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구약 단상 >

갈라디아서 4 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때는 "카이로스" 상대되는 개념인 "크로노스" 로 일정한 기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시간의 충만함이 와서"로 번역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 말라기 이후 침묵하신 400여년간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적 증거( 7:14 )와 역사의 전개(헬라시대와 로마시대)를 거쳐서 하나님께서는 세계언어로서 헬라어를 통용시키고 로마의 세계정복이라는 역사를 전개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마카베오 혁명을 통해서 잠시 독립하는 듯 했으나 역시 헬라화를 면치 못하고 헬레니즘에 동화되면서 로마에게   점령 당하고 헤롯왕조가 등장합니다. 이시기의 이스라엘의 역사 기록은 제한된 상태로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에 마카베오서 등 외경에 많이 의존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중간기 동안 이스라엘을 어떻게 준비해놓으셨는지 그리고 그것이 종말의 시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늘 궁금해 했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경고를 보면 말라기 4 4절에서 "시내산 언약을 기억하라"라고 하십니다. 이에 따라  유대교가 느헤미야와 에스라 이후 율법공동체로 이행되면서 디아스포라 회당이 헬라 제국 곳곳에 세워집니다. 결국 구약의 목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유대교"였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인 셈입니다. 요한계시록의 144,000명이 실제 유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상징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44,000명이 실제 유대인이든 아니든 세계 인구의 0.2~3%의 유대인이 노벨상을 30%이상 차지할 뿐 아니라 세계 정치, 경제, 금융, 예술, 영화,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이미 이 세상을 좌지우지 하고 있습니다. 결국 종말은 유대인의 회심이 필요조건이 되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을 위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는 한편 종말의 시기에 유대인들을 회심시켜서 원대한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시고 있는 것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신구약중간사(ppt,최종본,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20181128).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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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ppt,다른사람들을 하나님께, 20180308).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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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로 끌어들이는 사람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날 세계에서 복음전도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교회가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열방에 보이게 하고 비교하게 하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살고자 애쓰면 열방이 그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인데 하나님 백성의 삶의 윤리적 특성이 열방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끌어들이는 데 중대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의 건축으로 구도자들이 몰려들어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복을 구하게 된다. 이 기도에는 놀라운 개방성, 긍휼, 비전이 담겨 있다. 선교와 윤리의 결합은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8:19) 만큼이나 분명하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상이 알려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품이 그분의 살아 있는 백성의 행위 속에서 드러나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방법을 반영할 때에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아는 마음을 품도록 와서 그분께 기도하도록 끌어들일 수 있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구하러 오시면 열방이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나아올 것이다. 또한 열방으로부터 이스라엘 자손이 나아온다. 열방이 예배하며 나아온다. 세상에 평화가 온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눈에 잘 보이는 매력적인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 빛은 선행으로 이루어진다. 또 그 윤리적 빛의 특성은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끌어들여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하는 것이라는 점이 아주 분명해졌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삶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성경적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로 절정에 이르는 독특한 사건과 부인할 수 없는 경험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알려 준다. 더 나아가 복음은 이런 사건들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고 그분의 창조세계 전체를 구속하기 위해 행동하셨으며 그와 같은 구원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하나님이나 다른 원천은 없다고 단호한 주장을 펼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 모든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완전한 충성을 바칠 것을 주장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의 성경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인류 열방이 자신을 위한 신들을 만들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주권, 구원 사역을 증거하도록 부름받는다. 그 부르심이 우리가 선택받은 근본 이유이며 하나님의 종됨의 의미 일부이다. 증거하는 일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증인 자신의 믿음과 이해를 강화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성경대로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온전한 복음은 성경 전체의 깊은 우물에서 끌어낸 것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선교는 구원하는 은혜에 대한 성경의 위대하고도 감동적인 이야기 언약 순종에 대한 성경의 변혁적인 요구 및 약속, 의가 거하는 새 창조에 대한 성경의 활기찬 희망과 비전에 걸맞도록 통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말로 하는 증언, 곧 참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그 진리를 옹호하며 말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복음은 변호해야할 진리며 우주를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며 온 세계가 소통해야할 진리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값없이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증명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인데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신앙고백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지를 묵상해야 하고 우리가 선포해야 하고 증거해야 하는 복음은 현대교회에서 정상적으로 선포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며 만약 부족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보완해야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성경의 성취인 어떤 일은 사실상 성경의 하나님에 의해 재가를 받는다. 그러므로 보냄과 선포는 하나님의 승인과 성경적 보증을 받는 활동이다. 선교는 진리에 대한 전폭적인 헌신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 교회나 선교단체, 또는 훈련기관에 사람을 보내는 책임을 맡은 모든 이들은 자신의 벽과 탁상용 달력, 컴퓨터 화면에 요한삼서 6절을 모토로 써붙여야 한다. 기독교적 교제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냄 받는 자들을 후원할 의무가 따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공통적인 인간성, 구약의 예, 예수님의 가르침 등 여러 가지 논거를 들어서 이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와 같은 재정적 제공은 참으로 바울이 표현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는문제이기 때문으로 후원하는 일에는 관대하게 주는 것이 포함되며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 백성의 선교의 주요부분이다.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선교사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본질의 무언가를 나타내는 일꾼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공적 광장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을 심판하시는 독립적인 심판관이실 뿐 아니라 평상시에 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완전한 진실과 투명함이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예수님의 두 가지 말씀은 세상에 선교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 주는 여전히 중대한 통찰이다. 이 점에서 소금과 빛은 선교적이면서 대결적이다. 도덕적 진실성은 기독교적 구별되는 것과 공적 무대에서 기독교 선교를 하는 데 필수적이다. 성경에서 고난은 하나님의 소명과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던 수많은 사람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많은 사람은 충실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으며 예수님은 고난을 기뻐하라고까지 말씀하셨다. 사도행전은 고난이 초기 신자들 가운데서 곧 일어났지만 그들은 그 특권을 기뻐하고 계속 증거함으로써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행했다고 기록한다.12장을 통해서 12사도와 함께 바울이 사도로 규정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았으며 선교사들을 보내고 후원 하는 특징을 초대교회를 통해 살펴보았다. 요한 삼서는 이를 진리에 대한 신실함 선교사들에 대한 신실함이라는 이중적 신실함이라 표현하였으며 하나님의 선교와 함께 보냄 받는 자들에 대한 관대한 후원이 하나님 백성의 권리와 의무라는 점을 확인했다. 13장에서는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성문으로 지칭되는 공적광장에서 완전한 진실과 투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며 이를 위해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을 것을 예언하신다.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온갖 핍박을 받는 믿음의 형제들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복음 전도라는 선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성경적인 근거를 정확히 알고 실천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선교에 대한 권위와 보증을 해주신다는 확신은 사역자로서 선교자로서 행함에 믿음을 줄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가 고난당하도록 부름받는다는 명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주 적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고난의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인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110년 전의 평양대부흥을 생각해 본다. 동방의 예루살렘으로까지 불리우던 평양은 역사상 최악의 우상숭배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 교회가 불타고 목사들이 참수 당하고 지하교회 신자들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본다. 이들의 고난과 핍박이 세상에 알려지는 날이 새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묵상해본다.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선교가 아니라 예배다. 선교는 예배가 존재 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우리는 찬송하도록 창조되었으며 찬송하도록 구속받았고 또한 찬송을 통해 증거한다. 한편 우리는 기도 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이는 열방과 구별된 표시로서의 기도이며 열방을 향한 축복으로서 기도하고 기도를 통해 열방의 우상숭배를 물리친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기도가 예수님의 선교, 사도행전의 교회, 그리고 선교사역과 관련하여 바울이 교회에 준 가르침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방편임을 발견한다. 또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영적전쟁을 수행한다. 따라서 찬송과 기도야말로 하나님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 중의 두 가지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교에 관여하는 두가지 방편이 된다. 우리는 그저 목회자로 부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는다. 하나님 백성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독립적인 신적 감사를 대신해 하도록 부름받는다 우리는 주위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에 성경적으로 관여할 필요가 있으며 또 그렇게 할수 있는 용기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 사역을 하는 목사들을 후원하기 위하여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자기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후원하기 위해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 선교로서 참으로 중요한 그들의 사역은 교회 담장 바깥에서 세상에서,직장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복음의 종으로서 우리의 겸손을 회복해야 한다. 바울은 그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고후 2:17)자들 곧 설교나 전도사역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 자들과 날카롭게 구분했다. 고대 헬라 세계에는 자신의 철학을 여흥을 위해 군중들에게 파는 일을 하는 여행 강사들이 넘쳐났다. 바울은 그들처럼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14장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다 보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에 다가가는 길은 결국 찬송과 기도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도 살아 가면서 이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은 점을 잘 지적해주고 있다. 찬송과 기도를 생활화하면서 성령을 간구하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15장은 우리가 신학도로서 목회자뿐만 아니라 예언자로서도 부름 받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예언자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한다는 것 뿐이 아니라 선지자의 역할 즉, 세상이 잘못되어 있을 때 이를 용감하게 지적하고 자신을 정화하여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목회자는 성도들을 섬김으로써 그들이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 우리는 찬송과 기도가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찬송과 기도가 어느 정도 생활화되어 있는지를 아는 기준은 잠들어 있을 때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무의식중에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비율로 확인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에서 잠재의식속에서 나의 주님을 항상 만나게 되기를 소망해본다. 본문에서는 신학도가 목회자 뿐 아니라 예언자로도 소명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예언자는 선지자로서의 의미일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가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또한 그렇게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할 때 신학도로서의 초심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묵상해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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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약 

1)    1 : 인간 정신 생활의 한 차원인 종교

종교가 인간 정신의 한 측면이란 신념에 대한 신학적 비판자들과 과학적 비판자들은 종교를 인간이 신적 존재자들과 맺는 관계로 정의하는데 그 신적 존재자들의 실존을 신학적 비판자들은 긍정하고 과학적 비판자들은 부인한다. 만약 신이 실존하는지 실존하지 않는지 묻는 물음으로  시작한다면, 결코 신에게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신은 실존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보다 신에게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종교는 인간 정신 생활에 있는 특수한 기능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 기능에 있는 깊이의 차원이다. 종교는 모든 곳, 즉 인간 정신생활의 모든 기능의 깊이를 보금자리로 삼는다. 또한 종교는 그 단어의 가장 광범위하고 기본적 의미에서 궁극적 관심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 관심은 인간  정신의 모든 창조적 기능에서 나타난다. 궁극적 진지함으로 종교를 거부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궁극적 진지함이란, 혹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상태가 그 자체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 정신 생활의 실체, 근거, 깊이이다. 이것이 인간 정신의 종교적 측면이다. 종교영역과 세속 영역 두 영역 가운데 어느 것도 서로에게서 분리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두 영역이 서로에게서 분리된 실존 자체가 비상사태라는 것과 둘 다 넓은 의미의 종교에, 궁극적 관심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정도에 따라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갈등은 극복되고, 종교가 인간 정신 생활에서 즉 그 깊이에서 종교의 참된 자리를 재발견한다. 바로 그 깊이를 통해서 종교는 인간 정신의 모든 기능에 실체, 궁극적 의미, 판단, 창조적 용기를 제공한다.  

2)    2 : 종교철학의 두 유형

우리가 신에게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존재론적 유형은 소외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이 방식을 따르면 인간은 신을 발견할 때 자기를 발견한다. 즉 인간은 자기를 무한히 초월하면서도 자기와 동일한 어떤 것, 그것으로부터 자신이 소외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에서 결코 분리된 적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발견한다. 또 한가지는 우주론적 방식인데 이는 낯선 이를 만나는 방식으로 이 방식을 따르면 인간은 신을 만날 때 낯선 이를 만난다. 그 만남은 우연적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서로에게 속해 있지 않다. 잠정적, 미확정적 토대 위에서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만난 그 낯선 이에 관해서 아무런 확실성이 없다. 그는 사라질 수도 있고, 그의 본성에 관해 단지 개연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3)    3 : 시간과 공간의 투쟁 .

    시간과 공간은 투쟁하는 힘들로, 살아 있는 존재자들로, 자체의 힘을 가진 주체들로 다뤄져야 한다. 물론 이것은 진술을 위한 방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시간과 공간은 실존하는 모든 것이, 유한한 영역 전체가 종속되는 실존의 주요 구조들이기 때문에 이 방식이야말로 정당하다. 실존한다는 것은 유한함 혹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실존, 즉 인간의 몸과 정신을 포함하는 보편적 실존의 힘이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간만으로도 시간을 측정할 수 있고, 시간만으로도 공간을 측정할 수 있다. 운동은 생명의 보편적 특징으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정신은 시간에 결속되어 있는 듯 보이는 것으로, 실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현체가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공간을 필요로 한다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역사는 대체로 공간과 시간의 투쟁에 의해서 결정된다. 방향성 없는 시간은 공간의 완전한 지배를 받는 시간이다. 따라서, 시간의 첫 번째 승리는 생명의 과정이 탄생에서 죽음으로 진행된다는 것, 성장과 쇠퇴가 되돌려질 수 없는 방향성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영역에서 노인은 다시 젊어질 수 없다. 그렇지만 공간의 우월함은 여전하다. 생명 과정은 되돌려질 수 없지만 반복될 수는 있다. 각각의 개별적 생명은 탄생과 죽음, 성장과 쇠퇴의 법칙을 반복한다. 시간의 방향성은 지속적 반복이라는 순환운동에 의해 그 힘을 상실한다. 순환은 공간의 우월함을 가장 잘 표현하는 상징으로, 생명의 영역에서는 극복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시간의  최종적 승리가 가능하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지향하며 행동할 수 있다. 인간은 역사를 가질 수가 있고 또한 가족과 민족의 비극적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떤 새로운 것을 지향하면서 반복의 순환을 돌파할 수 있다. 인간은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의  잠재적 승리를 드러내지만, 항상 현실적 승리를 보여 주지는 못한다. 자연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던 일이 인간과 역사에서는 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공간의 힘은 대단하며 언제나 창조와 파괴 둘 다에 작용한다. 공간은 약간의 흙 이상을 의미한다. “서로 곁에 있음이라는 특징을 가진 모든 것이 공간에 포함된다. 현대 민족주의는 공간이 시간을 지배하는, 다신론이 일상적 실재인, 현실적 형식이다. 공간이 우세할 경우 인간적 실존은 비극적이다. 그리스 철학이 불변하는 존재자의 궁극적 상징으로 발견한 것은 공간의 가장 완벽한 재현인 구 혹은 원이었다신비주의에서 시간과 공간은 어떠한가? 신비주의는 공간의 우세함에서 벗어나는 실재적 도피책이 아니다. 신비주의는 시간과 공간을 소멸시키지만 그렇게 하면서 주장하는 기본적 전제는  시간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고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종속되어 있고, 어떤 새로운 창조물도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시간을 초월하며 시간의 어떤 단계로부터도 항상 독립적이다. 구원은 모든 시간적 현재를 초월 하는 영원한 현재이다. 신비주의는 공간의 우세함을 보여주는 가장 교묘한 형식이다. 신비주의는 역사를 부인하는 가장 교묘한 형식으로, 역사의 의미를 부인하는 가운데 시간의 의미도 부인한다. 신비주의는 공간과 공간의 부정 사이에서 일어난 상승작용이지만 시간의 긍정은 아니었다. 자연뿐 아니라 초자연도 시간을 공간에 종속시킨다시간의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그분이 최종 목표를 향해 역사 속에서 행동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예언자주의에서 역사는 보편적 역사이다. 선교에는 분열되지 않은 인간 의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보편적인 주장이 있다. 시간은 역사 속에서 완성되며 역사는 보편적 하나님 나라에서, 정의와 평화의 나라에서 완성된다. 2 이사야의 역사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기 민족의 불의 때문에 그 민족을 벌하고자 이방민족을 부르시는데, 이는 하나님을 보편적   하나님으로 격상했다. 비극과 불의는 공간의 신들에게 속한다. 하지만 역사의 완성과 정의는 하나님에게 속하는데, 그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해 행동하면서 자신의 우주에 있는 분열된 공간을 사랑으로 연합시키신다유대 민족은 모든 시대에 걸쳐 지속되는 시간과 공간의 영구적 투쟁을 재현한다. 그들은   다른 민족과 같이 공간의 민족으로 간주되었을 때 비극적 숙명을 가졌지만, 시간의 민족으로 간주되었을 때 비극을 초월했다.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분리된 것은 시간의 완성에서 유대교가  공간을, 즉 그 민족의 법을 선택했기 때문인데, 그 법은 결코 모든 민족의 법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교회는 언제나 자신의 예언자적 정신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신들이 힘을 가지고 있는 한 회당의 전통에 포함되어 있는 예언자적 정신이 필요하며, 유대교의 역사적 숙명에 관한 첫 번째 기독교적 해석자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상정한 것처럼 역사의 종말 때까지 중요하다. 회당과 교회는 우리 시대에 공간의 신들에 반대하여 시간의 하나님을 지지하는 투쟁 속에서 연합해야 한다. 만약 이런 연합이 일어난다면, 만약 역사의 주를 위해 또한 그분의 정의와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사람이 박해와 순교 중에도 연합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투쟁에서 영원한 승리는 시간의 승리로 그리고 역사의 주인인 한 분 하나님의 승리로 다시 한 번 드러날 것이다.

4)     4 : 종교적 문화분석의 여러 측면들 . 

만약 우리가 지상계명에서 종교 개념을 이끌어 낸다면, 종교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며 또 그래야만 하는 것에 관해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 과의 결속을 성공적으로 유지했고, 그리스도로서의 자신을 위해 예수로서의 자신을 희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현하는 새로운 실재를 창조했다. 실존적 종교 개념의 두 번째 결과는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 영역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은 분리된 영역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서로 독립되어 있고 이것이 인간의 곤경을 규정하는데 그 곤경은 자신의 참된 존재에서 소외된 인간의 상황이며 종교가 특수한 영역으로 실존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 상태에 대한 가장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결과는 종교 및 문화와   관계가 있는데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종교는 문화의 의미를 제공하는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기본적 관심이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들의 총체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그런 고찰은 종교와 문화라는 이원론의 확립을 분명하게 방지한다. 인간 정신 생활의 모든 행위는 발설되거나 발설되지 않은 언어로 수행된다는 사실이 이 주장의 충분한 증거이다. 언어는 가장 기본적 문화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양식을 읽을 수 있는 자는  그것의 궁극적 관심을, 그것의 종교적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현대 문화에서 산업사회는 지배적 정신이며 이에 저항하는 정신은 인간의 현실적 곤경에   관한 실존주의적 분석의 정신이다.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두 가지 주요 특징은 첫째로 인간의   활동들이 자기가 포함되어 있는 자신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기술적으로 변형하는 일에 집중되어 인간과 실재의 만남에서 깊이의 차원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며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유한한 상호관련들의 체계는 자족적이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신은 잉여적 존재가 되었고, 우주는 우주의 주인인 인간에게 맡겨졌다. 이 상황은 산업사회의 두 번째 특징으로 귀결된다.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자유주의와 정통주의가 중요하지 않은 투쟁에 관여하고 있었던 반면,역사적 섭리는 종교와 현대 문화를 관련시키는 다른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준비는 산업문명의 심층에서 수행되었는데 때론 가장 반 종교적 의미에서 산업문명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 일을 수행했다. 이것은 실존주의라고 알려진 거대한 운동으로서 파스칼이 시작했고 19세기의 예언자적 사상가들 몇몇에 의해서 수행되었으며 20세기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종교의 형식은 문화이다. 첫째로, 이 사실은 종교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경우에 특히 명확하다. 성경 언어를 포함한 모든 언어는 수많은 문화적 창조행위의 결과이다. 언어는 인간에게 보편자를 주는데 그 보편자의 힘으로 인간은 기술문명과 정신적 내용이라는 주어진 세계 위에 세계들을  창조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세계들의 발전은 언어의 발전을 결정한다. 둘째로, 종교에서 문화적 창조물을 사용하는 두 번째 본보기는 종교예술이다. 종교 예술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어야 하는 하나의 원리는 예술적 정직성의 원리이다. 예술양식이 정직한 것은 그것이 예술가의 실제 상황과 그가 속한 시대의 문화적 실제 상황을 표현하는 경우에만 그렇다. 세 번째의 본보기로는 인지  영역에서 취할 수 있으며 모든 문화 영역에서 수행된 실존적 분석의 방대하고 심오한 자료를   사용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치료 심리학이 포함된다. 기독교가 자신의 궁극적인 관심을 표현한  상징을 가지고 실존적 분석을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라는 선포뿐 아니라 현대 문화 에서 재발견된 인간의 곤경에도 적합한 방법이다. 교회는 인간의 실존 자체에 내포된 질문에, 이 실존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이 일을 감당하는 방법들 중 하나는 전도이다. 전도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의 생명을 표현하는 상징이 인간 존재자의 실존에 내포되어 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기독교가 교리적 혹은 제의적 혹은 도덕적 율법의 조합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치유의 실재가 출현함으로써 율법이 정복되었다는 좋은 소식이라고 사람들이 느껴야만 한다. 가시적 교회는 가끔씩 표면화되는 잠재적 교회의 목소리들을 통해 교회 자체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지 깨닫고 비록 그 목소리가 교회에 적대적으로 보일지라도 수용해야 한다. 교회는 문화를 심판하는데 교회 자체의 생활 형식을 포함하여 그렇게 한다. 교회의 종교적인 실체가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교회의 형식은 문화에 의해서 창조되기 때문이다. 교회와 문화는 서로에게 속해 있지 별개로 있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그 둘을 포함하면서 또한 그 둘을 초월한다.   

5)     5 : 종교언어의 본성

미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상징의 의미에 관해 많은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사실에 내포되어 있는 더 심도 깊은, 부정적이기도 하고 긍정적이기도 한 것의 징후이다. 종교 언어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 다섯 단계를 거치고자 하는데 첫 번째 단계는 상징과 기호에 관한 논의로 본다. 상징과 기호에 있는 본질적 동일성은 그것들이 자신을 넘어서 지시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상징이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닌, 자신이 나타내는 그 힘과 의미에 참여  하는 어떤 것인데 이것이 상징의 기능이라면 상징이 다른 상징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상징에는 특별한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은 꼭 그것이며 더 혹은 덜 적합한 상징으로 대체될 수 없다. 세 번째로는 종교적 상징의 본성인데 종교적 상징은 모든 상징이 하는 역할과 정확하게 같은 일을 수행한다. 궁극적 실재의 차원은 거룩함의 차원이므로 종교적 상징은 거룩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로는 종교적 상징의 수준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초월적 수준과 내재적 수준이 있다. 초월적 수준에 관한 기본적 상징은 하나님 자신이며 신의 성질, 속성은 당신이 신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것,  신은 사랑이다”, “신은 자비이다”, “신은 힘이다”, “신은 전지하다”, “신은 편재한다”, “신은 전능하다 등이다. 또한 초월적 수준의 또 다른 요소는 신의 행위이다. 내재적 수준은 신적인 것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출현하는 수준인데 이 수준에는 무엇보다도 신적인 것의 육화, 즉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다른 존재자들, 신적 존재자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날 때 다른 존재자로 바뀌는 육화(성육신)가 있다. 또한 성례전의 경우는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환경에서 거룩한 것의 담지자가 되는 어떤 실재로서 이런 의미에서 성만찬은 상징적이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상징의 진리에 대해 고찰해 보면 종교는 모호하며 모든 종교적 상징은  우상화될 수 있고 마성화될 수 있고 자체를 궁극적 유효성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적 교리나 어떤 종교적 제의도 궁극적이지 않다. 만약 기독교가 기독교의 종교적 상징들 중에 다른 어떤 진리보다도 더 우월한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십자가라는 상징,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6)     6 : 개신교와 예술양식 .

    모든 예술작품은 세 가지 요소, 즉 주제, 형식, 양식을 보여 준다. 주제는 인간 정신이 감각적 심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잠재적으로 일치한다. 그것은 결코 선이나 악, 아름다움이나 추함, 온전함이나 파편화, 인간이나 비인간, 신적인 것이나 마성적인 것 같은 다른 성질들로 제한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주제가 모든 예술가에 의해서 혹은 모든 예술 시대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형식과 양식에 의해 좌우되는 선택의 원리가 있다.  예술적 창작품은 형식으로 결정되는데 그 형식은 소리, 단어, , 색 같은 특정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그 재료들을 독립적 작품으로 격상시킨다. 이런 이유로 다른 모든 창작품에서와 같이 모든 예술적 창작품에서 형식은 존재론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존재 자체의 구조적 요소들에 속하며, 어떤 것이 그것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어떤 것에게 그것의 독특성과 보편성을, 존재 전체 안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특별한 자리를, 그것의 표현력을 부여한다. 하지만 형식 자체는 양식에 의해서 제한된다. 양식은 처음에 옷, , 정원 등에서 변화하는 유행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었지만, 예술적 생산 영역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되었고 심지어 철학, 정치학 등과의 관계  에서도 사용되었다. 양식은 어떤 독특한 방식으로 한 시대의 수많은 창작품들을 규정한다. 바로 그 형식 때문에 창작품들은 창작품이 된다. 바로 그 양식 때문에 그 창작품들은 공통적인 것을 가지게 된다. 양식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동일한 양식의 창작품들에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철학 양식에 관한 유명한 분석에서 독일 철학자 딜타이는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실재론을 구분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양식과 관련해서 시각 예술에 직접 적용될 수 있는 네 가지의 양식적 열쇠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관념론적 요소, 실재론적 요소, 주관적 요소, 객관적 요소이다. 모든 예술 작업에는 네 가지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들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이 우월한 상태로 있다양식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종교 일반과, 특히 개신교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특정한 양식이 다른 양식보다 종교적 주제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가? 특정한 양식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고  다른 양식은 본질적으로 세속적인가? 이와 관련한 대답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한 예술적 표현을 배제하는 양식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것은 사물이나 경험의 어떠한 특별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양식과 주제 사이에 명확한 적합성과 비적합성이 있다.  과로, 한 양식적 요소가 우세한지 혹은 여러 양식적 요소들이 조합되는지에 따라서 선호하는 주제가 달라지고, 이는 양식의 의미 분석을 위해 도상학이 강조되게 한다. 위대한 종교 예술이 창조되었던 모든 시대 양식에서 표현적 요소가 우세했다는 것과, 비록 어떤 종교 전통의 재료가 사용되지 않는다 해도 표현적 요소의 지배를 받는 양식에는 직접적으로 종교적 영향력이 있었다.모두 종교적 상징을 표현하는 데 똑같이 적합하지는 않다. 현대 예술에서 표현적 양식의 우세함은 종교 예술의 재탄생을 위한 기회이다. 다양한 양식이 모두 종교적 상징을 표현하는 데 똑같이 적합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양식들은 적합하다. 우리는 종교 예술이 오늘날의 예술에서 표현적 양식을 통해 새롭게 부상한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7)     7 : 실존철학 : 그 역사적 의미

    모든 실존철학자가 반대한 것은 서구 산업사회와 그 철학적 대표자들이 발전시킨, 사상과  삶의 합리적 체계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 체계의 함의는 점차 분명해졌다. 그 함의는 개인의 자유, 인격적 결단, 유기적 공동체를 파괴하는 듯 보이는 논리적 혹은 자연주의적 기제이며, 생명의 활동력을 약화시키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계산과 통제의 대상으로 변형하는 분석적 합리주의이며, 인간과 세계를 그 창조적 근원과 실존의 궁극적 신비로부터 단절시킨 세속화된  인본주의다. 모든 유럽 국가에서 시인과 예술가들이 지지한 실존철학자들은 삶의 이 자기-소외적 형식에 대한 접근법을 의식적으로나 잠재의식적으로 각성했다. 만약 철학을 인간의 자기 실존  해석으로 간주하면 그들은 철학을 매우 풍성하게 한 것이고, 20세기 유럽의 혁명을 위한 지성적 도구와 정신적 상징을 만들어 준 것이다19세기적 상황에서 종교는 그 비매개성을 상실했다. 즉 종교는 인간의 삶에 의심할 수 없는 의미의 방향성과 적절성을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 비매개성에서 상실된 것을 헤겔은 의식적 재해석을 통해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부흥신학에 의해, 한편으론 철학적 실증주의에 의해 공격받았다. 실존철학자들은 재해석, 부흥 신학, 실증주의의 범위를 초월하는 삶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비매개적 경험을,  주관성을 지향했다. 그들은 존재의 창조적 영역을 발견하고자 했으며, 그 영역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구별보다 선행하거나 넘어서는 것이었다실존적 태도와 그 철학적 표현의 양극성이 실존주의 운동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때로는 실존적 요소가 지배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철학적 요소가 지배적이기도 하다. 그들 모두에게서  비판적 관심이 지배적이다. 그들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역사적 운명에 저항하고 있고, 운명에 저항함으로써 그 운명의 완성을 심화시키고 있다. 실존주의는 서구 산업사회 안에서 일어난, 그리고 그 사회에 저항하며 일어난 거대한 혁명의 표현으로, 그 혁명은 19세기에 준비되었으며 20세기에 수행되고 있다.     

8)     8 : 실존철학과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의미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작품에는 심층심리학적 내용이 상당히 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할수 있기 위해서는,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에 공통의 뿌리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존주의는 자유의 가능성과 위험,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죄책까지 모든 면에서 비존재의 위협을 드러낸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인간의 실존적 곤경의 특성이고, 이 점에서 심층심리학과 실존주의는 일치한다. 실존적 구조는 가장 정교한 기술로도 치유될 수 없는 구원의 대상이다. 심층심리학은 먼저 종교문학에서 찾을 수 있는 엄청난 심층심리학적 내용을 재발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영혼의 움직임에 관한 거의 모든 통찰을 이 종교 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라는 단어의 의미를 재발견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자신의 본질적 존재로부터의 분리, 소외이다. 세 번째로 심층심리학은 인간의 의식과 결단을 결정하는 마성적 구조를 신학이 재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 네 번째는 도덕주의가 기독교 신학에서 폭넓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주의에 대한 요구는 신학이 그 전체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거대 형식들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정신분석학이 조직신학에 끼친 영향은 정신분석학이 인간 곤경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실존에 내포되어 있는 질문을 제기하는데 조직신학은 종교적 상징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 리뷰 > 

1.    서 평

인간 정신 생활의 한 차원으로서의 종교의 본질을 규명하고 인간 정신은 종교를 바탕으로 한다고 볼 수 있는데 종교는 그 궁극적인 측면에서 인간 정신의 기저에서 창조적 활동을 이끌고 있으며 인간 정신의 기능에 실체, 궁극적 의미, 판단, 창조적 용기를 제공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종교를 철학, 예술 등과 같이 나열하는 인간 정신작용의 한 분야로 생각해왔던 것을 바꾸어 주는, 종교의 본질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분석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또 종교철학을 두 유형으로 분류하여 소외를 극복하는 방식인 존재론적 방법과 미지의 존재를 만나는 방식인 우주론적 방법으로 구분하고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비교하면서 두 방식을 비교,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 둘은 결국 신인식의 비매개성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고 보여지며 현대 종교철학에서는 두 유형이 갈등과 혼합을 이루며 발전해 나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폴 틸리히는 실존한다는 것을 유한함 혹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정의하는데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역사는 대체로 공간과 시간의 투쟁에 의해서 결정된 것으로 보고 공간과 이교주의 대 시간과 하나님의 대결에서 비극과 불의는 공간의 신들에게 속하지만 역사적 완성과 정의는 하나님에게 속하는데 그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해 행동하면서 자신의  우주에 있는 분열된 공간을 사랑으로 연합시키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독특한 시각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종말론적 구속사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다른 차원에서의 투쟁 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보이며 인간에게는 시간의 최종적 증거가 가능하므로 자신의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지향하며 행동할 수 있다라는 말은 인간이 순교 등을 통해 공간에 예속되는 순환을 끊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파악된다.     

종교적 문화분석과 관련 종교와 문화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실체가 종교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라는 것과 관련 종교와 문화를 아리스토텔레스적 일원론적으로 파악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종교적 문화분석으로 종교언어적 측면, 종교예술적 측면, 인지영역으로서의 치료 심리학적 측면으로 나누고 결국 이러한 모든 작업은 종교를 인간의 실존적 측면과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상징을 존재의 매개로 간주하는 폴 틸리히의 견해가  반영된 이론으로 교회와 문화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하나님 나라는 이 둘을 포함하는 동시에 이 둘로부터 초월해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5장에서는 종교언어의 본질을 상징으로 파악한다. 존재의 매개로 보기 때문에 존재자와 존재 사이에 이성적인 구조를 강하게 설정했으며 언어를 존재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간주하는 하이데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기독교의 가장 우월한 상징으로 십자가를 설정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세 가지 요소, 즉 주제, 형식, 양식을 보여 준다. 폴 틸리히는 이 중에서도 양식의 해독은 예술 자체이고, 모든 예술처럼 대담하면서도 위험한 문제로 보고 있다. 그는 철학양식으로 예술 양식을 구분하고 예술 양식의 이면에는 각기 다른 철학 양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명쾌한 설명은 이 이론을 접하기 전까지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의아케 할 정도로 당연하다. 또한 그는 양식과 주제 사이에 명확한 적합성과 비적합성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는 표현적 요소를 중시하는 현대 예술의 특성이 종교 예술을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는 좋은 조건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내재적인 요소가 결국 표현적인 요소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종교적인 상징을 부여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경제적으로 산업화와 철학적으로 합리성, 인본주의 등을 실존주의자들은 반대한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20세기 유럽의 혁명을 위한 지성적 도구와 정신적 상징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이는 19세기적 상황에서 종교가 직접 인간 삶에 의심할 수 없는 의미의 방향성과 적절성을 제공할 수 없게 되면서 주관성을 지향하게 된 결과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신학을 목표로 고민한 것은 아니 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신학적 세계관 구축에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 되었다. 이는 저자가 지적한 대로 숙명적으로 인간의 실존에 접근하려다 보니 모든 정신기능의 궁극에 위치한 종교에 도달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심층심리학)에는 공통의 뿌리가 있다. 실존적 구조는 가장 정교한   기술로도 치유될 수 없는 구원이 대상이다. 심층심리학을 통해서 우리는 종교문학을 재발견한다. 영혼의 움직임에 관한 거의 모든 통찰을 이 종교 문학에서 찾을 수 있으며 두 번째로는 라는 것이 자신의 본질적 존재로부터의 분리, 소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죄라는 점을 알게 해준 것이다. 세 번째로 심층심리학은 인간의 의식과 결단을 결정하는  마성적 구조를 신학이 재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로써 우리가 결단을 통해 믿음을 선택하는 그 정신적 구조가 분석된 것이다. 네 번째는 도덕주의가 기독교 신학에서 폭넓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주의에 대한 요구는 신학이 그 전체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거대 형식들 중 하나였다. 이 역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이론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끝으로, 정신분석학이 조직신학에 끼친 영향은 종교적 상징이  인간 실존에 내포되어 있는 표현이라는 점인데 이런 점에서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징을 올바로 해석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2.    난해구절과 그 해석

1)     3장에서 표현하는 은 어떤 의미로 씌였는가?

본문에서 시간과 공간은 투쟁하는 들로, 살아 있는 존재자들로, 자체의 을 가진 주체들로 다루어져야 한다  공간의 은 대단하며 언제나 창조와 파괴 둘 다에 작용한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저자는 제 3장에서 시간과 공간을 인격화시켜 자체적으로 움직 이는 생물로 파악하고 있으며 시간의 하나님과 공간의 이교신들의 투쟁으로 설정하고 있고 또 다른 본문에서 운동은 생명의 보편적 특징으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란 방향성과 운동성을 갖는 에너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2)     6장의 표현은 무엇을 뜻하는가?

 6장에서 저자는 표현, 표현력, 표현적 요소, 표현적 양식 등 표현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주요 구절들을 살펴보면 형식은 존재론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존재 자체의 표현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한 예술적 표현을 배제하는  양식은 없다는 것이다”, “위대한 종교 예술이 창조되었던 모든 시대 양식에서 표현적 요소가 우세했다는 것과, 비록 어떤 종교 전통의 재료가 사용되지 않는다 해도 표현적 요소의 지배를 받는 양식에는 직접적으로 종교적 영향력이 있었다. 모두 종교적 상징을 표현하는 데 똑같이 적합하지는 않다. 현대 예술에서 표현적 양식의 우세함은 종교 예술의 재탄생을 위한 기회이다. 다양한 양식이 모두 종교적 상징을 표현하는데 똑같이 적합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양식들은 적합하다 등의 구절에서 표현이 무엇인지를 정의하지 않고는 제 6장을 이해할 수 없는데 본문 자체만으로는 그 의미하는 바를 파악할 수 없지만 폴 틸리히가 존재자와 존재의 기반에 이성적인 구조를 강하게 설정하고 상징을 존재의 매개로 본다는 점에서 제 6장에서의 표현이란 상징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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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성찰의 기술(요점 정리)

신학서적 리뷰 2020. 2. 15. 21:14 Posted by forest38

「신학적 성찰의 기술」 요점정리

(패트리샤 오코넬 킬런 · 존 드비어 공저/권수영 외 2인 옮김)

시작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은 회상되고 체화된다. 그래서 더 깊은 의미를 탐색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사건이 지니는 의미의 가장 깊은 수준을 발생 즉시 측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의 사건들이 어떠한 방어적 태도 없이 성찰 될 때 예수가 말한 비유들처럼 우리에게 하나의 비유가 될 수 있다. 비유는 놀라운 변환을 통해 우리를 그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우리를 흔들어 다른 것을 경험하게 하고, 삶의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한다. 비유는 통찰의 풍성한 자원들이며, 변화로의 초대장이다. 신학적 성찰을 통해 우리의 삶은 비유와 같이 될 수 있다. 신학적 성찰은 지혜와 삶의 방향을 일러주는 주된 원천으로서 기독교 전통 유산에 의존하여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 경험의 성육신(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현존하심)적이고, 섭리(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심)적이며 계시(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의 근원)적인 성격을 갖는다.

믿음으로 가는 길을 찾아

< 신학적 성찰의 필요성 >

전통적으로 인간은 삶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종교적인 전통, 즉 기독교와 기독교적 유산에서 찾아왔다. 하지만 과연 다원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그러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에 기독교적 전통과 지혜가 이러한 질문에 올바른 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종교적 지혜와 가치에 바탕을 두고 전체적인 패턴을 성찰하는 진정한 삶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떠나서가 아니라 그 세상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찾는 것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신학적 성찰을 통해 의미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대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 여정에서의 대화 상대인 기독교적 유산, 문화 그리고 오늘날의 신앙 공동체와 친밀감을 갖게 될 것이다.

< 확실성의 관점 >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실성이 통제해 왔는데, 이것을 우리의 삶이 흔들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이상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지게 된다. 이때 우리는 완전히 달리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필요하다. 확실성이라는 관점으로 기독교적 유산에 접근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접근을 하게 되면 결코 우리가 읽고 있는 21세기의 전제, 가치, 세계관을 성서적 자원과 신학적 전통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성서와 전통에 접근할 때 실제로는 우리가 이미 가진 전제와 해석적 입장이 반영된 방식으로 접근 함에도 불구, 우리는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있는 중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우리의 삶에 성서적 혹은 종교적 진리를 매우 단순하게 적용하도록 하는 기독교 전통에 대한 접근은 신학적 성찰을 방해한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두려워하면서 획일화된 기독교의 문화적 일치로 도피하려는 시도는 오늘날의 세계에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 진정한 신학적 성찰은 의식적으로 우리의 현재적 삶을 위해 전통을 해석 하고, 또한 전통을 위해 우리의 삶을 해석한다.

< 자기 확신의 관점 >

통제 속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은 자기 확신의 관점이 가진 매우 유혹적인 측면 중 하나이다. 이러한 관점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종종 자신만을 위한 관심사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이것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우리가 욕망하는 목표를 제대로 이루어낼 수 있는지 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가 자기 확신의 관점을 가지게 되면 과도한 확신과 통제를 하도록 유혹 받게 된다. 우리가 상황과 공동체에 의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인식하는 것을 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확신의 관점에서 살아갈 때 사람들은 종종 확실성을 확보 하기 위하여 전통에 의지하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오래된 외부적 권위에 복종시키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확신이라는 관점이 자기 의존을 통한 확실성의 추구라는 것이다.

< 신학적 성찰의 필요성 >

확실성과 자기 확신이라는 배타적 관점들은 우리가 반성적이고 헌신적이며 자비 로운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들은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고,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힘, 가치, 역할 등의 특별한 위치를 옹호하기 위하여 상황 과는 상관없는 몇몇 전통의 가르침들을 반복하도록 한다. 그것들은 같은 목적으로 전통의 다른 측면들을 무시한다. 진정한 신학적 성찰이 없다면 기독교인들은 개인적 성숙을 이룰 수 없으며 우리 에게 걸맞은 통전성을 가질 수 없다. 지성과 감성, 인식과 행위를 포함하는 신학적 성찰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의 훈련을 제공한다. 우리는 진정한 신학적 성찰 없이 그리스도인에게 걸맞은 사역을 온전히 해낼 수 없다. 제 1세계의 문화적 가치들이 점차 인본주의적 비전과 기독교적 비전 모두를 약화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통전적이며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을 주장하고 표현해야 한다.

< 탐구의 관점 >

확실성과 자기 확신이라는 배타적 관점을 대신할 대안은 탐구의 관점이다. 간혹 우리는 선입견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즉각적인 반응을 하려 하는 습관적 경향으로부터 벗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혼란스러움을 경험할 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지 않고 눈을 가린 채 헤매는 경향이 있다. 현실을 깨닫기 전에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다시 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길을 찾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주목하고 집중하는 것이다.

신학적 성찰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이 신앙의 선진들을 위해 그들의 시대 속에서 작용했던 것처럼 그것이 우리의 시대 안에서도 유효하다고 믿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믿는다면 우리 삶의 경험과 기독교적 전통사이의 대화는 매우 진솔하고 진실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는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가오는 질문들에 우선순위를 부여할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 요약 >

신학적 성찰은 삶의 경험과 기독교적 유산이 가진 지혜가 대화하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성장시킨다. 기독교적 성찰을 하기 위해 우리는 개인적 경험과 세계, 종교적 유산이 가진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확실성과 자기 확신의 관점은 이러한 우리의 능력을 차단시켜 버린다. 그러나 탐구의 관점은 그것을 가능 하게 한다. 변혁적인 신학 성찰은 이러한 탐구의 관점 안에서 이루어진다.

통찰을 향한 움직임 : 지혜에 이르는 인간과정

< 경험 >

경험을 정의하기

경험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들이다. 적극적이든 수동적이든 우리가 참여자 일 때 발생한다. 그리고 경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발현되는 감정, 생각, 태도, 희망 등을 의미하는 내적 차원들을 가지고 있다.

경험 안으로 들어가기

우리의 경험에 다시 들어감으로써 성찰을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성찰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실제 경험 안에서 우리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경험의 내적, 외적 차원을 알아차리고 그 두 영역을 정확하게 묘사하려 하는 주의 깊은 시도를 포함한다. 통찰로의 움직임 첫 번째 단계에서 유보해야 하는 질문은 바로 “왜”이다.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건의 해석을 가져온다. 무엇이든 우리가 초기에 해석을 시작할 때 그 해석은 대체로 적당하지도 않고 만족스럽지도 않다. 우리가 그 상황을 성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급하게 “왜”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려 할 때 실제 경험은 은폐된다. 이것은 우리를 너무 이른 시기에 사건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발생한 일을 쉽게 합리화시켜 버린다. 이것은 또한 경험이 가진 계시적 힘을 제거해 버린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경험 속에서 진중하게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고 머물러 있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사건 대신에 해석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판단 없이 우리의 경험 안에 머물러 있기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경험에 대한 섣부른 해석을 자주 한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나 작은 토론 그룹 안에서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상기시켜 보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을 때 지루했다거나 화가 나거나 짜증나 있는 스스로를 발견해 본 경험이 있는가? 만약 당신이 그랬다면 당신은 경험으로부터 일찌감치 멀리 떨어져서 합리화에 사로잡힌 태도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듣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풍부한 묘사와 판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은 영적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훈련이며 반드시 연습해야 하는 일이다. 성찰을 할 때 우리는 해석과정을 늦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 사건을 단지 기술하길 원한다. 그 순간에 우리는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거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기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 감정 >

감정을 정의하기

우리가 경험으로 들어가 그 경험을 어떠한 판단 없이 세밀하게 기술하려 할 때 우리는 그 경험이 감정들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감정은 우리의 실재에 반응하고 느끼는 우리의 능력이 육화된 영혼이다. 이것은 우리 본성이 가진 본질 이다. 우리의 감정들은 의미를 향한 인간의 욕구를 예증하는 것인데 이러한 욕구는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실재를 좀 더 친밀하게 알고자 하는 욕구이자 하나님을 좀 더 온전히 알고자 하는 욕구이다. 우리는 때때로 감정을 기술할 때의 해석적 판단에 혼란을 느낀다. 이것은 통찰을 향한 움직임을 중단시키는데 그것이 우리가 진정한 감정과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성찰에서의 감정

상황에 반응하는 감정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하더라도 잠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는 너무 강력해서 이것이 성찰을 방해할 수도 있다. 습관적인 해석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너무 성급하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경험을 잘 못 해석하게 만든다. 우리가 스스로를 감정에 직면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감정을 성찰 과정의 한 부분으로 여기지 않을 때, 우리는 경험이 진정한 의미를 간과하게 된다. 진정한 의미는 성찰로부터 드러난다. 그것은 결코 한 가지 경험의 의미를 취한 결과가 아니며, 그것을 다른 것과 접목시킨 결과도 아니다.

통찰을 향한 움직임에서, 우리가 감정과 직면하게 되는 이 시점에서 수행해야 할 과제는 수용적으로 그 감정들에 주의를 집중하고 그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환영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메시지를 담고 있는 감정은 그 내용이 유쾌한 것일 수도 있고 매우 불편한 것일 수도 있다. 이 같은 성찰에 있어서 우리는 감정을 문제로 파악하거나,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 감정에 이름 붙이기 : 영적 훈련

이 시대에 필수적인 기독교 금욕주의의 실천은 우리가 명확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어떠한 판단도 없이 감정에 이름을 부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원초적으로 우리 감정에 공포를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음 에도 불구하고 통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비통제성은 감정을 무서운 것이거나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 고통이나 적대감 또는 기쁨 등의 강렬한 감정 경험은 통제력의 상실과 취약성, 초월적 힘이라는 인식을 우리에게 가져온다.

 

만약 우리가 통제를 높이 평가함으로써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분노와 우울을 느끼게 만든다면, 그것을 우리로부터 삶의 기쁨을 앗아갈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문제로서 인식할 때 우리는 그것을 피하고자 한다. 만약 무엇인가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면, 마치 그것이 우리 소유인 양 우리는 그것을 계속하려고 노력하고 집착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피하고 싶은 감정을 나쁘다 하고, 가지고 싶은 감정을 좋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적절히 그러한 감정을 피하거나 경험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피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감정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성을 소멸시키며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능력을 방해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성찰 능력을 차단시키기 때문이다.

♣ 감정에 주목하고, 그것에 이름 붙이는 것을 연습하기

잠시 동안 숨을 깊이 내 쉬고 조용해진 가운데 당신 몸의 신체감각들에 주목해보라. 발끝에서부터 상체 중심을 통해 흐르는 감각에서부터 눈과 머리까지의 신체 감각들을 어떤 단어들로 묘사할 수 있을까? 당신의 몸이 당신의 감정에 정확하게 이름 붙이도록 하는 것은 당신이 감정 안에서 허덕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상황 안에서 통찰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다음 번에 어떤 판단의 잣대를 가지고 당신의 감정에 대한 질문에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멈춰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지금 반응하는 나의 신체감각은 무엇인가?

이러한 감정들에 집중하기 : 이미지에서 감정으로 여행하기

이미지는 신체감각을 넘어 한 단계 더 나아가 틀을 형성함으로써 우리의 질문을 상징화한다. 감정이 우리의 질문을 구체화시킬 때, 그리고 그것을 이미지의 수준으로 변화시킬 때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 다시 들어가는 것과 우리의 감정에 직면하는 것은 위험하면서도 온전한 희망을 경험하는 것이다. 감정없이 바라보기라는 문제는 제 1세계 주류 문화의 특성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객관성과 통제를 가치 있게 평가하고 주로 회피나 부정을 통해 감정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통찰을 향한 움직임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체화된 삶을 통해, 그리고 신체와 마음을 경직시켜 우리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밀어내는 것을 그만둘 때 드러 나는 감정을 통해, 우리를 통찰로 이끌어간다. 그 누구도 감정을 느끼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현명해 질 수 없다.

♣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는 연습하기

당신이 당신 인생에서 분노나 공포에 사로잡혔던 순간을 회상해보라 그것은 어떠했는가?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는가?

이러한 감정들에 집중하기 : 이미지에서 감정으로 여행하기

당신이 당신 인생에서 분노나 공포에 사로잡혔던 순간을 회상해보라. 그것은 어떠했는가?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는가? 당신은 당신이 느꼈던 감정에 대해 공포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그 감정을 부정했는가? 당신이 그 감정과 거리를 두려고 했을 때 무엇이 발생했는가? 강렬한 긍정적 감정이 생겼을 때를 상기해보라. 무엇이 발생했으며 그 감정이 스쳐갈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당신의 하루 중 10분 동안, 반복되는 일상의 과정으로 당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라.

< 이미지 >

이미지를 정의하기

우리는 상상의 언어로 감정을 형상화하고 그 감정의 소리를 듣는다. 보통의 대화에서 이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종교적 · 문학적 전통은 이 과정에 부각된다.

이러한 예시에서의 이미지들은 통찰을 위한 움직임에 있어서 상상력의 힘이 가진 중요성을 드러낸다. 이미지들은 시각적이거나, 촉각적이거나, 후각적이거나 청각적이거나 혹은 이것들의 조합이 될 수 있다.

이미지의 작용

이미지들은 여기서 마치 언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한 단어를 그와 유사한 의미를 가졌으면서도 그 자신만의 독특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과 비교할 수 있을 때, 그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다. 한 특정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정의들과 유사어의 관계들로 구성된 ‘정황’(context)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에게 경험과의 감정적 연결을 제공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성찰적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이미지는 경험에 내재한 감정 안에 존재하는 삶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본래의 사건에 정서적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또한 이미지는 경험이 주는 감정의 즉각적 강렬함으로부터 우리를 살짝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우리의 주의를 경험의 의미로 향하도록 만든다.

< 통찰 >

숙고하기와 질문하기 : 이미지는 통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미지는 상황의 다양한 측면들이 통전성을 가지도록 통합시키며 동시에 우리가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개방시킨다. 이미지는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 도록 함으로써 우리를 삶에 대한 습관적 해석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이미지는 우리가 숙고할 수 있도록 초청한다. 상황을 포착하고, 강화하며, 변화 시키는 이미지의 능력은 그 이미지들을 강력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미지를 통하여 상황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는데 본래의 서사적 구조 에서 상징적 구조로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핵심을 포착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미지는 통찰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는 본래의 상황을 다르게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관점으로 우리의 상황을 인도한다. 우리는 이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 자신을 새로운 통찰, 새로운 깨달음과 변화, 잠재적인 계시적 사실에 개방되도록 만든다. 통찰은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함으로써 촉발되는 것이다. 통찰이 발생할 때 그러한 과정이 어디에서 발생하던지 간에, 우리는 단어나 상징 속에서 그것을 포착하여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당신의 삶 속에서의 이미지와 통찰

당신이 삶 속에서 경험했던 두 가지 의미 있었던 통찰을 상기해보라. 이것들이 어떻게 당신에게로 왔는가? 어떤 감정이 그것들에 수반되었는가? 당신의 기억에서 무엇이 이러한 통찰을 붙잡고 있는 것인가? 이 통찰들을 기억하는 데 있어 그와 연계된 이미지가 작용하였는가?

< 행동 >

만약 우리가 의지가 있다면, 통찰은 행동을 촉발한다

우리가 배움의 결과로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통찰은 불완전하다. 기독교적 방식 자체는 앎 혹은 이해를 고양시키는 따위의 문자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취한 진리가 성육화되어 우리가 세계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의 과정이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통찰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서 그것을 받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새로운 영토로 옮겨 가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개방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통찰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신중하게 새로운 행동을 계획하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질문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결정해온 것을 행동으로 따를 필요가 있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 우리 삶에서의 행동을 위한 통찰

당신 삶 속에서 통찰에 따라 행동하려 했고, 몇 가지 방식으로 당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려 했던 때를 떠올려보라. 당신은 성공했었는가? 당신은 이러한 변화를 전적으로 당신 스스로 이루었는가? 당신이 삶 속에서 변화를 만들려 할 때 어떤 감정이 일어났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 요약 >

인간에게 있어서 의미에 대한 욕구는 물리적 생존을 위한 욕구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것들을 이해하고 우리 삶의 통전성, 일관성, 중요성을 반영하는 해석적 패턴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고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삶을 향한 의지는 위축되고 만다. 이것은 우리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행위를 좀 더 잘 분별하 도록 만든다. 깨달음을 위한 통찰을 향한 움직임은 우리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신학적 대화를 하도록 만든다.

인간성찰의 한 형태로서의 신학

< 인간성찰에 있어서의 신학의 자리매김 >

통찰을 향한 움직임은 우리가 어떻게 삶 속에서 새로운 이해에 이르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우리가 일어나는 사건들을 자기의식 없이 직관적으로 생각하든 그 상황들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든지 간에 우리는 이것을 통해 새로운 인식과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통찰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의 묵상과 깊은 사고가 우리를 삶의 의미들로 이끄는 것이다. 기독교적 유산은 삶의 경험들과 우리의 성찰을 통합시킬 수 있는 종교적인 지혜를 제공한다. 우리 삶의 경험 속에 드러난 의미를 우리의 기독교적 유산에서 나온 지혜에 사려 깊게 통합시킬 때, 우리는 그것을 신학적 성찰이라고 부를 수 있다.

< 관점과 신학적 성찰 >

통찰은 우리의 삶을 기독교적 유산에 비추어볼 때 발생하는데, 우리가 성찰 가운데 채택하게 되는 관점은 바로 통찰의 질과 신뢰성에 영향을 미친다. 확실성의 관점과 자기 확신의 관점은 성찰을 방해하며, 진부한 통찰과 빈약한 이해로 이끈다. 반면 탐구의 관점은 심층적 성찰을 격려하고, 놀라운 통찰과 변혁적 이해로 이끈다. 확실성의 관점을 가지고 성찰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의미나 놀라움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이러한 방식으로 성찰할 때 어떠한 변화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신학적 성찰은 우리 입안에서 곰팡내 나는 맛을 남기고, 우리의 가슴 속에 무기력감을 남긴다. 우리가 기독교적 유산의 지혜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권한 부여를 경험하고 변혁적 통찰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유산을 탐구적 관점에서 비롯된 통찰로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종교적 유산과 우리 자신의 경험 모두를 이해하는 것이 전 생애에 걸친 신앙여정의 과정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성찰하는 상황의 모든 차원들을 기꺼이 재경험한다. 우리는 우리의 해석적 틀이 개정될 필요가 있다는 가능성에 개방되어 성찰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우리는 성찰과 경험에 의해 변화되어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지혜의 자원인 기독교 전통이라는 풍성한 유산에 의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기독교 전통이 우리의 특정한 경험에 어떤 말을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그것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진리의 적용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 으로 말해주는 해방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탐구적 관점에서 비롯된 성찰은 자신의 경험과 기독교적인 종교 유산 안으로 동시에 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탐구적 관점안에 이 양자, 즉 경험과 기독교적 종교유산의 진정한 대화가 존재한다. 이러한 과정은 행동과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새로운 통찰과 새로운 이해를 향해 열려 있다. 진정한 신학적 성찰은 이러한 탐구적 관점 안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종교적 유산을 성찰의 과정 속으로 가져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 신학적 성찰 >

신학적 성찰은 우리의 종교적 유산, 기독교적 유산을 탐구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성찰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이것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피정을 하는 동안이나 하이킹 중일 때 우리는 초월적 차원에 의해 감동을 받게 되어 자동적으로 우리 경험을 해석하기 위하여 기독교적 전통의 이미지와 개념으로 움직여 간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종교적 유산과 삶의 경험을 성찰로 이끄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훈련은 우리가 사용하는 성찰적 과정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훈련은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을 열 수 있다. 훈련된 성찰은 우리의 유산에 대한 이해와 기독교인으로의 특별한 소명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자연적인 신학적 성찰에서 벗어나 좀 더 신중하고 훈련된 신학적 찰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좀 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이 세가지 방식 속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확장시키고 정교하게 함으로써 신학적 성찰을 위한 틀에 이르게 된다. 이 세 가지 변화는 ① 경험의 개념을 확장 시키기 ② 무엇을 성찰할지를 결정하기 ③ 사려 깊게 종교적 유산과 성찰을 통합 시키기를 포함한다.

< 신학적 성찰을 위하여 경험을 확장시키기 >

경험은 우리가 직접적인 참여자가 되는 사건들과 우리가 수동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사건들을 포함한다. 모든 사건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의 상호 관계를 포함한다. 경험은 한 개인과 타자들, 장소들, 사건들, 물질적 조건들, 그 사람의 정체성과 정황, 세계를 구성하는 문화적 요소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관계의 흐름이다. 경험은 우리가 물에 사는 물고기라 가정한다면 우리가 헤엄치고 있는 강물과 같은 것이다.

행동(살아 있는 이야기)

통찰을 향한 움직임에 있어서 우리는 경험과 살아 있는 이야기의 특정한 부분에 집중함으로써 성찰을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이루는 이야기들 혹은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살아 있는 이야기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행동과 그와 상관관계를 가진 생각, 감정, 전망을 포함한다. 이러한 생각과 감정이 인식의 전면에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이야기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야기를 행동 자원 이라고 부른다. 통찰을 향한 움직임을 위해 바로 이러한 자원을 가지고 시작한다.

전통

우리의 종교적 전통은 경험의 또 다른 측면을 포함한다. 이러한 전통자원은 권위 있는 성서, 교의적 가르침, 교단과 관련된 지도자들의 이야기, 성인들, 교회의 역사, 교회의 공적 문서 등을 포함한다. 신약복음서는 이러한 자원의 일부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 또한 하나의 전설이 된 성 크리스토퍼의 이야기 등도 이러한 자원의 일부이다. 그런데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성서는 이러한 전통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기독교로 회심한 사람에게 있어서 기독교와 그들의 토착 종교의 전통은 신학적 성찰을 위한 권위 있는 자원이 될 수 있다. 다른 종교 전통으로 회심한 기독교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 간의 대화는 여러 개의 권위 있는 종교 전통 자원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21세기의 상황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사람들은 복수의 종교 전통자원 안에서 신학적 성찰을 만들어낼 것이다.

문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경험의 한 부분이 문화이다. 문화는 무척 크고 압도적인 자원이기 때문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쉽게 들여다보기 위하여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좁은 의미로 정의되는 문화, 곧 상징, 규범, 전제, 가치, 과학, 인공물 그리고 인간집단의 철학 ② 인간 집단 내의 구조화된 상호작용의 패턴, 즉 경제적 상호관계 및 정치체계, 교육 체계, 법, 가족을 구성하는 방식 등 사회적 구조 ③ 기독교인들이 이제야 관심을 쏟기 시작하는 물리적 환경, 즉 인구, 쓰레기, 상업폐기물, 핵폐기물, 공기의 청정도, 야생 밀림의 보존과 같은 이슈들이다. 이중 두번째인 사회적 구조들에 근원적으로 집중하면서 시작되는 신학적 성찰의 방식을 사회분석(social analysis)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신학적 성찰의 방식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일상의 삶을 구성하는 사회적 구조를 인식하고 깨닫는 방법과 그것들을 복음의 빛 아래에서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다.

위치

행동, 전통, 문화와 달리 모든 사람들은 어떠한 위치를 점한다. 이것이 경험의 네 번째 측면이다. 위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논쟁 중에 근거로 삼는 태도, 의견, 믿음, 신념을 가리킨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통상 적인 해석이나 우리 문화 속의 어떤 것에 대한 해석, 우리 전통에 대한 해석 등을 정확히 표현하려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성찰하기 위하여 우리의 역할을 깨닫게 되면 위치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위치는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다. 우리의 위치를 드러내고 변화시키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신앙적 성장의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위치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그 반대로 그것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치는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행동, 전통, 문화 그리고 위치는 신학의 네 가지 자원을 가리킨다. 이 네 가지 자원은 경험의 여러 측면들이다. 즉 개인과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의 흐름, 장소, 사건, 물질적 조건, 사람들의 정체성, 상황, 세계를 구성하는 문화적 요소가 그것들이다. 이 네 가지 자원은 성찰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경험 속에 흘러가고 있는 구성 요소들을 분리시키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성찰을 위하여 경험의 흐름은 멈춰져야 한다. 우리는 경험 전체를 성찰할 수 없다. 우리는 경험을 성찰하기 위하여 경험의 다룰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하다. 따라서 경험을 성찰할 때 우리는 하나의 사건 또는 이슈를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경험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사람, 장소, 사건, 그 밖의 요소들 간의 상호 관계라 할 수 있는 강의 흐름으로 표현할 수 있다. 경험은 항상 내적 차원과 외적 차원을 가지며, 항상 주어진 순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을 성찰이 가능하도록 여러 측면으로 나눈다 하더라도, 어떤 특별한 사건의 의미는 오직 우리가 이러한 측면들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자원들과 그 자원들의 상호적 관계에 집중할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 성찰을 위해 경험의 중요한 이슈에 이름 붙이기 >

우리는 선택되어진 사건의 중요한 이슈를 문제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경험의 중심문제, 긴장,이슈, 주제, 무제, 놀라움을 이르는 말이다. 왜 선량한 아이가 고통을 받는가? 나는 어떻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과 내가 선택한 직장에서 성공하고 싶은 바람을 모두 이룰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약물 의존에 빠져 있는 배우자와 함께 살 수 있는가? 왜 유해 폐기물 소각로는 불공평하게도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 주변에 위치하는가? 이 산을 아름답게 만드는 근원은 무엇인가? 문제의 핵심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탐구와 해석을 이끄는 것이다. 성찰을 위해 문제의 핵심이나 사건의 진원지를 확인하는 것을 배우고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정교한 과정이다. 여기서 경험을 조심스럽게 비판 없이 기술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종종 사건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우리는 스스로를 문제의 핵심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는 또한 상황의 감정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신학적 성찰을 위한 경험의 요소를 명확히 드러내길 원한다. 이러한 감정적 에너지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상황에 대한 우리의 전체적 혹은 체화된 반응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한 관대하면서도 비판적이지 않은 자세로 이야기 하는 것은 이러한 에너지가 잘 드러나도록 만든다.

< 문제의 핵심을 기독교 유산의 지혜와 대화시키기 >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 우리는 경험을 기독교 유산으로 가져오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힘이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성찰의 방향을 제시한다. 우리는 신앙의 선진들이 가졌던 지혜를 통해 우리의 통찰을 발전시키고 검증하길 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 행동, 사건에 대한 전망과 종교적 전통의 믿음, 행동, 선망이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원한다. 성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 민간전승, 역사적 사건들 등 유산으로부터 발생한 모든 것들은 새롭게 해석될 수 있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좀 더 풍성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는 사건에 대한 이전의 해석들을 무분별하게 강화하며 우리의 경험을 전통에 억지도 대입하려고 하는 유혹은 언제나 존재한다.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두려움, 자존심, 소심함과 같은 것들은 한쪽으로 제쳐두고, 새로운 이해를 위해 대화의 주된 문제를 부각시켜야 한다. 진정한 대화는 놀라움과 기쁨과 냉정함으로 가득한 상호적 움직임이다. 이것이 우리가 문제의 핵심 혹은 가장 에너지가 충만한 사건의 초점을 기독교 유산의 지혜와 대화시킬 때 목표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과 종교적 유산의 지혜 사이에 대화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대해 기술적 이름을 붙인 것이 상관관계(correlation)이다. 두 개를 함께 접목시키는 것과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을 상관관계라고 생각 하면 된다.

< 성찰의 열매 거두기 >

경험과 기독교 유산 사이의 대화인 신학적 성찰은 다른 모든 대화들과 같이 결말이 있다. 일과 가족이 주는 압박과 식욕과 수면욕 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과 같다. 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대화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온 진리를 오랫동안 생생하게 기억하기도 한다. 어느 때는 우리가 저널이나 일기장에 새로운 통찰을 쓸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대화의 결과로서 새로운 방식 속에 행동하면서 새로운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진정한 통찰은 우리의 두려움을 잠재운다. 진정한 통찰은 우리를 타인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우리 자신을 비난하도록 만드는 데 사용해왔던 판단들을 해체시켜 버린다. 진정한 통찰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확하게 인지하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포함한 실재를 좀 더 정직하게 보도록 만든다. 우리가 하나님의 힘과 사랑을 좀 더 명확하게 보고 느낀다면 타인과 함께 느끼는 공감의 느낌이 발현될 것이다.

< 성찰을 위한 틀 >

경험의 몇 가지 측면에 집중하기

문제의 핵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경험을 기술하기

기독교 유산의 지혜와 대화하면서 문제의 핵심을 탐색하기

이러한 대화 속에서 삶의 새로운 진실과 의미를 드러내기

< 신학적 성찰을 경험하기 >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체화할 수 있는 삶의 사건이 당신의 마음 속에 떠오를 때까지 다음의 질문에 머무르라.

중심감정을 발견해보라.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를 때까지 그러한 감정들이 당신의 몸에 스며들게 하고 그것이 서서히 숨 쉬게 하라. 당신에게 떠오른 이미지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 는가? 당신에게 떠오른 이미지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장소로 당신에게 어디를 제안하고 있는가? 다시 당신의 이미지를 가지고 고요하게 앉아 있으라. 성서에 나오는 어떤 이야기, 본문, 주제가 떠오르는가? 하나의 성경구절이 떠올랐다면 그것을 읽으라. 이러한 전통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미지로 두 질문에 대해 대답한 것과 전통으로 두 질문에 대답한 것을 비교하라. 이미지로부터 나온 대답들과 전통으로부터 나온 대답들 사이의 대화는 당신을 어떤 식으로 놀라게 하고 각성시키는가?

< 통찰을 향한 움직임으로부터 신학적 성찰까지를 잇기 >

행동 자원의 살아 있는 이야기들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질문은 기독교적 주제와 제자도에 초점을 맞춘다. 이야기에서 비롯된 핵심 감정이나 이미지를 탐색하기 위한 질문들은 이러한 성찰을 신학적으로 만든다. 성찰의 과정은 경험과 전통을 잇는 명확한 가교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틀이 신학적 성찰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만든다.

개인의 신학적 성찰

< 자신의 방식으로 신학적 성찰 실천하기 >

정직성

정직성(honesty)은 신학적 성찰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정직성은 필수적인데, 그것은 신학적 성찰에서 환상이나 자기기만, 또는 인간이 주저할 만한 어떤 것도 없이 우리의 경험을 들여다보는 첫 번째 걸음이기 때문 이다. 우리의 경험을 감지하거나 기술하도록 배우는 일은 힘든 일이다. 우리의 경험을 마지 못해서 감지하는 것은 원죄로부터 내려오는 유산의 일부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결점이어서 우리의 존재에 관해 불안과 두려움을 준다. 만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술한다면, 정직하게 기술하라.

신학적 성찰은 우리를 초청해서 강화의 순례를 감당할 것을 요청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과 모호함을 극복하고 이 여행을 감당한다면, 또한 경험을 기술하고 다시 들어갈 수 있기만 한다면, 삶은 보석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틀림없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삶이기에, 이것이야말로 아직 던져보지 못한 질문을 찾게 하며, 알고 있으나 깨닫지는 못하고 있는 답변들에 대한 단서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인간의 마음에서 올라오게 되며, 의미 추구의 본능에 의해 축적된다. 이것들이 신학적 성찰의 근본을 이룬다.

시간

신학적 성찰을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한 기술적인 실행이 우리의 존재에 스며들 때가지는 배우고 정련하는 과정을 겪는다. 머리와 가슴의 훈련된 성찰 습관은 존재를 꿰뚫어서 우리 정체성과 행동의 일부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의 기술은 그룹이 함께 긴 시간 속에 훈련할 때, 좀 더 잘 배우고 익힐 수 있다. 만일 이런 그룹이 불가능하다면, 각 개인들은 이 책의 자료들을 사용해서 신학적 성찰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의 헌신을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가 빠른 답변과 급격한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사는 문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법을 배우고 신앙생활에 성찰을 녹여 넣기란, 춤이나 악기를 배우는 것처럼 시간이 걸린다. 이 과정이 쉬워 보여도, 처음엔 서툴고 또한 좌절하나, 후에 흥미진진해 진다. 그리고서야 편안해질 것이다. 마치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든든한 신앙적 자원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공부, 기도, 대인관계 기술들

신학적 성찰은 공부와 기도, 그리고 대인관계 기술들에 기반을 둔다. 우리가 신학적 성찰을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일부로 삼았을 때,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적 유산에 대해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 성서, 교회사나 예전 속 종교적 전통에 대한 공부 없이, 신학적 성찰을 한다면, 개인이나 그룹의 지식적 수준을 넘어서 깊어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신학적 성찰은 개인적 혹은 공동체의 기도에 그 뿌리를 둔다. 신학적 성찰은 기본적인 대인관계 기술들을 전제로 한다. 성찰할 수 있는 존재의 일부분은 “나”라고 말하게 한다. 따라서 진정한 신학적 성찰은 우리를 하나님과 기독교 전통에 대해 개별화 되고 사적인 관계로 이끌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을 피하기 위해 종교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신학적 성찰은 일상의 삶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의 유일성과 한계들 그리고 풍성함과 함께 말이다. 오직 여기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

< 개인적 성찰을 위한 지침 >

신학적 성찰을 향한 우리의 태도

신학적 성찰은 다양한 차원에서 울 안에서 작용하는 과정이다. 종종 통찰과 감각적 변화가 즉각적인 지각 아래의 깊은 차원에서 벌어진다. “빠른 교정”(quick fix)을 기대하거나 어떤 상황에나 해당하는 “즉각적인 해결”(immediate solution)을 바라는 것은 성찰적 과정을 벗어나게 해서, 더 깊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성장의 가능성을 잘라내어 버린다.

성찰에 형과 틀 만들기

각자가 사용하는 신학적 성찰의 특정한 방식에 관계없이, 우리는 성찰 중 일어날 수 있는 감정, 이미지, 통찰, 숙고들에 대해서 형과 틀을 만들어야 한다. 외재화(exteriorizing)는 성찰의 열매들을 기억하고 흡수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것은 우리의 해석적 틀에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경험의 의미들을 만들어 가는 데 신뢰할 만한 전략으로 발전될 수 있다.

성찰을 위해서 문제의 핵심 파악하기

무비판적으로 경험을 이야기하는 연습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이야기하고 확실히 규명하는 첫걸음이 된다. 성찰 중 다가오는 사건을 묘사해서 기술해보면 그 상황 속에서 우리의 판단을 알아차리게 된다.

성찰의 리듬

때로 신학적 성찰을 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서서 망설 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도 문제이 핵심 중에 잡아낸 이미지가 너무도 강력 해서 더 기도하도록 이끌리거나, 우리가 이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밀려 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성찰 모으기

개인의 신학적 성찰에서 일어나는 통찰과 의향들을 영적인 친구들, 안내자 혹은 신앙 그룹과 가능한 방법으로 적절하게 나누는 것은 무척 좋은 일이다.

근본적 지침

우리는 탐구하는 자세로 스스로 경험하여서 신학적 성찰로 다가가기를 원한다. 신학적 성찰을 하는 데 있어서 목적하는 바는 경험과 기독교적 전통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다. 탐구의 자세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놀라운 선물들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통찰을 행하기 >

기도

통찰은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 통찰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고 해도 말이다. 기독교 전통은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 감사의 기도를 먼저 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하셨음을 상기시킨다.

계획

어떻게 통찰을 실행할지를 계획하는데 한가지 단순한 방법은 통찰의 결과로 행할 수 있는 가능한 행동을 모두 적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각각의 행동들을 검증해 본다. 그 행동이 구체적인가? 관찰 가능한가? 현실적인가? 만일 필요하다면 이러한 질문을 묻고 난 뒤, 행동의 목록을 수정한다.

사람들

우리의 삶은 모두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수십 가지 요청으로 가득 차 있다. 만일 우리가 신학적 성찰로부터 얻은 통찰에 근거해서 행동하기로 결심했다면, 시험 삼아 만든 계획에 대한 점검 능력을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한 바로 그 지점이다.

< 개인의 신학적 성찰 >

신학적 성찰에는 다음에 나오는 아홉 과정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신학적 성찰의 기본적 틀에서 발전된 것이다. 이는 경험 속 몇 가지 측면에 집중하고 문제의 핵심을 규명하며, 기독교 전통의 지혜를 통해서 그 문제들을 다뤄주며 일상의 삶에 있어서 새로운 의미와 진실들을 적용해 나가는 것이다.

삶의 상황으로 시작하기

전통으로 시작하기 1

이 성찰은 기독교 전통의 일부분들과 함께 행해질 수 있다. 예컨대, 성자들의 이야기, 교회사의 사건들이 자료가 된다.

전통으로 시작하기 2

성서의 이야기로 그 이야기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경건 서적을 읽으면서 묵상과 성찰을 하는 것은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문화적 텍스트로 시작하기 1

슬로건, 광고, 소설, 수필, 위대한 그림들, 사회적 기관들, 사회적 갈등, 삼림 등이나 혹은 문화적 소재들은 성찰을 하는 데 있어서 출발점을 제공한다.

문화적 텍스트로 시작하기 2

문화적 텍스트들로부터 시작된 성찰은 문화적 정황으로부터 전통과 우리의 경험으로 흘러 들어간다.

주제로 시작하기

때로 어떤 주제가 우리의 삶 속에서 떠올라 성찰로 초대하기도 한다. 교회력에 따른 특정한 절기, 중요한 삶의 전환점, 그리고 다른 사건들은 우리의 주의를 탄생, 중생, 슬픔, 창조성, 관계 등 특정한 주제에 집중하게 한다.

개인적 위치로 시작하기

위치라는 말은 우리가 기꺼이 방어하고자 하는 확신들이다. 신앙 여정의 어떤 부분들은 우리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하도록 한다.

종교적 경험으로 시작하기

종교적 경험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자연, 위대한 예술 이나 음악, 책, 개인적 투쟁 그리고 더 많은 상호교류들이 종교적 경험을 깨운다.

다른 사람의 신학 서적 읽기

신학, 영성, 그리고 사역에 관한 책과 글들은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이의 신학 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입장과 관련해서 저자의 위치와 입장을 따라 가는 것이다.

♣ 신학 서적을 비판적으로 읽기

신학서적을 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일관성(coherence)과 적절성(adequacy)의 개념을 포함한다. 일관성은 본문의 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적절성은 저자가 어떻게 자기의 위치를 표현했는가에 관해서 언급하다.

♣ 신학서적과 창의적으로 대화하기

창의적인 대화를 위해서 다음의 질문이 필요하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계획에 적합한 통찰들, 적용점들, 혹은 접근방식들이 무엇인가? 이러한 통찰 이나 적용점들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신학적 성찰 그룹 인도

< 사역자원으로서 신학적 성찰 >

신학적 성찰은 삶을 변화시킨다. 신학적 성찰 훈련들은 우리로 섬광과 같은 신학적 통찰을 얻을 수 있게도 하지만 그것은 점차 경험을 지각하고 해석하는 지속적 틀로 움직여간다. 그것은 우리가 과거의 경험을 신앙의 빛 아래에서 더욱 적절히 재해석하려는 것을 그치고, 일상의 삶을 더욱 신앙적으로 살아가게끔 초대하는 것이다. 신학적 성찰은 우리를 더디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만성적 수치심과 불안 너머로, 은혜의 풍토를 조성해서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지도급 위치에 있는 사역자들은 신학적 성찰을 사용하는 방법에 관하여 배워야 한다는 특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전문적인 팀을 이끌어가고 봉사자들을 조직하고 지원할 수 있다. 또는 사업, 농업, 정부, 교육, 복지 그리고 예술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영적 여정을 함께 하기도 한다.

< 신학적 성찰을 인도하기 전 준비사항들 >

신학적 성찰 : 종교적 성숙을 향한 부름

다른 사람의 신학적 성찰을 인도하는 일은 결코 가볍게 다뤄져서는 안된다. 사람들을 신앙의 여정의 부분으로서 신학적 성찰을 하도록 초대한다는 것은, 그들과 자신의 신앙 전통과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라서 타인에게 이 여정을 시작하도록 요청하기에 앞서, 우리는 자신들의 동기와 헌신을 명백하게 살펴야 한다. 그룹을 인도하는 데 있어 복잡한 기대와 동기들을 가지고 신학적 성찰로 이끄는 일은 실로 힘겨운 과업일 수 있다. 가끔씩 참여하는 사람들이 “옳은(right) 결과를 이루는 수행을 했는가에 대한 선입관을 갖기도 한다. 진정한 성찰을 하는 데 지름길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기독교 전통이 자동적으로 자신들의 입장, 즉 하나님에 관해서나 사회에서의 여성의 직업, 지위, 그 밖의 것들을 확고하게 붙들어 주지 않으면 몹시도 불편해 한다. 그들은 이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 단 하나의 적절한 기독교적 답변이란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 가면서, 깊은 혼란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신학적 성찰로 부르는 상황적 요인들

사람들을 신학적 성찰을 향한 여정으로 초대할 때, 촉진자들(facilitator)은 반드시 헌신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앞의 장에서 정직, 시간, 공부, 기도, 대인관계 기술들을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밝혔었다. 신학적 성찰의 촉진자들은 자기 자신과 신학적 성찰을 촉진시키는 참여자들과 관련하여 좀 더 정확하고 솔직한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 촉진자는 그 그룹이 공부, 기도, 그리고 대인관계 기술을 발달시켜 신학적 성찰의 질을 높이는 데 특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공중 기도와 그룹원들을 지지하는 것에 있어서 모델이 되고, 신학적 성찰의 에너지 자원이자 토대를 제공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촉진자가 효과적인 상호작용 기술을 반영하는 규범들을 세우고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 신학적 성찰을 사용하는 지침들 >

사람(People)

사람들은 신학적 성찰을 한다. 만일 우리가 이 활동 속에서 그룹을 인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며, 그들에 대해서 무엇을 또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그들은 추상적이고 상상력을 사용하는 사고를 편안하게 사용하는가? 대인 관계적 기술들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함께 신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들의 미묘한 차이까지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목적(Purpose)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 목적을 분명하고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종종 어렵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목적이 명확할수록, 우리는 적절한 성찰적 설계를 선택할 수 있게 되고, 사람들을 인도하는 과정 중에 다림줄처럼 도움이 된다. 어떤 신학적 성찰도 우리의 목표는 맥락을 조성하는 것이다.

변수들(Parameters)

변수들은 특정 그룹이 신학적 성찰을 하는 데 있어서 탄력성 있는 경계나 제한점을 말한다. 멤버들은 서로를 알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 낯선가? 대규모 그룹이 되어야 하는가 혹은 소그룹이어야 하는가? 사람들의 바깥 삶에서 그룹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이렇게 주어진 질문들에 답변하는 일은 어떤 종류의 성찰적 설계가 적절한지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제시한다.

임재(Presence)

신학적 성찰은 촉진자의 에너지와 집중된 임재를 요청한다. 만일 우리가 아주 큰 그룹과 작업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작업표를 나눠주거나 개인 일지를 통하여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도록 하거나 혹은 서로가 친밀하게 머물면서 해야만 하는 일 없이 성찰적 과정을 이끌 수 있다.

과정(Process)

사람들, 목적, 변수들 그리고 임재를 일단 고려했다면, 우리는 신학적 성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특정한 과정이나 설계를 고르거나 발전시킬 준비가 되었다. 그 설계는 우리가 함께 작업해 나갈 사람들에게 반드시 적절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제한점들, 즉 그룹 크기, 시간 제한과 같은 것들도 고려해야 한다.

< 더 큰 상황을 기억하기 >

그룹과 신학적 성찰을 하는 데 사용되는 설계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룹을 촉진시키고 이끌어갈 기술에 대한 자원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신학적 성찰은 대부분 그룹에서 어떻게 함께 작업하는지, 함께 명확하게 말하는지, 서로를 어떻게 지지하며 도전하는지를 가장 자유스럽게 배워가도록 하는 과정이다.

신학적 성찰을 촉진하는 것은 숙련된 실천(artful practice)이다. 우리는 성찰을 위해 훌륭한 설계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설계가 실제로 신학적 성찰이 아닐 수 있다. 신학적 성찰에서 촉진자가 해야 할 주된 업무는 진정 그룹을 사려깊게 올바른 신학적 성찰로 안내하는 것이다.

신학적 성찰을 위한 설계 만들기

< 경험에 집중하거나 자원으로부터 자료를 규명하고 선택하기 >

구별되지 않은 경험은 너무 광범위해서 보람 있는 성찰의 주제로 삼기가 어렵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경험들을 주로 자원(sources)으로 알려진 어떤 경험의 측면들(aspects)로 나누어 놓는다. 자원은 우리가 신학적 성찰에 편입시키기를 원하는 관련 있는 데이터를 제공한다. 신학적 성찰을 위한 설계는 자원들에서 취한 자료에 집중하면서 시작할 수 있다. 신학적 성찰을 위한 목적, 변수들 그리고 사람들의 고려를 따지다 보면 시작할 수 있는 적절한 지점을 만나게 된다. 설계를 만드는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경험으로 향하도록 만들기 위해 어떠한 질문들을 구성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 문제의 핵심을 규명하기 또는 성찰의 핵심을 규명하기 >

일단 어떤 자원을 사용할지, 어떻게 데이터를 규정하고 선택할지, 그리고 어떤 자원을 가지고 성찰을 시작할지를 결정하고 나면, 다음 단계는 각 개인과 그룹이 문제의 핵심을 어떻게 규명하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없지만, 더 풍성한 성찰 과정에 도움이 되도록 말할 수 있는 지침들은 존재한다. 성찰을 위해서 이미 겪은 핵심을 언급하려면 그 경험의 정서적 에너지들을 붙들어 두어야만 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는 경험들을 성찰 하고 있는 것이다.

< 대화 일으키기 혹은 자원으로부터의 자료와 상관관계 짓기 >

상관관계를 정의하기

상관관계(correlation)란 경험을 기독교 전통의 지혜와 대화로 이끌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경험과 전통 사이에 주고받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으로 자원으로 부터의 자료를 함께 직조하지 않으면, 우리의 성찰은 지루하고 현학적인 것이 될 것이다. 경험과 전통, 양 방향으로 경이로움과 통찰들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서는 마술책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 가에 대한 이야기 모음이고, 그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 기독교인과 이방인들을 다루는 이야기다. 사실 성서 그 자체로도 신학적 성찰의 결과물이다. 교인들은 성서 안에 자신들의 경험적 의미를 밝혀냈던 것이다.

상관관계를 위한 전략들

두 개 이상의 자원으로부터 자료를 연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각각의 자원으로부터 취한 주제를 탐색하는 질문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을 대조하고, 발전시키며 광범위하게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서 대화는 진전된다. 여기에는 행위자원, 전통자원, 문화자원, 행동자원이 있다. 성찰은 이 모든 자원들로부터 시작된 질문들을 비교하고, 대조하고, 발전시키며 그리고 광범위 하게 반응하는 방식에 의해 계속된다. 여기에 소명과 부르심의 주제에 대해서 일반적인 질문들과의 상관관계를 위한 주제 구성의 두 번째 예가 있다. 우선 행위와 전통의 자원에서 꺼낸 자료들이 규명되어야 하고, 소명과 부르심의 주제와 관련된 질문들을 선택해서 사용해야 한다.

< 새로운 진리와 생의 의미 규명하기 >

신학적 성찰을 위한 설계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이 단계의 중심 과제는 참여자로 그들이 성찰 과정에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환적인 순서로서 그룹이 상관관계라는 탐색적인 대화로부터 나와서 판단하고 명료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신학적 성찰은 우리 신앙을 만들어 가는 데 다양한 수준에서 끝나기 때문에 우리는 통찰과 이해가 지속해서 발전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더 성찰된 것을 가지고 돌아와 그룹의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그것을 체화하는 데 좋은 방법이다. 촉진자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신학적 성찰하기는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무엇이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심오하거나 지각을 움직이는 것일 필요는 없다. 질문, 기도문, 이미지 혹은 변화된 위치가 그렇게 할 것이다. 때로는 성찰로부터 취하는 것들이 명백한 변화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 설계를 빌려오거나 만들기 >

신학적 성찰을 위해 과정을 조성하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것보다 쉽다. 특정한 과정이 끝난 뒤 정기적으로 회고하면 우리가 자기 의식화의 방법론을 발달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신학적 성찰을 위해 가용한 자원들을 파악하는 것도 방법론적 레파토리를 풍성하게 한다. 적어도 프로그램을 많이 연구하면 함축된 신학적 성찰에 개입할 수 있다. 문화 자원의 측면에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신학적 성찰을 하게 될 때 사회적 분석에 관한 중요한 문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결론

기독교인은 신학적 성찰로 부름 받았다. 우리의 삶을 기독교 전통과 대화하도록 가져가는 기술적인 실행은 우리뿐 아니라 전통을 위해서도 훌륭한 통찰을 자라게 한다. 우리는 탐구적인 자세로 우리의 삶과 기독교 유산들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우리의 경험에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면서 종교적 전통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고 신뢰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은 삶의 경험과 종교 유산이 가져오는 진솔한 대화를 통한 통찰들을 환영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확실성(certitude)과 자기 확신(self-assurance)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요구한다. 이는 우리가 그토록 강하게 붙들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손해를 끼쳤던 신념과 신조를 새롭게 개정한다. 무엇보다도 신학적 성찰은 우리를 진리, 의미와 함께 묶어두어, 어느 개인이나 세대가 이해했던 것보다 더 깊어지게 한다. 이를 통해서 전통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복음을 세상과 나눌 수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전통은 죽게 될 것이고,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신학적 성찰로 부름을 받는 것은 이질적인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삶에 있어서 진솔하고 풍부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에 반응하는 것이다. 섬세하고 자각적인 신학적 성찰은 의미를 찾는 일상적인 방법을 세워나간다. 이 책은 신학적 성찰이 통찰을 향한 움직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신학적 성찰을 위한 틀을 찾아서 기독교인들이 다양한 자원들을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신학적 성찰의 과정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그러한 성찰이 경험과 전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 의해 사용될 수 있게 했다. 결국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전통 두 가지 모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통합적 접근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기독교 유산의 능력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귀한 열쇠가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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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서론

. 문제 제기 나. 목적 진술

2. 개인 구원과정에서의 성령의 역할

. 개인 구원에서의 성령의 정체성

. 개인 구원 과정에서의 성령의 역할

1) 회심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

2) 성화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

3) 영화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

. 종말론적 구원론과의 관계  

3. 결론

4. 참고문헌 

 

개인구원 과정에서의 성령의 역할

 1.    서론

가.  문제제기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구원을 기본으로 하여 타 종교와는 차별화되는 종교이다.[1]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정확한 정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 과정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서 구원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감안, 개인 구원과정에 대한 정의와 함께 그 순서, 각 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심층적으로 조명해보기로 한다.   

나.  목적 진술

개인 구원과정에서 성령의 역할을 조명하고 각 구원 단계에서 우리의 실천적 과제를 도출해내며 종말론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개인구원과 종말과의 관계를 도출한다. 아울러 본 논문에서는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구원과정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 철학 이론을 도입하여 정통신학의 구원론과 비교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2.    개인 구원 과정에서의 성령의 역할  

가.   개인 구원과정에서의 성령의 정체성

여기서는 성령론 전체 중에서 개인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만을 상세하게 고찰해 것인데 구원 과정과 관련하여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① 의인과 동시 중생하며 여기서부터 초기의 성화가 시작되며, ② 그후 신자로서의 회개와 믿음으로 온전한 성화, 곧 성결하여지며, 마침내 ③ 영화의 단계를 포함하며, 이는 종말론적인 목표를 향해서 계속 상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2] 여기서는 개인 구원의 단계를 대별하여 회심으로부터 시작해서 지속적인 구원 과정으로서의 성화, 영화로 나누되 칭의는 회심에 포함하고 중생 및 양자됨의 단계는 성화에 포함하여 살펴본다.    

개인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이라는 주제를 논의하기 위해 먼저 성령을 정체성을 살펴보면 성령은 창조시부터 하나님의 대리역할을 하였으며 그 존재는 인간 생명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하였고 생명을 지탱시키는 존재로서 성령의 임재는 성령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임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자원들을 제공하여 주었다. 선지자들은 성령을 온전하게 체험하게 될 장차 도래할 시대를 예견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성령은 종말론적으로 존재하였다. 예수는 바로 성부로부터 오는 성령을 사람들이 영접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리하여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일회성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초월적인 영역에 존재하던 하나님의 영이 세상 속으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내재적 삼위일체로서 성령은 성령의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인정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성부와 성자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결합하기 위해 성령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랑으로서의 성령이 성부, 성자와 함께 완전한 하나님 이시며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가 완전한 인격체이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도 완전한 인격체인 것이다. 경세적 삼위일체의 개념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사를 이루고 완성시키는 실제적 사역을 감당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전면적으로 개입되어 있으며 모든 생명 속에 편재해 있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능력이다. 믿는 자들 안에 들어와 계신 성령은 우리의 삶을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든다. 성령은 만유에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며  우리로 하여금 천국 경험을 하게 해준다. 이로써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지금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며,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종말론적 공동체의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나.   개인 구원과정에서의 성령의 역할

1)   회심(회개와 믿음)에서의 성령의 역할

성서는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강조한다. 구원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이 놓여 있는 영원한 맥락의 한복판에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 우리가 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본질상 관계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우리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시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악된 인간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교제에 동참하게 한다.[3] 그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나와야 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신비로운 위격인 성령은 은밀하고 조용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위를 우리로 하여금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성경과 함께 우리의 경험은 구원이 즉각적이기도 하며 또한 점진적이기도 함을 보여준다.[4] 심지어 우리는 이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성령은 회심과정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 인간사자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과 우리의 마음을 밝혀서 복음 안의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고 각 개인에게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성령은 회심 체험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요한은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8) 라고 하여 예수께서 성령이 이러한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죄의 깨달음에 대하여 성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성령은 또한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도록 부르시는 역할을 인간 사자들을 통해 중재해 준다. 바울은 회심으로 이끄는 과정을 역순으로 간략하게 서술한다( 10:1-15) : 개인의 응답, 믿음, 들음, 전함, 사자들을 보냄. 이처럼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듣게 하는 것이 필수적인 첫 절차이다. 이 때 그 역할을 맡고 있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존 웨슬리는 우리의 의가 되신 주라는 설교에서 믿기 전의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회개는 그가 말하는 감리교회 세가지 큰 교리, 즉 회개, 신앙, 성결에서 신앙의 문간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이는 구원의 문인 신앙으로 들어갈 수 없다.[5]

회심에서 성령의 사역은 인간 사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그것을 듣는 자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이해력을 제공해 주는 역할도 한다. 바울은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라고 하여 이러한 역사를 천지창조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십자가의 대속 죽음 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누가는 루디아의 회심사건에서 이러한 역학을 단순 명료하게 표현한다.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6:14) 존 웨슬리에 따르면 믿음은 의인의 유일한 길이지만 회개와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필요함을 강조함으로 복음주의적 개혁자들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신앙 지상주의의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믿기 전의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회개는 그가 말하는 감리교회 세가지 큰 교리 즉 회개, 신앙, 성결에서 신앙의 문간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이는 구원의 문인 신앙으로 들어갈 수 없다. 또한 회개와 동시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강조하면서도 조건부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회개와 그 열매는 다만 간접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믿음은 직접적으로 필요하다고 분명히 구분한다.[6] 

성령은 회개와 믿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권능인데 회심 과정에서 각 개인에게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성령의 조명사역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과정이었다면 성령의 능력 주심은 우리의 의지와 연관되어 있다. 죄의 종 노릇 하는 우리는 성령의 부르심에 자유롭게 순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도움아래 우리는 그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는데 인간 사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그 메시지를 통하여 듣는 자가 응답할 수 있게 역사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회심을 통하여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인도한다. 우리 마음 속에 새로운 영적인 생명이 창조되는 것이다. 성령은 회심을 통하여 칭의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인 지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임재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며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하나님 및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우리에게 필수 불가결한 섬기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1] 김동호, 「삶이 바닥부터 흔들릴 때」(서울, 바이블리더스,2007),  9

[2]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2007), 174

[3] 스탠리 그렌츠, 「조직신학」 신옥수 옮김 (파주: CH북스, 2017), 646

[4]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173

[5]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171~172

[6]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171~2

한편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 회개와 관련해서 마음의 변화 (메타노이아 : 회개)를 통해서 선에 대한 성향을 자라게 할 수 있고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사람의 결단으로 이 회개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도덕법칙과 나의 행위, 좀 더 궁극적인 목표로 지향하는 거룩함에 도달한다는 것이다.[1] 따라서 그는 악은 인간이 자유를 바탕으로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인간의 힘으로 죄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성화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바울의 고백과는 차이를 보인다( 7:23-25). 칸트의 주장은 윤리적 삶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성화과정과 일부 유사한 듯이 보이지만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등 구원의 주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실제 사역을 성령께서 담당하신다는 것을 도외시한 철학이론으로 기독교리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이론인 것이다. 칸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면서도 이렇게 구원론과 관련 철학적으로 다른 주장을 한 것이다. 바울은 칭의라는 용어를 믿음 생활의 시작과 최종적 완성 모두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다. 칭의는 복잡하고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최후의 심판을 예시하고 마지막에 있을 무죄선고를 앞당겨서 평결한다. 따라서 의롭게 된 신자들이 누리는 기독교적 실존은 장차 완성될 형벌의 용서에 대한 예시이자 미리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며 또한 종말론적이고   최종적인 무죄 평결에 대한 현재적 보증이다.[2] 

2)   성화 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를 닮게 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맞도록 살게 해주는 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인도하는 성화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하신다. 성령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 안에 실현 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신다. 성화에는 지위적 성화와 상태적 성화가 있다. 지위적 성화는 우리가 그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인 반면에 상태적 성화는 우리가 성령과 합력해서 필사적인 노력으로 우리의 죄를 씻고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성령의 인도 하에 생겨나는 것이다. 결국 이것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2:14)의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존 웨슬리는 사람이 칭의될 때 그는 거듭나게 되며 성령으로 났기 때문에 그것은 성화의 완성은 아닐지라도 성화의 문에 들어간  것은 틀림없다. 인간 영혼이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인간의 주체성의 내면으로부터 활동하는 것은 성령이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를 살리시며 성화시키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고난이라는 우리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자신인데, 곧 성령이신 하나님이시다. 성화는 성령이신 하나님의 행위인데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영혼을 죄로부터 해방하시며 성령 충만에 의한 사랑으로 온전케 하시는 은총이다.”[3] 라고 주장하였다.    

성화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다. 이 과정에서 성령은 우리의 자발적인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이 부분이 어떤 면에서는 구약의 거룩보다 신약의 성화가 훨씬 더 어려울 수도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다는 의미에서의 거룩은 레위기에서 정한 규정대로 하면 되고 횟수도 정해져 있는데 비해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매일 새롭게 되어야 하고 상상으로도 죄를 범해서는 안되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완전한 성화는 '죽음이 임박' 해서나 혹은 '죽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0:10)의 말씀이 무색해 진다. 즉 성서는 이러한 성화과정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은 성령이 죄와 영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5:17) 우리의 영적인 병기( 6:10-17) 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활용하여야 한다(벧후 1:3)고 설파하고 있다. 이처럼 성화과정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육체에 거하고 있는 죄()와의 싸움을 해야 한다. 로마서 6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게 하지 말고라 하여 성화과정에서 끊임없이 죄와 싸워야 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인간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데 근본 악은 감성이나 자연적인 경향성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 경향성 그 자체는 도덕적으로 볼 때는 중성적이며 근본 악은 자유롭게 선택된, 법칙에 위배되는 준칙에 의거한다. 악의 성향이 실제로 있다는 것은 인간의 태도에 대한 경험을 통해 입증된다. 악은 모든 도덕 준칙의 근거를 오염시킨다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따라서 바울이 발견한 것처럼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악한 원리와 선한 원리 간의 싸움이 전개된다[4] 하여 바울과 유사한 논리를 전개한다.

또한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서 성경을 읽되 깊이 묵상하고 은혜를 사모하며 읽어야만 한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감동과 은혜를 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참으로 성령 충만한 삶이 되고 무슨 생각을 하든지 영의 생각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성경을 떠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길은 없으며 성경을 떠나서는 영의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이다.[5]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최종 목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완전한 성화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4:14) 까지 도달 하게 하는 것으로 언제 우리가 여기에 도달하는지에 대해 신학사적인 논쟁이 있어 왔는데 여기서는 존 웨슬리의 주장과 함께 사도 바울의 견해를 살펴보되 성령이 역사하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짚어보도록 한다.

  존 웨슬리는 완전주의로 불리우는데 그는 구원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며, 따라서 마음 속에 일어나는 어떠한 변화도 성령의 역사라는 점을 믿었다. 웨슬리에 의하면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도 크리스천이 아니다. 그는 성결이나 기독자 완전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웅대한 구원역사는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현실의 삶 속에서 온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신약성서는 현세에서 완전한 성화에 도달한다는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그 반대로 일생을 통하여 자기가 완전한 성화에 도달했다는 것을 부인하였는데( 3:12,14),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바울은 여기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신자들에게 끊임없이 성령으로 충만할 것( 5:18), 성령을 따라 살아갈 것 ( 5: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 ( 5:25), 성령의 불을 소멸하지 말 것(살전 5:19)을 권면하였다. 바울은 현재로서는 자신이 추구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없다는 쓰라린 체험을 견뎌내야 했다. 왜냐하면 완전함을 요구한 율법  바울이 중생한 사람으로서 즐거워한 율법( 7:22) – 은 완전함을 이루는데는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가장 깊은 자아, 진정한 ”) 하나님의 법(명령),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7:25).[6]

3)   영화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

성화 과정은 일생 동안 매일 매일 갱신되면서 진행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과 관련된 우리의 체험을 종말론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 마지막 궁극적인 체험을 영화(glorification)”라고 하는데 이 영화는 성령이 우리를 회심케 하여 완전한 성화를 이루게 하여 우리의 구원을 종말론적으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와 관련하여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많은 언급을 하지 않고   있으나 바울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8:30)라고 하여 사실에 대해 확신함으로 인해 과거시제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과거시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한가지는 전통적인 해석방법으로 이를 미래에 확정적으로 일어날 사건이기 때문에 구원의 종말론적 확신에 근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론인데 이것은 베드로가 온전한 구원이 종말론적 사건  때까지 우리를 위해 보존되어 있다고 말한 것(벧전 1:3-5)과 일맥 상통한다. 결국 이 이론은 성화과정이 일생 동안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가 개인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와 관련된 우리의 체험의 궁극적인 측면(영화)을 바라보게 되어 우리의 구원이 공동체적인  실재라고 주장하고 있다.[7]

  또 한가지의 해석방법은 영화롭게 하셨다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존 웨슬리의 주장처럼 현세에서 완전한 구원이 가능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성경에서 이 구원의 시기의 문제는 명확하지 않고 아주 모호하게 기술을 해놓아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구원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시간 개념을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지만 하늘나라에는 시간이 없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것이므로 시간이 없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도 없다. 따라서 비록 일시적일 수는 있어도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얼마든지 올 수 있으며 그것은 오늘 우리 삶의 자리를 살펴서 알 수 있는데 오늘 우리 자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으면 구원을 얻은 것으로 영화롭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도 실제 활동주체는 모든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성령이시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때에 천국 백성을 최종 변화시키는 일을 마무리 하실 것이다( 8:11,13-17). 그 때에 성령은 우리를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존 전체를 포함할 것 (요일 3:2)이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여( 5:22-23)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물리적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8:11)고 선언하였으며 요한의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 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지나갔음이러라”( 21:4)는 선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기독자 완전이나 온전한 성화, 성결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개념상의 차이는 있다. 대체로 구분되는 점은 성화는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체험적인 의미가 강하며, 성결은 온전한 성화의 경험을 통해 정결케 된 결과적 상태를 뜻하며 기독자 완전은 신앙인의 인격적인 성숙을 주로 의미  한다. 린드스트롬은 기독자 완전이란 인격의 완전이며 이는 곧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개념상의 차이를 볼 때 온전한 성화의 경험을 통해 성결케 되어 기독자 완전의 보다 높은 정도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세에서의 완전은 끝이 아니다. 완전한 자라도 계속 은혜 안에서 성장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최종적인 의인을 얻어야 한다. 이를 최종적인 안전 또는 영화라고 한다. 현재 우리는  성결해도 연약성을 지니며 무지나 실수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다. 비록 육체가 죄는 아닐지라도 육체 안에 있는 동안은 죄의 가능성은 상존한다.[8] 

[1] 강영안, 「강교수의 철학이야기」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5), 246~7

[2] 알리스터 맥그레스, 김기철 역「신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 2017), 772

[3]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56~7.

[4] 호남신학대학교, 「신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386

[5] 김동호, 「삶이 바닥부터 흔들릴 때」, 84

[6]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정옥배 옮김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8), 409.

[7] 스탠리 그렌츠, 「조직신학」 신옥수 옮김 , 643

[8]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224

현재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는 자는 장차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을 것이요 지상에서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천상에서도 천국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이미 현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들어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있지만 지금 여기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 가운데서 살고 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이며, 그것이 하늘나라라고 불리우는 것이 그것이 (어느 정도) 영혼 안에 열려진 하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현재 있는 것과 장차 올 것 즉 지금과  아직 아니의 사이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현재의 삶이 앞으로 도래할 영원한 세상을 위한 훈련도장이요 준비장소이다. 현재의 삶은 거주민이 아니라 영원한 거처로 가는 도중에 이방인과 나그네로서 며칠 혹은 몇 해 동안 지나가는 장소임을 분명이 인식해야 한다. 웨슬리에 있어성화는 현재의 칭의 즉 현재의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성화가 최후  심판에 있어서의 궁극의인과 궁극구원의 필요 조건이 된다.[1]

여기서는 구원론의 영화와 유사한 개념인 스피노자의 최고 선  철학과 비교해 보기로 한다. 에 따르면 신은 인격이 전혀 없는 자연이며,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구원을 기대한 처소는 철학이었다. 그것도 고 중세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철학이 아니라 갈릴레이가 제창한 새로운 과학에 적합한 철학을 통해 구원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① 참된 선은 존재하는가 ②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오직 그것만으로 영혼이 자극될 수 있는가 ③ 그것을 발견하여 얻은 뒤로는 그것을 통해 영원토록 지속적인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탐구하기로 했는데  기독교의 영화의 개념으로는 최고 선을 상정하고 성령의 개념으로는 이성과 도덕을 설정했는데 이 이성과 도덕(윤리적 삶의  실천)을 통해 최고 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얼핏 보면 기독교의 구원론과 유사한 것 같으나 기독교의 구원론이 경세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속사를 설파한 데 비해 스피노자는 사람 자신의 이성과 도덕을 주장한 점에서 완전 다른 것이다.[2]

가.  개인 구원의 종말론적인 특징 

구원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이 놓여 있는 영원한 맥락의 한복판에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 우리가 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본질상 관계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우리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시기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구원을 종말론적으로 방향 설정한다는 것은 구원의 순서와 관련된 유일하게 적절한 출발점이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 체험 전체는 하나님의 자신의 목적성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구원의 순서의 엄밀하게 신학적인 요소들이  뒤따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성을 예정이라고 말한다. 예정은  영원한 생명 또는 영원한 사망을 위한 개개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신자들을 그의 구원 사역의 최종적인 목표(영화)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도이다. 우리는 그의 아들을   닮아가도록 예정되어있다. 그리고 영화를 이루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인 우리에 대한 그의 미리 아심, 영원한 아심으로부터 생겨난다.[3]

하나님의 의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선택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적 이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한다. 그러므로 선택은 공동체와 결부되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통합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에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위임하셨다( 28:16-20). 따라서 우리는 도처의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공동체의 도래를 통하여 절정에 달하게 될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에 기여하는 일에 초대한다. 최후의 추수에서 절정에 달하게 될 역사의 전개는 누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고, 누가 영원한 공동체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를 결정해 준다. 성도의 견인은 성령의 임재가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을 보장해 준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루이스 벌코프는 견인을 신자의 마음속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계속되어 완성에 이르게 하기 위한, 신자 속에서의 성령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정의한다. 자신 안에서 성령이 진정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부르심에 충실한 상태로 달려갈 길을 마칠 것이다.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은 언젠가는 믿음으로 되돌아올 것인데 이는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그의 구원 사역을 완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그들은 결코 그들의 배교 행위로부터 돌이키거나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를 통해서 그들은 결코 진정으로 회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라는 성경의 언급들은 의미심장하다.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러한 권면들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따라서 계속해서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능력을 주시는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임재는 그들이 달려갈 길을 마치고의로운 재판장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을 때에 분명하게 드러난다(딤후 4:8). 기독교의 역사관은 반드시 종말이 있는 역사관이다. 성경은 인간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 회복과 완성이라는 계획에 성령이 역사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종말론적 구속의 역사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4]

3. 결론

경세적 삼위일체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사를 완성시키는 전 과정을 담당하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능력으로 창조  창조 행위에 전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모든 피조물에 편만한 존재이다. 오직 성령에 의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게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종말론적 공동체의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회심 과정에서 우리는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성령께서 조명하시어서 우리는 마음을 열었으며 우리의 의지는 성령께서 주신 능력이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부르심에 거역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인간 사자로 하여금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어 듣는 자가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신다. 이때 역사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회심할 때 우리는 거듭난다. 우리 마음 속에 새로운 영적인 생명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으로 인한 칭의라고 부른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인 지위가 변화된 것이며 성령의 임재는 우리에게 순종할 자유를 가져다 주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성화과정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성령께 협력해야 한다. 구약의 거룩보다 신약의 성화가 훨씬 더 어려울 수 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에서 정한 규정대로 하는 거룩이 겉으로의 거룩이라면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매일 새롭게 되며 상상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는 진정한 거룩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완전한 성화는 '죽음이 임박' 해서나 혹은 '죽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존 웨슬리처럼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어떻게 이해하든지 이러한 성화 과정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와 영적인 전쟁을 벌이고 계신 성령을 도와 영적인 병기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활용해서 강력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는 일생 동안 갱신되면서 진행된 성화가 종말론적 구속사의 마지막  궁극적인 체험을 의미하는데 이 영화는 성령이 우리를 회심케 하여 완전한   성화를 이루게 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 때에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완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를 닮은 모습으로 바뀔 것인데 거기에는 성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물리적 신체까지 변화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8:11)고 선언하였다.  

성경의 역사를 종말론적인 구원사라고 한다. 성령께서는 이 모든 과정을 구체적으로 주도하신다. 역사는 하나님의 의도 아래 일직선으로 구원 목적 으로 순서 지어졌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종말론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결연한 의도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예정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도라는 관점에서 성도 개개인은 각자 구원을 이루겠지만 하나님의 의도라는 관점에서 우리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통합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에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위임하셨다. ‘땅끝까지 전도하라는 사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공동체를 통해 클라이맥스에 달하게 되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일이 된다. 우리는 도처의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공동체의 도래를 통하여 절정에 달하게 될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에 기여하는 일에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여야 한다.  끝.

[1]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350, 352

[2] 철학이야기(스피노자)

[3] 스탠리 그렌츠, 「조직신학」 신옥수 옮김 , 637, 639

[4] 주해홍, 「말씀이 삶이 되어」 (서울: ㈜ 도서출판 에스라, 2018), 40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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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레스, 김기철 역「신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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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 「논문 작성 이렇게 해라」. 서울: 시대의 , 1984.

허성갑, 「히브리어헬라어직역성경」 . 음성: 말씀의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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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레니즘이 유대교에 미친 영향

- 참고도서 : 마틴헹엘 저/임진수 역 신구약 중간사

- 참고도서 : D.S.RUSSELL Between the Testaments

- 참고도서 : 존 브라이크 저/박문제 역 이스라엘 역사

- 참고도서 : 가톨릭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성서

 

< 목차 >

1.  문제의 제기

2.  헬레니즘이 유대교에 끼친 영향

1)     알렉산더의 원정과 팔레스타인(B.C. 333/331)

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통치

3)     셀류코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

4)     마카베오 혁명과 묵시문학, 수전절의 유래

5)     하스몬 왕조 시대 종파의 고착화와 유대교 사상의 변천

6)     유대교를 제외한 철학, 종교, 문학, 언어 문제로서의 헬라화

3.   기독교의 산파가 유대교 

 

 

1.   문제의 제기   

말라기의 마지막 경고를 보면 "시내산 언약을 기억하라(4:4)"라고 한다. 이것을 다시표현하면 율법을 지키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서 율법을 내려 주셨으며 또 말라기 이후 400여년의 기간 동안에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 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율법공동체인 유대교를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침묵기라고 하는 헬레니즘 시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신 기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갈라  디아서 4 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라고 시작하는데 여기서 는 헬라어 "카이로스"와 상대되는 개념인 "크로노스" 로 일정한 기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것을 직역하면 "시간의 충만함이 와서"로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 말라기 이후 침묵하신 400여년간 역사를 주관하시어 메시아를 보내셨다. 이처럼 성경적 증거 ( 7:14 )와 역사의 전개(헬라시대와 로마시대)를 거쳐서 하나님께서는 세계 언어로서 헬라어를 통용시키고 제국을 활용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방에 전파하신다.

헬레니즘 시대의 일정기간 동안 유대인들에 관한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구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늦게 쓴 부분들과 정경에 속하지 않는 유대인 저작들도 직접적 역사적 지식은 대단히 부족하다[1]. 이 시기의 역사 연구는 마카베오서 같은 외경에 상당 부분 의존해왔다. 여기서는 유대교의 태동과 형성과정과 관련하여 알렉산더의 등장과 이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류코스 왕조 시대, 로마의 등장과 발전, 마카베오 혁명과 하스몬 왕조 시대 등 역사의 흐름과 함께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헬레니즘이 유대교에 끼친 영향을 위주로 분석하여  유대교가 어떠한 형태로 완성되었으며 유대교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돌아선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그러했는가. 그것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또 이것이 기독교의 탄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추적해보도록 한다.

2.    헬레니즘이 유대교에 끼친 영향

유대인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헬라화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하였는데 헬라는 새로운 그리스에 의해 확장  되었으며, 점차 야만인의 세계를 헬라화하였다. 그리고 평화의 감시자는 그들에게 해당하는 지역을 할당해 주었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헬라화의 문화 프로그램은 로마 시대에서야 비로소 인정받는 보편적인 유산이 된다.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상호간의 융합이라는 주제는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하며 모순적인 현상들을 말한다. 따라서 우선은 그 현상을 통해서 논쟁이 되는 다양한 개념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것들과 연결된 헬레니즘헬라화의 현상들을 보다 세밀하게 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2].

유대인은 포로기 시대를 거치면서 그 이전의 민족국가와 제도 등은 이미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여야 했고 재건공동체로서 유대감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그들의 정신적 유대감인 율법을 도구로 하여 율법공동체로서의 유대교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 공동체가 마침내 유대교라는 율법공동체로  일관성 있게 나아가게 된 기초를 놓은 것은 에스라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B.C. 4세기와 3세기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헬레니즘은 필연적으로 유대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마침내 이에 대한 저항의 결과로 나타난 마카베오 혁명시기와 하스몬 왕조 시기에  유대교라고 특징 지울 수 있는 일련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  알렉산더의 원정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은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헬라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 왔다. 이것이 B.C. 5세기, 4세기에 들어와 더욱 빈번해 졌다. 간접적이긴 하나 유대인들이 불가피하게 헬라 정신과 접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헬라 정신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3]

전세계를 통일하여 하나의 언어, 하나의 관습과 헬라적 도시의 건설 등 범헬라적인 이상을 구현하려는 포부를 가졌던 알렉산더는 B.C.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패퇴시키고 이집트를 정복한다. 이 과정에서 유다와 사마리아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내륙지방은 알렉산더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알렉산더는 B.C.323년 바벨론에서 죽었지만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오리엔트는 급속한 헬레니즘이 시작되었다[4].  

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통치시대와 알렉산드리아 문학  

알렉산더 사후 그의 왕국 중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동쪽 지역은 시리아 일대의 셀류코스 왕조와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분할된다. 알렉산드리아를 거점으로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팔레스타인을 거의 한 세기 동안 통치한다. 이들은 유다의 내정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온순한 신민으로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살았을 것이다. 이집트의 유대인들은 이내 헬라어를 그들의 모국어로 삼았다. 헬라제국 시대 이전부터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이집트, 바벨론 각 지역에 흩어져 있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알렉산더와 그 후계자에 의해 가속화되어서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숫자가 훨씬 많게 되었다[5]. 히브리어는 적어도 B.C. 2세기 말까지 계속 사용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디아스포라 사회에서는 명맥이 끊어져 갔을 것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이 경제적인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면서  여러 문화가 혼합되고 있었다. 헬레니즘의 지배조직이 지방까지 미쳤으며 그리스의 상인과 관료들은 팔레스타인의 작은 농가에까지 이르렀다. 사마리아 지역은 용병들이 이주함에  따라 헬라화의 영향으로 점차 디오니소스에게 제사를 드리게 되며, 특히 필라델피아 유모가 헬레니즘화됨으로써 셈족 여신에 대한 숭배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 보면 팔레스타인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다양성으로 인해 쉽게 통일되지 못했다. 토착민의 귀족정치는 한편으로 새로운 지배자들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귀족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위치를 보다 개선해 나갔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경제적 도약에 참여하였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헬레니즘적인 지도층의 삶의 방식에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6].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시대에 이르러 문학의 중심지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유대인들은 일찍부터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헬라시대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프톨레미 우스 2(B.C. 285-247)는 먼저 모세오경의 번역부터 시작해서 이후 구약의 다른 부분으로 확대되었다. 이 번역본이 70인역(Septuagint)이다. 70인역이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초대교회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경이 헬라어로 존재하게 되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의사 소통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놓고 또한 유대인들의 정신에  헬라 사상이 더욱 강력한 영향을 미칠 길도 마련한 것이었다. 물론 후대에 이것은 기독교의 전파를 촉진시켰다. 이 시기에 헬레니즘이 유대인 사상가들의 사고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미쳤던 것인데 헬레니즘 문화에 살고 있으면서 그 문화를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러한 것에 휩쓸려 종교적 원칙을 타협하지 않았지만, 거기에 휩쓸려 도덕적으로 몹시 타락한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실제로 헬라 문화를 부러워 하고 거기에 몰두 하여 자기들의 고유한 율법과 관습을 거북하게 여긴 사람들이 많았다.

70인역과 더불어 우리가 주목할만한 또 한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바울과 동시대 사람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이다. 그는 히브리어 성경과 문학 그리고 헬라문학에도 정통한  학자였는데 성서신학과 그리스 철학의 진리를 일치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여러 해석을 자유롭게 시도했는데 당시에도 정통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의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정립 시도는 그 이후 나타날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7].

3)  셀류코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남북왕조간의 각축은 안티오쿠스 3세가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고 아시아로부터 몰아냈을 때(B.C.198) 최종적으로 결판이 났다. 이후부터 셀류코스 제국은 팔레스타인을 병합하였다. 안티오쿠스 4(이후 에피파네스’) 시대에 유대교의 헬라주의자  들은 헬라화에 입각한 개혁을 현실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비유대교적이며 헬라화된 주변세계와 보다 밀접한 경제, 정치, 문화적인 접촉을 가지면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들의 상황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에피파네스의 여러가지 종교탄압적인 정책들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격류에 휘말리게  된다. 우선 그는 로마로부터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 자기 백성들을 통일 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절감했고, 한편 재정난으로 인하여 새로운 재원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탐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의 재물에도 눈독을 들이게 되었고 이것은 유대교 금지령의 한 원인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정치적 통일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도시들에 대해 헬라의 도시국가와 같은 특권을 허용하고 헬라적인 모든 요소를 장려하였다. 이 정책에는 제우스 신 및 헬라의 여러 신들에 대한 숭배와  함께 자기 자신을 제우스 신의 가시적인 화신으로 신격화하여 숭배한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매우 신중하게 추진되기는 했지만 조상의 신앙에 충실했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킬 것이 분명한 그런 정책들이었다.  

이 시기의 유대인들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겼는데 대 제사장직을 에워싸고 암투가 벌어졌으니, 야손은 뇌물로 대제사장직에 오른 뒤 적극적인 헬레니즘화 정책을 추진하여 예루살렘에 헬라식 운동경기장을 건립하고 젊은이들을 거기에 등록하였다. 더 많은 뇌물로 야손을 밀어내고 대제사장직에 오른 메넬라우스는 에피파네스의 성전약탈을 묵인하고 여호와를 제우스와 동일시하여 예배하는 한편 왕을 제우스의 현현으로 숭배하는  제의로 재편하려고 하였다. 독실한 유대인이 충격과 공포로 반항하자 에피파네스는 사실상 유대교의 모든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정기적인 제사는 물론이고 안식일과 전통적인 절기를 금지하고 율법 사본들이 파기되었으며 어린이들의 할례도 금지되었다.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했고 이중 어느 하나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졌다. 이교  제단들이 세워졌고 그 제단들에서 부정한 짐승들이 제물로 바쳐졌다[8]. 결국 B.C.167 12월에 올림푸스 제우스신의 제의가 예루살렘 성전에 도입되었다. 사마리아의 성전도 마찬가지로 제우스 크세니우스에게 봉헌되었다(마카베오 261-31). 헬레니즘화한 유대인들은 왕의 칙령을 환영하였고, 한편 그 밖의 사람들은 자진해서거나 무서워서 그들의 뒤를 따르며 조상의 신앙을 저버렸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추종을 거부하고 율법을 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선택하였다.(마카베오 11:43-62f)

마카베오 2 9장에는 이 가증한 왕, 에피파네스가 하나님께 어떠한 형벌을 받아 고통속에서 죽어 가는지가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는 내장이 썩고 몸의 뼈마디가 모두 어긋난  가운데 구더기가 눈에서 기어 나오는 상태로 아주 서서히 죽어가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요한, 야고보 등을 죽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헤롯 아그립바가 벌레 먹혀 죽은 것과 비견될 수 있다. 가증한 자들을 최악의 형벌로 벌레를 사용해 죽이시는  절대 권능자의 진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사도행전 12:23, NKRV)

 


[1]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파주: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출판그룹, 2016), 559

[2] 마틴 헹엘, 「신구약 중간사」 임진수 옮김 (파주: 주 살림출판사, 2006), 92

[3]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559

[4]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569~71

[5] D.S RUSSEL, BETWEEN THE TESTMENT(USA : SCM Press Ltd., 1965), 14-5

[6] 마틴 헹엘, 신구약 중간사, 임진수 역, 92

[7] D.S RUSSEL, BETWEEN THE TESTMENT, 15-18 

[8]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580~84

 

4)  마카베오 혁명과 묵시문학, 수전절의 유래

왕의 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의 핵은 하시딤(율법에 충실한 자들)으로 알려진 집단이었는데, 아마 이들로부터 후에 바리새파와 엣세네파가 나온 것 같다. 박해를 통해 유대인들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적지 않은 수였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가공할 박해였다. 유대인들이 무장 봉기로 치닫게 된 것은 불가피했다. 바야흐로 마카베오 혁명의 불길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치솟았다.

혁명은 시골 산마을에 있는 모데인이라는 마을에 악명 높은 포고령을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 폭발하였다. 맛다디아라는 제사장 가계 사람이 왕의 관리가 포고령을 강제로 집행하기 위해 모데인에 당도해서 이교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자리에서 왕명을 따르겠다고 하는 자를 죽여버리고 관리도 죽여버렸다. 그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수백명의 용사들이 합세하여 에피파네스의 주력부대가 빠진 틈을 타서 대승을 거두고 성전이 모독된 달로부터 꼭 3년이 되는 B.C.164 12월에 축제의 큰 기쁨 속에 성전은 다시 봉헌되었다. 이렇게 구약시대 말기에 종교적 독립을 위한 유대인들의 투쟁은 성공적인 출발을 보인 셈이었다. 그것은 영광의 순간들만이 아니라 숱한 좌절과 실망으로 점철된 기나긴 투쟁이었지만, 결국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치권을 가져다 주었고 이후 79년간 하스몬 왕조가 통치한다.

구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늦게 편찬된 다니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무서운 위급사태에 대응하여 말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하시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자기 힘이 닿는 대로 모든 수단을 다해서 왕의 정책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 속에서 그들의 율법과 유대인 됨, 그들의 신앙을 고수하면서 저항하도록 용기를 북돋우어 주려고 했다. 이 선견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다 예정된  대로 진행되며 어김이 없다는 것, 그리고 현재의 고통은 하나님의 목적이 개가를 올릴 날이 가까웠음을 알려주는 것임을 자기 백성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했다.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이러한 확신 속에서 선견자는 자기 동포들로 하여금 굳게 서도록 격려하였다. 실제로 영웅적 순교자들의 운명에 대한 성찰이 유대 사상안에  내세에 관한 믿음을 확고히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거의 의심할 수 없다[1]. 만일 다니엘서의 사자굴 이야기나 풀무불 이야기가 역사적 필요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면 성경의 축자적 해석의 오류를 증명할 강한 반론적 증거가 될 것이다.   

신구약 중간기에 또 다른 절기가 생겼는데, 그것은 성전을 정화한 역사를 기념하는 수전절(요 10:22)이다.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기와 날짜가 겹치곤 하는 이 수전절(하누카)은 지금도 유대인들에게는 장막절 이상으로 중요한 절기이다. B.C.164년에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청결케 하고 난 다음에 성전촛대에 불을 밝히려고 했다. 거룩한 감람 유가 하루를 밝힐 분량밖에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하루치 감람유가 팔일 동안 불을 밝혔다고 한다. 이것을 기념하여  생겨난 절기가 수전절인데 일명 ‘빛의 절기’라고 부른다. 이렇듯   포로기 이후에 생긴 절기들은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일에 일조했다[2].

5)  하스몬 왕조 시대 종파의 고착화와 유대교 사상의 변천

하스몬 왕조를 연 시몬은 B.C. 135년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유대의 통지차 겸 대사제가 되었다. 요한 힐카누스는 율법주의자 였던 하시딤들을 내치고 현실주의자인 사두개인들을 중용했다. 이 때 쫒겨난 하시딤들은 이후 바리  새파가 되었다. B.C. 104년 요한 힐카누스가 사망하고 그 아들인 아리스토불로스가 왕위를 이어받은 후 우여곡절 끝에 알렉산드로스 야나이가 왕위에 올라 전성기를 열지만 이전에 쫒겨났던 바리새파가 항거하다가 800명이 십자가 처형을 받는다. 남은 이들은 유대광야로 도망쳐서 엣세네파에 합류한다. 그자 죽자 부인인 살로메 알렉산드리아는 장남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에 앉힌다. 사두개파를 규합한 그의 동생 아리스토 불로스 2세가 왕이 되고 힐카누스 2세는 바리새파를 규합하여 대제사장직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 두 형제를 제거 하고 로마의 도움을 얻어 왕위에 오른자가 이두메인 안티파트로스였다. 로마는 B.C. 37년 그의 아들 헤롯을 분봉왕으로 임명함으로써 유다는 로마의 분봉왕령이 되었다. 이 자가  솔로몬 성전을 모방해 헤롯성전을 지은 헤롯대왕이다.  

유대교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유대교가 헬레니즘적 제의로 변질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헬레니즘화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유대교는 크게 네 종파로 나뉘어 지며 가장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집단이 바리새파인데 이들은 율법에 대하여 열심을 내고 헬레니즘과의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았던 집단인  하시딤파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바리새파는 귀족계급도 아니고 제사장 파벌도 아니었지만 도덕적으로 진지하였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존경을 받았다. 셀류코스 왕조와 손잡은  제사장 귀족계급들과 세속의 귀족계급이 사두개파의 세력 배경이었는데 이들은 바로 셀류코스 왕조 시대에 헬레니즘에 상당히 물든 계층이었다. 이들은 토라의 권위만을 인정하였고 서기관들에 의해 발전된 일단의 구전 율법에는 아무런 권위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부활신앙, 사후의 상벌, 마귀론과 천사론, 묵시 문학적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전반적으로 거부하였다.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며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살았던 엣세네파 같은 종파들이 있었는데 쿰란 종파는 엣세네파였다. 이들도 하시딤파의  전통을 이어 받았을 것이지만 하스몬 왕조가의 대제사장을 겸한 왕들에 대해서는 화해의  여지가 없는 입장을 취했다. 하스몬왕조의 제사장직을 불법적이며 배교적인 것으로 간주  했던 묵시문학에 경도된 사람들이 그들과 제휴했다. 그들은 모든 예언이 자기 시대에 실현되고 있다고 확신하고 광야에서 수도원과 같은 생활을 했다. 유대교의 활로가 호전적인 민족주의 노선을 따르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마카베오 혁명의  중추였고 그 투쟁을 단순히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더 나아가 민족의 독립을 위한  전면전으로 전환시켰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신약시대에 이르러 열심당이라는 당파로 출현  한다. 이들은 광적으로 용감하고 무모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러 오실 것을 확신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어떠한 강적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당파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네 당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당시 유대인구에 비해  극소수였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당시 총인구 5~60만명중 이 네 당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30,000~35,000명 정도였다. 바리새인의 수가 전체인구의 5%정도고 사두개인과 에세네파를 합쳐서 2%정도의 수준이었으므로 그들이 유대인 전체의 대표성을 띤 것은 아니었다[3].

유대교는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본질적 요소에서는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에피파네스의 박해는 무죄한 사람도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논리를 사탄의 소행으로 돌림으로써 사탄에 대한 정의가 확고하게 된 것으로 보이고 이것은 나중에 기독교에도 영향을 준다. 또한 부활신앙에도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현실에서 이유 없이 당하는 무자비한 고통을 하나님께서 내세에서 다 갚아주신다고 믿어야 그 고통을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헬레니즘은 다른 한 측면에서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조장하였을 것이다. 강요되는 이방종교에 굴복할 수 없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에 악착같이 매달렸을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위가 전적으로 그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율법주의로 고착화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6)  유대교를 제외한 철학, 종교, 문학, 언어문제로서의 헬라화

헬레니즘 시대의 헬라화의 문제는 매우 강한 정치적 요소와 함께 철학, 문학, 종교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헬라인들은 에피쿠로스를 보편주의적인 스토아 철학과 비교하여  참된 헬레니즘의 철학자로 내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스토아의 세계시민정신은 시대 흐름에 따라 결국에는 보다 영향력이 커졌다. 이것은 세계시민정신이 헬레니즘 군주들의 요구,   다양한 면모를 지닌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통합해야만 하는 요구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종교에 대한 관심은 헬레니즘의 군주들이 와해되면서 보다 강하게 일어났다. 디오니소스는 당시 그리스 밖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 신이었다. 그것은 예술과 문학을 통해 아시아까지 퍼지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이 종교에 심취한 추종자였다. 그는 또한 고대 모든 신들과 더불어 오랫동안 예루살렘의 유대교 신과 결합되기도 하였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교가 이를 위험한 경쟁자로 보았는데 70인 역에서 집필자들은 그들이 증오하는 가나안 제사들을 디오니소스 종교에서 유래하는 개념을 가지고 해석하고자 하였다.

B.C. 2세기부터 두 문화를 결합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는데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문학 혹은 예루살렘 개혁의 시도 등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합이라는 실제적인 완성에 이르게 된다. B.C. 4세기와 3 세기에는 헬라화되는데 사회적인 장벽이 있었지만 B.C. 2세기와 세기에 이르러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히브리어 지혜문학 안에도 부분적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이 나타나며 그리스 사상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밝혀진다. 이 사상은 무엇보다도 논란이 되고 있는 전도서에 해당하는데 그 작품은 아마도 B.C.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의 통치하의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철학의 영향 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 책은 어떤 면에서 초기 헬레니즘의 계몽정신을  호흡하고 있다. 유대교의 묵시사상의 번영은 B.C.2세기부터 디아스포라 세계에 급속하게 확산되었으며 헬레 니즘 세계에서 계시종교의 개혁과 평행을 이루면서 지속되었다[4].

헬라화를 위한 최초의 가장 중요한 진보는 개인들이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이었다. 헬레니즘 문화를 위한 최후의 토대는 갈라지고 서로 투쟁해야 했던 정치권력이 아니라 공통의 언어였다. 따라서 그리스어는 야만족이었던 로마인들과 파르티아인들이 헬레니즘 군주체제에 대한 승리 이후 그 종말을 보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 유지되었고 로마 평화의 보호를 받으며 그 완성을 보았다.

3.   기독교의 산파가 된 유대교

유대교가 형성되었지만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망하고 전세계로 흩어진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여기서 처음에 제기한 문제 하나님께서는 400여년의 침묵의 기간을 사용하면서까지 왜 유대교를 허락하시었을까?”라는 의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포로귀환기에 윤곽을 드러낸 유대교는 헬레니즘에 한편으로는 저항하면서 한편으로는 융합하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유대인으로서 헬라제국에 살면서 헬레니즘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교리가 형성, 발전되고 종파가 갈리면서 체계화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파의 형성은 별개의 철학이나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안에서의 파벌의 갈림이며 배교자나 전혀 관심이 없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율법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사두개파 사람들중 일부가 속된 마음을 갖고 있기는 했었지만 전체적으로 모두 종말론적인 대망과 민족주의적 열정을 품고 있었다. 각 분파의 차이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종말론을 어느 정도 강조할 것이냐, 메시아를 비롯한 민족의 장래 소망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불과하였다.  

유대교는 종말론적 구원으로 그 율법공동체를 구원하지 못했다. 사두개인들은 세속화된  친헬레니즘을 추구하면서 외면 당하였고 엣세네파나 열심당의 호전주의도 해답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민족이 파멸을 초래하였고 그들이 기대했던 종말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대교가 실제로 살아남은 것은 바리새파식의 규범적 유대교, 즉 율법 뿐이다. 이것은 물론 율법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들에게 구약의 소망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소망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유대인의 그 왕을 한없이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을 때 대대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교라는 테두리에 남아 있지만 당시부터 지속적으로 기독교로 전향하는 구원  받는 유대인들이 있다. 또한 아직 유대교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도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다른 히브리 저작들을 통해서도 기독교는 아직도 유대교의 영향력  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유대교는 그 자체로서는 실패한 종교였지만 기독교를 낳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산파 역할을 하고 지속적으로 사후관리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 으로 말하면 구약은 유대인들에게는 실패한 구속사였지만 구주를 믿는 우리 신도들에게는 그 실패한 구속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구속사가 되어 실제적인 체험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 신약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율법을 대신하는 믿음의 구원을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의 고백(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 들인 신도들에게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 실존에 침투해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다.   

 

[1]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옮김, 584~88

[2] 재경안, “교회력 따라가보기: 성경절기  지금도 유효한가?” 매거진 Re(전남 여수시 충민로 175: 그라티아, 2015), 63

[3] D.S RUSSEL, BETWEEN THE TESTMENT (USA : SCM Press Ltd., 1965), 48-9

[4] 마틴 헹엘, 신구약 중간사, 임진수 역, 118

< 알렉산드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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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슈라이너 저/임범진 역

 

- 1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 2 요한 신학의 영생과 종말론

- 3 복음서 외에 나타난 시작된 종말론

 

1. 중심주제 및 내용 요약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 이미 임하여서 시작되었으나  종말론적 완성은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다. 공관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임을 즉각 보여준다.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을 종말론적 나라를 시작하는 사건으로 보았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역할인데 하나님나라는 현재인 동시에 미래라는 점이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하나님의 원수들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직 구약 성경에서 약속한 복들을 모두 소유하지 못했다.  

.「요한복음의 영생과 종말론」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그리스도 대속과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신자들은 지금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나 종말론적 영생은 신도들의 견인에 의하여 최종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다. 비록 신자들은 여전히 육체적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만 생명의 현존이 미래를 보장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이 악한 시대에 신자들이 현재 소유한 생명은 사망이 결코 승리하지 못할 것임을 보장하며, 따라서 우리는 신자들이 현재 속한 생명과 미래에 영원히 실현될 생명 사이에 끊을 수 없는 결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구원의 약속은 미래의 일이다. 성령의 선물은 마지막 날이 왔음을 증언하지만 신자들은 마지막날까지 보존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복음서 외에 나타난 시작된 종말론」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기 시작하였으나 신자들은 아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들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중간지대에서 살아간다. 오는 시대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였으나 여전히 현재의 악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종말론적으로 주신 것은 새 창조가 도래하는 일의 전조다. 이 약속들의 표지로 성령을 주셨으며,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성취의 날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였다. 미래의 소망은 산 자들에게 국한하지 않는다.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마지막 고통스러운 공격이지만 결국은 무기력한 공격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사시기 때문에 자신 들도 살게 될 것이라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 사이를 살아간다. 신자들의 종말론적 소망은 이미 받은 새 생명에 근거한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날은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자가 종말론적 상급을 받기 위해   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과 순종을 지속해야 한다.  

2. 비평할 부분         

. 누가복음 1720~21너희 중에 among으로 번역

새번역, NRSV, NLT‘among’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개역개정, NIV, KJV 등 역본들은 ‘within’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 부분의 해석은 원어 단어의 쓰임새와 함께 원문의 앞뒤 문맥을 살피어 해석해야 하는데 ἐντὸς 가 두 가지의 뜻을    다 가지고 있지만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것은 대부분 ‘whthin’으로만 쓰였지 ‘among’으로는 쓰이지 않았음에 주의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ἐντὸς가 같이 쓰인 또 다른 용례인 마가복음 23 26절은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ἐντὸς)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라고 하고 있다. 역시 ‘whthin’으로 쓰였다. 또한 문맥으로 보면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하고 있고 바리새인도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이므로 그들도 회심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본문이 속한 누가복음 17장 전체를 개관해 봐도 신도들이 회개와 감사의 마음으로 마지막 날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이므로 하나님 나라가 바리새인들의 가운데(among) 있는 예수님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사람의 마음속(within)에 이미 침투해 들어와 있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마지막 때까지 육적인 소욕을 이겨내고 성령 안에서 행동하여 영생을 얻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보아야 한다.

. 요한복음 15절에서 katalambavnw이기다이해하다의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

개역개정과 KJS, NIV, ASV 등이 이해하다’, ‘깨닫다’, ‘이해하다로 번역하고 있고    새번역, NRT, NRSV 등이 이기다’, ‘끄다등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katalambavnw 어원이 되는 lambavnw붙잡다’, ‘취하다’, ‘영접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2차적인 파생의미로 이해하다’, ‘깨닫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실제로 이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용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가 주장한 대로 정황상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어원과 용례상  으로 깨닫다로 번역하여야 한다. 또한 요한복음 19~10절에도 ν τ φς τ ληθινόν, φωτίζει πάντα νθρωπον, ρχόμενον ες τν κόσμον. ν τ κόσμ ν, κα κόσμος διʼ ατο γένετο, κα κόσμος ατν οκ γνω. (NA28) 라고 하여 말씀이 되신 하나님이 세상에 빛으로 왔는데 어둠이 빛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을 재차 분명히 전하고 있다. 여기서 γνω (기본형 ginwvskw)에 대해서는 모든 역본이 다 이해하다’, ‘깨닫다로 일치된 번역을 하고 있다. 따라서 1 5절을  이기다로 번역하는 것은 단어의 의미로 보나 문맥으로  보나 오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경의 구절이 두 가지를 다 의미한다고 하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서 불합리하다.  

3. 책 내용중 자신에게 유익하거나 도움이 되었던 사항

주교재인 신약신학은 각 권으로 되어 있는 신약성서 27권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처럼 통전적인 시각이라는 씨줄과 각 권의 개성과 특징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날줄을 통해 진리의 말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린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구분에 대해 확실한 구분을 할 수 없었는데 본 강의를 통해서 요한복음을 생명이라는 주제로 구분할 수 있으며 진리와 오류, 빛과 어둠,위의 것과 아래 것이라는 이원론적이면서 종말론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세상에 침투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 나라를 경험하게 해주셨으며 우리의 믿음과 회개를 통한 성화과정을 통해 마지막 날까지 우리를 보존하시어 영생을 주실 것을 확신한다.

-  4 신약신학의 중심이신 하나님

-  5 공관복음서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  6 복음서에 나타난 메시아와 인자

-  7 하나님의 아들, 에고 에이미, 그리고 로고스

-  8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구원 사역

-  9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수님의 구원 사역

-  10 바울의 기독론

 

1. 중심주제 및 내용 요약

.  7장「하나님의 아들, 에고 에이미, 그리고 로고스」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예수님은 십자가의 빛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 구원의 경륜인 에고 에이미이고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로고스이다. 종말론적인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이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임마누엘하시는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위격에서 차이가 나지만 주님이자 하나님이시며 구약성경에서의 인류구원 사역을 이루어가시는 언약인 에고 에이미이다. 하나님의 모든 구원약속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다. “로고스는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그 안에 빛이 있었는데 이 말씀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다.  말씀은 곧 예수님이고 하나님이시다.

.  8장「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구원사역」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 인류 구원에 대한 언약들을 성취하셨는데 복음서들은 이를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신다.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 고통스런 시간  뒤에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이 대속 죽음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받아야 할 형벌을 스스로 감당하셨다. 따라서 이 죽음은 용서를 가져오는 희생이며 그럼으로써 이 죽음에는 구원론적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다요한복음은 이 모든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들어맞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말씀안에 있는 이 자기 백성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으로 충만하다.

.  9장「사도행전에 나타난 예수님의 구원 사역」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보증이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로써 높아지신 주님이 되셔서 하나님의 구원약속들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은 오는 시대의 약속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의 중심이다. 유대 사상에서 오는 시대는 부활과 함께 시작된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신호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들이 실현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퉁이돌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부활하신 분으로서 예수님은 이제 지도자이자 “구시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시고 높아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영화롭게되셨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증거한다.

.  10장「바울의 기독론」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면서 그가 유대인 이자 메시아로서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올라 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광채, 즉 그리스도가 바울에게 나타나셨을 때 보았던 그 광채를 드러낸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주목을 받거나 스스로에 대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선포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자들에게 주어진 은사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어둠에 거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가 빛을 비추실 때 새 생명이 온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육체와 성령으로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충만을 경험할 것이다.

2. 본문 내용중 공감하는 부분과 비평할 부분         

.  4장 내용중 광적이고 미신적으로 반복하는 기도는 피해야 한다 부분

은밀하게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기도할 때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현대 교회에 만연해 있는 뜻 모를 반복되는 기도인 방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 6 7~8에서 말하는 이방인은 당시 로마제국내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타 민족을 뜻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γλῶσσα)”은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① 외국어(로마제국내의 지방언어) ② 뜻 모를 말이 그것이다. 여기서 ②의 “뜻 모를 말”은 당시 고린도가 항구도시로 각 지방에서 외국인이 빈번하게 왕래  하여 여러 언어가 불규칙하게 혼합된 지방언어라는 설이 있고 또 한가지는 현대 교회에서의 뜻이 없이 반복되는 음절로 기도하는 “방언”현상이라는 설이 있다. 어떤 설을 취하든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히 금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  로마서 1 23~26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적 타락을 묵인하셨다의 의미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성적인 죄에게 넘겨주신다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신자들은 특히 성적 순결의  측면에서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로마서  1 23~26절이 번갈아 가면서 우상숭배와 육체적 타락을 두 번에 걸쳐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라서가 아니라 우상숭배, 즉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정욕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바울은 우상 숭배의 배후에는 사탄, 즉 어둠의 영과 타락한 세상 권세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고전 10:19–22).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말을 따름으로써 영적인 간음을 행했고 이로 인해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우매해지면서 우상숭배를 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하나님 께서는 인간을 육체적 타락에 넘어   가도록 놓아 두시고 또한 역리적인 육체적 타락까지 이르게 하신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5:31-32) 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거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왜 수치와 두려움으로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렸는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

3. 책 내용중 자신에게 유익하거나 도움이 되었던 사항

요한 문헌은 빛으로 충만하다. 요한일서 1 5절은 하나님은 빛이시라라고 선언한다. 창세기 1 3절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한다. 빛과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라면 사랑은 구체적인 속성이고 빛은 추상적인 속성이다. 이는 요한문헌의 종말론적 이원론 철학에 근거한 것으로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창조에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빛은 필요 없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빛이 되심을 알게 되었다. 빛은 상징이기도 하지만 실제 현상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의 특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등은 빛을 연구해서 나온 이론이다. 또한 빛은 모든 사물에 색을 부여한다. 스펙트럼을 통과한 빛은 일곱가지 무지개 색으로 이 세상에 찬란한   색을 만든다. 많은   성경내 단어가 그렇듯 에는 우리가 묵상해야 할 하나님의 계시가 숨겨져 있다.

-  7 하나님의 아들, 에고 에이미, 그리고 로고스

-  8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구원 사역

-  9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수님의 구원 사역

-  10 바울의 기독론

-  11 바울서신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  12 히브리서~요한계시록의 기독론

-  13 성령

 

1. 중심주제 및 내용 요약

.  11장「바울서신에 나타난 구원 사역」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도들을 구원의 전 과정에 걸쳐 인도하시어 종말론적 영화에 이르게 하신다.

로마서 등 바울 서신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구원의 전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분리될 수 있는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시어 죄인된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었고 그를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칭의하셨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으나 변화된 삶을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것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신도들은 영화롭게 된다. 이것은 죄인된 몸의 신음으로부터, 그리고 죽을 몸 안에서 사는 삶의 특징인 탄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최종적으로 보장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건져낸 구원으로 인해 영원토록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된다.

.  12장「히브리서~요한계시록의 기독론」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제사장적 왕이시며 메시아로서 오셨는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며 구원과 함께 완전한  죄사함을 가져오신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며 자신을 제사로 드리려 성육신하셨으며 인간 실존의 고통을 이겨내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인들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을 증거한다.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유다서에서도 역시 하나님과 예수님의 동등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베드로 후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며 다윗에게 주신 언약적 약속들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요한 서신을 통해 기독론이 구원론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선언하시는데 이 표현이 구약성경 에서는 여호와에 대해 사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같은 것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등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  13장「성령」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성령은 구원의 전 과정에 적극 개입하시는데 이것은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종말론적 표지다. 성령의 신학자라 할 수 있는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성령의 예언적 말씀은 구속 역사의 성취, 하나님의 구원 약속들의 실행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언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교회를 인도했다. 요한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면서 대언자, 중보자의 의미를 표현한다고 하였다. 바울의 신학에서 성령은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며 성령에 감동되면 회심이 일어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에 의해  시작 되며 성령에 의해 지속된다. 히브리서는 구원의 역사, 즉 이제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아온 구약 성경의 성취에서 성령이 하시는 역할을 조명한다. 요한계시록 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예언하고 증언하는 성령이다 요한이 선포하는 메시지는 성령의 영감을 받은 것이다. 

2. 본문 내용중에 비평할 부분         

.  8장 내용중 빌라도의 재판에서 유대인의 왕에 대한 해석 비평

저자는 요한복음 18~19장의 빌라도의 재판과정을 설명하면서 “the king    (ὁ βασιλεὺς)  “a king(βασιλεὺς) ”의  설명을 빠트리고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구약성경이 지칭하는 ‘그 왕(the king)’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다윗 왕조를 재건할 사람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고 빌라도는 예수께 “the king”과  “a king”을 혼용해서 질문을 했는데 “the king”이냐의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았으나 “a king”이냐에는 “진리를 가져온 왕(a king)”이라고 답변    하신다. 빌라도는 로마인으로서 정관사가 없는 라틴어를 구사하는 인물이다. 그가 the king과 a king의 유대적 개념을 알고 행동했는지는 본문상으로 분명하지 않으나 결과적으로 그가 만든 명패에 “유대인의 왕(the king) 나사렛 예수”    라고 기록했고유대인들은 이를 “자칭 유대인의 왕(a king)”으로 써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한다. 그는 이 명패를 죄목으로 기록했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심으로써 확인할 진리를 만방에 선포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 10장 빌립보서 2 6절의 해석에 대한 비평

빌립보서 2장 6절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저자는 NRSV와 HCSB의 해석에 따라 6절의 시작하는 분사구를 “(그리    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셨으나 라는 양보구로 번역하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목적어로 번역하여 “하나님과 동등 됨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뒤에 나오는 구절들의 문맥에 맞추어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 첫 번째  분사구를 원인으로 번역하여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므로”라고 하고 “하르파그  모스 (ἁρπαγμός)”를 “탈취하기”(raptus) 라는 행위 자체로 보면 “하나님과 동등됨”은 “하르파그모스”의 의미상 주어가 되어 “하나님과 동등됨은 (무엇을/남의 것을) 취하기를 의미한다고 여기지 않았다.”로 된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온전한 분이기에 남의 것을 취해 스스로를 채울 필요가 없는 분이므로 자신의 “충만함”(pleroma)에서 스스로를 내어 주는 데 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셨기에(곧 신성의 존재이셨기에), 하나님과 동등됨은(즉 신성은) (남의 것을) 취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내어 주시는 것이다. 이 은혜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자기 주장    하여 서로의 것을 빼앗아 살려는 불가능한 게임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

3. 책 내용중 자신에게 유익하거나 도움이 되었던 사항  로고스의 개념 정리

헬라적 사고에서 로고스는 내면의 생각과 발화에서 그런 생각이 표현되는 것 모두를 말한다. 로고스가 중개자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로고스(말씀)를 통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역사를 이끌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계획과 목적을 인간에게 알리시고, 또 섭리와 경륜에 따라 세계를  인도하시면서 그 목적하신 바를 성취 시키는 데 사용하신 특수 수단을 가리킨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본질이 변이된 것이 아니라 태양 주위의 후광이 그렇듯 하나님 자신의 현현이 변이된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실존에 초자연적으로 개입  하시는 매개체로 말씀이 쓰이었다. 요한에게 로고스는 단순히 의인법이 아니라 인물이며, 단순히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셨던 분일 뿐 아니라 사람으로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이 인격을 갖춰 실체로 구체화(형상화, 성육신)되신 분이 그리스도이다.

 

-  11장 바울서신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  12장 히브리서~요한계시록의 기독론

-  13장 성령

-  14장 죄의 문제

-  15장 믿음과 순종

-  16장 율법과 구원역사

 

1. 중심주제 및 내용 요약

.  14장「죄의 문제」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인간의 근원적인 죄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것과 창조자보다 피조물을 섬긴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직시해야 한다. 신약 성경은 전체적으로 죄를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하여 이 주제가 대단히 근본적이며 광범위하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죄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에서 유토피아적 이념이 시작된다. 이로써 우리는 죄를 다룰  능력을 상실하게 되며 결국에는 죄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다시 죄에 굴복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같은 죄가 형식을 다르게 하여 나타난 것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스스로의 덕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종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는 자기 만족과 자기 도취의 통로가 된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믿음은 하나님을 힘을 가지신 분으로 여기고 모든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영적으로 죽은 채 세상에 들어오며 육체적인 죽음과 심판을 향해 나아간다.

.  15장「믿음과 순종」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구원하는 믿음은 회개 및 삶의 변화와 분리될 수 없는 구체적이고 능동적이며 사랑 안에서 그 참됨이 드러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혹은 영생을 얻기 위한 토대이며 근본이다. 사람은 자기 행위에 근거해서는 영원한 상을 얻지 못한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의 우선성은 율법주의를 배제하지만 동시에 반 율법주의도 제거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게 된 자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동료 신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이 참으로 거듭났음을 보여  준다. 변화된 삶이 필요함을 강조했다고 해서 믿음의 우선성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의 삶은 그들이 썩은  나무인지 건강한 나무인지를 보여준다. 신약 성경 기자들은 죽은 나무에게 열매를 맺으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새  나무와 새 창조를 요구한다. 이 새로움은 그리스도의 죽음 및 부활과 함께 나타났지만 신자들은 이 모든 구원 사역을    완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16장「율법과 구원역사」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율법의 마침과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 율법에 암시된 것들을 성취하신다고    가르친다. 구약 성경의 율법은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빛 안에서 재해석된다. 율법의 중심 규범은 사랑으로 표현되며 제자들에게 기대하는 사랑의 전형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주신 것이다. 실로 구약 성경의 일부 계명들이 사랑의  정의 안에 담겨 있다. 그러나 율법의 모든 규범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신약 서신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암시하며 권면하는 것을 수없이 볼 수 있다. 또한 새 삶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따라서 율법을 고찰할 때에는 성령이 하시는 사역에 대한 주요 주제들이 따라오게 된다. 구약 율법은 구원 역사의 견지에서 일직선적 역사관으로 해석해야 하며 율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성령의 능력 부어주심을 통해 실현된다.

2. 본문 내용중에 비평할 부분과 동의하는 부분     

.  11장 내용중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에 대한 해석과 다른 견해

저자는 로마서 8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에서 영화롭게 했다의 원어 ἐδόξασεν 을 미래에 확정적으로 올 일이기 때문에 부정과거로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영화롭게 했다를 문자 그대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완전한 성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라고 볼 수 있는데 지금 우리 삶의 자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면 이미 영화롭게 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하나님 나라가 죽어서야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 8 30절은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의 이유로  봐야 하는데 여기서 모든 것은 성도들의 고통, 실패, 죽음 까지도 포함된 개념  이어서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통계열역학을 주창한 루트비히 볼츠만은 현대 물리학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은 유일하지도 않고  방향도 없으며 양자화까지 될 수 있는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밝혔다. 시간은 상대적이어서 지구의 좌표계에서 볼 때 블랙홀의 좌표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시간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시간  개념의 신비를 풀어주는 이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해서 불러 의롭다 하신 자들을 이미 영화롭게 해놓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 11 택하심의 내용중 공감하는 부분

11장 내용중에 보면 “바울은 모순으로 보이는 문제에 대해 철학적인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과학에서도 우리는 왜  전자들이 때로는 파동처럼 때로는 입자  처럼 행동하는지 해결하지 못했으며 사람의 몸과 영혼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우주에서 가장 심오한 실재들은 우리의 이성적 역량을  초월하는 듯하다” 고 한다. 우리는 오로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없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고 있고 다시 3절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라고 하고 있다.

3. 자신에게 유익하거나 도움이 되었던 사항  오순절 성령역사의 이중적 의미

13장의 성령 강림 설명에서 사도행전의 네 번의 성령강림 사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새롭게    알게 된 귀한 설명이다. 세례는 시작을   의미하며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은 성령의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 8, 10, 19장에서 성령의 오심은 일차적으로   성령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기사들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참으로 속하였음을 강조  한다. 이에 비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다른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의미 뿐 아니라 특별한 동사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채우다(πίμπλημι)’라는 동사로 이 단어의 용례는 사실상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기 위한 목적을 뜻하고 있다. , 오순절 기사는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시작되었다는 것 뿐 아니라 카리스마적 능력을 함께  받았다는 것도 보여 준다.

 

-  14장 죄의 문제

-  15장 믿음과 순종

-  16장 율법과 구원역사

-  17장 약속의 백성

-  18장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사회             

-  19장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

 

1. 중심주제 및 내용 요약

.  17장「약속의 백성」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주로 고백하는 참 이스라엘의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광 받으    시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 신약의 교회에서 나타나는 특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인종적인 이스라엘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지상 명령은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그들의 삶의 향기로 인해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도록 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독특성은 옛 생활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새롭게 헌신하는 것을 상징하는 세례에 의해 드러난다. 전체회중은 성령의 은사의 복을 받아서, 교회가 모였을 때 모두가 서로를 섬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교회는 몸이다. 모든 몸의 지체가 성령을 받았다. 공동체 안에서 복음에 상반되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살면서 악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하는 자는 치리를 받아야 한다. 교회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구약시대가 와서 보라”, 신약시대는 가서 말하라로 요약할 수 있다. 교회는 좋은 소식을 알려야 하며 사랑 안에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복음의 향기가 널리 퍼진다.

.  18장「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사회」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이 땅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최고 되심과 그리스도 중심성이 일상의       삶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신자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을 기다리고 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성취는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세상에 대한 신자들의 관계는 이미와 그러나 아직의 긴장 속에 놓여 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어 신자들은 지금 이미 하나님의 자녀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되기를 기다린다. 신자들은 자신이 이 땅에서 포로와 나그네임을 자각한다. 순례자로서 우리는 강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행복하다. 따라서 어떤 인간의 정부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성적 즐거움정치적 권세, 이 땅의 위로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떠한 고통이 닥치더라도 그리스도를  붙잡고 이겨나갈 때 이 세상의 나라는 사라지고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지속될 것이다. 주 예수여 속히 오소서.

.  19장「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중심주제 및 내용요약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모든 구원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하실 것이며 그리하여 우주는 그 의도된 목적에 이르게 될 것이다. 새 시대가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죽음은 아직 제거되지 않았으며 하나님 백성의 실존의 특징은 여전히 고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죄와 투쟁할 뿐 아니라 아직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다. 따라서 하나님의 최종적인 약속은 필수적으로 성취되어야 하며 그 사이에 낀 시간은 끝이 나고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신자들에게 약속된 보상이 주어지고, 믿고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경고한 심판이 실행될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어린 양을 영원토록 경배하고 옛 피조물의 고통과 신음은 사라질 것이다. 새 창조는 하나님을 보는 것과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나 황홀한 것이 될 것이다. 신자들은 영생의 상급과 신자들이 이 땅에서 믿음으로 붙잡았던 하나님 나라의 약속들을 받게 될 것이다. 고대하던 상속과 구원이    그때 현실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한 자들은 최후의 심판을 맞게 될 것이다.

2. 본문 내용중에 비교할 부분과 비평할 부분         

.  15장 내용중 피스티스 크리스투의 해석에 대한 비평

저자의 설명대로 갈라디아서 2장 16절의 “크리스투” 의 해석은 대격이나   속격이 다 가능하기 때문에 전후 문맥으로  판단해야 한다. 교재에 나와 있는 여러가지 ‘속격지지설’을 제외하고도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KJV가 이 해석(the faith of Christ)을 따르고 있다. 이런 해석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를 약화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논리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동 구절의 전반부(εδότες [δ] τι ο δικαιοται νθρωπος ξ ργων νόμου ἐὰν μ δι πίστεως ησο Χριστο, κα μεῖς εἰς Χριστν ησον πιστεύσαμεν.) 를 직역하면 “우리는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아닌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지 못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κα)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로 번역해야 한다. 결국 이 구절의 주제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실함)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로 봐야 한다. 예수의 신실함을 믿는 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격지지론을 따른다면 중간논리 생략의 오류를 범한다.

. 신율주의의 저자의 해석에 대한 공감과 바울 신학의 재해석

샌더스의 신율주의는 일견 획기적인 이론처럼 보일지 몰라도 저자의 의견  대로 충분한 자료를 검토하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로마서 등 사도 바울의 율법에 대한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논리를 묵상하는 과정에서 주관의 오류에 빠진 듯하다. 그런데 오히려 그의 신율주의의 논리를 비평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바울의 죄와 율법, 구원에 대한 신학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명인 율법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무도 그 율법의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율법의 조문은 사망으로 인도한다. 이 때 율법은 율법주의이든 아니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 그 자체를 얘기하는 것 같다. 신약시대 언약이 변화했지만 율법의 상당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지속적으로 지켜야 할 계명이다. 바울은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들  만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율법의 명령을 성취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3. 자신에게 유익하거나 도움이 되었던 사항  율법에 관련한 설명

교재 14,15,16장 전체를 관통하는 죄, 믿음, 율법, 구원의 상관관계를 고찰 하는 과정에서 율법에 대한 바울 신학을      상당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율법을 지키라는 말인지 폐기하라는 말인지가 로마서에는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인지 죄에 질 수 밖에 없다는 얘기인지도 분명히 정리하기가 어려웠었다. 저자는 율법을 기본적으로 구원역사의 견지에서 해석   하며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빛 안에서 재해석한다. 율법주의는 같은 죄가 형식을 다르게 하여 나타난 것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스스로의 덕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의 우선성은 율법주의를 배제하지만 동시에 반 율법주의도 제거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게 된 자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동료 신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이    참으로 거듭났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  17장 약속의 백성

-  18장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사회             

-  19장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

 

1. 본문 내용중에 비교할 부분과 비평할 부분         

.  17장 내용중 반석의 해석에 대한 비평

저자는 반석을 베드로라고 해석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이 반석을 베드로로   주장하면서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오류인 것이고 이사야서 51장 1-2절의 아브라함을 하나님 백성의 토대로 보는 견해가 이 구절의 배경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반석을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 개신교의 전통적인 견해를 뒤집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사야 51장 1,2절의 이스라엘 백성을   “반석(צוּר, στερεὰν πέτραν) ”에서 떼어냈다고 하고 있는데 이들이 “의를 따르는(צֶ֫דֶק רדף)” 백성들이므로 이 반석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의, 곧 그의 믿음으로 보아야 문맥상으로 무리가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은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베드로의 고백,    즉 예수에 대한 그의 믿음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 방언(γλῶσσα)에 대한 저자의 해석 비평

저자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내용중에 나오는 ‘방언’과 관련하여 “황홀경의 발화”설은 부정하고 “외국어로서의        방언”을 주장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 에서 쓰여진 γλῶσσα 지방 방언(외국어)”이라는 의미와 황홀경의    발화로서의 쓰임을 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킹제임스 버전(KJV)은 외국어를 의미할 때 tongues라고 하고 있고 뜻 모를 소리는 unknown tongue으로 정확히 번역하고 있으며 원어 성경에도 γλῶσσα”를 단수와 복수로 분명  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tongues”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그 역시 교회내에서   통역 없이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고 “unknown tongue”에 대해서는  그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신도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다면 교회에서 통역없이 무분별하게 하지 말고 집에서 혼자 하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얘기하는 방언이 외국어만을 의미한다고 하면 단수와 복수를 혼재하여 쓰는 것이 설명되지 않고 고린도전서 14 2절을 해석할 길이 없는 것이다.

2. 자신에게 유익하거나 도움이 되었던 사항  약속된 새 창조와 관련한 설명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새 창조를 완성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새 시대가 이미 도래하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직 실존적 고통에 직면해 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죄와 투쟁할 뿐 아니라 여전히 죄로  부터 자유롭지도 않다. 오히려 죄의 교활한 속성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진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들은 최종적으로 성취될 것이 분명하다. 물리학에서 얘기하는 열역학 제 2법칙은      이 우주가 종말론적 구속 역사를 향해 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약속된 새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의 부활된 몸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는 것과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새 창조는 너무나 황홀한 것이 될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한 자 들은 최후의 심판을 맞게 될 것이다. 새 세상이 그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밝아올 때 옛 창조의 탄식과 신음은 끝나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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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

요한복음, 요한 1,2,3, 요한계시록을 요한문헌이라고 합니다. 이 문헌들은 기본적으로 사도요한의 증언을 토대로 에베소 지방에서 형성된 요한 공동체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유대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헬라적 관점에서 기술된 책입니다. 요한문헌을 읽다 보면 이 저작들이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빛에 대해 묵상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빛을 주제로 설교문을 작성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원문을 주해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살펴본 뒤 성경 안에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를 찾아보았습니다. 과학적인 의미에서 빛은 광선이며 일종의 전파로 직진성이 있는 엄청난 속도 에너지를 가진 물질입니다. 이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를 놓고 과학계에서는 아직도 격렬한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과학적으로 빛의 실체를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은 어둠을 밝혀 주기도 하고 세상 만물에 색을 입혀 주기도 합니다. 스펙트럼을 통과한 빛은 일곱빛깔의 무지개색으로 나뉘어 집니다. ‘빅뱅이론은 우주가 어떤 섬광으로  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창세기 13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의 말씀과 많이 닮아 있지요. 저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더 연구하는 과정에 있으며 오늘 설교에 그동안 묵상했던 내용을 반영했습니다. 이 연구가 진행되면서 제 2, 3의 빛에 대한 설교문을 만들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말씀, 즉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상징적 표현이라 과학, 물리에서 말하는 빛과는 다르다고 봐야겠지만 말씀이나 하나님 등을 사물에 빗댄다면 만큼 좋은 비유도 찾아보기 힘들겠지요.  

[ 성경내에서의 쟁점과 해석 ]  

오늘 설교 본문인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에서 깨닫지 못하더라의 Greek 원어 카타람바노 (καταλαμβάνω)는 취하다, 영접하다의 원형 동사 람바노(λαμβάνω)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 대한 해석을 놓고 개역개정과 KJS, NIV, ASV 등이 ‘이해하다’, ‘깨닫다’, ‘인지하다’로 번역하고 있고 새번역, NRT, NRSV 등이‘  이기다’, ‘끄’ 등의 해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0~12절은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γινώσκω)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해서 여기서 영접하다라는 단어로 파라람바노(παραλαμβάνω)와 람바노(λαμβάνω)와 같은 동사원형을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15절은 하나님이 빛으로 오셨지만 어두움이 그것을 받아들이지(영접하지) 않았다고 번역해야 합니다이렇게 번역했을 때 요한복음 11절부터 12절까지는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깨닫다’’이해하다로 번역하려면 110절의 그노스코(γινώσκω)카타람바노 (καταλαμβάνω)로 사용했어야 합니다 . 그래서 요한복음 11절부터 12절까지는 하나님이신 말씀(logos)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 빛으로 왔는데 사람들이 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세례요한을 증인으로 보냈다.(영접하라고) 그가 세상에 있었으며 세상은 그에 의해 창조된 것인데 세상은 그가 누군지를 알지(γινώσκω) 못했다(다른 차원이므로). 그가 자기 땅에 왔는데 (빛으로)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빛을 받아들이는 (영접하는)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실 원어 분석이 어떻게 되었든지 여기서의 결론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로 볼 수 있습니다.    

[ 세상에서의 문제 ]

실제로 보면 빛을 빛으로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나 혹은 세상을 살면서 겪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사실을 서기관들은 바로 알고 동박박사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맞이하러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메시아가  오면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기 때문에 오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늘 현대교회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만 재림하면 교회는 더 이상의 기득권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기 보다는 어두움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당수의 교회가 영을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는데, 어쩌면 알면서도 방조하면서 교회 신도의 증가를 목회의 성공으로 간주하는 세태와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성경내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아직 십자가의 얘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 자체가 십자가의 대속에 못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지창조 당시 하나님께서는 섬광으로 빛을 주셨고 생명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어둠과 죽음으로 바꿉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직접 빛이 되셔서 인간세상에 침투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저는 개를 좋아하는데 제가 초등학교때는 지금 같은 고급견은 아마도 한국 최상류층 정도나 키울 수    있는 존재였고 보통 잡종견을 집에서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를 데리고 같이 잠자고 뽀뽀하고 하면서 지냈는데  어느날 얘가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며칠 동안을 학교 끝나고 울면서 찾아 다녔습니다. 저는 어릴 때 세검정이라고 하는 평창동 아래 홍은동 쪽에 살았는데 당시에는 개장수가 끌고 가기도 하고 그저 일반인이 계곡에서 잡아  먹으려고 잡아가는 경우가 흔했지요.  그 이후로 제가 보신탕집을 보면 속이 메슥거리면서 밥을 잘 못 먹었어요. 사회  생활하면서 애로사항이 좀 있었지요. 직장에서 상사가 보신탕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 거절하면 좀 좋지 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시절이라, 어떤 사람은 보신탕을 못 먹는데 핑계를 대기를 아버지 유언이라고 하는 사람도 봤어요. 저는 아버지가 지금도 정정하게 살아계시니 그 핑계를 댈 수도 없었지요. 아뭏튼 그렇게 개를 사랑했는데도 저보고 개가      되라고 하면 그건 아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되신 겁니다. 우리를 구속하시려고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

요한복음 110절에서 12절을 보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인간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신 것을 사람 들이 알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심으로써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선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종말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많은 종말적 증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당시부터 인류 구속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창세기 25절을  보면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고 했는데 여기서 내력은 히브리어 톨레도트(תוֹלְדוֹת)를 창세기 안에서 찾아 보면 족보나 세대로 나오는데 한글 번역으로는 족보세대, 계보, 자손, 후손,내력, 대략 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한글 개역개정판에서 다양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원어로 분명히 같은 단어를 쓰는 것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인류의 족보와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천지창조는 인류구속의 역사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거룩한 선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에 굴복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고통을 통해 인간을 자신에게 되돌아 오도록 하기 위해 용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정의로운 만큼 자비로우셔서 엄청난 반전을 계획하셨는데 그 분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사람들의 빛이 되어 주시었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아멘.

 

설교본문 : 시편 136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도입부 ]

시편 136편은 후렴구인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로 유명하다. 아마 당시에 제사장 같은 예배 인도자가 앞부분을 말하면 회중들이 후렴구로 응답했던 것으로 보이며 하나의 예배절차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고 이것을 신실하게 지키고 계시다. 창조이전부터 백성을 택정하시어 경륜적 삼위일체로 종말론적 구속사역을 하고 계신 것이다. 136편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한 백성들의 감사와 찬양이라는 주제로 읽어야 한다.

[ 성경내에서의 쟁점과 해석 ]

1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2, 3절에서는 다른 모든 신들을 뛰어 넘는 신들의 신임을 선포한다. 성경은 하나님외에도 신이 있다는 것을 여러 군데서 알려준다. 그 모든 신들중에 하나님이 최고임을 찬양하는 것이다. 4-9절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찬양한다. 5절에 지혜로 하늘은 지으셨다는 구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을 읽어 보면 성경구절들이 단순히 상징적인 내용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신학 등은 성경을 구절대로 해석할 생각을 하지 말고 자꾸 다른 해석을 가미하도록 강요한다. 10-15절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위대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10가지의 재앙으로 완악한 바로를 제압하고 출애굽시킨 사건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16절은 광야에서의 사건들이다. 이것은 모세오경의 출애굽기 중간부터 신명기 후반 까지의 부분에 해당한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해내신다. 거기에는 만나가 있었고 메추라기가 있었다.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17-22절에서 시편 기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가나안에 정착 하게 하신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10명의 정탐꾼들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 대노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적으로 아무리 두려운 일이 있어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면 해결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23-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긍휼을 주셨음을 선포한다.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해주시고 거져주셨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여야 하며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해야 한다.

[ 성경내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

하나님의 자비는 사실 창세전부터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시편 136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구속사역을 설파한다. 이러한 긍휼과 은혜를 입혀서 예배를 드리자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늘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하면서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은 찬양을 놓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시편기자는 이러한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미래의 인류 구속의 은혜를 암시한다. 시편 136편에는 아직 십자가의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훗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십자가의 대속을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십자가의 대속 사건을    제외하고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이라는 드라마에서 완성이 된다. 시편 136편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성육신 사건과 연결해서 볼 때 비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목적을 알 수 있게 된다.

[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 감사와 찬송으로 응답한다 ]

감사는 성숙한 인간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성이다. 감사에는 악과 불의가 존재 하는 세상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감사는 우리가 갖가지 고난과 비극을 겪을 때 느끼곤 하는 절망감과 무력감에 대한 해독제로서,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러한 감사를 실천하여 자신의 말과 모범으로 주변사람 들에게 이것을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수한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더욱 깊이 자각할 수 있게 된다. 감사하는 태도는 가정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감사는 부부관계로부터 시작된 인간관계로 확대된다.관계는 창조질서의 기본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처음부터 창조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다. 사람들 간의 수평적인 사랑의 관계는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인류 구원계획의 일부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과의 관계 회복일 것이다. 타락으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복원은 감사이다.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원활한 소통을 해야 하며, 상대방 이야기에 기울일 알아야 하고, 갈등의 원인분석과 그에 대한 현명한 해결, 친밀감의 유지, 자신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이타심 배양, 실천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과정으로서의 용서와 화해와 더불어 임의적 혹은 예정된 상실에 대한 극복 등이 있다. 결론적으로 감사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 있다. 분이야 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있고, 그렇게 하기를 간절하게 원하시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현재 세계에 창궐하는 전염병 사태,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의 끈을 놓쳐서는 안된다. 하나님 앞에 상실을 내려 놓고 죽음이 최후 승자가 아님을, 우리의 구주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눌 있는 영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임을 믿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감사는 선한 동기를 더욱 강화하는 능력이 있고 잘못되고 악한 동기를 약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상처에 대한 치유가 쉽지 않은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에 있다. 감사는 상대방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더 큰 유익을 준다. 교육적으로 보면 감사하는 태도는 가정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일생을 통해 영혼을 치료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할 것이다. 감사를 통해 우리는 상실을 이겨낼 수 있다. 상처 입은 관계는 감사와 사랑이라는 해독제를 통해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느낌으로써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진정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올바른 결정을 하여야 하는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믿는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의 문제는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해소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우리가 시편 136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에 굴복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인간들을 자신에게 되돌아 오도록 하기 위해 긍휼을 베풀고 은혜로써 용인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정의로운 만큼 자비로우셔서 엄청난 반전을 계획하셨는데 그 분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사람들의 빛이 되어 주시었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인 것이다. 아멘.

성령의 탄식( 8:29~30)

  1. 서론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구원과 거리가 먼 신앙생활은 헛된 믿음이며 그것이 없는 신학공부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라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면서 현재 내 삶의 자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는 M.Div 2년차로 졸업까지 1년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히 신학생의 신분으로 있을 때 적어도 제 나름의 개인 구원관을 정립한 뒤 남은 생애 동안 제 자신을 구원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가정을, 사회를, 세상을 구원하는데 일조해 보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일반적인 목회자들의 설교 형식보다는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진정한 개인 구원을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를 같이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2. 구원론과 관련한 로마서 소개

    구원과정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크게 나누어 보면 회심(회개와 믿음)-성화-영화의 단계입니다. 여기서 칭의는 회심에 포함시키고 중생이나 양자됨은 성화과정에 포함시킵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된 회심을 통해 예수님을 닮는 과정인 성화과정을 거쳐서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영화의 순서입니다. 일반적으로 현세에서의 완전한 성화, 영화를 달성 하지 못하며 죽기 직전에나 혹은 죽은 뒤에야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현세에서 완전한 성화가 가능하다고 하며 또한 죽기 직전을 죽기 전 10년전, 20년전 혹은 40년전 쯤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기 때문에 완전성화가 현세에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이 통일된 이론은 아닙니다. 완전성화, 곧 영화가 현세에 이루어 질 수 있느냐의 문제와관련하여 오늘 성경 본문인 로마서 8 30절을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었느니라라고 하여 하늘나라에서 체험하는 영화를 이미 받은 것으로 과거 시제로 쓴 것에 대해 바울이 미래에 일어날 것을 확신해서 그저 과거시제로 말했을 뿐이라고 보통 설명을 하는데 이 표현을 말 그대로 이미 영화롭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해석은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이 구원의 시기의 문제는 명확하지 않고 아주 모호하게 기술을 해놓아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주제입니다. 구원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시간 개념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시간이 있지만 하늘나라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것이므로 시간이 없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도 없습니다. 따라서 비록 일시적일 수는 있어도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얼마든지 올 수 있으며 그것은 오늘 내 삶의 자리를 살펴서 알 수 있는데 오늘 내 자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으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구원론과 관련한 대표적 성경은 로마서입니다. 이 시대에 전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로 손꼽히는 제임스 패커성경 안의 모든 길은 로마서로 통하며, 성경 에서 제시하는 모든 관점은 로마서에서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는데 로마서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사고 친다는 말이지요) 이 로마서를 크게 깨우치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고 인류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기리라고 확신합니다. 실제로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를 연구하여 쓴 주석에서 로마서 서문은 종교개혁의 신앙과 사상의 선언문이라고 까지 평가 받고 있고 스터디 그룹에서 이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다가 존 웨슬리는 뜨거운 것이 올라오면서 성령 체험을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특별히 개인 구원과 관련해서는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에 현대신학의 구원론 전체가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이 로마서의 구원론과 관련하여 제 나름의 구원관을 도출해 보기 위해서 특별히 주석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여러버전의 성경으로만 면밀하게 분석하고 묵상하여 개인 구원과 관련하여 다음의 3가지 사항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지속적으로 매일 수행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3. 구원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3가지를 명심하고 지켜야 합니다

  1. 먼저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성서를 통한 위대한 회심에는 성 어거스틴, 루터의 회심, 존 웨슬리의 회심이 유명합니다. ‘sola Script’(오직 성서) 라고 외친 종교개혁가들은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성서의 지식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수 없다고 알려줍니다. 구원의 확신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룰 수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성서를 통해서 만이 가능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오직 하나의 목적과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는 과정에서 기독자 완전, 즉 완전 성화의 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와 성령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성서 안에 성령이 담겨 있는 것이라 성서는 영적 생명을 창조하고 지탱시키는 성령의 사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통해 예수 그리 스도를 증거하고, 신자들의 삶을 인도하며, 교회 속에서 권위를 행사합니다. 또한 성령은 성서를 도구로 하여 하나님말씀을 전하므로 성서 말씀을 따르는 것은 구원을 향한 필요조건이 됩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신앙에 필요한 자양분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합니다.

  2. 이렇게 성서를 통해 회심이 이루어지면 구원은 시작된 것으로 보는데 두 번째로 우리는 성화과정에 들어섭니다. 성화과정은 매일 매일 죄와의 격렬한 싸움을 통해서 단계적 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의 죄와의 담대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죄의 본질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이 죄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여기서 인격화 되어 있는 죄는 살아 있는 생물로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 안에 성령이 살아 계시듯이 죄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 23절에서처럼 죄는 사람을 휘감아 죽음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죽음을 가지고 인간을 종으로 다스리기도 합니다. 성령이 인간의 영생을 위한 무기요, 보혜사인 것과 같이 죄는 사망을 위한 무기요 사망의 강력한 후원자입니다. 로마서 7 5절 말씀을 보면 죄는 율법을 근거로 한 우리의 죄책감을 노려 우리의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열매를 맺게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가지고도 우리를 죽입니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를 포기하게 하기 위해 죄가 교활하게 율법을 이용한다는 뜻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는 이미 죄와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이기셨으며 우리는 그 주님과 연합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6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게 하지 말고라 하여 성화과정에서 끊임없이 죄와 싸워야 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죄와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한지 바울 사도는 로마서 7 23~25절에서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하면서 자신의 육체가 죄를 이길 수 없음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자기가 완전한 성화, 즉 영화에 도달했음을 부인했지만 끝까지 죄와의 치열한 싸움을 지속하였고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디모데 후서 4 7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 후서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바울의 마지막 서신서로 순교 당하기 직전 로마의 마메틴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기록한 유언과 같은 서신 입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죄로 인해 우리가 현세에서 영화에는 도달하지 못하지만 죄를 향한 담대한 싸움을 통해 우리는 주 안에서 결코 정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8:1), 어느 누구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 ( 8:39)이라고 확신합니다. 로마서 8장은 로마서 1~7장에 대한 결론, 즉 완전한 성화인 영화에 대한 개인 구원의 완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8장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확정적으로 정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을 것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등 바울의 삶 전체를 면밀히 살펴보면 바울은 내적으로 자신의 죄와의 싸움을 위해 결국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을 의미하는 순교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묵상해 보게 됩니다. 자신 안의 죄성을 극복하지 못한 그는 빌립보서 1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은 유익함이라고 하였고 디모데후서 4 6절에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등과 같이 죽음을 각오한 전장터의 장수 같은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죽음으로 죄와의 치열한 투쟁을 해야 합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구원의 전 과정에서 역사하고 계십 니다. 성화 역시 성령이신 하나님의 행위인데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영혼을 죄로부터 해방하시고, 성령 충만에 의한 사랑으로 온전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은 물거품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께 매달려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 하나님께 우리의 구원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이미 성령께서는 어머니 같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성부 하나님께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성령의 탄식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한심해서 탄식하신다는 말인데 기도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말이죠. 사도 바울과 같은 성자의 기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중언부언인 모양인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기도방법을 잘 모를 때는 주님께서 알려주신 주 기도문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 우리 역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죄를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매달려야 합니다. 이러한 간구를 통해 아름다운 9가지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 결론과 마무리

    이상으로 말씀을 마치기로 하고 지금부터 각자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죄와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1분간만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 (통성기도 1)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인된 우리를 창세전부터 택정하시어서 우리를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우리를 또한 영화롭게 해주시었으니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 친히 성령을 통해 내려 주신 성경말씀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이에 굴복하지 않도록, 이미 약속해주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성령의 무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갈 길을 마치고””믿음을 지키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주 안에서 결코 정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도의 거룩한 견인을 ……. 성령으로 붙들어 주시옵고 말씀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마치는 기도) 주께서 허락하신 이 아름다운 공동체 캐나다 크리스천 칼리지 한인 학부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통해 매일 죄와의 담대한 전쟁을 수행할 것이오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넘치도록 부어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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