합주의와 맥락주의인데 때때로 이 견해는 정당화의 성문이론이라 불리워 진다. 결합주의는 인식론적으로 선험적이며 기본적인 믿음은 없다는 견해이다인식론적인 정당화의 문제의 양쪽 측면에 기독교 인식론이 있다. 기초주의와 결합주의는 어떤 점에 있어서 서로 접근한다. 만약 기초주의자가 교정의 여지가 있는 그리고 논리적으로 결정적이 아닌 근거를 허용한다면, 그리고 결합주의자가 함정의 외곽에 있는 믿음들이 경험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 두 견해는 중요한 유사성을 갖는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인식론자들이 받아 들일 수 없는 두 개의 중요한 견해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적절하다. 그것은 실재 세계에 대한 상대주의와 불가지론이다.

3부 실재란 무엇인가?   

11 : 실재는 하나인가 다수인가?

실재는 하나인가 아니면 다수인가? 혹은 양쪽 모두인가? 만약 실재가 하나라면 우리는 어떻게 명백한 그 다수성을 설명할 것인가? 일원론은 실재는 다수가 아니라 하나라고 주장한다. 제논은 ① 만약 실재가 다수라고 가정한다면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결론이 따른다 ② 불합리성은 허위의 조짐이다. ③ 그러므로 실재가 다수라는 것은 허위이다. ④ 따라서 실재는 하나이다  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원론은 실재는 다수이다라고 주장하며 두 그룹(원자론자들과 플라톤학파)은 실재가 비존재에 의해 다르다는 것을 얘기했고,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와 토마스주의자들은 모든 실재는 존재 내에서 다르다고 주장했다원자론은 사물들은 절대적인 비존재에 의해 다르다고 주장했고 플라톤학파는 사물들은 상대적인 비존재에 따라 다르다고 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들은 그 단순한 존재 내에서 다르다고 한 반면 아퀴나스는 사물들은 구성된 존재 안에서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플로티노스는 통일성은 존재보다 더 궁극적인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은 통일성이라고 하며 신은 모든 존재,  지식, 의식을 넘어선 유일자로서 수많은 방향의 반경이 원의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이 일자로부터 다수가 나온다고 하였다기독교의 삼위일체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복수라는 수 세기 묵은 문제의 해결책이 한 신 안에 세 인격이 내포되어 있다는 정통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해 왔다. 바로 여기에 (인격의) 다양성과 본질의 통일성이 존재한다. 적어도 어거스틴 이후로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에서 굉장한 가치를 발견하곤 했다. 신은 왜 인간을 창조했는가? 삼위일체론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신이 자기의 사랑을 나누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지 나누어줄 필요성에서 그리하였던 것은 아니다.” 신의 삼위일체는 우주의 가장 궁극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은 똑같이 본질적인 실재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 안에서의 통일성은 다양성보다 더 근본적일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다양성은 통일성보다 더 근본적일 수가 없다. 신은 다원성 내의 통일성인 동시에 통일성 내의  다원성이다. 신성 속에서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똑같이 근본적이다.

12 : 정신과 육체의 관계

인간 본성에 관한 질문은 가장 대답하기 어렵고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반면에 최대의 철학적인 의의를 갖는다. 유물론은 우리는 육체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인간은 곧 육체와 같기 때문에 육체의 건강이나 행복은 곧 우리 자신의 건강이나 행복이라고 한다. 이와 극단적인 반대는 관념론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므로 인간은 물질로 축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축소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연장을 가진 육체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데카르트는 상호 작용론을 주장하면서 아주 고전적인 형태로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실체와 육체적(확장된)인 실체 두 가지가 있다며 정신적인 실체의 본질적인 특징은 그것이 연장되었다(, 공간적인 크기를 갖는다)는 점이며 인간만이 두 가지 실체를 함께 가질 수 있고 인간 속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이 상호작용론은 물질과 에너지의 보존이라는 물리적인 법칙과 이 상호 작용론은 모순된다고 주장해 왔으며, 이 법칙은 두뇌의 현상이라는 복잡한 영역에는 적용 불가능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두 번째 반론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서로 연결되기에는 너무 별개의 입장이라는 것으로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인간이 그 본질에 있어서 서로 다르지만 일상적인 관계를 늘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는 정신행위가 육체행위의 원인은 아니고 오히려 그것의 산물이라는 것이고 육체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단 하나의 방향성만을 지닐 뿐이라고 주장한다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유물론과 일원론인 동일성이론이 성경에 정면으로 위배되며 성경은 인간이 순전히 물질적이기만 한 차원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안다. 인간의 육체는 땅의 흙으로  만들어 졌으나 하나님이 인간의 몸 속으로 당신의 숨을 불어 넣어주신 것이다.

13 : 인간은 자유로운가 ?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직면하게 되는 가장 중요하고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는 철학적 의문의 하나는 자유의지의 문제이다. 또 특히 그 대답은 형이상학은 물론, 도덕, 법률, 종교와 관련이   있다. 극단적인 결정론은 특히 종종 운명론으로 오해받는다. 반면에 단적인 결정론은 우리 자신의 행동을 포함하는 선행조건들에 의해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극단적인 결정론자들은 인간의 책임이란 개념은 부정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나간다. 사실은 도덕적 책임의 부정이 나약한 사회 보다는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 것이다. 만약 우리 경험 중의 어떤 것들이 진실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행하는데 자유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온건한 결정론이란 만약 외적인 구속이 없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따라서 때때로 우리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견해인데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욕구와 내적인 상태에 따라서 행동하였지만, 이런   상태가 사실상 우리를 어떤 기계 위로 걸어 올림으로써 유도된 것이라고 가정해 보면 그     불합리한 것을 알 수 있다이에 대해 비결정론자들은 자유에 대한 양립주의자들의 해석을 거부한다. 우리의 행동을 범주화 할 수 있는 과학적인 법칙이란 없으며, 또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어떤 법칙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질서에서 그 원인을 알지 못하더라도 한 사건은 그 원인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점에서 비판 받을 만하다.

14 : 인간은 죽음 후에 살아남을 수 있는가 ?

사후의 인간 존재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찬반 논쟁이 존재한다. 영혼불멸을 반대한 논증은경험적인 논증으로 운명론자는 모든 인간이 죽는 것은 보편적이고 논의의 여지 없는 사실이라고 지적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것이 아니다. 에녹( 5:24)과 엘리야 (왕하 2:11)는 죽지 않았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숙명론적인 입장에 반대하는 핵심적 예증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재림시 육체가 썩지 않는 몸으로 변할 것이라고 교훈하고 있다영혼 불멸에 반대한 가장 흥미 있고 인상적인 논증은 육체와 정신이 의존한다는 논증이다. 이 관점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이 문제가 현대의 지적인 고찰로부터 권위 있는 확증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정신활동은 육체에 의존하고 있다우리의 두뇌는 불멸하는 것이 아니며, 죽음 앞에서 모든 기능을 멈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욱이 모든 증거는 정신생활이 두뇌의 구조와 육체적인 에너지와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현재 실존의 육체정신의 의존관계가, 미래 실존의 상태에 관해서는 아무런 증명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 하기 위해서 미래 생명을 관찰해야 한다. 미래 실존의 상태들은 현세의 상태와는 차이가 있다기독교인에게 내세에 관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대답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는 죽은 이후의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고 있다.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건너 가신 예수는, 불멸의 문제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15 : 다른 정신은 있는가 ?

철학자들은 실재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에 흥미를 가질 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소유하는  것과 똑 같은 사상과 감정을 가진 다른 정신들과 존재들이 있는 것을, 우리들 각자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다유추에 의해 논증하는 것은 만약 주어진 현상 A가 일관성 있게 다른 현상 B하고 관계가 있다면, A와 유사한 현상에 접할 때 우리는 이것이 B와 유사한 현상과 관련성이 있다는 결론을 정당하게 내릴 수 있다고 가정한다는 사실을 보통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반대이론들은 그 논증이 빈약하며 논증의 정확성을 지지할 방법이 없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다른 정신들에 대한 질문에 응답함에 있어서 행동주의란, 모든 정신적인 태도나 심리학적인 표현들이 행동이나 육체적인 상태로 축소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런 표현들이 행동에 비추어서 완전히 이해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우리가 극심한 고통 중에 있을 때는 주위환경이  행위를 유발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서 관찰하는 어떤 행위에 기초하여 고통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유추로부터의 논증이 현대 사상들 속에서 폭넓게 비판 받았던 반면에, 그 논증은 다른 대안 못지 않게 변화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그것은 비방들이 없는 바는 아니며, 그것에 반대해서 제공된 어떤 반론도 결정적인 것이 못 된다.

16 : 진리란 무엇인가 ?

철학이 진리의 문제와 궁극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면, 진리를 정의 내리고 그 진리가 어떻게 결정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다일관성 진리이론에 의하면 하나의 진술이란, 그것이 그 이론체계의 다른 진술과 일치하거나 일관성이 있을 그 때에만 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진리이론에 접해 볼 때 각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체계의 특징이며 지식이 지니는 이와 같은 철저한 상관성 때문에 모든 지식은 그 체계 안에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관성이라는 것이 진리의 필이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하나의 진리이론으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즉, 그것은 충분조건이 못 된다상응이론에 의하면 진리란 신념이나 문장과 사실이나 사태 간의 상응형식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응이론에 대한 반대이론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고 불리어 왔다. 이 역설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으로서의 해답을 제시하자면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주장은, 자기   파괴적이거나 자기 패배적인 것으로서 전혀 진리 주장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상대주의나 불가지론으로 결론이 나는 진리이론은 모두 받아들일수 없다. 성경에는 인간이 진리를 알고 있으며, 거기에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4부 궁극적인 존재란 무엇인가 ?

17 : 신앙과 이성의 관계

철학에서 기독교인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신앙과 이성을 어떻게 결부시키는가이다. 계시는 인간의 이성이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는 발견될 수 없을 진리에 대해 신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현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은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인간 정신의 자연적인 능력이다키에르케고르나 칼 바르트 등은 오직 계시만이 인간지식의 타당한 원천으로 고려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반면에 칸트나 스피노자 등은 모든 진리는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과 계시 사이에 상관성이 존재한다고  하였으며 이들의 차이점은 어느 쪽에 더 강조를 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거스틴은 플라톤 철학의 배경에서 기독교에 이르렀으며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통에서 저술했다. 어거스틴은 신앙에 의해 신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 대한 반대급부는,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얻을 수 없는 보다 완전한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이며 이 증명을 통해 나오는 신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 결코 인간이 신앙에 의해 진입해 들어가게 되는 유일한 종류는 아니다. 그러나 그 중의 한 유형임에는 틀림없다. 아퀴나스는 계시의 도움을 받아 인간은 신에 관한 확실한 진리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진리들을 철학적으로 증명해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18 : 신의 의미

신을 인식하는 방식에는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가 있는데 ① 유신론은 세계 저편에 있으  면서 세계 안에 있는 신을 고수하는데, 그 신은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다. ② 자연신론은 신이 세계 저편에 있지만 세계 안에는 없다고 믿는데, 그 신은 초월적이며 적어도 초자연적인 방식으로는 내재적이지 못하다. ③ 범신론은 신이 세계 안에 있지 세계 저편에는 없다고 믿으며  여기서 신은 세계이고 신은 우주 속에 내재하고 있지 우주를 초월해 있지 못하다고 하며 ④ 만유재신론은 영혼이 육체 속에 있는 방식으로 신이 우주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⑤ 유한 신론은 유신론과는 반대로 신이 우주 밖에 있으면서 우주를 통치하지는 않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우주는 만유재신론과는 반대로 신의 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중 자연신론에서 제일 난처한 점은 그것이 창조는 긍정하면서 기적은 부정하는 것인데 왜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신 신이, 어떤 것에서 어떤 것(예를 들어서 물 à 포도주)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는가? 이러한 비일관성은 특별한 변명 없이는 답할 수 없다기독교적인 견해에서 볼 때 신은 전능하고 선한 창조주이며 세계의 보존자로 여겨진다.  신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간을 창조했으며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하여 악을 허용해 왔다. 기독교인이 신의 계시(, 성경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아는 것은 인간 이성에 의해서 확인된다. 

19 : 신은 존재하는가?

전능하시고 전선하시고 무한하신 창조주 그리고 전 우주를 지탱하시는 분은 존재하는가?   유신론자들은 소위 신의 존재에 대해 결정적인 논증을 제시한다. 무신론자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들이라고 자기들이 주장하는 바를 제시한다. 불가지론자들은 신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회의주의자 집단은 오히려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자 한다.   결국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신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으로 불가피한 증거란 없다이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증을 보면 ① 나는 불완전한 관념을 갖고 있다. ② 그러나 완전한 것을 모르는 한, 불완전한 것을 알 수 없다. ③ 그러나 불완전한 정신은 완전한 관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④ 그러나 완전성이라는 나의 지식의 원천인 완전한 정신이 틀림없이 있다. 이것은 논리적인 정당화 없이 인과율의 원리에 호소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싸르트르는 인간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할 수 있을 때에만 자유롭지만, 그들의 욕망들을 그들에게 부여한 것은 신이 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비록 신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인 완벽한 논증은 없다고 해도 우리는 신을 믿을 만한 얼마간이유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우연한 존재가 있다면 절대적인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이 우연성의 근거가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정의상 우연한 존재는 비야기되었거나 자기 원인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인 존재가 존재한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합리적인 듯이 보인다.

20 : 우리는 신에 관하여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

언어가 경험적으로 근거 지워지고 또 신이 초경험적인 존재라면, 신에 관한 어떠한 이야기도 진정으로 서술적일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언어의 성질에 대하여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대답이 있다. 첫째, 신에 관한 이야기는 다의적이다. 이들은 무한한 신은 항상 신을 표현하려는 유한한 언어의 능력을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신에 관한 단일의미적인 이야기는 불가지론의 견지에서 주장하는 이론으로 많은 기독교 사변가들이 종교 언어의 한 가지로만 해석되는 성질을 주장해 왔다. 세 번째로는 신에 관한 유추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유추적인 개념들은 불가지론이나 단일 의미적인 개념으로 전락해 버린다종교언어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진리의 한 요소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종교언어에는 순수하게 기술적인 것 이상이 있어야 한다. 신에 관한 이야기는 환기적이 어야 한다. 그것은 신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신에게 응답하게 하는 신으로 부터의 이야기이어야 한다. 계시의 언어는 신에 관한 비례적인 서술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에게 응답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비례적인 것 이상을 포함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신에 관한 적절한 이야기는 신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로부터 초월적인 신에 대한 응답을 끌어내는 이야기이다.

21 : 악의 문제

신과 악을 관련시키는 근본적인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무신론은 악의 실재를 인정하고 신을 부정한다. 범신론은 신을 인정하고 악의 실재를 부정한다. 유신론과 이원론은 신과 악의 양립을 보여주려고 시도 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유신론자들은 몇 가지 이유에서 신과 악의 양립을 인정한다. 그것은 선과 악은 대립물이어서 어떤 것도 이 대립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악은 선에서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선과 악은 둘 다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 모든 선의 기초에는 영원한 하나의 제 1원리가 있으며 악의 뿌리에는 또 다른 제 1원리가 있다. 이에 대해 유신론자들은 첫째로 신은 몇몇 사물에 대해서는 단지 간접적인 창조자라고 한다. 둘째로는 악은 사물이 아니다. 악은 선의 상실이나 부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악은 다른 실체 속에 존재하지만 존재 그 자체는 아니다. 어떤 것도 전적인 악일 수 없다. 결국 유신론은 신이 보다 더 큰 선을 만들기 위해 악을 인정한다고 한다유신론은 신이 악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신의 무한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창조에 대한 신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악이 발생할 것을 안다는 신의 전지를 부정한다. 유신론은 악에 대해 가장 적합한 설명을 견지하는데, 즉 무한히 선하고 전능한 신은 보다 더 위대한 선을 만들기 위해서 악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이 세계는 최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신은 그의 최선을 다할 것이다.

22 : 우리는 신을 경험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종교와 경험을 둘 다 정의해야 한다. 경험은 주체가 다른 주체나 객체에 대하여 갖는 인식이다. 특수한 경험은 개인의 의식 전체 내의 어떤 주어진 측면이나 계기에 집중된다. 경험은 근원적이거나 이차적일 것이다. 근원적인 경험이란 어떤 것에 대한 원래의 비 반성적인 인식이다. 2차적인 경험이란 어떤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경험의 반성이다. 2차적인 경험은 종종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추론은 하나의 경험이고 그 자체로 종교경험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 있어서 중요역할을 할 것이다종교는 초월적인 것이거나 서구 사회에서 보통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초월적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자기 초월의 과정이나 자신의 유한한 상태라는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인간의 시도를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과정의 대상을 의미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부른다. 쉴라이어마허는 도덕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의무이지만, 종교는 우주에 대한 인간의 절대 의존이라고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윤리적인 것은 도덕법칙에 대한 응답이지만, 종교적인 것은 도덕적 율법 제정자에 대한 응답이라고 그는 말했다. 어거스틴, 아퀴나스, 파스칼, 키에르케고르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가장 저명하고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이 자신들의 신과의 만남에 관해서 완전히 속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따라서 신은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5부 선과 악은 무엇인가 ?

23 : 옳음이란 무엇인가 ?

철학에서 인식론은 진리와 관련이 있고 존재론은 실재와 관련이 있지만 윤리학은 선과 관계가 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은 기독교 윤리로 나타나는데 궁극적으로 그리고 견고하게 완전한 사랑과 정의의 신의 변함 없는 본성에 고정되었다. 기독교 윤리학이란 신의 절대 의지에 기초하고 있거나 아니면 신은 그 이상의 무엇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하는 잘못된 이분법을 피한다. 기독교의 신은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박애적이다. 기독교도들은 신이 인간에게 두 가지 국면에 자신을 계시해 놓았다고 믿는다. 즉 그의 세계(자연 계시)와 그의 말씀(특별 계시)이다. 특별 계시는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 죄의 영향을 극복하는데 필수적이다. 그것은 자연계시 보다 신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해 준다기독교 윤리는 인본주의 윤리보다 우월함을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은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그의 완전성이 절대적인 인격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만약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옳다면 그 도덕의 궁극적인 근원은, 다른 어떤 인본주의 윤리보다 무한히 우월하다. 또한 기독교 윤리는 우월한 인격적인 현현(예수 그리스도)을 갖고 있다. 성경은 예수는 성육신한 신이며, 그것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수많은 경우에 그가 구약의 여호와임을 말해 준다. 더욱이 기독교는 우월한 윤리적 선포(즉 성경)을 갖고 있다. 신은 사랑이며 예수는 인간의 형태로 현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율법은 개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최선의 방향을 알려준다.

24 : 어떻게 무엇이 옳은 지를 알 수 있는가 ?

윤리적인 원칙들을 정당화 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 왔다. 그 대부분은 옳음에 대한   특별한 정의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는 우선 유명한 견해들의 부적합성을 검토해 보고 그리고 기독교적인 관점으로부터 보다 적합한 정당화를 제공하고자 한다.  옳음에 의해 의미된 것의 정당화로는 ① 결과에 대한 정당화 ② 반대되는 것의 자멸적인 속성에 의한 정당화 ③ 직관에 의한 정당화 ④ 자기 증거에 의한 정당화 ⑤ 인간의 권위에 대한 호소에 의한 정당화 ⑥ 신의 권위에 대한 호소에 의한 정당화가 있다. 이에 대해 옮음에 대한  기독교적인 정당화로는 ① 오직 신앙에 대한 호소 ② 이성에 대한 호소 ③ 일반 계시의 성격  ④ 일반 계시의 정당화 등이 있다옮음의 개념을 정당화하려는 무수한 시도들이 있어 왔다. 옳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더 이상 호소할 곳이 없는 궁극적인 권위(하나님)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님을 믿는데 대한 어떤 정당화를 가져야만 한다. 기독교인들은 행동에 대한 권위 있는 규범으로서의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성경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제공한다. 기독교인들은 특별계시 뿐만 아니라 일반계시 둘 다를 믿는다.

25 : 규칙과 결과의 연관성

기본적으로 윤리학에 대한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하나는 법칙에 중심을 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과에 중심을 둔 것이다. 전자는 의무중심적이어서 법칙주의라 불리우고, 후자는 목적중심적이어서 목적주의라 불리운다플라톤과 칸트를 포함한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 취해져 왔는데 그것은 목적론적 견해와 대비해 봄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옳음이란 결과에 관계없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공리주의는 옮음은 장기적인 결과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 전형적인 예를 들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는 시도는 그것 자체로는 훌륭한 행동이 아니고 그 사람이 구조되었을 때 비로소 좋은 행동이 된다. 옮음과 결과의 상관성을 보면 이러한 견해의 검증은 법칙과 결과가, 포괄적인 윤리도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법칙이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 모두이다  앞에서 본 두가지 접근방법은 법칙주의 윤리는 법칙에 있어서 의무중심적이고, 목적주의  윤리는 결과에 있어서 목적 중심적이다. 이러한 두 측면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포괄적인 윤리는 둘 모두를 포함한다. 기독교인들은 둘 모두와 관련이 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의무라고 신이 준 규범을 지킨다면, 신은 결국에는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단기적으로는 우리가 윤리적인 기준을 침범하지 않고 보다 나은 행복을 낳을 때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26 : 옳음이란 보편적인가 ?

윤리적인 상대주의는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변화한다며 보편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중세의 옥캄은 유명론을 주장하여 윤리적인 상대주의에 공헌하엿는데 보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래서 유명론은 철저한 윤리적 상대주의를 요구한다이에 대해 근대의 상대주의는 공리주의와 실존주의, 진화론 등을 통해 보편성을 부정하고 결과에 따른 윤리의 상대주의에 무게를 실었다. 많은 움직임이 현대의 윤리적인 상대주의에서 두드러지는데 정서주의, 주관주의, 상황주의. 그것들의 극단적인 형태에 있어서 그 모두는 도덕 폐기론이다. 에이어는 모든 윤리적인 진술들은 정서적이라고 주장한다. 싸르트르는 무신론적인 실존주의는, 윤리에 있어서는 극단적인 주관주의의 형식을 내포하고 있다. 플래처는 과감하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도덕률폐기론 사상가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고, 모든 객관적 가치는 그와 함께 사장되었다고 주장했다기독교인에게는 보편적인 윤리기준이란 신의 변하지 않는 성품에서 나온다. 그것에 의해 그것은 모든 사람은 어떤 도덕적인 의무아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상황은 신의 어떤 절대를 적용해야 하는지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준다.

27 : 도덕적인 의무는 상충하는가 ?

도덕적 의무의 상충시 그 상충이 실재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이론과 상충하지만 딜레마는 풀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세번째 대안에 따르면 모든 윤리적인 딜레마에 도덕적인  방법이 항상 있다. 이 견해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취해진다. 이들은 ① 상충은 외관상의 것이며 ② 생명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고 ③ 죄를 피하기 위해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며 ④ 신의 섭리를 믿으라고 충고하며 ⑤ 진정한 딜레마는 우리들   자신이 만드는 것으로 본다보편적인 윤리규범을 믿고 있는 사람에 의해 취해지는 두번째 견해는 대중적으로 덜 나쁜  견해라고 묘사된다. 이 입장에 따르면 둘다 틀렸다고 하는 진정한 도덕적 딜레마가 있다. 우리는 두 악 중에서 덜 나쁜 쪽을 단순히 행해야 하며, 그리고 나서는 그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이에 비해 더 나은 선의 견해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신의 명령 사이에 불가피한 상충이 있을 때마다, 우위의 법칙(성경속에 신에 의해 나타난)에 따를 것을 의미한다기독교인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다. 성경은 예수는 전혀 죄가 없지만 그러나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의 죄없음이 성경에 분명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덜 나쁜 악의 지지자들은 이 명백한 상충에 필요한 다른 설명을 찾기를 원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그리스도 모범의 완전성에 의문을 던지며 둘째로 왜 예수가 덜 나쁜 악의 상황에 직면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① 모든 덜 나쁜 악의 상황은 원죄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그 스스로 어떤 딜레마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② 신은 예수의 죄 없음을 요구하는 구속 계획을 전복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예수를 면하게 하였다고 설명한다.

기독교적인 덜 나쁜 악의 견해를 논박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예수가 처했던 진정한 도덕적  상충의 예를 주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어떤 실재적 상충에 접했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죄 없이도 놓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누구나 죄 지음 없이 실재적인 도덕적 상충에 직면할 수 있다면, 덜 나쁜 악의 견해는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덜 나쁜 악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상충된 상황에서 죄 지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옳음의 상충에 대한 문제에서는 세 가지 기본 입장이 있다. 세번째 대안의 견해는 진정한  상충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가 실제적이지 못하고 비성경적이며 모순이라는 점을 우리는 발견하였다. 덜 나쁜 악의 견해는 어떤 진정한 딜레마가 있지만,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 둘 다 나쁘다고 주장한다. 이 입장은 예수의 삶과 그리고 십자가의 사실과 맞이 않음이 밝혀졌다. 유일하게 적절한 견해는 더 나은 선의 견해의 형태이다. 이것에 따라서 신은 인간의 더 높은 명령에 대한 의무의 거절과 관련해 더 낮은 명령을 따르지 않도록 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이 무엇이 더 높은 명령인가를 계시해 준다.

< 리뷰 > 

장점  

노르만 L. 가이슬러(1932-) 박사는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종교철학과 교수, Dalla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변증학 교수, Southern Evangelical Seminary 교수로 50년을 봉직하였다. 기독교 철학, 변증학의 대가로 기독교인들에게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다. 대표적 저서로 종교철학 개론,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 변증학, 기적과 현대사상 등이 있다. 그의 저서 「기독교  철학개론」은 기독교 철학분야의 주요 저작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철학적 사유의 길로 인도한 역작이다. 이 책은 기독교 철학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하면서 기독교적 철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철학이 모든 지식적 활동의 기본이 될 수 있도록 정지 작업을 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이 책은 비록 철학적인 용어로 인해 어렵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개론형식으로 엮어 놓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으면 소제목 암기를 통해서라도 전체 기독교 철학에 대한 개념을 잡을 수 있다. 다른 책들이 신학과 철학을 비교하는 형태로 서술되었다면 이 책은 용광로처럼  철학에 신학을 녹여 놓은 것 같이 자연스럽고 통일성이 있다. 전체적으로 신학이라는 명제를   철학으로 설명 해주고 있지만 특히 제 3 11장에서처럼 실재는 하나인가 다수인가? 를 통해   삼위일체론을 개념적으로 설명, 본서 12정신과 육체의 관계에서는 로마서 7장에서 다루고  있는 마음과 육체의 철학을 구체화 시켜 주고 있다. 저자는 철학의 1차적인 자료를 매장 말에 소개하면서 까지 모든 철학적 주장 중 반 기독교적 주장들을 근거를 가지고 공정한 입장에서 반박, 기독교의 온당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철학의 오류들을 인정하고 반박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철학을 기반한 신학을 구축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철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일생 기독교를 이해 하는 바탕을 이루게 되기를 유도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봉착할 수 있는 제반 철학적 사유를 다루어 줌으로써 신학도에게도 많은 도움을 준다.  

단점

이 책은 개론식으로 엮으면서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한 번 읽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다시 몇 페이지 앞으로 돌아가서 두세 차례씩 밑줄을 그으며 읽어야 해서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 철학도가 아닌 기독교인들이 주요 독자층인 만큼 기독교인이 보다 더  쉽게 이해되도록 교리와 성경구절을 더 많이 삽입하여서 철학 용어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여 실제 신앙생활에 곧바로 적용토록 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더우기 이 책은 개론서라고 보기에는 서술형 위주로 되어 있어서 내용 정리가 쉽지 않게 되어 있다. 우리 신학도의 입장에서는 신학을 들어가기 전에 철학개론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입장이므로 철학적 사조 및 이론을 도표화 한다든지 하는 서비스가 있었더라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학기 중에 본서에 나오는 철학이론을 나름대로 도표화 하는 작업 등을 서문 등에서 권유했더라면 소기의 학습능률을 올릴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적용

1. 개인에게

우리가 신학도로서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자신만의 신학을 정립하는데 철학적인 사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주요 교리를 이해하고 신학적인 저작을 합리적으로 해석  하기 위해 누구든지 어느 정도의 철학 지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철학에 대한 인지가   없다면 비기독교인의 철학적 지적 유희에 휘말릴 수 있다. 기독교리를 공부하면서 철학적인 기초 구축을 병행해야 한다. 그것이 본서와 같은 기독교 철학이면 더욱 좋다. 그래야 이단과의 논쟁  에서도 반박할 논리를 갖출 수 있다. 신학과 철학은 둘 다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철학적인 지식은 실제로 주요교리 형성 체계와 신학적 저작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게 해주고 자칫하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흐를 수 있는 신학공부를 구체화시켜 주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서 철학이론 중에서 무신론, 불가지론, 회의론 등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를 시도하지만 우연한 존재가 있는 것을 인정한다면 필연적인 존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론을 통해 우주는 변화하고 있고 유용한 에너지의 총량은 감소한다는 이론에 따라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다라는 철학적 결론을 통해 우주 너머에 실존하고 있는 필연적 존재를 우리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악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 해답을 얻는다. 즉 무한히 선하고 전능한 신은 보다 더 위대한 선을 만들기 위해 악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리만으로는 얻기 힘든 철학적 사유다. 자유로운 이 세계는 최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신은 그의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2. 교회에서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신학도나 성직자들이 결국 정착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학생들과 성직자들이 철학 공부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문제는 이들이 결국 교회로 진출했을 때 벌어지고 있는 수 많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에 있어서 신학적으로만 접근할 뿐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책임이 있다. , 종교만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제 문제, 즉 선과 악,  미와 추, 질서와 자유, 삶과 죽음 같은 것은 철학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철학은 사물의 궁극적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어서 종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  므로 철학이론을 통해 교회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이단논쟁이나 교회내에서의 인간관계의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으므로 교회에서도 목회자나 교역자, 일반성도를 막론하고 성경공부와 함께 철학의 기본지식도 함께 습득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3.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유신론자이면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데 문제가 없지만 사회 내에서 무신론자와의 논쟁이나 설득을 위해 신에 대한 신에 대한 경험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역사적으로 수천 년에 걸쳐 그 많은 사람들, 특히 지성적인 철학인, 종교인들이 다 오류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종교적인 경험을 무조건적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경험은 철학적인 이성적인 추론과 떨어질 수가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신론자들은 이성적으로 기독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결국 구원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물질만능주의의 현실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이상학의  양대 분야, 즉 종교와 함께 철학적 역량을 기르는 것은 우리의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이다. 종교와 철학은 바로 그 출발점과 목표에서 만물의 근원의 정체와 원리를 밝힘으로써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모색해 보려는 공통적 과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보통 비신자의 경우 이해가 되지 않는 교리를 가지고 설득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거부감을 가지기 쉽다. 이때 가벼운 철학적 논제를 가지고 대화를 풀어 나간다면 훨씬  이해하기 쉽게 대화를 주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것은 결국 우리의 사명과도 연관되어 있다.  .

 

 

 게시물(포스팅) 다국어성경연구소(多國語聖經硏究所, Multilingual Bible Institute) 사적인 저작권이 있는 (사진 포함)입니다무단 복제와 배포, 가공이 불가하지만 자료의 출처와 URL을 명기할 경우 사용이 가능합니다 연구소는 선교활동을 위한 다국어 성경읽기(聖經通讀, Reading the Bible)운동과 미전도 소수민족의 성경 번역사업을 지원하는 기관입니다성경읽기를 위한 성경 히브리어(Hebrew) , 성경 헬라어 (Greek)강좌와  함께 고전 라틴어 (Latin)의 강의도 개설(online offline 가능)이 되어 있습니다또한 어린이부터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정철 BIBLE ENGLISH 시스템을 통한  영어 강좌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본 게시물(포스팅)은 영어(English), 중국어(Chinese), 일본어(Japanese), 한국어(Korean)의 4개국어로 번역이 되어 전세계로 서비스되어 기독교 선교사명을 활발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선교활동  제휴 문의usedslr@gmail.com, 홈페이지(homepage) http://www.nkmissio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