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고린도전서의 “γλῶσσα” 연구
Ⅰ. 고린도교회의 당시 시대상황 분석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γλῶσσ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적인 고린도의 문화적 특징과 사회, 정치, 경제적 특성을 이해해야 하며 그 후에 원어인 헬라어 사본을 비롯해서 각종 역본을 성실하게 대조해 보고 해당 구절을 분석해야 하고, 해당 구절의 번역에 문제가 있는 부분은 철저하게 비평하여 교정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바울이 이것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한 사실파악이다.
A. 로마의 도시 고린도와 그 문화적 특징
그리스의 고린도는 지정학적으로 그리스 반도의 남북과 동서의 상업과 무역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늘 여행객으로 붐볐으며 국제적인 무역 중심지였고, 사업과 경제적 번영에 민감한 도시였다. 이처럼 성공에 몰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십자가 아래 자기를 낮추는 삶을 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 고린도는 그렇게 만만한 전도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린도전후서를 합치면 바울 서신 중에서 뿐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장문의 책이다. 특히 고린도전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본 논문의 주제인 “방언” (γλῶσσα)의 해석이 까다로운 만큼 바울의 서신 저작 목적을 바르게 분석하기 위해 이러한 고린도의 문화적 배경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한편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인이 되기 이전에 자신들이 속해 있던 문화의 여러 특징들을 교회 안으로 그대로 갖고 들어왔다. 이는 여러가지 문화가 혼재해 있는 상황에서 있을 법한 일이며 동서남북으로 엄청난 유동인구가 있던 당시의 고린도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복잡다단한 문화의 교회 유입은 막심하였을 것이며 고린도 전후서 에 나타난 많은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본 논문의 주제인 “방언”(γλῶσσα)과 관련하여 고린도교회를 둘러 싼 상황을 유추해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의 여러 부분에서 바울은 교인들이 외국어를 하는 은사에 대하여 감사한다. 다국어에 능통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특별히 외국어를 잘 하는 것에 대하여 향후 그들을 통하여 로마제국내의 여러 지방에 퍼져 나가 역동적으로 전도활동을 할 수 있게 될 것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의 헬라적 배경에 따라 지식과 더불어 방언과 예언의 은사들을 특별히 좋아했고, 그들 중에서도 황홀경에서 하는 방언을 성령의 가장 현저한 나타남으로 생각하고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은사들을 겉으로 현저하게 나타나느냐의 관점이 아니라 모두에게 유익을 주느냐(12:7), 또는 교회를 세워 올리는 데 유용한가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성령은 남을 섬기는 사랑으로 스스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2]
B. 고린도교회 당시의 사회 경제적 분위기
바울이 고린도에 선교를 위해 도착할 즈음에는 고린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바벨론 유수 당시부터 시작해서 신구약 중간기에만 전세계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이 800만명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유수한 헬라의 도시들 즉, 알렉산드리아, 로마, 고린도 등지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사도행전 18장에도 나타나 있듯이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을 정도였다.
고린도는 지정학적 위치상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섞여 있는 도시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고린도에 온갖 지역의 언어가 혼잡되어 많은 수의 언어가 섞여서 복잡하게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현대에 이러한 예들은 싱가포르나 홍콩에서 영어, 중국어, 광둥어 등을 혼잡하여 사용함으로써 타 지역 사람들이 볼 때는 무슨 언어인지 알 수 없는 경우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타 종교의 영향으로 온갖 우상숭배가 자행되면서 그들의 “반복되는 뜻 모를 소리”도 분명히 성행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서신에서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고전 8:5)”라고 하면서 당시 고린도사회에 수 많은 종교가 있었음을 알린다. 그리스·로마 신화나 다른 신화들에는 그 신들의 족보를 정리해 놓은 표가 수십 페이지에 이를 정도[4]라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그들 중 방언과 같이 현저히 나타나는 은사들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자신들이 받은 은사들을 서로에게 자랑하며, 교만과 멸시, 시기와 분쟁의 분위기를 만들고 예배 때 그 방언과 예언을 경쟁적으로 해대어 일대 혼돈을 빚곤 하였다(고전 12~14장).[5]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교회내에서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C.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후서 저술 배경
고린도전서의 저술 배경 및 목적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고린도에 보낸 서신의 수가 몇 개며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상황에서 쓰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 들이 폭넓게 제시 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게 최소 4통의 편지를 쓴 것 으로 보인다. 첫 번째 편지는 고린도전서 5장 9절에 언급된 지금은 없어진 “이전 편지” 이고, 우리가 갖고 있는 고린도전서가 뒤따른다. 세 번째 편지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고뇌와 애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고후 2:3; 4) 씀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근심하게 한 편지”(고후; 7:8;12)이고, 네 번째 편지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고린도후서이다.[6]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점 중에서도 교회내의 무질서한 “방언” (γλῶσσα)에 대해서 상당한 비중을 두고 권면과 충고를 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문맥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만연한 “방언” (γλῶσσα)이 “은사 로서의 외국어”나 “천사의 언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반복되는 뜻 모를 소리”까지 다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정확한 실체를 다 파악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 (γλῶσσα)에 대해서 일관된 주장을 하지 않고 하려거든 통역 등 검증절차를 거쳐서 질서 있게 행하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린도후서에는 이러한 “방언”에 관한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지만 “고뇌 속에서 애통한 심정으로 쓴” 세 번째 편지에 그 해답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냈던 4개의 서신과 관련, 그 시기와 장소, 기록 목적 등에 대한 분석은 고린도전서의 “방언” (γλῶσσα)에 대한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도표로 정리한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에서 “방언” (γλῶσσα)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상당히 모호해서 그 뜻을 헤아리기가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 도표로 본 바울의 고린도 사역과 편지 >
바울의 사건 |
내용 |
관련 성구 |
비고 |
첫번째 고린도 방문 |
고린도 사역, 교회 설립 |
사도행전 18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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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 소식을 들음 |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바울에게 소식을 전해주었음 |
고전 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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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편지 |
소실 : “음행한 자들과 사귀지 말라” |
고전 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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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일군들 접견 |
바울이 아볼로, 스데바나, 브르가도, 아가이고등과 접견하고 고린도교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 |
고전 16:12,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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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편지
(고린도전서) |
고린도교회 안의 문제들에 대한 책망 과 훈계, “방언”(γλῶσσα) 설명 |
고린도전서 12-14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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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로부터 상황보고 받음 |
비난, 중상, 조롱, 바울의 사도직 의심
거짓 사도 – 고린도 교회 혼란 |
고전 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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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고린도 방문하여 신도들과 대면 |
바울이 신도들로부터 큰 상처를 받음
두 번째 대면의 흔적은 고린도후서 에서 찾을 수 있음 |
고후 12:14, 20-21; 1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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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편지 |
소실 : 통렬한 편지, 교인들로 하여금 근심하게 함 |
고후 7: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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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를 고린도에 보냄(2회) |
결국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 -à 안도함 |
고후 2:12,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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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편지 |
고린도후서 : 위로와 권면, 자기 방어
“방언”(γλῶσσα)에 대한 단서 표현 |
고전 14:33;
고후 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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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고린도 방문 |
에베소 사역 마무리후 고린도로 가서 3개월 체류, 고린도교회의 영적인 혼란을 온전히 수습. 로마서 기록 |
행 20:2,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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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세 번째 방문에 앞서 고린도후서를 썼는데, 이 과정에서 고린도전서의 “방언” (γλῶσσα)에 관한 단서가 고린도후서 12장 20절에 있다. “For I am afraid that when I come I may not find you as I want you to be, and you may not find me as you want me to be. I fear that there may be discord, jealousy, fits of rage, selfish ambition, slander, gossip, arrogance and disorder.” (2 Corinthians 12:20, NIV) NIV가 “disorder” 라고 표현하였고, KJV가 “tumults”라고 번역한 헬라어 “ἀκαταστασία”는 “무질서, 혼란”인데 똑 같은 표현이 “방언”과 “예언”을 질서 있게 하라고 했던 14:33에 나타난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방언” (γλῶσσα)이라는 표현 대신 “ἀκαταστασία”라는 표현을 했으며 결과적 으로 고린도후서가 칭찬과 권면, 자기 방어의 내용이라고 보았을 때 고린도후서를 보내기 전 디도를 두 번째 파견하여 다른 모든 문제들과 함께 “방언” (γλῶσσα)의 문제도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바울은 교인들이 고린도교회내에서 “방언” (γλῶσσα)을 무질서하게 하는 것을 대단히 불쾌히 여기고 경계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중인 고린도후서를 보낸 뒤인 고린도교회 세 번째 방문시 3개월간 체류하면서 고린도교회의 모든 영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기록한 “로마서” 12장에서 은사를 나열하면서 “예언”은 언급(롬 12:6)하고 있으나 “방언” (γλῶσσα)은 빼버린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Ⅱ. 신약성경내 ‘방언(γλῶσσα)’의 용례
“방언”이 “외국어”의 뜻이든지 “반복되는 알 수 없는 소리’라는 뜻이든지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γλῶσσα”와 “διάλεκτος”로 표현되어 있다. 둘 다 ‘말’, ‘언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뉘앙스에 차이가 있다. ‘방언’은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에 31구절인데 이 중 2구절(행 2:6절과 2장 8절)에는 “διάλεκτος”로 나머지 29개 구절에는 “γλῶσσα” 로 쓰고 있다. 이 두개의 단어는 ‘언어’라는 같은 뜻을 가진 이음동의어로 알고 있으나 용법은 차이가 있다. γλῶσσα는 듣는 사람이 모르는 언어로, διάλεκτος는 듣는 사람이 아는 언어라는 의미로 쓰였다. 사도행전 2장 6, 11절에서의 διάλεκτος 는 “자기 지방 말로”라고 번역된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쓰이기 때문에 신약성경 용례 6곳 전부 복수로는 쓰이지 않고 단수로 쓰였다.
A. 마가복음의 용례
마가복음 16장 17절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γλώσσαις λαλήσουσιν καιναῖς) 으로 말하며” 라고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의 “방언”은 복수로 사용되었으며 사도행전에서의 용례와 같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막 16:9-20)은 오래된 라틴어역이나 아랍어 공관복음서 등에 포함되어 있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이 구절이 여러가지 이유로 후대에 누군가가 원문에 첨가한 것으로 보고 있어 이 부분을 성경적 “방언”을 논증하려는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구절로 생각한다. 이 내용을 예로 들어 “방언”의 근거로 설명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외국어 방언”으로서 구분하고 이에 대해서 별도로 분석하지 않는다.
B. 사도행전의 용례
사도행전에서 “방언(γλῶσσα)”의 사용은 총 네 번인데 이 때의 사용은 성령을 주시는 사건과 연결되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이라는데 학자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한다. 즉, 오순절 성령 주심(2장), 고넬료와 친구들에게 성령주심 (10장), 에베소의 열두명에게 성령 주심(19장) 사건으로 나타난다.
사도행전에서는 전부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토머스 R. 슈라이너는 “사도행전 2장의 은사는 사람의 언어였던 것 같다. 사도들이 말하는 것을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 들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행전의 다른 어디에도 방언 말하는 것의 성격이 다르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는 첫 번째 방언 사건으로부터 변화가 일어 났다는 표지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의사였으며 바울과 같이 오랜 기간 동행한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시기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시기가 8년 정도 앞서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을 쓸 당시 누가는 이미 고린도교회에 있는 “방언”(an unknown tongue)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바울과도 이에 대한 논의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이 “an unknown tongue”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만 기록하고 있다. 만일 누가가 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을 했다면 신학적으로 방언 연구에 있어 획기적인 결론이 났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사도행전의 “γλῶσσα” 4회 용례는 전부 복수로 쓰이고 있으며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이다. 따라서 단수로 쓰인 고전 14장의 “γλῶσσα”는 분명히 “은사로서의 외국어”와는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C. 요한계시록의 용례.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방언 연구 서적이나 논문은 “요한계시록”의 용례까지는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 논문은 전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모든 “방언” (γλῶσσα)의 단수, 복수 용례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요한 계시록”의 용례까지 포함한다.
이 “방언”(γλῶσσα)의 단수와 복수의 쓰임과 관련하여 요한 계시록에서는 총 여덟 곳에(5:9; 7:9; 10:11; 11:9; 13:7; 14:6; 16:10; 17:15) 나오는데 이중 ‘혀’의 뜻으로 쓰인 16:10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백성(들)과 같이 쓰여 언어(들)의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이중 5장 9절과 14장 6절에는 γλῶσσα가 단수로 쓰이고 있지만 이것은 앞에 “πᾶς”가 “every”의 뜻으로 쓰여서 복수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수로 쓰인 것이다. 사실상 복수명사인 것이다. 다수의 영어 역본(KJV, NIV, ESV, NIT)도 every tongue (language) 라고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를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에 있어서 γλῶσσα가 복수로 쓰인 경우는 “은사로서의 외국어(언어들)”나 “천사의 언어”로 쓰였고 단수로 쓰인 경우만 “알 수 없는 뜻 모를 소리”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D. 고린도전서의 용례
고린도전서에서 “γλῶσσα”는 14장을 제외하고는 전부 복수로 6회 (12장 4회; 13장 2회)가 쓰였고 14장에서는 16회가 사용되었는데 복수로 쓰인 것이 5(x2), 6, 18, 21, 22, 3, 39절에서 8회, 단수로 쓰인 것이 2, 4, 9, 13, 14, 19, 26, 27절에서 8회 쓰였다. 특이한 점은 9절에서는 단수로 쓰였으면서 정관사가 붙어서 “그 방언”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점이다. 원어성경에도 정관사가 있으며 단수로 사용(τῆς γλώσσης )되고 있는데, 영어 역본으로는 “the tongues”(KJV), “your tongue”(NIV, ESV)이라고 쓰여 있어서 만일 “혀”라면 정관사가 붙을 수 없으므로 “방언”(an unknown tongue)으로 보아야 한다. 한글역본에는 “혀”(개역개정, 우리말성경)와 “방언”(새번역, 공동번역)으로 갈린다.
한편 KJV는 14장에서 단수로 쓰인 8구절중 26절을 제외한 7구절(2, 4, 9, 13, 14, 19, 27절) 은 “an unknown tongue”이라고 하고 있는데 반해 26절은 “a tongue”이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단수로 쓰인 다른 구절들하고는 다른 표현인데, 26절이 찬송(a psalm), 교의(a doctrine), 방언(a tongue), 계시(a revelation), 통역(an interpretation)을 나열하고 있는 구절이라 수사적인 이유로 다른 단어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전서에는 방언이 “γλῶσσα”라는 한 단어로만 표기되어 있다. 또한 “방언” (γλῶσσα)이 동사와 연결되어 사용하는 경우에는 “방언으로 말하다”라고 쓰였고 “방언 으로 기도한다” 라고 쓰인 경우는 고전 14:14의 한 구절 뿐이다. 그런데 그 14장 14절에서도 “방언으로 기도한다면”이라고 하여 가정법을 썼기 때문에 “방언 기도”가 있었다는 증거로 삼기는 곤란하다. 이런 이유로 실제로는 방언과 관련한 동사구는 “방언으로 말하다”만이 확실한 용법으로 봐야 한다.
여기서,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의 가정법 구문은 “방언 기도”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단서를 가지고 있다. 김동찬은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은 주절에 조동사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법이 아니라 단순한 조건절이라고 주장한다. 14장 14절이 가정법이 되기 위해서는 15절 같이 미래형 동사 “προσεύξομαι”가 쓰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영어 문법으로 보면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헬라어의 가정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오는 오역으로 보인다. 헬라어에서 가정법은 영어에서 보다 더 넓은 용법으로 쓰인다. 가정법으로 쓰인 동사는 “시간”의 의미는 없고 오직 “시상”의 의미만 갖는다. 그러므로 14장 14절에서 가정법 접속사 “ἐὰν” 과 장음화된동사 “προσευχωμαι”만으로 헬라어 현재 가정법 구문의 조건은 충족된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해석자에 달려 있다. 즉, 화자가 조건절을 실제로 벌어진 일로 보느냐 아니면 단순히 일어날 가능성만을 전제하고 있느냐는 문맥을 통해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또 한가지는 고전 14장 21절과 22절에서 이사야서 28장 11절, 12절을 인용하는 부분에서 구약성서 이사야서 28장 11절의 tongue은 전후 문맥으로 보아 외국어임이 분명하지만 단수로 히브리어 “라숀”(לָשׁוֹן)이라고 쓰고 있으며 70인역 (LXX)도 γλώσσης ἑτέρας(another tongue)라고 하여 단수로 쓰고 있는데 반해 고린도전서 14장 21절에서는 복수로 사용(ἑτερογλώσσοις, other tongues)하고 있다. LXX에서 단수로 사용한 것은 영어로 설명하면 another 뒤에는 반드시 단수명사가 와야 하는 문법의 규칙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굳이 표현을 바꾸어 복수로 사용(ἑτερογλώσσοις, other tongues)하면서 까지 단수로서의 “γλῶσσα”와의 명확한 구별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앞서 Chapter 1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언급했듯이 스탠리(Stanley Mr. Brugess)가 분류한 방언의 종류 중에서 상대방이 외국어로 말할 때 듣는 사람들이 자기 나라말로 내용을 알아듣는 방언을 “헤테로글로솔랄리아” (heteroglossolalia)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이사야서 28장 12절을 인용하면서 “방언”(γλώσσαις)을 재번역한 단어인 “ἑτερογλώσσοις”를 보면 복수명사로서 “헤테로글로솔랄리아” (heteroglossolalia)로 번역이 가능하다. 만일 이러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면 신약성경 난해구절 중에 대표구절이라 할 수 있는 고린도전서 21-25절까지를 기존의 해석과는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 즉, “구약에 기록된 것처럼 선지자의 말을 조롱하고 듣지 않는 북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을 보내어 ‘방언’ (hetero glossolalia)으로 증명해주어도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21절), 이렇게 인용된 구약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방언’은 불신자 들에게 일회성 표적(σημεῖον)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22절)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다 이 ‘방언’으로 떠들고 있으면 불신자들이나 초신자들이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23절)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은 믿는 자들의 신심을 더욱 굳게 하는 것인데 교회내에서 다들 이 예언을 말하고 있으면 불신자들이나 초신자들도 그 내용에 감동하여 회개하고 경배하게 될 것(24-25절) 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21-25절에서의 바울은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 방언”의 쓰임새로 비추어 보아 교회 내에서 집단으로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로서의 외국어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라 (39절)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γλῶσσα)”이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에 대해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12장과 13장에서의 용례를 우선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 우선 “은사장”이라고 불리우는 12장에서는 성령께서 공동 이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로서 9가지(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기적,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를 들고 있다. 이것들은 전부 신령한 은사로서 각 지체에게 나누어 주시는데(12:11) 교인들이 전부 ‘알고 지내야 하며’(12:1),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할 것’을 권고 (12:31)하고 있는 것이다. 12장 “방언(γλῶσσα)”의 4회의 용례들, 즉 12: 10(x2), 28, 30은 다 복수로 쓰이면서 사도행전에서와 같은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으로 유추해 볼 때 고린도전서에서 복수로 쓰인 외국어 방언은 단지 “외국어를 잘하는 능력”이라기 보다는 성령의 은사로서 대부분 “전혀 습득하지 않은 외국어”로 하는 능력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14장 18절에서 바울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방언들을 말하는 것(μᾶλλον γλώσσαις λαλῶ)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것을 감안해 보았을 때, 바울의 현란한 외국어 능력은 그의 탁월한 지식 수준으로 보아 상당부분은 학습을 통해 습득하였겠지만 일부 외국어들은 은사로서 받았으며 그의 광범위한 선교활동에 쓰였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논한 12장과 “방언장”이라고 할 수 있는 14장의 사이에 사랑을 설파한 13장을 배치하고 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외관적으로 현란하게 보이는 방언 같은 은사들에 심취하고 열광한 것으로 보이는 데 아마도 예배 때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려는 유치한 우월감이었 으며 사랑 없음의 또 하나의 징표였다.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로 강한 자들과 약한 자 들의 다툼에도 그것이 근본 문제라고 보아 8장과 10장 사이 9장에 자신의 자기 희생적 사랑과 섬김의 모범을 그려준 바울은 여기 은사들의 적절한 사용 문제를 다룸에 있어 서도 그 가운데인 13장에 사랑을 예찬하는 시를 끼워 넣어 모든 은사들은 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을 섬기고 공동체를 세워 올리기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14]
바울은 “사람의 모든 언어와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할 꽹과리가 될 뿐”(13:1)이라고 하면서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데 고린도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천사들이 하는 언어라고 생각하면서 그 은사를 특별히 중시하고 자랑하였으며 예배 때마다 무절제하게 행사하여 혼돈을 일으켰던 것이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는 헬라의 신비 종교들에서 광란의 의식 때 쓰이는 도구들이었다. 바울이 여기서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과거 헬라 신비 종교에서의 그들의 체험을 다시 상기시켜서, 사랑이 없이 방언들만 해대는 것은 그들의 과거 이방 종교의 예배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하기 위함이다.[15] 여기서 “내가 사람들과 천사들의 언어들을 말할지라도” (Ἐὰν ταῖς γλώσσαις τῶν ἀνθρώπων λαλῶ καὶ τῶν ἀγγέλων’) 에서 “사람들”과 “천사들”은 “언어들”에 같이 걸리기 때문에 “천사들의 언어들” 이 된다. 이것을 현대교회의 방언의 근거로 볼 수도 있고 “일종의 과장법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때의 “방언”(γλῶσσα)이 복수로 쓰인 점으로 보아 바울은 자신도 하고 있는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에는 “천사의 언어(혹은 자신도 전혀 모르는 외국어)” 같이 외국어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가지만 뭔가 “황홀경이 느껴지는 언어들(종교적인 ecstasy)”도 있다고 생각 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동찬은 “방언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하다면 누구나 방언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자칫 성도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고 성령 충만한 사역자들 중에도 자신은 방언을 하지 못하지만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임을 인정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역시 “은사로서의 외국어”나 “천사의 언어”로서의 황홀경을 말하는 것이지 부정적 측면으로서의 “repeated unknown sound”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으로 “온전한 것이 올 때 사라질 것”(13: 8, 10) 이다. 여기서 “온전한 것”은 예수 재림이라는 설도 있고 신약성경이 정경으로서 완성된 A.D. 90년경이라는 설도 있다. “정경완성시설”을 취할 경우 현대에는 이런 방언이 완전히 사라졌어야 할 것이고 “예수재림시설”을 취할 경우 현대에도 아직 부분적으로 방언현상이 남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증거를 고려할 때 현대교회에도 아직 방언현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본 논문에서는 “예수 재림시설”을 취한다.
Ⅲ. 고린도전서 14장의 해석
지금까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γλῶσσα)에 대한 해석을 위해 바울 당시 고린도의 시대상황을 분석하였으며 14장을 제외한 여타 신약성경에 나오는 용례를 살펴봄으로써 “방언”(γλῶσσα)이 복수로 쓰였을 때는 거의 예외없이 “은사로서의 외국어들”을 의미하는 것을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이러한 토대 위에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γλῶσσα)의 해석을 통해 현대교회의 방언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분석하는데 먼저 논란이 적은 복수로 쓰인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을 먼저 해석하고 수많은 논란에 휩싸여 있는 단수로 쓰인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 로서의 방언을 분석한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방언”(γλῶσσα)을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과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로서의 방언의 두 가지를 번갈아 가면서 예언과 대비하여 설명함으로써 후대인들이 이 부분을 해석하는데 많은 혼란을 겪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말로 번역할 때 복수인 경우나 단수인 경우나 다 단수로 번역이 되기 때문에 특별히 혼동을 겪고 있는 것이며 “방언”(γλῶσσα)을 사용한 바울이나 누가, 마가와 요한은 단수와 복수를 분명히 구분하여 성경을 기록하였다. 이것을 해석해내는 것은 우리의 몫인 것이다. 바울은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이든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로서의 방언이든 예언하는 것만 못하며 통역이 없이는 교회내에서 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을 금하지는 말라(39절)고 하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도 쓰임새에 따라 불신자들에게 하나의 표적이 되어 그들이 회심하는데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22절).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이 외국어 방언은 누가 통역하여 교회에 덕을 끼치지 않는 한 방언 보다는 예언이 더 우월하다고 강조한다(14:5). 여기서 예언(預言)은 “미신으로서 앞날을 맞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대언(代言)의 의미이다. 또한 예언을 의미하는 “προφητεία”(prophesing)은 “예언된 글”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하나님 말씀” 으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그러면서 바울 자신이 “방언”(γλῶσσα)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을 전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6절)고 반문한다.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는 것이다.
한편 단수명사로서의 “방언”(γλῶσσα)의 해석과 관련 논란의 중심에 있는 14장 2절(개역개정)을 분석해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ὁ γὰρ λαλῶν γλώσσῃ οὐκ ἀνθρώποις λαλεῖ ἀλλὰ θεῷ· οὐδεὶς γὰρ ἀκούει, πνεύματι δὲ λαλεῖ μυστήρια·, NA28) 여기서 θεῷ·을 보면 세미콜론(;)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미콜론의 역할은 앞의 문장을 보조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감안하여 다시 번역해보면 “방언(an unknown tongue)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한다;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는데(δὲ) 이를 알아 듣는 자가 없다.”로 번역할 수 있다. 거기에다 2절은 마지막 글자 μυστήρια·에 세미콜론 (;)이 붙어 있어 아직 문장이 끝나지 않고 있다. 헬라어에는 영어의 콜론(:)이 없고 세미콜론(;)만 있기 때문에 세미콜론(;)이 콜론(:)과 세미콜론(;)의 두 가지 역할을 다 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문장의 마침표는 3절 마지막에 있다. “ὁ δὲ προφητεύων ἀνθρώποις λαλεῖ οἰκοδομὴν καὶ παράκλησιν καὶ παραμυθίαν.”(NA 28) 따라서 2,3절을 합쳐서 번역을 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 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한다;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는데(δὲ) 이를 알아 듣는 자가 아무도 없다: 반면에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교화하고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다”가 된다. 2절과 3절은 대구(對句)가 되어 상호 대비되는 표현을 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하는 것: 사람에게 하는 것”,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지만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한다: 교화하고 권면하며 위로한다”가 된다.
그 다음에 나오는 4절은 단수로서의 “방언”(an unknown tongue)을 바울이 과연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구절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14:4, NKRV)의 원문을 보면 “ὁ λαλῶν γλώσσῃ ἑαυτὸν οἰκοδομεῖ· ὁ δὲ προφητεύων ἐκκλησίαν οἰκοδομεῖ.” (NA28)로 되어 있는데 한글 개역개정이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번역하고, 영어 역본(KJV, NIV)은 “edify himself”(자기 자신을 교화시키다)로 번역하고 있는 원어 “ἑαυτὸν οἰκοδομεῖ”에서 “οἰκοδομέω”는 “짓다, 세우다, 강하게 하다”의 뜻으로 “자기 자신”과 “교회” 두 가지에 다 걸리는 단어이므로 “방언”(an unknown tongue)이 자신에게 유익 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단지 4절의 전체적인 맥락은 “방언”은 자신 에게만 유익하지만 “예언”은 교회 전체에 대해서 유익하다고 하여 “예언”이 방언보다 우월함을 언급하는 것으로 단수로서의 방언이 유익하지 않다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해석해야 한다. 14장 전체가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맥락 임에 불구하고 14장 4절에서 긍정적 측면에서의 “an unknown tongue”은 개인적으로 유익이 된다고 본 것이다.
다음으로, 5절과 6절은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에 대해서 언급한다. 바울은 모든 교인들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받기를 원하지만 예언만은 못하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보다 예언이 더 교회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7절에서 11절까지에서 단수로서의 “an unknown tongue” 에 대해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거든 다른 사람이 알아 듣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부정적으로 비판한다. 이 부분은 바울이 14장 4절에서 단수로서의 “an unknown tongue”이 “개인에게 유익하다”고 한 것과 명백히 다른 논조이다. 이것은 단수로서의 “an unknown tongue”에 대해 바울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단수로서의 “an unknown tongue”이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황홀경의 발화”와 함께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반복되는 뜻 모를 소리”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9절은 단수 “tongue”에 정관사를 사용하여 “그 방언” (τῆς γλώσσης) 이라고 표현하고 이것은 2절과 4절에서 언급한 단수로서의 방언 (an unknown tongue)을 지칭하는 것이 문법구조상 명확히 드러난다.
바울은 이어서 그러므로 뜻 모를 소리는 가급적 하지 말되 만일 꼭 하려거든 통역도 같이 할 수 있는 은사를 더욱 넘치게 받기를 기도하라고 권고 (12,13절)하고 있다. 그러면서 만일 자신이 방언(an unknown tongue)으로 기도한다면 영(spirit)은 기도하지만, 스스로도 이해(understanding)를 하지 못할 것이므로(14절), (자신 같으면) 방언으로 기도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또 기도하고, 방언으로 찬미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또 찬미해야 할 것 같다 (15절)고 말하면서 그렇지 않고 영으로만 감사를 드리면 잘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아멘”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16)고 반문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바울이 자신이 “an unknown tongue”으로 기도나 찬미를 했다는 것인지 안했다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울이 “만일 내가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이라고 하여 가정법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방언 기도를 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한 파악이 아니라 바울이 그것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에 대해 다음 구절 “그러면 어떻게 할꼬?”(NKRV, 14:15a)는 바울의 “방언기도”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KJV와 NIV는 이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갖는다. KJV는 부정적으로 “그럼 이게 뭐지?”라고 하고 있고, NIV는 중립적 혹은 긍정적으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뉘앙스로 표현을 한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문맥을 파악해서 해석할 수 밖에 없는데 고린도전서의 저작 목적이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부분을 시정하는 것이고, “방언”(γλῶσσα)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권면과 충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잘했다는 것보다는 잘못하고 있다고 질책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아직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이 있는 경우만 하라(고전 14:27)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교회내에 만연해 있는 “방언” 이 무질서하게 이루어 지고 있어 바울이 이를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14장의 전체적 문맥으로 보아 교회내에서 하는 “방언 기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으며, “예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검토되어야 할 것이 있다.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고린도교회에서 어떤 교인들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이나 천사의 언어 같은 황홀감을 주는 방언이 아닌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그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정확히 뭔지를 아직 모르니 반드시 통역할 수 있는 경우만 제한적으로 하라고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만(18절), 단수로서의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다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로 만 마디 말을 할 바에야 차라리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를 할 것”(19절)이라고 하면서 “an unknown tongue”으로 말을 하려거든 통역을 대동하여 차례대로 하고 통역이 없으면 절대 교회에서는 하지 말라 (27, 28절)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6] 크루즈 콜린, 「고린도후서」 왕인성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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