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복음서 요절 암기법

신학서적 리뷰 2020. 4. 14. 07:30 Posted by forest38

4복음서 암기법 및 주요구절

1. 마태복음(9+9+9+1 = 28)

제목 또는 주제

핵심(주요) 구절

1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 (17)

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2

동방박사 (9~10)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3

세례요한 (3)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4

사탄의 유혹 (1~2)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5

빛과 소금 (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아나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6

주기도문(9~13)

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니다 아멘)

7

두드리라(7)

7 구하라 그러면 열릴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8

나병환자 고치심(2~4)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 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9

금식(14~15)

14 이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0

열두제자(1~4)

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11

무거운 짐(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12

손마른자를 고치심(10~13)

10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옭으니이까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 때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3

씨뿌리는 자의 비유(3~8)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4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벼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 떨기 위헤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4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19~21)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15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 (35~38)

35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16

천국열쇠(18~19)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7

변화산(1~2)

1 엿새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18

잃은 양 한 마리 (12~14)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19

어린아이를 축복하심 (13~15)

13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20

섬기는 자가 다스린다 (25~28)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1

쫒겨난 상인 (12~13)

12 에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이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

22

큰계명 (37,38,40)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람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3

외식하는 자 (27~28)

27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히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4

그날과 그 시 (21,36)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25

열처녀의 비유 (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26

향유를 부은 여인(7,10~12)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10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27

가시 면류관 (27~30)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28

부활하신 예수님 (9~10)

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2. 마가복음(8+8+8+1=25)

제목 또는 주제

핵심(주요) 구절

1

어부 네 사람 (16~20)

16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

중풍병자 고치심 (9~12)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3

바알세불과 성령 (22~23, 29)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사단을 쫒아낼 수 있느냐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리라 하시니

4

겨자씨의 비유 (30~32)

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5

돼지 떼 (11~13)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6

세례요한의 죽음 (26~29)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7

귀머거리 고치심 (32~35)

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8

수난 예고 (30~32)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서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9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 (17)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10

낙타와 바늘귀

(23, 25,27)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11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 (13~14)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2

가이사의 동전 (14~17)

14 ...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 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13

환난예고 (10,14,20)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

14

아버지 뜻대로 (35~36)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15

십자가에 못 박히심 (25,27,33~34,37)

25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3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16

예수님의 승천 (15~20)

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여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3. 누가복음(24= 8+8+8)

제목 또는 주제

핵심(주요) 구절

1

마리아의 노래 (47~49)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2

예수님의 어린시절 (28,36,40,42,52)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36 또 아셀 지파 바누렐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42 예수께서 열 두 살 될 때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3

세례요한의 전도 (16)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다항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4

고향 (23~24)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5

고기잡이의 기적 (4,6)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릐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6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43~44)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7

살아난 과부의 아들 (13~15)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8

잔잔해진 풍랑 (24)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9

불안에 싸인 헤롯 (7~9)

7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 혹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9 헤롯이 가로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

10

선한 사마리아인 (36~37)

36 네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11

표적을 구하는 세대

(29~30)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1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19~21)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맣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3

누룩의 비유 (20~21)

20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14

제자가 되려면 (26~27)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5

탕자의 비유 (31~32)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6

부자와 거지 나사로 (31)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7

나병환자 열명 (17~19)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깨ㅔ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8

과부와 재판관 (6~7)

6 주께서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9

당나귀 입성 (37~38)

37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20

부활논쟁 (35~38)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37 죽은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21

깨어 기도하라 (31~36)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 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22

최후의 만찬

(14~15,19~20)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3

예수님의 무덤 (50~56)

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52 빌라도에게 가서 옛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2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13~17)

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리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4. 요한복음(7+7+7=21)

제목 또는 주제

핵심(주요) 구절

1

말씀이 육신되다 (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

가나의 혼인잔치 (11)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3

니고데모 (3)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4

사마리아 여인 (14)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5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 (8)

8 에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 이 날은 안식일이니

6

생명의 떡 (53~55)

53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니

7

예수님의 형제들 (5)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8

간음한 여인 (7)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자가 먼저 돌로 치라

9

소경을 고치심

(3, 5)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5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10

선한 목자 (11)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1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32~35)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2

생명을 살리심 (9~10)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3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 (14)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4

예수님의 평안 (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5

참 포도나무 (1,3~4,7)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6

세상을 이겼다 (32~33)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17

제자들을 위한 기도 (11)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어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8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27)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19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다

(32~34)

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20

도마의 불신앙 (27)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7)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4복음서 개관 및 핵심 요절

마태복음은 세리 마태가 A.D 50~70년 사이에 기록한 성경이며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씌어졌다. 마태복음 18 1절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가 대표되는 요절이다. 마태복음은 다음의 특징을 갖고 있다. ⓛ 바리새적 율법주의를 비판 (화선포) ② 바리새인 보다 나은 의를 촉구 (5:20) 율법의 유효성’(유대적 성향) ④ 예수는 모세보다 더 위대한 분 (5-7) 교회의 복음서’(교회의 복음) ⑥ 구약 성취 인용문을 많이 사용 ⑦ 모세와 다윗을 능가한 메시아 예수 ⑧ 구원관 (‘청함 받은 자는 많되 택함 받은 자는 적다’, 22:14) ⑨ 교회관(가라지와 곡식, 죄인과 의인이 함께 모여 있음, 13: 24-30) ⑩ 심판관 (행위가 없는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함, 7:21-23; 25:31-46).

마가복음은 마가가 A.D 65~70년 경에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관점으로 저술한 성경이다. 대표 적인 요절로는 마가복음 10 45절의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이다. 마가복음은 이방인인 로마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이방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이 많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록되었다. 이방인들은 이론보다는 행동을 더 중요시 하였으므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족보를 과감히 삭제하였다. 마가복음은 16678절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복음은 의사 누가가 A.D 62년경 기록한 성경으로 인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인성을 지닌 사람으로 기록한 성경임. 대표적인 요절로는 마가복음 23 47절에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임. 누가복음에는 유난히 병자에 대한 치료부분을 상세하게 기록한다. 공관복음서 중에서 가장 나중에 기록된 누가복음서 는 가장 많은 자료를 사용하고 있고 또 다양한 신학적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누가복음서의 특징은 ⓛ 최초의 기독교 역사가적 관심 ② 하나님의 구원사의 3단계화 (구약시대-예수시대-교회시대) ③ 우주적 지평(이방세계 지향성) ④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 (가난한 자, 세리, 죄인 등) 여인들의 복음서 성령의 활동을 강조 ⑦ 재물, 부에 대한 비판 ⑧ 기도, 회개, 용서를 중시 ⑨ 예수의 수난을 의인의 순교로 이해 ⑩ 로마에 대한 정치적 변호, 유대교의 배척 등이다.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A.D 85~90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기록, 대표적인 요절로는 요한복음 3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임. 요한복음 1 1~18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 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의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예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결국 요한복음 1 1~18절에는 4복음서의 내용이 압축, 요약되어 있고 이는 구약 39권의 예수님의 예표와 신약 27권의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전부 아우르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다윗의 계보인 왕으로서 사람(인자)으로서 또한 섬김()으로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왔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우리 믿는 자를 세우사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할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겸손히 섬기는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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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Packer ; 제임스 패커 저/ 정옥배 옮김 / 송인규 해설 

1부 여호와를 알라

1.    하나님에 대한 연구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위해 우리는 다섯 개의 기본진리, 곧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다섯가지 근본 원리가 이 행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결정할 것인데 다섯 가지 기본원리는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며,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② 하나님은 그분이 지으신 세상의 주님이시며 왕이시다. 하나님은  하시는 모든 일에서 완전하심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이로 인해 인간들과 천사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미한다 ③ 하나님은 구세주로서, 믿는 자들을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 구하시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권적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나타내 보이신다. 그리고 그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합당한 복을 주신다 ④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신성 안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위격이 있으며, 구원 사역은 이 세 위격이 함께 하시는 역사다. 곧 성부께서 구속하기로 결심하시고, 성자께서는 그 구속을 이루시며, 성령께서는 그것을 적용하신다 ⑤ 경건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신뢰와 순종, 믿음과 예배, 기도와 찬양, 복종과 섬김으로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드러나고 영위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종교다.

2.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는 다니엘서를 통해 이에 대한 대답을 해보기로 한다. 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엄청난 열정을 갖고 있다 ②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생각을 품고 있다 ③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담대함을 드러낸다 ④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커다란 만족을 얻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한다면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인식하고 우리를 깨닫도록 주님께 간구하여야 하며 둘째로, 우리는 구세주를 찾아야 한다. 주 예수를 찾은 사람들만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하나님을 안다고 증거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을 찾으면, 분명히 그분을 찾게 되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3.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우리는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니이다”( 17:3).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매우 낮아지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죄와 죄책과 연약함과 무지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말씀하셔서, 당신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절망적이고 무력하다고 판단하며 소리쳐 용서를 구할지 않을 수 없게끔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하나님은 실제로 마음을 열어 보이시며, 당신과 친구가 되시고, 당신을 동료로, 바르트의 말로 하면 언약의 동반자로 삼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하셔서 우리와 사귀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사람을 아시는 것은, 자비로운 구원이라는 전체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그 아심은 아시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개인적 애정, 구속의 행위, 언약적 신실함, 섭리적 보살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앞에서 우리가 암시한 것처럼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어지는 구원이다.     

4.    오직 참되신 하나님.

형상들은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림과   형상을 금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묘사하는 신적 존재의 인격적 본질과 특성에 대한 진리의 대부분을---전부는 아니더라도불가피하게 숨기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형상들은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상을 기도의 보조물로 사용함으로써, 경건을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고난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보는 위험에 빠지곤 했다. 그리하여 육체적 고통의 영적  가치에  대해 불건전한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부활하신 구세주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성경이 계시보다 철학적 추론에 의거하는 모든 사변적인 신학은 이 점에서 잘못되어 있다. 바울은 이런 유의 신학이 결국 어떻게 되는가를 말한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 신학의 영역에서 자기 마음의 상상력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채로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추측과 상상력으로 만든,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형상인 우상을 숭배하는 길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제 2계명의 적극적인 측면은 명백하다.  계명을 소극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는 예배 방식과 종교적 관행에 대한 경고다. 반면 적극적으로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초월하시고 신비로우시며  불가해 하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상상과 철학적 사고 범주 너머에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명령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견해는 다름 아닌 성경으로부터 취하여야 한다. 

5. 성육신하신 하나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성육신을 어떻게 설명해 주느냐에 있다. 여기에는 두가지 신비가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1:14).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짜 걸림돌이다. 하지만 일단 성육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난점들은 사라진다. 우선,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그 아기는 진짜 하나님이었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오해하기 쉬운 연상들로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주장하셨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게 있다고 생각되는 아들 됨은 바로 신성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래서 유명한 요한복음 서문( 1:1-18)이 나오게 된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의 의미와 본질을 여기처럼 분명히 설명하는 곳이 없다. 또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그 아기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다. 그분은 하나님에서 신성의 어떤 요소를 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인성을 취하심으로 인성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드신, 모든 것을 더한 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인이신 성자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성부에게 순종하신 것은 성육신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관계가 아니라, 하늘에서 누리는 성자와 성부의 영원한 관계가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었다.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도 성자는 성부의 뜻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성자께서는 알 수 있을 만한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알지 않으셨고 오직 성부 하나님이 알도록 뜻하신 것만을 아셨다. 성자의 지식은, 그분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성부하나님의 뜻에 의해 제한되어 있었다.

6. 그가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은 성령을 보내실 분은 성부 하나님임을 알린다. 성자를 보내신 분이 성부이신 것과 마찬가지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부께서는 내 이름으로 즉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대행자로 활동하며 그분의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의 대리역으로서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사,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활동하시고,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셨으며아버지의 일을 하시고, 자신을 사자로 보내신 하나님을 끝까지 증언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사, 세상에서 예수님의 대행자와 증인으로 활동하실 것이다성령론은 기독교 교래에서 재 속에 묻힌 보석과 같으며 거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를 우리의 논증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눈 먼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전능하신 역사가 없이는 어떤 사람도 기독교의 진리를 입증할 수 없다. 인간의 양심에 복음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주권적인 특권이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성공하리라는 소망의 근거가 자신이 진리를 잘 제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진리를 권능 있게 나타내 보이시는 데 있음을 배워야만 한다. 만약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2부 네 하나님을 보라

7.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곧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이 씌어진 그 때와는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현재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지도 알지 못한다. 공간과 시간, 문화라는 견지에서 보면 그 사람들과 그들의 시대는 우리에게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이러한 의구심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불변성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해가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성품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방식들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들도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도 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13:8) 그분의 손길은 여전히 예전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매우 커다란 위안을 준다.    

8.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가지는 방법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알려준다. 첫 번째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 하나님을 왜소하게 만들 만한 제한들을 제거해  버리라는 것인데 시편 139편에서 기자는 사람들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임재와 지식과 능력의 무한하고 무제한적인 특성에 대해 묵상한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고 말한다. 당신은 동료 인간과는 관계를 끊을 수 있다. 하지만 창조주에게서 달아날 수는 없다. 나를 인간의 시야에서 감추어 주는 흑암이라도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가려주지 못한다. 만물을 꿰뚫어 보는 하나님은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위대함을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 임재, 능력이 얼마나 무한한지를 인식하는 것이다두 번째는 우리가 위대하다고 여기는 권세나 힘과 하나님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이사야 40장에서 하나님은 그 분이 행한 과업을 보라고 말씀하시고 선지자는 계속해서 열방을, 세상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크기와 다양성과 복잡성을 생각해 보고 거기에 사는 70억의 인구와 그 위에 있는 하늘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사는 지구 전체에 비할 때 우리는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들인가! 그렇지만 이 거대한 전체 행성도 하나님과 비교할 때 어떠한가? 위대한 자들을 보라. 하나님은 이 세상의 위대한 자들보다 더 위대하시다. 마지막으로, 별들을 보라. 몇 백만개에 이르는 별의 숫자나 몇 십억 광년에 이르는 거리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추가할 수가 없다. 우주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생각하려 할 때, 우리는 정신적으로 마비되고 어지러워진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

9. 지혜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단순한 영리함이나 교묘함이 아니다. 지혜는, 최선이며 최고인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을 보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선택하는 성향이다. 지혜는 도덕적 선의 실제적인 측면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전능함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좌절이 없다. 하나님 안에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이 한데 결합해 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은 완전한 신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 되신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혜는 언제나 활동하고 있으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와 섭리와 은혜의 사역은 지혜를 나타내 보이며, 우리는 그것들 안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혜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들을 제대로 본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하여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안에서 볼 수 있었던 만큼의 목적은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사탄의 사자로서 그에게 왔으며, 하나님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들을 하도록 유혹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유혹에 저항했고, 가시가 제거되기를 구하면서 세 번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했다. 바울이 받은 유일한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것이었다. 숙고한 끝에 바울은 왜 그 같은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계속 겸손하도록 곧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기위함이었다. 이러한 생각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그는 족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9)

10. 하나님의 지혜와 우리의 지혜    

옛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룰 때, 비공유적인 속성과 공유적인 속성이라는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지혜는 공유적 속성에 포함된다. 하나님이 원래 지혜로우신 것 같이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신다. 우리는 지혜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이 은사를 우리 손에 넣으려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성경에 따르면 이를 위한 선행 조건이 두 가지  있다. 첫째,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서 지혜를 받기 에는 너무 교만하고 자만심이 강한 상태로 온 생애를 보내는 것은 염려할 만한 일이다. 성경에서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11:2)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딤후 3:15-17) 해주는 성경에 푹 잠김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하나님은 원리들을 적용함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실 때, 때로 우리가 신호로 즉시 인식할 만한 색다른 섭리를 통해 그 같은 인도를 확증해 주신다. 그러나 사실 지혜의 은사란 이러한 능력과는 무관하고 우리가 그런 쪽에 무능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만사에 대해 신적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기대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비관적 결론으로 이끌 것이라고 전도서는 말한다.

11. 주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성경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사실은 첫째 하나님이 우주의 모든 일을 조정  하시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우주의 절대적인 왕이라는 사실 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이 행해지도록 하기 위해 그 뜻을 표현하는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살펴볼 것인데 하나님의 주권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하는 바에 비추어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왕이신 하나님에게서 온 토라는 세 가지 특성을 지닌다. 그 중 일부는 율법(제재 규정들이 첨부된 좁은 의미의 명령 혹은 금지 사항)이다. 그 중 일부는 약속(호의적이거나 비호의적이거나)이다. 그 중 일부는 선포(하나님 자신과 사람들, 그들의 행동, 목적, 본질, 기대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정보)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고 반드시 그렇게 된다. 이를 두 가지 맥락에서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의 계명은 진리이다. 성적 방종은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덜 인간적인 모습으로 만든다. 그것은 인간을 짐승처럼 만들어 버리며,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곳에서는 어디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는 바로 그만큼만 진정 인간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은 참되다. 하나님이 그 약속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약속을 틀림없이 이루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12.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사역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부어   주심으로 화평과 기쁨과 소망과 사랑을 주시는 성령의 일상적인 사역보다는, 치유와 방언의 은사들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전 12:28~30). 바울이 성령과 관련하여 에베소인들에게 바랄 수 있었던 최선은, 성령이 그들을 향해 계속해서 더욱 능력 있게 로마서 5:5이 사역을 하심으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 가게 되는 것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숙고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속을 들여다 본다. 우리는 거룩한 땅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죄를 짓지 않고 그 땅을 밟으려면, 경외함이라는 은혜가 필요하다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약속(8 :28)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하나 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제임스 오어는 사랑이란 일반적으로 한 도덕적 존재가 다른 도덕적 존재를 바라고 기뻐하도록 해주는 원리로서, 각자가 상대방의 삶 속에서 사는 인격적 관계, 상대방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고 자신도 상대방의 애정을 받는 것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그런 인격적 관계에서 최고의 형태에 이른다.”고 하였다. 로마서 8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한다.

13. 하나님의 은혜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이며, 그들의 생활 규칙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2:21) 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응보적 정의를 깨달아야 하는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도덕적인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죄를 벌하시지 않는다면 이는 그분의 본분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이 사실, 곧 행악자들에게 소망이란 없으며 하나님께 응보적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을 수 없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3:20)라고 단언한다. 한번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후에 그것을 되찾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성경적 믿음을 가지려면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이 앞에 고개 숙여야 한다은혜와 구원은 원인과 결과로서 한데 결합되어 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2:5,8).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2:11). 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3:16)에 대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는지”( 5:8)에 대해, 예언서에 따라 어떻게 샘이 열려”( 13:1) 죄와 더러운 것들을 씻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지금 복음 듣는 사람에게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고 외치신 것에 대해 선포한다.  

14. 심판자 하나님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그것이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행동이란 주제가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것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아시며, 우리를 있는 그대로 심판하신다. 바울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실재한다는 것은 분명 우리의 인생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야만 한다. 인생의 끝에서 응보적 심판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렇지 않을 때와는 다르게 살 것이다최후의 심판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그리스도 위에 어떤 생활 방식을 세울지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5). 지금 예수님을 찾으면 그분을 발견할 것이며(“찾는 자는 찾을 것”), 그렇게 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없다”( 8:1)는 것을 알고, 장차 예수님과 만나는 것을 기쁨으로 고대하게 될 것이다.

15. 하나님의 진노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점 가운데 하나는 신약과 구약이 하나님의 진노의 실상과 그 두려움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고는 그분이 벌하시는사람들이 스스로 따르기로 선택한 길에 의해 이미 자신들에게 부과한 그 심판을 비준하고 확증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최초로  보이신 진노의 행위에 대한 기사에서 나타난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기도 전에 이미 아담이 하나님에게서 숨고 그분의 임재를 피하기로 선택했음을 알게 된다. 똑 같은 원리가 성경 전체에서 적용된다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신약의 논법은 로마서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며,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4:15)한다. 율법은 우리 안에 잠복해 있는 죄를 불러일으키며 범죄진노를 유발하는 행동가 충만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5:20;7:7-13). 양심 속에 사실로 계시된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이 세상에서 힘으로 작용하는 증거를 원한다면, 바울은 단지 주위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이 무엇에 그들을 내버려 두셨 는가를 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16.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사람들은 혼란을 겪고 있다. 그 뿌리에는 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배우기 보다는 자신의 종교적 직감을 따르는 습관에 빠져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② 현대인들이 모든 종교를 대등한 것으로 생각하여 기독교적 출처뿐 아니라 이교적 출처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고 ③ 사람들이 자기 죄성의 실상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과 함께 ④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준엄하심이라는 개념과 분리시키는 습관이 있다는 것이다우리는 이렇게 분석한 혼란의 원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다음의 노력을 하여야 한다. ① 사람들이 생각하는 확신의 기초를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근거로 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② 하나님이 인간에게 최종적으로 주신 말씀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과 최종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애써야 하고 ③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기꺼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자신을 바로잡도록 해주어야 함과 동시에 ④ 하나님의 인자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준엄하심이라는 개념과 분리시키려는 습관을 고쳐주어야 한다바울은 로마서 11:22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고 말한다. 준엄하심은 문자 그대로 잘라내다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일축해 버린 자들에게서 그 인자를 단호히 거두시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는 모든 표현의 배후에는  만일 그 인자하심이 멸시를 당했을 때는 준엄한 심판이 있으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의미한다.

 17. 질투하시는 하나님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임을 명백히 알리고 있다.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24:14)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질투에 대해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① 하나님의 질투는 신인동형론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인격적인 존재이면서도 타락된 본성은 없는 상태이므로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의 질투와 같이 좌절과 시기와 원한의 복합체가 아니라, 어떤 것을 가장  값지게 보존하려는 찬양할 만한 열심으로 나타난다. ② 인간의 질투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중 하나만이 악덕이다. 종종 성적 질투라 불리는, 거부당한 혹은 밀려난 구혼자의 미친 듯한 광포함은 바로 이런 종류의 질투다. 또 다른 종류의 질투는 사랑하는 사이의 관계를 보호하려는 혹은 그것이 깨어졌을 때 복수하려는 열심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후자와 같다하나님의 질투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갖도록 촉구한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 한 마음을 품었으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열심 있는 사람이었다. 바울은 감옥과 고통에 직면해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4)고 단언했다. 또한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에 대해 열심이 없는 교회들을 위협한다. 차든지 뜨겁던지 하라는 말씀이다

3 부 하나님의 우리를 위하시면

18. 복음의 핵심

복음의 핵심에는 화목의 개념이 있다. 신약에는 화목에 관련된 4개의 본문이 나오는데 ①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3:21-26)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이 죄를 속량하려 하심 이라”( 2:17)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 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요일 2:1-2)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8-10). 이처럼 신약의 신앙에서 화목은 중심을 차지한다화목은 속죄를 의미하는 것에 더하여, 또한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화목제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한 희생적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셨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만큼이나 인격적이고 효력이 있다.

19.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됨이라는 선물은 태어남으로써가 아니라 중생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12-13). 요한일서에서 중심이 되는 사상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아들 됨(요일 3:1), 아들 됨의 도리인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2:9-11), 아들 됨의 특권인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2:13), 아들됨의 증거로서 의와 죄를 피하는 (2:29), 아들 됨의 소망인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3:3) 등이다양자됨은 복음이 제시하는 최고의 특권이다. 그것은 심지어 의롭다 함보다 더 높다. 양자됨은 하나님과의 더 풍성한 관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또한 양자됨은 지속되는 복이다. 부모는 완전히 지혜롭고 선하며, 자녀의 위치는 영구히 확보되어 있다. 양자 됨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도의 견인이며 보증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양자됨에 의하여 비추어져야 한다. 아들 됨은 모든 점에서 지배적인 생각, 말하자면 규범적인 범주가 되어야 한다. 이는 문제의 본질상 당연한 결론이며, 주님이 늘 이러한 견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 대해 가르쳤다는 사실로 확증된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자의 영으로 주어지며, 그리스도인과 관련된 모든 사역에서 양자의 영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이다.

20. 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도행전은 서너 번에 걸쳐 상세한 인도하심에 대해 기록한다. 꿈과 환상과  직접적인 말을 통한 인도는 사도들과 당시 사람들에게조차 예외적인 사건이며 통상적인 것은 아니라고 여겨졌지만, 이 사건들은 적어도 하나님이 종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도와 관련 사람들이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이를 본질적으로 기록된 말씀과는 별개로 성령이 주시는 내적 충동으로 생각하는 것이다우리의 이성적인 창조주가 그 분이 지으신 이성적인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근본적인 방식은, 그 분의 기록된 말씀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성령을  우리의 인도자로 존중하는 참된 방법은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수단인 성경을 존중하는 것이다. 로마서 8: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것은 내적 음성이나 그러한 체험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알려진 죄를 억제하고 육신에 따라 살지 않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인도의 제한 내에서만 하나님은 소명을 위한결정이라는 문제데 대해  우리에게 내적 충동을 주신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초월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이 정하는 한도 내에서 인도하신다. “그가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3).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대치되는 다른 어떤 길로도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신다.

21. 내적 시련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장미빛 환상만을 전해서는 안 된다. 복음적인 사역의 기초는 성경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리고 그 약속들을 하나님의 보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기서 통상적  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십자가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성령을 통한 새로운 탄생,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얻는 새로운 삶 등이다. 성경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진리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부적절하게 적용할 경우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복음이 가지고 있는 두가지 측면을 가감 없이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에 대한 더욱 깊어지는 지식 그리고 하나님과 계속 친밀해지는 교제야 말로 모든 은혜의 역사가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그분께로 점점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이다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경건한 삶의 비결을 가르쳐 주는 전형적인 성경의 문구를 빌린다면 여호와를 앙망하도록하기 위해, 조처를 취하신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 죄와 실수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과 육신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막아 주시거나, 부담스럽고 좌절되는 환경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거나, 우리 자신의기질과 심리로 인해 생겨나는 문젯거리들을 막아 주시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이 모든 것에 노출되도록 하신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함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께 더욱 매달리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이러저러한 괴로움과 당혹스러운 일로 채우시는 궁극적인 이유다.

22. 하나님의 충족성

로마서는 어느 모로 보더라도 성경의 정점이다. 루터는 로마서를 가장 분명한 복음이라고 하였고 칼뱅은로마서를 이해한다면 그에게는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확실한 길이 열린 것이다라고 했다. 틴데일은 로마서 서문에서 이 두 개념을 연결하면서, 로마서를 신약의 주요하고 가장 탁월한 부분 그리고 가장 순수한 유앙겔리온’, 즉 우리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기쁜 소식, 또한 전체 성경에 이르는 빛이요 길이라고 불렀다. 성경 안의 모든 길은 로마서로 통하며, 성경에서 제시하는 모든 관점은 로마서에서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고, 로마서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 중에도 8장이 압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라는 간단한 진술은, 사실 성경에 담긴 가장 풍성하고 중대한 말 중 하나다. 바울은 하나님이자기 아들을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사실 자체가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리라는 보증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신실하시며, 또한 당신에게 충분하시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 이상은 절대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공급하시는 것은 그 때마다 언제나 충분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넉넉히 이길 것이며,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충족성 안에서 기뻐하면서 로마서 8장처럼 살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27:8).

< 리뷰 > 

장점

제임스 패커는 금세기를 대표하는 복음주의 신학자로 리젠트 대학 교수(조직신학)를 역임   하였고 무엇보다도 성경적 경건과 신학적 이해 사이에 조화와 통합을 추구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성경의 무오성과 함께 이러한 무오적인 성경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가 개인과 교회의 삶에서 생생히 드러나도록 해야 함을 역설한 학자이다저자는 신학이론을 수필형식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평이한 문체로 신학 전반을 서술하여 초신자나 일반인에게는 어렵지 않게 조직신학적 지식을 전달하고 있는데 특히 신학적 난제로 볼 수 있는 성육신 개념을 요한복음 서문을 근거로 명쾌하게 설명한 것 등은 그만의 장점이다또한 이 책은 신학적 기반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신학지식을 실제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잘 보여주고 있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일독시 조직신학+성경통독의 효과를 낼 수 있게 해주고 있는데 특히 22장의 로마서 8장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주해는 독자로 하여금 당장 로마서 8장으로 달려가고 싶도록 만드는 생생한 충격을 안겨준다. 이 책은 저자의 성경적 통찰력과 함께 유려한 문체로 독자로 하여금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해주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주며 복음의 핵심을 설파하여 감동을 선사함으로써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에 다가가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귀한 책이다.  

단점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머리글에서 발코니에 앉은 사람들과 여행자들을실례로 들면서 이 책이 여행자들을 위한 책이며,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는 여행자들이 던지는  질문이라고 하였으나 본서의 내용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실제 삶에서 경험적으로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에 대한 측면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부록인 「연구 및 토론문제」에서 이 점을  보완하고는 있으나 본문내용과 부록이 독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 내용을 본문 안에 녹여 놓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또한 이 책은 각 장마다 통일된 구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개념을 핵심적으로 규칙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어떤 장에서는 결론 부분을 우리의 반응으로 잡는 반면 어떤 장에서는 결론 부분을 그저 저자의 이야기의 계속일 뿐으로 각 장마다의 통일된 형태가 있지 않다. 통일된 형태로 구성하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뿐만 아니라 저자 자신의 언급과 같이 각각의 장들은 잡지에 연재된 것을 모아서 편집하다 보니 조직신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개념상 빠지는 부분들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어떤 장들은 주제가 되풀이되고 반복되는 것이 있어서 한 권의 책으로서는 완성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적용

1. 개인에게

저자는 담담한 묵상과 유려한 필체로 우리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독서를 하면서 기회가 되면 장거리 열차여행에 원어로 된 성경책과 함께 이 책을 함께 가져가서 읽고 싶은 소망이 생길 정도로 묵상해야 할 많은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이고 만물을 꿰뚫어 보시며 전능하신 분이다. 우리는 그 분의 위엄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을 때까지 여호와를 앙망하여야 한다하나님의 지혜의 두 가지 목적은 개인적인 성화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 속에서 정해진 사역과 섬김을 완수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좌절스럽고 괴로운 상황에서 내재된 하나님의 목적을 어떻게 확인해나가야 하는가? 첫째로 그것들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복음이 그것들에 대해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에게 어떤 반응을 요구하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둘째로 특별히 그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행한다면, 우리는 괴로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을 온전히 파악하게 될 것이다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로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존중하고 순종하고 따르며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기꺼이 묵상하느냐, 묵상하기를 꺼려하느냐가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정말로 영향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확실한 검증수단이 된다. 하나님의 진노를 경외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은혜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다.

2. 교회에서

우리는 교회 내에서 성령의 사역을 인식하고 성령만이 우리 증거가 참되다는 것을 인증해 주실수 있음을 기억하며, 성령이 그렇게 하시도록 기대하고 그렇게 하실 것을 믿으며, 우리의 생각과 기도와 실제 생활에서 성령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는 핵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삶의 온갖 변화와 불확실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여전히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하심을 지닌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성서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결하여야 한다성서는 지혜의 열매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 화평과 겸손과 사랑( 3:17) – 이며, 그 뿌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난 것으로(고전 1:24, 30) 믿는 믿음(고전 3:18; 딤후 3:15)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혜를 추구하는 우리의 노력이 이러한 것들에 대한 노력이 되도록 하며,  세상에는 가질 수 없는 그런 지식을 추구하다가 믿음과 신실함을 소홀히 함으로써 하나님의 지혜로운 목적을 좌절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그 아래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그들 주위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정돈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안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환경을 조정하신다는 생각은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다.

3. 사회에서

우리가 믿지 않는 신도들에게 전도를 할 때 신학적으로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놓고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성육신, 삼위일체의 부분에 대해 비 신도들의 의구심을 어떻게 해소해주어야 할지를 스스로 이론화 시켜 놓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비 신도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들을 올바르게 전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느끼는 바대로 하지 않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확신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고 종교 통합주의로 같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과 최종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며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믿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라고 충언해야 하고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복 주시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때는 혹독한 징계를 가하시는 분임을 알려줘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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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 고대 그리스 철학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한다. 철학은 사물의 의심, 특히 자기가 소중히 마음에  고수해 온 신념, 즉 교리나 원칙을 의심하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들 신념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확고한 것으로 되었는지 또 남모르는 소망이 사상의 옷갈피에 욕구를 집어 넣어 어느새 그 확실성을 만든 것은 아닌지, 그것은 알 길이 없다고 한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검토하기 전에는 진정한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인 불가지론,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단 한 가지만을 안다라고 주장하였다그는 자기 나름의 종교적 신앙이 있었다. 그는 유일신의 존재를 믿으며 죽음이 자기를 멸망  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겸손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처럼 불확실한 신학 위에 불변의   도덕률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만일 모든 종교적 교리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경건파에게나 무신론자에게도 타당한 도덕체계를 세울수 있다면 여러 가지 신학은 생겼다 없어졌다 할지라도 도덕의 규범만은 늦추어지는 일 없이 어리석은 개인을 공동체의 평화로운 시민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소크라테스는 또한 지적으로 통치된 사회에서 평화와 질서와 선한 의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오직 투철한 통찰만이 필요함을 자각하고 있었다. 국가의 관리를 지적이고 현명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로 사회를 구하고 강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플라톤

플라톤은 민주정치를 파괴하고 가장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이 다스리는 정치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장 슬기롭고 선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국가를 다스리게 할 방도를 세우는 것이 플라톤이 일생을 통하여 전념한 과제였다. 플라톤은 10여년간 이집트, 시칠리아, 이탈리아, 인도 등을  여행하면서 훗날 그가 유토피아 <국가론>을 저술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플라톤은 정의란 단순히 철학이라고 말한다. 만일 인간이 단순하다면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로 족할 것이라고 하였다. 국민은 지성이 없으므로 통치자의 명령에 순종할 뿐이어서 중우 정치는 국가라는 배의 항해를 그리치게 한다. 이러한 민주정치의 종말은 전제정치이며 참주정치이다. 민중은 아첨을 좋아하며 꿀맛에 주려 있으므로 결국 가장 교활한자가 국민의 보호자 자처하여 최고의 권력을 잡게 된다.. 무능과 부정을 공무에서 몰아내고 공동의 복리를 위해 통치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준비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정치철학의 과제이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현재의 왕과 군주들이 진지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철학을 하여 지혜와 정치적 지도력이 한 사람에게 겸비될 때까지…… 국가와 인류는 결코 재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 사상이라는 아치의 Key stone(宗石) 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정신분석과 관련한 중요한 이론을 세웠는데 우리의 정치심리학이 혼란되어 있는 것은 인간의 여러가지 욕망과 본능을 충분히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꿈은 이런 미묘하고 포착하기 얼운 성질을 연구하는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고 하여 후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은 이상국가 실현을 위한 국민의 심리적, 도덕적 기초를 갖추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으로서 사회의 도덕적 요구에 대해 초자연적 권위의 승인을 내리는 것이라고 하며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국민은 신을 믿지 않는 한 강해질 수 없다고 확신하였으며 단순한 우주력이나 제 1원인 또는 생의 비약을 가지고는 도저히 희망,헌신,희생,위안, 용기를 줄 수 없지만 신은 이것을 할수 있다고 하면서 이기적 개인주의자를 흔들어 외경심을 갖게 하여 탐욕에 절도를 주고, 정욕을 억제시킬 수 있다. 만일 신에 대한 신앙에 인격의 불멸에 대한 신념을 더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영원한 삶에 대하나 희망은 우리들 자신의 죽음을 직시하는 용기를 줄 뿐 아니라 사랑 하는 이의 죽음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도 준다. 신앙을 가지고 싸우는 자는 이중으로 무장  되어 있는 셈이다. 비록 어떠한 신앙도 증명되지 않고 신은 결국 우리들의 사랑과 희망이 의인화된 이상에 불과하며 영혼은 칠현금의 소리와 같아 외형인 그 악기와 동시에 죽는다 해도 신앙이 우리를 해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며,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수많은 이익을 줄 철학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리스 시대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알렉산더의 부왕인 필리포스가 그리스를 통일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알렉산더의 스승으로 초빙한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을 감안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정계가 언제 일변하여 평화스런 철학적 생활을 폭풍우로 몰아넣을지 모른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해야 했으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만 비로소 아리스토   텔레스의 정치 철학과 그의 비극적 최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수많은 책을 저술했으며 거의 백과사전이라 할만한 문고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인류에게 전문적이고 추상적인 압축된 과학을 유산으로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위대한 공적은 오직 혼자만의 엄격한 사색으로 논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창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저서오르가논은 중세사상의 참된 옥토가 되어 스콜라 철학의 엄격한 어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그 교리에 얽매여 불임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청년기인 유럽의 지성에 추리와 세말한 분석의 훈련을 베풀고 근대과학의 전문용어를 만들며, 자기를 낳아 주고 길러준 체계와 방법으로는 모자랄 만큼 정신을 크게 성장시켰으므로 마침내 그것을 벗어버리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논리학이란 정확한 사고의 기술과 방법이다. 그것은 모든 학문과 과학 및 기예의 방법이며 음악 속에까지 스며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큰 공헌은 삼단논법을 정립한데 있다. 삼단논법이란 세 개의 명제로 이루어지는데 제 3명제(결론)는 다른 두 개의 명제(대전제 및 소전제)의 명백한 진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은 생물학에서 성장하였는데 세계의 모든 사물은 내부의 충동에 움직여져 지금 보다 더 큰 것이 되려고 하며 모든 것은 실제 형상일 뿐 아니라 그것의 질료였던 어떤 것에서  생장한 것으로 형상인 그것들은 또 그 자신보다 높은 형상을 생장시키는 질료가 된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자연이 특정한 자기 실현을 향하여 움직인다. 어떤 사건을 규정하는 여러 원인 중 목적을 규정하는 궁극 원인이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중요하다. 달걀은 오리가 아닌 닭이 되는 것과 도토리는 버드나무가 아닌 참나무가 되는 것처럼 내면적으로 계획되고 예정되어 있다. 이는 어떤 외적인 신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것이며 사물의 공동형태와 기능에서 생기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의 섭리는 자연적 원인의 작용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존재한다. 신은 청년기의 젊은 정신이 품을 수 있는 의인관에 의해 상상된 단순한 인간은 아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에 관한 오래 된 궁금증에서부터 이 문제에 접근한다. 운동에는 근원이 있는데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고 다른 일체를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것, 즉 비물체적이고 분할할 수 없고 넓이가 없고 성이 없으며 감정이 없는 불변의 완전하고 영원한 어떤 존재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신은 세계를, 사랑의 대상이 그것을 사랑하는 자를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인다.’고 한다. 신은 세계의 궁극 원인이고 사물의 원동력이며 목적이고 세계의 형상이다. 세계의 생명의 원리, 세계의 생성 과정과 힘의 총화, 세계의 성장의 내재적 목표 전체를 현실화하는 엔텔레케이아이다. 신은 순수한 에네르게이아, 스콜라 학파의 악투스 푸루스이다. 이것은 다분히 현대의 생리학이나 철학에서 말하는 신비적인 이라 할 수 있다. 이 신은 인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력이다. 그는 관조를 사랑하여 신의 개념을 희생시켰다. 그의 신은 플라톤의 철인왕과 다를 뿐 아니라 엄격하고 피가 통하는 실체로서의 여호와 신, 인자하고 무엇이든  염려해 주는 아버지 같은 그리스도교의 신과도 아주 다른 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보편개념-이데아-에 관한 실재론과 정치에 관한 이상론을 공격 하고 스승이 그린 미래화에 많은 오점을 발견하였다. 그는 플라톤이 명백히 수호자인 철학자들에게 강요한 병영 생활과 같은 민중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보수적이긴 해도 개성, 사생활, 및 자유를 사회적 능력이나 재능 이상으로 존중한다. 공산주의는 우수한 능력 발휘에 충분한 자극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파탄에 이른다. 획득의 자극은 노동력에 필요하며 소유의 자극은 적당한 근면, 절검 및 장래의 준비에 필요한 것이다가장 오랫동안 인류의 정신을 지배한 그의 업적에 대한 비평을 하자면 우선 그의 논리학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그는 삼단논법을 인간의 추리과정의 기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자기의 추리를 수식하는 방법을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또한 그의 자연과학에 많은 불완전한 관찰이 남아 있는 것은, 실험과 유효한 가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윤리학은 논리학의 일부일 뿐이다. 이상적 생활이란 올바른 삼단논법과 같아 그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은 개선을 향한 격려라기보다 오히려 예절의 안내서다. 그는 과도를 피하라는 델포이 신탁의 명령을 너무 완벽히 지키고, 오직 극단을 배격하려던 나머지 마침내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의 계몽을 위해 이처럼 큰 공헌을 한 사상가는 없었으며  후세의 모든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하였고 그의 어깨에 올라타 진리를 보려고 한 것이다. 그의 저서는 유럽철학에서 신학의 성경처럼 모든 문제의 해결점을 갖고 있는 절대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1260년에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기독교 학교에서 필독서가 되었고, 종교회의는 그의 견해에서 벗어나는 것을 유죄로 한다는 입장을 선언했다. 이처럼 오랫동안 인류의 지성을 지배한 정신은 그 외에 다시 없다.

 2 부 근대철학

프란시스 베이컨 .  

베이컨은 철학을 좀 더 유용한 면으로 스콜라적 논쟁에서 떠나 인간의 행복을 밝히고 그것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전향시키려고 결심하였다. 그의 다방면에 걸친 재능과 거의 무한에 가까운 지식은 그를 모든 중요한 위원회의 귀중한 회원이 되게 하였다. 높은 관직이 점차 그의 앞에 열려서 1606년에는 법무차관에 추대되고, 1613년에는 법무장관이 되었으며 1618년에 마침내 57세로 대법관이 되었다그의 작품 <에세이> 명예와 명성에 대한 에세이속에서 그는 모든 등급의 명예를 정치적 및 군사적 공적에 부여하고 문학적 및 철학적 업적에는 하나도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하여속에서는 진리의 탐구, 이것은 진리에 구애하는 일, 또는 구혼하는 일이다. 진리의 인식, 이것은 진리의 찬미이다. 그리고 진리의 신앙, 이것은 진리의 향수이고 인간 본성의 최고 선이다라고 씌어 있다. 그는 문장을 길게 늘이기 위한 말이나 쓸데없는 말을 경멸한다. 그는 짧은 글 속에 무한한 보배를 담고 , 논문에서도 한 두 장마다 인생의 주요 문제에 관한 달인들의 명민한 지혜와 정수를 담았다그는 욕망에 대한 스토아적 억압만큼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본능이란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인데 본성은 가끔 은폐되고 압도될 수 있지만, 소멸되는 일은 드물다.  강압은 그 보복으로 본성을 한층 광포하게 한다. 가르침이나 설교는 본성이 귀찮게 조르는 것을 조금은 누를 수가 있으나 오로지 습관은 본성을 개조하고 정복한다고 말한다.

그는 입신출세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철학이 부활이나 재건을 계속 생각했다. 그는 그 <저작계획>속에서 몇 개의 입문적 논문을 써서 철학의 정체는 낡은 방법이 그 기능을 상실  하고도 계속 고집하기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을 설명하고 새로 시작하기 위한 제안을 약술한다. 또한 새로운 학문의 분류를 시도하여 모든 학문에 그 재료를 할당하여 각 분야의 미해결 문제의 목록을 만들며 자연 해석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바쁜 손을 실제로 자연과학으로 돌려 자연의 여러 현상을 연구한다. 그리고 과거의 저술가들이 중세의 말이 많은 배경에서 이탈하여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모든 진리를 향해 기어 올라간 그 지성의 사다리를 가리키며 새로운 방법에서 틀림없이 나오리라고 믿는 과학적 여러 성과의 어떤 종류의 예상도 시도하고 마지막으로 제 2철학으로서 이 모든 싹트고 있는 여러 과학 ---- 그는 예언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 에서 꽃필 미래상을 그리는 데 이 전체가 <대혁신>, 곧 철학의 대재건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 었다. 그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외하고는 철학사상 최초의 일이다. 이론보다는 실천을, 사변적 논리보다도 특수한 구체적 결과를 노리는 점 등이 다른 모든 철학과 그 취지를 달리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은 임이지, 단순한 논증이나 장식은 아니라고 주장했다베이컨은 철학을 풍요케 하는 새로운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불모지였다고 주장 하면서 그리스 철학자들의 큰 실책은 이론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관찰에는 시간을 쏟지 않은것이라고 한다. 그는 귀납법에 서사시적 모험을 시도하여 논리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을 배격하고 실험을 탐구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자연을 고문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증언을 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귀납의 필요를 역설하였다. 그에 따르면 귀납법을 통해서 사실에 대한 이 끈질긴 축적과 분석에 의해 우리는 연구하려고 하는 현상의 형상, 즉 현상의 숨은 본성과 그 내적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체계에는 실체, 속성, 양태라는 세 가지 주요한 술어가 있다. 간단히 하기 위해 우리는 속성을 잠시 옆에 놓아두기로 한다. 양태란 무엇이라도 좋은 개개의 물건 또는 사건이며 실재가 잠시 동안 취하는 특수한 형식 또는 형상이다. 실체를 거의 영원한 질서와 같은 의미로 씌였고 실체를 자연 및 신과 동일시 한다. 그는 자연을 이중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 한편으로는 능동적으로 활발하게 약동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을 스피노자는 능산적자연(베르그송의 생의 비약이나 창조적 진화)이라고 부르며 다른 한쪽에서는 이 과정은 수동적 산물,  소산적 자연, 자연의 재료와 내용, 나무나 바람이나 물, 산이나 들, 그 밖에 무수한 외적 형태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가 자연의 실체와 신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것은 후자의 의미에서이고 긍정하는 것은 전자의 의미에서이다실체와 같이 신은 인과적 연쇄 또는 과정, 만물의 기초적 조건, 세계의 법칙 및 구조이다.  양태와 사물 사이에 있는 이 구체적 우주와 신의 관계는 다리와 그 설계구조 및 건설에 따르는 수학 및 역학의 여러 법칙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이것들은 다리를 받치는 기초이자 다리의 기본조건이며 다리의 실체이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다리는 무너지고 만다. 이 다리와 같이 세계 그 자체도 그 구조와 그 법칙으로 받쳐져 있다. 그것은 신의 손으로 받쳐져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신의 의지와 자연의 법칙이 여러가지로 표현되는 동일 실체라고 한다면 모든 사건은 변함  없는 법칙의 기계적 작용에 따르는 것이지 천계에 자리잡고 있는 무책임한 독재자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가 물질과 무레 소겡서만 본 기계작용을 스피노자는 신과 정신속에서도 본다.

물질과 정신과 관련 그는 자유로운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생의 욕구가 본능을 규정하고, 본능이 욕망을 규정하며, 욕망이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며 정신의 결의는 신체의  상태가 다름에 따라 다른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신 속에는 절대적인 의지, 또는 자유로운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은 이런 일 또는 저런 일을 의지하듯이 어떤 원인에 의하여 결정 되고, 이 원인도 또한 다른 원인에 의하여 결정되어 무한에 이른다고 한다예지와 도덕과 관련 본능은 추진력으로서는 훌륭하지만 안내인으로서는 위험하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본능의 개인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의하여 각 본능은 전체의 행복에는 무관심 하게 그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식탐, 호전벽, 또는 색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데서 얼마나 큰 황폐가 인간에게 일어났었는가. 그리고 마침내 인간은 자기를 이겨낸   본능--- 다시 말해서 이성---에 결국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가 날마다 사로잡히는 여러 감정은  신체의 어떤 부분이 다른 어느 부분보다도 많이 자극되는 데 관계된다. 그 때문에 감정은 일반적으로 과잉되고 정신을 단 하나의 대상을 고찰하는 데 붙들어 두어 다른 것을 돌아볼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체의 일부나 약간의 부분에만 관계하는 기쁨과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은 그 사람 전체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우리자신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완성하여야 한다고 본다.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 .

    빅토르 위고는 볼테르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18세기 전체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극찬하였는데 볼테르는 프랑스에서 르네상스요, 종교개혁이며, 거의 혁명 그 자체였다. 볼테르와 루소는 봉건적 귀족정치에서 경제적 정치적 지배권이 중간계급으로 전환하는 과정의 2대 함성이었다. 신흥계급은 현행 법률과 관습을 불편하다고 느끼면, 관습보다 이성, 법률보다 자연에 호소한다  마치 개인의 마음속에서 반대되는 욕망이 부딪쳐 불꽃을 발하듯이 부유한 부르주아는 볼테르의 이성주의와 루소의 자연주의를 지지했던 것이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낡은 풍습과 관습의  힘을 늦추어 감정이나 사상을 새롭게 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실험과 변혁을 받아들이기 쉽게 할 일이 필요했다볼테르는 교회의 횡포에 대한 전쟁에 열중한 나머지 만년에는 정치의 부패와 압박에 대한  싸움에서는 거의 물러나 있었다. 그는 부유하여 보수주의로 기울었으며 공화정체가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결점도 잘 알고 있었다. 군주정체에 대해서는 현자가 군주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현자가 아닌 경우에는 역시 결점이 많은 정체로 보았다그는 <철학사전>인간항 끝부분에 두려운 인간에 관한 일반적 고찰에 대해 쓰고 있다. “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에 생존하고 있는 식물적 상태와 유년기의 동물적 상태에서 이성의 성숙을 자각할 때까지 20년이 걸린다. 인간의 구조를 다소나마 발견하는 데도 3천년이 필요했다. 인간의 정신을 알기 위해선 영원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을 죽이는 데는 눈 깜짝할 사이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볼테르는 항상 이성을 믿었으며 말과 글로 사람들을 보다 잘 계몽하고 개선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칸트

    임마누엘 칸트는 19세기를 지배한 사상이었다. 1781 <순수이성비판>에 의해 세계를 독단의 꿈에서 깨게 하였다.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비판철학은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하여 왔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낭만주의의 물결을 타고 잠시 성행하였으나 그 물결은 1848년에는 잠잠해졌다. 1859년 이후는 진화론이 그 이전의 것을 남김없이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리고 니체의 통쾌한 우상파괴는 세기가 끝나가면서 철학무대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제 2차적인 표면상의 움직임에 불과하고 그 밑에는 칸트주의의 억세고 부단한 조류가 더욱 넓게 또 깊게 흐르고 있었다. 오늘날 칸트주의의 본질적 원리는 성숙한 모든 철학의 공리가 되어 있다. 니체는 칸트의 학설을 이미 증명된 것으로 보고 앞으로 나간다. 쇼펜하우어는 <순수이성비판>독일어로 쓴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라 하여 누구나 칸트를 이해하기  까지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스피노자에 대하여 언급한 헤겔의 말을 인용해보면 한 사람의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칸트 학도여야 한다는 것이다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한 이성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사물을 그릇되게 하는 감각을통하여 우리가 받아들이는 불순한인식 위에 그것을 높일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칸트에 의하면 순수이성이란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감각적 경험 에서 독립한 인식, 다시 말해서 정신의 내적 본성 및 구조에 의해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인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 <단순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를 통해 신의존재를 증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보고 세계의 계획성 논의로 되돌아간다. 그는 계획성과 미를 서로 관련시키는 일에서 시작하여 마치 예지의 존재자에 의하여 계획된 것처럼 구조의 균형과 통일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는 균형 잡힌 구성의 관조는 항상 우리에게 무관심한 적의를 이루는것, 그리고 자연미에 대하여 그 미 자체를 위하여 갖는 관심은 언제나 선량하다는 표시다라는 것을 간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외적 계획으로 보이는 것은 신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신의라는 것을 휘두르는 신학자들은 그것을 버려야 할 것이고, 그것을 버린 과학자들은 그것을 이용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칸트는 69세노인으로서는 대담하게 종교에 관한 주장을 하는데 종교는 이론이성의 논리 위에기초를 둘 것이 아니라 도덕의 의식이라는 실천이성위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성서나 계시도 그 도덕적 가치에 의해 평가되어야 할 것이나 그 자체가 도덕법칙의 재판관이 될 수는 없다. 교회나 교의는 다만 인류의 도덕적 발달을 돕는 한에서만 그 가치를 지니는데 불과하다.  단순한 신앙고백과 의식이 종교의 시금석인 도덕적 탁월성으로 변하자 마자 종교는 사라졌다고 할 것이다. 진정한 교회는 아무리 뿔뿔이 흩어져 있다 할지라도 공통되는 도덕법칙의 숭배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 같은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살았 으며, 또 생명을 버렸던 것이다. 이 진정한 교회를 그리스도는 바리새인의 교회주의에 대립시켜 지지하였으나 어떤 새로운 교회주의가 이 고귀한 사상을 거의 압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의 나라를 지상에 접근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해하여 우리들 사이에 신의 나라가 아닌 성직자의 나라를 건설했다는 대담한 주장을 편다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신학자를 경멸하였다. ‘신학자들의 최후수단으로 우리는 수많은 국민 사이에서 화형을 본다고 하였으며 종교를 민간 형이상학이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더떤 종류의 종교적 실천 및 교리에 깊은 의의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리스도교를 깊은 염세철학으로 표현하였다젊은 처녀에 관하여서는, 연극에서 쓰는 말을 빌리자면 자연은 충격효과라고 불리는 것을 노린 것이다. 자연은 처녀들의 그 남은 생애 전부와 맞바꾸기 위해 고작 이삼년동안 넘쳐흐르는 미와 매력, 그리고 풍만함을 주었던 것인데 그것은 그 이삼년 동안 남자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남자를 열중하게 함으로써 처녀를 한평생 무슨 형태로든 어엿이 돌보아 주자고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만일에 남자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렇게 하는데 아무런 확실한 보증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자연은 이 경우 늘 상투적인 절약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멸망이 헬라스의 뺨에 스토아주의의 창백과 에피쿠로스의 자취를 남긴 것처럼 나폴레옹 전쟁의 분란은 유럽의 영혼에 서글픈 피로를 느끼게 했으며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이 피로의 목소리였다. 유럽은 1815년 무서운 두통을 앓았다. 인격 진단의 단서인 인간의 행복은 외부 사정에 의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본질에 좌우된다고 쇼펜하우어는 인정하고 있다. 염세관은 염세주의자의 기소장이다. 병적 체질과 노이로제적 정신, 공허한 여가와 침울한 권태의 생활을 가정한다면 쇼펜하우어 철학의 정확한 생리적 전제가 떠오른다. 염세주의자이게 위해서는 여가가 있어야 한다. 바쁜 생활은 언제나 심신을 건강하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알맞은 목표와 견실한 생활에서 오는 밝음을 찬미하였지만 그러나 그런 말을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열반은 한가한 인간의 이성이다. 너무도 많은 것을 원하며 하나의 정열에 전부를 내걸음으로써 일을 시작하고 실패하게 되면 무슨 일에도 열의가 없는 견딜수 없는 권태속에서 여생을 보내는 차일드 헤럴드나 르네 같은 자의 이상이다.

스펜서의 불가지론                          

19세기 영국에서는 생물학의 발달과 진화론이 대표적으로 발달되었다. 이 분야의 과학발전을위한 국제적 협력은 모범적이어서 칸트는 인간이 원숭이에서부터 진화하는 가능성을 논했고 괴테는 <식물의 변태>라는 책을 썼으며 에라스무스 다윈과 라마르크는 종은 단순한 형태에서 사용 및 사용할 수 없는 결과의 유전에 의하여 진화했다는 이론을 제기했다. 1850년대에는 진화라는 관념은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스펜서는 다윈보다 앞서 <진화의 가설> <심리학의 원리>에서 진화의 사상을 기술했다. 1858년에 다윈과 윌레스는 그 유명한 논문을 린네 협회에서   낭독했다. 그리고 1859, 구 세계는 신심 깊은 사교들의 의견에 의하면 <종의 기원>의 출판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 책을 보면, 왜 그런지는 분명하지 안지만 아무튼 고등한 종은 하등의 종에서 진화했다는,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생존경쟁에서의 자연도태, 또는 우량종이ㅡ 보존에 의한 진화의 현실적 경과에 관한 이론이 상세하고도 풍부하게 실증되어 있다. 10 동안은 누구나 다 진화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스펜서를 이 물결의 선두에 올려놓은 것은, 진화의   개념을 모든 연구영역에 적응케 하려고 생각한 밝은 정신과 거의 모든 지식을 자기 이론에 적응케 한 그 폭넓은 정신이었다. 17세기에 수학이 철학을 지배하여 데카르트, 홉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파스칼을 세상에 내보낸 것 처럼, 또 심리학의 버클리, , 콩디약, 칸트의 철학을 지도한 것처럼 19세기에는 생물학이, 셸링, 쇼펜하우어, 스펜서, 니체, 베르그송의 철학적 사고의 배경을 이루었다스펜서는 <제일원리>에서 나쁜 일 속에 친절한 영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류속에 진리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리고 산다.’ 그래서 그는 여러가지 신앙의 제각기 다른 형태 밑에서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는 뿌리 깊은 힘을 종교에 부여해 온 그 진리의 핵심을 발견하기 위해 종교적 관념을 음미할 것을 계획했다스펜서는 진화와 관련하여 진화란 물질의 통합과 이에 따르는 운동의 방산이다. 통합하는  동안 물질은 부정을, 연관 없는 동질성에서 일정한 연관 있는 이질성으로 바꾸고, 볼된 운동은 어떤 병행적 변형을 받아들인다며 통합과 이질성, 즉 모든 부분이 모여 점점 큰 전체가 되고 모든 부분이 분화하여 점점 다양한 형식을 취하는 것, 이것이 진화의 초점이다. 확산에서 통합 및 통일로, 동질적 단순성에서 이질적 복잡성으로 변화하는 것(예컨대 166~199년경의 미국)은 진화의 밀물을 타고 있는 것이며 통합에서 확산, 복잡에서 단순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은 분해의  썰물에 떠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니체

니체는 다윈의 아들이었고 비스마르크의 동생이었다. 그의 부친은 목사였고 그 자신도 마지막까지 설교자였다. 그는 기독교를 공격하였지만, 그것은 자기 속에 기독교의 도덕적 정신을 다분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온순과 친절과 평화를 사랑하는 성향을 맹렬히 부정함으로써 조정하려는 일종의 시도였다18세때 그는 조상의 신앙을 잃고 남은 생애 동안 새로운 신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초인에게서 찾아냈다. 후년에 그는 이 변화가 쉽게 일어났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냉소적으로 변했다. 종교는 그야말로 그의 생명의 정수였으므로 이제 생활은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갑자기 방탕한 생활로 접어들었으나 머지 않아 이러한 생활을 몹시 경멸하게 된다그를 버린 것처럼 생각되던 예술에서 그는 과학과 인간에게 어떠한 폭군도 침입할 수 없는 피난처를 제공하는 철학 속에 숨어들었다. 마치 스피노자처럼 격정을 연구함으로써 진정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감정이 화학이 결핍되어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그 뒤의 저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는 심리학자가 되어 외과의사처럼 가차 없이 미묘한 모든 감정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신앙을 분석하여 그것을 대담하게 악명높은 볼테르에게 바쳤다.

도덕성이 친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힘에 있는 것과 같이 노력의 목표도 역시 만인의 향상이 아니라 보다 우수하고 강한 개인의 발전에 있어야 한다. 인류가 아니라 초인이 곧 목표이다. 분별있는 현인이 생각하는 최후는 항상 인류의 개선이겠지만 인류는 개선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상물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개인의 큰 개미집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의 모양은 오히려 거대한 실험실과 비슷하다. 어느 시대나 성공하는 실험은 있지만 대부분은 실패한다. 그리고 모든 실험의 목적은 집단의 행복이 아니라 전형의 진보에 있다. 사회는 보다 훌륭한 전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망하는 편이 낫다. 사회는 개인의 힘을 강하게 하고 개성을 높이는 도구이기 때문에 집단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목적도 될 수  없다. 만일 모든 개인이 기계의 운전을 중단시키지 않기 위해서만 필요하다면 그 기계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자체가 목적인 기계(사회조직), 그것은 인간 희극이다. 처음에 니체는 새로운 종족의 산출을 기대하는 것처럼 말했으나 나중에는 평범한 민중의 수렁속에서 고생 끝에 기어  나와 그 존재를 자연도태의 우연에 맡기기보다는 계획적인 훈육과 신중한 양성에 의한 탁월한 기인으로, 초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3 부 현대철학

앙리 베르그송

진화는 다윈이나 스펜서가 기술한 투쟁과 파괴의 맹목적이고 황량한 기계관과는 전혀 다른것 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진화에서 지속을, 살아 있는 힘의 축적을, 생명과 정신의 발명력을,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의 끊임없는 전개를 본다. 제닝즈나 모파와 같은 최근의 연구가들이 어째서 원생동물이 행동에 대한 기계론적 학설을 부인하는지, 또 현대 세포학계의 원로 윌슨교수가 세포에 관한 저서에서 세포 연구는 전체적으로 보아 딴 것이 아니라 생명의 최저형태를 무기계로부터 나누는 거대한 간격을 좁히기는커녕 오히려 넓히는 것이다라고 어째서 말한 것인지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생물학계 곳곳에서 다윈에 대한 반역의 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란 아마도 새로운 기관과 기능, 새로운 유기체와 종의 발생은 유리한 변이의 자연도태에 의한 것임을 뜻한다고 해도 좋다. 그런데 이 견해는 반세기도 못되는 동안에 여러가지 고장으로 일찍부터 좀이 슬기 시작했다. 모든 개체와 모든 종을 실험대로 하는 이 끊임없는 창조적 생명이야 말로 우리가 신이라고 이름 짓는 것을 뜻하며 신과 생명은 하나이다. 그러나 이 신은 유한이지 전능은 아니다. 즉 물질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며 물질의 타성을 애써 한 발 한 발 극복하는 것이다. 또 이 신은 전지가 아니며 서서히 인식과 의식에게 더욱 밝은 빛을 구하기 위하여 탐색한다. 이렇게 정의가 내려진 신은 아무것도 완성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부단한 생명,행위,자유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창조는 신비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 때우리의 행위를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우리의 생활을 위하여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자신 속에서 창조를 경험한다.

베네데토 크레체

크로체는 역사 및 문학 연구로부터 철학으로 들어갔으므로 그 철학적 관심이 문예비평 및  미학의 모든 문제에 강하게 수식되었다. <미학>에서 그는 형이상학이나 과학보다는 예술을 좋아했다. 예술은 우리르 직접 특수한 인물과 사실, 즉 구체적 개별형태로 직관되는 철학적 형태로  끌어 간다. 인식에는 두가지 형식이 있다. .즉 직관적 인식과 논리적 인식, 상상력에 의해 얻어  지는 인식과 지성에 의해 얻어지는 인식, 개별적 인식과 보편적 인식 및 개체의 인식과 개체간의 인식이다. 인식은 심상이나 개념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예술의 근원은 심상을 형성하는 힘에 있다. 예술은 오로지 상상력에 지배된다. 심상은 상상력의 유일한 재산이다. 예술은 대상을 구별하지  않고 대상을 확실하게 현실적이니 비현실적이니 하지 않고 대상을 규정하지도 정의하지도 않고 느낌으로서 표현한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 상상은 사고에 앞서며, 사고는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정신의 예술적 활동, 즉 심상 형성의 활동은 논리적 활동, 즉 개념 형성 활동이 전제이다. 인간은 상상력을 작용시키자마자 예술가이며 개념적으로 사고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예술가다.

버트란트 러셀

버트란트 러셀이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은 거의 운명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속에서 수학으로 나타낼 수 없는 많은 것을 발견하였으므로 그리스도교를 그 도덕률은 별도로 치고 완전히 포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는 자를 박해하고 그리스도교를 해롭게 생각하는 자를 투옥하는 문명을 경멸해서 말하였다. 이런 모순에 찬 세계에서 그는 신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진화와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진보란 자기 본위로 말하는 방법이며 진화란 분해와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일의 그 무도덕적 순환의 반쪽에 불과하다유기적 생명은 원생동물부터 철학자까지 점차 발달하였다고 말하지만 이 발달은 틀림없이  진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유감이지만 이 확신을 우리게에 안겨주는 것은 철학자이지 원생동물은 아니다. 자유인은 아이들과 같은 희망이나 의인관에 의한 신들에게 마음 놓을 수는 없다. 결국 자기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과 만물은 죽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자유인은 용기를 잃어서는 안된다.

조지 산타아나

조지 산타아나는 넓은 학식에 의해 유연할 뿐만 아니라 시인의 영혼과 같이 다감한 그의   영혼은 미국 도시생활의 시끄러움에 못 견뎌 본능적으로 보스턴에서 은거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스턴에서 다시 케임브리지와 하버드로 옮겼으며 제임스나 로이스보다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 텔레스를 좋아하는 조용한 생활로 들어간다. 그의 최초의 철학논문은 <미적감각,1896>이며 5년 뒤에는 단편적이지만 좀 더 알기쉬운 <시와 종교이 해석>을 써냈다. 7년뒤 그는 주저 <이성의 삶>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그의 명성을 높여주었으며 1923 <회의와 동물적 신앙>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무엇보다도 우선 현대철학을 얽어매어 그 성장을 방해한 인식론을 떨구려는 시도를 한다. <이성의 생활>을 서술하기 전에는 그도 자진하여 전문적 인식론자가 중요시하는 모든 술어를 써서 인간 이성의 근원, 타당성,  한계를 논하고 있었으나 그도 사고의 커다란 함정은 기존의 여거 가정을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윌리엄 제임스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을 모든 종의 밖에, 그리고 위에 자존하며, 필연적이고 단일한 무한, 완전, 단일, 불변의 무변하고 영원한 지적 존재로서 기술하였다. 이것은 실로 당당한 것이나 이러한 정의를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 어떤 신성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 정의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인간에게 어떠한 결과가 되는 것일까.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우리는 허수아비여서 신의 의지가 처음부터 윤곽을 그려 결정한 운명이 진로를 바꾸기 위하여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다. 칼빈주의와 숙명론은 이러한 정의의 논리적 귀결이다. 기계관적 결정론에 똑 같은 음미를 가해도 결과는 똑같다. 만약 정말로 결정론을 믿는다면 우리는 인도인 같은 신비가가 되어 우리를 인형과 같이 조종하는 예측하지 못하는 운명에게 몸을 맡기게 된다.

존 듀이

존듀이 사상의 특색은 진화론을 드러내어 놓고 받아들인 태도에 있다. 신체는 물론이요정신도 생존경쟁의 결과 낮은 형태로부터 진화한 기관으로 보았다. 모든 영역에서 그의 출발점은 다윈주의적이다.  데카르트가 물적 사물의 본성은 이루어진 완전한 상태로써 한꺼번에 만들어졌다고 생각 하는 것보다는 서서히 발달하였다고 보는 편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고 말하였을 때 근대세계는 이후에 지배될 운명의 논리, 즉 다윈의 <종의 기원>을 그 최신의 과학적 업적으로 하는 논리를 자각하기에 이르렀다듀이는 노골적인 자연주의자로서 우주 전반을 이상화하고 이성화하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히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물의 경과를 지배하는 능력이 없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이들 우주력은 인간이 창조하고 존경하는 것을 매우 자주 파괴하기 때문이다. 신성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지 이들 무색투명한 우주력에 있는 것은 아니다.

< 리뷰 > 

장점  

윌 듀랜트(William J. Durant, 1885~1981)는 지난 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문명사학자로서 일반인들이 어렵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철학을 역사이야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전달함으로써 이의 대중화를 주도하였다. 미국 출생으로 대학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21년에는 성인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에서 철학, 역사, 문학을 전파했다. 철학사상에 관한 그의 강의는 철학의 고전이 되었고 그후 그는 인류의 문명사를 정리, 11권의 『문명 이야기』 시리즈를 인물 중심으로 정리하여 인류 문명의 역사를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일관되게 편집하여 격찬을 받았다. 그의 저서 「철학이야기」는 전무후무한 철학분야 베스트셀러로서 수많은 학생들을 철학의 길로 인도한 역작이다. 이 책이 기독교 철학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하지는 않지만 그 바탕이 되는 지식에 인간성을 주려고 시도하고 철학이 지혜를 위한 종합력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에서 서술  되어 기독교적 철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철학이 모든 지식적 활동의 기본이 될 수 있도록 정지 작업을 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철학의 세세한 분류를 가지고 논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역사상 대표적인 철학자를 선정, 그의 일생과 철학을 심도있게 조명함으로써 말그대로 이야기속에 철학이론을  녹여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거부감을 줄여준다. 마찬가지로 어려운 철학용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철학에 인간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할만하다. 특별히 저자는 인식 과정의 연구는 심리학이 할 일이며, 철학은 경험 그 자체의 양식 및 과정의 분석적 기술이 아니라 모든 경험의 종합적 해석이라고 정의하여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윌 듀랜트의 저서 「철학이야기」는 처음부터 마지막 부분까지 철학에 문외한이면서 관심을 가져보려는 초보 철학도들의 친절한 인도자 역할을 하여 누구라도 철학적 사색의 길에 접어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신학적 바탕이 되는 철학의 기본을 익히고 앞으로 접하게 될 신학적 역작의 바탕에 깔려 있는 철학적 사색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단점

윌 듀랜트는 그의 저서 「철학이야기」의 머리글에서 철학의 효용에 대하여 언급하면서철학자는 사실을 서술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실의 경험과 일반에 대한 관계를 알아내어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려 한다고 하였으나 예로 들은 철학자들의 경우에 대입해 보았을 때 해당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스펜서의 <진화의 가설>같은 저작의  경우는 없는 사실을 가상적으로 상정해내어 오히려 반대로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해도 철학이론에 따라 철학자의 성향에 따라 기상천외한 발상이 존재하는 것을 감안하면 위와 같이 일반화하고 규범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철학자 개인의 전기식으로 구성하여 철학의 전체 흐름을 잡기가 쉽지 않고 단편 나열방식에 그칠 수 밖에 없다. 전문적인 철학용어나 이론을 부각하지 않아서 철학적 깊이를 느끼기가 쉽지 않고 체계를 잡기가 어렵게 되어있다더우기 이 책은 입문서라고 보기에는 내용이 쉽지 않게 되어 있어서 우리 신학도의 입장   에서는 신학을 들어가기 전에 철학개론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입장에서는 철학적 사조를 도표화 한다든지 하는 서비스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적용

1. 개인에게

저자는 철학이 이른바 귀중한 기쁨이었던 멋진 청춘의 나날을 경험해왔다고 고백한다. 당시 깨달을 듯 하면서도 알쏭달쏭한 진리에 대한 사랑이, 육욕이나 이 세상의 사소한 일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찬란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인생이란 우리의 본질과 경험하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빛과 불꽃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이 위대한 철학자의 생을 우리가 범접할 수는 없겠지만 학창시절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문학이나 무슨 말인지 잘모르는 철학책을 가지고 다니며 고민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공부는 안하고 니체를 논하고 쇼펜하우어의 기초 논리를 암송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런 유치한 젊은 시절에 비해 신학도로서 우리는 철학을 통해 우선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제 문제, 즉 선과 악, 미와 추, 질서와 자유, 삶과 죽음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그 다음으로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이해하고 분명 철학적인 바탕으로 기술된 신학저작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기본을 배워야 한다. .

2. 교회에서

초대교회 시절 기독교 신학의 두가지 원천을 꼽으라고 하면 정경으로서의 성경, 그리고 고대그리스의 철학으로부터 발전된 헬레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갈다디아서 4 4절의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에서 때가 차매의 중요한 부분이 국제어로서 헬라어를 준비하는 시기였다고 해석하듯이 기독교학을 성립하는데 헬레니즘, 특히 그리스 철학역시 하나님의 준비한 때(크로노스)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꼭 이러한 기독교 역사적인 상황이 아니어도 철학은 사물의 궁극적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므로 종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교회에서도 목회자나 교역자, 일반성도를 막론하고 성경공부와 함께 철학의 기본지식도 함께   습득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3. 사회에서

물질만능주의의 현실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이상학의 양대 분야, 즉 종교와 함께 철학적 역량을 기르는 것은 우리의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이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보통 비크리스천의 경우 이해가 되지 않는 교리를 가지고 설득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때 가벼운 철학적 논제를 가지고 대화를 풀어나갈 때 훨씬 이해하기 쉽게 대화를 주도해 나갈수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천들 역시 기독교리 형성과정에서의  철학의 역할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이해력을 길러나가야 하며 교리의 바탕이 되는 철학적 사고를 함으로써 개인발전과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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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서론

1 : 철학의 정의

철학공부는 논리적으로 그 분야에 대한 정의와 함께 시작한다. 철학을 제 과학의 여왕 이라고 하는데 또 다른 사람들은 철학이 과학이라는 주장을 철저히 부인한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 우리에게 세계의 궁극적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무지한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 “반성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금언이 종종 인용되는데 그는 이상적인 철학자나 애지자의 체현이었다철학적 탐구는 대략 B.C. 600년경 그리이스 식민지 밀레투스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개념분석이란 철학의 유일한 관심이 개념의 분석적인 탐구에 있다는 말을 요약한 것이다. 철학의 임무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용어를 정의하는 것이며, 제개념의 어법을 명료히 하는 것이다. 분석적 탐구의 중요한 영역들은 각각 명료화를 필요로 하는 기본용어와 원리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탐구들은 종종 메타 철학적이라고 불린다. 이에 비해 사변철학은 철학 연구의 두 번째 가지이다. 분석철학이 지식의 토대를 분석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데 비해 사변철학은 적어도 그것의 궁극적인 형태에서는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실재관들에 대한 개념적인 연구의 결과를 종합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몇몇 사변철학은 보다 엄격한 분석철학과는 상관없는 두 가지 관심을 가진다. 첫째는 실재에 대한 단일하고도 전포괄적인 견해에 대한 모든 지식을 통합하려는 시도이며, 둘째는 종교적, 도덕적, 미적 가치의 통합된 체계를 간명하게 말하려는 노력이다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철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공부할 책임을 느끼고 있다. 철학은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도전하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기독교는 기독교에 대항하여 설치된 지적 도전에 용감하게 대적할 수 있다. 그러한 도전의 결과는 신앙의 상실이 아니라 이성으로 잘 다듬어지고 성숙한 신앙을 대단히 귀중하게 소유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 하게도 너무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에 해로운 그런 믿음들을 고수하고자 하며, 그리고 이런 사실조차 깨닫고 있지 못하다.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이고 철학도 진리 탐구의 하나의 탐색이므로 철학은 우리가 신과 신이 만든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2 : 철학의 분야

철학자가 기독교 윤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보통 기독교인들의 행위를 이끌어 나가는 법칙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철학자는 그 말을 보다 확장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그 용어를 철학의 한 분야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철학은 거의 모든 학문에 걸쳐져 있다. 특히 종교철학과 관련 그 특징적인 문제들은, 현존하는 종교에 대한 집중적이고 이성적인 세밀한 검토로부터 발생하는데 종교철학자는 일반적으로 이런 행위들이 끝나는 지점에서 자신의 연구를 시작한다. 종교철학에서는 보통 종교 자체의 본질에 관한 것을 연구하고 신의 존재 여부 및 신의 속성에 관하여 연구한다. 또한 종교언어에 관하여 고찰하고 악에 관한 문제도 중요 부분이다이 외에도 철학의 중요한 분과들로는 윤리학, 과학철학,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등 거의  모든 학문을 포괄한다. 윤리학은 올바른 행동을 통제하는 의무와 규범의 본질을 연구하며 종교 철학과 과학철학은 각각의 자기 분야의 개념들과 방법론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반면 논리학은 논증의 정확한 규칙을 다룬다. 지식이론은 인식론의 또 다른 명칭이며, 형이상학은 실재나 존재에 관한 연구분야이다.

3 : 철학 방법론

철학 방법론은 고대에 제논의 귀류법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의 방법이 있으며 현대로 와서는 베이컨의 귀납법과 함께 과학적인 방법들이 사용되고 훗셀이 창시한 현상학적인 방법은 인간의 근본적인 자각에 대한 전 이론적인 접근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이다. 또한 분석적인 방법으로 명료화 방법은 철학적인 난제들이 언어의 분석에 의해서 해결해보려 하는 것인데 인간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를 법제화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우리는 어떤 것이 의미되어 있는가를 주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료화는 사실상 그 어떤 진리 탐구에 있어서도 열쇠가 되는 요소인데 왜냐하면 모호함은 혼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철학은 하는 데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우리가 모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일반적인 철학자들과 특수한 기독교 철학자들 중의 그 어느 쪽도, 어떤 방법이 종교신앙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일치하지 못한다. 사실 어떤 기독교 철학자들은 신앙우위적이어서 종교신앙을 정당화해 주는 합리적인 방법이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어떤 철학적인 방법론도 신적인 계시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성한 성경에서 그 자신을 계시한 신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믿음이다. 기독교 신자가 어떻게 이 믿음을 정당화할 것인가 하는 것은 내적인 문제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은 신의 계시의 불가능성을 법제화하는 철학자 들을 모두 다 실패할 운명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철학의 임무는 신지식에 대한 논증과 모든 자만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고후 10:5)   

4 : 철학의 도구

철학은 논증과 관련 되어 있어서 논증이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정의 내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논증의 종류로는 귀납적 논증과 연역적 논증이 있는데 귀납적인 논증에서는 전제는 결론을 위한 증거를 주기를 주장한다. 어떤 훌륭한 귀납적인 논증은 고도의 적합한 결론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 결론이 실현될 것인지 혹은 진실일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납적인 논증은 적절하다거나 부적절하다고 말해질 수도 있고, 진실이 아니라거나 거짓이라고 말해진다. 한편 연역적 논증에서 만약 근거가 확실하다면 전제는 결론을 보장한다. 그것은 만약 전제가 진실이라면, 결론은 논리적인 필연성에 따라 진실이며 결코 거짓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은 단지 그 형식의 덕택으로 이루어 진다.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은 타당성, 건전성, 결정적인 논증, 믿을만한 논증 등이다철학자의 일차적인 도구는 논리이다. 그것은 적절한 논증을 위해 필요한 규칙을 다룬다.  우리는 연역적인 논증과 귀납적인 논증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전제와 결론에 대한 상관  관계라는 사실을 보았다. 귀납적인 논증에서 전제는 단지 적절한 결론을 얻기 위해 도움이 된다. 한편으로 만약 논증이 타당하고 전제가 참이라면, 전제는 연역적인 논증에서 결론의   진실성을 보장한다.

5 : 철학의 도전

철학자는 꾸준히 생활을 반성한다. 그는 비판적인 사고 그리고 명료하고 올바른 사고에 관심이 있다. 철학은 음으로 양으로 기독교인을 위한 특별한 도전장을 던진다. 철학에의 철저한 인지가 없다면,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들의 지적인 유희에 놀아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그 도전은 진리의 체계를 정립하고 또 오류의 체계를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비기독교인들을 내동댕이 치는 것이다기독교인은 무지한 믿음에 대해서는 정신적인 보상을 받지 못한다. 믿음은 이성보다 더 가치있는 것일는지 모르나 이성은 보다 고귀하다. 루이스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이제 무지하고 고지식하다는 것은 우리의 무기를 버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비호할 방어물이 없는 교육받지 못한 우리의 동지를 배반하는 것이고, 또한 이방인의 지적인 공격에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비유로써도 옳지 못한 철학에 대항해야 함으로 참된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철학의 도움이 없이는 조직신학을 전개할 수가 없다. 성경은 기독교 신학을 위한 기초적인 자료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신학은 그것이 체계화되기 전까지는 체계적이지 못하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여러 철학적인 과정의 결과이다. 기독교리를 건설하는 이런 긍정적인 역할 외에도 철학은 부정적인 역할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 체계로부터 이러한 모순을 배제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믿음의 체계화나 기독교 신앙의 변호를 위한 철학적 논증에서 철학을 이용한다. 그는 기독교적 시각을 다른 세계관과 상호 교류하기 위해 철학을 필요로 한다.

2부 인식이란 무엇인가?

6 : 우리는 알 수 있을까 ? .

    회의주의는 ① 철저하고 완전한 회의주의 ② 완화된 회의주의 등으로 로 나뉜다. 철저하고 완전한 회의주의는 인간은 모든 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으나,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안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하는 부류의 회의주의자들이다. 완화된 회의주의는 직접적인 경험을 뛰어넘는 지식의 주장을 부정함으로써 특징 지워지는데 그것은 몇 가지 제한된 지식의 종류를 인정한다. 인간의 능력은 불완전하고 타락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틀림없이 확실한 지식은 인간에 의해서는 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칸트는 지식이 가능한가?” 라는 물음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칸트는 중간입장이었는데 그는 인간의 인식론적 관점을 변화시켰는데 인식자가 이전에 생각했었던 것으로서 사물을 따르지는 않는다고 가정하고 인식된 사물이 인식자를 따른다고 하여 그는 지식이 가능한 사물의 범위에서 그것은 정신을 따른다고 가정했다. 한편 반회의주의자들은 회의주의가 ① 이성적인 면에서 일관성이 없으며 ② 무의미하고 ③ 상식에 어긋날 뿐 아니라 ④ 언어와 갈등 관계에 있으며 ⑤ 귀납의 결과가 아니므로 귀납법을  이성적으로 정당하다고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식론자들은 회의주의가 이성적인 근거와 실제적인 근거 위에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회의주의의 강점은 인간이 아무것도 증명해 보일 수 없는 영역에서 독단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그 힘에 있다. 회의주의는 두 가지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데 하나는 자기들이 안다고 하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합당한 근거를 인식론자들이 가지고 있는가?”란 질문이고 또하나는 인간의 체계에 모순이나 불합리한 측면들이 있는가?”하는 질문이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지식의 체계는 아마 참일 수 없을 것이다. 회의주의는 인식론적인 유도의 첫 걸음이다.    

7 :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이 장에서는 우리의 신념과 지식의 원천이나 기원을 알아보는데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 직관적인 통찰, 이성, 감각적인 경험 등 이런 원천들은 신념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는 대응하는 다섯 가지 논리나 기준으로 발전한다. 여기에는 신앙이나 권위주의와 함께 주관주의, 합리주의, 경험주의, 실용주의가 있다신앙이나 타인의 증언은 과거에 관해 우리가 알려고 할 때 그 지식이 일차적인 원천이 되는것이고 직관은 윤리학과 형이상학 약간 뿐만 아니라 미적인 감각과 기호 감각의 근거인 것이다. 이성은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이성은 상호 모순되는 신념들이 도저히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또한 그것은 수학, 논리학 그리고 일반 개념들에 관한 우리  신념들의 원천이다. 경험은 이성에다가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첨가해 준다.

8 : 확실성이란 가능한가 ?

확실성의 추구는 일식론의 역사에서 커다랗고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많은 철학자들은 확실성이나 의심할 여지 없음이 지식의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진정한 지식이란 항상 영원한 동시에 확실한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에 관한 지식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확실성이 인식론에 중요한 역할을 명시했었음에 반해, 그 확실성의 본질은 철학자에 따라 다양했다인간의 지식은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오류 가능한 것이며 개연적인 것이다. 단지 신만이 필연적으로 틀림 없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신에 대한 지식은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고 진실한가? 아니면 그것은 개연성이 다양한 정도를 가진 진실과 허위, 지식과 의견의 혼합체인가? 성경 속에서 전달된 신지식이 틀림 없다는 것은 우리의 견고한 확신이다. 해답은 성경이 신의 본성의 일부분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어떤 속성들 속에서 발견된다. 신의 속성들 중에는 전지, 진리, 완전한 선, 전능 등이 있다. 이들 속성 각각은 우리가 강조하는 것들에 결정적인 것이다. 신은 이 진리를 가지고 있고 만약 그것을 전달할 동기와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신은 그것을 인간에게 전달할 능력을 결여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신의 계시의 의심할 여지 없음과 틀림 없음을 부정할 그럴 듯한 이유는 확실히 대답된 것처럼 보인다.

9 : 우리는 외부세계를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

우리가 지각할 때 그 지각내용은 실재론, 이원론, 관념론이 있다. 실재론은 주체와 객체와의 관련성을 해석하는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한 방법은 어떤 관찰자와도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써 모든 경험된 객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실재론은 물질 대상들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정신에 현저하지만, 그것들이 정신과는 독립해 있고 또 정신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이고 원시적인 실재론에 동의한다. 현상론은 에이어의 철학에서 시작된 이원론의 특별한 형태의 명칭인데 그는 첫째로 감각자료에 대한 진술은 사물들이 관찰자에게 어떻게 보이고 나타나느냐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에, 그런 진술은 교정할 수 없든지 틀림 없는 것이며 둘째로 감각자료 언어의 도입이 외부 세계의 존재 여부와 더불어 존재한다면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떤 철학자들은 세계가 전적으로 물질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다른 철학자들은 진리는 비물질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 관념론은 대상(특히 물질적인 대상)은 그것에 대한 어떤 의식과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관점으로써 정의된다. 따라서 모든 실재는 의식적인 존재들과 그들의 상태들에로 배타적으로 단축되어진다. 이 입장은 약한 형태와 강한 형태로 나누어 진다여기서 우리는 물질세계와 지각주체의 독립성과 본질에 관한 세 가지 관점을 검토했다. 실재론은 말하기를 우리는 직접적으로 독립적이고 물질적이고 외적인 세계와 접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원론은 두 개의 영역(즉 하나의 관념, 인상, 감각자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물질대상의 존재)을 주장한다. 관념론은 모든 세계를 주관이나 주관성의 영역으로 축소시킨다. 극단적인 형태에서는 자아까지도 이 영역으로 할당된다.          

10 : 신념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

철학자들은 신념이나 진리 자체만으로는 지각에 충분하지 않으며 최소한 그 신념을 옹호해 주거나 정당화해 줄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당화란 옳게 되고 지식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신념의 필수조건이지만, 그것 만이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식론적인 정당화의 두 가지 대인적인 논리나 구조가 있는데 그것은 기초주의와 결합주의나 맥락주의다기초주의란 그 기초가 나머지를 모두 지탱시켜 주지만, 그 자체는 아무런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지식의 구조가 있다는 견해이다. 인식론적으로 기본적인 신념이나 명제는 정당화 피라미드의 최하단을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의 정당화는 직접적이라고 말해지며 또 그것은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인 지식을 구성한다. 그들은 다른 철학자에 의해 본질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일견에 정당화된 본질적으로 믿을 수 있는신념이라고 불리워 졌다. 어쨌든 그들은 모든 지식이 올라설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다. 반면 기초주의의 중요한 대안은 결합주의와 맥락주의인데 때때로 이 견해는 정당화의 성문이론이라 불리워 진다. 결합주의는 인식론적으로 선험적이며 기본적인 믿음은 없다는 견해이다인식론적인 정당화의 문제의 양쪽 측면에 기독교 인식론이 있다. 기초주의와 결합주의는 어떤 점에 있어서 서로 접근한다. 만약 기초주의자가 교정의 여지가 있는 그리고 논리적으로 결정적이 아닌 근거를 허용한다면, 그리고 결합주의자가 함정의 외곽에 있는 믿음들이 경험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 두 견해는 중요한 유사성을 갖는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인식론자들이 받아 들일 수 없는 두 개의 중요한 견해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적절하다. 그것은 실재 세계에 대한 상대주의와 불가지론이다.

3부 실재란 무엇인가?   

11 : 실재는 하나인가 다수인가?

실재는 하나인가 아니면 다수인가? 혹은 양쪽 모두인가? 만약 실재가 하나라면 우리는 어떻게 명백한 그 다수성을 설명할 것인가? 일원론은 실재는 다수가 아니라 하나라고 주장한다. 제논은 ① 만약 실재가 다수라고 가정한다면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결론이 따른다 ② 불합리성은 허위의 조짐이다. ③ 그러므로 실재가 다수라는 것은 허위이다. ④ 따라서 실재는 하나이다  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원론은 실재는 다수이다라고 주장하며 두 그룹(원자론자들과 플라톤학파)은 실재가 비존재에 의해 다르다는 것을 얘기했고,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와 토마스주의자들은 모든 실재는 존재 내에서 다르다고 주장했다원자론은 사물들은 절대적인 비존재에 의해 다르다고 주장했고 플라톤학파는 사물들은 상대적인 비존재에 따라 다르다고 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들은 그 단순한 존재 내에서 다르다고 한 반면 아퀴나스는 사물들은 구성된 존재 안에서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플로티노스는 통일성은 존재보다 더 궁극적인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은 통일성이라고 하며 신은 모든 존재,  지식, 의식을 넘어선 유일자로서 수많은 방향의 반경이 원의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이 일자로부터 다수가 나온다고 하였다기독교의 삼위일체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복수라는 수 세기 묵은 문제의 해결책이 한 신 안에 세 인격이 내포되어 있다는 정통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해 왔다. 바로 여기에 (인격의) 다양성과 본질의 통일성이 존재한다. 적어도 어거스틴 이후로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에서 굉장한 가치를 발견하곤 했다. 신은 왜 인간을 창조했는가? 삼위일체론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신이 자기의 사랑을 나누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지 나누어줄 필요성에서 그리하였던 것은 아니다.” 신의 삼위일체는 우주의 가장 궁극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은 똑같이 본질적인 실재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 안에서의 통일성은 다양성보다 더 근본적일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다양성은 통일성보다 더 근본적일 수가 없다. 신은 다원성 내의 통일성인 동시에 통일성 내의  다원성이다. 신성 속에서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똑같이 근본적이다.

12 : 정신과 육체의 관계

인간 본성에 관한 질문은 가장 대답하기 어렵고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반면에 최대의 철학적인 의의를 갖는다. 유물론은 우리는 육체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인간은 곧 육체와 같기 때문에 육체의 건강이나 행복은 곧 우리 자신의 건강이나 행복이라고 한다. 이와 극단적인 반대는 관념론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므로 인간은 물질로 축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축소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연장을 가진 육체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데카르트는 상호 작용론을 주장하면서 아주 고전적인 형태로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실체와 육체적(확장된)인 실체 두 가지가 있다며 정신적인 실체의 본질적인 특징은 그것이 연장되었다(, 공간적인 크기를 갖는다)는 점이며 인간만이 두 가지 실체를 함께 가질 수 있고 인간 속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이 상호작용론은 물질과 에너지의 보존이라는 물리적인 법칙과 이 상호 작용론은 모순된다고 주장해 왔으며, 이 법칙은 두뇌의 현상이라는 복잡한 영역에는 적용 불가능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두 번째 반론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서로 연결되기에는 너무 별개의 입장이라는 것으로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인간이 그 본질에 있어서 서로 다르지만 일상적인 관계를 늘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는 정신행위가 육체행위의 원인은 아니고 오히려 그것의 산물이라는 것이고 육체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단 하나의 방향성만을 지닐 뿐이라고 주장한다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유물론과 일원론인 동일성이론이 성경에 정면으로 위배되며 성경은 인간이 순전히 물질적이기만 한 차원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안다. 인간의 육체는 땅의 흙으로  만들어 졌으나 하나님이 인간의 몸 속으로 당신의 숨을 불어 넣어주신 것이다.

13 : 인간은 자유로운가 ?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직면하게 되는 가장 중요하고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는 철학적 의문의 하나는 자유의지의 문제이다. 또 특히 그 대답은 형이상학은 물론, 도덕, 법률, 종교와 관련이   있다. 극단적인 결정론은 특히 종종 운명론으로 오해받는다. 반면에 단적인 결정론은 우리 자신의 행동을 포함하는 선행조건들에 의해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극단적인 결정론자들은 인간의 책임이란 개념은 부정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나간다. 사실은 도덕적 책임의 부정이 나약한 사회 보다는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 것이다. 만약 우리 경험 중의 어떤 것들이 진실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행하는데 자유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온건한 결정론이란 만약 외적인 구속이 없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따라서 때때로 우리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견해인데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욕구와 내적인 상태에 따라서 행동하였지만, 이런   상태가 사실상 우리를 어떤 기계 위로 걸어 올림으로써 유도된 것이라고 가정해 보면 그     불합리한 것을 알 수 있다이에 대해 비결정론자들은 자유에 대한 양립주의자들의 해석을 거부한다. 우리의 행동을 범주화 할 수 있는 과학적인 법칙이란 없으며, 또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어떤 법칙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질서에서 그 원인을 알지 못하더라도 한 사건은 그 원인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점에서 비판 받을 만하다.

14 : 인간은 죽음 후에 살아남을 수 있는가 ?

사후의 인간 존재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찬반 논쟁이 존재한다. 영혼불멸을 반대한 논증은경험적인 논증으로 운명론자는 모든 인간이 죽는 것은 보편적이고 논의의 여지 없는 사실이라고 지적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것이 아니다. 에녹( 5:24)과 엘리야 (왕하 2:11)는 죽지 않았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숙명론적인 입장에 반대하는 핵심적 예증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재림시 육체가 썩지 않는 몸으로 변할 것이라고 교훈하고 있다영혼 불멸에 반대한 가장 흥미 있고 인상적인 논증은 육체와 정신이 의존한다는 논증이다. 이 관점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이 문제가 현대의 지적인 고찰로부터 권위 있는 확증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정신활동은 육체에 의존하고 있다우리의 두뇌는 불멸하는 것이 아니며, 죽음 앞에서 모든 기능을 멈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욱이 모든 증거는 정신생활이 두뇌의 구조와 육체적인 에너지와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현재 실존의 육체정신의 의존관계가, 미래 실존의 상태에 관해서는 아무런 증명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 하기 위해서 미래 생명을 관찰해야 한다. 미래 실존의 상태들은 현세의 상태와는 차이가 있다기독교인에게 내세에 관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대답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는 죽은 이후의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고 있다.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건너 가신 예수는, 불멸의 문제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15 : 다른 정신은 있는가 ?

철학자들은 실재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에 흥미를 가질 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소유하는  것과 똑 같은 사상과 감정을 가진 다른 정신들과 존재들이 있는 것을, 우리들 각자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다유추에 의해 논증하는 것은 만약 주어진 현상 A가 일관성 있게 다른 현상 B하고 관계가 있다면, A와 유사한 현상에 접할 때 우리는 이것이 B와 유사한 현상과 관련성이 있다는 결론을 정당하게 내릴 수 있다고 가정한다는 사실을 보통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반대이론들은 그 논증이 빈약하며 논증의 정확성을 지지할 방법이 없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다른 정신들에 대한 질문에 응답함에 있어서 행동주의란, 모든 정신적인 태도나 심리학적인 표현들이 행동이나 육체적인 상태로 축소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런 표현들이 행동에 비추어서 완전히 이해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우리가 극심한 고통 중에 있을 때는 주위환경이  행위를 유발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서 관찰하는 어떤 행위에 기초하여 고통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유추로부터의 논증이 현대 사상들 속에서 폭넓게 비판 받았던 반면에, 그 논증은 다른 대안 못지 않게 변화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그것은 비방들이 없는 바는 아니며, 그것에 반대해서 제공된 어떤 반론도 결정적인 것이 못 된다.

16 : 진리란 무엇인가 ?

철학이 진리의 문제와 궁극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면, 진리를 정의 내리고 그 진리가 어떻게 결정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다일관성 진리이론에 의하면 하나의 진술이란, 그것이 그 이론체계의 다른 진술과 일치하거나 일관성이 있을 그 때에만 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진리이론에 접해 볼 때 각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체계의 특징이며 지식이 지니는 이와 같은 철저한 상관성 때문에 모든 지식은 그 체계 안에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관성이라는 것이 진리의 필이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하나의 진리이론으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즉, 그것은 충분조건이 못 된다상응이론에 의하면 진리란 신념이나 문장과 사실이나 사태 간의 상응형식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응이론에 대한 반대이론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고 불리어 왔다. 이 역설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으로서의 해답을 제시하자면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주장은, 자기   파괴적이거나 자기 패배적인 것으로서 전혀 진리 주장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상대주의나 불가지론으로 결론이 나는 진리이론은 모두 받아들일수 없다. 성경에는 인간이 진리를 알고 있으며, 거기에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4부 궁극적인 존재란 무엇인가 ?

17 : 신앙과 이성의 관계

철학에서 기독교인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신앙과 이성을 어떻게 결부시키는가이다. 계시는 인간의 이성이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는 발견될 수 없을 진리에 대해 신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현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은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인간 정신의 자연적인 능력이다키에르케고르나 칼 바르트 등은 오직 계시만이 인간지식의 타당한 원천으로 고려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반면에 칸트나 스피노자 등은 모든 진리는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과 계시 사이에 상관성이 존재한다고  하였으며 이들의 차이점은 어느 쪽에 더 강조를 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거스틴은 플라톤 철학의 배경에서 기독교에 이르렀으며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통에서 저술했다. 어거스틴은 신앙에 의해 신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 대한 반대급부는,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얻을 수 없는 보다 완전한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이며 이 증명을 통해 나오는 신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 결코 인간이 신앙에 의해 진입해 들어가게 되는 유일한 종류는 아니다. 그러나 그 중의 한 유형임에는 틀림없다. 아퀴나스는 계시의 도움을 받아 인간은 신에 관한 확실한 진리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진리들을 철학적으로 증명해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18 : 신의 의미

신을 인식하는 방식에는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가 있는데 ① 유신론은 세계 저편에 있으  면서 세계 안에 있는 신을 고수하는데, 그 신은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다. ② 자연신론은 신이 세계 저편에 있지만 세계 안에는 없다고 믿는데, 그 신은 초월적이며 적어도 초자연적인 방식으로는 내재적이지 못하다. ③ 범신론은 신이 세계 안에 있지 세계 저편에는 없다고 믿으며  여기서 신은 세계이고 신은 우주 속에 내재하고 있지 우주를 초월해 있지 못하다고 하며 ④ 만유재신론은 영혼이 육체 속에 있는 방식으로 신이 우주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⑤ 유한 신론은 유신론과는 반대로 신이 우주 밖에 있으면서 우주를 통치하지는 않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우주는 만유재신론과는 반대로 신의 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중 자연신론에서 제일 난처한 점은 그것이 창조는 긍정하면서 기적은 부정하는 것인데 왜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신 신이, 어떤 것에서 어떤 것(예를 들어서 물 à 포도주)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는가? 이러한 비일관성은 특별한 변명 없이는 답할 수 없다기독교적인 견해에서 볼 때 신은 전능하고 선한 창조주이며 세계의 보존자로 여겨진다.  신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간을 창조했으며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하여 악을 허용해 왔다. 기독교인이 신의 계시(, 성경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아는 것은 인간 이성에 의해서 확인된다. 

19 : 신은 존재하는가?

전능하시고 전선하시고 무한하신 창조주 그리고 전 우주를 지탱하시는 분은 존재하는가?   유신론자들은 소위 신의 존재에 대해 결정적인 논증을 제시한다. 무신론자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들이라고 자기들이 주장하는 바를 제시한다. 불가지론자들은 신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회의주의자 집단은 오히려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자 한다.   결국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신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으로 불가피한 증거란 없다이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증을 보면 ① 나는 불완전한 관념을 갖고 있다. ② 그러나 완전한 것을 모르는 한, 불완전한 것을 알 수 없다. ③ 그러나 불완전한 정신은 완전한 관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④ 그러나 완전성이라는 나의 지식의 원천인 완전한 정신이 틀림없이 있다. 이것은 논리적인 정당화 없이 인과율의 원리에 호소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싸르트르는 인간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할 수 있을 때에만 자유롭지만, 그들의 욕망들을 그들에게 부여한 것은 신이 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비록 신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인 완벽한 논증은 없다고 해도 우리는 신을 믿을 만한 얼마간이유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우연한 존재가 있다면 절대적인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이 우연성의 근거가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정의상 우연한 존재는 비야기되었거나 자기 원인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인 존재가 존재한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합리적인 듯이 보인다.

20 : 우리는 신에 관하여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

언어가 경험적으로 근거 지워지고 또 신이 초경험적인 존재라면, 신에 관한 어떠한 이야기도 진정으로 서술적일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언어의 성질에 대하여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대답이 있다. 첫째, 신에 관한 이야기는 다의적이다. 이들은 무한한 신은 항상 신을 표현하려는 유한한 언어의 능력을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신에 관한 단일의미적인 이야기는 불가지론의 견지에서 주장하는 이론으로 많은 기독교 사변가들이 종교 언어의 한 가지로만 해석되는 성질을 주장해 왔다. 세 번째로는 신에 관한 유추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유추적인 개념들은 불가지론이나 단일 의미적인 개념으로 전락해 버린다종교언어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진리의 한 요소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종교언어에는 순수하게 기술적인 것 이상이 있어야 한다. 신에 관한 이야기는 환기적이 어야 한다. 그것은 신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신에게 응답하게 하는 신으로 부터의 이야기이어야 한다. 계시의 언어는 신에 관한 비례적인 서술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에게 응답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비례적인 것 이상을 포함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신에 관한 적절한 이야기는 신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로부터 초월적인 신에 대한 응답을 끌어내는 이야기이다.

21 : 악의 문제

신과 악을 관련시키는 근본적인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무신론은 악의 실재를 인정하고 신을 부정한다. 범신론은 신을 인정하고 악의 실재를 부정한다. 유신론과 이원론은 신과 악의 양립을 보여주려고 시도 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유신론자들은 몇 가지 이유에서 신과 악의 양립을 인정한다. 그것은 선과 악은 대립물이어서 어떤 것도 이 대립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악은 선에서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선과 악은 둘 다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 모든 선의 기초에는 영원한 하나의 제 1원리가 있으며 악의 뿌리에는 또 다른 제 1원리가 있다. 이에 대해 유신론자들은 첫째로 신은 몇몇 사물에 대해서는 단지 간접적인 창조자라고 한다. 둘째로는 악은 사물이 아니다. 악은 선의 상실이나 부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악은 다른 실체 속에 존재하지만 존재 그 자체는 아니다. 어떤 것도 전적인 악일 수 없다. 결국 유신론은 신이 보다 더 큰 선을 만들기 위해 악을 인정한다고 한다유신론은 신이 악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신의 무한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창조에 대한 신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악이 발생할 것을 안다는 신의 전지를 부정한다. 유신론은 악에 대해 가장 적합한 설명을 견지하는데, 즉 무한히 선하고 전능한 신은 보다 더 위대한 선을 만들기 위해서 악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이 세계는 최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신은 그의 최선을 다할 것이다.

22 : 우리는 신을 경험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종교와 경험을 둘 다 정의해야 한다. 경험은 주체가 다른 주체나 객체에 대하여 갖는 인식이다. 특수한 경험은 개인의 의식 전체 내의 어떤 주어진 측면이나 계기에 집중된다. 경험은 근원적이거나 이차적일 것이다. 근원적인 경험이란 어떤 것에 대한 원래의 비 반성적인 인식이다. 2차적인 경험이란 어떤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경험의 반성이다. 2차적인 경험은 종종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추론은 하나의 경험이고 그 자체로 종교경험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 있어서 중요역할을 할 것이다종교는 초월적인 것이거나 서구 사회에서 보통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초월적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자기 초월의 과정이나 자신의 유한한 상태라는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인간의 시도를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과정의 대상을 의미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부른다. 쉴라이어마허는 도덕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의무이지만, 종교는 우주에 대한 인간의 절대 의존이라고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윤리적인 것은 도덕법칙에 대한 응답이지만, 종교적인 것은 도덕적 율법 제정자에 대한 응답이라고 그는 말했다. 어거스틴, 아퀴나스, 파스칼, 키에르케고르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가장 저명하고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이 자신들의 신과의 만남에 관해서 완전히 속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따라서 신은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5부 선과 악은 무엇인가 ?

23 : 옳음이란 무엇인가 ?

철학에서 인식론은 진리와 관련이 있고 존재론은 실재와 관련이 있지만 윤리학은 선과 관계가 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은 기독교 윤리로 나타나는데 궁극적으로 그리고 견고하게 완전한 사랑과 정의의 신의 변함 없는 본성에 고정되었다. 기독교 윤리학이란 신의 절대 의지에 기초하고 있거나 아니면 신은 그 이상의 무엇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하는 잘못된 이분법을 피한다. 기독교의 신은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박애적이다. 기독교도들은 신이 인간에게 두 가지 국면에 자신을 계시해 놓았다고 믿는다. 즉 그의 세계(자연 계시)와 그의 말씀(특별 계시)이다. 특별 계시는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 죄의 영향을 극복하는데 필수적이다. 그것은 자연계시 보다 신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해 준다기독교 윤리는 인본주의 윤리보다 우월함을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은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그의 완전성이 절대적인 인격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만약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옳다면 그 도덕의 궁극적인 근원은, 다른 어떤 인본주의 윤리보다 무한히 우월하다. 또한 기독교 윤리는 우월한 인격적인 현현(예수 그리스도)을 갖고 있다. 성경은 예수는 성육신한 신이며, 그것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수많은 경우에 그가 구약의 여호와임을 말해 준다. 더욱이 기독교는 우월한 윤리적 선포(즉 성경)을 갖고 있다. 신은 사랑이며 예수는 인간의 형태로 현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율법은 개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최선의 방향을 알려준다.

24 : 어떻게 무엇이 옳은 지를 알 수 있는가 ?

윤리적인 원칙들을 정당화 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 왔다. 그 대부분은 옳음에 대한   특별한 정의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는 우선 유명한 견해들의 부적합성을 검토해 보고 그리고 기독교적인 관점으로부터 보다 적합한 정당화를 제공하고자 한다.  옳음에 의해 의미된 것의 정당화로는 ① 결과에 대한 정당화 ② 반대되는 것의 자멸적인 속성에 의한 정당화 ③ 직관에 의한 정당화 ④ 자기 증거에 의한 정당화 ⑤ 인간의 권위에 대한 호소에 의한 정당화 ⑥ 신의 권위에 대한 호소에 의한 정당화가 있다. 이에 대해 옮음에 대한  기독교적인 정당화로는 ① 오직 신앙에 대한 호소 ② 이성에 대한 호소 ③ 일반 계시의 성격  ④ 일반 계시의 정당화 등이 있다옮음의 개념을 정당화하려는 무수한 시도들이 있어 왔다. 옳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더 이상 호소할 곳이 없는 궁극적인 권위(하나님)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님을 믿는데 대한 어떤 정당화를 가져야만 한다. 기독교인들은 행동에 대한 권위 있는 규범으로서의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성경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제공한다. 기독교인들은 특별계시 뿐만 아니라 일반계시 둘 다를 믿는다.

25 : 규칙과 결과의 연관성

기본적으로 윤리학에 대한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하나는 법칙에 중심을 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과에 중심을 둔 것이다. 전자는 의무중심적이어서 법칙주의라 불리우고, 후자는 목적중심적이어서 목적주의라 불리운다플라톤과 칸트를 포함한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 취해져 왔는데 그것은 목적론적 견해와 대비해 봄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옳음이란 결과에 관계없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공리주의는 옮음은 장기적인 결과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 전형적인 예를 들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는 시도는 그것 자체로는 훌륭한 행동이 아니고 그 사람이 구조되었을 때 비로소 좋은 행동이 된다. 옮음과 결과의 상관성을 보면 이러한 견해의 검증은 법칙과 결과가, 포괄적인 윤리도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법칙이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 모두이다  앞에서 본 두가지 접근방법은 법칙주의 윤리는 법칙에 있어서 의무중심적이고, 목적주의  윤리는 결과에 있어서 목적 중심적이다. 이러한 두 측면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포괄적인 윤리는 둘 모두를 포함한다. 기독교인들은 둘 모두와 관련이 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의무라고 신이 준 규범을 지킨다면, 신은 결국에는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단기적으로는 우리가 윤리적인 기준을 침범하지 않고 보다 나은 행복을 낳을 때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26 : 옳음이란 보편적인가 ?

윤리적인 상대주의는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변화한다며 보편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중세의 옥캄은 유명론을 주장하여 윤리적인 상대주의에 공헌하엿는데 보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래서 유명론은 철저한 윤리적 상대주의를 요구한다이에 대해 근대의 상대주의는 공리주의와 실존주의, 진화론 등을 통해 보편성을 부정하고 결과에 따른 윤리의 상대주의에 무게를 실었다. 많은 움직임이 현대의 윤리적인 상대주의에서 두드러지는데 정서주의, 주관주의, 상황주의. 그것들의 극단적인 형태에 있어서 그 모두는 도덕 폐기론이다. 에이어는 모든 윤리적인 진술들은 정서적이라고 주장한다. 싸르트르는 무신론적인 실존주의는, 윤리에 있어서는 극단적인 주관주의의 형식을 내포하고 있다. 플래처는 과감하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도덕률폐기론 사상가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고, 모든 객관적 가치는 그와 함께 사장되었다고 주장했다기독교인에게는 보편적인 윤리기준이란 신의 변하지 않는 성품에서 나온다. 그것에 의해 그것은 모든 사람은 어떤 도덕적인 의무아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상황은 신의 어떤 절대를 적용해야 하는지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준다.

27 : 도덕적인 의무는 상충하는가 ?

도덕적 의무의 상충시 그 상충이 실재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이론과 상충하지만 딜레마는 풀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세번째 대안에 따르면 모든 윤리적인 딜레마에 도덕적인  방법이 항상 있다. 이 견해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취해진다. 이들은 ① 상충은 외관상의 것이며 ② 생명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고 ③ 죄를 피하기 위해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며 ④ 신의 섭리를 믿으라고 충고하며 ⑤ 진정한 딜레마는 우리들   자신이 만드는 것으로 본다보편적인 윤리규범을 믿고 있는 사람에 의해 취해지는 두번째 견해는 대중적으로 덜 나쁜  견해라고 묘사된다. 이 입장에 따르면 둘다 틀렸다고 하는 진정한 도덕적 딜레마가 있다. 우리는 두 악 중에서 덜 나쁜 쪽을 단순히 행해야 하며, 그리고 나서는 그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이에 비해 더 나은 선의 견해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신의 명령 사이에 불가피한 상충이 있을 때마다, 우위의 법칙(성경속에 신에 의해 나타난)에 따를 것을 의미한다기독교인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다. 성경은 예수는 전혀 죄가 없지만 그러나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의 죄없음이 성경에 분명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덜 나쁜 악의 지지자들은 이 명백한 상충에 필요한 다른 설명을 찾기를 원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그리스도 모범의 완전성에 의문을 던지며 둘째로 왜 예수가 덜 나쁜 악의 상황에 직면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① 모든 덜 나쁜 악의 상황은 원죄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그 스스로 어떤 딜레마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② 신은 예수의 죄 없음을 요구하는 구속 계획을 전복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예수를 면하게 하였다고 설명한다.

기독교적인 덜 나쁜 악의 견해를 논박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예수가 처했던 진정한 도덕적  상충의 예를 주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어떤 실재적 상충에 접했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죄 없이도 놓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누구나 죄 지음 없이 실재적인 도덕적 상충에 직면할 수 있다면, 덜 나쁜 악의 견해는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덜 나쁜 악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상충된 상황에서 죄 지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옳음의 상충에 대한 문제에서는 세 가지 기본 입장이 있다. 세번째 대안의 견해는 진정한  상충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가 실제적이지 못하고 비성경적이며 모순이라는 점을 우리는 발견하였다. 덜 나쁜 악의 견해는 어떤 진정한 딜레마가 있지만,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 둘 다 나쁘다고 주장한다. 이 입장은 예수의 삶과 그리고 십자가의 사실과 맞이 않음이 밝혀졌다. 유일하게 적절한 견해는 더 나은 선의 견해의 형태이다. 이것에 따라서 신은 인간의 더 높은 명령에 대한 의무의 거절과 관련해 더 낮은 명령을 따르지 않도록 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이 무엇이 더 높은 명령인가를 계시해 준다.

< 리뷰 > 

장점  

노르만 L. 가이슬러(1932-) 박사는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종교철학과 교수, Dalla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변증학 교수, Southern Evangelical Seminary 교수로 50년을 봉직하였다. 기독교 철학, 변증학의 대가로 기독교인들에게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다. 대표적 저서로 종교철학 개론,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 변증학, 기적과 현대사상 등이 있다. 그의 저서 「기독교  철학개론」은 기독교 철학분야의 주요 저작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철학적 사유의 길로 인도한 역작이다. 이 책은 기독교 철학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하면서 기독교적 철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철학이 모든 지식적 활동의 기본이 될 수 있도록 정지 작업을 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이 책은 비록 철학적인 용어로 인해 어렵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개론형식으로 엮어 놓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으면 소제목 암기를 통해서라도 전체 기독교 철학에 대한 개념을 잡을 수 있다. 다른 책들이 신학과 철학을 비교하는 형태로 서술되었다면 이 책은 용광로처럼  철학에 신학을 녹여 놓은 것 같이 자연스럽고 통일성이 있다. 전체적으로 신학이라는 명제를   철학으로 설명 해주고 있지만 특히 제 3 11장에서처럼 실재는 하나인가 다수인가? 를 통해   삼위일체론을 개념적으로 설명, 본서 12정신과 육체의 관계에서는 로마서 7장에서 다루고  있는 마음과 육체의 철학을 구체화 시켜 주고 있다. 저자는 철학의 1차적인 자료를 매장 말에 소개하면서 까지 모든 철학적 주장 중 반 기독교적 주장들을 근거를 가지고 공정한 입장에서 반박, 기독교의 온당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철학의 오류들을 인정하고 반박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철학을 기반한 신학을 구축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철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일생 기독교를 이해 하는 바탕을 이루게 되기를 유도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봉착할 수 있는 제반 철학적 사유를 다루어 줌으로써 신학도에게도 많은 도움을 준다.  

단점

이 책은 개론식으로 엮으면서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한 번 읽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다시 몇 페이지 앞으로 돌아가서 두세 차례씩 밑줄을 그으며 읽어야 해서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 철학도가 아닌 기독교인들이 주요 독자층인 만큼 기독교인이 보다 더  쉽게 이해되도록 교리와 성경구절을 더 많이 삽입하여서 철학 용어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여 실제 신앙생활에 곧바로 적용토록 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더우기 이 책은 개론서라고 보기에는 서술형 위주로 되어 있어서 내용 정리가 쉽지 않게 되어 있다. 우리 신학도의 입장에서는 신학을 들어가기 전에 철학개론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입장이므로 철학적 사조 및 이론을 도표화 한다든지 하는 서비스가 있었더라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학기 중에 본서에 나오는 철학이론을 나름대로 도표화 하는 작업 등을 서문 등에서 권유했더라면 소기의 학습능률을 올릴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적용

1. 개인에게

우리가 신학도로서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자신만의 신학을 정립하는데 철학적인 사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주요 교리를 이해하고 신학적인 저작을 합리적으로 해석  하기 위해 누구든지 어느 정도의 철학 지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철학에 대한 인지가   없다면 비기독교인의 철학적 지적 유희에 휘말릴 수 있다. 기독교리를 공부하면서 철학적인 기초 구축을 병행해야 한다. 그것이 본서와 같은 기독교 철학이면 더욱 좋다. 그래야 이단과의 논쟁  에서도 반박할 논리를 갖출 수 있다. 신학과 철학은 둘 다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철학적인 지식은 실제로 주요교리 형성 체계와 신학적 저작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게 해주고 자칫하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흐를 수 있는 신학공부를 구체화시켜 주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서 철학이론 중에서 무신론, 불가지론, 회의론 등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를 시도하지만 우연한 존재가 있는 것을 인정한다면 필연적인 존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론을 통해 우주는 변화하고 있고 유용한 에너지의 총량은 감소한다는 이론에 따라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다라는 철학적 결론을 통해 우주 너머에 실존하고 있는 필연적 존재를 우리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악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 해답을 얻는다. 즉 무한히 선하고 전능한 신은 보다 더 위대한 선을 만들기 위해 악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리만으로는 얻기 힘든 철학적 사유다. 자유로운 이 세계는 최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신은 그의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2. 교회에서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신학도나 성직자들이 결국 정착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학생들과 성직자들이 철학 공부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문제는 이들이 결국 교회로 진출했을 때 벌어지고 있는 수 많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에 있어서 신학적으로만 접근할 뿐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책임이 있다. , 종교만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제 문제, 즉 선과 악,  미와 추, 질서와 자유, 삶과 죽음 같은 것은 철학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철학은 사물의 궁극적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어서 종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  므로 철학이론을 통해 교회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이단논쟁이나 교회내에서의 인간관계의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으므로 교회에서도 목회자나 교역자, 일반성도를 막론하고 성경공부와 함께 철학의 기본지식도 함께 습득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3.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유신론자이면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데 문제가 없지만 사회 내에서 무신론자와의 논쟁이나 설득을 위해 신에 대한 신에 대한 경험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역사적으로 수천 년에 걸쳐 그 많은 사람들, 특히 지성적인 철학인, 종교인들이 다 오류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종교적인 경험을 무조건적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경험은 철학적인 이성적인 추론과 떨어질 수가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신론자들은 이성적으로 기독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결국 구원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물질만능주의의 현실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이상학의  양대 분야, 즉 종교와 함께 철학적 역량을 기르는 것은 우리의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이다. 종교와 철학은 바로 그 출발점과 목표에서 만물의 근원의 정체와 원리를 밝힘으로써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모색해 보려는 공통적 과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보통 비신자의 경우 이해가 되지 않는 교리를 가지고 설득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거부감을 가지기 쉽다. 이때 가벼운 철학적 논제를 가지고 대화를 풀어 나간다면 훨씬  이해하기 쉽게 대화를 주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것은 결국 우리의 사명과도 연관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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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활동  제휴 문의usedslr@gmail.com, 홈페이지(homepage) http://www.nkmission.net

 

서론: 근대에 대한 반성

철학은 그렇게 신비로운 것도, 반드시 어려운 것도, 터무니 없는 것도, 그렇다고 무의미  하여 버려야 할 것도 아니다.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악기를 하나 배우는 데도 몇 년간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데 하물며 삶과 인간과 세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일을 쉽사리 익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오해이다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신앙을 정당화하고 변호하기 위해서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중세 신학이 신앙을 이론화하고 체계화하는 수단으로 철학을 사용하고자 했다면 근대 이후의 신학은 대체로 철학이 앞서 닦은 길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현대 철학의 흐름을 잘 파악하면 현대 신학의 논지도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철학은   믿음의 조건이 될 수 없을 뿐 더러 신앙을 정당화하거나 변호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철학은 기독교 신앙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알게 해주고 신앙을 체계적으로 이해   하고자 한 신학에 서양 철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야 한다. 신론 뿐만 아니라 인간론, 우주론, 교회론 등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신앙의 이해에 철학적 영향이 엄청나게 많이 스며 들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철학을 통해 얻은 또 다른 유익은 어떤 하나의 철학을 절대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철학을 피하기 위해서도 철학을 알아야 한다. 만일 철학을 알지 못하면 거의 예외 없이 어떤 철학에 붙잡혀 있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사회 운동가들, 신학자들, 목회자들에게서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의식적으로 어떤 철학을 따르는 것보다 이런 경우가 더 해로울 수 있다신앙이란 감정이나 의지의 작용일 뿐만 아니라 지성을 포함한 전인격을 바쳐 참여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신뢰하고,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고, 그 가운데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삶이다. 철학은 이와 달리 지적이고 이론적이며 반성적인 작업이다. 철학은 언제나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신앙을 전제하고 있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할 수도 있고 기독교 유신론적 관점에서 철학을 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 à 의심을 거쳐 확실성으로

데카르트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것은 지금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할 수 없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지금 존재한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생각한다가 아니라 내가 지금 생각한다”,”내가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결국 일인칭 단수, 시제는 현재형,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데카르트는 어떤 지식이라도, 신뢰할 수 있는 지식 즉 과학적 지식으로 인정받으려면 동일한 방법으로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이 방법을 네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명증성의 규칙으로 확실하게 알 때 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것이고 둘째,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분해의 규칙).” 셋째, “생각들을 순서대로 이끌어 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대상에서 시작하여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을 인식하는 데까지 이를 것(합성의 규칙 또는 종합의 규칙).” 넷째, “아무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열거의 규칙 또는 매거의 규칙)”이다데카르트는 새롭게 등장한 과학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갈등을 철학적으로 화해시키고자 애썼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신 존재 증명은 나의 사유와 존재의 확실성에서 출발한다. 나의 사유와 존재의 확실성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신실성에 의존한다는 말인데 우리는 여기서 인식의 순서에 따른 접근법과 존재의 순서에 따른 접근법으로 나눌 수 있다. 존재의 순서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먼저고 인식의 순서로는 내가 먼저라는 것이다여러 측면에서 데카르트는 비판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는 전통주의자라는 이유에서 였는데 사회변혁에는 무관심한 채 오직 참된 명제들만 끌어 모으는 일에 집착한 비실천적 이론가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환경론자들의 비판으로 그가 인간 중심주의에 빠져서 자연을 철저히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프로이트와 라캉 같은 정신분석 학자들의 비판으로 이들은 존재와 사유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데카르트가 말하려는 것은, 애초에 나를 무한한 능력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동일한 능력으로 나를 보존하시며 또한 앞으로도 보존하실 것이기 때문에 나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사실  이다. 하나님이 없다면 나의 존재 자체가 가능하지 않으며 나의 존재가 없다면 나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는 정신의 눈으로 나 자신을 향하면 나는 불완전하고 다른 누군가에 의존하며  끊임 없이 더 크고 더 좋은 분을 바라고 있음을 이해할 뿐 아니라, 동시에 내가 의존하고 있는 분은 이 더욱 큰 것을 모두 무한정적으로 또 가능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한하게 갖고 계신 분이며 이 분이 곧 하나님임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여 내가 있다는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가능함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파스칼 à 생각하는 갈대의 비참과 행복

파스칼은 근대 철학자 중에서 이성만이 유일한 인도자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태도도 실제로 실험을 통해서 어떤 이론이 참된지를 확증하고자 했다. 수학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 교통수단과 체계를 고안할 만큼 실제적인 사람이었다.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여긴 그의 신앙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도 하다그는 또한 또 다른 인식능력인 판단력을 강조했는데 이는 근대의 객관주의적, 탈 인격적 과학 개념에 대항해서 과학적 지식이 지닌 인격적인 차원을 강조한 마이클 폴라니의 암묵지란 개념이 파스칼의 섬세의 정신과 흡사하다. 기하학적, 수학적, 과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몸을 통해,”암묵적으로, 자연스럽게,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고형성되는 지식의 차원이 있다. 마찬가지로 참된 진실을 아는 데는 수학이나 과학이 아닌, 또 다른 이성, 또 다른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사람은 갈대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알 수 있다는 것, 모른다는 것조차 알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존엄성을 구성한다고 보고 공간, 크기, 지속과 같은 측면에서 보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온 우주를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는 생각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고도 하였다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존재, 위대하면서도 그 비참함을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 이것이 파스칼이 본 인간 상황이다. 불균형, 모순, 불안정, 이와 같은 것들이 인간의 현실적 존재를 규정짓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한에 비해서는 무, 무에 비해서는 전체, 무와 전체 사이의 중간자. 양극을 이해하는 데서 무한히 떨어진 인간에게는 사물의 종국도 그 근원도 다같이 헤아릴 수 없는 비밀 속에 숨겨져 있다. 행복은 오직 우리를 창조하고 보존하시는 하나님께 있다고 파스칼은 단정한다.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고 우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을 겸손하게 섬길 수 있다. “자기의 비참을 모르고 하나임을 아는 것은 오만을 자아낸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불러 일으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중간을 이룬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비참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다다를 수 없으며, 진리의 영상을 느끼면서도 허위밖에는 가지지 못하였다. 완전히 모를 수도 없고 확실히 알 수도 없는 만큼 우리가 어떤 정도의 완전에 있었는데 불행히도 거기서 떨어졌다는 것은 명백하다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가치를 올바로 매길 수 있음을 파스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스스로 높이면 낮춰 버리고 사람이 스스로 낮추면 나는 높여 준다.”고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스피노자 à 신 없이 신 안에 사는 삶 .

데카르트가 관심을 가진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과 세계를 근거 짓는 궁극적 기반으로서의   하나님이었다면 파스칼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역사 속에 동참하며  고난 받는 백성과 함께 하는 약속의 하나님이었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사고방식을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이 네덜란드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이다. 어떤 시간적 관점이나 역사적 관점에서 사고하기 보다는 그야말로 시간과 역사, 어떤 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영원의 관점에서생각해  보려고 했던 철학자이다. 그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은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이다. 사실 이 말은 마르틴 루터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은 인격이 전혀 없는 자연이며,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구원을 기대한 처소는 철학이었다. 그것도 고 중세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철학이  아니라 갈릴레이가 제창한 새로운 과학에 적합한 철학을 통해 구원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① 참된 선은 존재하는가 ②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오직 그것만으로 영혼이 자극될 수 있는가③ 그것을 발견하여 얻은 뒤로는 그것을 통해 영원토록 지속적인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하는 것을 탐구하기로 하고 최고 선을 최종 목표로 한다.

그는 특이하게 신 즉 자연에 대한 인식의 전형을 근대 자연과학에서 찾았다. 스피노자가  문제 삼은 것은 모든 것을 목적론적 또는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이었는데 인간 중심적, 의인론적 신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는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파악될 수도 없다는 명제를 증명한 뒤, 곧장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는 명제를 내세운다. 신 외에는 아무런 실체도 존재하지 않고, 신 외에 존재하는 것은 양태뿐이며, 양태는 실체 없이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는 것이죠. 신은 신 이외, 신의 양태로서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자의 존재 근거인 동시에 인식 근거라고 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스피노자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생성하는 모든 것은 오직 신의 무한한 본성의 법칙에 의해서 생기고 또 신의 본질의 필연성으로부터 생긴다고 결론짓는다. 결국 스피노자의 종교비판의 핵심은 ① 종교현상은 자연 현상처럼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 ② 종교적 권위의 원천인 성경도 다른 책과 동일한 방식으로 읽어야 하며 성경의  목적은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식제공이 아니라 경건한 삶의 실천을 유도하는 데 있다고 본 것 ③ 신앙과 지식은 엄밀히 분리되며 신앙은 오직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 것 등이다. 19세기 이후에 유행한 고등비평, 기독교의 본질을 윤리적 삶의 실천에서 찾은 19세기의 자유주의, 그리고 20세기에 볼트만 등을 통해 실천된 기독교 신앙의 탈신화화 작업, 이 세 가지 사조의 선구자가 바로 스피노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이 모두 근대적 이성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을 보았기 때문에 나왔던 결과인 것이다. 

홉스 à 국가 안에서의 인간의 행복

홉스는 종교뿐만 아니라 도덕도 안전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 최초의 근대 정치철학자이다. 정치 문제를 과학적 합리성에 기초해서 풀어 보려고 했던     철학자이다. 홉스는 갈릴레이의 자연철학(물리학)적 관점을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확대, 해석했는데 그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물체 밖에 없고 이것을 지배하는 원리는 운동이다. ‘국가라는 것도  인공적으로 만든 거대한 물체로서 운동의 원리는 돌이나 비행기에 적용될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도 적용된다고 본 것이다근대 물리학자들은 운동을 두 가지의 힘, 즉 당기는 힘인 인력과 밀어내는 힘인 척력으로  설명한다. 홉스는 이 원리를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는데 적용한다. 존재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을 욕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기피하는 것, 이 두가지 정서 사이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행동이 생긴다는 것인데 욕망과 기피 또는 희망과 두려움, 이 두 가지 정서가 인간을 지배한다고 본 것이다. 사회를 형성하고 국가를 만들고 정치를 하는 인간의 모습을 욕망과 기피, 희망과 두려움으로 본 것은 성경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이성을 고작해야 계산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나에게 유리한 것은 더하고 불리한 것은 빼는 능력, 즉 덧셈과 뺄셈 능력이라는 것인데 이성을 거느리고 이용하는 게 정념 이라는 것이다. 정념은 앞에서 이야기한 욕망과 기피, 희망과 두려움 등을 말하는 것이다. 정념 에는 선천적인 것도 있고 후천적인 것도 있는데 예컨대 식욕이나 배설욕, 수면욕이나 성욕 같은 것이 누구나 타고나는 것이라면 특정 대상에 대한 기호는 환경적 요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일 수 있으며 인간의 정념, 즉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과 희망을 주는 것을 잘 연구해야 비로소 안전한 사회를 구축할 전략을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그는 시민사회 또는 국가조직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인격적, 도덕적 변화나 신분에 걸맞는 행동, 이타적 삶의 태도를 내세우지 않는다. 홉스의 철학 전체를 꿰고 있는 원리는 운동의 원리이다. 그는 운동을 추동하는 힘을 노력또는 욕구라고 불렀다. 자신을 보존하고자 끊임 없이 애쓰는 모습을 일컫는 것인데 운동의 법칙에  종속된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예외 없이 자기 보존 욕구로 살아간다.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은 바로 사물의 현실적 본질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은 가감 없이 홉스의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다. 홉스의 정치 이론은 바로 이러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인간, 철저하게 정념에 의해 지배 받는 인간,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인간, 이 인간으로부터 홉스는 국가라는 인위적인 인격체를 구성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가 합법적 종교로 수용되고 최고 지도자가 기독교인이라면 이 때는 최고 주권자가 국가 뿐 아니라 교회의 일에서도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이프니츠 à 이 세계는 가능한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문두스 옵티무스’, 즉 가능한 세계(하나님이 만들 수있는 세계) 가운데 가장 좋은 세계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 완선,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보았다하나님에게는 보편적인 의지만 있을 뿐 개별적인 의지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전체적으로 무엇을 원할 뿐 어떤 하나만을 개별적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처음부터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선택하고 조정해 두실 뿐 개별적으로 간섭하시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거울처럼 반영되고 있기 때문에 예외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하나님이 개별사건에 직접 개입하시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통상적 의미의 이적이 부인되는데 우리가 이적이라 부르는 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것을 이적이라 부르는 것은 일어난 이유와 과정을 우리의 제한된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이 세계는 우연적이다. 이 세계가 우연적이라고 해서 세계가 우연히, 저절로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세계가 우연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계가 선택되었다는 말인데 만일 이 세계가 그 자체로 필연적이라면 이 세계는 창조주의 뜻과 상관없이 현재 있는 이 모습 이대로 영원 전부터 있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우연적이라는 말은 이 세계가 반드시 있어야 했기 때문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를 만드셨는가? 여기에는  한가지 전제가 있는데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있다면 그 사물이나 사건이 존재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충족이유율이다. 우리처럼 유한한 인간이 그 이유를 분석해서 찾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분석해서 읽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다논리적으로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어떤 세계가 다른 세계보다 더 좋은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 라이프니츠는 다양성과 질서의 결합을 바로 그 기준으로 제안한다. “하나님은 가장 완전한 세계, 다시 말해 그 가설로는 가장 단순하고 그 현상으로는 가장 풍부한 세계를 창조하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내용은 가장 풍부하고 다양하면서 그것을 통일하는 법칙은 가장 단순하고 최소한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가장 좋은 세계라는 것이다. 최소한의 법칙으로 최대한의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가장 좋은 이론이고 최소한의 법과 질서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국가가 최선의 국가이듯이, 다양성은 극대화하면서 그것을 통일하고 있는 법칙은 가장 단순한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는 또 죄와 관련하여 인간의 불순종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면 고통은 없었을 것인데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로 지어져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존 로크 à 의견 차이를 조정할 수 있는 방법  

로크는 다원주의적 상황을 꿰뚫어 보고 그것에 철학적 반응을 보인 최초의 근대 철학자  이다. 당시는 정치체제나 종교 다원화의 시대였고 단순한 다원화가 아니라 피를 흘리며 싸웠다.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그는 유럽에 최종 조정자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의 관심은 도덕과 종교의 문제였는데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반목, 개신교 안에 있는 종교적 열광주의자들의 움직임, 로크는 이러한 것들이 지속적인 사회적 불안의 요인이 된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불안 요소를 지식 이론으로 극복해 보려는 것이 그의 저서 도덕과 계시종교의 원리의 실천적 목적이었다. 존 로크는 분명히 경험론자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성을 불신한 것은 아니다. 인간 정념이 빚어 내는 구체적인 삶과 정치 현실과 관련해서 이성주의자 스피노자가 누구보다 경험을 중시한 것처럼, 영국 경험론의 아버지로 분류되는 로크는 엄밀한 경험적 지식에 매이지 않고 도덕과 종교와 관련해서 이성의 역할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그는 지식이란 관념들의 결합과 일치 또는 불일치와 모순에 대한 지각이며 지식은 오직  이것만으로 성립한다고 하였다. 또한 확실성이 보장될 수 있는 지식은 오직 직관과 증명을   통한 지식이고 그 외 다른 것은 단순한 의견이나 신앙일 뿐 지식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지식의 분야에서는 다원주의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하였다. 또 그는 어떤 명제에 대한 동의는 그것이 계시임을 입증해주는 증거를 넘어서지 않을 때 합리적일 수 있다고 한다. 신앙조차도 그것이 보여주는 증거를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말이다이성이 최종 재판관이며 우리의 안내자여야 한다는 로크의 주장은 종교와 정치 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계몽 철학자로서 제시한 분쟁 해결의 방안이었다. 이성을 내세운다고 해서 이성이 곧 모든 믿음의 원천이어야 한다거나 기초라는 말은 아니다. 믿음이 근거를 둔 것  혹은 믿음이 비롯된 것은 이성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믿음과 관련된 문제는 이성을 안내자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칸트와 마찬가지로 로크도 책에 의존하는 것을 대단히 경계하였다. 그는 책이 지식의 수단임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아무런 검증 없이 저자가 그렇게 말했다는 이유로 책의 내용을 믿는 다면 독자의 믿음은 저자의 앎에 비해 언제나 열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보는 것이므로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기까지, 우리 자신의 지성으로 파악하기까지는 우리는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일도 실제로 생각해 봄으로써 가능하다고 로크는 강조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실행해 봄으로써 참된 것을 알고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교육 및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버클리 à 상식을 회복하기 위한 철학

버클리는 성공회 신부였는데 그는 선교사 훈련을 위해 버뮤다에 신학교를 설립할 계획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아일랜드에서 5년동안 체류하기도 했고 생애의 후반에는 아일랜드 클로인의 주교로서 교인들의 영적 복지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신체적 복지를 위해 애썼다. 대학에  있있을 때 그는 철학이 아니라 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저작들을 보면그가 끝까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서 철학적 문제를 다루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철학을 업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철학은 그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버클리는 근대 자연과학을 뒷받침하고 있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발견했는데 사물 가운데 실재하는 것은 제 1성질에 해당하는 것(크기, 모양, 공간 점유, 운동    가능성)뿐이고 맛, 소리, 냄새 등은 인식 주체의 주관적인 느낌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주관을 통해 채색되고 굴절된 관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실재하는 그 배후의 세계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 채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제 2성질과 제 1성질을 지닌 사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밖에서 주어진 영향에 따라 정지해 있거나 운동할 것인데 이것이 옳다면 우리는 전혀 의식할 수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의식되지 않는 실체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고 상정해야 한다.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얼핏 보아 비상식적인 이 주장은, 모든 사물은 그것을 지각하는 정신과의 관련성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지탱하시고 세상 어느 곳에나 현존하신다는 믿음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이를 ‘비물질론’ 또는 ‘비유물론’이라고 한다. ‘자존적인 물질’ 다시 말해  다른 정신적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물질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버클리는 자연이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존재임을 거부한다. 스스로 그러한 존재 스스로 자기 자신인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스스로 계신 분이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다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존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그런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는 자연, 인간의 지식 그리고 하나님 모두 어떤 의미에서 인격적임을 주장하고자 했다. 근대 과학은 자연에 내재된 목적을 제거해 버렸는데 인간은 소나 개 혹은 돼지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종속된 존재가 되었고 인간적 요소, 가치관, 세계관, 욕망과 의도는 배제되고, 지식은 사물의 객관적인 반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고 해도 자연 법칙에 모든 것을 내 맡긴 채 한가하게 쉬고 있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버클리는 실체라 할 수 있는 것은 인격을 가진 인간과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밖에 없고 이 실체를 떠나선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à 회의론과 일상적 삶

중세철학은 믿음에서 시작하고 근대철학은 의심에서 시작한다라는 말이 있다. 중세철학의   문을 열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말했고 영국 켄터베리의 주교였던  안셀무스도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신앙은 지성을 추구한다고 했다. 믿음은 종교적 지식뿐만 아니라 사람과 관련된 지식이나 사물에 대한 지식에도 전제되어 있다는 생각이 여기에 깔려 있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은 발생의 조건’, ‘지각의 조건’, ‘확인의 조건’, ‘이해의 조건이 함께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어떤 사건을 교통사고로 이야기할 수 있다. 지식을 구성하고 있는 이 기능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고, 또한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데이비드 흄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의심을 품으면서 데카르트처럼 진리를 찾는 확실한 방법으로 의심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경험론의 근본 주장을  철저히 밀고 갈 때 회의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흄은 인간에 대한 과학을 세워 보고자 한 철학자였다. 뉴턴이 이른바 자연철학에서 거둔  성과를 도덕철학분야, 즉 인간에 관한 과학에서 거두고 싶어했다. 인간을 연구하되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태어난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고자 했는데 이 모든 것은 철학적 인간학에서  그 기초를 얻어야 하고, 철학적 인간학은 경험을 통해 얻은 자료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흄의 생각이었다. 그는 인간의 지식 체계 전체를 새롭게 조정하려고 했으며 인간 본성을 올바  르게 이해하는 것이 지식의 문제, 도덕의 문제, 정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로 본 것이다. 흄은 경험과 동떨어진, 어떤 선험적인 것은 배제한다. 이성으로 이 관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인데 경험만이 이 관계를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반복된 경험을 토대로 현재와 미래에 동일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추측은 잘못될 수 있다.  그는 신학과 종교 전통에 근거한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이것을 대치할 수 있는 일종의 비판적 형이상학을 모색했다. 사물과 자아와 신의 존재에 대해서 오직 이성으로부터 그토록  확실하게 말하는 것을 막아 보자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그는 회의론자로 나타난다. 최종적인 판단을 주저하는 사람이라는 것인데 이성적 추론으로 우리의 지식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회의를 표시한 것이다. 흄은 허구에는 의지가 개입하지만 믿음에는 의지가 개입할 틈이 없다고 하면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믿음, 예컨대 이 길을 따라가면 지하철을 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그렇게 믿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복된 경험을 통해서 믿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느낌은 지성이나 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생존해야하는 인간의 본능, 인간의 정념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흄의 생각이다. 그는 칸트가 생각한 것처럼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일하게 라고 부를 수 있는 인격적 주체를 흄은 수용하지 않는다.

칸트 à 이성이 던지는 세 질문

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칸트는 항상 스스로 생각하라는 준칙이 계몽이라고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이성 자체가 칸트에게는 진리의 최고이자 최후의 시금석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이성 외에는 어떤 것도, 예컨대 국가 권력이나 종교적 전통 또는 신비적 체험이라 해도 진리의 최종 판단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비판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럼에 불구하고 칸트는 이성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와 인간의 도덕적 결함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악을 향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것이 근본악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본다면, 악에 집착하는 성향이 인간에게 내재한다는 것은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다무엇이 앎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무엇이고, 그 대상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만일 우리에게 앎이 가능하다면 그 앎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로 다시 정리해볼 수 있다. 그에게 문제가 된 것은 지식 가운데서도 형이상학과 관련된 것인데 그의 전략은, 보편 타당한 지식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해서 그 지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 무엇인가를 탐사하는 것인데 자신이 이성비판을 통해서 인간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임을 보여 주었다고 주장한다. 흄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인간을 단순히 세계 안에 있는 존재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념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표상과 개념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통해 세계를 빚어 가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세계를 만들고 조직하는 원리가 인간주체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 조직원리는 한편으로는 시간과 공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 지성의 능동적 행위에 바탕을 둔 범주입니다이렇게 사물과 사건을 서술하는 기본적인 사고틀을 범주라고 부르는데 이 범주를 사용해서 사물이나 사건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지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지성의 통제 아래 감각을 통해 들어온 것들을 이어주는 능력을 상상력이라 부른다.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사유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이 감각을 통해서 주어져야 하고 감각을 통해 주어진 것은 개념을 통해 사유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은 감각적 경험과 개념적 사고의 종합을 통해서 비로소 생성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철학사에서 흔히 칸트의 지식 이론을 일컬어 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여기서 우리는 지식과 관련해서 두 가지 서로 관련된 제한과 배제를 볼 수 있는데 먼저 우리의 사유가 객관적인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영역은 오직 감각적 경험의 영역에 제한되고 지식의 타당성 영역을 현상계에 제한할 때 앞에서 말한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지식의 영역에서 제한한다.

 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말은 내가 인간답게 살자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안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선과 악의 기준에서 보자면 나의 생존에 기여하는 것은 선이고 생존을 해치는 것은 악이라고 보는 입장은 홉스나 스피노자에게서 볼 수 있는데 일종의 사회계약으로 본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위를 선하거나 악하게 하는 것은 도덕법칙이다. 그는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 명령은 가언 명령이라 부르고 조건 없이 절대적인 명령을 정언 명령이라고 한다. 진정으로 도덕적 명령, 다시 말해 도덕법칙이 될 수 있는 것은 정언 명령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와 관련된 실천은 오직 정언 명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으로서 중요한 것은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정언 명령이다. 흔히 보편화의 원칙이라 부르는 것인데 두번째의 원칙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는 것입니다. ‘인격성의 원칙또는 목적성의 원칙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다.   나는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는가?

그의 세 번째 물음은 실천적인 동시에 이론적인 물음이다. 그가 내리는 결론은 만일 내가  도덕적 용기를 가지고 산다면 나는 그 덕에 상응하는 행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적으로 산다고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다. 다시 말해 덕에 상응하는 행복이 자연 질서 속에  균등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인데 칸트는 이에 대해 실제로 행복이 이 땅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세에라도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거룩한 존재는 오직 순수 이성에 의해 이지가 움직이는 존재를 말한다. ‘은 바로 이 도덕적 갈등 상황과 관련되는데 덕은 감성의 저항에 대항해서 그것을 억누를 수 있는 도덕적 힘 또는 용기를 뜻한다. ‘불멸하는 영혼은 이 도덕적 완전성을 향해서 무한한 진보를 수행할   자이다. 영혼의 불멸성은,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나아가야 할 인간의 도덕적 소명으로부터 귀결되는 요청입니다. 무한한 도덕적 진보를 이룰 도덕 주체의 영혼이 죽지 않고 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때, 그 때 최고의 선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덕의 실현과 관련해서 영혼의 불멸성이 요청되듯이 행복과 관련해서는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따라서 선과 악에 비례해서 각각 보상할 뿐 아니라 세계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고 관리하는 창조주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돌아가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치할 뿐 아니라 역사의 사건과 우연적인 인간사 전체를 알고 있고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전능자의 존재를 가정할 때 비로소 도덕적 세계라는 이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궁극적으로 선하게 통치하는 신의 존재와 현세를 이어 계속되는 내세의 삶은 만일 우리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산다면 반드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된다.

< 리뷰 > 

장점  

어려운 철학이론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최대한 쉬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게다가 한글이 원본이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근대철학을 논함으로써 크리스찬들이 철학을 어떻게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철학자들을 신앙과 결부시켜서 그들의 철학을 검증하고 있으므로 철학수업에 우선 읽어야 할 책으로 생각된다. 일반철학의 가장 어려운 부분의 하나인 칸트철학 이론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함에 따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칸트의 철학을 3가지 물음 즉,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는가로 구분하고 각기 정통기독교 신앙과 비교하면서  풀어놓아서 크리스천으로서 칸트철학의 기본을 쉽게 알 수 있도록 기술되었다. 제목 그대로 이야기속에 철학이론을 녹여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거부감을 줄여준다. 더 읽고 생각하기를 매장 끝에 배치함으로써 본격적인 철학이론을 더 공부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다음 단계의 서적소개를 하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할만하다.

단점

저자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자신이 직접 원전을 읽지 않은 철학자는 다루지 않다 보니 서문에서 얘기한 쉽게 쓰면서도 서양 근세 철학사의 깊이와 넓이를 체험할 수 있게쓰겠다고 했으나 넓이 부분이 부족하게 되었다칼럼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철학개론과 같이 철학의 큰 흐름을 잡기에는 뭔가가 좀부족한 책이다. 철학이론을 쉽게 풀어 쓴 것은 좋은데 그러다 보니 철학용어 사용 등을 지나치게 자제함으로써 책을 다 읽어도 철학용어를 사용한 논리적용이나 대화가 쉽지 않다. 복잡한 도표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필요한 사람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사람이 참고할 수 있게 철학용어나 철학사조를 도표화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 해놓는 서비스가 아쉽다.

적용

1. 개인에게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 참여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고 있다.  성경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기 위해서 죄와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 철학은 우리에게 삶이 무엇인가. 인생은, 죽음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있게 성찰해 보게 하는 도구이다. 이것을 통해서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고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재검토해 볼 수 있다. 또한 어떠한 하나의 철학에 사상적인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철학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2. 교회에서

철학공부는 하면 할수록 필요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철학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종교를 더 잘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대부분의 기독교 이론은 철학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교회내에서 지도자로서 위치에 있을 때 신도들의 종교관을 확립해주기 위해서도 철학의 기본을 잘 알고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신학을 탄탄하게 바쳐줄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이러한 교회내에서의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철학은 종교와 함께 사물의 궁극적 실체를 파악하고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노력이므로 교회공동체내에서도  기독교적 철학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좋다.

3. 사회에서

물질만능주의의 현실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이상학의  양대 분야, 즉 종교와 함께 철학적 역량을 기르는 것은 우리의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이다. 종교와 철학은 바로 그 출발점과 목표에서 만물의 근원의 정체와 원리를 밝힘으로써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모색해 보려는 공통적 과제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이후 400여년간 때를 기다리시면서 헬레니즘, 즉 헬라어가 준비되는 시기를 기다리셨듯이 헬레니즘 철학이 그 안에서 꽃을 피운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그리스도교인 들로 하여금 성서 자체와 또한 이의 다른 지식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추구 하도록 했던 철학적인 태도가 그들에게 없었다면 역시 신학이라는 학문은 성립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비신도나 타종교 신봉자에게 전도를 할 때 성경 말씀을 가지고 바로 접근할 때 거부감을 줄 소지가 많다. 이 때 누구나 학교에서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가벼운 철학적 주제를 가지고 접근할 때 훨씬 부드럽게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도 기독교리 형성과정에서의 철학의 역할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이해력을 길러나가야 하며 교리의 바탕이 되는 철학적 사고를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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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구약성서 신학 -- 류행열

신학서적 리뷰 2020. 4. 14. 06:19 Posted by forest38

 

제 목 : 신학이란 무엇인가? 호남신학대학교 편

(구약성서 신학 류행열 교수)

1. 2. 구약성서 신학내용요약

[ 서론 ]

하나님의 이름

명칭

함의()

비고

셈족어의 일반적인 호칭인 엘과 연관을 가지는 히브리어적으로 음역된 명칭 거룩한 분

 

엘로힘

 

엘로아

 

샷다이

전능자’, ‘산의 유일자

 

바알

지배권과 관련 있는 명칭 멜렉은 왕권과 관련

 

아도나이

 

멜렉

 

야훼

구약성서에 6,700회 이상 나오며 셈어 계통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 명칭으로 오직 이스라엘만이 사용

 

야훼 쩌바옷

만군의 야훼’, 전쟁 때의언약궤와 관련, 예언서에 자주 등장

 

<조상들과의 언약>창세기 12장 이후의 이른바 족장사로 분류되는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주어지는 언약이다. 이 언약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을 민족되게 하는 땅을 약속한 것이다. 또한 중다한 후손으로 커다란 민족이 되리라는 약속(12:1-3)이다.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 출애굽은 구약성서의 구원사 정점에 위치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스라엘 민족을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광야에서도 계속된다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의 훈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살게 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 하셨으나 이들은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에 부응하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선택과 계약> 제사장 나라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구별된 존재로 살아야 한다. 그들은 거룩과 공의로써 치장을 하여야 하며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존재이다.

[ 하나님이 베푸신 일 ]

하나님께서는 땅을 주셨는데 땅의 원 소유주는 하나님으로서 그분의 허락이 있으셨기에 이스라엘 땅이라는 논리다. 모든 것은 야훼의 결정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초기에는 풍요와 생산의 축복을 토속신인 바알의 소관으로 알아 바알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점차 풍요의 축복도 하나님의 베푸심으로 그 분께 순종할 때 이루어짐을 알게 된다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현존을 의미한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두 제사용구인 회막과 법궤와 결부된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의 이름이 있는 곳에 와서 그 앞에서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예물을 가져오며, 그 앞에서 식사도 한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전쟁을 수행하시는데 전쟁의 승리는 야훼의 작용으로 모든 영광은 그분께 돌려져야 한다. 따라서 전승은 야훼의 선물이지 인간적인 승리의 모습으로 비쳐지지 않는다. 여기에도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패배라는 결과도 종종 보여줌으로써 야훼의 은총을 돋보이게 해 준다또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선지자나 예언자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파송하시는데 그로써 백성을 위한 은혜를 충족시킨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수없는 하나님의 종들이 등장해서 말씀에 합당한 백성으로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구분

역할

비고

모세

이스라엘을 해방으로 이끔

 

여호수아

군대지휘관이자 토지의 분배관이며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게 하는 자상한 충고자. 여호수아 이후 각 지파 체제로 비교적 자유로운 연맹체제를 유지

 

사사

사사기가 보여주는 초기 이스라엘의 혼란스러운 모습은 파도가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기복의 연속이었다. 활동영역은 전 이스라엘에 걸치지 않고 국지적이며 그들의 인간적 용맹성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구로서 힘을 발휘하며 출현도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다. 백성을 회개하게 하는 역할

 

사무엘

왕을 세우는 역할

 

사울

군대 지휘관, 거만하고 편집증적이어서 야훼의 영이 떠남

 

다윗

그 등장이 지극히 초라한 출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야훼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야훼의 영에 감동되어 중요한 역할을 다한다. 전쟁에서 탁월한 전과로 인정을 받고 백성들의 환호와 함께 왕으로 추대

 

솔로몬

영웅적인 요소도 없고 오히려 비정상적인 출생으로 궁정의 비밀모의와 함께 왕이 된다. 인간적인 범죄와 부조리 가운데서도 야훼의 결정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부분이다. 남북 분열의 위기를 초래. 북이스라엘은 200년을 지속하다가 멸망하고 유대는 400년을 지속하다가 멸망함

 

제사장

야훼의 은사에 상응하여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하나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율법을 교육하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도록 한다. 또한 신성한 제비를 뽑고 제사를 집행한다. 예배시에는 백성을 축복하는 특권이 주어진다

 

예언자

개별적인 소명으로 야훼에 의해 선택. 초기의 예언자는 일정한 틀 없이 황홀경 등 역동적인 현상에 치중. 후기로 가면서 예언자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사신 파송을 강조. 사신의 위임을 받을 때 말씀은 예언자의 전유물로 말씀의 중단은 곧 사신직의 중단 의미

 

지혜자

국가의 정치적 고문. 지혜는 폭넓은 개념에 속하나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에 해당. 지혜는 철저히 생활과 그 실천적인 면을 지향. 지혜는 그 유통이 가히 국제적 교류를 하고 인간 삶의 편의로운 처신과 관련. 지혜는 구약의 실용주의. 도덕, 윤리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당혹하게 하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은 지혜에 관해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귀결

 

각 시대별 지도자들의 역할

[ 하나님의 계명 ]

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너에게 두지 말라”(20:3) 이는 자기 백성에 대한 야훼의 독점적인 자기 권리 주장이다.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이며 동시에 그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오직 한 분이신 야훼께 복종하는 것은 구약신앙의 근본이다2계명은 우상 금지의 계명은 출애굽의 역사적 행위에서 역사를 초월하신 분의 형상을 묘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분은 언제나 형상 묘사를 초월해 존재하시는 분이다. 야훼는 결코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분도 아니라는 것이다3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다어떠한 이유로도 야훼의 이름이 남용될 수는 없다. 이러한 것은 신명기 18:10~12과 레위기 24:10~23, 레위기 19:12의 거짓맹세의 금지, 그리고 에스겔 36:20의 야훼의 이름을 훼방하는 문제에 대해 다루는 것에서도 맥을 같이한다. 이 규정은 후대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고 마침내 이름을 말하는 것도 꺼리다가 발음법마저 잊어버리게 되었다.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안식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안식일은 매 7일마다 야훼를 위하여 쉼으로써 야훼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했다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이 계명은 십계명 안에서 긍정문 형태로 된 계명가운데 하나로 약속이 수반되어 있다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재산이다. 이 계명은 인간 생명의 절대 신성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자존하는 생명의 소유자가 아니라 야훼가 준 생명을 야훼가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야훼의 거룩한 전쟁에서 많은 생명이 죽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음은 그런 이유이다. 하나님의 뜻은 가장 값지다고 하는 인간의 생명보다도 우위에 있다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이 계명은 부부 관계를 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남녀 관계는 책임적 관계로서 성적인 문란함을 보여주는 가나안의 풍속과 질적으로 다르다. 혼인의 신성함을 위협하는 행위를 금한다. 제사장의 영역세서도 간음을 부정의 첫 범주로 간주한다(18:6, 22:11) 8, 10계명은 이웃의 재산에 대한 태도이다. 타인의 재산에 대한 보호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백성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분배하려는 데 있다. 하나님은 이에 역행하는 어떤 행위도 분쇄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레위기 25장의 희년제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이 계명은 피고를 해할 목적으로 재판장 앞에서 거짓 증언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문맥으로 보아 직접적인 관심은 진실과 거짓,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파괴하는 것을 경계한다.

[ 인간의 즐거운 삶 ]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란 진실과 질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야훼는 그 의로써 구원 행위를 하셨다. 사람의 도 계명의 준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구약적인 란 계명에 맞춘 바른 행동을 말한다. 시편 24:4에서 에 관한 전반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니 아니하는 자로다.” 그러한 사람은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는 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예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긴다.”고 한다. ,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의를 말한다. 믿음은 약한 존재가 강한 존재에 확약을 얻고, 그에 결합하고 고착하는 것이다. 야훼의 약속을 굳게 믿음으로 굳게 서는 즉 보호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믿음은 그 안에 자체적으로 회개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는 것이다또한 찬양, 감사,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온전하게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가장 아름답고 좋은 삶은 찬양이다. 시편 기자는 찬양은 산 자만 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한다. 시편은 찬양의 책이며 공동체의 예배와 긴밀한 관련을 가지는 책이다. 시편은 찬양을 주로 하는 책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 고난에 처한 의로운 인간의 탄식과 기도, 고난을 이기게 하신 분에 대한 찬양과 감사 등 온갖 신앙의 감정들의 도가니라고 할 수 있다. 탄식, 찬양, 고백, 기도, 감사, 지혜, 교훈 등의 많은 요소가 혼합된 신앙인의 응답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진, 거룩한 영성의 책이다. 구약은 또한 신앙인의 삶과 지혜의 말씀의 집대성이다. 구약의 지혜문서는 가장 인간적인 책이다. 지혜란 야훼께서 인간 삶의 풍요로움을 위해 주신 것이다. 모든 지혜는 야훼께 귀속되고 근원적으로 그에게서 유래된다. 지혜는 많은 문제를 슬기로 풀어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알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 어떻게 악인이 세상세서 잘 되어도 하나님은 모르는 체 지나가시는지와 같은 불가해한 것들이 있지만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못 박는다전도자는 허무를 말한다. 체념으로 끝나지 않고 시간 속에 주어진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말한다. 주어진 삶을 최대한 즐거워하는 것이 헛된 세상에서의 삶의 방법이라면 그 한계는 하나님 안에서 즐기는 삶이라고 한다욥기는 고통을 당하는 인간의 실존 문제와 고통을 받는 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고난자가 취해야 할 적절한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진, 겸손하고도 경건스런 침묵이다. 이러한 결론은 고통이란 하나님의 신비하고도 측량할 수 없는, 그러나 의미 있는 행동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통찰과 하나님과의 친교(만남) 이외의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는 확신 위에 기초하고 있다. 욥은 참으로 살아 있는 순교자이며 엄청난 고난의 터널을 건너 고난의 한복판에서 승리해 우뚝 서 있는 영웅이라 할 수 있다.

[ 예언자들의 선포 ]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빗나감에서 정치, 사회적 위기가 초래되고 연민의 하나님은 백성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도모한다. 예언자들의 출현이 이를 대변하지만, 실로 이전의 역사 속에서도 갈등과 뒤틀림으로 인한 위기는 적지 않았다. 역사의 초창기에서 보여준 위기는 다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이 펼쳐졌다고 보며 여기서는 대거 출현한 당대의 예언자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본다이 시기의 문서 예언을 보면 B.C 8세기의 대표적인 네 명의 예언자는 아모스와 호세아, 이사야와 미가이다.

이름

출신 및 시대

활동지역

활동내용

비고

아모스

유대 드고아의 목자출신

북왕국과 남왕국

당대의 사회적 생태, 당대인의 역사 이해, 제사 이해 및 일반적인 삶의 방식 등에 대해 강한 거부. 그의 예언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제사회까지 영향을 미침

 

호세아

이스라엘을 창녀가 된 아내로 비유

북왕국

자신의 결혼을 통해서 유비를 내세워 말씀을 전하는 특이한 점이 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계약 관계로 보지 않고 가족관계와 결혼의 관계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을 한다. 하나님을 잊는 시점이 가난에서 풍요로 넘어가는 시점이라고 지적. 인간의 회개가 곧 하나님의 자비를 작동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으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고 돌아서게 한다는 것

 

이사야

호세아와 동시대인으로 유대출신

예루살렘에서 40여년간 활동

거룩하신 하나님이 백성에게 공의를 요구하신다고 말하고 하나님은 거룩한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했다고 하면서 그러나 야훼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므로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은 후에는 남은 자들의 구원이 있을것이라고 주장

 

미가

모라셋 출신으로 이사야와 동시대

사마리아 함락전에 예언을 시작

불의한 방법으로 땅을 탐하는 자들을 비난. 도시를 규탄하고, 백성들의 착취와 돈의 노예가 된 예언자들, 불의하고 돈만 아는 예루살렘의 통치자, 제사장, 예언자들에 대하여 선포. 특히 68절의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은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의 메시지를 총괄하는 포괄적인 선언이 되고 있다.

 

또한 포로기의 예언자들로는 스바냐, 나훔, 하박국, 예레미야, 에스겔 등이 있다.

이름

출신 및 시대

활동지역

활동내용

비고

스바냐

 

예루살렘

야훼의 날에 대해 예루살렘에 나타날 구체적인 일들과 거민에 관하여 말한다. 스바냐는 인접국들 뿐만 아니라 구스, 니느웨 등 강대국에게도 심판의 말을 선포

 

나훔

 

니느웨

의로우신 하나님이 인간의 악행을 벌주심. 그것은 니느웨가 야훼의 뜻을 배반하는 모든 적대 세력을 통칭한다고 보는 것임. 나훔과 요나서는 모두 니느웨를 초점으로 하고 있으나 인간의 자만이 지나치면 나훔서처럼 니느웨가 멸망하고 그 백성이 회개하면 요나서처럼 구원 받는다고 주장

 

하박국

바빌론의 영향력이 남왕국의 삶을 장악하고 있을 당시

남왕국

어찌하여 요시야는 개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또다른 굴욕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선한 백성이 악한 민족에게 계속 억압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투성이의 상황전개에 하박국은 어찌할 줄을 모른다.

 

예레미야

요시아 왕의 통치시기

 

북방의 적이 침략하여 유대와 예루살렘을 침략한다고 예언. 이스라엘은 헛것을 섬기고 양심이 부패하고 사회적 범죄는 늘고 산당에서는 바알이 예배된다고 지적. 북방의 적이 쳐들어오는 환상을 보고 몸을 치며 마음속 깊이 애통해 한다. 예언자의 고통 속에서 야훼의 고통이 반영된다. 예레미야의 고통은 그의 선포의 일부가 되었다

 

에스겔

BC 597년 여호야긴 왕과 함께 추방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기간에 사역

전체적으로 포로 전 문서 예언자들의 심판 선포를 마무리하는 입장에서 죽음의 재난을 극복하고 새 삶을 맞이하도록 권고한다. 에스겔의 중심되는 예언은 상징 행위로 나타나며 이스라엘 집의 중추인 예루살렘이 곧 함락될 것이라고 예언. 에스겔은 한 주제와 표상을 끈질기고 자세히 예언

 

포로기 이후의 예언을 보면 포로기 이후의 시대는 암흑기로 이 시대의 예언자인 제 2 이사야는 절망의 시대를 달랠 복음전도자의 모습을 보인다. 이사야 40:3~5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2 이사야의 선포는 그대로 실현된다. 새 출애굽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즉 야훼가 해방의 도구로서 일으키신 자에 관한 언급에서 구체화됨마지막으로 묵시문학이 있는데 구약의 묵시부분은 에스겔 38장 이하, 요엘서의 일부분, 이사야 24~27, 스가랴 12~14, 그리고 다니엘서 등이 이에 해당. 다니엘서는 새것이 세계에 침입해 올 것을 말한다. 후기 묵시문학은 세계의 마지막 위기에 대한 기대와 하늘의 하나님이 영원한 한 왕국을 건설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나라들을 맡기도록 하나님의 권세가 작용할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견디기 힘든 상황 아래일지라도 배교하지 않고 오로지 야훼 한분만을 공경하며 그분의 계명에 충성하며 견딜 것을 요구.

3. 리뷰

우리는 하나님의 정식 명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써놓은대로 읽지 않고 다른 말로 읽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 다윗 왕과 언약을 세우신.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서에서 후일에 세우실 새 언약에 대해 말씀하신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널리 가르치시는 사역의 주요 주제가 하나님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결국 우리는 언약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실체를 다루며, 성경이라는 성당에 들어가는 주출입구의 두 개의 문임을 알게 되었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출애굽으로 보여주신다. 하나님 백성을 선택하여 인류전체를 구속하시려는 원대한 계획을 시작하신 것이다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의 훈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살게 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 하셨으나 이들은 선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부응하지 못한다그들은 거룩과 공의로 옷을 입고 하나님 백성의 역할(제사장)을 수행하여야 하였지만 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썪은 베띠의 비유로 예레미야는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의 심판을 경고한다하나님께서는 우선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살 수 있는 땅을 주셨는데 약속된 땅을 주시고 그 땅의 모든 것을 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이를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이 잉태되었던 것이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상당부분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을 비롯한 토속신을 섬기다가 징계를 당하는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멸하라는 명령을 거역한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범죄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구약의 지혜서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고대 근동에서는 지혜문학이 존재했다. , 보편적인 윤리나 지혜가 존재했다는 얘기가 된다. 구약의 지혜서가 고대 근동의 지혜를 수집했음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면서도 구약의 저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범위내에서 지혜를 수용하고 구약에 포함시켰다여기서 우리는 왜 정경에 지혜문학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의 지혜문학은 인류의 보편적인 윤리와 지혜를 포함함으로써 이 내용을 정경에 포함시킴으로써 기독교 이론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거나 전혀 이질적인 논리라고 생각하는 이방인을 설득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인 것이다선지자, 예언자들의 경고 및 예언을 보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약속, 특히 메시아의 출현에 대해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신학에서도 최근의 추세는 구약신학을 신약신학, 더 나아가서 성서해석사와 조직신학까지 관련시켜서 다룰 것을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신학의 각 분야가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양하고 신구약의 유기적인 해석을 할 것에 대한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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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신학 하동안 교수)

1. 저자의 성서학자로서의 지위

저자는 호남 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고려대학교, 장신대 신대원,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저서로서 교회란 무엇인가?(1999,공저), 구원이란 무엇인가?(2002,공저)등이 있다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교수로서 다락방+개혁교단 회원자격 철회운동, 최삼경 목사 이단결의 취소 촉구 등 활동을 하였음

2. 2. 신약성서 신학내용분석

신약성서 신학은 근세의 태동과 함께 시작되고 발전되어 왔음. 근세는 인류가 나아갈 길을 모르고 역사의 진행방향을 알지 못하는 위기의 시대에 교회는 성서의 원어 연구와 성서의 본래의 뜻을 교리에서 해방되어 새롭게 알아보고 노력하는 종교개혁운동으로 나타났다. 신약성서 신학은 늘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맞추어 신약성서를 새롭게 해석하고 시대문제의 해결과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도록 도전을 받는 것이다신약성서 신학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역사비평학의 혹독한 연단을 받고, 다시금 변증법적 신학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신약성서신학은 신앙의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궁극적임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온전히 찾고자 노력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 하나님의 나라 ]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가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옳게 이해하는 것은 복음서를 바르게 알 수 있는 길이 된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신약성서의 주요 사상은 그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서 그 기원과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며, 그에 따라 올바른 해석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성격

먼저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성격을 살펴 보면 세계 역사를 볼 때 역사를 이루는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인 것을 지금까지의 역사 진행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민족이 역사의 진행속에서 제 기능을 완수하기 위하여 힘과 지혜를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이 국가라 말할 수 있다. 역사 진행에서 국가의 의미는 큰 것이다. 국가를 옳게 이해할 때 역사의 뜻과 의미를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국가의 조직으로 지상의 국가 조직과 대비되나, 지상의 국가 조직이 시사하는 바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실마리를 주는 것이다계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어진 계약을 위반하고 범죄의 길로 나아갈 때, 그러한 국가가 멸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며 역사의 순리라고 말할 수 있다. 멸망의 위기에 선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로 정치적인 혁명을 피하여 예언자운동으로 나아간다예언자들의 활동가운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암시와 전조를 읽을 수 있다.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알 수 있는데 아모스는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5:4~15 )라고 예언하였다. 아모스 선지자는 국가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의로움임을 예언하고 있다. 호세아의 예언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어떠한가? “에브라임아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히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처럼 나오느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4-6)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분열과 멸망, 이방 민족의 압제를 통하여 그들의 영적인 세계가 넓어지고 깊게 되어 이스라엘의 지방색을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민족의 땅에도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이방민족의 압제와 질고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적인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깊은 절망 속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의 죄와 악의 무서움을 통감하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되는데 하늘의 세계와 영의 세계의 질서 정연함을 깨달아 지상의 혼돈과 죄억을 하늘의 세계와 연결지어 해결하려는 사상이 움트게 된다. 여기서 이러한 문제를 깨닫고 세상의 악함을 깨닫게 되는 이원론적인 사고가 생겨나는 것이다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인 성격이 강하게 스며들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옛 질서를 변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새 질서가 초월적인 언어로 묘사되며 포로 후기의 묵시문학 속에서는 먼저 현세적이며 지상적인 왕국이 존재하고 후에 새롭게 변화된 영원한 질서가 뒤따른다. 고난과 억압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유대의 포로 후기 묵시문학은 이러한 영과 육, 하늘과 땅,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대별시키는 사상이 강조됙고 여기서 메시야는 수난의 종으로 묘사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53:4-5)

하나님 나라의 현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활동 가운데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 역사하는 힘이 강하고 종말론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고 예수는 벙어리를 고치신 후에 말씀하고 계신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고 기록하며 마태는 하나님 나라의 힘의 관련성을 설명구약성서를 통해서 보여 준 하나님의 모습은 만군의 여호와이거나 만군의 하나님과 같이 권위와 위엄으로 가득찬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제사가 의식적이요, 형식에 치우친 면이 많다. 예수가 자기 의식이 탄생하는 성장기인 12세에 예루살렘의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였을 때 많은 짐승이 도살되어 제단에 바쳐지는 희생제서를 통해서는 피비린내 나는 인간의 잔혹함을 느꼈을 뿐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랍비들과 토론해서 선생님과 부모님을 놀라게 했다.(2:41-51)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인류와 가장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 아버지가 되시고자 하신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으로 인간의 영적인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모시게 된 계기가 되었다하나님의 나라는 새 이스라엘을 암시. 이스라엘을 통한 국가공동체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 진실된 통치자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메시야 모습이며 그를 통한 메시야의 온전한 지상 구현으로 실현된 것이다. 거기서 탄생된 새로운 이스라엘 모습은 교회를 통해서 구현된 것으로 암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민족을 모태로 이루어지나 그것은 국가이든, 교회이든 새로운 공동체인 것이 암시된다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삶의 윤리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데, 구약의 율법이 규율적이요, 제약적인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윤리는 진리요, 생명으로서 기쁨과 자발적인 의욕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는 슈바이처의 말과 같이, 중간 시대의 윤리로 주님의 오심과 그의 재림 사이를 연결하는 임시적인 것으로서, 그 성격은 철저한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완전한 윤리적 수준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하나님 나라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곳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된다는 말은 진리이다. 예수의 활동, 즉 하나님의 종 메시야로서의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진실된 뜻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아버지시라면, 그의 왕국의 권세를 이어 나갈 분이 아들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이 된다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를 수반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실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태니시니”(16:21). 이는 왜냐하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10:45) 때문이다. 그리스도이 진실된 면은 십자가에서 나타나며, 그의 참된 영광과 부활의 의미도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예수의 공생애 첫 말씀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였다. 이 말씀 중 2개의 동사, 때가 찼다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은 모두 현재완료 동사를 쓰고 있다. 현재완료형 동사는 시제상 지금 바로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하나님 나라는 신구약에서 달리 표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찬가지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언약과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 및 승천, 그리고 예수 재림으로 실현되는 새창조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해석

하나님 나라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상징어로서 인간의 지각세계와 영적인 체험을 전달해 주는 단어이다. , 하나님 나라는 진공 속에서 무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역사와 인간생활의 체험을 통해서 무수하게 다양하고 변형된 모습 속에서 그 의미를 읽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하나님 나라의 해석이나 하나님 말씀의 해석은 개념을 이끌어 내는 해석일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력을 이끌어 주는 말씀의 해석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의 해석은 한 번 내려진 해석이 표준이요, 완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해석은 한 시대속에서는 창의력과 진리가 주어지는 해석일지라도 모든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케리그마와 초대교회 ]

케리그마

케리그마는 신학의 전문용어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가 보여준 선포적인 사실을 말한다. 도드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기의 설교 내용을 요약.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서위의 시대가 도래.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2:16)라고, 그리스도 예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초대교회의 영적 현상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1:17, 2:28-29)라는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해석이 일은 예수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그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2:23 ) 이루어졌다는 성서의 증거와 함께 간단한 설명을 제시. 예수는 부활로 말미암아 새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서 하나님 우편에 올리우심을 받았다(2:22-36, 3:13) 교회내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능력과 영광의 표적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2:33) 메시야 시대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곧 그 완성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다케리그마는 항상 회개를 호소하고 죄 용서와 성령을 제시하며 구원을 약속함으로 즉 선택 받은 공동체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오는 세대의 생명을 약속함으로써 끝맺는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다”(2:38-39)

초대교회

지상교회의 출현은 신비한 것으로, 그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땅에 신약성서의 출현이나 교회의 성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으로 초대교회의 사상은 케리그마에 나타나 있고, 성례전인 세례나 성찬은 교회와 관련된 것이다. 근대 과학주의 물결에 따른 성서에 대한 비평적인 입장에서의 접근과 탐구는 성서의 문서와 이전인 구전 단계를 알아보는데 까지 이르고 있다또한 교회는 왜 성립되는가?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구주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에 의한 것이다. 이 고백을 위해서 또한 공동체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모이고, 찬송하고, 기도한 것이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난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어하게 하시니라”(2:42-47)고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부흥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공동생활을 이념으로 함에 따라 성도의 사귐을 특별히 강조한다. 성도들은 한 몸과 같은 하나의 단체이다. 한 몸의 지체와 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12:4-13)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교회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실현된 종말론을 가졌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의 부활이라는 새 생명위에 기초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은 새 생명의 표본이 된다그리스도 교회는 유대교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형식과 내용이 변화되어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는데 세례와 성만찬은 교회의 중요한 의식이 되는 것이다. 세례는 물로 씻는 결례의식이지만 가장 중요한 뜻은 세례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한다는 뜻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따라 사람이 죄에는 죽고, 그의 부활하심을 따라 의로 다시 살아 새 삶을 누린다는 뜻으로 바울은 해석한다.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같이 경험하는 것으로 죄는 죽고 의는 사는 새로운 생활로 바꾸어진다는 것이다. 성만찬은 세례받은 신자들의 의식으로, 이러한 성도 간의 교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신비스러운 교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 바울의 신학사상 ]

바울의 인간관

바울의 인간관은 죄인관이다. 즉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3:10-18) 그러나 바울은 죄를 밖에 나타난 개개인의 행위로서 본 것이 아니고, 인간성에 깃들어 그것을 지배하며 악한 생각과 행위를 산출하는 우주적인 큰 세력으로 보고 있다바울의 사상속에는 죄는 단순히 생명의 타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생명의 부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죄란 하나님의 목적들에 대한 적대감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역을 의미한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심각하고 치유 불가능할 정도의 소외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개념만이 죄를 묘사하는 데 가장 적절한 개념이다.

바울 서신에서 인간성을 설명하는 말로서 육체나 육이라는 말이 쓰이는데, 이것은 인간의 죄성을 말하는 상징어이다. 바울의 육체를 신뢰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업적의 성취자로 만족하는 것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바울은 죄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피상적이고 심리적인 의미에서의 자부심혹은 자만과 동일한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자랑하는 것도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피조물이나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죄(자랑함)는 인간 상황의 오해, 즉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고전 4:6)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임바울의 육체에 대한 개념만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견해도 그의 죄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육체가 죄의 주인이라면 율법은 죄의 중개자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율법을 지키면 살리라고 약속한 것같이 율법의 본래의 뜻은 살리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도정으로 세워 두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이 사람을 죽이는 데 이른다고 율법의 실제성을 파악하고 있다. 율법의 기능은 최를 알게 하고 죄를 산출한다. 인간은 율법이 없다면 죄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나, 율법을 통해서 실행 불가능한 율법을 깨닫고 자기의 죄인됨을 철저히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7:8-11)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기 실존인 죄인 됨을 깨닫는 자의 울부짖음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2-24)

바울의 구원관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의가 없이는 아무것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피조세계의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대망하는 모습을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8:19-23)라고 기록하고 있다. 피조세계가 도처에서 죄로 말미암은 멸망의 모습 속에서 몸부림치며 구원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의 파괴가 죄이며 이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의의 회복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룩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구원관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1:17 )라고 바울은 증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이신칭의행동이 인간을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로 회복시키는 것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괴리의 두 편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을 극복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바울의 화해 개념속에 잘 나타나 있다바울은 하나님의 화해의 행동에 관한 사상을 도입할 때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고후 5:18)라고 말한다. 의인과 성화의 관계는 성화가 의인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룩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신앙의 실천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인도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화는 이미 달성된 도덕적 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하나님의 의는 의인과 성화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하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죄의 종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 즉 죽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의인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하며 그 의인의 열매는 성화(하나님에 대한 봉사), 그 성화의 종말은 차례로 영생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6:22)

3. 리뷰

신약성서 신학은 중세 십자군 전쟁이 실패하고 인류가 중세의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반성과 더불어 인문주의 문예부흥, 계몽철학,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태동되고 발전되어 왔다. 교회는 성서의 원어 연구 등을 통해 중세의 교리에서 해방되어 종교개혁운동으로 활로를 모색하였다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독일인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원어로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 그 은혜를 통하여 죄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근거로 히브리어 및 헬라어를 읽는 것이 개혁지도자가 가져야 할 위대한 책임과 특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하나님나라는 구약부터 신약을 거쳐 새창조에 이르는 노정에서 일관되게 깔려 있는 기독교 이론의 밑바탕이다. 구약에서의 언약부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까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이끌고 이루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선택받은 민족이었으나 디아스포라로 전세계에 흩어졌지만 이것은 인류의 구원을 세계만방, 땅끝까지 전파하려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근거한 것이었다사복음서에서 공관복음 세 책은 예수님을 목격한 것을 증언한 복음서이며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그 목격한 것을 묵상한 결과를 복음서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복음서의 가장 놀라운 소식은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계획이라고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에게 가장 어필하고 있으며 마가복음은 이방인 특히 로마인에게 어필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논리적인 그리스인들에게 어필하는 점이 크며 요한복음은 요한의 묵상인 만큼 모든 인류를 향한 통합적인 복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은 누가행전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누가의 저술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하나의 세트로 보아 누가복음을 읽고 사도행전을 읽을 때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부분이 있다. 사도행전은 역사서로 보아야 하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책을 합하면 신약전체의 30%를 차지한다. 누가에 의하면 복음은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에서 오히려 십자가 이후 그 복음이 유대에서 로마까지 어떻게 퍼져나갔는지를 생동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사실상 바울과 베드로 두 사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신약신학은 많은 부분을 바울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바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왔다. 본서 역시 특히 바울신학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으므로 리뷰에서는 바울의 사상과 신학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이방인의 사도 바울신학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바울서신을 정리해본다. 논란이 있는 히브리서를 포함 총 14편의 서신서가 있는데 이를 상황변화에 따라 구분해 보면 재림서신으로 데살로니가 전서, 데살로니가 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가 있고 옥중서신으로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레몬서, 빌라도서가 있으며 유언서신으로 히브리서와 로마서, 디도서, 디모데 전서, 디모데 후서가 있다.

사도바울의 서신서 14

특징

서신서

내용

 

재림서신

살전, 살후

갈라디아서

고전, 고후

교회에 찾아온 성도들의 죽음

이방인들도 율법을 따라야 하나

내재되었던 문제들의 재폭발

 

옥중서신

,

빌레몬서

빌라도서

이방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대항

골로새의 지도자 빌레몬에게 보내는 해방서신

진정한 믿음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하는것

 

유언서신

히브리서

로마서

,딤전,딤후

사랑하는 동족 유대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마지막으로 남기는 사도 바울의 신학 총정리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보내는 마지막편지

 

바울은 우리에게 사탄으로 대표되는 선과 악의 대결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인류구원드라마를 총 4개의 막으로 구분했다. 두 아담에 의해서 인류전체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 두 번째 아담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다.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죽음이 들어왔으며 두 번째 아담으로부터 부활이 이루어졌음. 이것이 바울의 아담 기독론이다. 아담에서 토라까지를 첫 번째 막으로 보는데 여기에는 아담과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원형이 아브라함이다. 그러면 토라는 왜 존재했는가. 토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지만 이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는 교육의 하나의 과정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훈련시키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도 한번도 토라를 제대로 지켜본 적이 없다. 인간은 아무도 의로운 사람이 없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으로 보아야 한다. 토라의 기능은 한시적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토라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을 거룩한 것이라고 했다. 토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예비적 과정으로 토라시대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성령과 동행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면 토라는 자동으로 따라 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하나님 만나는 경험이 다시 필요하다. 바울은 교회시대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새창조로 넘어간다토라 시대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이 있었다. 두 번째 아담을 통해 인류의 구원과 새창조를 이룬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모형인데 약속을 믿는자를 구원한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율법을 향한 열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선포한다. 삶의 변화가 토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성령의 법이 생명의 법인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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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란 무엇인가

1. 서론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학에 이성이 개입되고, 다른 학문이 세분화되면서 신학도 다양한 분야로 전문화되고 여러 가지 방법론이 발전되었다. 이에 따라 직관적이고 통찰력 있는 신학에 대한 이해는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다른 학문도 그렇지만 신학도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목회 현장에 있는 분들이나 이미 오래전에 신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 지속적으로 이러한 변화하는 학문을 따라가지 못해서 겪는 어려움이 클 수 있으며 또한 이제 막 신학공부를 시작한 신학도들이 신학의 전반적인 아웃라인을 잡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현재 국내에서 신학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를 알기 쉽게 서술하여 신학의 제 분야에 대한 이해와 함께 신학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인식을 도모하고자 한다.

2. 본론

[ 신학이란 무엇인가 ]

신학은 시대를 외면하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이론으로만 학습하는 신학은 죽은 학문인 것이다. 신학은 그 시대를 해석하고 생명을 불어 넣으며 시대는 신학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적 책임을 부과한다신학(theology)는 신(theos)과 말(logos)이라는 두 헬라어의 결합이다. 즉 신을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신학이라는 용어는 초기 교부시대에서부터 사용되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신학은 주제별로 체계화가 이루어진다. 기독론, 삼위일체론, 교회론, 성령론, 구원론, 종말론과 같은 교의가 체계화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학문의 분야로서 체계화 시킨 대표적인 저서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는 신학에 대한 이해가 학문전반, 사회의 구조, 자연과학의 발전 등 다양한 측면에서 큰 시대적 변화를 야기한다. 신학을 특별하게 취급하기 보다는 종교학의 한 분야로 취급하는 곳이 많아졌다신학은 두가지 측면에서 해석하기 어려운데 첫째, 신학의 대상과 관련이 있는데 신학에서 은 단순히 인간의 인식 대상이 아니라 항상 살아 있는 존재로서 스스로 주체가 된다. 둘째, 신학은 학문성과 신앙의 고백적 측면을 동시에 지닌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에 대한 신앙과 연관됨과 동시에 학문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다른 분야와 관계될 수 밖에 없다신학은 신앙을 배제할 수 없다. 신앙 없이 신학에 정당한 관심을 가질수 없고 신학에 대한 열정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신학은 교회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다.. 신학이 교회와 분리되면 추상적이 되고 사변적이 된다. 신학은 순수이론 작업으로 머물 수 없고 항사아 교회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며 역사 속에서의 실천과 연결된 신학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계시와 종교를 구별하면서, 기독교의 진리 진술의 토대인 계시를 일반적인 종교라는 개념과 구별하기도 한다.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기독교가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적 개방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동질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에 달려있다. 대화를 위해서는 타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존중의 자세도 있어야 한다. 신학은 또한 학문으로서의 기능을 가지므로 신학적 주제에 대해 타학문과 상호 연계하여 연구하여야 한다.

신학에는 대표적으로 네 분야가 있는데 첫째, 성서신학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으로 나뉘는데 언어오아 본문에 대한 연구가 기본이 된다. 언어는 사고와 개념에 우선되고 사고의 형성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그러므로 신학도는 성서의 본문을 원어로 읽고 이해할 뿐 아니라 다양한 본문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을 잘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언어에 대한 이해와 석의에 대한 능력이 필요하다. 둘째, 역사신학은 기독교가 창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철저히 역사적인 방향성을 가진 종교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기독교 진리는 역사 속에서 진리가 드러나고, 이는 다시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확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간 세대에 교회가 어떻게 진리에 대한 진술을 했는지를 구체적 정황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중요한 길이다. 셋째, 조직신학은 성서신학 등에서 연구된 다양한 발견과 결과들을 체계화하는 작업니다. 조직신학은 변증적인 역할을 가진다. 즉 조직신학은 성서, 교회, 기독교 전체에 대해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고 그 타당성을 변증할 의무를 가진다. 또한 조직신학은 기독교와 각 시대의 관계를 설정해주어야 한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의 의미를 제시하는 일이다. 넷째, 실천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교회현장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역할을 한다. 신앙은 언제나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진다. 현대에는 실천신학은 단지 목회자 양성과 교회내에서 사용될 수 있는 실용적인 차원의 학문이라는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실천신학이 교회 현장 뿐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는 바른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공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지고 있다.

[ 구약학의 흐름과 미래 ]

구약학에서는 무엇보다도 구약 본문을 통해 시대마다 필요한 말씀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야 말로 구약학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길이 된다. 이 일을 위해 구약학자들은 지금과 앞날의 시대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그에 걸맞은 메시지를 구약성서에서 찾아내어 제시하는 데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1947년 쿰란 사본이 발견된 뒤부터 칠십인역 연구가 강화되고 마소라 본문의 비중이 다소 떨어지고 있다. 그 전에는 히브리어 사본 가운데 마소라 본문에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했으나 지금은 여러 전통 본문 가운데 하나로 의미가 상대화 되었다히브리어 구약성서 제 5은 여러 고전어로 된 약어와 마소라 주 등을 영어로 풀이해놓아 일반 신학도들도 여렵지 않게 읽을 수 있게 배려된 친절한 성서이다. 그러나 완성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히브리어 성서 제 4판 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칠십인역에 들어있는 외경과 종래의 마소라 본문과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널리 알려졌을 때 평신도들 뿐만 아니라 일반 목회자들, 심지어는 신학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날 텐데 이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는데에 있다. 또한 영어와 히브리어 대조성서로 Jewish Publication Society Hebrew English Tanakh(1999)가 나와 있다구약 연구에 쓸 수 있는 사전들로는 히브리어 사전과 구약 신학용어사전, 성서 백과사전, 신학백과사전이 여럿 출간되어 있는데 구약성서 히브리어 사전(BDB)이 있고 최근의 사전으로 독일어로 1967-1996년에 걸쳐 여섯 권으로 나온 구약성서 히브리어 · 아람어 사전HAL(=KBL)이 있습니다. 그 영어 번역본인 HALOT은 이제 히브리어 본문을 읽는 데 없어서는 안될 기본참고서이다. 구약 신학용어사전으로는 구약 신학용어사전(ThWAT,영문 번역판 : TDOT)이 있으며 백과사전으로는 1990대 초에 앵커 성서사전(ABD)이 있다.

구약 생성사 관련 뮌스터 오경 모델은 아브라함, 야곱, 요셉, 출애굽, 가나안 정복 이야기와 언약의 책이 따로따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주전 700년경 예루살렘에서 하나의 역사 이야기로 한데 묶여졌고 거기에 이르나 창세기 2-8장 핵심 부분과 신명기-열왕기하의 핵심 부분이 덧붙으면서 주전 586년 뒤에 포로기 역사서가 생겨 났으며 주전 520년 이후에는 제사장 자료가 더해져서 창세기-열왕기에 이르는 포로기 이후 큰 역사서가 이루어진 뒤에 주전 400년 경에 마침내 오경과 전기 예언서, 곧 신명기-열왕기하가 나뉘어 지게 되면서 오경을 모세의 율법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의 최종 단계에서 신명기 전통 신학과 제사장 전통 신학을 비롯한 여러 전통이 뒤섞였다고 한다. 이를 테면 언약신학의 경우에 신명기 전통에서는 언약을 이스라엘의 순종이라는 조건과 어느 정도 관련시키지만, 제사장 전통에서는 언약을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베푸신 처사로 제시하고 있다. 이리하여 오경은 적어도 주전 900~400년의 기간, 500여 년의 기간에 걸쳐 이스라엘 사회 안에 벌어진 다양한 신앙과 신학이 서로 충돌하고 대화하면서 이루어진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구약성서를 히브리어 본문으로 자세히 읽어보면 오늘 우리로서는 밝혀낼 수 없는 숱한 사람들이 그 나름대로 본문의 형성에 이바지했으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특히 편집비평이 새롭게 강화되고 있는 이즘의 경향은, 하나님이 몇몇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만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이 세상에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옛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에 속했던 평범한 사람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들이 그런 놀라운 과정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경전 형성 과정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맡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한다바람직한 미래의 구약학과 관련 무엇보다도 구약 본문을 통해 시대마다 필요한 말씀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 듣기 위해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야 말로 구약학의 미래를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길이 된다. 또 앞으로는 개인과 공동체가 처한 지역 상황과 세계 상황을 늘 염두에 두면서 구약학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곧 한편으로는 전 세계에 공통된 위기 상황에 대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각 개별지역에 특수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비록 오래 전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다양한 삶의 현실에서 다양하게 형성되어온 구약 신앙의 여러 가르침을 오늘의 현실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히브리어를 익히기가 쉽지 않고, 내용이 방대하고 복잡할 뿐 아니라 너무 오래 전에 생겨나서 일반사람들이 어려워하지만 상황이 이러할수록 구약학을 더 깊고 더 넓게 연구하여 구약학이 기독교 신학과 신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알려주는 것 또한 구약학 과제중 하나다.

[ 한국의 현실에서 본 신약학 ]

신학생은 물론 한국 교회는 성서학과 신약학적 연구들의 결과들을 주목하고, 그것들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근거로서 신학을 올바로 세워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현실에서도 성서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책이 아니라 도리어 무고한 자들을 억압하는 무서운 무기가 될 것 이기 때문이다종교개혁가들의 주장과 같이 성서를 그대로 믿을 것이냐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역사비판학적 성서방법론이 주장하듯이 성서가 일점일획도 가감이 없이 무오한 하나님의 원형적인 계시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손에 의해 기록된 역사적 산물로 볼 것이냐는 개인의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은 성서 안에서 서로 상이한 본문과 편집들을 연구하여 그 본문이 본래 의도하는 바를 찾아 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9세기말 근본주의적이며 문자적인 성서관을 가진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을 전수 받은 한국 교회와 신학은 이러한 성서해석 방법들을 외면하고 이단적이고 불신앙적이라고까지 매도함으로써 문제를 야기한다고 보는 것이다신학이란 그때그때의 시대적 상황이 안고 있는 과제에 대한 진실한 접근을 요구하는데 한국의 신학자로서 한국의 민중사관을 도외시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 이야기나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국여성신학은 1980년 독재정권자들에 의한 광주학살 사건을 기점으로 태동한 것으로 서구 여성신학과는 또 다른 상황에서 강대국의 침탈과 분단상황에서 고난당하는 한국 여성들의 삶을 문제삼는다. 그리고 성서를 민중 중의 민중인 한국 여성민중의 시각으로 다시 읽고 재해석하면서 한국의 민중여성들이야말로 한반도의 역사를 지탱해온 역사의 주체이며 한국교회를 세우고 섬기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선두에 서서 일해왔음을 증언한다.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와의 관계에 있어서 예언과 성취’, ‘율법과 복음의 도식으로 보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기독교의 반유대주의는 실제로는 성서적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예수의 적대자로 묘사된 유대인은 히틀러 치하에서 무고하게 살해당한 그 유대인도, 오늘날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니며 신약성서시대에 로마 제국하에서 북쪽 갈릴리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멸시하고 죄인으로 매도하던 남쪽 예루살렘이 권력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오늘의 상황에서 보면 제국의 지배와 분단하에서 고난받는 동족을 외면하고 성서의 몇구절을 내세워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일 수도 있다기독교 신앙을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성서 언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익히고, 신약학의 배경사 연구와 다양한 성서해석 방법을 통해서 본문을 올바로 주석해내야 한다. 성서의 배경이 되는 구약, 유대교, 그리스, 헬레니즘의 사상들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교회는 성서학과 신약학적 연구들의 결과들을 주목하고 그것들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근거로서 신학을 올바로 세워가야 한다신학은 성서본문을 해석하되 오늘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제시하여야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도 성서에 명확한 근거를 두고 해석해야 한다. 한국여성신학이나 민중신학 등이 독재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시각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 황장엽 선생의 말대로 북한의 김일성주의는 수령 무오론등 일종의 기독교 이단이라고 한다. 성서를 제멋대로 해석해서 정치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든지의 행동이 북한의 김일성주의와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다 성서의 올바른 해석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각기 자신의 입장에서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우리는 신학도로서 반드시 중간자적 입장에서 어느쪽의 주장이 성서에 정확히 근거하여 객관적,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또한 2,000년 전에 기록된 성서가 21세기 오늘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진리와 답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하는가를 찾아내는 것도 신학도들의 과제이다. 성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해 오시는가를 증언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같지 않더라도 성서가 이야기하는 진리는 마찬가지이므로 우리는 성서해석학을 통해 이것을 찾아내야지 수천년 전의 이야기라 현실과는 맞지 않으므로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이단의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생각한다.

[ 조직신학의 특징, 주제 및 전망 ]

조직신학은 기독교 사상과 교의이다. 조직신학은 성서에 대한 체계적 지식일 뿐 아니라 인간과 세상과 역사가 질문하는 문제에 대해 답을 주는 신학이다. 조직신학은 교회의 설교와 교육의 주제와 내용이고 교회가 세워가야할 하나님 나라의 지식이다. 그런 까닭에 조직신학은 세상의 학문과 대화해야 하고 세상의 학문의 바른 길을 인도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조직신학이라는 표현에서 조직이라는 용어는 학문의 영역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방법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곧 조직이라는 말은 조직신학의 작업에서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체계화시키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체계화시키는 것은 조직신학의 중요한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고, 조직신학의 학문적 영역은 기독교 사상이다. 조직신학은 전 세계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믿고 전하고자 하는 사상의 총화이다조직신학은 성서의 체계적 지식을 갖추는데 필요한 학문이다. 성서의 한두구절만으로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성서 전체의 내용을 상호 모순 없이 체계화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성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정보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언급하고 있지만 야고보서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조직신학은 이런 것에 대한 해답을 준다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라는 개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성서에서 찾으려하면 너무 다양한 언급들이 있어서 이에 대한 해석을 하기가 어렵다. 죽은 자들은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가 역사의 마지막 날 예수의 재림의 날에 부활한다는 표현도 있고, 죽음에서 즉각적으로 부활을 경험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구절도 있다.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서 죽은 자의 영혼이 즉각적으로 천국으로 간다고 믿고 있다.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갖고 있는 개인의 질문에 대한 답은 교회의 교리서에서 직접 얻은 것이지 성서에서 직접 얻은 것은 아니다. 성서학이 달라지면 조직신학의 답도 달라진다. 안식일이 토요일인데 왜 주일에 예배를 드리느냐라든지 유아세례가 가능하냐 라든지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으면 인간이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이 왜 필요하냐의 문제도 조직신학이 답을 하는 것이다. 조직신학은 개인이 질문하는 모든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을 하려는 학문이다조직신학은 세상과 역사가 질문하는 문제에 대해 답해야 한다. 진화론은 잘못되었는가?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문제들이다. 성서 속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성서가 저술될 당시의 이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서속에서 직접적인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조직신학이 답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신학은 성서를 기초로 해서 오늘의 세상과 역사가 질문하는 수많은 문제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이 질문들은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고 이 답을 위해 조직신학은 존재한다.

개인이 질문하는 문제에 대한 특정교회의 답이 교의이고 세상과 역사가 질문하는 질문에 대한 교회의 답도 교의이다. 특정교회가 자신의 입장에서 성서의 내용을 체계화시키고 개인과 세상과 역사의 질문을 깊이 고려해서 최종적인 답을 한 것이 그 교회의 교의이다. 물론 이 교회의 교의들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러한 교회의 교의들은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교회의 교의들 사이의 논쟁은 불가피하다. 조직신학은 세계 교회들의 교의들을 연구해서 최종적인 바른 답을 하려고 하는 학문이다. 특정교회가 자신들의 교의만을 절대화하면 그 교회 안에서는 조직신학이 발전하기 어렵다. 조직신학의 발전은 진리를 찾는 과정이고 끊임없이 발전되어야 한다. 한국의 일부 교단에서는 교권으로 조직신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막는 위험한 일이다설교의 주제와 내용은 조직신학이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교의는 설교의 내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설교의 내용은 성서라고 생각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는 설교의 주제와 내용이 흘러나온 원천이다. 그런데 설교의 주제와 내용은 교회의 교의이고 조직신학이다. 설교는 지금 여기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조직신학은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학문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교육 지도자들은 조직신학이 교회의 교육의 주제와 내용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성서를 암기하는 것이나 과거의 교리를 암기하는 것이 교회교육의 핵심이 아니다. 교회교육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인데 곧, 오늘의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가르침의 근원은 성서이고 주제와 내용은 조직신학이며 방법은 실천신학이다초대교회의 신학은 변증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변증학이란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일반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학문이다. 이 변증학을 계승하고 있는 학문의 분야가 조직신학이다. 조직신학은 무신론과 싸우는 제일선에 있는 신학이다. 조직신학은 무신론과 싸우는 제일선에 서 있는 신학이다. 조직신학의 가르침이 날카롭지 못하면 교회는 무신론을 방어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이는 즉시 교회의 위기로 나타난다. 이단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교회는 수많은 이단으로 말미암아 수없이 위기에 봉착한 바 있다. 이단을 극복하는 것은 조직신학의 깊은 가르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단들이 모두 성서를 인용하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깊은 체계적 지식이 없이는 이단을 극복하기 어렵다. 한국교회가 성서공부는 많이 하는데도 이단 극복이 안 되는 이유는 조직신학교육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조직신학과 교회의 교의에 대한 교육강화를 통해 이단에 대처해야 한다.

[ 교회사란 무엇인가 ]

교회인식의 새로움, 교회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전혀 새롭게 고안해낸 관점이 아니라 사도시대의 교회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며, 또 오늘날 모더니즘적 세계관인 기계적 사고양식을 지양하며 유기체적 세계관과 상통하기도 한다. 교회 인식의 새로움을 통해서 교회사 서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개발된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한 역사를 서술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역사는 신앙과 신학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어 왔다. 그래서 교회사 안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교훈과 의미가 가득 차 있다. 교회사를 이해하는 여러 관점들 중에는 교회사를 선교의 역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사실상 교회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선교하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선교하지 않았다면 교회는 오늘날 세계적인 공동체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또한 우리는 열린 자세로 상호 대화를 통해서 세계 보편 종교가 된 기독교의 현주소를 보면서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과 특성을 우선적으로 찾아보는 교회사 연구 방식, ‘glocalization’을 추구해야 한다. 자신의 역사를 먼저 철저하게 파악하고 규명함으로써 세계사적이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적인 자리매김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문제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부터 있어 왔던 문제들의 재현일 뿐인 것이다.

신학은 교회사를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역사를 구속사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가 어떠한 경로로든 교회사와 연관되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구약과 신약학이 제대로 되려면 시대사 연구가 그 바탕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반드시 역사적인 방법으로 다루어 져야 한다는 뜻이다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교회의 역사와 불가분적인 관계를 설정해준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하나님을 설명하고, 그의 선하신 행동을 가르치며, 예배와 선포를 통해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모든 신학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는 필수적인 연구과제이다. 신학하는 이가 반드시 터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루시는 방법을 읽는 안목이다교회사학자의 우선적인 과제는 성경에 증언된 하나님의 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계시가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또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선포된 말씀을 하여, 말씀 사건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반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세계교회사와 함께 우리는 한국 교회사를 아울러 면밀히 연구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선교사가 전래하기 전에 자생적으로 신도들이 형성되었고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엄청난 대부흥을 경험하였으며 인구 대비 최다 선교사 파견 등 기독교 역사상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구한말 대외투쟁,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 독재정권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현재도 기독교의 중요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사의 연구를 통해 바른 기독교관을 정립하도록 노력하여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통해 이루려 하시는 뜻을 파악하여 실현하여야 한다신학의 한 영역으로서 교회사를 공부하는 뜻은 첫째, 다른 학문의 영역에 역사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필요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탐구하고자 하는 일차적 본체인 넓은 의미의 교회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겪어 왔는지를 시대를 뛰어넘어서라도 경험하자는 것이 교회사를 공부하는 일차적 목표이다.

둘째는 도대체 올바른 교회의 개념과 모델이 어떤 것이냐?’하는 질문이 2,000년 역사속에서 끊이지 않았다는 데에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교회상과 가시적 조직체로서의 교회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믿는다는 일이 언제나 진행형인 것처럼, 교회의 모습도 현재적 완성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로 되어 가고 있는 진행형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역사를 탐구하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의 교회를 찾아가는 일과 같다2,000년 기독교회의 역사는 또한 성경의 역사와도 일치한다. 교회의 역사는 본질보다는 제도와 외형적인 일에 몰두하여 왔다. 그럴 때마다 등장하는 것이 개혁의 목소리이다. 성서에서 예언자가 등장하는 것처럼, 교회사 가운데에는 언제나 개혁의 외침이 있었다교회의 역사는 개혁의 역사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개혁 정신, 사도 바울의 개혁적인 사상, 어거스틴의 사상, 교회 개혁을 향한 수도사들의 노력, 위대한 종교개혁자들, 경건주의자들 모두가 교회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신앙 여정을 탐구하는 뜻은 과거의 잘못을 오늘에 반복하지 않으려 함이요, 오늘 교회의 모습을 진단하고 참교회상을 추구하자는 데 있다이제 한국은 통일을 대비해야 한다. 통일을 대비하는 한국에 있어서 기독교 정신의 바른 정립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이러한 바른 정립을 위해서는 세계교회사에서의 한국교회 역사의 위치를 정확히 자리매김하고 바른 기독교관을 정립하는 것이 시급한 것이다.

[ 실천신학이란 무엇인가 ]

실천신학운동은 단순히 사중구조에서의 목회학의 재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서학, 역사신학, 조직신학으로 대분류되던 기존의 신학 교과과정에 설교학과 예배학, 기독교교육학과 기독상담학을 부가하고 강조하는 세부전공 분류의 변화가 실천신학의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다 입체적이고 실천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신학하기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실천신학운동은 전개되어야 한다가장 바람직한 목회의 실천은 그 공동체가 속한 지역과 문화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지역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변화와 기대를 품어내는 공동체가 변혁을 위한 해방적인 실천을 감당해낼 수 있다. 모든 신학이 현장적이듯이 모든 실천과 변혁도 현장적이기 때문이다.

[ 선교학에 대한 이해와 선교신학의 유형 ]

선교학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이루는 모든 이론과 시런을 비판적, 체계적,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교학은 모든 교회와 기독교인이 공동으로 짊어져야 할 과제이다. 특히 선교학은 모든 신학 분야와 학문 분야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만남을 통해 변화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지향한다선교신학은 실천신학으로 선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는 독일 선교학자인 테오 준더마이어가 말한 네 가지 선교신학의 유형을 바탕으로 하여 모두 여섯 개의 선교 신학유형을 제시하는데 곧, 회심유형, 이식유형, 구원사적 유형, 약속사적, 유형, 의사소통 유형, 해석학적 유형이 그것이다또한 선교는 무엇보다도 통전적으로 이해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교회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과 문화적 대응에 민감하기를 요구하며, 더 나아가 선교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선교신학은 에큐메니칼 노선과 복음주의 노선으로 양분되어 있다. 큰 틀에서 보아 전자는 세계교회협의회(1948년 창설)를 중심으로, 후자는 로잔 대회(1974년 시작)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에큐메니칼 노선은 대체로 복음주의가 보여 주는 이원론적인 면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데 즉, 영혼과 육체, 종교와 문화, 개인과 공동체, 교회와 세계, 구원과 해방 등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이웃과의 관계 사이에 나타나는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을 선교의 주요 과제로 삼는다. 복음은 교회와 구원 받은 개인뿐 아니라 인간 세계의 모든 부분과 관련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은 1910년 스코틀랜드 애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인데 세계복음화를 그 이상으로 천명하였다. 이에 반해 복음주의 노선은 복음의 일차적 관심을 개인의 영혼 구원에 둔다. 복음주의자들이 사회 구조의 변화에 무관심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들은 대체로 사회 변화는 전도의 결과로 이루어진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최근 들어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와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여 주고 있지만, 전도의 우위성에 대한 주장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를 위한 국제대회에서는 그 이전에 열린 여러 선교대회를 규모면에서 압도할 뿐 아니라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분명히 밝힌 대회로 평가된다. 그러나 로잔 대회가 복음 전도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사회참여가 필요하다고 인정하였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주장한 사회, 정치적 해방이나 구원의 인간화를 수용한 것은 아니었으며 복음 전도의 우선순위를 포기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3. 결론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의 훈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살게 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 하셨으나 이들은 선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부응하지 못한다그들은 거룩과 공의로 옷을 입고 하나님 백성의 역할(제사장)을 수행하여야 하였지만 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썪은 베띠의 비유로 예레미야는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의 심판을 경고한다하나님께서는 우선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살 수 있는 땅을 주셨는데 약속된 땅을 주시고 그 땅의 모든 것을 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이를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이 잉태되었던 것이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상당부분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을 비롯한 토속신을 섬기다가 징계를 당하는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멸하라는 명령을 거역한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범죄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선지자, 예언자들의 경고 및 예언을 보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약속, 특히 메시아의 출현에 대해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신학에서도 최근의 추세는 구약신학을 신약신학, 더 나아가서 성서해석사와 조직신학까지 관련시켜서 다룰 것을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신학의 각 분야가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양하고 신구약의 유기적인 해석을 할 것에 대한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 신학은 중세 십자군 전쟁이 실패하고 인류가 중세의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반성과 더불어 인문주의 문예부흥, 계몽철학,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태동되고 발전되어 왔다. 교회는 성서의 원어 연구 등을 통해 중세의 교리에서 해방되어 종교개혁운동으로 활로를 모색하였다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독일인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원어로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 그 은혜를 통하여 죄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근거로 히브리어 및 헬라어를 읽는 것이 개혁지도자가 가져야 할 위대한 책임과 특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하나님나라는 구약부터 신약을 거쳐 새창조에 이르는 노정에서 일관되게 깔려 있는 기독교 이론의 밑바탕이다. 구약에서의 언약부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까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이끌고 이루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선택받은 민족이었으나 디아스포라로 전세계에 흩어졌지만 이것은 인류의 구원을 세계만방, 땅끝까지 전파하려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근거한 것이었다

사복음서에서 공관복음 세 책은 예수님을 목격한 것을 증언한 복음서이며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그 목격한 것을 묵상한 결과를 복음서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복음서의 가장 놀라운 소식은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계획이라고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에게 가장 어필하고 있으며 마가복음은 이방인 특히 로마인에게 어필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논리적인 그리스인들에게 어필하는 점이 크며 요한복음은 요한의 묵상인 만큼 모든 인류를 향한 통합적인 복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사도행전은 누가행전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누가의 저술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하나의 세트로 보아 누가복음을 읽고 사도행전을 읽을 때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부분이 있다. 사도행전은 역사서로 보아야 하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책을 합하면 신약전체의 30%를 차지한다. 누가에 의하면 복음은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에서 오히려 십자가 이후 그 복음이 유대에서 로마까지 어떻게 퍼져나갔는지를 생동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사실상 바울과 베드로 두 사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토라는 왜 존재했는가. 토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지만 이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는 교육의 하나의 과정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훈련시키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도 한번도 토라를 제대로 지켜본 적이 없다. 인간은 아무도 의로운 사람이 없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으로 보아야 한다. 토라의 기능은 한시적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토라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을 거룩한 것이라고 했다. 토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예비적 과정으로 토라시대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성령과 동행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면 토라는 자동으로 따라 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하나님 만나는 경험이 다시 필요하다. 바울은 교회시대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새창조로 넘어간다토라 시대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이 있었다. 두 번째 아담을 통해 인류의 구원과 새창조를 이룬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모형인데 약속을 믿는자를 구원한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율법을 향한 열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선포한다. 삶의 변화가 토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성령의 법이 생명의 법인 것이다 신학은 성서본문을 해석하되 그 내용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본문에서 저자는 지나치게 한쪽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슈가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성서적으로 명확한 근거하에 주장하여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용공, 좌파들의 주장과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 한국여성신학이나 민중신학 등이 독재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갖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니라 성서의 해석을 정치적인 시각으로 노선에 맞게 고쳐서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또한 2,000년 전에 기록된 성서가 21세기 오늘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진리와 답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하는가를 찾아내는 것도 신학도들의 과제이다. 성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해 오시는가를 증언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같지 않더라도 성서가 이야기하는 진리는 마찬가지이므로 우리는 성서해석학을 통해 이것을 찾아내야지 수천년 전의 이야기라 현실과는 맞지 않으므로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이단의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생각한다.

회심 유형과 이식 유형의 문제점은 제도적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점이다. 그 다음에 불신자를 선교의 단순한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다오늘의 한국 교회 선교 이해는 대개 회심, 이식 유형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을 그가 사는 문화와 역사와 정체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점과 제도 교회의 소속원으로서의 의미부여를 극복해야 할 과제가 한국 교회에 놓여 있다. 아울러 복음 전도를 통한 회심의 경시나 가시적 교회의 중요성과 교회 설립과 확산의 약화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교회 없는 신학이나 선교 없는 신앙은 기독교의 정체성 보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구원사적 유형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교회중심적 선교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신학적 과제를 안고 있다. 아울러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회봉사에 대한 이해를 선교의 테두리내에서 파악하고 실천하는 선교의 확대를 어떻게 실현하는가 하는 점이다약속사적 유형이 교회 중심적 선교이 배타성과 세상에 대한 관심의 약화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높이 살 만하나 반대로 교회를 약화시키고 교회 무용론으로까지 확대된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교회와 선교는 결코 이율배반적인 대립자가 아니다. 교회 없는 선교를 생각할 수 없듯이 선교 없는 교회 또한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의사소통 유형의 과제는 전파와 적응은 함께 모든 기독교 신앙의 이중적인 기원과 원인을 지시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하나는 인간의 증거와 전통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선택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해석학적 유형은 기존의 서구 중심적 혹은 선교사 중심적인 일방적인 복음의 문화 이식과 주입과 문화가 복음을 해석하는 극단적인 상황화와 문화화 모델을 극복하려는 점에서 훌륭하지만 전세계 교회의 해석학적 공동체라는 것은 아직도 구호성의 외침으로 남아있고 여전히 개신교는 교단, 교파, 선교단체 등으로 분열되어 세상의 아픔에 동참하고 세상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성육신적 선교에 못미치고 있는 현실에서 너무 이상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이제 선교는 선교의 종교성을 회복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선교는 프로젝트나 선전이 아니고 선교사는 사업가나 의료인이나 교육자로서만 이미지가 고착된다면 구도자와 종교인으로서의 접촉점은 상실되고 복음 진리의 선교는 지체되거나 거부될 것이다에큐메니칼 노선과 복음주의 노선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은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WCC에서 접신행위등을 자행한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한 일로 보아야 하며 이러한 비성경적인 노선을 교회의 일치라는 것은 무리한 주장인 것이다신학도는 이 시대를 준비하고 대비해야 한다.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없이 맞이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믿는 성서는 미래가 단순히 흘러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을 증거해준다.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것을 인식하는 의식을 예언자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 민족은 명실 공해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시기가 오고 있다. 우리는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길러야 하고 통일을 대비하는 신학을 준비해야 한다. 신학이 바로 설 때 이 시대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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