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과 이단논쟁(正統과 異端論爭) 2

 

[ 바우어의 이단 주장 ]

그리스도 교회의 정통 신앙은 이단 사상과의 투쟁을 통하여 정립되어 왔다. 그러나 사실에 근거한 추론으로 교회사를 재구성하면서 이단 사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바우어 등을 통하여 제기되어 왔다. 부르노 바우어는 1934년에 출판된 초기 기독교에서의 정통과 이단에서 초대 교회 당시 객관적으로 이단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로마 교회의 견해를 정통  이라고 부르고 이에 따르지 않은 다른 그룹을 이단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몇 가지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초기 기독교가 교회의 통일성을 교리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는 바우어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기독교의 통일성에 대한 교리적 이해가 이미 로마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순교자 저스틴의 저술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로마제국 안에서 쉽게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널리 펴져 있던 신자들이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  관계를 맺고 공동체의 그물망을 유지하는 것이 비교적 쉬웠기 때문에 그들의 교리적 공동체 의식은 느슨하지 않았다. 셋째, 바우어는 발렌티누스주의의 기원이 정통파와는 다른 기독교라 주장했지만, 당시 발렌티누스는 비록 소수였지만, 그들 자신을 정통 기독교라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단은 교회 밖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 내에 기원을 두고 있다. 넷째, 바우어는 훗날 로마 교회가 갖게 된 영향력을 권력이나 권위를 찾아볼 수 없었던 그 전 시대 기독교 공동체들에 거꾸로 투영하는 오류를 범했다. 로마 교회가 당시의 다른 교회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때는 3세기 이후이다. 다섯째, 여러 이단이 정통 신앙 보다 먼저 찾아왔다는 것은 어떤 역사적 근거도 찾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바우어의 주장은 이단은 개방적이고 느긋하고 성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고, 정통은 편협하고 독단적이고 가부장적이고 경직된 것이라는 편협한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 소수를 피해 받은 약자로 그리고, 전통으로 이어오는 정통의 가치를 지배자의 권력의 산물로 여기며 정통의 가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바우어의 주장은 전통과 참된 진리를 부정하는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에서 보면 매우 타당하게 보이며, 이들의 충실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이단은 모종의 신학적 억압으로 말미암은 희생자가 아니다. 정통을 확립시키는 역사 가운데 분명 권력과 정치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복음적 신앙의 정통 신조는 그런 더러운 일부 과정과 주님의 참된 종들의 수고와 희생속에서 확립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다.  

[ 서방교회적 이단 및 동방교회적 이단의 예시 ]

서방교회의 신학자들은 동방교회의 인식의 특징을 이루고 있던 삼위성에 대한 강조보다는 하나의 신적인 본질 혹은 실체를 강조하였다. 그들은 하나의 실체 안에서 삼위성을 관계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존재, 지식, 의지라는 삼각축으로 표현하였으며 근본적으로 관계적인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신학자들로 하여금 창조와 구원에 있어서의 협력 사역들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서방 신학자들은 동방교회가 삼신론에 빠져들었다고 염려하였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된다고 보았다. 서방교회의 모형은 신적인 삼위일체의 내적인 삶의 토대가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성에 있으며, 이 관계성은 다른 두 위격 모두와 결부되어 있는 성령이라고 선언한다. 양자설 : 모나키안, 비잔틴의 데오도투스, 사모사타의 바울 --- 예수님은 인성만 있고 신성이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 마음에 아주 합하여서 양자로 받아들여졌다고 주장. ‘역동적 군주신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태론 : 사벨리우스, 스미나의 네오투스, 프락세아스 --- 양태론 이단은 2세기 후반에 나타났는데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자기 모양을 바꿔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성부 하나님이 성육신했고, 성부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 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를 성부수난설이라고도 한다.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신성 내부의 발출(성령의 발출)을 강조하였고 성부를 영원한 운동 속에서 성자를 낳으시고 성령을 발출시킨 신성의 근원으로 보았다. 삼위일체의 세 개별적인 지체들에 초점을 맞추어 창조와 구원의 신적인 행위들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특수하고도 개별적인 사역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고 동방교회는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 사이의 관계를 엄밀하게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의 활동을 교회를 통한 인류구원에만 묶어둘 필요가 없었다. 종속론 : 오리겐 ---로고스의 영원한 발생을 주장해서 최초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설명했으나 그는 성부 아래 성자를 두고, 성자 아래 성령을 두는 종속론을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영원한 발생은 정통이었으나  종속론은 이단사상이었다. 아리우스주의 : 아리우스 --- 4세기 초반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는 종속론을 계승 하여 성부가 혼자 계시다가 아들을 창조했고, 그 다음 아들 안에서 세상을 창조했으며 성부와 성자는 유사본질이라고 주장했다. 

[ 초기 교회가 복음의 경험적 차원을 담은 역동적 기준으로 사용하였던 신앙규범 ]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경험한 초기 그리스도 교회는 다양한 문화와 상황 속에서 제기되고 표현되었던, 그들 자신의 하나님 경험의 고백과 다른 주장들에 대하여 신앙의 규범을 가지고 정통과 이단을 판별하였으며 문헌들의 정경성 여부 또한 판단하였다. 초대교회는 아직 이론화 또는 체계화하지 못한 자신들만의 신앙 생활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서로간에 공감하고 있었던 신앙의 규범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신앙의 규범은 신앙문헌들의 정경성 여부 판정과 정통과 이단을 분별하는데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었다. 여기에는 신앙 문헌들의 정경화의 판단을 위한 신앙규범으로는 사도성, 보편성, 권위성을 들 수 있다. 사도성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 생활한 12제자들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세상에 파송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기록한 책이거나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이 기록한 책 들이 사도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 되었으며 보편성은 초대 교회가 1세대, 2세대, 3세대로 접어 들면서 다양한 신앙 문서들이 시기 장소에 따라 쓰여지고 읽혀지게 되었다. 여러 신앙 문서중에서 각 지역 공동체안에서 자연스럽게 보편적으로 거룩한 책으로 인정받는 책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신적인 권위성으로는 초대 공동체 안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된 책들은 대부분 신적인 영향력이 있는 문서이기에 선별된 것이었다. 따라서 성경의 영감으로 기록된 신적인 권위성이 정경을 판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또한 이단과 정통의 구별을 위한 신앙규범에 있어서 초대교회는 외부적으로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내부의 적, 즉 이단사상에 대처해야 했다. 예수 십자가의 복음은 구약에 근거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이면서 구약 율법의 완성이기에 율법 중심의 유대주의를 넘어서야 했고, 동시에 그 당시 성행했던 헬라 철학 사상이나 이방 종교와의 혼합을 경계 해야 했다. 초대 교회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신앙규범을 정경성이 있는 신앙문서의 수용, 짧은 신앙 신조 또는 신경의 배포 및 암기, 초대교회의 조직화와 공의회의 결정으로 보고 이를 신도들에게 가르치며 이단에 대처했다. 정경화 규범이었던 사도성, 보편성, 신적인 권위성에 의거한 정경성이 있는 신앙 문서들이 각 지역 공동체 안에 수용되어 하나의 신앙 규범이 되어 이단에 대항했다. 효과적으로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짧은 신앙 신조 또는 신경들을 만들어 배포하고 암기하여 이단에 대처하게 하였다. 장로, 집사 등 직분자들 중심으로 이단에 대처했고, 이단의 공격을 받을 때, 사도적 권위를 지닌 주교가 교회를 지키는 힘을 발휘했다. 전 교회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정통 교리 차원의 문제들은 각 지역 교회의 대표자가 모인 공의회에서 결정하여 방향을 설정했다.

[ 몬타니즘, 도나티즘, 펠라기아니즘 이단 ]

고대교회에 등장하는 이단 사상들은 한편으로 교회의 문제와 관련 하여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 의해 발흥하였다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A.D. 170년경 몬타누스는 성경구절을 인용해 자신이 예수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한 성령의 대언자라고 하며 새로운 예언활동을 하고, 교회의 윤리가 타락하고 세속화와 제도화 되는 것에 강한 반발운동을 전개하며 성령을 받아 엄격한 금욕생활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다. 현대  교회에서 통일교나 신천지 등에서 교주가 자신을 재림예수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단 교파뿐 아니라 현대교회에서 목회자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든지 하는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러한 몬타니즘적 요서의 극복을 위해서는 말씀선포를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되도록 하여야 한다. 밀라노 칙령(A.D 313) 을 통해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된 이후 한 배교 성직자에 대한 처우 문제로 논란이 일었는데 엄히 처벌하자는 도나투스의 이름을 따서 도나티즘이라 알려졌다. 이들은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아닌 거룩한 인간 대리인에게 의존하며, 기독교 복음의 은혜와 치유의 능력이 교회와 목사들의 순수성에 달려 있다고 보는 오류에 빠짐으로 이단의 옷을 입게 된다. 복음은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로 인해 은혜를 입고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펠라기우스는 결함 없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엄격한 영적 생활과 도덕생활을 강조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성 어거스틴과 일생 동안 논쟁을 벌였는데 어거스틴이 인간 본성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죄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논리가 거룩한 삶을  살려는 인간의 모든 동기를 제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며, 오늘 우리의 죄인 됨이 원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현대교회에서 펠라기아니즘적 요소를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뉴에이지사상인데 내가 하나님이 될 수 있고 인간도 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인간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정해진 규범을 지나치게 앞세우면서 교만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펠라기우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 당시에 외쳤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 이슬람교 ]

6세기 후반에 중동의 메카에서 태어난 무하마드는 7세기 초에 메카를 성지로 하여 이슬람교를 창시한다. ‘샤리아라고 하는 이슬람의 율법은 코란, 하디스, 디아스, 이즈마의 4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계획적이고 폭발적인 성장으로 기독교 세계에 최대 위협이 되고 있다. 그들의 경전인 코란의 내용을 보면 자신들의 종교를 따르지 않는 자는 다 죽일 것이라든지 여성에 대한 학대나 성적 범죄를 합법화하는 구절 이라든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잘 못된 종교로 인해서 수 없는 선량한 무슬림들이 억압받고 고통 받고 있으며 선교적 방법을 통해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 이슬람교를 통해 우리는 경계심을 가지고 그 위협에 대처해야 하는데 그들의 적극적이고도 계획적인 포교활동은 상상을 초월한다. 포교를 위해서는 해당 국가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물론 얼마든지 거짓말 (타끼야)을 해도 용서받으며 배교자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등 잔인한 정복전쟁 방식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세력을 확장시키는 바 우리는 그 위험성을 널리 알리고 대처해나가야 한다선교적 접촉방법은 그들의 잘 못된 교리를 일깨우는 것으로서 가능한데 우선 소극적인 방법으로 기독교의 기본 사상에 대한 코란의 묘사는 당시에 아라비아반도에서 성행했던 영지주의적 이단사상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이것이 기독교 정통 신앙이 아니라는 점을 설파함으로써 선교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한 문제로 접근하여 이를 위해 구약의 수많은 예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성취 되었음을 알려주고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약속된 구원자 그리스도임을 증명한 이는 예수 외에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성경을 통해 확증되었기에 기독교가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 성경은 구원을 얻기 위해 산에 이르는 다양한 길이 아니라 유일한 길임을 전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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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해석  5요소 분석(모세 오경)

 

1.     족보  (창세기 10 1~32 : 노아의 자손)

 

     1) 창세기 10장의 내용 : 창세기 10장에서 언급하는 족보는 대홍수 이후 노아의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이 온 세계에 퍼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홍수 후에 그들의 아들을 낳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축복 그대로 이들은 온 세상에 거하게 되었다. 본 장은 홍수로 말미암아 멸종 위기에 놓였던 인류가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다시 급속 확산된 것과 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지게 된 원인이 밝혀져 있다.   2)  9장 및 11장 과의 관계 : 9장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무지개 언약을 맺는 장면과 노아가 포도주 사건으로 셈과 야벳을 축복하고 함(가나안)을 저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홍수 이후에 노아의 후손들이 전 세계에 퍼지게 되는데 축복을 받은 셈과 야벳의 후손들과 함의 잘못으로 저주를 받은 가나안의 후손들이 10장에서 그 흩어져 사는 지역이 소개된다. 또한 다음장인 11장에서는 바벨탑사건과 셈의 족보 및 데라의 족보가 나온다. 타락 이후에 죄성의 유전으로 인간은 언제나 교만하여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게 된다. 이 때까지는 아직 언어가 갈라지지 않아서 높은 탑을 쌓아 이름을 날리고 흩어짐을 면하려고 바벨탑을 쌓게 되나 바벨탑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여 탑 건립을 중단시키고 온 세상으로 이들을 흩으신다. 또한 셈과 데라의 족보를 통해 아브라함의 계보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10장의 창세기 전체에서의 역할은 대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이 전 세계로 흩어져 살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3)  표현상의 특이사항 : 10장에서 함의 후예인 니므롯에 대한 언급과 바벨탑이 건축되는 지역인 바벨을 언급한 뒤 다음 장에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오는 점이 특이하며 셈의 자손을 열거하면서 10 25절 에서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 : 나눔 – 원형 פָָלַג 의 니팔형 뜻 : 나뉘다)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라고 하면서 이름에 대한 뜻을 굳이 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창세기에서는 이 ‘나뉘다’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기로 하고 단지 이 내용은 벨렉과 욕단의 두 사람을 통한 세상의 구분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하여 보고자 하는 것은‘셈의 후예’들인데 셈의 자손을 열거하면서 10 25 에서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 : 나눔 – 원형 פָָלַג 의 니팔형 뜻 : 나뉘다) 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라고 하면서 26~31까지 욕단의 계보를 열거한다. 다른 족보에서는 볼 수 없는 ‘나뉘다’라는 개념에 주의해야 한다. 이어서 11 10~32까지 에서는 셈과 데라의 족보를 열거하면서 아브라함의 계보를 밝히고 있다. 또한 역대상 1장에서 다시 셈의 자손중 에벨로부터 벨렉과 욕단으로 갈리며 벨렉-아브라함으로 이어져서 아브라함때 이삭과 이스마엘로 나뉘는 것과 함께 아브라함-이삭으로 이어져서 에서(에돔의 조상)와 이스라엘로 갈리는 것 등을 상세히 기재하고 있다. 정통계보가 아닌 이스마엘, 에서 등에 대한 언급은 이들의 후손들이 훗날 이스라엘과 수 천년 간 적대 세력으로 존재하는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욕단의 계보로서 아브라함-다윗-예수로 이어지는 정통 계보가 아님에도 창세기 12장에 이어 역대상 1장에 두 번이나 언급한 것과 관련 욕단의 계보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어떤 시기에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예상할 수 있다. 벨렉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어서 세상은 벨렉의 후예와 욕단의 후예로 크게 대별될 것임을 예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이야기 (민수기 22:2~24:25 : 발람이야기)

 

1) 민수기의 오경내에서의 위치와 의의 : 민수기는 출애굽기, 레위기와 신명기의 다리 역할을 하는 책이다. 시내산에서의 율법이 실제 광야생활을 거쳐 수정, 보완되고 있으며 광야의 새 세대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준비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현실에 맞게 수정, 보완되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오늘날의 교회에서 보여지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광야에서 똑같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해야 하며 아울러 신약에서 인용하고 있는 민수기의 율법을 하나 하나 확인해서 신학지식으로 정립해야 한다. 2) 민수기의 구조 : 민수기는 크게 보아서 시내산에서의 출발준비(1:1-10:10), 광야 여정(10:11-25:18), 모압 평지에서 출발 준비(26:1-36:13)로 나눌 수 있다. 발람의 이야기는 광야 여정 중에 삽입된 것인데 바로 전장인 21장에서 아모리 족속을 정벌한 이야기가 나오고 25장에서는 브올에서 음행과 우상숭배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시어 염병의 벌을 내리신 이야기가 나온 뒤 하나님께 모세에게 미디안 족속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발람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고 이방 족속을 저주하고 멸하는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여야 한다.  3) 발람이야기 : 민수기 22 2~24장에 이르는 발람의 이야기 중에서 22 2장에서 heading에 해당하는 22 2절은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이 구절에서 두 개의 동사, ‘보다와 ‘행하다’ 이 두 단어는 각기 그 이후의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는 데 ‘행하다’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 민족을 저주하고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일들을 행하시게 되고,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그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보게’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이야기에서 축복하고 저주 하는 것과 관계된 ‘행하다’ 계통의 동사는 40여회 사용되었으며 ‘보다’ 계통의 동사는 28회 사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약속하신 대로 실천하는 신실하신 분’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이야기의 플롯은 발람과 발락과의 갈등 및 해소를 중심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과 발람과의 갈등 및 해소를 기준으로 살펴봐야 한다. , 발단은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으로 등장인물과 배경 등이 나오는 부분이므로 22:2~6절까지로 잡고 갈등부분은 발람이 하나님의 말을 순종하는지 거역하는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야 하므로 발람이 우유부단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가라’는 허락을 받는 부분인 22:7~20까지이며 하나님께서 가라고 허락한 뒤 사자를 보내어 나귀로 하여금 가지 못하게 하면서 발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행하도록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부분을 절정으로 잡아서 22:13~35까지이다. 대단원은 이후 22:36부터 24:25까지로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실하게 예언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인도하에 흥왕하고 번성하게 되며 악을 행한 민족들이 멸망하게 됨을 알린다. 발람의 이야기에서 또 한가지 알아야 할 사항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발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함으로써 축복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3. (신명기 5 1~21 : 십계명  

 

1)  신명기의 오경 및 구약전체에서의 위치 : 신명기는 출애굽기,레위기 언약의 갱신된 언약으로 오경의 결론이며 역사서의 서론에 해당한다. 광야 제 2세대인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그리고 율법에 대한 재 설명이 필요했다. 어떻게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설명 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할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는 점이다.  2) 십계명의 특징: 십계명의 법은 절대법으로서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지시들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언약이라는 개념에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10계명에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본질이 반영되어 있으며 법전으로서가 아니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개념 으로 접근해야 한다. 십계명은 에덴 동산에서의 범죄로 인해 선택해야 하는 삶으로 바뀐 인간 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지 않는 쪽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선택의 기준을 준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별된(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는 지침을 주신 것이다. 계명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이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이 십계명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로 요약했다.  3) 신명기 십계명의 특징 : 신명기 에서 10계명은 5 7절부터 21절까지에 나타나 있다. 5장에서 모세는 시내산에서의 언약과 십계명에 대해 회고하면서 이 율법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앞날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하고 있습니다. 특히 모세는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신세대들에게 과거에 그들의 부모 세대에 주어진 율법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따라서 5장의 결론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라’로 볼 수 있다.  4) 10계명이 포함된 5장의 전후 장(4, 6) 분석 : 4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성실히 지키는 자가 누릴 축복에 대해 언급하고 6장에서는 ‘여호와를 사랑하라’를 강조하면서 자녀들에 대한 율법 교육도 철저하게 시켜서 대를 이어 영원히 지킬 수 있도록 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5장에서는 율법의 핵심인 10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라는 의미로 결론지을 수 있다.  5) 출애굽기와 비교한 신명기 십계명의 특징 : 여기서는 출애굽기의 10계명과 신명기의 10계명의 차이점을 분석해 보면 가장 큰 차이는 제 4계명에 있는데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를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초점을 맞춘 반면,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보다 더 조명하고 있다. 또한 제 5계명에서 신명기의 10계명은 복을 누리리라를 추가하였다. 10계명에서는 신명기가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라는 말을 앞에 두어 강조하고 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 둘 다 모세의 작품으로 인정한다면 양자간의 차이는 이제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가나안의 문란한 이방 문화를 극복하여야 하는 것을 앞두고 일부 수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내러티브(사건 기술) (레위기 24 10~23)

 

         1) 내러티브 본문 :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그 저주한 자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 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2) 내러티브의 전후장(23,25)과의 관련 분석 : 23장은 절기에 관한 규정이고 25장은 안식년에 관한 규례이다. 절기와 안식년은 다른 규례 보다 그 비중이 큰 중요한 사안들이고 그 사이에 위치한 24장은 등잔불 및 진설병 규정과 복수법 사이에 나레 이션으로 애굽인 아비와 슬로밋이라는 유대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다가 징계를 받아 죽은 사실이 언급되었다. 이는 여호와의 성호를 모독, 혹은 저주하는 일이 얼마나 큰 신성 모독죄인가를 보여 주고 그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본 내러티브는 범위를 정하는 것이 까다로운데 일단 24장 10절에서 시작하여 16절에서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저주한 자를 죽이는 결과가 보복법의 끝인 23절에 나옴으로써 결국 23절까지를 같은 같은 나레이션으로 보아야 한다. 특별히 등잔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불이 꺼진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하는 행위이므로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과 진설병은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여섯 개씩 두 줄로 진설해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제물이 되어 여호와께 뜻과 정성을 다해 헌신해야 함을 의미하는데 이 뒤에 여호와를 모독한 나레이션이 나오고 그 뒤에 상해죄에 대한 보복법을 배치함으로써 여호와를 모독한 죄를 돌로 쳐죽이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 하고 있다. 등잔불과 진설병은 다른 어떤 규례 보다도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에게는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규례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보복법 역시 다른 어떤 규례와 율례 보다도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서 여호와를 모독한 자에 대한 나레이션과 보복법 뒤에 23절에서 여호와를 모독한 죄의 결과인 돌로 쳐죽이라는 모세의 명령을 실행함으로써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본 나레이션의 전달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3) 내러티브 자체의 내용 분석: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칭호를 사용하기를 두려워할 정도로 경외했는데 혼혈아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모독하고 저주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돌려 쳐죽이는 사형을 면치 못하는 무서운 범죄 행위가 되었다. 하나님의 엄한 진노를 받은 자를 벌하기 위해 증인들이 안수를 하도록 함으로써 증언이 진실임을 증명하고 그들이 들었던 모독과 저주를 범죄자에게 책임 지우는 의식이었다. 이 형벌이 하나님을 모독한 자를 이스라엘 진 밖으로 끌어내어 죽인 것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서 축출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 진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한편 공개적인 처형 방법을 택한 것은 신성 모독죄가 얼마나 큰 범죄인가를 보여 주고, 또한 회중으로 하여금 그러한 중죄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5. /노래 (출애굽기 15 1~18: 모세의 노래)

 

      1) 모세의 노래의 의미 : 모세의 노래는 바로의 병사들이 홍해에서 수장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안전하게 된 상태에서 모세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부르는 노래인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르는 찬송이었다. 이 노래는 일종이 승전가인데 이 노래에서 사용된 단어는 찬송(3), 노래(3) 등 주를 찬송하는 노래의 주제로 6회가 사용되고 주의 오른손(3)이 주의 팔, 주의 손, 주의 힘, 권능, 위엄, 콧김,,거룩, 영광, 인자하심 등 주의 권능과 성품에 관련된 단어들이 총 13회 사용됨으로써 출애굽기의 모세의 노래는 주의 권능과 성품을 찬양하는 노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찬송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그 큰 권능과 인자하심으로 에쯔라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내시어 미래에 도래할 천국백성으로의 훈련을 시작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가 있다. 2) 모세의 노래가 속한 출애굽기 15장의 구조 : 15장은 모세의 노래와 함께 최초의 선지자로 지칭 받는 미리암과 여인들의 화답과 함께 마라의 쓴 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마실 수 있도록 치료함으로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교훈을 주셨다. 3) 14장과 16장의 분석 : 14장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바로가 변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뒤 쫒다가 홍해에 수장되는 내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를 쳐다보며 공포와 절망에 빠졌으나 곧이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16장은 만나와 메추라기의 이야기로 백성들의 불평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나타낸다. 따라서 15장은 우리의 삶이 기쁨과 함께 고난이 있으며 찬송과 함께 불평이 공존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극복하여야 하고 불평보다는 찬양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모세오경 분석에 대하여

 

모세오경 본문을 다섯가지 요소( 족보, 시가, 이야기, , 내러티브)로 분류해서 각기 그 의미를 파악해보았다. 특별히 이번 술취한 노아의 사건과 관련해서는 수업이 목표하는 바와 같이 노아 행동의 잘잘못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전적으로 나레이터의 언급에 주목하여야 할 것 같다. '당대의 의인' 노아가 홍수이후의 회복된 땅에서 포도원을 경작하여 풍성한 수확으로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자고 있었는데 내러티브에 의거,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포도주는 '야인 [yayin] '으로 포도즙이 아니라 '발효된 술'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 경우에 신구약 전체에서 술에 관한 부정적인 언급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할지 과제로 남는다. 또한 노아의 아들들이 노아의 하체를 보았느냐 안보았느냐의 문제를 놓고 함의 후손들이 처참할 정도의 인종적인 저주와 차별을 받는 문제와 관련해서 어떻게 신학적으로 해석하여야 할지 궁금하다. 그런데 성서는 술에 대하여 두 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다. 일단 구약 안에서만 살펴본다면 술은 대부분 '포도주'를 의미한다. 이 포도주를 많이 마셔야 취하는데, 구약 시대에는 포도주를 취할 만큼 많이 저장해 놓고 마시는 사람들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왕이나 돈과 권력이 있는 상위층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풍요로운 사람이나, 잘 사는 상류층 사람들이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할 수 있었다. , 구약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는 행동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문맥은 많은 경우에 부를 건강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일부 계층을 고발하는 것이다. 막연하게 일반인을 대상으로 "술 취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다. "마시고 취했다"라고 나레이터가 소개하는 내용 중에 "걱정없이 즐거운 상태에 있다"는 정보를 주는 구약의 본문들이 무척 많다. 나레이터가 어떤 뉘앙스로 말하는지를 정확히 확인해야한다. 정리하자면, 구약의 '포도주' 개념에는 이런 이중성이 있다. 이 둘을 잘 구별해야 한다. 더 나아가, 구약에서 노아의 이야기를 통해 '포도주'가 처음 등장한다. 이 포도주의 상징성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돌보심, 안식(상류층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의 의미를 지니다가, 신약으로 가서, 예수님의 첫 이적 사역인 '가나의 혼인잔치' '최후의 만찬'을 거쳐, 오늘날 교회의 '성찬식'으로 그 상징성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함의 후손들의 저주와 차별의 문제에 대하여서는 노아 사건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에 들어가 하나님의 안식에 거함'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함이 한 행동은 단순히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언약의 안식을 거부한 행동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결과는 오늘의 교회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기' 이다. 영원한 죽음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이 '인종적인 저주와 차별'보다 약한 결과인지는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처럼 성경본문은 단편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연습이 되어야 한다. 비단 술에 관해서뿐 아니라 다른 많은 문제들에서도 성경본문들간에 상호 모순되게 기술하고 있는 거 같이 느껴지는 부분들에 대해 나레이터의 뉘앙스를 기준으로 다시 한번 해석함으로써 올바른 성서 해석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이다.

 

성서 해석에 있어서 원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선 족보들(복수형), 계보를 뜻하는 תוֹלְדוֹת(톨레도트)를 창세기 안에서 찾아 보면 창 2:4(천지창조 내력), 5:1  (아담 자손), 6:9(노아의 족보), 10:32(그 백성 들의 족보), 11:10(셈의 족보), 25:13(그 세대),37:2(야곱의 족보) 에 나오는데 한글 번역으로는 족보, 세대, 계보, 자손, 후손,내력, 대략 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지만(실제로 한글 개역개정판에서 다양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원어로 분명히 같은 단어를 쓰는 것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인류의 족보와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천지창조는 인류구속의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2:4),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거룩한 선포였다. שְׁמוֹת(쉐모트) '이름들' '출애굽기'의 원어 명칭인데 출 1:1이 야곱의 자손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쉐모트'라고 하였 으므로 '사람 이름'을 뜻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 명칭으로 판단해보면 출애굽기의 주제를 '시내산에서의 언약'이란 측면보다도 12지파로 대변되는 '이스 라엘 백성의 형성'이라는 측면을 더 중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언약적인 중점은 전적으로 레위기로 넘겨야 할 것 같다. 쉐모트의 단수형인 쉠(שֵׁם)이 모세(משׁ)의 이름을 거꾸로 해놓아서 언어적인 유희로 볼 수 있는데, 모세가 출애굽기의 저자가 맞다면 출애굽기의 주인공이 모세라고 보았을 때 재미있는 설명이 되는 것 같다. 출애굽기의 원어 명칭과 어떤 관련이 더 있을지 묵상해 볼 일이다.

 

레위기는 제사와 음식에 대한 설명과 함께 거룩, 정결, 부정 등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정리하였을 때 지루하고 따분한 책이었지만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 언약을 중심으로 구약성경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다시 보게 되었고 이번 강의를 통해 레위기가 죄인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가? ,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레위기의 원어가 봐이크라( וַיִּקְרָא )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로 번역되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부르셨는데 (가까이 오라고) 가까이 오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설명해 놓으신 책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히브리서는 레위기의 눈으로 읽어야 하고 레위기는 반드시 히브리서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습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들이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구약의 제사장보다 훨씬 우월한 큰 대제사장임을 강조하여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술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에 특별히 히브리서와 같이 읽어 보았는데 피상적인 개념외에 더 깊은 뜻은 아직 잘 모르겠다. 혹시 두 책을 묵상하는 좋은 방법을 알고 계시는 믿음의 동료들이 있으면 함께 나눔을 원합니다. 이번 강의를 통해서 신약성경에서 얘기하는 '영화'의 단계에 가기위해 거쳐야 하는 '성화'와 관련 '거룩' '성화'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구약 백성들이 더 쉽게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레위기에서 정한 규정대로 하면 되고 횟수도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매일 새롭게 되어야 하고 상상으로도 죄를 범해서는 안되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완전한 성화는 '죽음이 임박'해서나 혹은 '죽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0:10)의 말씀이 무색해진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탐구해봐야 할 주제 같다.

 

민수기의 법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출애굽기, 레위기의 법이 실제 적용되는 과정에서 수정, 보완된 법인데 실제로 신약에서 민수기의 법을 더 많이 인용한다는 설명에 많이 놀랐다. 그렇다면 민수기의 법과 출애굽기, 레위기의 법을 하나 하나 대조해가면서 음미해야 할 필요가 생기고 실제 사역현장에서도 필수적인 지식일 뿐 아니라 심도 있게 묵상해야 할 내용으로 생각된다. 광야라고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라고 보았을 때 광야는 바로 현재의 교회이며 여기서 발생되는 모든 문제점들을 짚을 수 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 그 안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명기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순종하지 않은 죄로 징계를 내리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징계조차도 여호와의 정의를 열국중에 증거하게 될 것인데 그들이 순종하여 세상의 빛이 되었다면 빛이 된 대로 불순종으로 멸망하면 멸망하는 대로 여호와의 공의를 만천하에 드러낸다는 것이다. 신명기의 주제를 흔히 '주 여호와 네 하나님을 사랑 하라'로 얘기하지만 신명기를 차분히 읽다 보면 곳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할 것을 예견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벨론 유수로 붙잡혔다가 되돌아와서 편집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우리가 신구약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어진 '무오의 진리'임을 인정한다면 사람의 의도라기 보다는 역시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 아닌가 생각케 한다. 이번 학기 수업에서는 가급적 신약하고 연결시키지 않고 구약 자체만으로 해석하려고 일부러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특별히 신명기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예견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신명기의 복음을 통해 로마서 7장과 8장의 모순된 것 같은 바울사도의 주장을 명확하게 깨우치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 모세오경 연구의 최대 수확인 것으로 생각한다. 즉 육신의 죄를 끝내 극복할 수 없었지만 ( 7:2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8:39)고 하여 신명기의 "지키지 못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 받을 것"이라는 답을 신명기를 통해서 비로소 얻을 수 있었으니 이처럼 성경 정독과정에서 신구약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올바른 성경 읽기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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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란 신(theos)과 말(logos)의 결합어이다. 즉 신을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은 각 시대마다 그에 맞는 시대적인 소명이 있는 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 소명을 정확하고 깊이있게 역사 책임적 과제를 설정하고 구체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봉사할지에 대해서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어진 성경을 정확하고 바르게 알기 위하여 신학을 공부한다. 일반적으로 신학은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실천신학으로 나누어서 학습하게 된다. ‘오직 성서로'라고 외친 복음주의자들의 의로움을 경외한다. 그들의 통찰력에 감사할 따름이다. 일점 일획 까지 성경전체가 성령의 역사로 기록된 것을 믿지 않고서는 성경을 통한 감동과 그에 따른 삶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이 씌어진 이후 수천년동안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구절들까지 최근의 과학적 연구의 성과로 그 내용이 진실이었음이 속속 드러남을 보면서 성경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없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것이며 이것이 인간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인간 구원의 메시지임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관으로 일하고 있던 49세때 흉노를 토벌하던 이릉의 사건에 연루, 누명을 쓰고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는다. 이때 그는 "하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부르짖으면서 이후 여생을 전국을 돌며 자료를 수집, 역사상 최고의 역사서 "史記"를 저술하는데 투신한다. 이른바 '사마천의 사기'이다. 그가 알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은 계시는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신가?'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마천이 만약 우리의 하나님을 알았다면 신학의 위대한 전제인 하나님께서 존재하고 계시며 하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신적인 말씀 속에서 계시하시면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공의롭고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되었을 것이다. 물론 시대는 다르지만 그가 성경을 접하고 읽고 연구했더라면 로마서 5 3~4절 말씀에 큰 위안을 얻었을것 같다.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교회를 다니지 않던 때에(다니고 있었더라도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신앙의 단계가 초등학문의 수준에 머물고 있을때) 친구들과 종교문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 지면 늘 등장하는 주제가 삼위일체론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AD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령의 온전한 신성을 선언하여 삼위일체론이 정통신앙으로 인정된 것과 관련해서 일종의 정치적인 회의에서 정통과 이단을 구획하는 것일 뿐 이런 문제들이 종교의 본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씌어졌음과 그러한 공의회조차도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결과였던 것 같다. 지금도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규정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대표적으로 창세기 1:26 '우리라는 복수개념' 요한복음 14:26에서 말하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등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성령의 신성과 관련해서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즉, 구속사역, 구원의 계획 속에서 성령 하나님을 이해하여야 하며, 성도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성령이 실제로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면, 우리가 성령에 참여함으로써 신적인 본질을 공유하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종교가 그 위에 설수 없을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유의지이며 창조된 세상으로부터도 초월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 창조의 교리는 성서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완성하시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바볼트만은 특히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창조교리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들과 구별하게 해주며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창조교리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성서의 다른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존엄의 이유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찬양하도록 피조물을 지으셨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으므로 피조물 사이에는 연결점과 유사점이 있는데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더불어 구원의 길로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섭리란종말을 향한 사물들의 질서의 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피조물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신다. 악을 징벌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역사의 완성 때에 삶의 모든 악과 불의들을 고치실 것이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목표의 근원이시며 그 목표의 완성을 향해 모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종말론적인 구속사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짐으로써 공통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목적 하에서 지으셨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에게 의지해야 하는데 여기에 육체와 혼과 영이 따로 떨어져서 의지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 셋이 각기 기능을 달리할지언정통일된 전체가 다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을지라도 루터가 얘기한 것처럼말씀과 성령으로 회복할 수가 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이고 그리스도이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점진적으로 회복된다는 루터의 이론을 정교하게 발전시켰으나 그들 종교개혁자들은 완전한 형상의 회복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결론을 맺고 또 다른 삶에 가서야 완성된다고 본다. 하나님의 형상을 종말론적인 목적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리스도안에서의 공동체로 보아야 하며 그것은 교회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성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친히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16:23)라고 하시어 영생을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목숨을 바친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서 순교에 까지 이른 것을 묵상해보게 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에 따라 순종하여 삶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야 하는 것이다. 기독론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지닌 분임을 인정해야 하고 한 인격안에서의 두 개의 완전한 본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말씀(Logos)이신 예수' 개념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및 계시적 측면을 강조하고 '아들이신 예수' 개념으로 예수의 역사적 측면을 조명하는 한편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신적인 아들임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욕정으로 부터의 결과가 아닌 '동정녀 탄생'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임을 성서의 증거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대속 죽음을 통한 인간 구원이었는데 이는 구원론이 기독론을 근저로 형성된 것임을 반증한다고 보아야 한다.

 특별히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존 웨슬리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그의 신학의 성패가 달렸다고 생각되는데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을 더욱 중요시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루터파나 칼빈주의와도 이해를 달리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구분에 있어서 어느 한 쪽을 더 중시하는 것이 복음주의 정통신학에 비추어 가능한 것인지 알고 싶다. 구원론과 관련하여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설파한 로마서 7장의 ''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7:5) .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여러 성경을 대조하여 분석하고 묵상해 보았는데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의 부분에 대해서 '죄가 그 하고자 하는 바를 율법을 이용하여 우리 지체중에 역사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경세적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활동하시는데 성령께서는 인간 개개인의 구원에 있어서 역사하신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구원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동체적 역할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는 죄가 없었고 죄로 인한 소외도 없었으나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된 이래 사람들 사이에서의 소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소외를 가져 왔고 이를 치유해야 하며 이에 대한 대부분의 역할을 성령께서 인도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담당하고 있다. 교회는 단순히 어떤 건물이나 사람들이라는 정태적 관계라기 보다는 계약, 하나님 나라의 표지, 공동체와 같은 동태적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교회는 현재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별한 계약 관계 속에 있는 백성들이 종말까지 이어지는 공동체이다. , 교회는 종말론적 계약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계약 백성이 필수요소가 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 개념 정립에 선결되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시간적 순서가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이 시간이 있을 수 없고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미 인간세상에 들어와 계신다. 그 분께서는 우리의 현재적 실존속으로 뚫고 들어와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이미 현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들어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교회에서의 현재의 삶은 앞으로 도래할 영원한 세상을 위한 훈련도장이요 준비장소이다. 종말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류구속의 원대한 계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어디로 이끌고 계시는가. 지금의 세계는 하나님의 계획중에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묵상해 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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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倫理意識

신학일반/신학 산책 2020. 4. 24. 04:33 Posted by forest38

그리스도인(목회자 포함)의 윤리의식(倫理意識)

 1.    서론

우리 안의 죄성을 극복하는 문제와 관련해서은혜만을 가지고 죄성을 덮으려고 하니 이것이 해결될 수 없다. 내가 스스로 자각하여 바뀌려고 하지 않는 한 죄성은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말이다. 이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연결시켜 보면 목회자의 성 윤리의식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내 안에 있는 죄성을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1:23~26까지의 말씀에는 성적타락이 우상숭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구절이 있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 몇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5:31-32) 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칼 바르트의 견해로 기억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이 '남녀의 관계' 자체를 의미한다는 말은 묵상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왜 수치와 두려움으로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렸는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모 이단교파가 제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명확한 반박논리를 정통교리로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도 연구대상이다. 영적인 간음과 육적인 간음은 어떤 관계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간음을 더 큰 범죄로 보시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상숭배를 영적인 간음이라고 전제하는 한도내에서의 논리이다. 앞서의 로마서 구절에서 영적인 간음을 범한 인간을 육체적 타락에 내던지셨다고 해서 선후로 보아 영적인 간음이 육체적 타락의 원인이 되며 또한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라는 구절로 비추어 보아 원래 인간은 원초적으로정욕의 죄를 짓는 존재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영적인 간음을 하지 않으면, 즉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바라보고 성령의 열매를 바라고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면 육체적으로 타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되며 오직 성령의 은사만이 육체적 타락을 막아 줄 수 있다고 해석을 해보았는데 강의 내용을 첨가하자면 여기에  인간 자신의 뼈를 깎는 노력이 동반해야 한다고 할 수 있겠다.

2.    본론

1)    그리스도인과 정의

목회자가 설교나 교단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강요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나 자신도 목회자나 교수도 아니지만 오랫동안 정치적인 논의는 피해 왔다. 좌파나 우파나 집권후에 저지르는 비리나 탐욕을 수 없이 봐왔기에 누구 편도 들고 싶지 않아서이다. 심지어 투표조차도 일부러 안한 적도 더러 있다. 그런데 마침 목회자의 정치윤리(정의와 불의)를 주제로 토론하는 이 시점에 국내상황과 관련하여 우려스러운 일이 워낙 많아서 몇 가지 정치적인 문제를 현실에 대입하여 생각해 보았다. 군사독재를 경험하고 80년대를 전후해서 대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대체로 극좌나 중도좌파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민주화된 정부에서 이러한 편향적 시각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인 것 같다. 오히려 자유야 말로 우리가 수호해야 할 가치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의나 자유는 하나님안에서 성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의로움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선택은 이러한 의로움이 구현되는, 하나님을 믿는 자유를 보장받는 선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 세상을 위기의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있는 종교탄압자들은 종교자유의 최대 적이다. 이들이 세상을 교란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들은 여러 정황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실수도 아닌 것이다. 백 번 양보하여 이것이 그들의 조작이 아니라고 해도 수억명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범죄들로만도 이들을 천인공노할 범죄자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북한의 인권문제와 더불어 세계는 언제까지 종교탄압자들을 두고 보아야 하는가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이에 대한 침묵의 대가를 하나님 앞에서 치르게 될 것이다.

2)    임신중절(낙태)의 문제

임신중절(낙태)의 문제는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당사자들에게는 큰 상실로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신학이라기 보다는 목회상담적 접근이라 문외한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안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다. 단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법적인 문제는 시대에 따라 국가에 따라 달라지고 있으니 논외로 친다고 해도 윤리적으로는 마땅히 당사자(태아 포함)의 관계적, 상황적 현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주변적 논리 위에 성경 말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여러 구절을 통해 태아는 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인격성을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중심축으로 하여 다른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처럼 당위적으로는 임신중절은 태아라는 인격체를 죽이는 것이라 안되는 일이므로 사전예방이 최선의 방책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실제 결과에 대해서는 사후대책, 즉 치유를 통해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치유책으로 제도적 장치와 법적 장치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이에 대한 종교적 치유가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임신당사자들의 의사가 출산(불행이 예상되는)이나 낙태를 결정한다고 보았을 때 사후에 슬퍼하고 위로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낙태를 결정할 경우에도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자신들의 결정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여야 한다. 매 건에 대해 우리는 우선 인권보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그의 은혜와 자비를 구해야 한다. 이것은 이혼, 사별 등 다른 모든 상실과 함께 온전히 당사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다. 제럴드  싯처는 "이러한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위대한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 제기에 능히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 분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3)    그리스도인과 이단논쟁

이단과 사이비의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훨씬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한국교회의 폭발적 부흥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작금의 신천지 등 이단은 한국 이단계보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정통 교리를 연구하여 대처를 잘 하여야 신도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단, 사이비의 문제는 공부해보면 금방 잘못된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몽매함만 깨우치면 되지만 정통으로 분류되는 교단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종교일치운동(애큐메니컬)에의 무분별한 참여, 성령으로부터 온 것 같지 않은 방언 현상의 창궐, 교회의 성장 제일주의, 교단간의 이기적 분열, 목회자와 신도간 파벌싸움 등 공동체의 신앙생활이 개인의 신앙에 오히려 해가 될 것 같은 상황이다. 사실 이렇게 혼란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이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해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 이제 신학공부를 해왔는데 오히려 성경에 대한 갈증이 훨씬 심해진 것 같다. 보다 많은 시간을 성경 읽기에 할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경 자체를 읽고 주요부분을 암기하고 라틴어까지는 무리일지 모르겠지만 성경원어인 헬라어, 히브리어만도 제대로 성경해석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성경읽기(암송 포함), 성경원어에 기초가 탄탄하면 그 위에 성경해석을 위한 여러 과목들은 독학으로도 가능할 수도 있다.

4)    그리스도인과 가정폭력, 결혼과 이혼

그리스도인(목회자 포함)의 가정폭력, 결혼, 이혼이라는 문제는 특별히 목회윤리 차원 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 이 문제가 목회윤리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성직자(제사장)라는 구별된 개념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텐데 그렇게 본다면 목회자는 무흠결이어야 하고 신성한 존재이므로 가정폭력이나 비정상적인 결혼, 이혼 등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면 파문이나 지위 박탈 등 엄격한 정죄의 결론 밖에 내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교의 전통은 목회자나 교사 등도 신도들 중 적임자를 선정하여 그 직을 맡기는 하나의 직분을 의미한다고 한다. 물론 그 경우에도 엄격한 선발 기준이 있다고 하지만 일반 성도들 중의 하나, 즉 보통 인간임을 전제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정폭력, 결혼, 이혼이라는 문제도 일반 성도들과 똑 같은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더구나 목회자 커플의 일방 당사자가 비신자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다만 신실한 목회자라면 가정생활도 충실하게 수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존경받는 목회자나 신실한 교회 장로, 권사분들의 부부 사이가 원만 하고 자녀가 축복 받아 잘 자라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봐 왔다. 감사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가정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우선 당사자 스스로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위로해야 하며 교회 공동체에서 목회자 가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 보살펴 주고 배려해 주고, 기도하는 과정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그리스도인과 4차 산업혁명 시대

대중문화는 현 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이며 매스미디어는 그 문화를 효과적 으로 전달하고 있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가 기독교 문화와 공존할 수 있는가가 토론의 핵심인 것 같다. 여기에는 교회음악을 대중음악으로 대체할 수 있느냐의 여부, 교회당에서의 설교 대신 인터넷 설교로 마찬가지의 효과를 볼 수 있는지의 여부, 성경책 대신 어플로 보아도 되느냐의 여부, 인공지능이 설교자가 될 수 있느냐 등 현재진행적인 많은 문제 들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자랐던 시대를 비교해보면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그 자체로서 가치 판단을 할 것이 아니라 본래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배치되는 지의 여부를 살펴보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올바른 신앙이 유지되는 한 어떠한 문화나 방식은 지엽적인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신앙관이 정립된 상황에서 첨단 과학기술은 오히려 폭발적인 전도의 도구가 될 수 있고 소외된 현대인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효과적인 사이버 공간에서의 피난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활용하기 나름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도래할 새 세상이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4차 산업혁명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활용하여야 한다. 인공지능의 시대같이 비인간적인 현상이 올수록 오히려 영적인 리더가 더욱 필요하게 된다는 예측이 많다. 세상에 문제가 많아질수록 교회가, 영적 리더가 할 일은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이 상식과 가장 진보된 과학에 부합하는 최상의 선택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더 빨리 임하기를 기대한다.

6)    그리스도인과 성적소수(동성애)의 문제

동성간의 성행위에 대해서 로마서 1 23~27절은 다른 문란한 성적 타락과 함께 설명을 한다. 성적인 문란이나 기형적인 성행위 등에 대해서 원인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들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번갈아 가면서 우상숭배와 육체적 타락을 두 번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서 반복하여 기술하는 것은 강조를 뜻한다고 배웠다.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이 인간들을 정욕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라고 한다. 특별히 남자들끼리의 행위를 "역리", "부끄러운 일" 등으로 표현하면서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동성애라는 정상적이지 않은 현상도 성적타락 중의 하나인데 이러한 성적 타락에 대해 성경에서 얘기하는 바를 살펴보다 보니 몇 구절이 찾아진다.바울은 우상 숭배의 배후에는 사탄, 즉 어둠의 영과 타락한 세상 권세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고전 10:19–22).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하나님께 범죄했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우매해지면서 우상숭배를 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육체적 타락에 넘어 가도록 놓아 두시고 또한 역리적인 육체적 타락에 까지 이르게 하신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적 타락의 최정점에 동성애가 있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서도 우리는 성적인 관계라는 것이 영적으로 무엇인지 조차도 사실 모른다. 하지만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또한 성경은 남녀간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5:31-32) 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명한다. 이처럼 "이성애"와 함께 "동성애"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훨씬 많은 학습을 한 후에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7)    그리스도인과 돈, 명예, 그리고 영적 탈진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으로서 명예나 영적탈진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면 돈(금전)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목회를 지속할 수 있느냐 그만 두느냐의 문제이므로 훨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사실 많지 않은 것 같다. 늦은 나이에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내에서 줄곧 여러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많이 봐왔다. 심지어는 장로파, 목사파로 나뉘어 서로 소송전을 벌이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도 하지 않을 행위들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 금전적인 문제였는데 이렇게 한 번 싸움이 벌어지고 나면 다시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 하다. 교회를 떠나고 끝나면 다행인데 인력을 동원해서 상대 파벌의 강대상을 점령하고 예배당을 지키고 서서 예배를 훼방하거나 하는 일까지 비일비재 했다. 돈도 돈이지만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이 일반 신도들을 더 힘들게 한다. 이런 분쟁은 한국에서의 일이었는데 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라 목회자에게 사례금을 못 준다거나 선교, 교육, 구제 등 각종 교회활동을 돈이 없어서 못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돈을 엉뚱한 곳에 쓴다고 법적 소송이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각자 자기들 돈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데 캐나다에 와서 보니 이민 교회의 현실은 대부분 금전적으로도 힘들고 교인들도 적어서 목회자들이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다. 큰 교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교인부족으로 어려워 한다. 변호사 합동사무실 같이 합동교회를 만들어서 대표목사 아래 여러 목사님들이 각 분야를 담당하여 운영하는, 목사그룹으로 구성된 교회를 운영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8)    그리스도인과 성윤리

최근 목회자의 성윤리 세미나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점과 대책을 살펴보았다. 전문 직업군 중에 성윤리, 성범죄 관련 문제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케이스가 목회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교육등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예방과 사후 대책 역시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한다. 어떤 분은 "이진 아웃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회자도 인간으로서의 약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유혹 받을 수도 있고 스스로 탈선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행위가 반복되는 경우라면 상습이며 병으로 보아야 하므로 목회직을 맡으면 안되고 이미 목회직에 있는 사람이라면 빨리 물러나서 다른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한다. 그러나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아서 오랫동안 사역해 온 직업으로서의 목회직을 단번에 떠나기도 어려울 것이고 또한 교단에서도 여러 사정을 고려해 엄정한 처벌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 성에 대한 욕망은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모두는 회심이전이나 이후를 막론하고 마음으로라도 이미 범죄 하였으며 앞으로도 범죄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딜레마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7:23)"라고 통찰하고 있다. 결국 목회자의 성윤리문제를 풀어나가는 핵심은 목회자의 윤리에 맡기는 것 보다는 시스템으로 갖추 어야 할 것 같다. 목회자의 건강한 부부관계와 함께 예방교육의 강화, 그리고 목회자가 탈선하고 타락할 수 있는 자리 자체를 피하는 것 등은 흔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예방책이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목회자 자신이 항상 죄인임을 인식하고 통렬한 회개와 자기반성을 통한 간절한 기도가 유일한 내적 해결책일 것이다.

3.    결론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길에 접어든 이상목회윤리가 아닌신앙윤리로라도 이 문제를 심도 있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사실 다루어지는 많은 주제들, 예를 들어목회자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윤리적 삶에 진실하고 당당해야 한다거나자신의 삶에 더 크고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등의 주제는 범인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이다. 목회소명과 연결되어 있는 목회윤리의 엄격성과 중대성을 생각한다면 목회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 알 것이다. 이런 문제를 놓고 교인들끼리나 신학도들끼리 많은 토론도 해봐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잘 이루어지지않고 원칙적인 얘기들만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에는 우선 성경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 우리는 많이 배워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총체적인 하나님의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 중에목회윤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 같다. 아마도 초인적인 내면적 싸움을 필요로 한다는 말일 것이다. 헨리 나우엔의 말은 치유에는 인간적인 한계가 있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 지는데 아직 책을 읽지 않았으나 내용이 기대가 된다. 이미 타락했으나 치유를 통해 소외를 무너뜨리며 인간간 관계를 회복하고 나아가 하나님과 다른 인간과의 깨어진 관계(죄성)를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줄 뿐이라는 말을목회윤리에 적용한다면 결국 윤리를 지키는데도 인간적인 한계가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는 완벽한 윤리적 완성자라기 보다는 상처받고 좌절하면서 깨달아 가는 존재로생각해 볼 수 있겠다. 사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공포 앞에 윤리이든 도덕이든 더욱 무력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 겪어야 할 것은 사도 바울과 같이 현실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매진하는 것인데 이러한 중압감에 인간은 자신의 생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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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윤리 임신중절(낙태)

 

1.    서론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고대 그리스의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의료의 윤리적 지침으로, 현대의 의사들이 의사가 될 때 하는 선서로 잘 알려져 있다이 중에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긴다라고 한다. 의학적인 차원에서 수태로부터 인권 존중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임신중절(낙태) 현황을 보면 2010 34만회에서 2017년에 100만건이었으며 대개 12주 미만의 태아에 해당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수치는 2019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 금지의 헌법 불합치 판정 후 통계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증하고 있다고 한다. 낙태와 관련하여 찬반양론이 거세다. 진보론자들은 낙태는 그 사람의 권리이므로 아무도 침범 못하며 태아는 의사표시를 할 수 없으므로 인격자가 아니고 부모가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우리 인간은 모든 권리가 허용된 것이 아니며 병원에서 의식을 잃고 있는 사람도 의사표시를 할 수 없고 부모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고 해도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여기서는 낙태관련 논쟁을 ① 법적 고찰 ② 윤리적 고찰 ③ 성경적 고찰을 통해 살펴보고 사례별로 ① 장애 확률이 높을 경우 ② 본인의 의사와 반한 경우(원치 않는 상대) ③ 결혼거부로 인한 경우(경제적인 사유)로의 실례를 통해 이의 대안을 도출하고 그리스도 인의 입장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 점검해 보기로 한다.        

2.    본론

  A.   임신중절(낙태)을 둘러싼 논쟁

    (1) 법적인 고찰 : 20194월 헌재의 낙태 합헌결정과 관련한 논쟁

낙태는 다른말로 임신중절이라고도 하며 이는 자연분만기에 앞서서 자궁내의 태아나 배아가 자연적 혹은 인위적으로 모체 밖으로 배출 혹은 모체내에서 사망하는 것이다.[1] 대한민국은 원칙적으로 낙태가 인정되지 않는 나라이다. (형법 제 27장)낙태를 한 임신부는 형법 269조에 의하여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행위 시술자 또한 처벌한다. 2019.4월 낙태금지의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리고 법 조항 개정을 준비중에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임신부의 자기결정권보다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고 있다. 그러나 모자보건법 법률 11441호에 따라 제한적으로 낙태가 합법화되는 경우가 있다. ①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이 정하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②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이 정하는 전염성질환이 있는 경우 ③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④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 임신된 경우 ⑤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이다. 1953년부터 도입된 이런 낙태죄 규정이 66년 만에 임신후 일정기간안에는 낙태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내용으로 바뀔 수도 있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11일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형사처벌하도록 한 형법 규정은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해 위헌“ 이라고 결정하였으며, 다만 낙태죄를 곧바로 폐지하면 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2020년 말까지 법 조항을 개정 하라는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2] 최근 이런 낙태 합법화에 대한 여러가지 이슈들이 계기가 되어 23만명 이상의 ‘낙태죄 폐지’청원에 정부 또한, 해당 청원을 계기로 정부는 낙태에 대한 법,제도 현황 및 쟁점을 검토하고 보완대책을 마련할 계획과 함께, 2011년 이루 국가차원의 낙태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2018년 낙태 실태조사를 재개할 것을 발표한 바 있다.[3] 그러나, 캐나다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법적 제약이 없는 국가이다. 캐나다 건강법에 따라 임신의 모든 단계에서 낙태가 가능하며 부분적으로 자금이 지원된다. 하지만 이런 캐나다도 1969년 이전에는 형법 제 251조(Section 251 of the Criminal Code)에 의해 모든 낙태가 불법이었으며, 이를 어기는 임부는 2년 이하의 징역, 낙태 수술을 수행한 의사나 낙태하려는 여성을 돕는 자는 최대 종신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는 범죄였다. 현 대한민국의 낙태죄보다 더 중한 처벌이었다. 1988년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낙태는 공공 병원에서 캐나다 정부의 보조를 받으며 선택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가 되었다. 또한 2015년 7월 캐나다 연방정부는 캐나다 의사들의 낙태약 처방을 허용하였으며, 온타리오 주는 낙태약을 무상 공급받을 수 있다.[4]

   (2) 윤리적 고찰

a. 생명에 관한 윤리적 고찰

낙태는 새로운 생명을 종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렇기에 낙태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은 언제 인간 생명이 시작되느냐에  관한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 구분하는가에 따라서 낙태가 살해 행위가 되는가에 대해서 구분할 수 있다. 생물학적 지식이 없던 과거에는 태어나기 전까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유전학파는 인간 유전자를 가진 모든 존재를 인간으로 규정하기에 유전 인자가 형성되는 순간을 인간의 시기로 본다. 사회결과학파는 생물학적 모든 근거를 부정하며, 개인이 인격적 주체가 되어서야, 혹은 이성을 행사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정의한다. 발달학파는 태아가 인간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발육기간이 경과되어야 한다고 본다.[5] 보수주의적 입장에서는 인간 생명의 시작을 정자와 난자의 수정부터로 찾는다. , 태아가 단세포 접합체 시점 에서부터 생명권을 지닌다고 주장한다[6] 그렇기에 유전적으로는 인간이며, 단세포 접합체이지만 무고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므로 임신 전 기간에 걸쳐 낙태 행위는 무고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살인 행위 이므로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인간은 출생과 함께 생명권을 지니므로 출생 이전까지는 자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출생 시점 에서야 비로소 모체로부터 완전히 독립한다.[7] 그렇기에 낙태는 도덕적인 문제를 지니지 않으며, 절충주의적 입장을 인정한다면 수태와 출생 사이 어느 시점부터는 낙태는 허용될 수 있다고 본다.

b. 여성의 권리에 대한 윤리적 고찰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 중에 낙태를 여성의 건강과 사생활의 권리로 인정하여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한다.[8] 여성에 대한 차별이 철폐되면서 여성의 건강을 보호, 증진시키고, 여성의 존엄성과 자유의지의 영역을 확장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임신은 태아가 여성의 몸에서 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몸을 사용할 권리를 여성에게 부여 받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만약 부모들이 임신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책임을 떠맡은 것이기에 태아에 대해 신체를 사용할 권리를 부여한 것이지만, 부모가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 모든 합리적인 조치를 강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우연히 존재하게 된 태아에 대해서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임신은 여성의 몸 안에서 일어나며, 여성에게 출산과 양육의 책임이 있는 현실에서 여성 스스로 낙태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이 주어져야 한다[9]고도 주장한다. 여성의 선택권에 의해서 낙태를 찬성 하는 사람들은 태아의 생명보다 임산부의 생명과 인권이 귀하다는 입장이다.

a. 조셉 플레처의 낙태에 관한 상황윤리

조셉 플레처는 낙태에 대하여 전통적인 생각과는 달리 모든 판단을 이웃 사랑에 준하여 생각하며 인간의 인간됨에서 출발한다. 그는 최소한의 지능이나 정신능력이 없는 사람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에서 플레처는 태아가 아직 자유나 자기 결정, 합리성, 수단이나 목적을 선택하는 능력 그리고 환경에 대한 지식 등이 모자라기 때문에 태아는 도덕적이거나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며 태아에게 요구되는 생명의 권리도 부인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0] 상황에 따라 윤리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낙태를 합리화 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조셉 플레처의 상황윤리는 기독교 윤리학이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절대적인 기준인 태아의 인격성을 포기한 것이 되어서 낙태의 문제에 있어서 생명경시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의 상황윤리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배치되는 이론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이론의 장점은 원칙적으로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만 현실적으로 피치 못할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낙태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으로서의 가치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성경적 고찰

a. 성경적 예시(용례)

누가복음 144절에는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임신 6개월이 되었을 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대목이 나온다. 그때 엘리자벳의 태중의 아이를 baby(βρέφος)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216절에 목자들이 보았던 구유에 놓인 아기 역시 baby(βρέφος)이다. 또한 시편 13913절에는 다윗이 주께서 내 장기를 만드시고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나이다라고 하면서 모태에 있을 때 이미 자기 자신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창세기 2522-23절에는 리브가가 쌍둥이를 이 단어가 children을 의미하는 토아밈(תּוֹאֲמִם)이다. 출애굽기 2122절은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자를 다치게 하였는데 낙태만 하고 달리 더 다친 데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반드시 배상금을 내되, 배상금액은 재판관의 판결을 따른다고 하였는데 이 경우에도 어린이, 젊은이, 소년이라는 의미의 child(παιδίον,נַ֫עַר)로 쓰고 있는데 전부 어머니 태 속의 아이이지 다른 표현을 쓰는 법이 없다. 결국 적어도 용어적 정의로 보아 성경적인 근거로는 수태 당시부터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것이다.

b. 기독교적 규정

낙태(落胎) 자살(自殺) 함께 자아를 파괴하는 살인죄이다. 임신 중절의 참상을 바로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태아를 낙태시키는 것은 죄가 아닌 듯이 잘못 생각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태아도 생명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 든지 낙태는 죄가 된다고 명시한다. 더욱이 패륜의 열매로 태아를 수술하여 버림은 삼중 죄악(6, 7, 9 계명을 범함)이다. 이와 같은 무서운 죄가 현대 사회에서 문제 되지도 않고 있으니, 죄악에 대한 불감증까지 겸한 부패한 시대이다.[11]

웨스트민스터 6계명 해설은 신자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모든 세심한 연구와 올바른 노력을 기울이도록 권면한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자살을 금지하며, 타자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대교리문답이 6계명 해설에서 마지막으로 권면하는자비로운 생각과, 사랑, 긍휼, 온유, 부드러움, 친절, 화평함과, 부드럽고 예의바른 말과 행동, 관용과 화해하려는 자세, 해를 입힌 것에 대한 관용과 용서, 악을 선으로 갚음과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고 도우며 무고한 자들을 보호하고 변호하는 우리가 공공의 장에서 실천한다면 우리는 생명, 전쟁, 낙태, 인공수정, 인간복제, 장기기증, 죽음, 안락사, 자살, 환경, 장애인, 폭력 사회, 피로 사회, 남북분단 통일, 테러 시대에 대한 근원적인 대책을 발견할 있을 것이다.[12]

파이퍼 목사는 낙태관련 대담에서 낙태는 다음의 여섯 가지 이유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① 낙태는 어머니 태 속에서 아기를 죽이는 것이다. 살인은 살인이며 이것을 성경은 용납하지 않는다. 창세기 96절은 다음과 같이 사형제도를 정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 셨음이니라” ② 만일 태아가 의사결정 능력이 없기 때문에 죽일 수 있다면 동일한 조건인 한 살이나 두 살 짜리 아이를 죽여도 좋다는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③ 동일한 논리가 그리스도인을 죽이는데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도하여 회심시킨 뒤 그들이 타락하기 전에 빨리 죽여서 천국을 보낸다는 것과 같다. ④ 로마서 61절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라고 한다. 아이를 죽여서 천국에 가게 하여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살인이라는 죄에 거하겠느냐는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실용주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⑤ 빌립보서 121-2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빨리 죽어서 그리스도 곁에 가는 것이 훨씬 좋다고 여기지만 자신의 소명에 따라 이 땅에 남아서 교회를 섬기는 일을 택하였다. ⑥ 심판자는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천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집이 이 땅에 있으며 또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13]

 B. 사례 연구

     (1) 장애 확률이 있는 경우

 "죄와 벌"이라는 법정 드라마에서 가족 중에 다운증후군을 갖고 있는 산모가 주치 병원에 다운증후군검사를 요구했는데, 담당의사가 검사를 해 주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보니 다운증후군이라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걸었는데, 법정에서는 원고가 미리 태아의 다운증후군에 감염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특별한 치료법이 없는 상황에서 산모에게 손실을 주지 않았고, 태아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 에게도 없어 낙태할 기회를 잃었다고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지적장애를 가진 자녀가 이미 있는 산모가 태아도 장애를 가질 수 있음을 염려하여 초음파검사와 유전자검사를 하였는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보니 지적 장애인이었다. 산모는 장애인인 줄 미리 알았으면 낙태를 했을 것인데, 병원이 검사를 소홀히 하여 장애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병원은 2 4천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드라마에서처럼 병원 측은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시 하였고,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자 고등법원은 이를 기각 한 것이다. [14]

   (2) 원치 않는 임신

a. 아들이 숨진 뒤 며느리, 성폭행, 낙태시킨 시아버지 사례

아들이 숨진 뒤 19개월간 20차례에 걸쳐 며느리를 성폭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며느리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자 낙태 수술을 받게 하였으며,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며느리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폭행도 하였다.[15]

b. 친딸 2명을 수년간 성폭행하고 낙태시킨 50대 아버지

아내 없이 두 딸을 양육하던 아버지는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큰 딸이 24살부터 29살까지 8차례 걸쳐 성폭행을 하였고, 성폭행으로 임신한 큰 딸이 수개월이 지나서야 낙태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폭행을 계속하였다. 또한 둘째 딸에게도 16세부터 4차례 성폭행을 하였다.[16]

   (3) 경제적으로 육아가 불가능한 경우  

a. 금전적인 이유

2011년 보건복지부의 인터넷 조사에 따르면 낙태를 하는 가장 큰 이유로 금전적인 어려움을 가장 많이 답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고용 불안정, 낮은 임금과 경제활동의 지장 등의 이유로 낙태 이유를 밝히고 있다. [17]

b. 임신중절 관련 주제의 연극

연극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임신 중절 문제를 소재로 다룬 연극으로 2007년 초연되어 10년째 무대에 공연 되고 있는 연극이다. 비정규직 외벌이 월수입 200만원 부부의 이야기로 임신을 하지만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하며 임신중절수술을 생각하는 이야기이다. [18] 

C. 대안

(1) 사례별 대안 제시(해결 방법)

a. 장애 확률이 있는 경우

태아 상태에서 차별은 바로 생명을 박탈하는 것으로 삶의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  기에 가장 심각한 차별이 된다. 현대의학은 아직도 유전성을 밝히지 못한 장애가 많으며, 기형의 경우도 30% 정도만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유전적 요인인지 환경적 요인인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리고 환경적 요인이 유전적 요인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고엽제 질환은 환경적 요인으로 얻은 질환이지만 유전된다. 유전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것은 증명되지 않은 가능성에 불과하며 그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확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능성일 뿐이다.

하나의 가정을 해 본다면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1963년 흔히 루게릭병  이라고 알려진, 몸속의 운동신경이 차례로 파괴되어 전신이 뒤틀리는 근위축성측색  경화증 진단을 받고 심각한 장애를 겪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장애를 극복하고 뉴턴-아인슈타인의 계보를 잇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만일 지금의 유전자 분석의 과학으로 그가 장애인이 될 것이 예상되었다고 해서 그 부모가 임신중절을 선택했다고 해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그가 일생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을 살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b.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

어쩔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낙태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렇기에 낙태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특히 낙태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껴야 한다. 학교나 사회 단체나 교회를 통해서 생명중심의 성교육에 관한 올바른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 특히 미혼모의 낙태를 막기 위해 미혼 청소년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위해서 청소년을 위한 성교육을 통해 순결을 지키도록 교육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원치 않은 관계를 통해서 임신을 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교육도 해야 한다. 특히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자신의 몸은 소중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정확히 심어 주어야 한다. 또한 어떠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대처 방법들에 대해서 교육을 해야 하며, 특히 혼자 있을 때에, 자신이 잘 모르는 사람을 따라 가거나 의도치 않은 상황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을 해야 한다.

원치 않은 상대와의 관계를 통한 임신과 낙태에 대한 방안으로는 원치 않는 상대와 성관계를 하지 않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본다. 특히 성폭행에 대한 임신과 낙태에 대한 부분은 성폭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적 대책으로 현대의 정보매체를 통해서 실상이 소개되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SNS 또는 미디어를 통해서 나오는 정보들에 대해서 신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회가 현대 정보매체를 통해서 성폭행에 대해서 많이 알리고, 교육을 한다면, 스스로 조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시대가 발전하면서 성 개방 풍조의 만연으로 이성간의 무분별한 교제 및 성폭력 등의 증가로 미혼모가 발생하였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미혼모 보호에 대해서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특히 어린 나이에 생각지도 않은 임신을 통해서 금전적인 문제나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의료적 서비스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료적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나, 지원 등이 필요하다. 또한 출산을 하고 나서도 적정 시기 동안은 보호를 하며, 정신적,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사회적 프로그램들을 실시하여, 양육을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의도치 않은 임신을 하지만, 낙태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한 경우들 가운데 금전적인 문제로 낙태를 할 수 있는 비용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스스로 선택한 관계를 통한 임신이라면 본인이 피임을 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하지만, 원치 않는 관계에 의해서 임신을 하게 된 경우에는 낙태 비용을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 유럽에 국가 공공보건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낙태 시술이 공공재원에서 지원이 되며, NHS가 있는 나라에서 공공병원에서 받는 시술은 무료이거나 아주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은 비용을 자신이 부담을 해야 함으로 원치 않는 관계를 통한 임신을 하더라도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 그렇기에 민간병원을 찾거나 불법 낙태를 찾아 가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여성의 건강에도 훨씬 좋지 않고, 잘못하면 죽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그렇기에 여성의 인권과 건강을 위해서는 원치 않은 상대와의 성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일방적인 관계를 통해서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 낙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국가에서 도와주는 것이 대안 방법이라고 본다.

c. 경제적인 이유로의 낙태

법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낙태시술의 대부분은 불법이다. 불법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므로 정확한 수치를 찾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타당성을 놓고 많은 이슈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낙태법에 따라 나오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보면 무조건적인 법의 규제가 다 맞다고 말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주사랑 공동체에서 설치한 ‘베이비박스’는 한 대안이 될 수도 있다.[19] 이런 베이비 박스가 낙태가 합법으로 바뀐다고 해서 없어진다고 할 수 없지만, 낙태 시술을 받지 못해 아기를 유기 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22주이하의 초기 임신 단계에서의 낙태 합법화가 거론되고 있다. 의학적으로 24주이하의 태아들은 독자적으로 생존을 못하기 때문에 임신 초기단계인 22주전까지는 임신부의 자기 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하자는 주장이다. 또한, 이렇게 아기를 유기하는 단계에 이르지 않도록 청소년기의 학생들을 위한 실직적인 성교육을 실시하여 안전한 피임과 올바른 성에 대한 인식을 심어 주어 할것이다. 또한, 미혼모들의 건강한 출산을 위한 금전적 지원을 하고 아이와 함께 자립할 수 있도록 주거와 일자리를 지원하여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도와야 할 것이다.

(2) 제도적 장치를 통한 치유

a. 프로젝트 레이첼 (가톨릭에서 설립, )

가톨릭교회는 프로젝트 레이첼(Project Rachel)”을 설립했는데 일부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치유를 경험하기도 한다고 한다. “Slient No More Awareness Campaign”은 낙태를 경험한 이후 후회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opreration Outcry” 역시 낙태 여성들의 치유를 위한 기관이다

미국 엘리엇연구소(Elliot Institute)에 따르면, 낙태한 지 8주가 지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44%가 신경 불안을 호소했으며 36%는 잠을 설친 경험이 있으며, 31%는 그들의 결정에 대해 후회했고, 11%는 향정신성 약품을 복용했다고 한다. 특히 10대시절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은 악몽, 낙태 당시의 환각, 히스테리성 감정 폭발, 낙태 관련자들에 대한 증오, 죄책감 등의 극심한 정신적 혼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Opration Outcry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법적으로 수용되는 범위 안에서, 낙태로 상처입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필요하면 간증을 전해줄 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낙태를 합법적으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취소하거나 뒤집는 것이라고 말했다.[20] 당사자들은 낙태 여부를 결정하기 전 이러한 상담센터 등을 적극 활용하여 잘못 된 결정을 사전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b. 베이비 박스를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베이비박스’는 부모의 피치 못할 사정 또는 아기의 장애 등의 사유로 인해 유기 위험에 처해져 있는 아기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생명 보호 장치’이다. 베이비박스는 생명의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부모와 아기의 생명을 모두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만들어진 생명 박스로서 2009 12월 주사랑공동체교회의 담벼락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c. 목회자나 사역자가 인도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 다음 정부에 다시 헌법소원을 해서 법을 고쳐야 한다. 낙태 조장 기금 등을 만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줄기세포를 이용하려는 배아(수태에서 8주까지의 태아)를 만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4. 결론

A. 종교적 치유

     어떤 상황에서이든 한국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당사자의 의사가 낙태 여부를 결정짓는다고 보았을 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일정한 치유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장애아일 확률이 높은 경우 출산이든 낙태이든 당사자가 상처 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출산 뿐 아니라 낙태 후에도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다. 해당 결과 후에 당사자가 곧바로 일상 생활로 복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단순한 의료행위가 아닌 것이다 

또한 낙태를 결정한 경우에도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서 기념함으로써 자신들이 저지른 낙태라는 행위를 직시하여야 한다. 그럼으로 해서 자신의 결정과 관련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회개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서적, 영적 성장과 치유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21] 이 경우 당사자들의 영혼을 꿰뚫는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영적 고통은 대단히 깊게 남는다. 결국에는 심각한 상실에 직면해야 한다. 장애아 확률이 높은 데도 출산을 결정한 경우에도 당사자들은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고 겪어야 하는 모든 일들을 함께 겪어야 한다. 심지어는 출산결정에 대해 훗날 아이에게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 이렇게 우리가 선택한 일이든, 그것이 임의의 고통이든 주권자는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깊은 성찰과 함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피치 못하게 사산이나 낙태를 했을 경우 사후에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아이가 사산을 하였거나 낙태를 한 뒤 일반적으로 분만실에서 사역을 하는 목회자가 한국에서는 빨리 잊어버리세요라고 권고하는데 반해서 미국의 경우는 그 사진을 보여주며 현실을 직면하라고 권한다고 한다. 이 문제는 외면하고 피해간다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돌이킬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용서를 통해 회복시키실 수 있기 때문이다.[22]

B. 크리스천으로서의 마음가짐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추스르고,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방향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위에 열거한 사례에 있어서 어떤 결정이든 우리는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이 낙태의 실행이었든지, 장애나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무릅쓰고 출산을 했던지 온전히 당사자가 겪어야 할 고통이다. 그 현실을 직시하고 과감히 마주해야 한다. 어떤 불행이 나를 엄습하고 난 뒤 극복은 쉽지 않다. 새로운 정체성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위대한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 제기에 능히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분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23]

매 건에 대해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고 인권보호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그의 은혜와 자비를 구할 따름이다. 또한 교회는 당사자가 질곡의 심연에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분이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고 자신에게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맞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의지를 안고서 그분께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멘.



[1] 낙태“네이버 국어사전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6783900] (202024)

[2] 낙태의 죄」 형법 법무부(형사법제과),27269 20181218http://www.law. go.kr/법령/형법/269202024)

[3] 청와대청원답변2호” 20171126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18278 (202024)

[4] Legal Abortion in Canada” National  Abortion Federation http://www.nafcanada.org

 /legal-abortion-ca.html (202024)

[5] 김진경, “임신중절의 도덕성에 관한 연구”(교육학 석사 학위논문, 동아대학교대학원, 1999), 25-28.

[6] 권철, “기독교적 덕 윤리관점에서 본 낙태문제”(기독교와 문화 석사 학위 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2012), 65.

[7] 류인자, “생명존중의 관점에서 본 낙태의 윤리적 문제 고찰”(교육학 석사 논문, 서울교육대학교대학원, 2010), 49-51.

[8] 류인자, “생명존중의 관점에서 본 낙태의 윤리적문제 고찰”, 71-73.

[9] 류인자, “생명존중의 관점에서 본 낙태의 윤리적문제 고찰”, 73

[10] 지장규 낙태 문제에 대한 조셉 플레처(Joseph Fletcher)의 상황윤리(Situation Ethics)관점에서 본 이해와 비판”(신학 석사 학위 논문, 장로회 신학대학교대학원, 2009), 61.

[11] 박윤선, 계시의존사색 I, ed. 조주석 (수원: 도서출판 영음사, 2015), 254–255.

[13] 존 파이퍼 목사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에피소드 684, 2015.9.14 (2020.02.28).

[14] 「장애 태아의 낙태는 불법, 법원 재확인」, 에이블뉴스, 2014723http://www. 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06&NewsCode=000620140723054612708219 (2020220)

[15] 「아들 사후 며느리 성폭행, 낙태시킨 시아버지 논란, SBS NEWS, 2018528,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777336&plink=ORI&cooper=NAVER(2020224)

[16] 「친딸 2명 수년간 성폭행, 낙태시킨 인면수심 50대 징역 20년」, 연합뉴스, 20171220, https://www.yna.co.kr/view/AKR20171220089000063?input=1195m(2020 224)

[17]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주요결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8https://www.kihasa.re.kr /web/news/report/view.do?menuId=20&tid=51&bid=79&ano=10778 202024)

[18] 200 외벌이로낙태고민 부부의선택 네이버공연전시 201818

http://naver.me/xewQmIhP (202024)

[19] “위기영아보호사업”주사랑공동체 http://www.godslove.or.kr/kor/html/business/baby01.asp 202024)

[20] 「나는 낙태를 후회합니다」, 크리스천 투데이, 2013.7.11,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65255

[21] 마르틸 파도바니, 「상처입은 관계의 치유」, 권은정 역 (칠곡: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2011), 153.

[22]낙태 어떻게 볼 것인가?”, 기독교 TV(CTS): 2015.12.23), https://www.youtube.com/watch?v =VUA3vXpG_zE&list=RDCMUCjpIl-p9sFNPXfcuoU2KS-g&start_radio=1&t=4,(20200310)

[23] 제럴드 싯처, 하나님 앞에서 울다, 이현우 역 (서울: 좋은씨앗, 2003), 89,109, 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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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正統)과 이단논쟁(異端 論爭) 1

1. 문제의 제기

이단과 정통은 인식론으로 구분하는 것 보다는 체험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며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이단이 되는 경우 등을 구분해 내어야 할 뿐 아니라 논쟁이 될 수 있는 이유로 이단으로 정죄되었 더라도 그들의 신앙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있는 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론을 이해하고 포용하여 정통신앙으로 인도하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이에 대해 정통신앙은 사도신경의 선포와 경륜적(경세적) 삼위일체로 대표 하여 표현할 수 있으며 바우어의 신앙의 규범을 통해서도 가늠할 수 있다. 초기의 이단은 기독론과 관련된 근본적인 견해차이로 시작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유사한 이단들이 지속적으로 출현되었으므로 전통적인 이단을 위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이단이란

이단이란 교회사에서 정통교리로 인정한 기준에 배치되는 이론을 주장하는 교파를 통칭하는 개념인 바 이단(異端)의 문자적인 뜻은 정통교리와 유사한 듯 하면서도 마지막 부분을 그릇되게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대표적인 이단 사상은 자신을 재림예수라고 지칭하는 경우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구원관, 성령관, 종말관 등에서 이단사상을 볼 수 있다. 이단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단으로 지명된 사상 자체는 물론이고 그들이 그런 정죄를 받게 된 사회적 과정까지 고려해야 한다. 나아가 이단은 다른 어떤 사상만큼이나 담론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고 그 공동체는 정통파 공동체에 사회적 정치적 위협을 제기하는 만큼 이단은 사회적 실체를 가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단은 관념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강제로 어떤 교리를 믿게 만든다든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권리를 침해한다든지 등의 교리 외적의 문제에서도 이단 판단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이단의 특징을 들자면 이단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신념을 거부하는 불신앙은 아니고 결국에는 전복적이거나 파괴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일종의 신앙이며 간접적으로 불신앙으로 이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도적 전승을 인정하지 않고 한 분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들로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며 이단이다.

경세적(경륜적) 삼위일체는 성자의 완전한 신성과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수많은 이단이 이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면서 독버섯처럼 자라왔다. 특히 헬라 철학과 결합되면서 하나님과 예수의 존재를 다양한 각도로 성경과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비슷하지만 다른 사이비 종교를 양산한 것이다. 초기의 고전적 이단들은 기독론과 관련된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서 생겨났는데 에비온주의자들의 양자 기독론은 유대적인 경향을 구현한 것으로 예수를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통해 의롭게 됨으로써 메시아로 인정받은 사람일 뿐이라고 이해하였다. 그 까닭에 예수는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양자가 되었다고 했으며 이와 반대로 영지주의를 비롯한 여러 가현설적 이단들을 추종한 사람들은 헬라적인 관심사들을 반영하였다.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실제로 인간의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다면 그는 하나님일 수가 없고, 그가 하나님이라면, 그는 결코 고난을 당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3. 정통신앙이란

정통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아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통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구세주가 되셨음을 믿으며 십자가 에서 대속하여 죽은 후 부활하심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신앙을 기본으로 하여 성도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논의를 함에 있어서 우리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의 기준들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 신앙의 규범(rule of faith)이다. 먼저 사도적 전승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한 분 하나님, 그의 천지창조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해야 한다. 또한 모든 신학적 해석은 성경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복음주의의 오직 성서로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력은 신적 생명의 영원성 안에 자족하지만 흘러 넘쳐서 창조의 행위로 들어간다. 세상을 향한 그의 계획이라는 맥락 속에서 한 분 하나님은 경세적 삼위일체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동방정교를 중심으로 발전된 개념인데 서방교회의 내재적 삼위일체와 비교되며 성경전체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언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4:4) > 성육신하고 부활하여 믿는 성도들과 함께 새하늘 새 땅으로 들어간다는 종말론적 인간 구속의 역사 전체를 의미한다. A.D 451년에 개최된 칼케돈 제 4차 공의회에서는 칼케돈 신조를 기초하였 는데 이 칼케돈 선언의 핵심에는 4대 이단의 각각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목표로 한 절묘하게 고안된 몇몇 구절들이 있다 : “ 이 두 본성은 혼동이 없고 변화도 없으며 구분도 없고 분리도 없다.”교회지도자들은 이 네 단어 속에 예수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신비가 담겨 있고 따라서 이 용어들은 전통 기독론의 경계를 이룬다고 확신하였다.

4. 결론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려는 노력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 즉 하나님의 마음을 올바로 판단하는 것에 두어야 한다. 바우어의 신앙의 규범과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의 주장을 비교하여 구분하기로 하여야 하며 특히 경륜적 (경세적) 삼위일체를 인정하느냐로 다시 규정할 수가 있다. 신앙의 규범을 정하여 이단과 정통으로 나누는 것은 서로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는 공동체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세이어야 한다. 결국 대부분의 이단논쟁은 기독론에서 갈리운다고 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지닌 분임을 인정해야 하고 한 인격 안에서의 두 개의 완전한 본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말씀(Logos)이신 예수' 개념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및 계시적 측면을 강조하고 '아들이신 예수' 개념으로 예수의 역사적 측면을 조명하는 한편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신적인 아들임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욕정으로부터의 결과가 아닌 '동정녀 탄생'으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임을 인정해야 한다. 역사적이나 현실적으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예수 그리 스도를 구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기본에 위배되지 않고 있으면 얼마든지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고 정죄하기 보다 대화와 정당한 논리로 설득하여 적극적으로 그들을 포용해야 하며 올바른 정통신앙으로 이끌어야 한다.

 

소키니우스 주의(ppt, 정통과 이단).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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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異端들(에비온주의, 영지주의, 말시온파) --- 1

 서론

 拔提과제로 초기교회의 이단문제를 선택한 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신학공부나 제 자신이 앉아 있는 신앙생활의 자리가 혹시라도 이단 宗派 가 指向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검증작업을 위한 것이며 이러한 검증의 기준으로는 어떤 한 종파 또는 어떤 이데올로기(보수,진보 등)로서가 아니라 無誤의 진리인 성경말씀을 기준으로 정통신앙과 이단의 경계를 구분해 나가 보고자 하며 오늘은 우선 초기 교회의 이단으로 분류되고 있는 종파들중 에비온주의, 영지주의, 말시온 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본론 : 초기교회의 이단종파 

1.  에비온주의 : 유대전통에서 나온 율법주의적 이단 

에비온은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 에비온주의는 使徒시대 의 이단으로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신도들이 유대교의 전통을 버리 지 못하고 견지하려 했음.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고 이방인에게 傳導한다 하여 배신자라고 했음. 이 용어는 첫 세기 동안 유대교 공동체와 가까웠던 유대인의 基督敎 改宗者들을 指稱하는 말이었으나 후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단지 그를 탁월한 종교적 스승으로 믿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에비온주의 자들은 할례와 安息日의 遵守 , 성전제사, 율법을 중요 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는 보통 인간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언 자로서 그가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가 비둘기같이 내려와서 함께 머물다가 十字架에 못 박힐 때 예수를 떠나갔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예수는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며 救援은 자기 努力으로 얻는 것이라고 하는 모든  사상의 元祖가 되었다. 

2.  靈智주의(Gnosticism) 

자신들이 신비한 領 域 이나 秘密戒示를 소유하고 있다고 신봉. 이는 1세기 말부터 기독교리+그리스 철학+신비종교 등이 혼합되어 물질과 육체를 죄악시하고 영을 높이 평가, 超越的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함. 이들은예수님의 육체는 기적적으로 육체처럼 보였을뿐 예수님의 고난이나 죽음, 부활 등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假現設)”라고 주장. 영지주의는 2세기 헬레니즘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중기 플라톤주의에 여러 가지 종료사상들을 섞어 놓은 종교 혼합주의로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크게 위협했던 사상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물질과 육체의 束縛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내면의 靈 感 과 지식을 추구했다. 그들의 우주관을 보면 초월적인 신으로 부터 더 열등한 에온들이 유출하게 되는데 그 에온들 가운데 타락한 데미우 르고스가 물질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따라서 구원이란 인간의 영혼이영지깨닫고 물질세계를 탈출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비밀 계시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 영지주의 관점 에서 예수는 인간들에게 영지를 알려 주기 위해 세상에 온 超 越 的 인 신의  使者인 것이다. 

3.  마르시온주의(Marcionism) 

극단적인 바울 추종자로서 2세기 중반에 나타난 가장 위협적인 이단. 마르 시온이 정경으로 인정한 것은 바울의 10개 서신과 편집한 누가복음뿐임. 영지주의처럼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했으며 마르시온의 聖書編輯에 刺戟을 받은 초기 교회는 성경의 정경화 작업을 서둘렀으며 393년 북아프리카의 히포회의와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27권의 신약성경을 확정했음. 그는 바울의 以信稱義 교리를 지나치게 신봉한 나머지 행위와 관계된 구약, 모세율법, 유대교 전통을 모두 거부함. 구약의 율법적 하나님과 신약의 사랑 의 하나님은 다른 존재라고 주장. 

《 영지주의와 마르시오니즘 유사성 》 

分類

영지주의

마르시오니즘

우주관

이원론적 우주관

이원론적 우주관

유일신신앙 및 구약관

부정

부정

성육신과 부활관

부정

부정

 결론 

에비온주의는 律法을 벗어나지 못한 신앙이며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사람 의 노력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함으로써 삼위일체교리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설파하는 성경말씀에 위배됨. 한편 영지주의와 마르시오니즘은 영육 이원론을 주장하지만 사람의 인격은 영육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은 그 인격이 성령의 요구에 순종하는 사람이고 육에 속한 사람은 그 인격이 성령과 분리된 관계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이들이 유일신 신앙과 구약과 거부하는 것과 관련 기독 교 신앙은 창조주와 구세주를 같은 하나님으로 믿고 구약과 신약을 하나님 말씀으로 수용한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하지만 성경은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죄 용서를 증한다. 

초대교회의 이단들(몬타니즘,군주신론,사벨리우스주의) – 2 

서론 

초대교회의 異 端 들(1)을 통하여 에비온파, 영지주의, 말시니즘을 살펴보았으며 이번에는 몬타니즘, 군주신론, 사벨리우스주의를 살펴보기로한다. 마찬가지로 초기교회의 이단종파들을 살펴보고 이들 宗派들이 성경말씀과 어떻게 違背되는지를 차례로 점검해나감으로써 신학생으로서 신학공부의 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하고 경건한 信 仰 생활을 위한 기본 개념을 鼎 立 하고자 한다. 

본론 : 초기교회의 이단종파 

1.  몬타누스주의 

뜨거웠던 예수再臨이 遲延되자 終末신앙이 점점 퇴색하는 과정에서 반작용 으로 발생한 이단으로 몬타누스가 160년경 성령이 자기에게 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방언과 결정적인 엑스터시의 체험을 강조함. 결혼을 금하고 금식 과 금욕생활을 실천하며 순교를 장려하면서 자신과 자신을 돕는 두 여사제 프리스킬라막시밀라를 통하여 성령은 말씀하신다고 주장. 몬타누스는 요한복음을 引用, 자신이 예수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한 聖靈 代辯者라고 주장했으며 이들이 주장한종말이 가까웠으며 성령을  받고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논리는 2세기 후반 당시 기성교회의 윤리가 타락하고 세속화 현상이 심해지면서 이러한 종말론적 성령운동에 魅 惑 되었음. 현대에서도 종말론과 성령론을 내세워 기성교회와 제도를 무시하고 현실에서 逃 避 하게 하는 종교집단들을 흔히 볼수 있는 만큼 이들의 실체파악은 매우 중요함

2.  군주신론(Monarchianism) 3. 사벨리우스 주의 : 삼위일체를 부정

 영지주의자들과 말시온이 주장했던 하나님의 이중성과 이온들의 다양성에 반대, 하나님의 통일성 혹은 君主性을 擁護하는 데서 君主神論의 기원을 찾을수 있다. 역동적 군주신론은 데오도투스가 최초로 주장했고 사모사타의 바울이 확립 한 사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성은 부정하고 인성만을 강조했으며 (이점에서 사벨리우스주의와 다름) 그리스도는 동정녀 몸에서 난 독특한 존재요 로고스 가 내재한 완전한 인간으로 인정하였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과는 다르며 나아가 예수는 신적이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養 子 되었다고 주장한다. 樣態론적(形態론적) 군주신론은 일명성부수난설’ ‘사벨리우스 주의라고 하는데 주창자는 노에투스와 프락세아스이며 3세기초에 사벨리우스에 의해 확립된 사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만을 강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양식 혹은 顯 現 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受 難 이라고 하여 정통파 교 회로부터 非 難 과 공격을 받았다. 또한 삼위일체를 가면으로 認 識 하여 삼위 를 부정하고 가면 뒤에는 오직 한 하나님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 역동적 군주신론과 사벨리우스주의 비교 》 

분류

力動的 군주신론

사벨리우스 주의

主唱者

데오도투스, 사모사타

바울

노에트스,프락세아스

그리스도관

人性만을 강조

神性만을 강조

 

예수에 대한 인식

동정녀 탄생,완전한인간으로 인식하였지만 하나님과는 다르다고 생각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역사 가운데 나타났다는

논리

삼위일체관

부정

부정

결론 

결론에서는 고대교회의 이단 대처방법을 세 가지로 살펴보고 이를 반영하여 현대사회에서 이단 대처방법을 강구해보기로 한다 

【 고대교회의 異 端 대처 방법 】 

첫째, 고대교회는 신약성경 27건을 正 經 으로 확정했음. 신약을 정경화하는 기준은 그것이 사도적 전승 안에 있어야 하며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신학 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교회가 예배에서 사용하는 보편성이 있는 문서라야 했다. 비록 교회는 397년 카르타고 공회에서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확정했지만 무라토리가 발견한 150년에 작성된 문서를 보면 이미 신약 27권이 교회 안에서 권위를 지닌 성경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있다. 둘째, 당시의 교인들은 성경을 구입하기 어려웠고 글을 아는 사람도 적었다. 그래서 교회는 짧은 신조를 기억하게 해서 이단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게 했다. “사도신경은 이단을 대처하는 데 필요한 정통신앙을 잘 요약한다. 셋째, 교회는 주교(목사), 장로, 집사라는 직분을 세워서 이단에 대처했다. 교회가 박해를 받고 이단의 공격을 받을 때  사도적 권위를  지닌 주교가  교회  를 지키는 힘을 발휘했다. 특별히 키프리아누스는 영지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를 주교의 권위와 사도적 전승에 두었음. 이런 전통이 주교제도(로마 카톨릭, 동방 정통교회, 성공회 ) 발전했다.

【 현대교회의 異端 대처 방법에 대한 考察 】 

첫째, 고대교회에서 확정한 정경의 무오성을 믿고 모든 교리는 성경의 통일적, 세부적 내용에 의해서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는 체계를 갖춘다. 둘째, 성도들이나 일반 불신자들에게 이단을 구별하는 간단한 방법을 교육하며 이에 대해 꾸준히 홍보한다. 셋째, 직분자들에 대한 심사를 엄격히 하고 교단에서 끊임없이 교육하고 테스트하여 기성교회에 이단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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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역사(ppt).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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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을 경건한 종교라고 잘 못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불합리하고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음모 속에서 창시되어, 역사를 교란하는 종교임을 알면 놀라게 될 것이다. 6세기 후반에 중동의 메카에서 태어난 무하마드는 7세기 초에 메카를 성지로 하여 이슬람교를 창시한다. 그 배경에 가톨릭의 음모가 숨어 있음을 세상에 알리고 있는 사람도 있다. ‘샤리아라고 하는 이슬람의 율법은 코란, 하디스, 디아스, 이즈마의 4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계획적이고 폭발적인 성장으로 기독교 세계에 최대 위협이 되고 있다. 그들의 경전인 코란의 내용을 보면 자신들의 종교를 따르지 않는 자는 다 죽일 것이라든지 여성에 대한 학대나 성적 범죄를 합법화하는 구절 이라든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신앙을 위해서 자폭테러를 하면 죽어서 여러명의 미녀가 알몸으로 시중을 드는 내세에서 살게 된다고 하여 테러범을 잡은 뒤 몸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신체 일부를 붕대 등으로 보호하고 자폭테러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러한 잘 못된 종교로 인해서 수 없는 선량한 무슬림들이 억압받고 고통 받고 있으며 선교적 방법을 통해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 이슬람교를 통해 우리는 경계심을 가지고 그 위협에 대처해야 하는데 그들의 적극적이고도 계획적인 포교활동은 상상을 초월한다. 포교를 위해서는 해당 국가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물론 얼마든지 거짓말 (타끼야)을 해도 용서받으며 배교자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등 잔인한 정복전쟁 방식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세력을 확장시키는 바 우리는 그 위험성을 널리 알리고 대처해나가야 한다. 목표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공산주의 사상과 유사하다. 이들에 대한 선교적 접촉방법은 그들의 잘 못된 교리를 일깨우는 것으로서 가능한데 우선 소극적인 방법으로 기독교의 기본 사상에 대한 코란의 묘사는 당시에 아라비아반도에서 성행했던 영지주의적 이단사상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이것이 기독교 정통 신앙이 아니라는 점을 설파함으로써 선교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한 문제로 접근하여 이를 위해 구약의 수많은 예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성취 되었음을 알려주고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약속된 구원자 그리스도임을 증명한 이는 예수 외에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성경을 통해 확증되었기에 기독교가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 성경은 구원을 얻기 위해 산에 이르는 다양한 길이 아니라 유일한 길임을 전해야 한다. 그들과는 구약을 공유하고 있다. 코란에 예수가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공통점으로부터 접근하면 길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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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보고서 : 모스크」

모스크 방문 및 기도 견학

내가 모스크를 방문하였을 때, 마침 기도시간 전이어서 무슬림들이 모이고 있었다. 마침 한 분이 모스크로 들어오면서 마주치게 되어 방문 목적을 얘기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분이 교회로 말하면 시무 장로로서 모스크의 전체 운영을 맡고 있었다. 그 분은 내가 만난 첫 무슬림이었는데 첫 대면에서 친절하고 개방적인 인상을 받았으며 마치 아는 사람과 대화하듯 편안한 심정이었다. 선입견을 버리고 그들을 대하라는 가르침과  같이 이번 수업을 통해 그들에게 다가갈 계획이다. 과제이기 때문에 방문한 모스크이지만 순간 이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길 잃은 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자연스럽게 증거할지에 대해 계속 생각 하고 있었다. 삶의 진리에서 벗어나서 그릇된 믿음을 쫒는 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 전 세계적으로 18억명 가량의 무슬림이 있다고 한다. 아이를 많이 낳는 데다가 낳자 마자 당연히 무슬림에 포함되는 이슬람 교리에 따라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일반인들은 이런 추세라면 무슬림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않아 기독교 인구를 초월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이들이 현재 창궐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하에 허락된 일이며 그분의 주권적인  역사 아래 이슬람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믿고 그들을 회심시켜야 한다.          

    기도실로 들어가자 모두들 환대하며 계속 음료, 건과 등을 제공하면서 여러가지를 설명해 주는데 손님을 극진히 접대하는 그들의  문화를 느낄 수 있었고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는 질문에 이맘은 사진은 찍어도 좋지만 가급적 자신은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하였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장로 등 직분자가 있다고 하며 이맘은 장로를 추켜 세우고 장로는 이맘이 코란 전체를 다 암송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교재에서 읽은 대로 무슬림들은 앞에서는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하는 말이 생각나서 실소를 하였다. 그러나 우리를 그렇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가 방문한 모스크는 소규모 모스크로 일반주택을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대형 모스크 방문을 희망하면 연락하라고 함). 이러한 설명을 하는 중에도 장로는 코란을 꺼내어 흔들면서 마치 거기에 진리가 있는 듯 힘있는 어조로 자신의 논리를 설파, 이들의 잘못된 믿음을 어떻게 바꾸어 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주님, 이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단지 이슬람에서 태어난 이유로 길을 잘못 들었으니 이들에게도 빛을 내려 주소서

    이슬람에 조각상이나 상징물이 없는 이유는 무슬림들은 기도하며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마다 기간 동안이라도 특별히 기도에 변화는 없다. 5번의 기도는 늘 똑같이 이루어진다. 단    라마다기간에는 기도 후 함께 코란을 읽고 나누는 시간이 있다. 한번의 기도는 보통 5분내외로 끝난다. 라마단 기간 동안에는 숙박을 하는데 1층에는 남자들의 숙소이고 2층은 여자들의 숙소이다. 지하는 샤워 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시간표상에는 맨 위에 날짜가 있고 하루 다섯 번의 기도시간이 표시되어 있는데 라마단 기간 동안 하루의 마지막 기도가 끝난 뒤에 성찬을 갖는다고 한다. 맨 마지막에 있는 1:15로 되어 있는 것은 매주 금요일만 하는 기도이다. 물론 오후 1:15 이다. 한다. 절하기 전에 누군가 음률에 맞추어 특이한 소리를 내고, 이맘이 낭송(아마도 코란)을 하는 중에 무슬림들은 절을 하는데 순서를 보니 첫째,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둘째, 두 손을 귀 위에 올리며 샤하다를 외우고 셋째, 팔짱 끼고 넷째, 반절을 하고 다섯째, 무릎을 꿇고 두 번 절을 하고 여섯 번째,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당신에게 평화가  함께하기를 외우며)  마치게 된다. 한쪽에는 선한 일을 기록하는 천사가, 한쪽에는 악한 일을 기록하는 천사가 앉아 있어서 죽은 뒤에 착한 행실과 악한 행실을 저울에 달아 천국과 지옥으로 갈린다고 믿는다고 한다. 절은 새벽에는 2번 정오, 오후, 밤에는 4, 일몰기도는 3, 금요 예배 때는 2번 한다.

돌아갈 시간이 되자 장로는 식사를 하고 가라고 적극 권하여서 식사까지는 좀 부담이 된다는 말로 사양하자 자기들의  헌금 봉투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연락을 하였다. 며칠 뒤 다시 전화하면 어떻게 반응을 할지 궁금해서 장로에게 전화하여 수 일내로 다시 방문하겠다고 하자 환영한다고 답변이 왔다.기회가 되는대로 다시 한 번 방문해서 언어상 제약은 있지만 천천히 그들의 문화를 알아가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의 주위 친구들과도 접촉하는 진행해 볼 계획이다. 이렇게 우리의 사명이자 수업목표이기도 한 무슬림과의 접촉은 비교적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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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하나님의 형상

가장 존엄한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 내가 내 교회가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내용 요약

o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1:26-27) :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 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 : 모든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공통되는 윤리가 있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의무감이 있다. 이것 역시 중요한 선교학적 기초가 된다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 : 기독교 선교는 모든 인간을 존엄하고 평등하게 여기며 존중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의 꼬리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에 대한 도리며 삶의 다른 영역에 적절한 것만큼 선교에도 적절하다성경적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하다 :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해 더욱 충분히 인간적이 되도록 사람들을 권유하는 것. 복음의 능력은 모든 사람에게 적합하다. 그 이유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에 응답하며 참으로 인간적이 되는 것,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남자 혹은 여자가 되는 것이라는 일반적 영광을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 과업을 위해 창조됨 : 카바쉬(땅을 정복한다), 라다(지배하고 통치권을 행사)의 의미를 새겨보면 다른 피조물을 인간의 관리 아래 맡겨진 것으로 보고 자비롭게 돌보라는 의미.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교만한 우월감에서 피조물을 함부로 학대해도 좋다는 허가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겸손하게 반영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모범으로 삼을 표본으로 봐야 한다.

- 관계안에서 창조됨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 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7) : 이 밀접한 비교는 분명 남성과 여성의 상호 보완성과 그로 인해 가능한 상호관계에는 하나님의 성품 자체에 해당되는 무언가가 반영되어 있음을 함축하는 듯하다. 인간의 성별은 창조 질서 내에서 신적이고 창조되지 않은 존재인 하나님께 해당되는 무언가를 반영한다. 다른 한편, 창세기 2장은 남성과 여성의 상호 보완성을 인간의 과업이라는 맥락에서 말한다.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좋았더라라고 묘사되다가 갑자기 뭔가 좋지 않은것이 들어온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좋지 않은 것은 사람이 혼자라는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외롭다고 느끼지 않도록 동료를 찾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곁에서 창조 세계의 종, 유지자, 충만하게 하는 자, 정복자, 다스리는 자로서 주어진 이 거대한 과업을 함께 할 돕는 자를 찾는다고 말씀 하시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맨 처음부터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다. 사람들 간의 수평적인 사랑의 관계는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이 계획의 일부다. 그것은 결혼으로부터 시작되지만 확대되어 다른 모든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다. 그리고 타락이 인간 삶의 관계적 차원을 황폐화시킨 이후에는 건강한 사회적 관계가 죄로 인해 깨어진 곳에서 그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의 일부다.

- 반역하는 인간

· 죄는 인간의 모든 차원에 영향을 끼친다 :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이 네가지 차원 모두가 인간 삶에 죄가 들어온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또한 그 차원 하나하나가 그 선택의 결과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인격에서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부분은 없다. 죄는 인간 사회와 역사에 영향을 끼친다 : 죄는 사회 안에서 수평적으로 퍼져나가며 세대간에 수직적으로 전파된다. 그래서 그것은 집단적 죄로 가득한 상황들과 관계들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우리의 선교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좋은 소식을 가져가는 것이라면 나쁜 소식이 정확하게 무엇인지에 대해 얼마간 연구와 분석을 해야 한다. 수평적으로는 주어진 사회의 구조 내에서 그리고 수직적으로는 그 역사내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그 과정에서 많은 요소들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드러날 때만 정결하게 하고 치유하고 화목케 하는 복음의 능력이 그 요소들의 음울한 영향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죄는 인간 삶의 전체 환경에 영향을 끼친다 : 단지 인간의 모든 차원이 죄의 영향을 받는 것뿐만이 아니다. 단지 모든 인간이 죄인일뿐만이 아니다. 또한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관계 전체가, 그리고 땅 자체에 대한 우리의 생태학적 관계 전체가 왜곡되고 일그러졌다. 분명, 완전히 성경적인 신학과 선교를 하려면 죄에 대한 완전히 성경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 악의 전형? HIV/에이즈와 교회의 선교 : 과거 인간 역사에서 일어난 대유행병은 주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 아주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에이즈는 젊은 층을 가장 황폐화시킨다. 에이즈는 우리가 직면해 있고 성경이 경고하는 악의 거의 모든 차원들을 그 무시무시한 소용돌이로 빨아들이고 있으며 동시에 성경이 묘사하는 선교의 모든 차원을 요구하는 듯하다.

· 에이즈와 관련해서 존재하는 악의 차원들 : 에이즈는 악 자체처럼 그 기원과 원인이 불가사의하다. 왜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그와 같은 미생물체가 있어야 하는가? 왜 그것은 명백히 1934년에 인류를 급습했는가? 그것은 생명에 침입하며 불가피한 죽음을 낳는다. 또한 여러 경로로 전파된다. 하지만 주된 통로는 인간의 성을 통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축복하신 가장 친밀한 관계를 착취하고 더럽힌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타락한 남성의 성욕, 난잡한 욕정을 추구하는 걷잡을 수 없는 남성의 경향을 통해 크게 번진다. 남성의 성적 행위가 에이즈 유행의 80퍼센트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는 동성애적 행위뿐 아니라 이성애적 행위도 포함된다. 하지만 동성애가 분명 훨씬 더 높은 전염 비율을 갖고 있다. 남부아프리카에서 여성의 60퍼센트는 강압적 상황에서 첫 번째 성경험을 하며 40퍼센트의 경우는 직장이나 가정에서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남자와 이루어진다. 물론 다른 모든 악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평하심에 대한 심각한 영적 질문을 제기한다. 또한 부도덕한 제약회사들과 싸워야 하는 정의의 문제와도 연관된다에이즈에 대한 선교적 반응들 : 에이즈는 매우 다양한 상호 영향을 끼치는 원인들, 지속시키는 요소들, 영향력 등을 지닌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전염병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들은 이 유행병에 총체적인 선교적 반응을 보여야 한다전도의 궁극성과 죽음의 비궁극성 : 에이즈에 대해 가장 피할 수 없는 사실은 그것이 불가피한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악의 가장 파멸적인 흔적이다. 에이즈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이기 위해 다루어야 하는 일시적 문제들의 상세한 목록을 제기하는 한편, 또한 그리스도인들 에게는 전도의 궁극성 문제를 제기한다. 리처드 백스터나는 결코 다시는 설교하지 않을 것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설교한다. 에이즈는 가장 끔찍한 악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구세주께 믿음과 소망을 둘 때 어떤 것도 그리스도께서 제공해주시는 새 창조의 삶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갈수 없다. 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장자와 첫 열매가 되시기 때문이다. 오직 복음만이 최종적 소망과 확실한 미래를 제공한다. 오직 복음만이 현재의 인간성이 바이러스에 의해 산산이 깨어지고 해체된 사람들에게 새 인류에 대한 약속을 제공하고 선포한다.

- 지혜와 문화 : 고대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우리는 바로 이 전체 창조 세계와 전체 인간에 대한 관점이라는 광각 렌즈를 사용하는 세계관 위에 세워진, 광범위한 신앙과 윤리의 전통을 발견

· 국제적인 가교 :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지혜문학은 광범위한 고대 근동 문화의 전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종류에 속하는 문헌의 일부다. 그 기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기 적어도 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공통적인 인간의 관심사 : 일부 선교학자들과 타문화 사역자들은 지혜문학이 성경적 신앙을 전 세계의 다양한 인간 문화들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가교 중 하나라고 말한다열방의 지혜를 받아들임 : 이스라엘의 현자들은 언약없는 민족들이 지닌 많은 가치관과 가르침들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다른 민족들의 신과 종교적 관행을 거부하는 율법과 선지서의 경향을 뒤엎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지혜는 놀랄만큼 개방적이고 긍정적이다. 이에 대한 한가지 이유는 이스라엘이 온 세상과 모든 인류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분명하게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지혜는 온 땅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모든 인간은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이스라엘은 지혜롭고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뭔가를 부인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경의 진리 및 도덕적 기준에 양립할 수 있는 모든 인간 문화 전통의 측면을 긍정함으로써 많은 선교적 유익을 누릴 수 있다열방의 지혜를 비판함 : 그러나 그들은 다른 나라들의 지혜에 접근할 때 야웨를 믿는 유일신론이 제공하는 종교적, 도덕적 살균제를 갖고 접근했다. 토라는 이스라엘에게 이교도들이 추구하는 지혜와 그들이 습득하는 지혜를 둘 다 평가할 판단기준을 제공해 주었다지혜의 가교 자체가 구속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 지혜는 다리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성경적 복음 전체의 구원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지혜 문학은 그것이 다루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그 지혜문학 자체가 과연 적합한가에 대해 자기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성경적 복음의 메시지, 야웨가 누구이신가 하는 것과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속하시는 성경 이야기 전체만이 그 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 창조 윤리 : 전문적인 윤리적 용어로 표현된 율법의 의무론적 접근은 지혜의 결과주의적 접근과 균형을 이룬다. 율법 및 선지서와 지혜서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각각의 특징인 동기를 부여하는 호소다. 전자는 주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 호소하는 반면, 후자는 주로 창조에 대한 이스라엘의 확신에 호소한다. 율법과 선지서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그처럼 확고하게 근거하고 있는 반면, 지혜 문헌은 그 신학과 윤리를 좀더 보편적이고 창조에 기초한 도덕질서에서 이끌어 낸다는 것은 현저한 사실이다. 이것 역시 선교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다른 문화, 신앙,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공통의 특성과 또한(그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든 안하든) 공통의 창조주 하나님을 공유한다. 성경적 지혜 전통은 성경적 윤리에는 일정한 보편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에 살며 타락한 인간 문화에서 이 진리들이 아무리 왜곡되었다 해도, 그것들이 여전히 인간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칠 것이기 때문이다솔직한 신앙 : 정경에 지혜서가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는 의심들과, 우리의 경험의 한계내에서 혹은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한계 내에서조차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는 솔직한 신앙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지혜문학에 나오는 이러한 어조와 거북한 질문들, 면밀히 조사하는 관찰,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 등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선교적 책임 중 일부다. 성경에 그런 본문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 성경 원리들을 그것들과 관련이 없는 환경에 잘못 적용하는 경솔한 독단론(욥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 성경 본문들은 또한 믿음과 물질적 보상간에 혹은 죄와 질병간에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매우 단순한 순진함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다. 지혜문학의 경고들을 무시하는 선교는 소위 말하는 번영 복음의 어리석음과 거짓말로 귀착되거나, 가장 교만한 근본주의, 즉 아무 문제도 없다고 주장하는 승리주의로 귀착된다. 사실은 세상은 전체 성경의 증거에 따라 한 분이시고 선하시고 인격적이시고 주권적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대단히 힘든 질문들을 제기한다.지혜 문학은 생각 하고 씨름하고 분투하고 항의하고 논쟁할 수 있는 허가서를 제공한다. 그렇게 할 때 조건은 주를 경외함이 지혜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28)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1:7)라는 핵심 증언에 요약된 믿음과 겸손한 자세로 그렇게 하라는 것 뿐이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본 것은 실로 광범위한 전망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의 무대에 대해 살펴볼 때 그 외 달리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은 온 땅의 하나님,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 그리고 모든 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보편적 진리들이 함축하는 것을 모두 살펴보았다. 창조세계 전체는 하나님의 선교현장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부름받은 선교에는 불가피하게 생태학적 차원이 포함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는 인간적 속성에서 많은 선교적 함축들이 생겨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은 또한 철저히 그리고 포괄적으로 죄와 악에 오염되고 영향을 받았다. 우리의 선교적 반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의 능력으로 다루는 문제들 만큼, 철저하고 포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문화는 인간성의 모호성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현자들은 다른 나라들의 지혜에서 선하고 참된 것을 인정했으나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평가했으며 우상숭배적이고 도덕적으로 부적절한 것은 모두 거부했다. 그들은 또한 모든 인간의 지혜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인생의 가장 힘든 문제들과 싸움들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 성경적 지혜는 우리의 선교적 노력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녀야 함을 큰 소리로 외친다.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비판적이면서 개방적인 마음. 인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존중.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장하고 대답할 때 신중할 것이다.

신학적인 성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에는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 있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고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말이며 성경적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하다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관계안에서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을 반역하고 영적으로 이성적으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죄에 물들어 인간의 인격에서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부분이 없게 된 것이다. 에이즈의 예에서와 같이 죄는 인간 사회와 역사에 영향을 끼치며 인간 삶의 전체 환경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과 소망을 둘 때 어떤 것도 그리스도께서 제공해 주시는 새 창조의 삶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갈수 없다. 오직 복음만이 최종적 소망과 확실한 미래를 제공한다. 오직 복음만이 현재의 인간성이 바이러스에 의해 산산이 깨어지고 해체된 사람들에게 새 인류에 대한 약속을 제공하고 선포한다.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고 하나님의 과업을 수행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나 죄악으로 물들어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에이즈와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 인류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고 나아가면 죽음을 이기고 악을 이길 수 있는 권세를 가질 수 있다. 절망속에서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들도 구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창조적 세계관 및 국제적 관점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구약성경의 일부인 지혜서를 고찰하고 그것이 다른 문화적 상황에서 선교할 때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실제 선교현장에서 이를 적용하여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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