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언어() – 3. 세상의 언어는 원래 하나였다

 

성경언어학과 관련한 시리즈를 진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간단하게나마 먼저 어원학(Etimology) 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헬라어로 ‘etym’‘true’라는 의미로서 그 기원을 보면 하나님의 원래 의도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Etimology는 단어에 대한 원뜻과 역사를 밝히는 학문이다.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기원을 찾아 들어가면 ‘Proto-Indo-European’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들이 언제 어디서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코카서스 산맥쪽이라는 설이 있고 지금의 터키지방에 살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이들이 터키지방에 살다가 점차 메소포타미아 등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언어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인 philology는 언어학, 문헌학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서 Father의 기원을 찾아가보면 라틴어의 Pater, 그리스어의 Pater, 원 인도유러피언(Proto-Indo-European)Pəter로 귀결된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이 Jacob Grimm(1785-1863)이며 이 법칙을 Grimm’s Law라고 한다.  서유럽의 언어가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스크리트어와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 William Jones(1746-1794)이다. 그는 언어의 천재로서 수십개의 언어를 구사하였으며 산스크리트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Porto language의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한 학자였다.

그런데 원 인도유럽어’(Proto-Indo-European)와 관련하여 주목하여야 할 점이 있다. 언어학을 발전시키고 계승해왔던 학자들이 다 서양의 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산스크리트어와 유럽의 언어들과의 연관성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중 많은 부분이 한국어(특히 남쪽 지방의 사투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사실은 또한 한자를 발명한 민족이 한족이냐 동이족이냐의 논란과 관련하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이것은 한자를 읽는 방식이 중국과 한국이 다소 다르고 어떤 발음은 완전히 다른 발음을 하는데 우리가 읽는 방식이 원래의 한자 발음이라는 것에서 한자는 동이족이 만든 글자로 보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진행중이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기로 한다. 한자의 발명과 관련하여 많은 한자들이 창세기의 설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예를 들어서 배 선()자를 살펴보면 배에 8(세 아들을 포함한 노아의 가족 4x2=8)이 타고 있다거나 만들 조()흙으로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말하고 걷게 한 것이라든지 금할 금()“‘생명나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금한다라든지 하는 말들은 익히 알려진 바다. 이러한 글자의 실례는 무수히 많다. 한자를 만든 동이족이 하나님을 섬기는 종족이었음을 밝혀주는 증거이다. 산스크리트어가 인도유러피언의 뿌리가 되고 또한 한국어, 일본어, 한자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니까 유럽인들이 ‘Proto-Indo-European’라고 부르는 언어는 홍수 이후 인류 최초의 언어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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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언어() – 2. 바벨탑 사건

 

창세기 11장에 의하면 인류는 원래 언어로 통일되어 있었으나 바벨탑 사건 이후로 언어가 혼잡이 되고 그때부터 사방으로 흩어진다. 성경적 족보상으로는 노아의 장남 셈의 4대손인 벨렉과 그의 동생 욕단 대부터 시작해서 족속과 언어가 갈렸다 ( 10). 시기가 바로 바벨탑 이후 족속이 갈린 시기일 것이다. 이후에 이들이 전세계로 퍼지면서 족속별로 언어별로 각기 발전하게 되었다. 성경에는 벨렉(‘나눔 ) 욕단대부터 세상이 나뉘었음을 차례에 걸쳐서 밝히고 있다.

성경은 특별히 욕단(‘그가 작게 되어질 것이다 ) 족보를 역대상 1장과 함께 기재하고 있다. , 야벳과 달리 세상이 나뉘는 벨렉대와는 별도로 욕단의 계보를 번이나 명기한 것은 훗날 욕단의 계보가 중요한 역할을 것이라는 암시로 보여진다. 때부터 족속과 언어가 나뉘어 것으로 성경은 설명을 한다. 욕단의 후손들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곳이 파미르고원, 천산산맥, 알타이 산맥쪽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지만 이것은 어원적으로 연구해봐야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하여야 부분은 수메르 문화와 관련된 것인데 수메르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번성한 고대문명이다. 수메르인이 어디서 인종인지 밝히는 것은 뒷부분에서 다루기로 한다. 우리는 인류문화의 시원을 메소포타미아로 보고 논의를 시작한다. 지역의 고고학적 성과를 살펴보면 B.C 5,000~3,000 이르기까지 지역은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가 혼재되어 있다. 시기는 놀라울 정도의 문화가 이미 피고 있었다. 관개농업과 상업의 발달, 도시 국가의 번성 등과 함께 문자의 발명이 이루어졌는데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시기의 원시문자의 존재이다. 

벨렉과 욕단의 시기에 세계로 흩어진 종족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하면서 이어져 갔다. 한편 각각의 언어는 각각의 문자로 발전되어 갔는데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수메르 문자(설형문자, 쐐기문자) 셈어족 (페니키아어, 히브리어) 문자에 영향을 주었고 인도유럽어족(원 인도유럽어, 산스크리트어, 타밀어) 문자에 영향을 것으로 보인다. 산스크리트 문자로부터 그리스/로마문자 à 불어/독일어 à 영어로 발전되어 왔다. 부분은 어원학에 속하는 분야인데 이것은 다른 파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원 인도유럽어(Proto Indo-European), 산스크리트어나 타밀어의 분석을 통해 이들 언어가 어원적으로 한국어, 일본어의 뿌리를 이루고 있음이 최근의 연구결과 밝혀졌다. 산스크리트어는 인도유럽어족의 뿌리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산스크리트어는 또한 한국어와 연관이 있는 한자의 기반이 되기도 하면서 동서양언어의 공통분모 역할을 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의 어원 연구를 통해 바벨탑 이전의 언어가 원래 하나의 동일한 언어였다는 것을 증명할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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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언어() – 1. 개념과 정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와 온전히 구별되시지만 우리는 일반적인 언어를 사용해 그분에 관해 말할 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어를 허락하신 이유는 세상에 관해 말하고, 우리끼리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보다도 우리가 언어를 통해 하나님 자신에게 말하기를 원하시는데 성경을 통해 그것을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언어는 뜻이 명료하다. 

성경언어학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근거로 어원을 연구하여 민족과 언어의 역사를 밝혀서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학문이라고 있다. 여기에 다언어(multi-lingual)의 습득은 덤으로 얻어질 것이다. 필자는 한국인으로서 영어(English), 현대 중국어(Modern Chinese), 고전 중국어(Old Chinese), 일본어(Japanese), 고전 한국어(Old Korean), 성경 그리스어(Biblical Greek), 성경 히브리어(Biblical Hebrew), 고전 라틴어(Classical Latin)에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다. 현재는 아람어, 산스크리트어와 수메르어를 연구하고 있다. 앞으로 언어들을 기본으로 주변 언어들까지 확대하여 성경적인 어원을 탐구하여 민족과 언어의 기원과 분파를 밝혀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성경은 어원 자체를 알려주는 책은 아니지만 민족과 언어가 어떻게 분파되어 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여기에는 성경을 오류가 없는 진리라고 믿는 전제하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만으로 보면 성경 어원학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성경언어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성경 언어학이 현대 언어의 습득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론까지 제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영어는 한자와 같은 글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원(etimology) 모르면 습득하기가 어렵다. 단어마다 발음이 다른 것은 라틴어, 독일어와 다르다, 격변화나 동사의 활용이 그리스, 라틴어 등보다 간단하지만 이러한 문법사항만 일정기간 익히면 다음에 아주 쉬워지는 언어인데 비해서 영어는 대단히 까다로운 언어이다. 그런데 어원이 되는 산스크리트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각각 1,000단어 전후로 암기하고 있으면 영어단어는 어원적으로 대부분 커버가 된다. 고급 단계의 영어에 도달하기를 원하는 독자는 성경언어() 독파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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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결론

 

이상과 같이방언”(γλῶσσα) 정의부터 시작하여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고 현대 신학의 해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 보았으며 원어로 성서와 많은 역본 들을 대조, 비교하여 정확한 의미를 파악해 보는 한편 신앙의 선진들이 이미 연구해 놓은 성과를 토대로 고린도전서 14장의방언 대한 사도 바울의 관점에 대해서 논증해 보았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성령과 영적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의 발흥으로 현대 교회에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방언”(γλῶσσα) 연구하는 것은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또한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고린도전서의 방언”(γλῶσσα) 단지 가지 뜻으로만 해석함으로써 논리적으로 문맥에 맞는 설명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 

고린도전서를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에서 사용된 방언”(γλῶσσα) 용례를 보면 마가복음, 사도행전, 요한계시록까지 복수로 쓰였을 경우외국어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반면에,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방언”(γλῶσσα) 넒게 잡아서 2가지, 상세하게 구별하였을 최소 3 이상의 의미로 쓰였다. , 방언”(γλῶσσα) 복수로 쓰였을 일반적인외국어 의미와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으로 쓰였고, 단수로서 긍정적인 측면으로황홀경의 발화 부정적 의미의반복되는 모를 소리 구분된다.

이처럼 고린도전서에서 방언” (γλῶσσα) 단수로 쓰인 용례는 분명히외국어로서 쓰인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한   모를 없는 소리 (an unknown tongue)” 긍정적인 측면의황홀경의 발화 경우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의미로서무질서하게 반복되는 모를 소리등도 분명히 안에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교회내에서 질서 없이 이러한방언 남발하면서 자신이 최고의 은사를 받은 행동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γλῶσσα 단수와 복수 문제에 대한 해석을 혼동해서 온갖 종류의 오해가 난무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상당히 많은 외국어를 구사했을 것이고 외국어 능력은 당시로서 세계였던 지중해 연안에서의 그의 역사적 선교에 없어서는 안될 은사였을 것이다. 바울은 외국어를 하는 자체는 은사이지만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일회성 표적으로 불신자를 위한 것이지 교회 안에서 수시로 여러 사람이 같이 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을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 유익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한편 바울의 고린도전후서의 저작 목적을 고려해 사도 바울은은사 로서의 외국어 방언이나황홀경의 천사들의 언어등은 환영하였으나 부정적 의미의반복되는 모를 소리(an unknown tongue)” 대해서는 정확히 뭔지 모르므로 조심스럽게 생각하면서 통역이 있을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질서하게 난무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우려되므로 통역이 있을 경우에는 해도 좋지만 그것도 제한적으로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14 4절에서 단수로서의방언자신을 교화하는 유익한 것으로 명시하고 있고 28절에서도 자기와 하나님에게 말할 것이요라고 긍정하고 있으므로 방언을 함이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믿고 방언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적인 행위 (privacy)이므로 금할 것까지는 없다고 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상으로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방언”(γλῶσσα) 관련된 용례를 살펴 보았는데 연구를 통해서킹제임스버전”(KJV) 노우호가 제기한 단수, 복수의 용례 구분과 관련하여 14 9절과 21절의 예를 통해서 바울이방언” (γλῶσσα) 단수, 복수를 분명히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논증하여 한층 심화시켰으며 신약 성경 전체의 용례를 분석함으로써 가설에서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할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13 1절과 14 4절의 분석을 통해 바울이은사로서의 외국어 아니라천사들의 언어 긍정적인 측면의 황홀경의 발화 인정했을 것으로 보았으며 14 2~3절과 관련 헬라어 원어 성경의 정관사와 구두점(세미콜론) 넣어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시도를 하였고 무엇보다도 14 21절에서 바울이 구약성서의 구절을 예로 방언 상대방이 외국어로 말할 듣는 사람들이 자기 나라말로 내용을 알아 듣는 방언인헤테로글로솔랄리아” (heteroglossolalia) 해석할 있음을 밝힘으로써 고린도전서 21-25 39절까지 문맥에 맞는 해석을 있었다.

이렇게 고린도전서의방언”(γλῶσσα) 대해서 여러 각도로 분석해 보았는데  부분에 대해 결론이 났다기 보다는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토대를 구축한 것일 이며 이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연구를 것이다. 특히 바울이 현대교회의 방언 현상과 유사한 “an unknown tongue” 긍정적인 측면의황홀경의 발화 부정적인 측면의 반복되는 모를 소리 나누고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만큼 소고를 바탕으로현대교회의 방언현상 어떤 것인지, 당시 고린도전서의 “unknown tongue” 같은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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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고린도전서의γλῶσσα연구

. 고린도교회의 당시 시대상황 분석

고린도전서에 나오는방언”(γλῶσσα)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적인 고린도의 문화적 특징과 사회, 정치, 경제적 특성을 이해해야 하며 후에 원어인 헬라어 사본을 비롯해서 각종 역본을 성실하게 대조해 보고 해당 구절을 분석해야 하고, 해당 구절의 번역에 문제가 있는 부분은 철저하게 비평하여 교정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바울이 이것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한 사실파악이다.

A.  로마의 도시 고린도와 그 문화적 특징

그리스의 고린도는 지정학적으로 그리스 반도의 남북과 동서의 상업과 무역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여행객으로 붐볐으며 국제적인 무역 중심지였고, 사업과 경제적 번영에 민감한 도시였다. 이처럼 성공에 몰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십자가 아래 자기를 낮추는 삶을 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 고린도는 그렇게 만만한 전도지가 없었을 것이다. 고린도전후서를 합치면 바울 서신 중에서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장문의 책이다. 특히 고린도전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논문의 주제인 방언” (γλῶσσα) 해석이 까다로운 만큼 바울의 서신 저작 목적을 바르게 분석하기 위해 이러한 고린도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1]

한편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인이 되기 이전에 자신들이 속해 있던 문화의 여러 특징들을 교회 안으로 그대로 갖고 들어왔다. 이는 여러가지 문화가 혼재해 있는 상황에서 있을 법한 일이며 동서남북으로 엄청난 유동인구가 있던 당시의 고린도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복잡다단한 문화의 교회 유입은 막심하였을 것이며 고린도 전후서 나타난 많은 문제들을 이해할 있게 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논문의 주제인방언”(γλῶσσα) 관련하여 고린도교회를  둘러 상황을 유추해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의 여러 부분에서 바울은 교인들이 외국어를 하는 은사에 대하여 감사한다. 다국어에 능통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특별히 외국어를 하는 것에 대하여 향후 그들을 통하여 로마제국내의 여러   지방에 퍼져 나가 역동적으로 전도활동을 있게 것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의 헬라적 배경에 따라 지식과 더불어 방언과 예언의 은사들을 특별히 좋아했고, 그들 중에서도 황홀경에서 하는 방언을 성령의 가장 현저한 나타남으로 생각하고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은사들을 겉으로 현저하게 나타나느냐의 관점이 아니라 모두에게 유익을 주느냐(12:7), 또는 교회를 세워 올리는 유용한가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성령은 남을 섬기는 사랑으로 스스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2]

B.    고린도교회 당시의 사회 경제적 분위기

바울이 고린도에 선교를 위해 도착할 즈음에는 고린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바벨론 유수 당시부터 시작해서 신구약 중간기에만 전세계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이 800만명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유수한 헬라의 도시들 , 알렉산드리아, 로마, 고린도 등지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사도행전 18장에도 나타나 있듯이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을 정도였다.[3]

고린도는 지정학적 위치상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섞여 있는 도시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고린도에 온갖 지역의 언어가 혼잡되어 많은 수의 언어가 섞여서 복잡하게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현대에 이러한 예들은 싱가포르나 홍콩에서 영어, 중국어, 광둥어 등을 혼잡하여 사용함으로써 지역 사람들이 때는 무슨 언어인지 없는 경우 등에서 예를 찾아볼 있다. 종교의 영향으로 온갖 우상숭배가 자행되면서 그들의반복되는 모를 소리 분명히 성행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서신에서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고전 8:5)”라고 하면서 당시 고린도사회에 많은 종교가 있었음을 알린다. 그리스·로마 신화나 다른 신화들에는 신들의 족보를 정리해 놓은 표가 수십 페이지에 이를 정도[4]라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그들 방언과 같이 현저히 나타나는 은사들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자신들이 받은 은사들을 서로에게 자랑하며, 교만과 멸시, 시기와 분쟁의 분위기를 만들고 예배 방언과 예언을 경쟁적으로 해대어 일대 혼돈을 빚곤 하였다(고전 12~14).[5]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교회내에서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C.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후서 저술 배경

고린도전서의 저술 배경 목적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중의 하나는 고린도에 보낸 서신의 수가 개며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상황에서 쓰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 들이 폭넓게 제시 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게 최소 4통의 편지를 으로 보인다. 번째 편지는 고린도전서 5 9절에 언급된 지금은 없어진이전 편지이고, 우리가 갖고 있는 고린도전서가 뒤따른다. 번째 편지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고뇌와 애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고후 2:3; 4) 씀으로써 그들로 하여금근심하게 편지(고후; 7:8;12)이고, 번째 편지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고린도후서이다.[6]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점 중에서도 교회내의 무질서한방언” (γλῶσσα) 대해서 상당한 비중을 두고 권면과 충고를 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문맥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만연한 방언” (γλῶσσα) 은사 로서의 외국어 천사의 언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반복되는 모를 소리까지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 (γλῶσσα) 대해서 일관된 주장을 하지 않고 하려거든 통역 검증절차를 거쳐서 질서 있게 행하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린도후서에는 이러한 방언 관한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지만 고뇌 속에서 애통한 심정으로 번째 편지에 해답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냈던 4개의 서신과 관련, 시기와 장소, 기록 목적 등에 대한 분석은 고린도전서의 방언” (γλῶσσα) 대한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도표로 정리한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에서 방언” (γλῶσσα) 대한 바울의 태도가 상당히 모호해서 뜻을 헤아리기가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 도표로 바울의 고린도 사역과 편지[7] >

바울의 사건

내용

관련 성구

비고

첫번째 고린도 방문

고린도 사역, 교회 설립

사도행전 18

 

고린도 교회 소식을 들음

글로에의 사람들이 바울에게 소식을 전해주었음

고전 1:11

 

첫번째 편지

소실 : “음행한 자들과 사귀지 말라

고전 5:9

 

고린도 일군들 접견

바울이 아볼로, 스데바나, 브르가도, 아가이고등과 접견하고 고린도교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

고전 16:12, 17

 

두번째 편지

(고린도전서)

고린도교회 안의 문제들에 대한 책망 훈계, “방언”(γλῶσσα) 설명

고린도전서 12-14

 

디모데로부터  상황보고 받음

비난, 중상, 조롱, 바울의 사도직 의심

거짓 사도고린도 교회 혼란

고전 4:17

 

두번째 고린도 방문하여 신도들과 대면

바울이 신도들로부터 상처를 받음

번째 대면의 흔적은 고린도후서 에서 찾을 있음

고후 12:14, 20-21; 13:1-2

 

세번째 편지

소실 : 통렬한 편지, 교인들로 하여금 근심하게

고후 7:6-10

 

디도를 고린도에 보냄(2)

결국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 -à 안도함

고후 2:12, 13

 

네번째 편지

고린도후서 : 위로와 권면, 자기 방어

방언”(γλῶσσα) 대한 단서 표현

고전 14:33;

고후 12:20

 

세번째 고린도 방문

에베소 사역 마무리후 고린도로 가서 3개월 체류, 고린도교회의 영적인 혼란을 온전히 수습. 로마서 기록

20:2, 3

 

 

바울은 번째 방문에 앞서 고린도후서를 썼는데, 과정에서 고린도전서의 방언” (γλῶσσα) 관한 단서가 고린도후서 12 20절에 있다. For I am afraid that when I come I may not find you as I want you to be, and you may not find me as you want me to be. I fear that there may be discord, jealousy, fits of rage, selfish ambition, slander, gossip, arrogance and disorder.” (2 Corinthians 12:20, NIV) NIV “disorder” 라고 표현하였고, KJV “tumults”라고 번역한 헬라어 “ἀκαταστασία” 무질서, 혼란인데 같은 표현이 방언 예언 질서 있게 하라고 했던 14:33 나타난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방언” (γλῶσσα)이라는 표현 대신 “ἀκαταστασία”라는 표현을 했으며 결과적 으로 고린도후서가 칭찬과 권면, 자기 방어의 내용이라고 보았을 고린도후서를 보내기 디도를 번째 파견하여 다른 모든 문제들과 함께 방언” (γλῶσσα) 문제도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바울은 교인들이 고린도교회내에서 방언” (γλῶσσα) 무질서하게 하는 것을 대단히 불쾌히 여기고 경계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3 전도 여행중인 고린도후서를 보낸 뒤인 고린도교회 번째 방문시 3개월간 체류하면서 고린도교회의 모든 영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기록한 로마서” 12장에서 은사를 나열하면서 예언 언급( 12:6)하고 있으나 방언” (γλῶσσα) 빼버린 것에서 유추할 있다.  

. 신약성경내 방언(γλῶσσα)’의 용례

 방언 외국어 뜻이든지 반복되는 없는 소리라는 뜻이든지 단어는 신약 성경에γλῶσσα”διάλεκτος” 표현되어 있다. ’, ‘언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뉘앙스에 차이가 있다. ‘방언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에 31구절인데 2구절( 2:6절과 2 8)에는 “διάλεκτος” 나머지 29 구절에는 γλῶσσα” 쓰고 있다. 두개의 단어는언어라는 같은 뜻을 가진 이음동의어로 알고 있으나 용법은 차이가 있다. γλῶσσα 듣는 사람이 모르는 언어로, διάλεκτος 듣는 사람이 아는 언어라는 의미로 쓰였다. 사도행전 2 6, 11절에서의 διάλεκτος 자기 지방 말로라고 번역된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쓰이기 때문에 신약성경 용례 6 전부 복수로는 쓰이지 않고 단수로 쓰였다.

A.  마가복음의 용례

마가복음 16 17절은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그들은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방언(γλώσσαις λαλήσουσιν καιναῖς) 으로 말하며라고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의방언 복수로 사용되었으며 사도행전에서의 용례와 같이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 16:9-20) 오래된 라틴어역이나 아랍어 공관복음서 등에 포함되어 있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구절이 여러가지 이유로 후대에 누군가가 원문에 첨가한 것으로 보고 있어[8] 부분을 성경적 방언 논증하려는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구절로 생각한다. 내용을 예로 들어 방언 근거로 설명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따라서 논문에서는외국어 방언으로서 구분하고 이에 대해서 별도로 분석하지 않는다.

 

B.    사도행전의 용례

사도행전에서방언(γλῶσσα)” 사용은 번인데 때의 사용은 성령을 주시는 사건과 연결되어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이라는데 학자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한다. , 오순절 성령 주심(2), 고넬료와 친구들에게 성령주심 (10), 에베소의 열두명에게 성령 주심(19) 사건으로 나타난다.

사도행전에서는 전부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토머스 R. 슈라이너는사도행전 2장의 은사는 사람의 언어였던 같다. 사도들이 말하는 것을 여러 지역에서 사람 들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행전의 다른 어디에도 방언 말하는 것의 성격이 다르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는 번째 방언 사건으로부터 변화가 일어 났다는 표지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다.[9]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부분은 의사였으며 바울과 같이 오랜 기간 동행한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시기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시기가 8 정도 앞서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을 당시 누가는 이미 고린도교회에 있는방언”(an unknown tongue)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바울과도 이에 대한 논의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an unknown tongue”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만 기록하고 있다. 만일 누가가 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을 했다면 신학적으로 방언 연구에 있어 획기적인 결론이 났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사도행전의 γλῶσσα” 4 용례는 전부 복수로 쓰이고 있으며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이다. 따라서 단수로 쓰인 고전 14장의 γλῶσσα 분명히은사로서의 외국어와는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10]

C.    요한계시록의 용례.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방언 연구 서적이나 논문은 요한계시록 용례까지는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논문은 전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모든방언” (γλῶσσα) 단수, 복수 용례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요한 계시록 용례까지 포함한다.

방언”(γλῶσσα) 단수와 복수의 쓰임과 관련하여 요한 계시록에서는 여덟 곳에(5:9; 7:9; 10:11; 11:9; 13:7; 14:6; 16:10; 17:15) 나오는데 이중 뜻으로 쓰인 16:10 제외하면 나머지는 백성() 같이 쓰여 언어()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이중 5 9절과 14 6절에는 γλῶσσα 단수로 쓰이고 있지만 이것은 앞에 “πᾶς” “every” 뜻으로 쓰여서 복수로 사용할 없기 때문에 단수로 쓰인 것이다. 사실상 복수명사인 것이다. 다수의 영어 역본(KJV, NIV, ESV, NIT) every tongue (language) 라고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를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에 있어서 γλῶσσα 복수로 쓰인 경우는은사로서의 외국어(언어들)”천사의 언어 쓰였고 단수로 쓰인 경우만 없는 모를 소리 쓰인 것을 있다. 

D.    고린도전서의 용례

고린도전서에서 γλῶσσα” 14장을 제외하고는 전부 복수로 6 (12 4; 13 2) 쓰였고 14장에서는 16회가 사용되었는데 복수로 쓰인 것이 5(x2), 6, 18, 21, 22, 3, 39절에서 8, 단수로 쓰인 것이 2, 4, 9, 13, 14, 19, 26, 27절에서 8 쓰였다. 특이한 점은 9절에서는 단수로 쓰였으면서 정관사가 붙어서 방언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점이다. 원어성경에도 정관사가 있으며 단수로 사용(τῆς γλώσσης )되고 있는데, 영어 역본으로는 “the tongues”(KJV), “your tongue”(NIV, ESV)이라고 쓰여 있어서 만일라면 정관사가 붙을 없으므로방언”(an unknown tongue)으로 보아야 한다. 한글역본에는”(개역개정, 우리말성경)방언”(새번역, 공동번역)으로 갈린다.

한편 KJV 14장에서 단수로 쓰인 8구절중 26절을 제외한 7구절(2, 4, 9, 13, 14, 19, 27) “an unknown tongue”이라고 하고 있는데 반해 26절은 “a tongue”이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단수로 쓰인 다른 구절들하고는 다른 표현인데, 26절이 찬송(a psalm), 교의(a doctrine), 방언(a tongue), 계시(a revelation), 통역(an interpretation) 나열하고 있는 구절이라 수사적인 이유로 다른 단어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전서에는 방언이γλῶσσα라는 단어로만 표기되어 있다. 또한방언(γλῶσσα) 동사와 연결되어 사용하는 경우에는방언으로 말하다라고 쓰였고방언 으로 기도한다라고 쓰인 경우는 고전 14:14 구절 뿐이다. 그런데 14 14절에서도방언으로 기도한다면이라고 하여 가정법을 썼기 때문에방언 기도 있었다는 증거로 삼기는 곤란하다. 이런 이유로 실제로는 방언과 관련한 동사구는방언으로 말하다만이 확실한 용법으로 봐야 한다.[11]

여기서, 고린도전서 14 14절의 가정법 구문은 방언 기도 관련하여 결정적인 단서를 가지고 있다. 김동찬은 고린도전서 14 14절은 주절에 조동사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법이 아니라 단순한 조건절이라고 주장한다. 14 14절이 가정법이 되기 위해서는 15 같이 미래형 동사 προσεύξομαι 쓰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2] 영어 문법으로 보면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헬라어의 가정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오는 오역으로 보인다. 헬라어에서 가정법은 영어에서 보다 넓은 용법으로 쓰인다. 가정법으로 쓰인 동사는 시간 의미는 없고 오직 시상 의미만 갖는다. 그러므로 14 14절에서 가정법 접속사 “ἐὰν” 장음화된동사 “προσευχωμαι”만으로 헬라어 현재 가정법 구문의 조건은 충족된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해석자에 달려 있다. , 화자가 조건절을 실제로 벌어진 일로 보느냐 아니면 단순히 일어날 가능성만을 전제하고 있느냐는 문맥을 통해서 판단할 밖에 없다.[13]  

한가지는 고전 14 21절과 22절에서 이사야서 28 11, 12절을 인용하는 부분에서 구약성서 이사야서 28 11절의 tongue 전후 문맥으로 보아 외국어임이 분명하지만 단수로 히브리어 라숀”(לָשׁוֹן)이라고 쓰고 있으며 70인역 (LXX) γλώσσης ἑτέρας(another tongue)라고 하여 단수로 쓰고 있는데 반해 고린도전서 14 21절에서는 복수로 사용(ἑτερογλώσσοις, other tongues)하고 있다. LXX에서 단수로 사용한 것은 영어로 설명하면 another 뒤에는 반드시 단수명사가 와야 하는 문법의 규칙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굳이 표현을 바꾸어 복수로 사용(ἑτερογλώσσοις, other tongues)하면서 까지 단수로서의γλῶσσα와의 명확한 구별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앞서 Chapter 1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언급했듯이 스탠리(Stanley Mr. Brugess) 분류한 방언의 종류 중에서 상대방이 외국어로 말할 듣는 사람들이 자기 나라말로 내용을 알아듣는 방언을헤테로글로솔랄리아” (heteroglossolalia)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이사야서 28 12절을 인용하면서방언”(γλώσσαις) 재번역한 단어인 “ἑτερογλώσσοις” 보면 복수명사로서헤테로글로솔랄리아” (heteroglossolalia) 번역이 가능하다. 만일 이러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면 신약성경 난해구절 중에 대표구절이라 있는 고린도전서 21-25절까지를 기존의 해석과는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 , “구약에 기록된 것처럼 선지자의 말을 조롱하고 듣지 않는 북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을 보내어방언’ (hetero glossolalia)으로 증명해주어도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21), 이렇게 인용된 구약 구절에서 있는 것처럼 “‘방언 불신자 들에게 일회성 표적(σημεῖον) 나타낼 사용한다.” (22) 그렇기 때문에교회에서 방언으로 떠들고 있으면 불신자들이나 초신자들이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23)라고 해석할 있다. 반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은 믿는 자들의 신심을 더욱 굳게 하는 것인데 교회내에서 다들 예언을 말하고 있으면 불신자들이나 초신자들도 내용에 감동하여 회개하고 경배하게 (24-25) 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21-25절에서의 바울은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외국어 방언 쓰임새로 비추어 보아 교회 내에서 집단으로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로서의 외국어인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라 (39)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의방언(γλῶσσα)”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에 대해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12장과 13장에서의 용례를 우선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 우선은사장이라고 불리우는 12장에서는 성령께서 공동 이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로서 9가지(지혜, 지식, 믿음, 고침, 기적, 예언, 분별, 방언, 방언 통역) 들고 있다. 이것들은 전부 신령한 은사로서 지체에게 나누어 주시는데(12:11) 교인들이 전부알고 지내야 하며’(12:1), ‘ 은사를 열심히 구할 권고 (12:31)하고 있는 것이다. 12 방언(γλῶσσα)” 4회의 용례들, 12: 10(x2), 28, 30 복수로 쓰이면서 사도행전에서와 같은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으로 유추해 고린도전서에서 복수로 쓰인 외국어 방언은 단지외국어를 잘하는 능력이라기 보다는 성령의 은사로서 대부분전혀 습득하지 않은 외국어 하는 능력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14 18절에서 바울이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많은 방언들을 말하는 (μᾶλλον γλώσσαις λαλῶ)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는 것을 감안해 보았을 , 바울의 현란한 외국어 능력은 그의 탁월한 지식 수준으로 보아 상당부분은 학습을 통해 습득하였겠지만 일부 외국어들은 은사로서 받았으며 그의 광범위한 선교활동에 쓰였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논한 12장과방언장이라고 있는 14장의 사이에 사랑을 설파한 13장을 배치하고 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외관적으로 현란하게 보이는 방언 같은 은사들에 심취하고 열광한 것으로 보이는 아마도 예배 흔히  있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려는 유치한 우월감이었 으며 사랑 없음의 하나의 징표였다.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로 강한 자들과 약한 들의 다툼에도 그것이 근본 문제라고 보아 8장과 10 사이 9장에 자신의 자기 희생적 사랑과 섬김의 모범을 그려준 바울은 여기 은사들의 적절한 사용 문제를 다룸에 있어 서도 가운데인 13장에 사랑을 예찬하는 시를 끼워 넣어 모든 은사들은 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을 섬기고 공동체를 세워 올리기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14]

바울은사람의 모든 언어와 천사의 말을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할 꽹과리가 ”(13:1)이라고 하면서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데 고린도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천사들이 하는 언어라고 생각하면서 은사를 특별히 중시하고 자랑하였으며 예배 때마다 무절제하게 행사하여 혼돈을 일으켰던 것이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헬라의 신비 종교들에서 광란의 의식 쓰이는 도구들이었다. 바울이 여기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과거 헬라 신비 종교에서의 그들의 체험을 다시 상기시켜서, 사랑이 없이 방언들만 해대는 것은 그들의 과거 이방 종교의 예배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하기 위함이다.[15] 여기서내가 사람들과 천사들의 언어들을 말할지라도” (Ἐὰν ταῖς γλώσσαις τῶν ἀνθρώπων λαλῶ καὶ τῶν ἀγγέλων’) 에서사람들천사들언어들 같이 걸리기 때문에천사들의 언어들 된다. 이것을 현대교회의 방언의 근거로 수도 있고일종의 과장법 표현으로 수도 있다. 그러나 때의방언”(γλῶσσα) 복수로 쓰인 점으로 보아 바울은 자신도 하고 있는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에는천사의 언어(혹은 자신도 전혀 모르는 외국어)” 같이 외국어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만 뭔가황홀경이 느껴지는 언어들(종교적인 ecstasy)” 있다고 생각 했었던 것으로 있다. 김동찬은방언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하다면 누구나 방언을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자칫 성도에게 상처를 수도 있다.”[16] 한다.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고 성령 충만한 사역자들 중에도 자신은 방언을 하지 못하지만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임을 인정 하는 경우가 많다. 경우 역시은사로서의 외국어천사의 언어로서의 황홀경을 말하는 것이지 부정적 측면으로서의 “repeated unknown sound” 아닐 것이다.

이러한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온전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으로  온전한 것이 사라질 ”(13: 8, 10) 이다. 여기서온전한 예수 재림이라는 설도 있고 신약성경이 정경으로서 완성된 A.D. 90년경이라는 설도 있다. “정경완성시설 취할 경우 현대에는 이런 방언이 완전히 사라졌어야 것이고예수재림시설 취할 경우 현대에도 아직 부분적으로 방언현상이 남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증거를 고려할 현대교회에도 아직 방언현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논문에서는예수 재림시설 취한다.[17]      

. 고린도전서 14장의 해석

지금까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γλῶσσα) 대한 해석을 위해 바울 당시 고린도의 시대상황을 분석하였으며 14장을 제외한 여타 신약성경에 나오는 용례를 살펴봄으로써방언”(γλῶσσα) 복수로 쓰였을 때는 거의 예외없이은사로서의 외국어들 의미하는 것을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이러한 토대 위에 고린도전서 14장의방언”(γλῶσσα) 해석을 통해 현대교회의 방언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분석하는데 먼저 논란이 적은 복수로 쓰인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먼저 해석하고 수많은 논란에 휩싸여 있는 단수로 쓰인 모를 없는 소리로서의 방언을 분석한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방언”(γλῶσσα)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모를 없는 소리로서의 방언의 가지를 번갈아 가면서 예언과 대비하여 설명함으로써 후대인들이 부분을 해석하는데 많은 혼란을 겪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말로 번역할 복수인 경우나 단수인 경우나 단수로 번역이 되기 때문에 특별히 혼동을 겪고 있는 것이며방언”(γλῶσσα) 사용한 바울이나 누가, 마가와 요한은 단수와 복수를 분명히 구분하여 성경을 기록하였다. 이것을 해석해내는 것은 우리의 몫인 것이다. 바울은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이든 모를 없는 소리로서의 방언이든 예언하는 것만 못하며 통역이 없이는 교회내에서 하지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을 금하지는 말라(39) 하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도 쓰임새에 따라 불신자들에게 하나의 표적이 되어 그들이 회심하는데 쓰일 있기 때문이다(22).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모든 교인들이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말할    있기를 바라지만 외국어 방언은 누가 통역하여 교회에 덕을 끼치지 않는 방언 보다는 예언이 우월하다고 강조한다(14:5). 여기서 예언(預言)미신으로서 앞날을 맞춘다 뜻이 아니라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대언(代言) 의미이다. 또한 예언을 의미하는 “προφητεία”(prophesing)예언된 의미하기도 하므로하나님 말씀으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그러면서 바울 자신이방언”(γλῶσσα)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을 전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6) 반문한다.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는 것이다.

한편 단수명사로서의방언”(γλῶσσα) 해석과 관련 논란의 중심에 있는 14 2(개역개정) 분석해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ὁ γὰρ λαλῶν γλώσσῃ οὐκ ἀνθρώποις λαλεῖ ἀλλὰ θεῷ· οὐδεὶς γὰρ ἀκούει, πνεύματι δὲ λαλεῖ μυστήρια·, NA28) 여기서 θεῷ· 보면 세미콜론(;) 붙어 있는 것을 있다.[18] 세미콜론의 역할은 앞의 문장을 보조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감안하여 다시 번역해보면 방언(an unknown tongue)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19] 한다; [20]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는데(δὲ) 이를 알아 듣는 자가 없다. 번역할 있다. 거기에다 2절은 마지막 글자 μυστήρια· 세미콜론 (;) 붙어 있어 아직 문장이 끝나지 않고 있다. 헬라어에는 영어의 콜론(:) 없고 세미콜론(;) 있기 때문에 세미콜론(;) 콜론(:) 세미콜론(;) 가지 역할을 있다고 봐야 한다. 문장의 마침표는 3 마지막에 있다. “ὁ δὲ προφητεύων ἀνθρώποις λαλεῖ οἰκοδομὴν καὶ παράκλησιν καὶ παραμυθίαν.”(NA 28) 따라서 2,3절을 합쳐서 번역을 하면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 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한다;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는데(δὲ) 이를 알아 듣는 자가 아무도 없다: 반면에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교화하고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다 된다. 2절과 3절은 대구(對句) 되어 상호 대비되는 표현을 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하는 : 사람에게 하는 ”,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지만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한다: 교화하고 권면하며 위로한다 된다. 

다음에 나오는 4절은 단수로서의방언”(an unknown tongue) 바울이 과연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구절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14:4, NKRV) 원문을 보면ὁ λαλῶν γλώσσῃ ἑαυτὸν οἰκοδομεῖ· ὁ δὲ προφητεύων ἐκκλησίαν οἰκοδομεῖ.” (NA28) 되어 있는데 한글 개역개정이자기의 덕을 세운다 번역하고, 영어 역본(KJV, NIV) “edify himself”(자기 자신을 교화시키다) 번역하고 있는 원어ἑαυτὸν οἰκοδομεῖ에서οἰκοδομέω”짓다, 세우다, 강하게 하다 뜻으로자기 자신교회 가지에 걸리는 단어이므로방언”(an unknown tongue) 자신에게 유익 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단지 4절의 전체적인 맥락은방언 자신 에게만 유익하지만예언 교회 전체에 대해서 유익하다고 하여예언 방언보다 우월함을 언급하는 것으로 단수로서의 방언이 유익하지 않다고 것은 아니라고 해석해야 한다. 14 전체가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맥락 임에 불구하고 14 4절에서 긍정적 측면에서의 “an unknown tongue” 개인적으로 유익이 된다고 것이다.

다음으로, 5절과 6절은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에 대해서 언급한다. 바울은 모든 교인들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받기를 원하지만 예언만은 못하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보다 예언이 더 교회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7절에서 11절까지에서 단수로서의 “an unknown tongue” 대해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거든 다른 사람이 알아 듣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부정적으로 비판한다. 부분은 바울이 14 4절에서 단수로서의 “an unknown tongue”개인에게 유익하다 것과 명백히 다른 논조이다. 이것은 단수로서의 “an unknown tongue” 대해 바울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단수로서의 “an unknown tongue” 긍정적인 의미에서의황홀경의 발화 함께 부정적인 의미에서의반복되는 모를 소리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9절은 단수 “tongue” 정관사를 사용하여 방언” (τῆς γλώσσης) 이라 표현하고 이것은 2절과 4절에서 언급한 단수로서의 방언 (an unknown tongue) 지칭하는 것이 문법구조상 명확히 드러난다.

바울은 이어서 그러므로 모를 소리는 가급적 하지 말되 만일 하려거든 통역도 같이 있는 은사를 더욱 넘치게 받기를 기도하라고 권고 (12,13)하고 있다. 그러면서 만일 자신이 방언(an unknown tongue)으로 기도한다면 (spirit) 기도하지만, 스스로도 이해(understanding) 하지 못할 것이므로(14), (자신 같으면) 방언으로 기도하고 이해할 있는 말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찬미하고 이해할 있는 말로 찬미해야 같다 (15) 말하면서 그렇지 않고 영으로만 감사를 드리면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아멘하고 말할 있겠느냐(16) 반문하고 있다.[21]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바울이 자신이 “an unknown tongue”으로 기도나 찬미를 했다는 것인지 안했다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울이만일 내가 방언으로 기도한다면이라고 하여 가정법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방언 기도를 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한 파악이 아니라 바울이 그것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대해 다음 구절그러면 어떻게 할꼬?”(NKRV, 14:15a) 바울의방언기도 대한 태도를 엿볼 있다. 그런데,  KJV NIV 이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갖는다.  KJV 부정적으로그럼 이게 뭐지?”라고 하고 있고,  NIV 중립적 혹은 긍정적으로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뉘앙스로 표현을 한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문맥을 파악해서 해석할 밖에 없는데 고린도전서의 저작 목적이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부분을 시정하는 것이고, “방언”(γλῶσσα)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권면과 충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잘했다는 것보다는 잘못하고 있다고 질책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당시에는 아직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방언 때는 반드시 통역이 있는 경우만 하라(고전 14:27) 하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교회내에 만연해 있는방언 무질서하게 이루어 지고 있어 바울이 이를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14장의 전체적 문맥으로 보아 교회내에서 하는방언 기도 대해서는 부정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으며, “예언 대해서는 긍정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있다.

여기서 가지 검토되어야 것이 있다.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고린도교회에서 어떤 교인들이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이나 천사의 언어 같은 황홀감을 주는 방언이 아닌 모를 없는 소리 한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모를 없는 소리 정확히 뭔지를 아직 모르니 반드시 통역할 있는 경우만 제한적으로 하라고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만(18), 단수로서의 모를 없는 소리 경우에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있을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로 마디 말을 바에야 차라리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를 ”(19)이라고 하면서 “an unknown tongue”으로 말을 하려거든 통역을 대동하여 차례대로 하고 통역이 없으면 절대 교회에서는 하지 말라 (27, 28)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1] 앤서니 C. 티슬턴, 「고린도전서」, 권연경 역 (서울 : SFC출판부, 2019), 24-27.

[2]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8), 336–337.

[3] John Bright,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역 (파주: Christian Publishing Distributor, 2016), 573-577.

[4] 한원김, 성경 원어, 어만: 하나님의 이름” 매거진 Re (여수: 그라티아, 2017), 83.

[5]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 21–24.

[6] 크루즈 콜린, 고린도후서」 왕인성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39–40.

[7] 노우호, 「고린도전후서 주해」, 273-341.

[8] 김동찬, 「방언 바로 알기」, 150-152.

[9] 토머스 R. 슈라이너, 「신약신학」, 임범진 역 (서울 : 부흥과 개혁사, 2017), 678-9.

[10] Charles R. Smith, Tongues in Biblical Persprctive (Winona Lake, Indiana : BMH Books, 1976), 39.

[11] 노우호, 「방언을 검증하자」, 173.

[12] 김동찬,「누가 방언을 금하는가」 , 210-223.

[13] William D. Mounce, 헬라어 문법, 조명훈 역 (서울: 복 있는 사람, 2017), 458-469.

[14] 김세윤, 326–327.

[15] 김세윤, 329.

[16] 김동찬, 「방언 바로 알기」, 248.

[17] 김동찬, 「방언 바로 알기」, 161-162

[18] 김동찬, 「누가 방언을 금하는가」, 201.

[19] 여기에 NA28 θε에 정관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특이하다. 하나님이 아니라 신(god)임을  암시할 수도 있다. (18절과 같이 확실히하나님인 경우는 τ θε로 표기) 그러나 27, 28절에서 단수로서의 방언”(γλσσα)을 언급하면서 τ θε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14 2절의 용례가 하나님(God)이 아닌 신(god)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20] πνεύματι γίῳ(성령)가 아닌 πνεύματι()으로 쓰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마가복음   110절과 같이 성령임이 분명한 구절에도 πνεύμα로만 쓰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성령인지 단순한 영인지 구분할 수는 없다.

[21] 노우호, 「방언을 검증하자」,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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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방언(γλῶσσα)’에 대한 학문적 선행 연구

 

동안γλῶσσα 해석을 놓고 학자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여왔다. 논쟁의 핵심은 현대교회의 방언이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과 같은 것이냐에 관한 것일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의 방언”(γλῶσσα)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전제한 데서 비롯된 논란이다. 신약성경 전체를 놓고γλῶσσα 단수와 복수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 면서 동시에 쓰인 경우는 고린도전서 14 밖에는 없다. 심지어 같은 고린도전서 12, 13 용례도 복수명사로만 사용된다. 따라서 Chapter 2에서 학문적 선행연구를 살펴본 Chapter 3에서 신약성경 전체와 고린도 전서, 특히 14장에서의 용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현대교회의 방언 고린도교회의 방언”(γλῶσσα) 어떠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검증해 보기로 한다. 

초대교회 시대의 방언은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이었는가, 아니면 모를 없는 소리였는가? 혹은 다로 했는가? 현대교회의 방언현상은 외국어인가, 무아경 속의 황홀한 소리인가, “반복되는 모를 소리인가? 이러한 판단이 방언 논란의 핵심이다. 방언의 언어나 성격에 대한 연구는 현상 자체에 대한 이해와 현대 방언운동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 필요하다.

.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로 보는 설

설은 고린도전서 14:2;14절과 같이 명백히 외국어가 아닌 방언”(γλῶσσα) 예로 들어 고린도전서의 방언이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아니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황홀경의 발화(천사의 언어)” 또는 부정적인 의미의반복되는 모를 소리 보는 설이다. 특히 “14 2절은 기도 중에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말하는 것을 뜻한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이 알아들을 없는 말로 기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1] 고린도전서 전체의 방언”(γλῶσσα)황홀경의 발화”(반복되는 모를 소리 포함)라는 것이다. 주장은 고린도전서의 방언(γλῶσσα) 의미를 전부 가지 뜻으로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해석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 최초로 방언 연구로 미국 오랄 로버츠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동찬  목사는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쓰인방언”(γλῶσσα) 전부이해할 없는 발성” (unintelligible utterance)으로 보고 이것에 대해은사로서의 외국어 없다고 한다. 그는고린도전서의 방언(복수형)외국어들이라고 번역할 경우 성경적 사례나 교회사적인 사례에 적용해 넌센스가 발생하게 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서 방언은 이해할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설명하고 있다.” 주장하고 있다.[2] 그러나 고린도 전서의방언”(γλῶσσα) 전부 이해할 없는 발성(unitelligible utterance) 으로 해석하면 문맥적으로 해석할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서 고린도 전서 13 1절에서 말한내가 사람의 모든 방언과 같이 외국어 임이 분명한 구절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으며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어떤 때는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어떤 때는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부분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샌더스(J. Oswald Sanders) 역시 고린도교회의 방언”(γλῶσσα) 부정적인 의미 에서 모를 없는 소리 보고 있다. 그는 이에 더하여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방언과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을 일일이 대조하여 가지의 방언이 전혀 다른 현상임을 증명하려 했다. “오순절의 방언은 사람을 향해 말했다( 2:6).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하나님만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고전 14: 2;9).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표징이었다(고전 14:22). 오순절의 방언은 온전한 조화가 있었다 ( 2:1-4).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혼란을 야기시켰다.”[3] 고린도교회의 방언” (γλῶσσα) 교회 내에 극심한 혼란을 일으키는 원흉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대로 따른다면 12장에서의은사로서의 방언 설명할 없을 아니라 14 39절의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라 바울의 표현을 해석할 없다.

이상훈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이 가지가 다르 다고 주장하는데, 번째로 오순절의 방언은 베드로가구약(요엘 2 28) 성취라고 지지하였으나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바울이 그와는 반대의 태도로 제재하고 있으며 번째로는 방언에 대한 통역이번역” (translation) 아니라해석”(interpretation)이라고 것으로 보아 고린도전서 전체의 방언” (γλῶσσα)   ‘an unknown tongue’라고 간주한다.[4] 그러나 바울은 “an unknown tongue 경우만 일부 부정적으로 말했을 , 12 13 1절의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천사 들의 언어 경우는 긍정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주장은 전체가 아닌 단편적인 견해로 봐야 한다. 또한 그가해석” (interprettation) 이라고 표현한 헬라어 “ἑρμηνεία”해석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지만번역”(translation)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무리한 주장이라고 있다. 이상훈 역시 고린도전서의 방언” (γλῶσσα) 오직 가지의 뜻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보았을 뿐이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방언”(γλῶσσα) 대해 학술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학문적 관점에서 다시 방언을 평가하는 흐름이 생겼다. 언어학적 관점에서 방언 연구에서는 방언이 이미 알려져 있는 외국어인 언어인지 언어가 아닌 지에 대해 파악 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연구에 따르면 방언을 언어와 사고를 담당하는 좌뇌보다 감정, 의지, 상상, 공간지각을 담당하는 우뇌가 활성화됨을 밝혀 냈다고 한다. 우측 두뇌를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방언은 언어가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5] 학습할 있는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언은 자연언어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언어라고는 없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언어가 아니라고 없어 유사언어라는 표현도 쓰고천사의 언어”, “천상의 언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유명복은방언은 학습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방언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학습을 통해서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성령의 감동으로 받아야 한다.”[6] 주장한다. 이것을황홀경의 발화 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 1절을 보면방언”(γλῶσσα)천사의 언어라고 해석할 소지가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하고 있다. 부분은 사도 바울이은사로서의 외국어 아니라황홀경의 발화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아주 중요한 표현 으로 봐야 한다. 그는 없는 모를 소리(an unknown tongue)”천사의 언어로서 황홀경의 발화반복되는 모를 소리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증거 구절이다. 가지 분명한 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단수로서의방언”(γλῶσσα)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과 다르다는 점이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분명한은사 로서의 외국어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 특히, 14장에서 단수로 쓰인 방언”(γλῶσσα) 대해서는 살펴야 한다.

이상의 이론들을 검토해본 결과 고린도교회의 방언”(γλῶσσα)은사로서 외국어천사들의 언어 같이 복수로 쓰인 긍정적인 측면과 단수로 쓰여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반복되는 모를 소리 가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KJV 방언”(γλῶσσα) 단수로 쓰인 경우 헬라어 원문에 없는 ‘unknown’ 붙여서 풀이하였다(고전 14:2, 13, 14, 19, 27). 그런데 26절의 경우에는 단수임에도 unknown 붙이지 않은 것은 특이하다. 점은 Chapter 3에서 세밀하게 이유를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 “외국어로 보는 설

설을 취하는 사람들은 신학성경의 방언”(γλῶσσα) 전부은사로서의 외국어 의미하므로 현대교회의 방언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

대부분의 중세교부들은은사로서의 외국어 취한다. 교부 이레네우스 (Irenaeus), 오리겐(Origen), 어거스틴(Augustine) 등이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 주장하는 반면 터툴리안(Tertullian) 경우 외국어 방언과 함께 영적 감동속의 찬양과 비전, 기도들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런 은사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가르침, 교훈에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3 1절에사람과 천사의 언어라는 표현과 14 4절에서 모를 소리 단수로서의 방언”(γλῶσσα)개인에게 유익이 된다 표현한 것에 비추어 사도 바울도 일부 견해(긍정적인 측면) 있어서 터툴리안(Tertullian)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캘빈은  「신약성경 주석」에서바울의 요점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외국어를 의미한다.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 이유는 아무도 뜻을 알아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8] 라고 주장하면서γλώσσῃ”(고전 14:2) 외국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은사로서의γλωσσῶν”(고전 12:10) 복수형태 로서 외국어이다. 단수, 복수에 관계없이 외국어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것이다.

권기현은 고린도교회의 방언과 관련,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 2절의 해석을 못함으로 인해 외국어인방언”(γλῶσσα)알아 들을 없는 신비로운 천상의 언어라는 전혀 가능성 없는 오역을 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고린도 전서 14 2절의 해석인데 그는 방언은비밀로말하는 것이지비밀을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비밀 헬라어로 “μυστήριον” 복수형인데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핵심적 내용으로 하는 복음 또는 이와 정면으로 대조되는 거짓 복음(살후 2:7; 17:5) 자주 동격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라면서 신약성경 전체에서 사용되는 방언 전부은사로서의 외국어라고 주장한다.[9] , 복음과 관련이 있는 어휘라고 보는 것이다.

데이어(Joseph H. Thayer) 방언”(γλῶσσα) 다른 민족들의 언어와 달리 특정한 백성에 의해 사용되는 언어로 보았다. 논리는현대교회의 방언 현상에서 간혹 어느 소수 족속의 언어였음이 판명되는 경우도 있어서 그럴 하다.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그것은무아경에 몰두하여 자신의 이성과 의식을 지배하지 못한 ,

이상한 말들과 함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영적 감정들을 토로하는 사람들의 은사라고 하면서 그것은 귀에 거슬리고 모호하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키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말들[10] 이라고 하였는데 방언”(γλῶσσα) 알려지지 않은 특정 족속의 언어라면서 이를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마키(R. G. Gromacki) 많은 현대의 방언 옹호자들이 사도행전의 방언” (γλῶσσα) 외국어 방언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고린도전서에서는 “an unknown tongue”외국어들”, 가지로 쓰였다고 주장한다고 부정적으로 비판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14장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의 방언”(γλῶσσα) 외국어를 말한다고 주장하면서 킹제임스버전(KJV) 해석 방식에 반대한다. 

KJV 없는” (unknown) 이라는 형용사가 번역자들에 의해 삽입된 것은 아주 못되었다. 영어본문에서 그것은 이태릭체로 나타나는데, 경우 그것은 단어가 본래 헬라어 본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역자 들은 고린도인들의 방언 현상이 없는 무아경적인 말로 이루어졌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의 말을 첨가하였다. 실제로, 절은 집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 말하는 자의 말을 이해하는 자가 아무도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11]

 

그는 KJV 번역을 비판하고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γλῶσσα) 전부 외국어로 봐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14 2절의 방언(γλῶσσα) 역시 교회내 신도들이 모르는 외국어였을 무아경적인 말이나 언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견 일리가 있는 듯이 보일지 몰라도 고린도전서 13 1절의내가 천사들의 언어를 할지 라도 14장에서의 방언” (γλῶσσα) 단수와 복수로 분명히 나뉘어져 쓰인 것에 대해서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바와 같이, 칼빈(J. Calvin) 방언” (γλῶσσα) 외국어 은사라고 보았다. 노우호 목사는 이러한 칼빈의 말을 예로 들면서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방언들을 통역하라고 것을 보면 외국의 언어나 특정지역의 지방 언어를 말할 있는 은사라고 인식을 했던 것이다[12] 라고 하면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는 고린도교회에 부정적인 의미의 모를 이상한 소리 외국어라고 생각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받아들이기 다소 힘든 측면이 있는 같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에서만 1 정도 기간의 사역을 통해 고린도의 사정을 알고 있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개인적이고 세부적인 잘못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γλῶσσα) 단수와 복수로 정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면서 격려와 훈계를 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교회내에서 외국어를 많이 쓴다는 것과 없는 무아지경에서 황홀경의 소리도 하는데 질서가 없이 혼란한 상황이어서 지침을 정해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에서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면서 방언” (γλῶσσα) 대하여 언급하였고 결론적으로 14 26절이하에서 교회내에서 질서 있게 하라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에서 유추해 있다. 질서 관한 이야기는 고린도후서 12 20 교회내 무질서가 있을까 두렵다 구절에 다시 나타난다.   

. 두 가지 의미가 혼재한다고 보는 설

설에 따르면 바울은 외국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an unknown tongue 관련해서는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방언”(γλῶσσα) 모를 소리(an unknown tongue)’외국어(languages) 구분하여 사용하는 대표적인 영어 버전이 킹제임스버전(KJV)이다.  이것은 알려진 바대로텍스투스 리셉투스”(TR1550MR) 근거로 해서 번역한 것인데, TR1550MR 라틴어역(Vulgate)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기준으로 해서 제작된 성경이다. KJV에서 단수로 사용된 고전 14:2, 13, 14, 19, 27에서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an unknown” 붙여서 번역하고 있다. “방언 단수로 쓰였을 때는 모를 소리, 복수로 쓰였을 때는 외국어 (언어들) 번역한 것이다.

에봇 스미스(Abbott Smith) 신약성경에 쓰인 방언(γλῶσσα) 비교적 넓게 사용한 것으로 이해했다. , 언어의 기관(), 사람의 언어(외국어) 함께영적인       무아경에서 말해진 알아들을 없는 소리들 정의함[13]으로써 다른 견해들보다 포괄 적인 입장을 취했다.

노우호는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을 가지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교인이 말하는 아무도 알아 들을 없이 하나님께 혼자 말하는 모를  소리(an unknown tongue) 단수로 사용하고 자신이 말하는 외국어들은 복수로 구분 하여 사용하고 있다.”[14]라고 하였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언”(γλῶσσα) 단수와 복수로 구분하는 것은 소수 의견이며 무리가 있는 해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킹제임스(KJV) 분명히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여 해석하고 있고 여러 문맥으로 보아 상당히 일리 있는 번역인 하다. 왜냐하면 다른 많은 의견들이 고린도교회의 방언” (γλῶσσα) 전부 동일한 개념이라고 가정함으로써 해석의 오류가 생겼기 때문에 이것이은사로서의 외국어”(12 10), “천사의 언어” (13 1), “반복되는 모를 없는 소리” (14 2) 해석을 하여야 비로소 신약성경내 여러 곳에서 등장 하는 방언” (γλῶσσα) 문맥과 맞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 21절에서율법에 기록된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여외국어들이라는 말로 분명히 해석되는 예를 들고 있는 점이다.

여기까지 신약성경내에서의방언”(γλῶσσα) 의미에 대한 선행연구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방언”(γλῶσσα)황홀경의 발화( 모를 소리)” 보는 설과외국어 보는 , “ 가지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는 설로 나누어서 살펴 보았다. 각각의 이론은 나름대로의 논리와 주장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설도 현대교회의 방언” (γλῶσσα)현상의 의미에 대해서 확실한 논거를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Chapter 3에서는 신약성경 전체(일부 구약성경도 포함) 용례를 살펴 보고, 특히 고린도 전서 14장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15]



[1] 목회와 신학 편집팀, 「고린도전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서원), 182-183.

[2] 김동찬, 누가 방언을 금하는가 (서울 : 베다니 출판사, 2016), 194-195.

[3] J.Oswald Sanders, 성령과 그의 은사, 권혁봉 역 (서울 : 요단 출판사, 1990), 193.

[4] 이상훈, 「신약에서 본 방언현상」, 기독교사상 69.6 (대한기독교서회), 71-77.

[5] 김동찬, 「방언 바로 알기」 (서울: 베다니출판사, 2015), 149.

[6] 유명복, 「언어학적 관점에서 본 방언」, 기독교교육정보, 33 (서울 : 한국기독교교육정보  학회, 2012), 235.

[7] 배종열,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타난신령한 것, 개신논집 제18 (2018.09), p.54-82 개신 대학원대학교 출판부.

[8] 존 칼빈, 「신약성경주석 제 8권」 (서울 : 성서교재간행사, 1980), 388

[9] 권기현, 방언은 지상에서 사용되지 않는 천상의 언어인가?, 진리와 학문의 세계 제 23 (경산: 달구벌 기독학술연구회, 2011), 166-175.

[10] Joseph H. Thay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Edinbugh: T.&T. Clark, 1954), p.118

[11] Robert G. Gromacki, 86-87.

[12] 노우호, 방언을 검증하자 (산청: 에스라하우스, 2014), 76.

[13] G. Abbott-Smith, A Manual Greek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Edinbugh : T.&T. Clark, 1954), p.93.

[14] 노우호, 방언을 검증하자, 124.

[15]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 고린도 사회가 국제무역항으로서 많은 외국인들이 출입하면서 온갖 종류의 외국어가 서로 섞인 상태로 하는 말, 일종의 복잡하게 섞인 외국어이지만 “an unknown tongue”처럼 들리는 말도 분명 있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지만 이것을은사로서의 외국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an unknown tongue”에 포함하여 분류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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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문제의 제기 

 

.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A. 연구의 필요성

한국 교회에서방언”(γλῶσσα) 대한 논쟁은 쉽게 과열이 된다. 서로간에 속을 열고 이야기도 하지 않지만 일단 논의가 시작되면 격렬한 논쟁으로 비화 아니라 상대의 말을 경청하거나 수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만 고집한다. 이렇게 과열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성경내방언”(γλῶσσα) 개념이 한가지를 뜻하지 않고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말로는 그저방언이라고만 쓰고 있는 것이 가장 이유이고 번째는 해당 성경구절이 아주 까다로워서 해석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해가 다르게 되고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서로 다른 개념으로 말하게 되어 논의가 뒤엉켜서 나중에는 뭐가 뭔지 수가 없게 된다.[1]

필자는 늦은 나이에 교회를 다니게 되고 성경을 읽으면서 기독교 신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자의반 타의반으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처음 교회를 나가고 세례를 받은 성경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현대교회에서 기도를 많은 사람들이 뜻을 없는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이것을방언이라고 한다는 것과 이에 대해서 교회마다, 신도마다, 목회자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교회의 방언현상 기독교 신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서 우리 기독교적 세계관 자체를 좌지우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문제를 정확히 알고 넘어가야 올바른 신앙의 길로 접어들 있을 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 분석을 위해 논문을 쓰게 되었다.   

기독교는 분명 신비로운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다. 우리는 계시로서만 하나님을 추측할 영적인 세계에 대해 확실하게 답할 있는 사람은 없다. 현대 교회의방언”(γλῶσσα) 무엇인지는 오직 하나님 만이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방언”(γλῶσσα)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감안한다면 이를 성실하게 추적해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20세기에 접어들어 성령과 영적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Pentecostalism) 발흥하여 전세계를 강타하는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다. 미국 개신교는 자유주의계열과 근본주의적 계열로 나누어졌고 새로운 교파들을 형성 하였는데 구자유주의는 신정통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발생을 열어 주었으며, 또한 “Ecumanical”운동(교회연합운동) 촉진하였다. 심지어 보수주의적 개신교조차도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로 나누어져 있다. 최근 미국의 기독교 무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운동은 특히 신유와 방언을 강조하는 은사주의적 부흥 운동, 신오순절운동 (new Pentecostalism)이다. 따라서 방언의 근본적 성격을 알고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검토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2]

이러한 오순절 운동은 가히 20세기 이후의 기독교 역사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자랑하던 한국의 유수한 대형 교회들도 오순절 운동에 힘입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규모로 보았을 초대교회 시절의 폭발적 신도의 증가, 종교개혁으로 인한 인간의식 전환의 쓰나미 같은 물결에 비견할 만한 일이 전세계적으로 특히 한국교회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파도의 근저에현대교회의 방언 자리하고 있다. 이것을 인정 하든 인정하지 않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든 부정적으로 생각하든 모든 신도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현대교회의 방언 연구하고 이를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이유다.

오순절 계열의 성령운동(The Holy Spirit Movement, 이하오순절파’) 주창하는    사람들은 방언현상을성령세례라고 하여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까지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현대교회의 방언현상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며 성경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고 반발하고 있다. 방언 (γλῶσσα)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교파에서 어떤 교리를 갖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신도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 아니면 잘못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구별 짓는 문제가 수도 있기 때문에 우선 성경에서 이것 어떻게 해석 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필요가 생긴다.

문효식은 현대 기독교에서 오순절파의 성령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대단히 강조 하면서 이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중요성을 역설하고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 하였는데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참고할 만하다.

오순절파는 현대교회의방언”(γλῶσσα) 근거를 고린도전서 14장에 두고 있는데 이것이 성경적 근거가 있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20세기 이후 전세계 기독교계를 휩쓸고 있는 오순절운동의 핵심이 바로 현대교회의 방언 현상, 황홀경의 발화이므로 이에 대한 실체를 파악해야 천주교를 포함한 세계 모든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다시피 오순절 운동, 소위 성령 운동이라는 것에 대한 정체를 규명할 있다 것이다.[3]

 

B. 연구의 목적

그동안 국내외에서 현대교회의 방언에 대해서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를 놓고 수많은 의견들이 나왔고 저서들이 출간되었다. 대체로 방언체험이 신앙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방언기도가 기도를 길게, 열정적으로 있게 한다 소극적이던 신앙생활에 긍정적 변화를 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방언을 반대하는 일부 논문과 소수 의견들은 신약성경의 방언은 외국어로서 사람들이 알아 들을 있는 언어이며 현대교회의 방언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극단 중간의 입장에서 현대교회의 방언이 성경적인 근거는 없지만(혹은 성경적 근거가 미약하거나 분간하기 어렵지만) 실제 신도들에게 도움이 되므로 굳이 금할 것까지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현대교회의 방언현상이 성령으로부터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일 것이다. 우리는 현대교회의 방언현상이 긍정적인 현상인지, 부정적인 현상인지 혹은 가지가 혼재하여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단지 이것이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 것이다. 특히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 (γλῶσσα) 대한 해석을 모를 없는 소리 보는 외국어 보는 가지 (, ) 혼재한다고 보는 설의 가지로 구분하여 학자별로 선행연구를 살펴 분석함으로써 현상을 어떻게 바라 것인지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4] 만약에 현대 교회의 방언이 성경적인 진짜 방언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사모하고 구하여야 하며 이미 받은 사람은 더욱 개발 하고 장점을 분석하여 다른 신도들에게도 권장하여야 것이지만 만일 현대 교회의 방언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성령인지 아니면 다른 이상한 영인지를 우선 분별하여야 한다. 또한 성령과 이상한 영이 혼재한 것일 수도 있다. 때문에 요한사도도영을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요일 4:1)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내에서방언”(γλῶσσα) 해석을 해내기는 결코 쉽지 않으며 많은 논란이 있다. 성경은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을 있는 여지를 남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본별, 역본별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외국어인지 일종의 황홀경의 발화(“ 모를 없는 소리포함)인지 구분해 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논문에서는 먼저 고린도교회를 둘러싼 당시 역사문화적,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고 사도바울의 서신 저작 목적 등을 고찰할 것이며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방언(γλῶσσα)’ 용례를 비교, 검토함으로써 고린도전서 14장에방언(γλῶσσα)’ 포함한 핵심 성구를 분석하고 관련된 맥락을 파악해서 바울의 관점에 대해 성경적인 근거에 의해 결론을 내릴 것이다.

. 연구의 방법과 범위

A. ‘방언(γλῶσσα)’에 대한 용어의 정의

방언은 영어로 “tongues”라고 하는데 이것은 “tongue”(언어) 이란 단어의 복수이다.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단수와 복수가 같이 쓰였다.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두개의 그리스어가 합성된 형태인 “glossolalia”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단어는 19세기 무렵 만들어진 방언을 가리키는 합성어로서 “γλῶσσα” (tongue) 라는 단어와 “λαλέω” (to speak)라는 단어가 합하여져 만들어졌다.[5]

라이프 성경단어 사전에는 “‘로서의 방언(γλῶσσα) 지방의 언어들 (13:24; 36:13; 8:23; 7:9), 외국어(2:4–11)라는 의미와 성령의 역사로 무아지경(無我之境) 상태에서 말하는 신비한 언어이며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고전14:2, 21, 22)이다. 따라서 회심한 모든 사람에게 방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6] 라고 하고 있다.

스탠리(Stanley Mr. Brugess) 중세기에 나타난 실례를 연구하여 방언의 종류를 분류해 내었는데본인이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말하는 것에 해당하는제놀랄리아’ (xenolalia), 상대방이 외국어로 말할 듣는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내용을 알아듣는헤테로글로솔랄리아’(heteroglossolalia), 혹은 듣는 소리가 없이 들리어지는아코랄리아’(akolalia)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지 못하는 언어로 발성되어지는 현대교회 방언현상으로 추정되는글로솔랄리아’(glossolalia) 있다[7] 하였다. 그가 주장 하는헤테로글로솔랄리아”(heteroglossolalia) 이론은 난해구절인 고린도전서 14 21절에 대한 해석에 결정적 역할을 것인데 이것은 Chapter 3에서 언급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 가운데 성령만이 방언의 근원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방언에 관한 여러가지 문헌들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방언의 출처가 성령 뿐이 아닌 여러 곳에서도 있는 것을 있다. 성령이 주시는 방언은 물론이요, 악령이 주는 방언도 있을 아니라 심리학적으로는 방언이 인격해리 (人格解離, Dissociation) 인한 다중 인격현상으로 인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8] 따라서 논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후서를 저술할 당시 상황을 추론하여 고린도교회의 방언현상이 성령으로부터 것인지를 확인할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방언”(γλῶσσα)이란 용어가 50 정도 나오는데”, “외국어”, “천사들의 언어”, “종교적 황홀경”( 모를 없는 소리)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대체로 논란이 되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의방언”(γλῶσσα) 어떤 뜻이냐의 해석을 놓고 학자들의 견해가 심하게 엇갈린다. 따라서 논문에서는 신약성경에 나오는방언”(γλῶσσα) 중에서 고린도전서 14장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중점을 것이다.

B. 연구의 방법

논문에서는방언”(γλῶσσα) 성경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동안의 선행 연구 사례를 살펴보고 먼저, 고린도전후서, 특히 고린도전서를 저술한 바울 사도의 본래 의도를 파악할 것이며 번째로는 현대교회의 방언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고린도전서의방언”(γλῶσσα) 의미, 특히 14장에 나타난 정확한 성경적 의미를 심도 깊게 분석할 것이다.

우선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내에 발생한 수많은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 하라는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성실한 사도 바울의 기독교적 철학이 담겨 있는 귀중한 서신이다. 아마 현대교회에서 마주치는 대부분 문제들이 있다고 정도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대처방법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렇게 크지 않은 교회에 이렇게 많은 문제가 동시다발로 발생한 것도 참으로 이해 하기 어려운 점이다. 당시 고린도교회를 둘러싼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바울의 해법을 보면 현대 교회의 문제와 해법을 찾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렇게 많은 문제점들 중에서도 바울은 방언에 대한 문제를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면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만큼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일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사역을 당시에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었지만 고린도 사역을 마치고 떠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을 것이다.[9] 왜냐하면 고린도전서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방언” (γλῶσσα) 대해 언급하였지만, 후세 해석가들에게 혼란을 초래할 만큼 자신의 말에 일관성이 부족한 같아서이다. 그러나 문제에 대해 바울은 뒤따르는 서신들 (고린도후서, 로마서 )에서방언 (γλῶσσα)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점으로 판단했을 , 고린도후서를 전후할 때까지는 완전히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논문에서는 먼저 고린도전서 14장의방언”(γλῶσσα) 해석과 관련하여  γλῶσσα 황홀경의 발화”(‘무아경의 없는 소리포함) 보는 설과 로마제국내의 지역언어로서외국어 보는 , 황홀경의 발화외국어로서의 의미가 혼재한 것으로 보는 설에 대한 학문적 선행연구를 진행할 것이며 다음 으로 고린도전서의 용례를 분석하기 위해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방언현상 으로서의γλῶσσα’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살펴보고 추가로 요한계시록의 용례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고린도전서의방언”(γλῶσσα) 의미를 판단하는데 여기에는 구약성경 이사야서 28 10절의라숀”(לָשׁוֹן)  분석도 포함한다.

최종적으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쓰여진방언”(γλῶσσα) 단수와 복수로 구분 하여 복수로지방 방언(외국어)”이라는 의미와 단수로서황홀경의 발화” ( 모를   없는 소리) 의미를 확실히 구분할 것인데 특히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우리말로방언이라고만 표현하여 가지 의미가 번갈아 가면서 쓰임으로 해석에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을 명확히 논증하여 해결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영문판 킹제임스 버전(KJV) 외국어를 의미할 ‘tongues’라고 하고 있고 모를 소리는 ‘an unknown tongue’ 으로 정확히 번역하고 있으며 헬라어 원어 성경에도 “γλῶσσα” 단수와 복수로 분명 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고찰을 위주로 살펴볼 것이다.

C. 연구의 범위

γλῶσσα대한 정확한 해석을 위하여 고린도전서 14장에서 필요한 부분의 원문을 분석할 것인데 특히 한글 개역개정판이 오역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14 2ὁ γὰρ λαλῶν γλώσσῃ οὐκ ἀνθρώποις λαλεῖ ἀλλὰ θεῷ· οὐδεὶς γὰρ ἀκούει, πνεύματι δὲ λαλεῖ μυστήρια·”(NA28) 해석에 있어서θεῷπνεύματι”, “δὲ 번역을 자세하게 진행 것이고 이와 관련, NA28 θεῷ 앞에 정관사를 쓰지 않는 비해 TR1550MR  (텍스투스 리셉투스) 정관사를 쓰고 있는 (τω θεω) 군데에서 헬라어의 세미 콜론(‘·’, 영어에서는;’ ) 쓰인 부분까지 고려할 것이다. 또한 14 4ὁ λαλῶν γλώσσῃ ἑαυτὸν οἰκοδομεῖ· ὁ δὲ προφητεύων ἐκκλησίαν οἰκοδομεῖ.” (NA28) 해석을 통해 바울이 단수로 쓰인 γλώσσῃ 대해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고 있는지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고 있는지를 파악할 것이다. 이와 함께, 14 14ἐὰν [γὰρ] προσεύχωμαι γλώσσῃ, τὸ πνεῦμά μου προσεύχεται, ὁ δὲ νοῦς μου ἄκαρπός ἐστιν.” (NA28) 번역에 있어 역본별 비교와 용례별 쓰임새를 면밀히 고찰하고 가정법 구문의 정확한 해석을 통해 사도 바울이 “an unknown tongue”으로서의 방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석할 것이다.  14 21절과 22절에서는 바울이 구약성경 이사야서 28 11, 12절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방언이라는 표현으로 구약성경(라숀, לָשׁוֹן)이나 70인역(LXX )에서 사용한 단수 표현 ἑτερογλώσσος 사용하지 않고 굳이 복수로 바꾸어서 (ἑτερογλώσσοις) 사용했는지를 논증할 것이다.

신약성경은방언”(γλῶσσα)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특히 고린도 전서에는 방언이 최소한 가지 의미(“외국어황홀경의 발화”) 쓰이고 있으며황홀경의 발화(반복되는 모를 소리)”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뉘고 있다. 논문에서는 이에 대해 면밀히 분석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구가 오순절파의 방언의 효용성에 대해서 객관적 결론을 내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수로서의방언천사들의 언어 수도 있고황홀경의 발화( 모를 없는 소리)” 수도 있을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미전도 종족의 언어 수도 있기 때문이며 일반적으로황홀경의 발화 경우 이를 통해서 실제로 긍정적인 효과를 느끼고 있는 많은 신도들이 있는 것이 분명한 데다 이러한 현대교회의 방언현상에 대해서는 다시 복잡한 분류와 논증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문의 연구의 범위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난방언”(γλῶσσα) 의미를 밝히는 두며 연구가 현대교회의 영적 현상에 대해서 좋은 제안을 것으로 기대한다.



[1] 이성호, 「교회의 직분자가 알아야 할 7가지」 (서울 : 세움북스, 2017), 219.

[2] Robert G. Gromacki, 현대방언운동연구, 김효성역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7-8.

[3] 문효식, 방언에 대한 신학적 평가, 국제신학 제 4(2002.12) (국제신학대학원학교 출판부), 101

[4] 의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로 보는 학자는 「두란노서원의 목회와 신학 편집팀」, 김동찬, 샌더스(J. Oswald Sanders), 이상훈, 유명복, 배종렬 의 외국어로 보는 학자는 어거스틴(Augustine), 캘빈(J. Calvin), 권기현, 데이어(Joseph H. Thayer), 그로마키(R. G. Gromacki) 의 두 가지 의미가 혼재한다고 보는 학자는 터툴리안(Tertullian), 에봇-스미스(Abohott-Smith), 노우호 등이 있다. 

[5] Douglas Webster, Pentecostalism and Speaking with Tongues (Londo, England:Highway Press, 1964), 21.

[6] 가스펠서브, ed. 라이프 성경단어 사전 (서울 : 생명의말씀사, 2011), 221.

[7] Stanley Mr. Brugess, medieval Examples of Charisatic Piety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Perspectives on the Pentecostalism, ed. Russel P. Spittler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6): 19-21

[8] 옥한흠, 성령과 방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 정음출판사, 1984), 137-38

[9] 노우호, 「고린도전후서 주해」 (산청 : 에스라하우스, 2019), 9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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