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안 자료 로마서 1, 2

신학서적 리뷰 2020. 2. 9. 04:01 Posted by forest38

OO교회 주일 신앙강좌 로마서 1                        인도: OOO 전도사

1.    우상숭배는 영적 간음인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로마서 1:2326, NKRV)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성적인 죄에게 넘겨주신다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신자들은 특히 성적 순결의 측면에서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로마서  123~26절이 번갈아 가면서 우상숭배와 육체적 타락을 두 번에 걸쳐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라서가 아니라 우상 숭배, 즉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정욕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버려 두다로 쓰인 헬라어 παραδίδωμι내어 주다로 번역해야 한다. ‘그냥 놔두다라는 의미가  아닌 적극적으로 죄에 빠지도록 하였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숭배라는 잘못을 저지른 인간 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음란과 정욕에 빠지도록 하셨는지를 확인해 봐야한다.

바울은 우상 숭배의 배후에는 사탄, 즉 어둠의 영과 타락한 세상 권세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고전 10:19–22).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말을 따름으로써 영적인 간음을 행했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우매해지면서 우상숭배를 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육체적 타락에 넘어 가도록 놓아 두시고 또한 역리적인 육체적 타락까지 이르게 하신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5:31-32) 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거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왜 수치와 두려움으로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렸는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영적인 간음과 육적인 간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간음을 더 큰 범죄로 보시는 것 같다. 앞서의 로마서 구절을 묵상해보면 영적인 간음을 범한 인간을 육체적 타락에 내던지셨다고 해서 선후로 보아 영적인 간음이 육체적 타락의 원인이 된다. 또한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라는 구절로 비추어 보아 원래 인간은 원초적으로 정욕의 죄를 짓는 존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육체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영적인 간음을 하지 않으면, 즉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바라보고 성령의 열매를 바라고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면 육체적으로 타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오직 성령의 은사만이 육체적 타락을 막아 줄 수 있다.

l  하나님께서는 왜 우상숭배를 한 인간들에게 성적으로 타락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l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는 범죄행위를 한 후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왜 범죄한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렸는가?

l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 하와를 유혹하는 옛뱀(사탄) >

 

OO교회 주일 신앙강좌 로마서 2                        인도: OOO 전도사

1.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  니라” (로마서 8:30, NKRV)

οὓς δὲ προώρισεν, τούτους καὶ ἐκάλεσεν· καὶ οὓς ἐκάλεσεν, τούτους  καὶ ἐδικαίωσεν· οὓς δὲ ἐδικαίωσεν, τούτους καὶ ἐδόξασεν.

(로마서 8:30, NA28) 

저자는 로마서 830절에서 영화롭게 했다의 원어 ἐδόξασεν을 미래에 확정적으로 올 일이기 때문에 부정과거로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영화롭게 했다를 문자 그대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완전한 성화,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지금 우리 삶의 자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면 이미 영화롭게 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야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 830절은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의 이유로 봐야 하는데 여기서 모든 것은 성도들의 고통, 실패, 죽음까지도 포함된 개념이어서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통계열역학을 주창한 루트비히 볼츠만은 현대 물리학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은 유일하지도 않고 방향도 없으며 양자화까지 될 수 있는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밝혔다. 시간은 상대적이어서 지구의 좌표계에서 볼 때 블랙홀의 좌표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시간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시간 개념의 신비를 풀어주는 이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해서 불러 의롭다 하신 자들을 이미 영화롭게 해놓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미리 정해서(προώρισεν) 불러(ἐκάλεσεν·)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고(ἐδικαίωσεν·) 의롭다 한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ἐδόξασεν)에서 전부 부정과거로 표현함으로써 천상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것이다. 그런데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이라는 문구를 보면 29절에 나오는 미리 정한 그 사람들이다. 구원하기로 예정했으면 그대로 다시 부른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 가령 29절에 있는 미리 정함이 있던 사람을 열 사람이라 했을 때 30절에 와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그랬으니까 열 사람을 부르시고, 부르시는 이 열 사람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이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영광의 기업에 들어가도록 하신다는 말인데 이것은 마지막의 정점적인 구원을 말한다. 처음부터 나중까지 같은 사람이 내내 이렇게 특수하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대상이 되어 있다. 예정된 자들 가운데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 그러니까 영화롭게 된 사람들이 그대로 열 사람이다. 내내 같은 사람이다. 예정되었다 하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인 것이다.

l  바울은 왜 영화롭게 했다는 것을 부정과거로 사용하여 표현했는가?

l  사람은 죽어서가 아닌 현세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l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공간의 왜곡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 시공간을 뒤트는 블랙홀 – NASA 제공 >   

  < 질량에 의한 시공간의 왜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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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자료 요한복음 1, 2

신학서적 리뷰 2020. 2. 9. 03:54 Posted by forest38

OO교회 주일 신앙강좌 요한복음 1                        인도: OOO 전도사

1.    빛으로 오신 하나님

개역개정과 KJS, NIV, ASV 등이 이해하다’, ‘깨닫다’, ‘이해하다로 번역하고 있고 새번역, NRT, NRSV 등이 이기다’,  ‘끄다등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καταλαμβάνω 어원이 되는 λαμβάνω붙잡다’, ‘취하다’, ‘영접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2차적인 파생의미로 이해하다’, ‘깨닫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실제로 이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용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가 주장한 대로 정황상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어원과   용례상으로 깨닫다로 번역하여야 한다. 또한 요한복음 19~10절에도 Ἦν τὸ φῶς τὸ ἀληθινόν, ὃ φωτίζει πάντα ἄνθρωπον, ἐρχόμενον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ἐν τῷ κόσμῳ ἦν, καὶ ὁ κόσμος διʼ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ὁ κόσμος αὐτὸν οὐκ ἔγνω.” (NA28) 라고 하여 말씀이  되신 하나님이 세상에 빛으로 왔는데 어둠이  빛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을 재차 분명히 전하고 있다. 여기서 ‘ἔγνω(기본형 γινώσκω)에 대해서는 모든 역본이 다 이해하다’, ‘깨닫다로 일치된 번역을 하고 있다. 따라서 1  5절을 이기다로 번역하는 것은 단어의 의미로 보나 문맥으로 보나 오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경구절이 두 가지를 다 의미한다고 하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서 불합리하다. 

요한복음 19절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본문이 속한 요한복음 11절에서 18절까지는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 적인 방법으로 변형의 틀을 가지고 하늘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언어와 방법을 통해 그 당시 문화 속에서 새롭게 하늘의 메시지를 해석하여 들려 주신 사건이 이른바 성육신 사건인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으로 묘사했다. 요한문헌을 읽다 보면 이 저작들이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과학으로 빛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알려진 바로는 빛의 특성 중 여러가지가 성경 말씀을 증명해 준다. 빅뱅이론은 우주가 창조될 때 섬광과 같은 한 줄기 빛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며, 만일 광속으로 이동하는 좌표계가 있다면 지구에서 볼 때 그 시간은 무한대가 된다고 한다. ‘빛이 있으라라든지 영생이라든지 하는 성경말씀들이 이해되는 것이다. 이처럼 빛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가 있다. 이런 면에서 요한복음이 성육신 사건을 으로 오셨다고 표현한 것은 절묘한 비유이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빛은 그 빛이 자연적인 것이든 초자연적인 것이든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구절은 특별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에서 세상에 와서비추는과 같은 단어를 현재시제로 사용한다. 영어도 불변의 진리를 표현할 때 현재형으로 쓴다. 빛은 시제가 없이 영원불변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 지금도 비추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천지창조 당시 하나님께서는 섬광으로 빛을 주셨고 생명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어둠과 죽음으로 바꾼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직접 빛이 되셔서 인간세상에 침투하신다. 이 빛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기도 하고 깨달았으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분의 진노를 살만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현상에 대해 112절에서 놀라운 자비를 베푸신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여 빛을 빛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자녀로 삼으신다고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에 굴복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들을 자신에게 되돌아 오도록 하기 위해 획기적인 반전을 계획하신 것이다. 그 분 자신을 희생하여서 사람들의 빛이 되어 주셨으니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인 것이다. 우리는 오직 죄를 자복하고 주  예수를 구주로 받아 들이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변함 없이 생명의 빛으로 우리 각자를 비추어 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성육신 사건으로 빛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도 했고 그것을 알면서도 받아 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 알면서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가 예수님 당시 상황에서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시오.

- 요한은 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으로 묘사했는가?  

 

OO교회 주일 신앙강좌 요한복음 2                        인도: OOO 전도사

1.    유대인의 그 왕이신 예수님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한복음 18:33, NKRV)

저자는 요한복음 18~19장의 빌라도의 재판과정을 설명하면서 “the king (ὁ βασιλεὺς) “a king(βασιλεὺς) ”의 설명을 빠트리고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구약성경이 지칭하는 ‘그 왕(the king)’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다윗 왕조를 재건할 사람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고 빌라도는 예수께 “the king”과  “a king”을 혼용해서 질문을 했는데 “the king”이냐의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았으나 “a king”이냐에는 “진리를 가져온 왕(a king)”이라고 답변하신다. 빌라도는 로마인으로서 정관사가 없는 라틴어를 구사하는 인물이다. 그가 the king과 a king의 유대적 개념을 알고 행동했는지는 본문상으로 분명하지 않으나 결과적으로 그가 만든 명패에 “유대인의 왕(the king) 나사렛 예수”라고 기록했고 유대인들은 이를 “자칭 유대인의 왕(a king)”으로 써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한다. 진리에 속하지 않은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압력에 못 이겨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한다. 빌라도는 십자가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의 죄목을 쓴 패를 붙인다.

빌라도는 이 패를 죄목으로 기록했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심으로써 확인할 진리(요 20:28)를 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요한복음적 역설이다. 이스라엘은 예수께서 다윗 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하지 않았다 하여 거짓 메시아라고 죽였지만, 예수는 자신의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고 그들 위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참 메시아이고 참 이스라엘 왕이었다. 다윗 왕조가 그림자로 그려내려 했던 실체인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참 메시아적 왕이었다. 예수는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들려 올려짐으로써 자신의 메시아적 과업을 완성하고 메시아적 왕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들려 올려짐은 예수의 수난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영광(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정체가 드러남)이다. 이것을 두고 예수는 자기가 다니엘 7장에 예언된 “그 ‘사람의 아들’ ”(단 7:13)로서 하나님의 새 백성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단 7:18, 22, 28)을 창조하기 위해 ‘들려 올려져야 한다’고 예고했던 것이다(요 3:14; 8:28; 12:32, 34).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온 세상 사람이 다 알아볼 수 있도록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쓴다. 하나님 백성의 언어인 히브리어, 로마 제국 언어인 로마어, 문명권 언어인 헬라어로 기록하여 세상의 대표격인 빌라도가 예수를 온 세상 왕으로 선포한 것이다. 여기 또한 요한복음적 역설이 있다.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은,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 중 그를 믿는 자들과 로마어와 헬라어를 쓰는 사람 중 그를 믿는 자들, 즉 세계 만방의 모든 족속 중 그를 믿는 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임을 고백하는 나다나엘 같은 자로서, 불신앙의 유대인(야곱의 자손)을 대치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요 1:45–51). 그들은 예수께서 예고한 대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들려 올려짐으로써 모든 민족과 모든 방언에서 예수 자신이 끌어 모으는 자들이다(요 12:32).

< 유대인의 그 왕(the king) 나자렛 예수 >

l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the king’ ‘a king’의 개념구분을 하고 예수께 질문을 하였는가?

l  빌라도는 왜 그가 만든 명패에 “유대인의 왕(the king) 나사렛 예수”라고 기록했는가?  

l  유대인들은 이를 “자칭 유대인의 왕(a king)”으로 써야 한다고 요구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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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교회 주일 신앙강좌 누가복음 1                        인도: OOO 목사

1.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  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NKRV) 이 구절과 관련하여 새번역, NRSV, NLT‘among’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개역개정, NIV, KJV 등 역본들은 ‘within’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 부분의 해석은 원어 단어의 쓰임새와 함께 원문의 앞뒤 문맥을 살피어 해석해야 하는데 ἐντὸς 가 두 가지의 뜻을 다 가지고 있지만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것은 대부분 ‘whthin’ 으로만 쓰였지 ‘among’으로는 쓰이지 않았음에 주의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ἐντὸς가 같이 쓰인 또 다른 용례인 마가복음 23 26절은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ἐντὸς)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하고 있다. 역시 ‘whthin’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문맥으로 보면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하고 있고 바리새인도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이므로 그들도 회심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본문이 속한 누가복음 17장 전체를 개관해 봐도 신도들이 회개와 감사의 마음으로 마지막 날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이므로 하나님 나라가 바리새인들의 가운데(among) 있는 예수님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사람의 마음속(within)에 이미 침투해 들어와 있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마지막 때까지 육적인 소욕을 이겨내고 성령 안에서 행동하여 영생을 얻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보아야 한다. , 성화 과정을 거쳐 영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번에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 이 구절의 번역 방법의 차이가 기독교적 가치관 차이를 구분해 준다고 하는 주장을 살펴본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계시인 신약 성경 전체의 핵심주제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2:28)라고 하셨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among’으로 번역하면 진정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현존해 있다. 또한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 또 그 나라의 도래는 아직 완료된 실재가 아님을 가르치신것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within’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을 경건주의자라고 치부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범위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세계관을 가르는 지표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나라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뿌리 깊은 성향이 있는데, 이것은 세상을 성스러운 영역과 속된 영역으로 나누려는 끈질긴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 경건의 영역, 즉 영혼의 내면 생활로 국한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신학적으로 위의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다. 우리는 여기서 신학적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묵상하여 신학이론의 실천적 적용을 하려는 것 이므로 어떤 해석이든지 우리는 여기서 추출해야 하는 궁금증들을 찾아본다.

-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는가?

- 바리새인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가?

-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within)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경건주의자들이 라고 싸잡아서 비난할 수 있는가?

<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모습 >

 

OO교회 주일 신앙강좌 고린도전서 1                        인도: OOO 전도사

1.     γλῶσσα는 외국어인가, 황홀경의 발화인가? 

고린도 전서 14장에서는 γλῶσσα가 복수로 쓰일 때 외국어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단수로 쓰일 때 황홀경의      발화로 씌였다. γλῶσσα의 단수, 복수 문제에 대한 해석을 혼동해서 온갖 종류의 해석이 난무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황홀경의 발화”도 ① 당시 고린도가 항구도시로 각 지방에서 외국인이 빈번하게 왕래하여 여러 외국어가 불규칙하게 혼합된 지방언어라는 설 ② 현대 교회에서의 뜻이 없이 반복되는 음절로 기도하는 “방언”현상이라는 설이 있다.

사도 바울은 최소한 8개국어 이상은 했을 것이고 이 외국어 능력은 당시로서 온 세계였던 지중해 연안에서의 그의 역사적 선교에 없어서는 안될 은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여러 외국어를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만(18) 만 마디 외국어보다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했다(19).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 사람이 모두 외국어를 할 수 있기를 바랬으나 그것이 통역이 되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다면 그 보다는 예언이 더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5) 외국어를 하는 것은 막지는 말되 예언하기를 열심히 구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37). 그러면서 그는 만약에 자신이 고린도 신도들  에게 외국어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을 전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유익이 안되지 않겠냐고 반문하면서(6) 온 교회 신도들이 모여서 외국어로 말하고 있으면, 초신자들이 미쳤다고 할 것(23)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외국어를 하는 것 자체는 은사이지만 교회안에서는 그것보다 예언을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 더 유익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반면에 unknown tongue으로서의 γλῶσσα에 대해서는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god)에게 말하는 것인데 영(spirit)  으로 비밀을 말하지만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한다(2)”고 하고 자기에게만 덕을 끼칠 뿐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끼친다(4)”고 하였다. 또한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를 모르므로 말을 해도 어떻게 남에게 전달이 되겠는가(9)라고 반문하고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할 것(13)이며 방언으로 말할 때는 둘 또는 많아야 셋이서 말하되, 차례로 하고, 한사람은 통역을 하라(27)고 하면서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하지 말고 집에서 자신과 하나님에게 할 것(28)을 권면한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했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내가 만일(ἐάν)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하면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내 마음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할 것(14)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하고 있는 unknown tongue에 대해 정확히 그것이 뭔지를 모르고 있는데 일단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 현상을 대하고 있지만 확실치 않기 때문에 통역이 있을 경우에는 해도 좋지만 제한적으로 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을 함이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줄 알고 방언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적인 행위(privacy)이므로 금할 것까지는 없다고 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상으로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γλῶσσα와 관련된 용례를 살펴보았 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unknown tongue자기에게 덕을 끼친다”(4)는 구절로  미루어 보아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고로 번역이 되어야 할 것인데 바울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일부에서 주장하는 현대교회의 방언 현상에 대한 방언 악령설은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한 것 같고 오히려 황홀경의 발화가 맞는 표현인 것 같다.

-   방언(γλῶσσα)외국어이든 황홀경의 발화이든 교회내에서 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   만약 바람직하다면 어느 상황하에서 어느 정도까지 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는가?

마태복음 66~7절은 은밀하게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기도할 때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신다.

- 그렇다면 외국어로서의 방언이나 황홀경의 발화로서의 방언을 할 때 중언부언이 아닌 다양한 형태일 경우 교회내에서 허용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물론 이때도 통역이 있는 경우로 한정한다)

- 고린도 전서 14장으로 볼 때 바울이 황홀경의 발화로서의 방언을 했다는 구절이 나오는가?

- 바울이 했다는 외국어 방언은 습득한 외국어로 봐야 하는가 은사로서의 습득하지 않은 외국어 방언인가? 아니면 두가지가 다 포함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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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사이어 저 / 김헌수 역

요약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펼치면서 영미 복음주의 운동의 확산을 주도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근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사상의 흐름을 분석하고 개념을 규정하면서 유신론에 기반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준다. 1976년 초판이 발행된 이래 그 이후에도 뉴에이지와 포스트 모던 사상을 추가해서 개정판을 내었으므로 현대사상을 망라하여 기독교적 세계관을 도출해 낸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 세계관의 차이

1장은 한 마디로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타인의 세계관과 비교해 보고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할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세계관을 정의하고 각 세계관별로 7가지 준거틀을 제시해서 여기에 대입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세계관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실재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의 의식 여부나 일관성  여부와 관계없이 보유하고 있는 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 일련의 전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 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세계관을 7가지 명제, 7가지 준거틀에 맞춰정의할 수 있는데 ① 신 또는 궁극적 실재의 본질과 속성 ② 우주의 본질 ③ 인간의 본성 ④ 인간 사망시일어 나는 일 ⑤ 지식의 근거 ⑥ 윤리의 기초 ⑦ 역사의 의미 등이다.     

2)    2: 하나님의 장엄으로 가득 찬 우주 - 기독교 유신론

저자는 결론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세계관은 기독교 유신론이라는 전제하에서 이 책을 저술 하였다. 첫번째 소개하는  세계관으로 기독교 유신론을 설명하고 10검토된 삶에서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는 방식으로 편집하였다. 기독교 유신론이야 말로 검토된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유신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격이시며,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전지하시고주권자이시며 선이시다. 또한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시어 개방 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제로 운행하도록 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인격, 자기 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지니면서 주변 세계와 하나님과 교통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훼손되었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역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윤리는 초월적이며  선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고 역사는 종말론적으로 일직선으로 흐른다.   

3)    3: 시계와 같은 우주 - 이신론

과학의 발달에 따라 우주에 관한 지식이 급속도로 넓혀지면서 권위의 기반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로부터 인간의 이성이나 직관 등으로 옮겨가는 시대가 되었다. 우주를 거대한 시계로 보고 하나님을 그 시계의 제조자로 간주한 것이다. 유신론에 따르면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방치한 상태이며 이러한 우주는 폐쇄된 체계 안에서 인과율의 일치체이므로 기적은 없다. 이에 따라 인간은 인격체이긴 하지만 우주의 한 부품일 뿐이며 우주는 아주 정상적인 상태로 인간은 우주를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우주가 운행하는 하나님의 일반계시로서 윤리를 이해하면 되며 역사는 창조시에 그 과정이 정해졌기에 직선적으로 흐른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자연에서 구했기 때문에 역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신론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고 보기 때문에 윤리가 설 자리가 없음에 불구하고 윤리학에 깊은 관심을 갖는 모순을 보였으며 인식론적 측면에서 개별에서 보편을 추출하려고 하였지만 그에 수반되는 무한한 지성은 확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이 안되고 폐쇄된 우주에서 인간 존재의 중요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한 사조로 이러한 내적인 모순으로 곧바로 자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세계관이었을 뿐이다.  

4)    4: 유한한 우주의 침묵 - 자연주의

이신론을 통해서 자연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 내리게 된 것이다. 자연주의의 영향하에서 발생한 진화론과 물질론에 의해 인류  역사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러면서도 자연주의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현대에도 그 망령이 종종 살아나온다. 저자는 하나님을 부정한 자연주의의 두 가지 실례로 세속적 인문 주의와 마르크스 주의를 들고 있으며 마르크스 주의의 기독교 이단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연주의는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물질만이 영원히 존재하며 우주는 폐쇄 체계 속에서 원인에 따른 결과에 따라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이란 복잡한 기계이며 이에 내재한 인격이란 인류가 아직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화학적물리적 성질의 상호관계로 이해한다인간은 물질로 구성되었으므로 사망시에 인간도 소멸하며 역사는 인과율에 따른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지만 최종 목적은 따로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따라 윤리도 인간에 종속된 것이며 인간의 발생과 함께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자연주의의 주장대로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가치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그처럼 불분명한기원을 가진 존재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연주의 내부에서도 견해가 불일치한다. 자연주의의 일관성 없는 논리적 모순에 불구하고 자연주의는  현대의 대부분의 과학적 연구의 틀을 제공한다. 자연주의는 하나님을 없애고 인간의 이성만을 중시하다가 진화론이나 물질론 같은 회복할 수 없는 오류를 인류역사에 선사하였다. 이것의 필연적인 귀결이 허무주의이다.  

5)    5: 零點(영점) - 허무주의    

허무주의는 모든 것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하는데 의미 있는 것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고 본다. 저자는 허무주의를 철학 사조가 아닌 하나의 감정으로 볼 수도 있으나 허무주의도 분명히 역사적인 사조이고 20세기와 21세기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 한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저자는 허무주의를 분석하면서 다른 장에서처럼 7가지 준거틀을 적용하지 않고 주로 자연주의와의 비교를 통해 자연주의가 어떻게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는 가에 초점을 맞춘다. 자연주의의 물질론과 폐쇄된 인과율의 법칙은 인류로 하여금 희망을 잃게 만들었다. 또한 인식과 지식조차 물질 작용의 결과인데 이 우연의 산물인 뇌가 존재의 원천이 참임을 실제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순을 낳는다. 다윈의 자연주의가 참이라고 할지라도 그 이론을 증명 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신빙성을 확립하는 방법조차 전혀 없다. 자연주의 윤리적 상대주의의  논리로 보면 그 틀 이외의 것에서 그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를 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의 죽음, 초월자의 상실, 우주의 폐쇄성 등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면 결국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니체와 헤밍웨이의 자살 등을 통해 우리는 허무  주의의 심각한 종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절망의 깊이와 그들의 예술을 이해해야 현대의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6)    6: 허무주의를 넘어서 - 실존주의    

저자는 6장에서 실존주의를 허무주의를 초월하기 위한 방법으로 탄생한 것으로 실로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이 의미가 없다면 무의미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미있게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으로 정의한다. 실존주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누지만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이며 특히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유신론과 어떻게 다른 지에 대해서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우주에는 물질과 인간 둘이 존재하는데 두 세계가 불일치하며 인간은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자신을 현재 상태로 빚어낼 수 있으며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롭다궁극적인 부조리는 죽음인데 생에 대한 사랑과 죽음의 확실성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독립된 세계관이라기 보다는 유신론의 특정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 의식을 가졌을 때 자신을 발견하는 그 위치를 중시한다. 인격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강조하며 지식은 주관적이며 삼위일체론과 같이 완전한 진리는 종종 역설적이라고 하였고 성경에 기록된 사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바로 선한 생활에 대한 성경의 모범들과 도덕에 대한 영원한 진리들이라고 표현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주관주의적 경향에 서서 종교를 역사에서 분리해서 그 내적 의미에 관심을 기울였다.

7)    7: 동양으로의 여행 - 동양 범신론적 일신론      

7장에서 저자는 동양 사상으로서 서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범신론적 일원론을 소개하고 있다. 이 곳에서 동양 사상을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으로 침투해 들어  와서 이미 서양화 되어 가고 있는 그러한 사상의 흐름을 고찰해 보고자 한 것이다. 동양 범신론적 일원론은 인간의 영혼은 우주의 영혼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존재하는 것은 궁극적 실재이며 그것은 모든 구분을 초월하며 현상적 계층제가 있다. 많은 것들은 이 궁극적 실재로 향한다. 인간은 가장 진실되고 충만한 존재로서 비인격인데 그는 인격, 지식, 선악을 초월하여 우주와의 합일을 체험한다. 죽음은 개인적, 인격적 존재의 종말이지만 인간의 본성에 관한 본질적인 것은 불변한다고 하며 유일자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인데 시간은 비실재이며 역사는 순환하는 것으로 본다. 동서양은 사상이나 종교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다. 어떠한 경우든 이렇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대화를 해나가면서 양자간에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야 한다. 우리가 세계관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양  사상에도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8)    8: 또 하나의 우주 - 뉴에이지      

저자에 의하면 뉴에이지 사상은 인류의 희망을 진화론적 모델에 두고 새로운 인류가 출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개개인에게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신비한 경험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이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연주의와 동양의 범신론, 애니미즘 등이 결합되어 있으며 고대의 영지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 저자는 특별히  뉴에이지에 대한 개관과 함께 부정적인 견해를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뉴에이지에 있어서 존재의 본질과 관계없이 최고의 실재는 자아이다. 우주는 자아 속에서통일되어 있으며 일반적인 의식 속에서 볼 수 있는 우주가 있고 신접한 상태와 같이 특수한  의식 속에서 볼 수 있는 우주가 있다. 이 안에서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도덕성 같은 보통의  범주들은 사라진다. 육체의 죽음은 자아의 종말이 아니며 우주 의식을 경험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며 생명은 순환한다. 실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새로운 의식의 상태에서 인식되는 존재와 사물들이 ① 자아와 떨어져 있다고 보는 비학적 해석 ② 그 존재와 사물들을 의식하는 자아의 반영으로 보는 환각 해석 ③ 우주 의식이 실재에 대한 수많은 특수한 모형중 하나를 사용하는 정신의 의식적인 행동이라는 개념적 상대주의 해석이 있다. 뉴에이지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님이 없고 우주는 닫혀 있다고 보는 점이다. 또한 애니미즘에서 차용한 악령들을 인정한다. 이 사상은 고차원의 진리라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실재에 대한 설명으로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념의 논리적인 결론은 일종의 인식론적 허무주의다. 우리는 결코 실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자아도 지향한다. 또한 우리 세계의 통일성과 함께 지식도 가져다 주는  체계를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이 사상은 차원 낮은 신비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9)    9: 사라진 지평선 -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용어는 현대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지만 이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 담론이나 하나의 세계관은 더 이상 존재치 않으며 모든 이야기가 똑같이 타당하고 그 타당성은 그 이야기에 따라 사는 공동체에 의해 확증된다고 한다. 본래 건축학에서 잡탕식으로 꾸며낸 데서 유래한 이 용어는 통합되지 않은 부분들, 상대주의, 애매모호한 혼합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상은 존재라는 1차적인 문제가 존재에서 인식을 거쳐 의미 구성으로 변천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실재 자체에 관한 진리를 우리는 영원히 알지 못하며 단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 목적에 걸맞는 언어를 구성함으로써 진리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이 믿게 될 때 그것을 들려주는 이야기꾼은 남을 지배하는 권력을 얻게 된다. 인간은 자신을 묘사하는 언어에 의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윤리 역시 언어적 구성물로서 한 사회가 선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면 다 사회적 선이 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체로 낙관적 자연주의를 정확히 비판했으며 언어가 권력과 연루되어 있다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인다. 또한 사회적 조건이 우리의 인식 작용을 좌지우지 한다고 함으로써 인간이 가진 제한성을 깨닫게 해준다그러나 모든 거대 담론을 부정한다고 하는 그 역시 거대담론일 뿐이며 우리가 실재에 접근할 수 없다는 관념과 우리가 실재에 관한 이야기만 들려줄 수 있다는 관념은 서로 모순된다. 또한 언어는 모호하지 않은 주장을 표명할 수 없다는 주장을 언어로 표현할 경우 그 속에 해결 불가능한 역설이 내포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충족성에 대한 비판은 또한 그에 기초한다. 논리적으로 오류인 것이다.

10) 10: 검토된 삶

저자는 10장에서 그동안 살펴본 각종 세계관들 중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한 조건을  네 가지로 분석하고 기독교 유신론이야 말로 이 네 가지 조건을 다 갖추어서 인간이 의미와  중요성을 찾을 수 있는 준거틀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올바른 세계관이 갖추어야할 조건은 첫째로 일관성 있는 내적인 지적 통일성이며 둘째 우리가 마주치는 실제의 자료를 모두 포함할 수 있어야 하고 세번째로 적절한 세계관은 그것이 설명하겠다고 주장한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 실존이 마주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주관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확실히 진리는 궁극적 만족을 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독교 유신론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의문점과 다듬어 지지 않은 이론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유신론은 왜 그러한 문제점들이 있는지를 초월하신 하나님안에서 다 해결된다고 설명해주고 있다. 기독교 유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어느 한 개인이 지적 세계관을 갖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하고 인격적인 우주의 주재께 인격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검토된 삶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평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대사회의 세계관을 망라하여 비교, 분석, 비판하고 여러가지 실질적이고 사회과학적인 준거틀을 대입함으로써 초월하신 하나님, 즉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분으로서 그 분 안에서 모든 이성, 모든 선, 모든 소망, 모든 실재, 모든 구분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기독교적 유신론적 세계관이야 말로 가장 바람직한 세계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 점에서 우리에게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탁월한 논리로 이 시대의 세계관을 통찰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초판을 발행한 뒤 수십년 동안 동 분야에게 그가 현대인의 세계관 형성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앞서 요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다양한 세계관에 일곱 가지 준거틀을 대입하여  분석한 뒤에 다양한 세계관이 있는 것 같지만, 내면을 들여다 보면 제한된 수의 세계관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제 1의 실재(궁극적 실재)의 본질과 속성)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기본적 대답만 있을 뿐인데 즉 영원토록 자존하는 것은 우주이거나 아니면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논리다. 또한 올바른 세계관의 선택에 있어서 네 가지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논리적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관련된 모든 자료가 포함 되어야 하며 자체 논리가 스스로 설명 가능하여야 하고 주관적으로 만족을 주는 세계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객관성이 확보되었는지의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1) 단점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중에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해당 예화에 익숙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스토리가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화는 또 다른 숙제가 된다. 예를 들어 허무주의에 관한 설명에서  저자는 로버트 파라 카폰의 작품을 예화로 들고 있는데 독자는 해당 예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다른 시간과 정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누구나 금새 이해하기 쉬운 자기만의 스토리로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책의 제목만으로도 저자가 올바른 가치관을 기독교 유신론으로 귀결시키려 한다는것을 알 수 있다. 뻔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구성 및 논리상의 반전이라든지 플롯의  짜임새라든지 하는 재미가 결여되어 있다. 또한 일곱가지 명제에 대입하여 각 세계관을 분석 하였는데 이 준거틀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저자는 이에 대해 각 세계관의 본질을 최소화한 매우 간결한 명제 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또한 그 순서에 있어서도 신 또는 궁극적 실재의 본질과 속성을 첫 번째로 했지만 다른 세계관, 예를 들어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같이 인간이 존재 하는 것을 제 1의 명제로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적 기술에 낯선 독자를 위해 준거틀에 대한 간단한 개념적, 기술적 소개와 또 다른 준거틀과의 비교 분석이 있었더라면 훨씬 더 호소력 있게 설명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다른 세계관들을 비판하면서 자체의 논리적인 모순 때문에 해당 가치관이 수용할 만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저자가 추천하는 기독교적 유신론에서도 실제 유신론은 의문점들과 거친 부분들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논리 전개에 있어서도 약점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사상에 대한 모순을 지적한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차라리 기독교적 유신론이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이러한 모순이 초월적인 존재(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추가되는 사상의 흐름을 포함해서 부분 수정을 하면서 개정판을 내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초판 때 구성  했던 방법을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했다고 봐야 한다. , 세월이 흐르면서 추가 작업을 하다 보니 전체적인 통일성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서 저자는 뉴에이지 운동과 관련, 책의 초판이 발행될 당시에는 뉴에이지의 통일된 개념 자체가 없었는데 나중에 구체화 되고 보니 영지주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초판을 발행할 당시 뉴 에이지 사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있었더라면 초판부터 이 책의 구성이나 논리는 달라졌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저자 자신의 사고도 변화할 수 밖에 없어서 일정 시점에서는 자신의  통일된 논리를 주장해야 하는데 초판을 어느 정도는 유지해야 하므로 개념상 빠지는 부분들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한 권의 책으로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완전히 다르게 저술한 것에 비해  완성도가 아무래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2)    장점

저자는 결론적으로 기독교적 유신론을 최상의 세계관으로 주장한다. 저자가 1장에서 먼저 밝힌 것처럼 이 책의 목적이 다양한 세계관을 분석, 비교하여 저자의 세계관인 기독교적 유신론으로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을 읽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발견하거나 수정하거나 또는 더 명확히 갖추어 가게 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책의 구성면에서와 타 세계관의 논리적 모순과 역사적 위치 등을 날카롭게 지적함 으로써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우선 전체 구성에 있어서 첫 번째 세계관으로 기독교적 유신론의 핵심을 설파하고 다양한 세계관을 분석 비교한 뒤 마지막에 종합적인 결론을 짓고 있다. 두 번째로 해박한 지식으로 여러 세계관들의 논리적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는데 예를 들어 뉴에이지 사상이 우주의 의식이라는 것이 악령과의 접신상태임을 암시하는 설명 등이 그것이다. 이신론을 통해서 이신론의 역사적 역할, 즉 궁극적 실재가 하나님에서 물질로 바뀌는 과도기적 역할에 대해서 적시하고 있는 점과 타 세계관을 분석, 비평하는데 있어서 각각의 근현대 철학사조를 기독교적인 관점을 일단 배제한 채 함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였는데 예를 들어 저자는 허무주의를 기술하면서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그 탄생배경이나 자연주의와의 연관성 등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현대사회의 복잡한 인간 내면에 있는 허무주의의 그림자를 그려내고 있다. 자칫 관념적으로 흐를 수 있는 세계관의 분석을 구체적이고 일목요연한 평이한 문체로 서술하여 초신자나 일반인에게도 어렵지 않게 지식을 전달하고 있는데 특히 허무주의나 실존주의 등 철학적 난제로 볼 수 있는 개념을 일곱가지 준거틀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 뒤에 네 가지 필터링으로 결론을 자연스럽게 유도한 것 등은 탁월한 장점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사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적인 방법이라 할지라도 전문적인 식견이 없이 이것을 적확하게 적용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저자의 노력과 지적 능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철학적 기반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철학지식이 실제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기독교적 통찰력과 함께 유려한 문체로 독자로 하여금  세상의 어떠한 사조라도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해주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주며 복음의 핵심을 설파하여 감동을 선사함으로써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 다가가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이 책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기독교적 유신론으로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지만 반드시 이러한 결론이 아니더라도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동양의 범신론적 일신론, 뉴에이지,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의 모든 사상의 흐름을 망라하여 비교, 분석, 정리,  비판하고 있으므로 이 책이 숙독만으로도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대부분 갖출 수가 있다. 자신의 세계관 정립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토론을 위해서도, 또한  복음을 전파하는데도 필요한 시대정신을 통찰하게 해주는 귀한 도서이다.  

적용

1) 개인에게

우리가 자신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세계관을 비교, 검토하여 체계적으로 정리, 합리적이고 가치관을 점검하고 정립한다. 우리가 자신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세계관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세계관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돌이켜 보면 중세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기독교 유신론은 다른 사조로부터 도전을 받는 일이 없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화되면서부터 여러가지 다른 사조들이 명멸해왔다. 우리는 우선 하나님이 초월자로서 궁극적 실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이고 만물을 꿰뚫어 보시며 전능하신 분이다. 우리는 그 분의 위엄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을 때까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는 닫혀 있는 곳이 아니고 열려있는 공간이다. 이신론에서 얘기하는거대한 시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 실존에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열려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는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결정론적으로 정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인류 구속의 원대한 계획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이것은 인간은 인격을 지니며 자신이 사는 우주로 부터 초월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허무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므로 항상 우리들과 소통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정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직접 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주를 바라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시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1 5절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고 있다. 죽지 않아도 되었던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의 타락으로 인해 죽어야 하는 존재로, 일시적인 존재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죽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원대한 계획을 수립해 놓으셨다. 세례를 받은 뒤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극복하며 성화과정을 통해 영화에 이르도록 하여야 한다.  

2) 가족에게

다른 가치관을 논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올바른 삶임을 가르쳐야 한다. 언뜻  보아서 앞뒤가 맞지 않는 기독교리를 알아 듣기 쉬운 말로 표현하여 자녀로 하여금 다른 세계관이 갖추지 못한 논리적 일관성이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 또한 학계의 여러 자료와 실제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증거 등을 망라해서 보여주어야  한다. 필요하면   과학적 탐구와 비판적 분석을 병행한다. 예를 들어서 다윈의 진화론이 갖고 있는 허구라든지 뉴에이지가 갖고 있는 악령의 실재라든지를 설명해주는 방법 등을 통해서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욕망, 허무, 사랑 등에 관한 모든 문제를 기독교적 유신론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다른 세계관으로는 이러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깨우쳐 준다. 이와 함께 확실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진리는 우리에게 만족을 선사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분께 인격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죄를 극복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을 인식하는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3)    교회에서

서구의 사조에서 자연주의, 허무주의로 이어지는 암울한 시대에 동양의 신비주의가 그 틈을파고 들었다. 제임스 헤릭은 뉴에이지 운동의 뿌리가 고대 영지주의에 두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뉴에이지 운동을 보고 있노라면 애니미즘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이들은 종교통합주의를 주장하고 모든 신은 다 같은 신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기독교계는 뉴에이지의  먹이감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하나님이 기록하신 성경을 거대담론을 언어와 상징으로 표현한 권력놀음이라고 주장 하고 있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실재와 부합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하면서 실용적 진리만이 유일한 종류의 진리라고 하는 종교적 상대주의를 표방한다. 교회는 이러한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힘을 잃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며 인간 실존에 침투해 들어오셔서 인류 구원의 원대한 계획을 실행해 가고 계시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능력과 지혜와 지식의 근원이시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악한 영들은 일곱 길로 달아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죽음, 이성의 죽음, 진리의 죽음, 자아의 죽음 등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망에 빠져 좌절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반영한다이에 대한 치료는 오직 기독교적 유신론에 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야 한다. 우리는 핵 시대를 살아가면서 삶의 온갖 변화와 불확실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여전히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하심을 지닌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  들에 대해 우리는 성서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결하여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그들 주위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정돈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안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환경을 조정하신다는 생각은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다.

4)    사회에서

사회에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비신자들도 있으며 또한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세계관은 이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적인 이론이 있어야 한다. 자연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기상천외한 반역사적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다윈 이전에 많은 사람들은 우주의 기원보다도 인간의 기원이 스스로 생성되기 시작했다고 믿으면서 다윈이 이를 체계화해서 진화론을 구축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최초의 생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이 이론이 처음 나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과학계를 지배하는 사상이 되었다. 자연주의의 또 다른 망령은 마르크스를 거쳐 공산주의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오류성 여부를 떠나서 엄청나게 많은 수의 인류에게 재앙이 되었다. 이들은 세상을 물질로 보고 경제적인 요소가 역사의 기본적인 결정인자이며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인식한다. 공산주의를 통해 이전 모든 사회에 존재했던 소외는 극복되고 새롭고 높은 차원의 세상이 도래한다고 보는 것이다. 한반도는 이 공산주의의 기괴한 변형인 북한이라는 체제를  낳았 으며  우리는 이들과 마주하고 살고 있다. 고 황장엽씨는 주체사상이 기독교 이론을 원용하여 만든 것이라고 실토한 바  있다. 저자도 지적한 대로 이들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독교의 비전과 상응한다. 의식 있는 사람들은 힘을 합쳐서 다윈의 진화론이 내용 없는 허구라는 점을 실증해야 한다. 한국의 창조과학회의 활동을 보면 의미 있는 창조론의 과학적 증명을 해내고 있다. 북한은 역사이래 최악의 우상숭배 국가이다. 한반도에 이러한 국가가 잠시라도 존재케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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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서론

1. 문제 제기 2. 목적 진술 3. 연구 진행 진술

. 본론

1. 자신의 직분이 소명에 따른 결정인지를 스스로 판단

. 헌신의 방법 정하기

. 자신의 은사 판단하기

. 교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신도들의 소명 확인 및 은사 분별

2.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 및 주의할 점

. 성경에 나타난 리더의 자질

.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4가지 일반적 덕목

. 리더가 경계해야 할 일반적 장애물

. 현대 교회에서 기피해야 할 리더의 유형

3. 신학 지식 및 필요한 학문의 습득

. 성경 학습 나. 신학 공부 다. 교양 서적

4. 현대 교회에서 평신도 리더 양성하기

. 평신도 리더의 선발 나. 평신도 리더의 훈련과 양육 다. 평신도 리더의 은사개발

. 결론

1. 요약 2. 제언

. 참고문헌

 

평신도 지도자 리더십 고찰

. 서론

1. 문제의 제기

현재 한국교회는 안팎으로 많은 문제가 노정되고 있는 데 이중에서도 이단종파의 기성 교단 침투로 인한 기존 교회 붕괴 교단내 분파 교회내 신도간 내분 교역자의 자질 부족 교회가 사회를 선도하지 못하는 문제 등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필자의 경우만 해도 7~8년간 다니던 교회내에서 신도간 내분이 일어나 목사 반대파와 지지파간의 싸움으로 매주 주일 예배때마다 반대파의 예배당 점거, 확성기를 이용한 설교 방해, 욕설 공방과 멱살잡이 등이 벌어졌는데 주일 예배는 드려야 하므로 캐나다에 오기 6개월 전부터는 서초동의 모 대형교회로 옮기게 되었지만 이곳도 역시 담임목사의 자질 문제로 말로 표현 못할 싸움을 벌이고 있었음. 이유는 한두가지의 문제가 아닌 앞서 언급한 문제점들이 총체적으로 복합되어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2. 목적 진술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역자·직분자·일반신도 등 각 당사자가 각기 노력해야 할 것은 당연하겠지만 본 소론에서는 그중에서도 교회의 운영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주요 직분자들의 자질에 대해서 고찰하여 리더 자신에게는 스스로 중요한 직분을 맡을 수 있는 소명의식을 갖도록 하고 교역자나 일반 신도들에게는 자질을 갖춘 리더를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도록 하여 교회내적으로 교회의 원활한 운영을 도모하고 교회 외적으로는 복음 전파에 주력하여 보다 많은 영혼을 구원케 하고자 함이다.

3. 연구 진행 진술

여기서 평신도 리더라 함은 교회내에서 일정 직분을 맡고 있는 장로·권사·집사 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직분이 없더라도 교회내에서 오피니언 리더나 기타 영향력 있는 신도와 함께 교회밖에서 비신자에 대해 전도하고 설명하는 사람 들을 통칭한다. 평신도 리더의 리더십과 관련 리더 자신이 스스로 맡고 있는 직분이 소명에 따른 결정 인지를 성찰하는 것과 함께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 및 주의해야 할 점을 점검해보고 필요한 성경 공부 및 관련 학문 등 필요한 신학적 지식을 갖추는 한편 이러한 평신도 리더를 양성하고 교육시키는 방안을 강구한다. 이러한 고찰은 주관적이고 자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내에서 해당 구절을 탐색 하고 해석하여 적용하는 것을 위주로 참고서적 등을 인용하여 에세이를 진행

. 본론

1. 자신의 은사에 따른 직분이 소명의식을 갖춘 결정인지를 스스로 판단

. 헌신의 방법 정하기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공통된 고민이 있을 수 있다. 나이와 무관하게 회심하고 하나님을 섬길 것을 결심을 하게 되면 목회자의 길을 걸을지 사회에서 직업을 갖고 평신도로서 섬김의 길을 걸을지에 대한 고민이다. 세상의 직업에서도 성공적이면서 헌신을 통해 교계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 중에서도 목회를 하지 않고 직업을 갖거나 사업을 경영해 본래의 계획과는 다른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다. 물론 평신도 리더의 역할을 하다가 직업 은퇴후 목사 · 선교사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소명을 제대로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8세기 영국의 하원 의원으로서 노예폐지라는 역사적 성과를 이루어 낸 윌버포스는 25세때 회심하면서 정치를 집어치우고 기독교 사역의 길로 접어들기를 원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일이 세속적인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존 뉴턴이라는 목사가 윌버포스를 설득하여 정치를 계속하게 함으로써 노예폐지라는 역사적 결정을 이끌어 내었는데 존 뉴턴은 노예 상인으로 일하다가 회심하여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사한 목사로서 윌버포스의 인생에 결정적인 조언을 하게 된 것 이었다. 윌버포스는 이렇게 목회자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평신도로서 감당했던 것이다.

반면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경우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명과정, 은사, 영향력 조합, 이중 확인 등 여러 개념을 사용하여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판단하여야 한다. 여기서 이중 확인 과정이라 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인도를 받음과 동시에 전혀 연관이 없는 위치에 있는 제 삼자를 통하여 한 번 더 확인을 받는 과정을 말한다. 이 중복 확인과정을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실수 없이 확실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이중확인은 네 단계의 패턴이 있는데 먼저 사역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말씀을 꼭 필요로 하는 중요한 시기에 와 있음을 알리고 두 번째로 직간접적 방향 제시, 세 번째는 제시한 방향에 대해 제 삼자를 통한 확인, 네 번째로 두 번째의 방향제시와 세 번째의 제 삼자를 통한 확인에 대해 주권적인 방법으로 반드시 알려 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경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와 소명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파악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고 하여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영원 전부터 있었으며 부르신 소명대로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 자신의 은사 판단하기

이러한 과정을 거쳐 목회자의 길이 아닌 평신도 리더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면 다음 단계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은사가 무엇인지를 먼저 판단하고 해당 분야에 은사가 있다고 판단되어 헌신하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8~10, 28~30)과 에베소서 4(4), 로마서 12(8~ 10)을 종합하여 언급한 18가지 리스트중에서 발췌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성경에 언급된 평신도 리더로서의 은사중 대표적인 것으로서는 믿음의 은사와 영분별 · 방언 · 통변의 은사, 전도자 · 위로자 · 베품 · 행정 · 다스림 · 지도자 · 돕는자 · 긍휼의 은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찾아 볼 수 있겠으며 이러한 은사는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리더에게 은혜로서 주어지는 것으로서 리더는 이들 은사를 가지고 기독교 공동체를 온전히 세우는 데 헌신해야 한다. 이러한 은사는 성령에 의해서 단번에 주어지는 것도 있지만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을 발전시키고 개발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은사들도 있는데 대체로 성령에 의해서 단번에 주어지는 경우는 좀 더 등급이 높은 은사라고 할 수 있다. 리더는 이러한 은사를 면밀히 연구하여 자신에 맞게 발전시켜야 한다.

. 교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신도들의 소명 확인 및 은사 분별

이처럼 평신도 리더는 자신의 은사를 판단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신도들의 은사를 분별하는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교회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인재를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일도 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마다 후회없이 은사와 함께 부르시고( 11:29)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시( 12:6, 고전 7:7)었으므로 각  지체들의 은사를 발견, 개발하여 교회 공동체를 원활하게 운영하는 것은 리더의 의무와 책임임과 더불어 하나의 축복  이기도 하다.

2.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 및 주의할 점

. 성경에 언급된 리더의 조건 분석하기

성경에는 감독, 장로, 집사, 청지기 등의 용어로 리더의 자질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갖추어야 하는 성정, 하나님께서 리더를 세우신 목적 등과 관련한 구절이 많이 등장한다. 성경에서 일반적인 리더의 조건과 공통적인 리더의 조건으로 분류해서 관련 내용을 발췌하고 이 내용들을 현대적 의미에서 재해석해 보기로 한다.

[ 일반적 조건 ]

1) 디모데전서의 감독 및 집사 자격론(딤전 3 :1~11)

바울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과 관련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는 것을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딤전 3:1)이라고 칭찬하고 감독, 곧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고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했는 바(딤전 3:2) 이 조건들 중에서도 특히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가르 치기를 잘해야 한다는 말은 믿음의 전도를 하기 위해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신도들에 대한 교육훈련에 힘쓰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여야”(딤전 3:3)  한다고 하였는 바 많은 교회들이 신도들간의 내분에 휩싸이고 재정 비리등의 문제로 시끄러운 것을 보면 이러한 바울의 경계 내용이 현대의 교회에 놀랍게도 똑같이 적용이 됨을 볼수 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4~5) 라고 한 것과 관련 현재 직분자들을 선발시 가족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지를 점검 하고 있는 것이 본 성경구절과도 일맥상통한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함 이라”(딤전 3:6~7)고 하여 새로 입교하여 아직 그 성정을 판별할 수 없는 자를 제외해야하고 타인의 평이 좋은 사람을 선택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 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딤전 3:8~10)이라고 하여 영혼과 행실이 순수한 사람으로 하여금 집사의 직분을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디모데 전서는 마지막으로 이처럼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 3:13)라고 권면한다.

2) 디도서의 청지기 자격론 ( 1 : 6~9)

바울은 자신의 참 아들 디도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장로들을 세우는 문제와 관련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1:6) 한다고 하여 감독, 집사와 마찬가지로 장로도 엄격한 심사 기준을 갖고 선발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1:7~8) 라고 하면서 장로를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1:9)고 하여 장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잘 지켜서 모범을 보여 신도들을 올바르게 이끌 것을 강조한다.

3) 베드로서의 자격론 (벧전 5:1~3)

베드로는 장로에게 권고하는 말로 너희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 5:1)라고 하고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벧전 5:2)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고 함으로써 장로된 자가 신도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고 모범을 보일 것을 주문한다.

[ 공통된 자격 ]

1)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 (삼상 16:7,  13:22)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 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13:22)라고 하여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여 왕으로 삼으신 이유가 용모와 키 등 외모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을 보고 결정하신다는 것을 알리면서 리더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라야 함을 나타낸다.

2) 가정에서 인정받는 자 (딤전 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딤전 3:12) 라고 한 것처럼 직분자는 부적절한 이성관계에 빠지지 않고 가정을 잘 이끌어 나가는 성실한 사람일 것을 요구한다.

3) 교회로부터 인정받는 자 ( 6:3)

사도행전은 또한 형제들아 너히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6:3)라고 하면서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일곱 집사로 삼는다.

4) 사회에서 인정받는 자 (딤전 3: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7)고 하여 타인에게 좋은 평을 가진 사람을 리더로 세워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비방에 휩쓸릴 수 있고 사탄이 쉽사리 올무로 엮어낼수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4가지 일반적 덕목

바울은 골로새서 3:23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바울의 서신 가운데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가 특히 소명에 충실한 삶을 요구한다. 그 가운데서도 디모데후서가 그렇다. 바울은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4가지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4가지 자질은 탁월함, 진실함, 근면함, 관대함인데 이러한 덕목을 간단히 살펴 보기로 한다.

1) 탁월함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고 했다. 곧 자신 에게 충실하려면 은사와 재능을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한다는 원리다.성경은 탁월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성경의 요구에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원칙이 존재한다. 바로 탁월함의 기준이  최선을 다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는 원칙이다. 어떤 직능, 직업이든 적절한 합격선이 있다. 우리는 그 한계에 머무르지 말고 최선을 다해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능력에 미치지 않는 일을 해놓고 만족해서는 안된다. 탁월함의 기준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 있게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진정으로 탁월함을 추구하는 마음은 섬김의 삶을 실천하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따라서 감사의 제물을 바치듯이 그분께 다시 돌려드려야 한다.

2) 진실함

바울은 디모데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권고함과 동시에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고귀한 일을 하려면 반드시 진실한 사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딤후 2:15) 바울은 자신의 소명을 언급할 때에도 동일한 원칙을 적용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매매하는 장사꾼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우리는………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4:2)고 덧붙였다. 교사, 정치가, 카운슬러와 같이 말을 사용하는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우리가 진리를 섬기기보다 자기 자신을 섬기며 한갓 장사꾼에 불과한 역할을 행한다면 우리 소명을 떠받치는 근본토대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꼴이 되고 만다. 소명에 충실하려면 정직해야 하고 반드시 진리에 입각해야 하며 자신의 말에 진실해야 한다.

3) 근면함

탁월함, 진실함과 함께 필요한 자질은 바로 근면함이다. 근면함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근면함은 철저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 무엇도 근면함을 대체할 수 없다. 어떤 일도 쉬운것은 없다. 운동선수도 천부적 소질이나 재능보다는 성실히 훈련에 임할 때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세심하게 일을 처리하느냐 않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성실성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든 주지 않든, 고마움을 표하든 표하지 않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데서 만족을 찾고 일이 잘 처리된 것에서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4) 관대함

네 번째 자질은 관대함이다. 리더는 관대한 태도로 소명을 이뤄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6에서 다른 사람을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새로운 피조물 여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기대를 가지고 바라 봐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고귀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관대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바울의 주장에는 그 같은 신념이 깔려 있다. 리더의 섬김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리더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섬긴다. 가족과 친구, 교인과 세상 사람에게 리더는 거저 베풀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지 않으셨다. 리더라고 해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고, 그런 사람이 되라는 소명도 받지 않았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반드시 나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 리더가 경계해야 할 일반적 장애물

J.로버트 클린턴의 영적지도자 만들기에서 언급한 유종의 미를 거두는 삶을 방해하는 여섯가지 장애물에 대입하여 교회 공동체의 리더가 되었을 때 주의해야할 사항을 여섯 가지로 정리해보기로 한다.

1) 재정의 오용과 남용

특히 권력의 지위를 가진 리더들은 재정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재정을 옳지 않은 방법으로 관리하고 결국 잘못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탐욕에 눈이 먼 자는 결국 재정적 비리와 부정을 범한다. 수 많은 리더들이 돈에 연루된 이슈로 실패했다. 구약 에서 기드온이 금으로 만든 에봇이나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에서 확인된다.

2) 권력의 남용

효과적인 리더들은 그들의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다양한 권력기반을 사용해야 한다. 권력이 유용하고 매일같이 사용할 때 그것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위계적 시스템에서 권력의 남용을 포함한다. 대개 그들은 자신들을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책무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제사장직 특권을 침해한 웃시아 왕이 좋은 본보기가 된다.

3) 몰락으로 이끄는 교만

교만은 리더를 몰락으로 이끌 수 있다. 리더는 역동적인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건강한 자긍심을 가져야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우리가 사역을 하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윗의 인구조사가 좋은 예가 된다.

4) 부적절한 이성관계

리더들이 부적절한 이성관계로 인해 몰락하게 된 것을 성경과 서구 문화에서 보여주고 있다. 성적 범죄에 대하여 요셉이 보여준 진실성 검증은 모든 리더들의 마음에 기억해야할 이상적 모델이다. 밧세바를 범한 다윗의 예에서 볼수 있다.

5) 가정문제

배우자 간에 혹은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아니면 형제들 간에 생기는 문제 때문에 리더의 사역을 망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에서 성경적 가치관이 필요하다. 오늘날 싱글 사역자와 결혼한 부부가 사회적 기반을 갖는 것이 점점 중요해 지고 있다. 다윗의 가족 중에 암논과 다말, 압살롬의 복수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6) 정체기(매너리즘)

유능한 리더들이 성장을 멈추고 정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강점이 약점이 될 수 있다. 그들은 현실감 없이 혹은 새롭게 하는 성령의 능력의 효과가 없이 어느 정도 계속 사역할 수 있다. 리더들은 대개 그들의 평생 개발 단계에서 몇 번씩 정체기를 경험. 압살롬이 반역하기 직전까지 다윗의 통치 후반기에서 예를 볼 수 있다.

. 현대 교회에서 기피해야 할 리더의 유형

평신도 리더는 직책의 개념이 아니라 사역의 개념으로 직분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어느 단체나 모임에도 문제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리더를 세워야 하는데 오히려 고질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또 사람으로부터 외면과 거부를 당하게 되므로 이러한 리더는 선발되어서는 안된다.

1) 호전적인 성격

모임에서 논쟁을 즐기고 상대방을 자극하며 사소한 일로 다툼을 일삼는 성격으로 이러한 성격을 고치지 않고 리더가  되면 심각한 분열을 일으켜 교인들이 사분오열되어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가장 심각한 결함이다.

2) 이기적인 성격

자신이 관심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 문제를 일으키는 스타일 로서 항상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만 하려고 한다.

3) 질투심이 강한 성격

목회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보지 못할뿐 아니라 심하면 교회를 떠나기까지 하는 스타일

4) 정직하지 못한 성격

책임을 피하기 위해 또는 자신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기 위해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스타일로서 재정적으로 비리를 저지를 가능성도 많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5) 뒤에서 말하는 성격

남의 말 하기를 즐기며 험담을 자주 하는 스타일로서 이따금씩 정직한 제직이나 목회자, 교회에 치명타를 입히고 여러 곳을 다니며 분란을 일으키게 된다.

3. 신학 지식 및 필요한 학문의 습득

최근 한국 교회에서는 평신도 직분자들을 위주로 신앙생활에 깊이를 더하기 위하여 별도로 신학공부를 하기도 하고 초교파적으로 성경통독 운동 등 교회내외적 학습활동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교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북미권 개신교회의 예배에서는 목사만 설교하는 한국교회와는 달리 교회의 직분자들도 돌아가면서 설교하는 문화를 감안하면 평신도 리더들도 상당수준의 신학적 지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수많은 이단종파가 난립하는 개신교계의 사정을 고려할 때 평신도 리더가 이단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학 지식과 필요한 학문은 성경읽기·신학공부·외국어 습득·교양서적 등을 들 수 있다.

. 성경 학습

성경을 무오류의 진리라는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신·구약을 관통하는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성취이자 신약의 주체임을 알아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매일 통독하면서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지만 의식을 가지지 않고 성경을 읽기만 해서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기본적인 성경 해석 방법을 알아야 하고 관련 지식의 함양과 함께 신구약을 체계화하여 분류하여 읽는 것이 필요하다.

1) 신약 성경

신약성경은 크게 여덟 조각 < 복음서 저자(4), 주님의 형제들(2), 그리고 대표적 사도(유대인 사도인 베드로와 이방인 사도 바울) > 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마가복음과 연결되는 서신은 마가의 스승격인 베드로의 베드로 전후서가 있으며 마태복음의 인맥과 전통에 따라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유다의 서신들이 연결되어 있다. 바울과 평생 끝까지 동역했던 누가에 의해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씌어졌으며 바울은 그와 함께 선교여행을 하면서 14권 서신들을 썼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복음서 한권과 세편의 편지들(요한 1·2·3) 그리고 밧모섬의 묵시록인 요한계시록을 저술했다.

2) 구약 성경

우리는 구약성경을 인간구속의 역사가 기록된 통일성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구약성경 39권은 모세 5(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역사서(예루살렘 멸망 전  여호수와·사사기·룻기·사무엘상하·열왕기상하, 예루살렘 멸망 후  역대상하·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 시가서(욥기·시편·잠언·전도서·아가서), 예언서(대예언서  이사야·예레미야·예레미야 애가·에스겔·다니엘, 소예언서  호세야·요엘·아모스·오바댜·요나·미가·나훔·하박국·스바냐·학개·스가랴·말라기 으로 구분해서 읽는 것이 일반적임.

3) 성경해석

성경해석의 필요성은 성경 자체의 계시로서의 특성과 관계가 있다. , 특별계시로서 성경이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감추어진 것을 나타내신 것임. 결국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밝히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여기에 성경해석의 필요성이 있다. 성경을 인생의 사용지침서라고 보았을 때 우리의 삶은 성경해석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 신학 공부

한국교회에는 신천지·구원파등의 본격적인 이단종파의 침투로 인한 기성교단 붕괴 뿐 아니라 로마 카톨릭·이슬람교 등 타종교의 확산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데 교회의 리더들이 상당한 신학적인 지식이 없이는 교회의 발전 뿐 아니라 방어조차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가 있다. 리더가 올바른 신학 지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교회의 역사와 기독교 사상사 등과 함께 현대신학에서의 쟁점 등 신학의 기초 지식에 대한 습득이 필요하다.

. 교양 서적

다른 사람의 생애에 나타난 교훈을 자신의 삶을 위한 지침으로 만드는 과정을 간접 학습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책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책을 통한 간접 경험 과정의 목적은 독서를 통해 삶과 사역에 적용할 내면적 삶을 가르침으로써 역량을 키우는 데 있다. 높은 수준에 이른 지도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폭넓은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읽은 책을 통해 자신의 삶에 필요한 교훈들을 뽑아 적용할 줄 아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책을 통한 간접 경험 과정은 어느 개발단계에서도 보충할 수 있는 과정이다. 기독교 서적들 속에서 거의 모든 정보들을 취할 수 있으며 지도자들의 전기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외국어를 습득하여 다문화 가정을 전도하여 인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히브리어·헬라어를 학습 번역본의 오류를 수정해 주면서 깊이 있는 성경인도자가 될 수도 있다.

4. 현대 교회에서 평신도 리더 양성하기

교회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훌륭한 평신도 리더를 선발하고 교육·훈련시켜서 양성하고 은사를 개발하여 교회에 봉사토록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 교회를 섬기다 보면 뜻하지 않은 어려운 일을 겪게 된다. 성경에 기반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충성된 리더를 훈련·양성하여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확장하고 성도들을 온전히 세워야 한다.

. 평신도 리더의 선발

1)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목회자가 목회와 성경 가르침에 전념할 수 있도록 평신도 리더가 도와야 하며 이렇게 목회자 리더십과 함께 평신도 리더십이 상호 공존하는 복수 리더십을 개발해야 한다. 제직들의 관심과 협조를 얻어내고 그들을 교회성장의 실질적인 사역자로 만들기 위해서 평신도 리더를 잘 세우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 따라서 평신도 리더를 선발하는 데 있어서 사사로운 인정이나 체면, 일시적 이익이 선발기준이 되면 낭패를 볼 수   있으므로 앞서 언급한 성경 말씀을 근간으로 해서 일반적 · 합리적 기준에 따라 적절한 절차를 갖춰 선발해야 한다.

. 평신도 리더의 훈련과 양육

리더의 선발 못지 않게 지속적인 훈련과 양육이 중요한바 특히 평신도 리더는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으므로 끊임없이 훈련시키고 양육해야 한다.

1) 목적

평신도 리더 훈련의 최종 목표는 교회차원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며( 4:12), 개인 차원에서는 그리스도의 자엉한 분량에 이르는 것임( 4:13). 일반적으로 이러한 훈련의 목적은  일꾼 양성  충실한 직무 수행  하나님 나라의 확장 등이다.

2) 방법

평신도 리더 훈련의 방법은 각 교회의 특성과 상황에 맞게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은바 한적한 장소를 빌려 2-3일간 합숙하며서 훈련할 수도 있고, 3~4주간 주일 저녁예배 시간을 통해 훈련하는 방법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계획을 갖고 지속적으로 균형있는 훈련을 하여야 한다는 것임. 일반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음.

 사역자 수련회

각 사역자들을 분야별로 나누어 교회내에서 혹은 별도의 특별한 장소에서 시간을 내어 수련회 형태의 훈련을 시킨다.

 재직 세미나 및 정기 제직회

특별 강사를 초빙하여 강의와 토론 형식으로 진행하며 정기 및 비정기 제직 모임을 회의와 더불어 훈련의 시간으로 활용한다.

 사역자 훈련학교

해당 사역을 전문적으로 훈련하고 교육받는 학교로서 현재 국내외에 각 교단별로 혹은 통합교단별로 사역자를 훈련시키는 교육기관을 활용

 기도훈련 등을 통한 영성회복

교회의 리더는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금식기도 등 기도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해야 하고 신도들의 기도를 도와주어야 한다. 기도는 하루에 일정시간을 정하여 규칙적으로 해나갈 때 큰 효과가 있으며 1년에 1~2차례는 기간을 정하여 금식 기도를 함으로써 필요한 영성을 유지, 개발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교회차원 에서 심령대부흥회 등을 통해 영적인 재무장과 성령충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경통독반 운영

리더는 이단종파를 구별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종말론 등 주요 교리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자신이 정통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도들이 거짓 사도들에게 흔들리지 않도록 할 수가 있다. 이를 위해 정통교리에 입각한 신학공부를 해야 하며 신도들을 교육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교단 또는 교회 자체적으로 성경 통독반을 운영하고 평신도 리더를 포함한 신도들을 강제로 참여하게 하며 교회내 목회자 또는 외부 초빙으로 정통주의에 입각한 성경 읽기를 진행하는 것이 좋은데 성경 읽기는 매일 일정분량씩 읽는 방법과 기도원 등을 예약, 집중해서 읽는 방법 등이 있는데 통상 신구약 전체 읽기는 4 5신약읽기 1 2, 구약읽기 3 4일이 소요

. 평신도 리더의 은사개발

1) 은사의 정의

교회성장학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는 은사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어 주신 특별한 영적 능력이라고 했는데 이 정의는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담고 있다.  은사의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다(고전 12:11)  은사의 대상은 교회의 각 지체, 즉 성도이다(고전 12:7)  은사의 목적은 교회의 성장과 성숙이다( 4:12)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원하는 모든 교인, 특히 리더라면 은사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성장하는 교회, 건강한 교회에는 구원의 확신과 함께 은사의 확신이 분명한 평신도 지도자들의 봉사와 헌신이 필수적이기 때문임

2) 은사 사역의 유익

은사를 통해 교회를 섬기면 우선 자신에게 유익이 생기며 봉사하면 할수록 소속감과 가치감과 자신감이 확실해진다. 또한 은사로 사역하면 몸된 교회에 유익을 준다. 은혜를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나눠주는 관계가 형성 되려면 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은사가 활성화 되어야 한다. 또한 은사를 통해 교회를 섬기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 은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룬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베드로도 은사를 활용하여 하나님의 나타내는 사역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벧전 4:10-11)

3) 은사를 통한 사역의 대표적인 예

 중보 사역

평신도 리더로서 은사를 따라 일할 수 있는 대표적 사역이 중보 사역이다. 중보 사역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임. 중보 사역을 성실히 감당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함을 유지하고, 기도 시간 확보 노력이 절대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봉사 사역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리더의 기본적인 사역 가운데 하나가 섬기는 사역이다. 섬기는 사역은 광범위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데 교회환경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로부터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 구제하는 일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봉사는  삶의 모습을 통하여  가진 것을 통하여  교회일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여야 한다.

 삶의 모습을 통하여(고전 11:1) -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리더는 언제 어디서든 그리스도인임을 자랑하고 당당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교회안과 교회 밖의 생활이 이중적인 사람은 결코 덕이 될 수 없다.

 가진 것을 통하여( 19:12-27) -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주어진 소유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웃의 기쁨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겠다는 분명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건강, 시간, 재능, 관심도 같은 차원이다.

 교회일에 참여함으로(고전 9:23) -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또 교회의 부흥과 성장, 발전을 위해 교회 차원에서 준비하고 진행하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교회 일에 부정적인 자세보다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참된 봉사자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벧전 4:11) -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다( 3:3).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양육 사역

가르치는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뜻을 밝히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깨우치는 일이다. 이 은사를 가진 제직은 배우는 사람들(성도)이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도록 바르게 인도해야 한다.

또한 평신도 리더는 다른 사람을 제자훈련 시킬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제자훈련을 하는 리더는 봉사의 정신을 갖고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제자훈련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되어야지 사람을 경직된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꿰맞추는 것이 되어서는 안됨. 그러므로 제자훈련에는 다른 사람의 신앙과 삶을 주관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신앙의 성장을 도우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리더는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개발, 연구 하고 자신의 역량 또한 강화해 나가야 한다.

 행정 사역

행정은 교회 전반을 관리하는 일인바 로마서 12 8절에는 다스리는 은사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이 행정이란 공동의 목표를 합리적으로 달성하려는 협동적 집단의 행동인데 곧,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일을 성취시키는 것으로서 계획 · 조직 · 지도 · 운영의 네 단계가 있다.

 계획 : 특별히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고전 14:33) 청지기들은 모든 일을 수행할 때 철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조직 : 조직이란 주어진 환경속에서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들이 복합적으로 연관을 맺으면서 활동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활동체계. 즉 목표의 성취를 위해 사람들을 적절한 부서에 배치하는 과정

 지도 :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적절한 행위를 취하게 한다

 운영 : 현재 진행중인 업무가 계획대로 되어 가는지를 확인하여 계획과 실제 사이에 편차가 있으면 수정하는 활동

 선교 사역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1:8)고 한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타국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개인 구원과 교회 개혁과 사회 변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천국 확장운동을 해야한다.

이러한 선교훈련으로는 평신도 리더가 일정 교육을 거쳐 직접 선교사로 나가는 방법, 기도로 지원하는 방법, 물질을 보내는 방법, 현지인을 초청하여 선교사로 양육시켜 재파송하는 방법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4) 은사 사역의 바람직한 자세

 모든 은사는 사랑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한다( 5:13).

 각 사람의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겸손히 행해야 한다(고전 7:7)

 다른 사람을 섬기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 기쁨을 누려야 한다(살전 2:20).

 모든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한 청지기와 같이 충성을       다해야 한다(벧전 4:10).

 모든 은사는 질서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고전 14:40).

. 결론

1. 요약

현재 한국교회는 안팎으로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평신도 리더의 리더십이 매우 중요함.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교회의 운영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주요 직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평신도 리더의 자질에 대해서 고찰하여 리더 자신에게는 스스로 중요한 직분을 맡을 수 있는 소명의식을 갖도록 하고 교역자나 일반 신도들에게는 자질을 갖춘 리더를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도록 하여 교회의 원활한 운영을 도모하고 교회 외적으로 복음 전파에 주력케 하도록 한다. 리더는 먼저 자신의 은사에 따른 직분이 소명의식을 갖춘 결정인지를 스스로 판단하여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방법을 정하여야 하며 중복 확인과정을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실수 없이 확실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리더는 자신의 은사를 정확히 판단하여 이를 발전시키고 보다 잘 쓰임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은사는 자신의 은사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은사도 분별하여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는 능력도 포함될 것이다. 리더의 자질과 관련 먼저 성경내에서 언급되고 있는 리더의 자질을 열거하고 현대적 의미에서 재해석하였으며 일반적인 덕목을 탁월함, 진실함, 근면함, 관대함 등의 4가지로 나누어 보는 한편 미자격자를 골라내는 기준과 관련 일반적인 장애물을 6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았으며 현대교회에서 기피해야할 유형을 5가지로 분석하였다. 

리더가 여러 가지 부정적 측면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고 심지어는 사법심판을 받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문제를 제도적으로 방지하는 리더의 자격이나 덕목을 판단 하는 것만큼 결함이 있는 리더를 선발하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최근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권사·집사 등 직분자들을 위주로 신앙생활에 깊이를 더하기 위하여 신학교에서 별도로 신학공부를 하기도 하고 초교파적으로 성경통독 운동 등 교회내외적 학습활동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평신도 리더들도 상당수준의 신학적 지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수많은 이단종파가 난립하는 개신교계의 사정을 고려할 때 평신도 리더가 이단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학 지식과 필요한 학문은 성경읽기·신학공부·외국어 습득·교양서적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평신도 리더의 자격과 조건에 따라서 현대 교회에서 필요한 평신도 리더의 양성과 관련하여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냉정한 기준으로 선발하여야 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이들을 양육하고 교육시켜야 하며 한편으로는 이들이 내적으로 충만한 은사를 개발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헌신토록 해야 한다.

2. 제언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에서는 평신도 리더의 자질 등과 관련해서는 비교적 직분자의 선거를 통한 선출이라든지 신앙활동 등에 대한 평가를 통해 공정하게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리더를 훈련시키고 학습시켜서 보다 발전적으로 교회운영 및 선교활동을 하는 체계적인 기획 등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실에서 비신도의 입장에서는 교회에 대한 불신이 쌓이고 교회내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과 시비가 그치지 않아 교회밖 세상에서 보다 더 심각한 법적 분쟁 등까지 흔히 발생하는 것으로 볼 때 자질 있는 평신도 리더를 선발과정부터 엄격한 평가를 거쳐야 하며 개별 직분에 대한 충실한 임무수행과 함께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교육·훈련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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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차 산업혁명시대에 기술은 극단적으로 발달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시대에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인 영성과 인성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교회가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해나가야 한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 사회에서 교회는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가? 공동체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 따라서 지교회 중심주의를 타파 하고 공동체의 역할을 강화해야 할 것이며 종교의 세속화를 막아야 할 뿐 아니라 급변하는 현실을 직시하여 거기에 따른 변화를 발빠르게 대처해야 한다. 작금의 교회의 위기는 교회 안의 의식이 교회 밖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옛 가치만을 고수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을 과감하게 타파하여야 한다. 교회는 4차 산업혁명 시기를 선도하여 첨단 기술에 열린 자세를 가지고 영적으로 시대를 선도해 나가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것과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허락하신 것은 신앙을 개인 사유화하지 말라는 지엄한 명령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교회가 이러한 올바른 가치를 잘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오는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기 위해 4차 산업 혁명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신학 실종으로부터 회복하여야 한다. 신학이 실종될 수는 있으나 개개인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게 존재할 수 있는데  신학이 실종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더 이상 교회안에서 신학이 그 중심적인 축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학의 실종은 개인주의에 영향도 크다. 신학이라는 학문에 영향을 끼쳤다기 보다 신학이 가져다 주는 방향성과 역사성, 그리고, 정체성이 개인화되고 사유화된 경험주의적 신앙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세속화되고 사유화된 신앙을 의미하는데 그런 신앙은 더욱 더 사람의 내면을 충동질할 것이고 그 충돌질된 상황은 은혜와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변질되어 복음이라는 옷을 입고 광란의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신앙고백 실종에 대해 회복하여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모든 신학이 중심을 신앙고백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신앙고백적 내용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데 진리의 말씀이 삶 속에 성육신화 되어 기독교적 삶의 실천으로 구체적   적용이 되어야 한다. 신앙고백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란 성경 안에 포함된 하나님의 계시 전체가 총 망라되어 성경의 다양한 부분을 통전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각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와 의지를 계시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명료  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성경을 토대로 과거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 일하시고 역사 하신 사실로부터 폭풍우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라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SNS 등 밀레니엄 세대와의 선교 소통방법이 획기적으로 개선됨에 따라 그들 과의 선교소통방법이 증가한 것을 기회로 활동한다. 역경을 축복으로 여기는 교회문화를 활용하여 교회에서 성장을 위한 학습을 강화하고 좋은 환경과 사역 및  봉사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교회 문화를 통해 선교활동을 강화한다. 교회내 부문별 전문가 멘토링 제도를 도입하여 전인적 소그룹활동을 시행한다. 이로써 큰 교회라도 작은 교회처럼 가까이에 전문가가 이끌어 주는 시스템을 만든다. 이 시대에는 영성이 최고의 무기임을 적극적으로 인식시킨다. 완벽한 영성 및 공감은 예수님과 성경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거룩한 복음으로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선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세상을 더욱 넓게 펼쳐 나간다. 세상의 문제가 많아지면 교회가 할 일이 더 많아 진다. 앞으로는 인공지능과의 문제까지 생길 전망이므로 잘 돌봐주고 위로해주고 용기를 줘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변했지만 예수님 말씀은 2000년전 그대로이다. 오히려 가장 인간답게 사는 세상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 공동체 생활양식은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며,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세상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으로 삶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서신서들은 분명 교회가 사랑 안에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복음의 향기가 널리 퍼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불신의 시대에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이 상식과 가장 진보된 과학에 부합되는 최고의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임을 역설  해야 하며 이 영적인 싸움에 맞게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며 인간 실존에 침투해 들어오셔서 인류 구원의 원대한 계획을 실행해  가고 계시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능력과 지혜와 지식 근원이시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악한 영들은 일곱 길로 달아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죽음, 이성의 죽음, 진리의 죽음, 자아의 죽음 등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망에 빠져 좌절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반영한다. 이에 대한 치료는 오직 기독교적 유신론에 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야 한다. 우리는 핵 시대를 살아가면서 삶의 온갖 변화와 불확실함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여전히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하심을 지닌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 들에 대해 우리는 성서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결하여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그들 주위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정돈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안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환경을 조정하신다는 생각은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다.

< 포스트 모더니즘이 기독교에 끼치는 긍정적 영향 >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하고 복잡한 정보를 바르게 필터링할 수 있으면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면서 기존에 비판없이 받아들였던 것을 다시 객관화 시킬 수 있으므로 부패하고 타락한 현재의 기독교를 근본부터 재정립할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직시하면 이것이 표면적으로 우리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기독교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근간이  흔들리기 전부터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포스트모더니즘에  책임을 전가하기 전에 기독교 자체의 개혁적 비판을 해야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체로 낙관적 자연주의를 정확히 비판했으며 언어가 권력과 연루되어 있다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또한 사회적 조건이 우리의 인식 작용을  좌지우지  한다고 함으로써 인간이 가진 제한성을 깨닫게 해주는 긍정적 작용도 하고 있다. 극단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는 논리와 이성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성은  통하기 때문에 예술에 기독교적 이념을 가미하여 전도하면 효과적일 수 있다. 향후에는 유일한 대안일 될 수도 있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예술인이 자기의 예술에 기독교적 신앙을 표현했을 때 그 예술인을 좋아하는 신도와 비신도가 다 그를 따를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한가지의 특징인 제 4차 산업혁명을 기독교에 긍정적  이고 적극적으로 대입할 수 있다. 초지능의 시대에는 감성과 영성이 중요해진다. 교회는 영성을 개발하고 널리 홍보하여 가치관의 혼란시대를 긍정적으로 선도해 나갈 수 있다. 초관계의 시대를 맞아 SNS 등 급속도로   빨라진 관계성을 선교에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인터넷의 세계는 3.5차원이 라고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 포스트 모더니즘이 기독교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 >

1980년대부터 미국사회에서는 신학에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신학의 정체성이 자기가 경험한 것만으로 한정하면 개인주의화 하게 된다. 기독교의 사상, 정통성, 역사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며 자신의 가치만이 최고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성을 띤다. 신앙이 편협해지고 이기적이 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과학기술 만능주의와 빅데이터가 보편화 되는 시대를 맞아 기독교는 절대 진리의 붕괴로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 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과의 가치관이 충돌되어 고정가치가 변화되는데 다원적인 실재들이 현재하고 있기 때문에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기독교의 가치가 사회적 이슈로부터 밀려나게 됨에 따라 사회에서 마주치는 고통과 고민을 교회에서 해결하지 못해서 교회 이탈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고 그에 따라 교회는 사회도피처로서의 왜곡된 이미지로 변질된다. 종교개혁을 촉발한 중세교회의 오만과 폭력이 현대사회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교회와 신앙은 권력에 편승하며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데 이용  된다. 현대 기독교의 부패와 부정이 기독교의 순수성을 잃게 만든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타 종교가 급부상하여 종교의 다원주의를 형성하고 각각의 종교들이 지역적 종교의 위치에서 세계적 종교로 확대된다.

현대인의 생각에 공허함이 증가하면서 이를 채우기 위한 절대가치가 위기를 맞는다.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은 기독교 논리에 대해서 논리적인 모순을 지적하는 것도 아닌 왜 기독교를 강요하느냐는 방식으로  거부한다. 이러한 지적 딜레마는 정형화된 사고에 대한 반동이며 지나친 문명화에 대한 반역으로 볼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목적의 상실임과 동시에 해체주의이다. 우리 자신과 자연, 우리 자신과 신적 질서, 개별 집단과 인간 공동체 사이의 괴리에 대해 저항하면서 과거의 범신론으로 복귀하거나 또는 자연과 인간의 본성일체 등을 주장하면서 종교를 세속화하여 신앙과 신성의 영역을 암묵적 부인하고 세속적 인본주의를 주장한다. 역사의식이 상실된 자기 중심적인 신앙이 발달하다 보니 과거 전통을 상실  하여 방향감각을 잃은 채 다원주의 신앙에 몰두한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도덕적 이상주의에 머물러 급변하는 시대를 외면한 채 시대의 암적존재로 변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말을 말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속에 숨은 의도를 간파하려고 하기 때문에 복음전파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NKRV) 라는 말씀과 같이 복음은 말로 전해야 하는데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전도의 위기 시대이다. 저출산 및 고령화로 주일학교가 감소한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젊은이들은기독교가 자신들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정보나 지식의 공급망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어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보다는 교회 밖에서 찾는 가치가 훨씬 늘어나고 있다. 교회가 답답한 삶을 해결해주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며 4  산업혁명으로 인한 첨단 기술, 특히 인공지능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보수적인 생각에 머물러서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다이러한 급변하고 기술 혁명시대를 선도하려 하지 않고 비관적인 소모적인 논쟁에만 몰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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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1.    서론

1)    문제의 제기

2)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3)    연구의 방법과 범위

2.    기독교적 세계관의 이해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    기독교 유신론적 세계관의 구조

3)    세계관의 실천적 의미

3.    본론

1)    고린도교회의 당시 시대상황 분석

2)    고린도전서의 저술 배경 및 목적

3)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세계관

4)    현대교회의 문제점과 대책

4.    결론

< 참고문헌 >

 

1.    서론

1)    문제의 제기  

현대교회는 실로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분파로 인한 갈등과 세상법정에서의 송사, 음행 문제, 우상숭배, ‘외국어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로서의 방언(γλῶσσα)의 난무, 교회의 무질서 등등 현대교회에서 벌어질 수 있고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수 많은 문제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지는 제반 문제에 대해 이에 대한 견해와 해결책을 제시한 고린도전서의 분석을 통해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재발견하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도바울은 초기 기독교 신학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의 세계관 자체가 기독교 신학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고린도교회의 문제점과 대책을 적시하여 보낸 고린도전서는 현대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세계관(가치관)을 일정한 준거틀에 맞추어서 분석하고 이를 현대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에 대입해봄으로써 해결책을 찾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해석상에 논란이 많은 현대교회의 방언(γλῶσσα)에 대해 사도 바울의 견해가 어떠하였으며 그것이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지 여부를 도출해낼 것이다.  

2)    연구의 목적

필자는 한국교회내 분란으로 사분오열되어 다니던 교회를 못 다니게 된 경우를 한국에서도 겪었고 캐나다에서도 겪었다. 고린도교회는 현대교회에서 발견되는 모든 문제, 즉 분파, 음행, 알 수 없는 소리로서의 방언 등을 안고 있는 데다가 해결책까지도 제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 전서의 당시 시대상황을 분석해보고 바울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 또는 가치관을 분석함으로써 현대교회가 겪고 있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고린도교회의 방언 문제 등 실로 중요한 여러가지 해석들이 나올 수 있어서 가치 있는 연구가 될 전망이다. 여기서는 12~14장까지 은사와 관련한 바울의 견해, 특히 14장에 나오는 방언(γλῶσσα)과 관련한 바울의 시각에 대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바울의 여러가지 교회의 문제를 대하는 시각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적으로 교회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그 대책을 찾는 것을 본 논문의 목적으로 한다.

3)    연구의 방법과 범위   

본 논문에서는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현대교회의 은사 문제, 특히 방언 현상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위해 먼저 고린도교회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고린도전서를 저술한 이유를 고찰해 볼 것이며 사도 바울의 세계관을 고린도전서를 위주로 준거틀(제임스 사이어의 7가지 측면)에 대입해 탐구한 뒤에 현대교회의 문제점들과 그 대책을 살펴보는데 특히 12~14장의 성령의 은사에 대해 바울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으며 외국어뜻 모를 소리로서의 방언(γλῶσσα )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를 통해 현대교회에 만연해 있는 방언현상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그것의 정체가 뭔지를 고찰해 볼 것이다. 이렇게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세계관을 분석할 것이지만 일부 세계관은 로마서 등 여타 성구를 참고함으로써 고린도전서가 다 커버하지 못하는 바울의 세계관의 문제를 고찰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현대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것인데 본 논문에서는 특별히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쓰인 γλῶσσα의 단수, 복수로 의미가 갈리는 것을  집중분석하여 명쾌한 성경적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2.    기독교적 세계관의 이해  

1)    세계관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세계관이란 한 사람이 자신의 삶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을 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이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실제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이든 비일관적이든) 보유 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다.”[1] 라고 정의한다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궁극적 절대 주권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 ②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③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④ 죽음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⑤ 지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⑥ 윤리는 무엇을 기초로 하고 있는가 ⑦ 역사는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라고 볼 수 있다.  

세계관이란 것은 아주 실제적인 것으로 이 세상에 대한 신념의 총합이고 우리의 일상적인 결정과 행동을 지시하는 커다란 그림이다. 그래서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른 여러 가치관과 갈등 속에 있는 모습을 조명하고 불신 시대 속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어떻게 수립하며 이에 대한 실천적 자세를 어떻게 갖추어 나갈지를 알려줄 뿐 아니라 그것을 지속시켜 준다. 세계관은 우리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인간은 이와 같은 방향감각이나 인도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식욕이나 성욕보다도 삶을 인도하는 관점을 더 근본적으로 필요로 한다.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노동, 사회집단, 교육과 같은 소위 세속적 문제들도 포함한다.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문화의 전 영역으로 확장하여 연관시켜야 하는 것이다.[2]

2)    기독교 유신론적 세계관의 구조와 방향

기독교적 세계관을 분석해보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창조, 타락, 구속이 그것  인데 알버트 월터스는 구조와 방향 이란 화두를 꺼내면서 구조란 창조자에 의해 의도된 방향을 얘기하는데 다시 말해 창조자의 원래 창조 의도에 더 가깝게 가도록, 구속 받고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 관점을 그는 자신의 스승인 에반 루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구조를 다른 말로 하면 창조의 원구조라고도 할 수 있고 방향은 왜곡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통틀어 가르치는 말로 이해해도 된다고 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제공하는데, 이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도 성경적이다. 세계의 현상들을 구조와 방향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곧 성경의 교정렌즈를 통해서 실재를 본다는 것인데, 이 교정렌즈는 어느 곳에서나  선한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가 그것을 회복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3]

3)    우리 삶에의 실천적 대입  

세계관은 우리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인간은 이와 같은 방향감각이나 인도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식욕이나 성욕 보다도 삶을 인도하는 관점을 더 근본적으로 필요로 한다.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빛이 삼각 프리즘을 통과하여 그 색깔을 드러내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노동, 사회집단, 교육과 같은 소위 세속적 문제들도 포함한다.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문화의 전 영역과 연관시켜야 한다.[4]

3.    고린도교회의 당시 시대상황 분석

1)    고린도교회의 당시 시대상황 분석

고린도는 헬라어 읽기로 ‘코린도스’(Κόρινθος)이며 ‘뿔’이란 뜻이다. 항구 도시로 성경 시대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해상 교통과 무역 중심지였고, 동시에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각 나라와 민족의 우상들이 총집결된 현란한 우상 도시였다. 한창 번성할 때는 2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이곳에서 고대 운동 경기 등이 치뤄지기도 했다. 또 고린도에는 대략 1천 명 정도의 신전 여사제(창녀)를 거느리고 있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어 온갖 음행이 자행되기도 했다. 학문(철학)과 우상 숭배가 극명하게 대립되며 조화를 이루던 고린도에 사도 바울이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제2차 선교여행 때였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 → 베뢰아 [5]→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본도 출신의 신실한 전도자요 천막 제조업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도움을 받으며 고린도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였다. 고린도에서 마게도냐로부터 온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고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으로 복음 사역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행 18:1–8).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18개월을 체류하며 사역하였다(행 18:11). 고대 세계에서 고린도는 지중해 연안을 항해하는 헬라, 애굽, 시리아, 가나안, 아시아 출신 선원들이 모두 다 체류하는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마치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자연히 타락한 문화와 가증스런 이방 종교들의 집산지가 될 수밖에 없었고, 항상 요란하고 시끄러웠다. 게다가 항구 도시의 특성상 고린도 사람들은 격정적이고 다혈질 적인 성향이 강했다.[6] 이들은 여러 언어가 섞인 외국어를 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2)    고린도전서의 저술 배경 및 목적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령의 은사를 그들의 헬라적 이원론적 사고로 이해한 데 있었던 것 같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영과 물질(육)을 엄격히 가르는 헬라적 이원론에 젖어 있어서, 바울 복음의 “시간적 이원론”을 “본질적 이원론”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자신들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 하늘의 축복된 삶을 현재 완전히 획득하는 것으로 보고, 성령의 은사들이 이러한 견해를 확인해 주는 것으로 이해 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장차 도래하리라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이미 얻은 것으로 믿고 지금 벌써 그 속에서 왕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고전 4:8). 그들은 또 자신들이 성령을 받아 육신의 제약을 벗어난 영적 존재들이 된 것으로 믿었다(고전 3:1). 그들은 세례 때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고 부활하였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그들 중 방언과 같이 현저히 나타나는 은사들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자신들이 받은 은사들을 서로에게 자랑하며, 교만과 멸시, 시기와 분쟁의 분위기를 만들고 예배 때 그 방언과 예언을 경쟁적으로 해대어 일대 혼돈을 빚곤 하였다(고전 12~14장). 성령을 통하여 얻은 “지식”으로 그들은 우상(곧 이방인들의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우상의 신전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참여하고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자유를 만끽했다(고전 8, 10장). 그들은 그들의 영혼이 벌써 하늘의 구원을 얻었으므로 그들의 몸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 시절의 문란한 성생활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문란한 고린도의 이방인들조차 할 수 없는 짓까지도 하게 된 것이다(고전 5:1~11; 6:12).[7]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질서를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저술 배경 및 목적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고린도에 보낸 서신의 수가 몇 개며 고린도전서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폭넓게 제시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게 다섯 통의 편지를 쓴 걸로 보인다. 첫 번째 편지는 고린도전서 5:9에 언급된 ‘이전 편지’(지금은 없어진)이고,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고린도전서가 뒤따른다. 세 번째 편지는 고린도후서 2:3–4, 7:8, 12에서 말하여지는 (고린도 교인들로 근심하게 한-역주) ‘통렬한’ 편지이고, 네 번째 편지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고린도후서 1–9장이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편지는 사실상 고린도후서 10–13장에 보존되어 있다.[8]물론 서신의 수에 대해 여러가지 반론이 있다. 두 통이라든지 세 통이라든지, 그러나 어떤 설을 취하든지 고린도전서내에 있는 내용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보낸 편지이다.(고전 1:2) 여기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은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의 모습을 잘 지적하고 있다. 교회란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았으며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세속에 물들면 하나님의 교회일 수가 없을 것이고 교회는 오히려 세상을 변혁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1]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김헌수역 (서울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7), 23.

[2]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양성만·홍병룡 역 (서울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7), 28-34.

[3] 알버트 월터스, 177-178.

[4] 알버트 월터스, 28-34.

[5] 가스펠서브, 성경문화배경 (서울 : 생명의 말씀사), 1579-1580.

[6] 가스펠서브, 성경문화배경

[7]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 (서울 : 두란노아카데미, 2008), 21–24.

[8] 크루즈 콜린, 고린도후서 왕인성 역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39–40.

3)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세계관(가치관)

서론에서 밝힌대로 여기서는 제임스 사이어의 세계관에 대한 7가지 준거틀에 맞추어서 고린도 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세계관(가치관)을 고찰할 것인데 고린도 전서만으로 부족할 경우에 한하여 필요에 따라서 로마서 등 여타 성구도 같이 인용하기로 한다.

a. 궁극적 절대 주권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

바울은 궁극적 절대 주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 주시는 하나님(고전 1:3) 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심(1:2)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삼위의 인격 이시며,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전지하시고, 주권자 이시며 선이시다.[1]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도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1:1) 바울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물이었다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어서 우리를 부르시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다(1:9).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에 나타나셔서 우리에게는 구원이 되시었다(1:18). 이 세상의 모든 지혜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1:21).

b.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울은 로마서 1 19~20절을 통해 우주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자신을 계시 하셨는데 사람은 그가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을 환히 드러내 주셨다고 한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게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모든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는데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시며,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살피신다(고전 2:10).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사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특성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데 첫째로 우주를 질서 정연하게 창조하셨다는 것과 그 체계가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주가 프로그램화 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주 운행의 전개 유형에 끊임없이 관여하신다. 만일에 우주에 질서가 없다면 우리의 결정은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의 결정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2]   

c.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이다. 창세기 1 1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 죽음이 들어왔다. 고린도 전서 15 21절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온다고 하면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하고  있다. , 인간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죄를 지어 죽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존재인 것이므로 죄를 자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인간 타락의 중심에는 죄의 근원인 우상숭배가 있다. 바울은 광야에서 멸망한 이유를 우상숭배한 결과로 경고한다 (고전 10:5-7). 우상숭배는 성적인 타락과 연결된다. “하나님  께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성적인 죄에게 넘겨주신다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신자들은 특히 성적 순결의 측면에서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언급[3]하고 있는데 로마서 1 23~26절이 번갈아 가면서 우상숭배와   육체적 타락을 두 번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  라서가 아니라 우상 숭배, 즉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정욕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버려 두다로 쓰인 헬라어 παραδίδωμι 내어 주다로 번역해야 한다. ‘그냥 놔두다라는 의미가 아닌 적극적으로 죄에 빠지도록 하였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숭배라는 잘못을 저지른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음란과 정욕에 빠지도록 하셨는지를 확인해 봐야한다.

바울은 우상 숭배의 배후에는 사탄, 즉 어둠의 영과 타락한 세상 권세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고전 10:19–22).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말을 따름으로써 영적인 간음을 행했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우매해지면서 우상숭배를 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육체적 타락에 넘어 가도록 놓아 두시고 또한 역리적인 육체적 타락까지 이르게 하신다.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5:31-32) 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거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왜 수치와 두려움으로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렸는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

d. 죽음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죽음 뒤에 있을 부활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은 썩을 것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며,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난다. 또한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것으로서 육신의 죽음 뒤에 우리는 다 잠들 것이 아니고 다 변화할 터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도리 것이고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51~2)이라고 한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비록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훼손되었다. 한편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하시고 선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시작하셨다. 물론 인간은 이 구속의 사실을 접하고 그 구속을 거부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사망시 인간은 변형된다.하나님과 그분 백성의 상태와 같이 영화된 존재로 변하여 하나님과 같이 살게 되거나 영원히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지옥에서 사는 존재로 변하게 된다.[4]

e. 지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아담과 하와가 행한 반역 행위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죽음에서 그치지 않고 그 후손들을 긴 세월 동안   인격적, 사회적, 자연적 혼란에 빠트렸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형상이 모든 면에서 훼손되었다. 인격의 면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능력이나 지성의 지시대로 자유로이 자신의 길을 결정할 능력을 상실했다. 인간의 지성 역시 손상되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주위 세계에 대해 완전히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없으며, 논증 역시 항상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으로 구속될 수 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와 무한한 은총으로 사람들은 새 생활의 가능성을 얻었다.[5]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모든 지식이나 지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고 한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이고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는데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고전 1:21)이라고 하였다이에 덧붙여 사도 바울은 여러가지 신령한 은사 역시 같은 성령을 통해서 온다고 주장한다(고전 12:4).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시는데(12:8),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12:7)이라고 결론짓는다.

f. 윤리는 무엇을 기초로 하고 있는가

윤리는 초월적이며 선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의  유일한 원천이시다. 물질세계 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서도 오직 하나님이 원천이시다. 하나님은 선이시며, 이 속성을 인간에게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율법과 도덕의 원칙에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역시 본질적으로 도덕적 존재이며, 우리 행동에 도덕적 범주가 반영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6] 바울은 자신이 삯을 받지 않고 헌신하는 것 그 자체를 자신이 보상받을 덕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독백한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819)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 하는데 이러한 의식을 갖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한다(9:16).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윤리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며 하나님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g. 역사는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일직선적 종말론적 구속사를 경륜하고 계신다. 창세기 2 4절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놀라웁게도 천지창조 자체를 인간 구속의 역사와 연결시키신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우선 족보 (복수형), 계보를 뜻하는 תוֹלְדוֹת(톨레도트)를 창세기 안에서 찾아 보면 창 2:4(천지 창조 내력),  5:1(아담 자손),  6:9(노아의 족보),  10:32(그 백성 들의 족보), 11:10(셈의 족보),  25:13(그 세대),  7:2  (야곱의 족보) 에 나오는데 한글 번역으로는 족보, 세대, 계보, 자손, 후손, 내력, 대략 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지만(실제로 한글 개역개정판에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원어로 분명히 같은 단어를 쓰는 것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인류의 족보와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천지창조는 인류 구속의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2:4)라고 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거룩한 선포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바울은 종말론적 구속사를 설명하면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고전 15:22)이라고 하고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인데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며(고전 15:23) 그 때가 마지막인데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모든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24)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진다 (13:10)고 하면서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지나,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사랑은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한량없이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ἀγάπη)이다.

4)    현대교회의 문제점과 대책 

< 분파의 문제 >

서로 다른 생각으로 다투고 있는 고린도교회 신도들에게 바울은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쳐 달라고 간곡히 당부한다(1:10).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받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자들의 모임이며, 그러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교회가 분파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여러 갈래로 찢는 행위이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몸을 부인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와의 세례를 통한 연합을 부인하는 행위이다.[1]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느냐라고 통렬하게 질문하면서 신도들 간에 화합할 것을 당부하였다.

< 음행의 문제 >                      

바울은 고린도 전서 5장에서 음행과 관련하여 신랄한 어조로 비판을 하고 있는데 마침 고린도교회에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신도가 있다고 하여 교회에서 이를 쫒아 내지 않은 것을 신랄히 비판한다(2). 그러면서 신도라 하는 어떤 사람이 음행하는 사람이거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거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사람을 중상하는 사람이거나, 술 취하는 사람이거나, 사람을 중상하는 사람이거나, 약탈하는 사람이면, 함께 먹지도 말라고 경고하면서(11) 그 음행한 자를 내쫓으라고 다시 한번 독촉한다(13).

< 우상숭배의 문제 >

바울은 10장에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불순종하여 벌 받은 것을 하나 하나 거론하면서 고린도교회의  우상숭배 문제를 경고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우상숭배하고 간음하며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 파멸을 맞은 것을 예로 들며 서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여기서 서 있다는 표현은 믿음 안에서 있다는 표현으로 한 번 세례를 받았다고 영구히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계속 의지하고 순종하는 믿음의 관계 속에서 만이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상숭배를 멀리하라”(10장 14절). 바울은 7절 에서 언급한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이제 본격적으로 펼친다. 여기서 우상숭배란 신전 제사에 참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신전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성찬식에 참여하는 예로 들어 설명한다. 여기서 멀리하다는 헬라어 퓨고(φεύγω)는 ‘도망가다’, ‘피하다’라는 뜻이므로 바울은 “우상숭배로부터 도망가라”고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는 곳이나 계제를 적극적 으로 피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2]

< 은사의 남용의 문제 >

12장을 은사장이라고 한다. 교회는 획일성을 추구하지 않고 다양성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추구하는 곳이다. 그래서 은사가 다양하게 주어지고, 주어진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모두 귀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어떤 은사를 받았는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12장 1~2절에서 바울은 신령한 은사에 대해 고린도 교회교인들이 알기를 원한다면서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 벙어리 우상들에 의하여 휩쓸려 갔었다.”고 한다. 이 구절은 고린도교회의 은사, 특히 방언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울은 진정한 성령의 현상[3]/역사/은사를 인식함에 있어 먼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그릇된 시금석 될 말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신비스럽고 초자연적인 것 같은 체험이나 황홀경의 체험 등을 성령의 현상이나 역사의 체험으로 생각한다.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여 신비스러운 황홀경에 빠진 상태에서 하는 방언이나 예언을 성령의 특별한 나타남이요 역사라고 열광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투어 방언하고 예언하여 교회의 예배가 혼돈에 빠지곤 하였다. 이것은 고린도를 포함한 전체 헬라 세계에서 신의 영이 임하여 일으킨다고 본 황홀상태를 높이 평가하고, 황홀경에 빠진 상태에서 디오니소스(Dionysos) 같은 신을 예배하던 전통의 반영이었다.[4] 이로 미루어 분명히 고린도 전서 14절에는 ‘외국어’로서의 방언과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황홀경의 발화?)”로서의 방언이 같이 쓰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쓰인 방언(γλῶσσα) 외국어만이라는 주장을 일축하는 것이다.

< 은사로서의 방언(γλῶσσα)에 대한 고찰 >

바울은 12장 은사장과 14장 예언을 권고하고 방언(γλῶσσα)의 남용으로 인한 교회의 무질서를 질책하는 한 가운데 13장에서 돌연 사랑을 예찬한다.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는 자세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령의 은사이며 사랑을 가진 자는 자랑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주장하지도 않을 것이고 경쟁을 조장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예언의 은사를 우선적인 성령의 은사로 부각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언의 은사는 예언하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회중 전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다고 한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하나님의 가족 전체에 유익을 주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사랑의 자세를 가지고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때에라야 은사를 소유한 사람에게 그 은사가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만약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과시하거나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은사는 사랑이 바탕이 된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달성되는 하나님과 협력 관계는 결국 가족 전체를 이롭게 할 것이다.[5] 결론적으로 바울은 은사는 사랑 안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며 또한 방언이 “외국어”이든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이든 사랑과 질서 안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현대교회에 만연하여 있는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γλῶσσα)에 대한 그의 견해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γλῶσσα가 복수로 쓰일 때 외국어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단수로 쓰일 때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로 씌였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세 번의 방언(γλῶσσα)이 전부 복수명사로 쓰인 것으로 증명된다. 이렇게  γλῶσσα의 단수와 복수 문제에 대한 해석을 혼동해서 온갖 종류의 해석이 난무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뜻 모를 알 수 없는 소리”도 당시 고린도가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각 지방에서 외국인이 빈번하게 왕래하여 여러 외국어가 불규칙하게 혼합된 지방언어라는 설도 있고 현대 교회에서의 뜻 없이 반복되는 음절로 기도하는 “방언”현상이라는 설도 있다. 사도 바울은 최소한 9개국어 이상은 했을 것이고 이 외국어 능력은 당시로서 온 세계  였던 지중해 연안에서의 그의  역사적 선교에 없어서는 안될 은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여러 외국어를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만(18) 만 마디 외국어보다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했다(19).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사람이 모두 외국어를 할 수 있기를 바랬으나 그것이 통역이 되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다면 그 보다는 예언이 더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5) 외국어 하는 것은 막지는 말되 예언하기를 열심히 구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37). 그러면서 그는 만약에 자신이 고린도 신도들에게  외국어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을 전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유익이 안되지 않겠냐고 반문하면서(6) 온 교회 신도들이 모여서 외국어로 말하고 있으면, 초신자 들이 미쳤다고 할 것(23)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외국어를하는 것 자체는 은사이지만 교회안에서는 그것보다 예언을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반면에 unknown tongue으로서의 γλῶσσα에 대해서는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god, θεός)에게 말하는 것인데 영(spirit, πνεῦμα)으로 비밀을 말하지만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한다(2)”고 하고   자기에게만 덕을 끼칠 뿐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끼친다(4)”고 하였다. 또한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몰라서 말을 해도 어떻게 남에게 전달 되겠는가(9)라고 반문하고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할 것(13)이며 방언으로 말할 때는 둘 또는 많아야 셋이서 말하되 차례로 하고 한사람은 통역을 하라(27)고 하면서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하지 말고 집에서 자신과 하나님에게 할 것(28)을 권면한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했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내가 만일(ἐάν)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하면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내 마음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할 것(14)이라고 하고 교회에서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할 바에는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 하기를 원한다(19).”고 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하고 있는 unknown tongue에 대해 정확히 그것이 뭔지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일단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 현상을 대하고 있지만 확실치 않기 때문에 통역이 있을 경우에는 해도 좋지만 제한적으로 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을 함이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줄 알고 방언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적인 행위(privacy)이므로 금할 것까지는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1] 김세윤, 47.

[2] 김세윤, 245–246.

[3] 김세윤, 308–309. 

[5] 데이비드 A. 드실바, 신약개론 박상민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773–775.

결론

본 논문에서는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현대교회의 은사 문제, 특히 방언 현상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위해 먼저 고린도교회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고린도전서를 저술한 이유를 고찰해 보았으며 사도 바울의 세계관을 고린도전서를 위주로 준거틀에 대입해 탐구하였고 특히 12~14장의 성령의 은사에 대해 바울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으며 외국어 뜻 모를 소리로서의 방언(γλῶσσα )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를 자세하게 살펴봄으로써 현대교회에 만연해 있는 방언현상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그것의 정체가 뭔지를 고찰해 보았다. 이 문제의 중요도에 비추어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unknown tongue 자기에게 덕을 끼친다”(4)는 구절과 관련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고로 번역이 되어야 할 것인데 바울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일부에서 주장하는 현대교회의 방언현상에 대한 방언 악령설은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한 것 같고 오히려 황홀경의 발화가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본 소고를 바탕으로 앞으로 현대교회의 방언현상이 어떤 것인지, 당시 고린도교회의 “unknown tongue”과 같은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많은 획기적 연구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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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L. Wolters : 알버트 월터스외 1/ 양성만 외 1

알버스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출간된지 30여년이 지나도록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개혁주의적 대안과 그 성경적 기초를 제시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구조와 방향이란 화두를 꺼내면서 구조란 창조자에 의해 의도된 방향을 얘기하는데 다시 말해 창조자의 원래 창조 의도에 더 가깝게 가도록, 구속 받고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 관점을 그는 자신의 스승인 에반 루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구조를 다른 말로 하면 창조의 원구조라고도 할 수 있고 방향은    왜곡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통틀어 가르치는 말로 이해해도 된다고 한다. 이 책은 포괄적문화와 정통 기독교의  기본요소를 결합시켜 세계를 봐야 할 필요가 커져 가면서 일종의 영적 공백 상태에 있던 세상에 개혁주의라는 성경적 세계관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창조의 범위, 타락이 미친 영향,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란      창조의 모든 부분과 전 문화 영역을 그리스도안에서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제 1장에서 성경적 세계관의 내용을 설명하고 우리가 성경에 순종하고자 할 때 그 내용이 우리 생활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뿐만 아니라 그 특징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올바른 세계관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밝히고 성경이 그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준거틀이 된다는 점을 논증한다. 또한 신학과 철학이 세계관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분석한다. 세계관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다. ‘사물들  이란 말은 우리 신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지칭할 수 있으며 세계관은 개인의 신념의 문제이며 한 개인의 확신(conviction)과 관련된 것이고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하여 갖는 근본적 신념들은 하나의 틀이나 유형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세계관은 우리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인간은 이와 같은 방향감각이나 인도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식욕이나 성욕보다도 삶을 인도하는 관점을 더 근본적으로 필요로 한다.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노동, 사회집단, 교육과 같은  소위 세속적 문제들도 포함한다.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문화의 전 영역과 연관시켜야 한다. 신학과 철학은 세계관을 과학적으로 다듬은 결과물이다. 기독교 철학은 성경의 기본적인 범주들에 비추어서 피조물을 보고, 기독교 신학은 피조물의 기본적인 범주들에 비추어 성경을 본다. 성경에 기초를 둔 세계관을 종종 개신교 종교개혁에서 이름을 따서 개혁주의적세계관이라 부른다. 개혁주의적 세계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적 신앙 고백의 모든 주요한 용어들을  보편적이고 포괄적 의미로 이해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종교적이며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이고 비속한 영역으로 나누려고 한다. 이는 이원론적 세계관의 변형으로서 우주의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는 개혁주의 세계관의 통합적 관점과 대조된다.  

2)    2: 창조

저자는 제 2장에서 창조에 포함된 여러 가지 측면을 논의하고 있다. 창조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구별해주는 가장 원초적인 주장이다. 먼저 저자는 창조를 법의 측면에서 두가지로 살펴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 과 연결시키는 한편 창조를 법과 우주의 상호관계로 보았을 때 창조의 범위는 훨씬 커짐을 지적한다. 특별히 창조를 통한 계시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 우리의 기독교적 가치관을 정립해나갈 것을 권면하고 창조는 유기체적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 발전해 감을 논증한다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 행위 전체를 가리켜 법이라고 한다. 이것은 구속 사역과는 구별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매우 풍부하고 폭넓은 범위를 가진다. 하나님이 자신의 법을 우주에 부과하시는 방식, 그의 뜻이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은 다음  두 가지이다. 그 분은 매개자 없이 직접 그렇게 하거나 인간이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렇게 하신다. 따라서 두 종류의 법이 존재하는데 자연법칙과 규범이 그것이다. 자연법칙과  규범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지만 그것들은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그분의 보편적인 법에 속한다. 창조의 법 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구별은 일반법과 특별법의 구별로서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일반법과 함께 모세의 이집트인 살인과 같은 특별법적 상황이 존재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법과 깊이 관련시키고 있다. 사람이 범죄하여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에 왜곡된 모습이 없었다. 혼돈하다는 것은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핵심에 있었다.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말씀은 또한 그 아들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법의 전 영역에 깊이 참여하신다. 그는 창조와 재창조 모두의 중보자이다. 창조를 법과 우주의 상호 관계로 이해한다면 창조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범위를 가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규례는 사회 구조와 예술의 세계, 사업과 상업 영역에까지 미친다. 인간 문명은 그 전체가 규범화 되어 있으며 우리는 모든 곳에서 한계와 예법과 표준과 기준을 발견한다. 인간 삶의 그 어떤 부분도 창조된 질서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존재와 행위 전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서나 성에도 규범이 있다. 우리의 사고는 사고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언어는 의미론적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것이 주어진 하나님의 법에 종속되며 모든 것이 피조성을 갖고 있다. 신학자들이 자연적 삶이라고 부르는 모든 분야들이 피조적 실제의 부분들인 것이다.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억누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고 알지만 이 지식을 왜곡하고 변형한다. 정의와 신실성, 청지기직과 경외에 대한 창조 규범을 하나님이 분명한 언어로 주신 적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규범적인 행동기준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하다. 요컨대 하나님의 법의 특정 측면이라고 불렀던 것, 즉 하나님의 인도 혹은 소명을 가리킨다고 이해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빛 속에서만 창조 세계의 규범성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다. 성경의 빛은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해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은 일반 계시와 달리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자연의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명쾌함이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 작업을 실행해 주셨지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하나님의 법의 지배는 자연계에서는 직접적이지만 문화와 사회의 영역에서는 매개적이다. 자연법칙은 소위 제 2창조에서 하나님이 직접 발전시킨 땅을 지배하고, 규범은 제 3창조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전시키시는 땅을 지배한다. 여덟번에 걸친 “…이 있으라라는 창조 명령이 동물과 식물과 광물에 부과된 창조의 법을 대표한다면, 4중적 문화명령은 사회와 문화에 부과된 창조의 법을 대표한다. 창세기 2장은 이것은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여기서 톨레도트(תּוֹלֵדוֹת)는 복수형으로 쓰여 내력, 족보, 역사 등의 뜻으로 “…에서부터 발생하는 역사적 발전상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란, 자연적 차원이든 인간적 차원이든 창조의 모체 안에 숨겨져 있는 가능성들을   대대로 드러내고 개발하는 과정이다. 창조 세계란 한번 만들어진 다음에 고스란히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는 성장하고 개발되며 이 성장과 개발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 속에  함축된 발전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창조의 법은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구현 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반면 우리가 사람의 역사 즉 문화와 사회의 개발 과정이 창조와 창조의 발전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안다면, 범죄로 인한 탈선에도 불구하고 태초부터 그것들이 하나님의 우주를 향한 계획안에 있었고 우리가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청사진의 일부 라는 것을 안다면 정치나 영화, 컴퓨터 공학, 사업 경영, 경제, 스카이  다이빙과 같은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새 땅에서의 삶은 이  땅에서의 삶과 비교해볼 때 마치 번데기에서 나온 현란한 빛깔의 나비와 같이 아름다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그처럼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류가 그것을 더럽혔을 때 그것을 폐기하기로 작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 그것을 다시 새롭고 선하게 만들기로 하셨다. 창조 세계가 선하다는 사실은 또한 우리가 줄곧 가정해 온 다른 사실, 즉 법의 지배가 하나님의 피조물, 특히 남자와 여자들에 대한 어떤 구속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자유롭고 건강한 직무수행을 가능케 해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여기서  법이란 먼저 창조의 법 즉 세계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지혜가 정한 질서를 의미하지만, ‘실정법즉 창조의 규범들이 국가, 교회, 가족, 결혼, 예술, 산업 등 여타 모든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실정된 법도 다 포함한다고 보아야 한다.  

3)     3 : 타락

개혁주의 세계관의 핵심은 창조, 타락, 구속이다. 저자는 제 3장에서 먼저 타락의 범위를 지정하고 죄가 원래의 선한 창조 세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밝히는데 이 과정에서 본 책의 중심 주제인 구조와 방향에 대해 개념정리를 하는 한편 죄와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결론적으로 세상은 창조세계가 죄로 인해 왜곡된 것임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인류 전체 뿐 아니라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과 경고를 무시한  아담의 실패에 연루되어 있다. 이 세상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타락의 결과들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결혼이라는 창조 제도는 현대 서구에서 심각하게 공격받고 있다. 이혼과   연속적인 결혼은 인간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왜곡하고 위반하는 예들이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므로, 악이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 대적한다. 창조세계 전체가 언젠가는 해방되겠지만 반 규범성과 왜곡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만일 아담의 범죄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모든 창조 세계의 타락을 가져왔다면, 이러한  타락이 원래 선한 창조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죄는 창조를 파괴한 것도 창조와 동일시되는 것도 아니다. 죄악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에 대한   그 분의 한결 같은 신실함을 무효로 돌릴 만한 힘이 없다. 죄는 창조세계의 낯선 침입자로서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는 전적으로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속에 죄의 존재를 허용하는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죄가 근본적으로 언어 도단적이고 신성 모독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채, 죄의 책임을 우리 자신이 아닌 창조주께 돌리는 행위다. 구조는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구조는 창조의 법, 달리 말하자면 다양한 창조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그 근거를 둔다. 이는 서양 철학의 전통이 자주 본체나 본질, 본성이란 말로 가리켜 왔던 실체를 지칭한다. 반면에 방향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 혹은 변질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한다. 모든 창조 세계에 주어진 구조는 그 방향이 뒤틀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그 구조는 악이 초래한 타락과 속박에 한계를 그어 준다. 구조는 결코 잘못된 방향에 의해 말살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향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창조 구조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시는 분이다. 세상이란 그리스도 밖에서 죄의 지배를 받는, 구속받지 못한 삶의 총체를 가리킨다. 성경의 세속적인 생활 양식에 대한 거부를 마치 타계적인 생활 양식을 권면하는 것으로 잘 못 이해한다. 죄를 범하는 행위가 사탄의 속박 아래에서 이루어지지만, “마귀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했다는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사탄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창조세계가 변질되어 신음하도록 만든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우리는 타락이 지상에 속한 창조의 전 영역에 영향 끼치고 있으며 죄는 창조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창조 세계의 기생충이라는 사실, 죄가 온 땅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모든 사물을 더럽게 만들어 세상적인’, ‘세속적인’, ‘땅의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이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고대한다.

4)     4 : 구속

저자는 구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이라고 규정하면서 제 4장에서 본서의 중간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첫째, 창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둘째, 타락은 창조 세계에 한 구석도 빠짐 없이 철저히 영향을 미친다. 셋째,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구속은 회복, 즉 창조에다 어떤 것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손상되지 않은 창조 세계의   선한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 회복은 창조세계의 어떤 영역에 국한되기보다 창조 세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회복 곧 구원이 새로운 무엇을 가져 온다기 보다 창조 세계의 삶에 이전에 없었던 영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차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이전부터 계속 존재하던 것에 새로운 생명과 생동감을 불어 넣는 것이다. 은혜는 자연을 회복한다. 즉 자연을 온전하게 만든다. 구속의 범위는 타락의 범위만큼 넓고 모든 창조세계를 포괄한다. 창조 세계에 속한 것 가운데 이 두 대적 간의 전쟁에 영향을 받지 않는 중립적인   요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곳에서 인간의 죄성은 타락시키고 왜곡시킨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는 죄악의 패배와 창조의 회복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계시인 신약 성경 전체의 핵심주제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  에게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2:28)라고 하셨다. 진정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현존해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 나라가 언제 임하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1라고 대답하셨다. 헬라어 ‘ἐντός’ within의 뜻 보다는 among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속이나 바리새인들 사이가 아니라 그 바리새인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통해 임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 또 그 나라의 도래는 아직 완료된 실재가 아님을 가르치셨다. 므나 비유( 19:11-27)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최종적으로 세상이 새롭게(중생) 것을 기대하면서 그 나라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창조 세계의 질병과 악마화에 대항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적 신앙은 역사적으로 진보적이며 결코 반동적이지 않다. 그것은 인류 역사를 동산에서 도시로 가는 움직임으로 보며, 근본적으로 그런 움직임을 긍정한다. 여기서 개략적으로 살펴본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우리가 구속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상에 대한 개념이 그랬던 것처럼, 그 나라의 범위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나라의 범위를 제한 하려는 뿌리 깊은 성향이 있는데, 이는 세상을 성스러운 영역과 속된 영역으로 나누려는 끈질긴 속성과 비슷하다. 이러한 제한적 속성을 보여주는 가장 일반적인 예는 경건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경건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 경건의 영역, 즉 영혼의 내면 생활로 국한한다. 그들은 누가복음 17:21 보라,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among you)있다”(NEB) 라고 번역 하기보다 너희 안에(within)”(KJV)라고 번역하기를 선호한다.   

5)     5 : 구조와 방향의 구분    

저자는 제 5장에서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중심적 주제들과 관련하여 기독교적 세계관이 어떻게 성경을 믿는 백성들의 신념을 형성시켜 주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함의를 밝히고 있다.  개혁주의의 의미를 밝히면서 결국 개혁은 내적인 재생 , ‘성화라고 결론을 내린다. 현대의 혼란스러운 가치관의 혼동시대에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바로 구조와 방향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구조란 창조된 사물의 본질, 즉 하나님의 창조의 법에 의해 창조된 사물을 말하며 방향이란 범죄로 인해 그 구조적인 규례로부터 일탈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그 구조적 규례에 다시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삶의 모든 분야를 분석할 때 개혁주의는 이 성경적 구별을 일관성 있게 적용한다. 개혁은 성별이 아니라 성화를 의미한다. 성별은 외적인 갱신을 의미하고 성화는 내적인 갱신을 의미한다. 개혁이라는 말이 내적인 재생으로서의 성화를 가리키는 단어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할을 통한 창조의 회복을 말할 경우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분명히 성화다. 성화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와 승리를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창조를 죄로부터 정화하시는 과정이다. 이처럼 개혁은 일차적으로 성화를 의미한다. 개혁의 두 번째 특징은 이 성화의 방법이 폭력적 전복이 아니라 점진적인 갱신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성별은 사물의 내면을 건드리지 않고 혁명은 사물을 제거하는 데 비해, 개혁은 그것의 내면 깊숙이 파고 들어가 대상을 갱신하고 성화시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깨끗하게 하고 개혁하는 것이다. 창조에 관한 논의에서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여러 사회적 제도들이 창조의 영역에 속한  다는 원리는 두루 적용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각 사회제도가 다른 사회제도로부터의 간섭을 막아내고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 또한 창조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참여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삶, 특별히 감정적인 부분에 까지도 영향을 미침은 당연하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분별력과 인간 본성에 관한 성숙한 통찰력으로 윤리적 회색지대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6)     6 : 결론

기독교적 분석과 성찰의 기초가 되는 성경의 이중적 강조점,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주적재창조는 이전에 인본주의적 범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었던 세계를 이제는 기독교 유신론적인 가치관이라는 전신갑주를 입은, 신선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지금까지 살펴본 개혁주의 세계관 자체가 성경적 관점의 기본 통찰들을 다른 학문과 상관있는 체계적인 철학의 기초와 연결시켜 줄 수 있는 개혁주의적 철학을 요구한다. 세계관은 철학적 범주들을 매개로 하여 학문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광대한 창조의 일부에 불과하며 복음에 입각한 세계관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어느 영역에서 부르심을 받았든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여 현실세계에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야 말로 매우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평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대사회의 세계관을 망라하여 비교, 분석, 비판하고 여러가지 실질적이고 사회과학적인 준거틀을 대입함으로써 초월하신 하나님, 즉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분으로서 그 분 안에서 모든 이성, 모든 선, 모든 소망, 모든    실재, 모든 구분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기독교적 유신론적 세계관이야 말로 가장 바람직한 세계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 점에서 우리에게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탁월한 논리로 이 시대의 세계관을 통찰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초판을 발행한 뒤 수십년 동안 동 분야에 그가 현대인의 세계관 형성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앞서 요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다양한 세계관에 구조와 방향이라는 준거틀을 대입하여 분석한 뒤 또한 다양한 세계관이 있는 것 같지만, 내면을 들여다 보면 제한된 수의 세계관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제 1의 실재(궁극적 실재)의 본질과 속성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기본적 대답만 있을 뿐인데 즉 영원토록 자존하는 것은 우주이거나 아니면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논리다. 또한 올바른 세계관의 선택에 있어서 네 가지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논리적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관련된 모든 자료가 포함 되어야 하며 자체 논리가 스스로 설명 가능하여야 하고 주관적 으로 만족을 주는 세계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객관성이 확보되었는지의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1) 단점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원어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중에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해당 원어에 익숙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단어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원어는 또 다른 숙제가 된다.    예를 들어 너희 안에에 관한 설명에서  저자는 원어 ‘ἐντός’를 설명하고 있는데 원어에 생소한 독자에게는 이것은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교양 서적의 형태를 띠고 있는 책이므로 누구나 금새 이해하기 쉬운 현대어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에 원어를 사용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차라리 전문적으로 확실하게 설명하고    정확한 원어로 표현해서 원어 공부를 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 많은 신학관련 서적들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다. 우리는 책의 제목만으로도 저자가 올바른 가치관을 성도들의 성화과정으로 귀결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뻔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구성 및 논리상의 반전이라든지  플롯의 짜임새라든지 하는 재미가 결여되어 있다. 또한 구조와 방향이라는 명제에 대입하여   창조, 타락, 구속을 분석 하였는데 이 준거틀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저자는 이에 대해 구조와 방향을 구별해 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과업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여 신선하게 자신의 논리를 주장한 장점이 있지만 결국 성화과정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조금 진부한 측면이 없지 않다. 조직신학적 결론 말고 또 다른 자신만의 주장이 있었더라면 더 호소력 있게 설명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세계관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면서 철학과 신학, 과학 등 학문이 세계관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고찰하고 있지만 다른 세계관들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적 유신론과 대척관계에  있는 자연주의를 소개하고 비판하면서 그에 기반해서 성경적 세계관을 장점을 돋보이게 해야 하는데 이러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독단적인 주장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저자는 초판이 출간된 지 20년이 지나 확대개정판으로 낼 때 저자가 N.T. 라이트, 레슬리 뉴비긴 등의 학자들과 나눈    대화의 결실로서, 초판 이후 제기된 비판적 논점들을 수용하여  내러티브와 선교라는 맥락에서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접접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추가하게 된 내용은 초판 내용과는 좀 통일성이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내러 티브와 선교라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거라면 본문 안에 녹여 놓았어야 마땅했다. 그러면 이 책의 구성이나 논리는 달라졌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저자 자신의 사고도 변화할 수 밖에 없어서 일정 시점에서는 자신의 통일된 논리를 주장해야 하는데 초판을 어느 정도 유지해야 하므로 개념상 빠지는 부분들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한 권의 책으로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완전히 다르게 저술한 것에 비해  완성도가 아무래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2)    장점

이 책에는 그의 교육 배경인 신칼빈주의가 그대로 녹아 있다. 신칼빈주의는 창조 세계가 특정한 방향으로 돌아가도록 창조된, 다양하면서도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구조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렇게 신칼빈주의가 주장  하는 구조와 방향이라는 신선한 통찰을 기독교적 유신론안에 녹여 놓았다. 더구나 이 책에서 구사한 간결체 형태의 서술로 군더더기 없이 무엇이든 분명한 결론을 짓는 듯한 문체는 저자의 논조를 강하게 어필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저자의  주장에 확신을 갖게 만들어 준다. 어떤 책들보다도 논리가 명쾌하다. 본서는 성적 범죄 문제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방향을 제시해준다. 하나님은 정상적인  성적결합을 제외한 모든 것을 단호히 금지하셨다. 그래서 저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모든 성적인 문제와 그 해결방법을 성경을 자세히 검토 해서 적용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충고와 관련 성경내에서 성적인 문제를 고찰해 보면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해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5:31-32) 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언한다. 이와 관련  우리는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어떻게 조명해 주고 있는지를 성경 안에서 고찰하여  해답을 찾아야 하는데 이 책은 이러한 성적 궁금증을 탐구해가는데 조언을 해준다. 창타구가 복음주의 세계에서 광범위한 방향전환을 일으킬 만큼 성공적이 된 이유는 성속의 분리라는 이원론을 무너뜨렸다는 점이다. 이는 가히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성경을 문화에 적용했으며 책을 구성하는 철학적 체계를 성경에서 따왔다. 내용을 보면 많은 성경주석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잠언과 베드로후서의 구절을 통해 이런 식의 철학적 적용을 거부하는 이들과 이원론에 빠진 이들을 설득하고 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책이 설명하는 철학적 전통이 분명한 성경적 기초에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적용

1) 개인에게

저자는 결론적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성화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영원히 살 수 있게 창조되었던 우리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존재로, 한시적인 가련한 존재로 바뀌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죽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종말론적 구속사라는 반전을 계획하고 계셨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뒤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극복하며 성화과정을 통해 영화에 이르도록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웁게도 천지창조 자체를 인간 구속의 역사와 연결시키신 흔적이 보인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우선 족보(복수형), 계보를 뜻하는 תוֹלְדוֹת(톨레도트)를 창세기 안에서 찾아 보면 창 2:4(천지  창조 내력),  5:1(아담 자손),  6:9(노아의 족보),  10:32(그 백성 들의 족보), 11:10(셈의 족보),  25:13(그 세대),  37:2(야곱의 족보) 에 나오는데 한글 번역으로는 족보, 세대, 계보, 자손, 후손, 내력, 대략 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지만(실제로 한글 개역개정판에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원어로 분명히 같은 단어를 쓰는 것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인류의 족보와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천지창조는 인류 구속의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2:4)라고 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거룩한 선포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과 같이 세계관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다. 이 틀의 바탕에 성경을 놓아야 한다. 이 틀을 종교적으로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삼각 모양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스펙트럼으로 나뉘는 것과  같이 성경을 통해 우주의 모든 체계를 바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서 다양한 세계관을 비교, 검토하여 체계적으로 정리, 합리적인 가치관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자연주의나 뉴에이지,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유신론을 더 확고하게 정립하기 위해 다른 세계관을 비교하고 검토해야 한다.

3) 가족에게

저자는 이 책에서 구조와 방향이라는 신개념을 도입하여 창조, 타락, 구속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신선한 시도이다. 이러한 준거틀 안에서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올바른 삶임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 조차도 성경적으로 근거를 두어야 한다. 언뜻 보아서 앞뒤가 맞지 않는 기독교리를 알아 듣기 쉬운 말로 표현하여 자녀로 하여금 다른 세계관이 갖추지 못한 놀라운 합리성이 있음을 증명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화두를 문화 전반으로 확대하여 해석한다. 자녀에게 현재의 모든 문화상황을 대입하여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개혁주의적 세계관은 쉽게 흔들리는 청소년기의 자녀를 믿음의 은혜 안에 있을 수 있도록 해줄수 있다. 청소년기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 허무, 사랑 등에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한 올바른 가치관과 그에 따른 실천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알려주어야 한다. 진리와 사랑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2)    교회에서

우리는 교회밖에서보다 교회내에서 더욱 깨어 있어야 하며 믿지 않는 자들 틈에서보다   믿음의 형제들에게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화 시대에 우리의 신앙은 이미 오염되어 있다. 우리의 신앙은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확고하게 구축하여야 흔들리지 않는다. 저자의 이 이론은 교회 밖에서 보다 교회 안에서 일차적으로 효용성이 있다.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의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고  인도해  주어야 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어떤 목사들은 신앙을 자꾸 이성과는 상반되는 신비한 어떤 으로 표현하면서 신도들을   인도한다. 그런 목사들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설교, 자신의 주석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도록 하고, 자기 자신은 안주한다. 평신도들이 성경에 눈을 뜨고 신학에 관심을 보이면 오히려 손사래를 흔들며 교회성장에 도움이 안되는 복잡한  문제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목사를 따르라고 한다. 아예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그냥 주욱 읽어서 은혜 받도록 하거나 원시적인 Q.T. 하도록 해야지,  이상 성경공부를 하게 해서는  된다는 목사들도 있다. 이리하여 너무나 많은 평신도들이 성경과 신학에 있어서, 개혁주의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있어서, 무식 대중의 상태에 묶여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적 세계관이 제대로 정립된 교회는 이단에 휩쓸리지 않는다. 비단 이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연주의, 허무주의, 동양의 신비주의, 뉴에이지, 종교 다원론 등의 문제점을 정확히 진단하고 이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무신론자들에게 우리는 절대주권자인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구원을 위한 일직선적 역사를 경륜하고 계신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은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적 유신론을 확립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4)    사회에서

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전통적인 이원론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때 악도 심어 놓으신 것처럼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죄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구조에 포함되지 않은 낯선 침입자일 뿐이다. 창조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죄는 창조세계의 낯선 침입자로서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는 전적으로 거리가 멀다. 하나님이 죄를 창조세계에 포함하셨다는 얘기는 우리가 죄를 짓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후안무치한 태도인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효과적으로 헬레니즘의 이원론을 배격하여 설명한다. 저자는 이 책의 타락 성적인 타락 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성적인 문란은 인간을 위해 남녀간에  사랑과 헌신으로 한 몸이 되라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왜곡하고 조롱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 1 23~26절의 성적인 타락과 우상숭배와의 관련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 구절은 번갈아 가면서 우상숭배와 육체적 타락을  두 번에 걸쳐 설명하면서 우상숭배, 즉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사람들을 정욕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고 강조 한다. 바울은 우상 숭배의 배후에는 사탄, 즉 어둠의 영과 타락한 세상 권세가 존재 한다고 설명한다(고전 10:19–22).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말을 따름으로써 영적인 간음을 행했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우매해지면서 우상숭배를 하게 된다. 이로인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육체적 타락이라는 질곡에 넘겨주시고 또한 역리적인 육체적 타락까지 이르게 하신다. 개혁주의적 세계관은 포스트모더니즘의 4차 산업혁명 시기를 기독교가 주도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강력한 신념이다. SNS 등 커뮤니케이션의 폭발적 증가는 젊은이들을 다시 신앙으로 이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물질만능의 4차 산업혁명의 시기에 오히려 사람들은  영성 있는 목회에 더욱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대에는 영성이 최고의 무기 임을 적극적으로 인식시켜야 한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말처럼 우리 기독교는 역사상 최고의 기회를 맞고 있다완벽한 영성 및 공감은 예수님과 성경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거룩한 복음으로 혁명적인 기술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세상을 더욱 넓게 펼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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