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신 하나님의 속성

신학일반/신학 산책 2020. 7. 10. 06:03 Posted by forest38

위대하신 하나님의 속성

 

1. 서론

삼위일체 하나님은 관계적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자기 백성과 온전한 신적 생명을 나누기 위해 활동하고 계신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자 그분의 속성들에 관하여 질문을 한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면서 다양한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어떤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인가 알아보고 이 속성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와서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는지 확인해 본다.

2. 본론

하나님의 속성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통일성 등 비공유적 속성과 지식, 지혜, 정직, 선, 거룩, 의, 의지와 능력에 있어서의 주권성을 포함하는 공유적 속성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전능, 거룩, 사랑이시다. 본질적인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을 의미하며 하나님 자신이다. 관계적인 속성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속에서의 이야기이며 하나님의 존재이다. 인격적인 속성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속에서 지, 정, 의 같은 인간의 인격을 의미하며 도덕적 속성은 피조물의 창조에서 만남, 통치에서 나타나는 속성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은 편재, 전지, 전능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분으로 홀로 완전하시다. 또한 자의식이 있으시고 인격적이시며 사회적인 관계를 가지고 계시는 존재 자체만으로 영광 받으실 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며 영원히 존재 하는 분(I am who I am)으로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분이며, 만물은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이면서도 본연의 모습으로 현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또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으로 창조를 위한 자신의 계획을 완성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피조세계에 대하여 심판을 행하시며 세계에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으로서 세계를 아신다. 심판과 구원은 종말론적인 실재들이다. 우리의 고통을 보고 함께 하시는 불변의 존재로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관계하시기를 원하시며 도덕적으로 순결하신데 거룩하시며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으로 순결한 분으로 온전하시며, 자존성,단순성,무한성 및 능력, 선, 자비를 갖추고 계신 분이다. 또한 의로우신 분인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와 관계 될 때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고 의롭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우리의 죄를 심판하신다.하나님은 참 하나님으로서 참 모습 그대로 보이시는 진정성을 갖추고 계신 분이며 그의 말씀은 진리로서 인간과 사물의 본질 모습 그대로 드러내신다. 하나님께서 정직성을 본질로 하시면서 백성에게 정직하게 다가가시므로 우리도 그분에게 정직하게 다가가야 한다. 또한 그분은 약속을 철저히, 완벽하게 성취하시는 신실성이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또한 사랑으로 자격이 안 되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백성의 필요에 따라 거저 은혜를 베푸시면서 우리는 믿음 으로 그 분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으로 오래 참으시는 분이다. 우리는 그분의 인내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하나님에 대한 기쁨이며 경외심으로 찬양하도록 한다. 또한 우리를 담대한 기도로 인도하고 믿음으로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종말론적 구원계획에 우리를 부르시는데 우리에게 주시는 수단은 열렬한 간구와 순종의 행동이다. 기도와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현재의 삶의 자리에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 사랑의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대해 오래 참으심과 긍휼로서 응답하신다. 이것은 우리의 사역의 모형이 되어 주는데 긍휼의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는 마찬가지로 긍휼을 타인들을 향한 우리의 특징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거룩한 긍휼은 우리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나오는데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 안에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결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통시적인 편재성으로 존재하고 전체적으로 완성되고 완전한 상태로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완성의 때에 하나님은 악을 이기시고 새 질서를 창조하실 것임을 믿어야 한다. 또한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있어서 공의롭다는 점에서 거룩하신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로서 피조물을 대하신다.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품은 둘 다 사랑이신데 우리는 성령께 탄식으로 간구하여 우리 안에 긍휼이 넘치고 사랑이 만들어지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종말론적일직선적인 구속사역에 담대히 참여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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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인간관과 인간 창조의 신학적 의미

1. 서론

우리는 하나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개인적 실존과 우리가 공유하도록 부르심 받은 인간적 본성의 기원임을 믿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한 개방적인 피조물들이라는 전제하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신학적 전망을 설명하기로 한다. 우리는 먼저 인류의 본질과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성경적, 신학적 개념 아래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즉 인류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 줄 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는 현재적인 실재가 될 수 있다.

2. 본론

[ 기독교적 인간관 ]

인간의 기원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이다. 하나님이 의도적 행동으로 인간을 만드신 것이다. 결정론에 의하면 창조적인 인류는 인간 이외의 그 어떤 힘들의 산물이다. 우리가 행하는 선택들은 예정되어 있고 심지어 결정되어 있기 까지 하다. 인간에게는 영원의 차원이 있으므로 시작과 출발이 있다. 인간은 흙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시작이 분명하고 하나님 안에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치를 부여하였으므로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창조주를 섬기고 사랑할 때 만족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는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고유한 것으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 파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우리 인간의 운명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였고, 지금도 이루어 가고 있을뿐 아니라, 언젠가는 온전히 실현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의 의미가 있다. 또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지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인들끼리 특별한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그 연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 참여는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변화는 회심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형상과의 완전한 합치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 저 위대한 종말론적인 갱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 인간창조의 신학적 의미 ]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 함은 인간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의 한 부분으로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는데 일곱째 날은 안식하신 날이라 여섯째 날이 창조의 마지막날로 볼 수 있다. 피조에는 연속성이 있다. 창조의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된 피조물들은 생태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인간은 우주에서 가장 우월한 대상이 아니다. 창조주에 의한 피조물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하나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유한성을 인정해야 하고 서로 돕고 협력하며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창조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에 있으며 이들 인간들 사이는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의 관계인 것이다.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과 세계의 기본적인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두 용어로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지으신 도덕적인 피조물들과 나누고자 하시는 특별 관계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우리의 실존 자체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증언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실존을 창조주 하나님에게 빚지고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와 그의 은혜를 베푸실 자유에 따라 우리에게 실존을 수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원(origin)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인간의 실존의 근거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격적 삶 자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의미도 우리에게 내재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개인의 삶의 의미를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실재로부터 가져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부여된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의도하신 목표, 목적, 운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 의미를 바로 찾는 것은 우리 믿는 자들의 사명이다.

3. 결론

하나님은 인간과 공동체적으로 교류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인간의 가치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규정지어지고 그를 섬기고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시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엡 1:4-5).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끼리 특별한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그 연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공유하며 위대한 종말론적인 갱신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하나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유한성을 인정해야 하고 서로 협력하면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 즉 공동체의 구원을 갈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실존의 가치를 부여하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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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회심

신학일반/신학 산책 2020. 7. 8. 07:36 Posted by forest38

기독교적 회심

가. 서론

개인 구원의 시작은 성령을 통한 회심이다. 회심은 이전의 타락한 상태로부터의 단절과 함께 거룩하게 하나님께 다가가서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일생 일대의 위대한 거래일 뿐만 아니라 인생을 변화시키는 만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회심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회개는 불신자가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고,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구원과정에서 회심과 중생의 선후관계를 살펴본다. 또한 회심의 구성요소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한편, 회심과정에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개인적 관점과 공동체적 관점에서 확인해 본다.

나. 본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게 되면, 회심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개인의 구원에 있어서 중생이 먼저인가 회심이 먼저인가는 칼빈주의(중생)와 알미니안주의(회심)를 구분하는 주요 기준이다. 웨슬리안은 회심이 중생의 필수조건이라고 간주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고, 변화시켜 주신다고 설명한다. 성서의 여러 증언들을 살펴보면, 회심이 중생보다 먼저임을 가리키는 구절들이 많다.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회개하라’라고 하는 호소들은 분명 회심이 중생으로 이끄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사실로 판단해볼 때 회심이 중생보다 앞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믿음의 자녀가 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걸음을 옮길 때 중요한 부분은 회심이다.

회심의 개인적 측면을 살펴보면, 회심에는 회개와 믿음이 있다. 회개는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어 오직 한 분 참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행실을 변화시킨다는 개념인 반면, 믿음은 지식, 동의, 신뢰의 단계를 거쳐서 비로소 완성되는 하나의 절차적 개념이다.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에게 ‘의롭다’ 칭해주시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신다. 이러한 회심의 요소에는 지,정,의 세 가지가 있다. 1) 참된 회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엄성을 아는 지식을 포함한다. 2) 회심에는 감정적 변화가 따라 오는데 우리가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기가 지은 죄를 애통해 하게 된다. 3) 회심의 의지적인 요소로는 회심을 통해서 목적이 변화하고, 죄로부터 내적으로 멀어지는 한편, 용서와 정결을 구하는 성향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회심을 외적변화의 측면으로 구분하면 민족적인 회심, 일시적인 회심, 반복적인 회심 등이 있다. 민족적인 회심은 도덕적인 갱신으로 나타나고 일시적인 회심은 심령 변화는 없이 어떤 과도적인 변화만 나타난다. 반복적인 회심은 일시적인 회심이 반복될 경우를 의미한다. 진정한 회심을 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회심은 하나님께서 조성하시는 것으로 그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생 동안 성화의 삶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회개하며 나아가야 한다. 회심과정에는 구원의 전 과정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이 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 신약성서 기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조명) 해주시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불러주시고 복음을 듣는 자들의 마음을 밝혀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해주시며, 우리들에게 복음에 응답할 수 있도록 회개와 믿음을 가능케 만들어 주신다. 성령의 조명사역의 초점이 마음에 있다면, 성령의 능력 주심은 우리의 의지에 관련된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복음에 대한 개인의 응답은 고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회심 과정에서 복음선포를 위주로 하는 신앙공동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교회는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개별 인간을 회심시키는 매개 역할을 하며 이들을 통합시키어서 새로운 공동체로 발전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어떤 한 개인이 회심을 통하여 교회라는 공동체 속으로 통합된다는 것은 그가 새로운 인식의 틀을 받아들이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다. 결론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시어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작정하셨다 (엡 1:4). 성령께서는 구원의 전 과정에서 역사하시어 우리를 회심시키고 일생 성화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회개하며 나아가게 하신다. 이로써 우리는 복음에 응답하고 믿는 자들의 공동체적 맥락에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 종말론적 구속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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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적 교회의 본질 이해

1. 서론

교회는 계약 맺은 백성이다. ‘에클레시아(Ecclesia, 불려내진 사람들)’라는 용어는 이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한편 삼위일체론적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를 말하는데 이것들은 각각 삼위일체 하나님의 어느 한 지체와 연관되어 있으며 여기에서는 이들 세 요소를 차례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2. 본론

신약성서는 교회를 하나님께 속한 나라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듯이 이제는 신약성서의 교회가 바로 그러한 관계를 누리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현재적으로 역사하심에 의해서 교회로 인정받게 된 것으로 교회가 교회다운 것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 중심으로 복음이 선포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하였는데 하나님이 부르시고 모으시고 선택하신 백성이 이스라엘이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돌보시고 눈동자처럼 지키시며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징표로 구약의 할례와 언약궤가 있으며 신약의 내적 할례(마음의 할례)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특성은 거룩성, 성화인데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마땅히 거룩해야 한다.

또한 신약성서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현재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시는 장소이며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강조한다. 성도는 그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양분을 받고 그 안에서 자라간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도에 지배되고 따라가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이 점에서 교회는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인간의 몸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통일체이다. 진정한 교제는 자기 이익을 떠나 그리스도와 성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진정하고 긴밀한 교감과 연합이 이뤄지며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통일된 몸)을 이룬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 인간의 모든 장벽이 교회 안에서 제거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주의 마지막 사명(대 위임령)인 복음 전파의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모든 지체들이 동일한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동일 목표를 갖고 있다. 모두는 다른 지체들에게 관심 가져야 하고, 전체에 봉사하기 위하여 그들의 은사를 사용하여야 한다.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 이스라엘에서 성전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지상 거소였다면 이제 하나님의 임재의 초점은 더 이상 특별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교제, 즉 공동체이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해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윤리적 함의들을 지닌다. 우리는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를 존재케 하신 분은 오순절 사건 후의 성부 하나님이며 개인은 물론 공동체 안에도 내주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령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때 우리 안에 성령이 맺히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능력을 수여하신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으며 성령께서는 또한 교회에 통일성을 부여하시는데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을 갖게 하고 교회가 주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역사하시며 성령의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한 선물로서 개인과 교회 공동체에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 결국 교회의 주권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분에 의하여 거룩하고 순결하게 되는 것이다.

3. 결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우리는 마땅히 거룩해야 하며 끊임없이 성화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와 연합하여야 한다. 또한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를 존재케 하신 분은 오순절 사건후의 성부 하나님이시며 개인은 물론 공동체 안에도 내주하시면서 교회에 능력을 수여하신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성자 그리스도에 의해 양육되며 성령 하나님에 의해 성화된다.

신앙은 개인의 믿음과 경건한 생활을 통한 성화 과정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적 섭리에 의해 인도되어지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구원은 개인의 구원보다 상위에 있는 개념일 수도 있다. 문제는 작금의 현실과 같은 펜데믹 상황에서, 개인의 신앙은 충분히 유지할 수 있지만 공동체의 신앙, 공동체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러한 펜데믹 상황은 일정 기간이 흐른후 그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또다른 펜데믹은 계속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환란이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계속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믿는 형제들의 중지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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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 논란

신학일반/신학 산책 2020. 6. 30. 08:21 Posted by forest38

가. 들어가는 말

일생에 오직 한번만 받는 세례(침례)와는 달리 반복적으로 행하는 성만찬 의식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반복적으로 재천명하는 것이다. A.D 1세기부터 현재까지 이 의식 배후에 있는 신학에 관하여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특히 이 논쟁 중에 성찬을 거행할 때에 주님의 임재 여부에 관한 문제는 격렬한 논쟁을 야기하여 초창기의 수 세기에 걸쳐 논의되었으며 특히 종교개혁 때에 열띤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여기서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함께 루터의 공재설, 쯔빙글리의 기념설, 칼빈의 실재적 영적 임재설을 소개하기로 한다.

나. 성만찬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 요약

첫번째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견해를 살펴보면 공식입장은 트렌트 종교회의의 결론이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화체설의 최종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화체설은 사제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때,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살로 변화된다는 주장인데 떡과 포도주의 기적적변화에 대한 아퀴나스의 설명 배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본질, 속성의 구별이 있는데, 미사를 드리는 동안에 떡과 포도주는 기적적인 변화를 겪는데 떡과 포도주는 통상적인 물리적 과정에서처럼 그 본질은 유지하면서 그 속성들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속성들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가운데 본질만이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해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실제의 몸과 피가 되었으며 그런 까닭에 변화된 본질, 예수 자신의 실제적인 임재가 외적인 모습 ‘아래’놓여있고 한다. 화체설은 미사를 희생제사로 이해할 수 있는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미사의 거행 자체가 하나의 공로적인 행위 라는 중세의 깊이 뿌리박힌 신념을 위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이에 대해 루터파는 화체설을 거부하고 떡과 포도주의 분자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 되지는 않지만 그 속에 주님이 함께하고 계시다는 공재설을 주장하였는데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 대신에 임재해 계시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와 함께 임재해 계신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는 성찬에 물리적으로 임재해 계시고 성찬의 성물들에 임재해 계신다는 것이다. 루터파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 수단과 관련해서는 이견을 보였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견해가 같았다. 루터의 실재 임재설은 기독론적 고려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는데 그는 속성들의 교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편재를 비롯한 그의 신성의 여러 속성들을 공유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심과 동시에 만유의 그 어디에도 계시는 인간 그리스도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통해지역화된다. 이 요소들은 여기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드러낸다.

루터와 동시대인인 쯔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하였는데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으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회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행함이 중요하며 그 속에 주님이 함께하심을 기억, 회상하는 것과 함께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화체설과 좀 더 근본적인 단절을 제안하였는데 성찬의 주관적인 차원을 강조하였으며 우리가 성찬의 성물들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실제의 살과 피와의 친교를 전달해주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임재는 결코 떡과 포도주 안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성령을 도입함으로써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실재적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는데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가 성찬의 성물들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 성찬의 성물들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하였고 하늘의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신자를 만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성령은 땅에 있는 우리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의 임재 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가로질러 우리를 주님과 하나되게 만든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는 능력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영적으로 임한다고 하며 기계적으로가 아닌 굳건한 믿음으로 성만찬에 참여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은혜를 주신다고 한다.

다. 성만찬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상으로 성찬에 관련된 여러가지 신학적 견해를 살펴보았는데 로마 가톨릭은 성서보다 교회 전통을 우위에 둠으로써 본질과는 동떨어진 여러가지 잡다한 전례를 만들어 놓았다. 그 중의 대표가 화체설로서의 성만찬이다. 이에 대한 개혁을 시도한 루터와 쯔빙글리는 성만찬 교리에 대한 차이로 인해 영영 결별하고 만다. 다행히 칼빈에 이르러 어느정도 절충설을 취함으로써 개혁교회가 더 이상 분열되는 것을 막을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성찬은‘친교’및 ‘감사’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의식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 공동체 내에서의 그리스도 및 성도 상호간의 교제를 상징적으로 실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체설, 공재설, 기념설, 실재 영적 임재설의 어떤 것을 취하든지 우리의 믿음에 기반한 진정한 헌신의식으로 성스럽게 치러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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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롤란트 베인턴 저)

홍치모/이훈영 역(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 리뷰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개념과는 다르게 다양한 형태의 종교개혁이 있었고 이러한 다양성은 현대 신학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패러다임들이 하나님의 복음과 어떻게 연결되고 또한 연결시켜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개혁을 어떻게 진행했으며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그들의 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선 종교개혁의 양대 거두라고 할 수 있는 루터파와 칼빈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면밀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루터가 처음에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잘못된 신앙을 교정하려는 것으로서 일이 그처럼 커지게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루터는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주이자들과 맞서야 했고 한편으로는 급진주의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자신들을 이미 ‘창세전부터 예정되어 있는’ 신도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보다 더 과감한 개혁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면서 이신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사랑의 행함이나 거룩한 삶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는 비난이 있는데 칼빈주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더불어 거룩한 생활을 통한 성화를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결코 편향된 가르침이 아니라 균형 잡힌 사상임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성화에의 강조는 그가 주장하는 ‘예정론’과는 논리적으로 배치되는 부분이 있어서 신학적으로 더 깊이 연구해야 하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가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성령에 의지하고 기독교적 확신으로 과감히 개혁하고 고쳐 나간 것은 참으로 위대한 공헌이라고 봐야 한다. 칼빈주의는 현실에 더욱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특별히 역사적으로는 소수파로 분류되고 있는 재세례파와 신비주의 등이 후대에 미친 엄청난 영향을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데 이들을 통해서 신학적 사상이 풍부해졌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수많은 이단교파가 이러한 이론 들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결국 이러한 선별적 능력은 이러한 좋은 서적을 광범위하게 탐독하여 지식을 함양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인 롤란드 베인튼(R.H.Bainton)의 종교개혁사는 자신이 수십년간 강의한 것을 압축한 것으로 종교개혁의 역사가 녹아 있다. 그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해주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이번 강좌에서 중시하고 있는 루터파와 칼빈주의의 심화과정이나 비교 등은 상대적으로 많이 취급하고 있지 않아서 좀 아쉬운 감이 있다. 때문에 다른 교재로 보충을 하여야 했다. 역사적으로 루터파와 칼빈파가 대립이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루터의 입장에서는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당시 로마 가톨릭의 부패에 정면으로 맞섰던 것으로서 그러한 실제 행동의 와중에서 교리적으로 후대에 비판을 받는 부분은 어떻게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구원의 믿음에서 나온다는 그의 탁월한 안목이나 목숨을 건 소신 등을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칼빈주의는 교회와 학교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분야에 걸친 개혁운동이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부의 균등한 분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부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칼빈의 ‘직업소명설’도 이러한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입장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칼빈이 얘기하는 ‘섭리’란 결정론이나 운명론이 아닌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허용하고 이 자유와 책임과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는 것인데 이 이론은 결국 신도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끊임없이 성화과정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 과정은 죽기 직전까지라고 하는 조직신학의 논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독교강요는 오늘날의 신학으로 보아도 명쾌하고 탁월한 것이 틀림 없다. 아마도 그 때 당시로서는 참신한 신학이론이었을 텐데 단숨에 명쾌하게 신학 이론을 정립하고 제도적으로 완비된 교회조직의 이론적인 기반이 되었다. 그가 운영한 제네바 아카데미는 종교개혁 사상 특히 개혁교회 전통을 온 유럽으로 전파하는 요람이었는데 유럽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제네바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배운 개혁교회의 이상을 실현하였으며, 이를 통해 개혁교회 전통은 명실상부한 국제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 아카데미의 두드러진 특징중 하나가 인문학과 교양에 대한 강조였다고 한다. 특별계시뿐 아니라 일반계시도 중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로마가톨릭의 부패를 극복하고 새로이 탄생한 개혁주의적 신학이 여전히 분파 주의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일러니이다. 복음전파를 아직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내에 있는 갈등이다. 정통교단내에서도 통일되지 않는 수많은 논쟁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외적으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고민 해야 한다. 이 문제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개인 신앙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회의감하고도 연결이 된다. 교회는 개인 신앙의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공동체의 구원’을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종교개혁사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현대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많은 묵상과 학습, 그리고 실천적 삶까지 수반되어야 한다.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 스스로 부족한 점을 채우고 행실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지 자격이나 소명부터 점검해본 뒤 실천해야 한다. 또한 신학이론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칼빈은 ‘예정론’을 주장하면서도 또한 실천적인 ‘성화과정’을 강조한다. 교수님께서 강의에서도 설명 하신 바 같이 이것이 변증법적인 논리이며 결정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난해하다. 로마서 7장 8장을 읽다가 느끼던 논리의 비약을 다시 여기서도 마주하게 된다. 어떤 연결고리가 있어야 이 의문이 풀리는가.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결국 완성되지 않지만 인간적인 노력을 끝까지 기울여야 한다는 논리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결코 달성할 수 없지만 죽을 때까지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서 철학과 신학을 좀 더 공부해야 한다는 필요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고 현대 신학은 어거스틴에 대한 주석이라는 말이 있다. 철학과 신학이 플라톤과 어거스틴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는 말인 동시에 또 그들의 영향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일 것이고 또한 플라톤과 어거스틴을 모르고는 철학도, 신학도 기반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종교개혁사를 읽으면서 어거스틴을 연구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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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롤란트 베인턴 저)

홍치모/이훈영 역(크리스찬 다이제스트)

[ 제네바 개혁교회: 칼빈주의 ]

칼빈주의는 불어권 스위스인 제네바에서 시작되었는데 종교에 외형적 수단을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색하였고 성상이 거부되었으며 음악은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신성공동체의 개념을 좀 더 대규모로 이해했으며 성찬을 영적 교제의 통로로 이해한 점은 루터파와 비슷했고 또한 칼빈파의 시편 찬송은 루터파의 성가곡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를 확신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재세례파의 교회관과, 좀 더 뚜렷한 것으로 엄격한 치리를 요구하는 그들의 태도는 칼빈주의에게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 칼빈주의는 활동적이었다. 왜냐하면 칼빈주의자들은 행동해야 할 필요성과 행동 역량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 화약 이후에는 안정된 지위를 누리게 되면서 신앙적 긴장이 풀려 버린 루터파나 또한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나 간신히 살아남는데 급급했던 재세례파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었다. 칼빈주의는 앞서의 사상들을 취합하기도 하고 독자적인 주장도 했다. 그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수세기 동안 개신교의 상당한 지역에서 마치 가톨릭 세계에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Sentences가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Thomas Aquinas의 Summa 조차 이에 비견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장황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의 필체는 간결하고 종합적이고 명쾌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신론, 인간론, 교회론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칼빈주의가 개신교이 가장 활발한 교파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칼빈주의의 추진력은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낙관론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칼빈의 인간관은 루터파나 재세례파에 못지않게 어둡고, 심지어 더욱 파괴적인 감이 있다. 그는 인간을 타락된 존재로 묘사한다. 비록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 반드시 돼지우리같이 될 필연적 이유는 없지만 그것은 결코 낙원이 될 수 없다. 재세례파는 그와 유사한 분석으로부터 교회가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논리를 끌어냈고 루터는 단지 체념섞인 참여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사회 영역내에서 활동하도록 단호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용기에는 ‘예정론’이라는 낙관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서의 위대한 구절은 “네 죄가 사함을 입었느니라”라면 칼빈에게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였다. 칼빈과 루터는 모두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압도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만 루터는 이를 사죄의 기적을 강조하는데 이용했고 칼빈은 신적 계획의 견고성에 대한 확신의 원천으로 이해했다. 그 결과 기독교강요에서는 이신칭의 항목에 앞서 하나님의 주권 항목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주님의 신속한 재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최후의 대환난을 불명확한 미래의 일로 미루었다. 루터는 역상의 종말이 자신의 죽음 이전에 올 것을 열심히 기대하였고 재세례파는 종종 날짜를 정하곤 했다. 그러나 칼빈은 주님의 위대하고 임박한 날을 지상에서 실현될 신성공동체의 꿈으로 대체시켰다. 그 건립은 인간 곧 하나님이 선택한 도구인 선민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위대한 명령을 지키는 데 실패했고 하나님은 그들 대신 새로운 이스라엘인 기독교회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그 교회 역시 변절하였고 이제는 정선된 소수의 무리들, 즉 선민들에게만 소명이 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다시 한번 선택된 자들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지에 관한 방법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루터는 이를 아는 듯이 행세하지 않았다. 뮌처는 영으로 안다고 했고, 쯔빙글리는 믿음으로 안다고 했으며, 재세례파들은 생활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알 길은 없다고 하면서 재세례파처럼 가라지는 없이 오직 밀만 있는 교회를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쯔빙글리의 기준과 재세례파의 기준을 받아들였다. 그는 여기에 세번째 기준(성례전에의 참여)을 덧붙였는데, 이로써 루터와 심지어 가톨릭측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칼빈이 생각하기에 성례전은 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의 통로이자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교제의 표현이다. 인간의 주된 목적은 자기를 구원하거나 그의 구원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어쨌든 인간은 이미 구원받았든지 버림받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므로 이를 놓고 걱정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이었다. 칼빈으로서는 선택 교리는 형언할 수 없는 위안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체의 근심을 제거하고 인간을 자신에 대한 염려로부터 해방하여 주권자 하나님을 위해 불굴의 봉사를 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 자유신령파 ]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 유형들과는 상이한 또 다른 형태를 나았는데 그 특징은 신비주의와 합리주의였다.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중요성은 후대에 엄청나게 유행했던 사상들을 선도했다는데 있다. 이들 자유신령파가 지지했던 신비주의와 합리주의는 모두 기독교 전통속에 뿌리박은 것으로서 하나같이 성과가 크면서도 동시에 탈선가능성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신비주의를 단순히 따스한 개인적 신앙 체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생명력 있는 기독교의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좀더 전문적인 견지에서 신성과 인성이 합일을 목표로 삼는 하나의 종교 유형으로 볼 경우에는 기독교를 강화하는 동시에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공존하게 된다. 인간이 신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개념은 베드로후서에서 찾아볼 수 있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고 말한 한 이교 시인의 말을 호의적으로 인용할 수 있었다. 기욤포스텔은 고대 동방의 비전의 신비적 지식의 비밀을 구명하려는 열망으로 히브리어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행의 도중에 외경이 야고보 복음서를 발견했고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아람어를 익혔다. 모든 진리의 통합과 모든 신앙의 궁극적 조화를 꾀하는 르네상스적 신앙은 그로 하여금 모든 종교의 일치를 이룩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당시에 이단으로 의심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이 후대에 끼친 엄청난 영향으로 인해서 신학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폴란드는 반삼위일체론과 재세례주의가 다양하게 조합된 집단들의 일대 거점이 되었다. 아 나라에거 일어난 운동은 파우스투스 소치누스 또는 소지니의 이름을 붙여 소지니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분명히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폴란드 여왕보나 스포르차의 호의로 이탈리아인들의 이주가 촉진되었다. 자유신령파는 비록 조직된 운동의 형태로는 거의 남긴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탐구, 신비적 경건, 신앙의 자유 등에서 다른 개신교 단체들에 그 나름의 각인을 남겼다. 계몽주의 시대는 그들을 거의 자기들의 사상적 선배로 인정하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분명히 그들의 신세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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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롤란트 베인턴 저)

홍치모/이훈영 역(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 내용 요약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의 말기, 각 분야에서 큰 변란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발생하였다. 르네상스는 기독교적 고대보다는 고전적 고대에 대한 열심을 표방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출현한 민족주의는 신성로마제국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교황의 신권체제를 약화시켰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종교의 부흥운동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공격의 표적은 오직 교황의 신권 체제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그의 노력은 중세 초기의 교회를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할 경우 복원되어야 하는 교회의 본래 모습은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나 심지어 바울서신과 복음서에 나오는 모습이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근본적 논조는 타락하지 않은 원초적 기독교의 회복이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 국가의 쇄신자였다. 그러나 교회는 중세기간 동안의 모든 모순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중 면죄부는 교회 부패의 절정이었다. 잉여 공로는 하나님의 보물창고에 저장되어 있는데 교황은 이를 자기 죄의 값을 치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자유로이 전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교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민중을 착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 루터의 신앙 ]

가톨릭적 해석자들은 종교개혁은 중세 후기의 병폐들의 교정이 아니라 연장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은 규율을 부활시키는 대신 제거한 것인데 예컨대 성직자들의 축첩을 성직자들의 결혼으로 대체시켰다는 것이다. 다른 가톨릭 역사가들은 개신교를 탐욕과 정욕을 근절하려는 정직한 시도로 간주했지만 그 열심이 지나친 나머지 교권에 대한 불복종으로 끝났다고 보았다. 루터가 철학은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다고 항상 변함없이 주장한 게 사실이지만 종교개혁은 후기 스콜라주의의 철학과 이성에 대한 경시 사상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공격의 표적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병폐가 아니라 가톨릭교 그 자체가 복음에 대한 병폐로서 그의 공격의 표적이었던 것이다. 그의 판단으로는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성을 너무 낮게 생각하고 인간의 가치와 잠재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교회는 신자들이 지나치게 만족감에 빠지거나 은총의 수단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주눅들이 않도록 하기 위해 공포심과 소망을 번갈아 가면서 이용했다. 절망에 빠질 정도로 섬뜩한 색깔로 지옥을 묘사한 다음에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연옥이 소개되곤 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층인데 낙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서 정화작용을 계속하는 장소였다. 루터는 그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아 인간의 본성 자체가 너무 타락해 있어서 근본적인 개조를 필요로 한다는 이유 때문에 범죄란 개별적으로 다룰 수 없고 또한 아무리 훌륭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 특수한 경우가 요구하는 수준에는 미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넘친다거나 다른 데 전용이 가능한 선행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루터가 그 신학을 공부하였던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자신에게 법이 되신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운명은 불확정적이며 하나님의 결정은 종잡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인간의 운명은 선악간에 미리 예정되었지만 인간은 그 향방을 알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 정죄된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정죄된 것이다. 구원된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하든 구원을 받는다. 루터는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무죄하시나 인간은 추악하다. 하나님은 강하시지만 인간은 연약하다. 그에 대한 답변은 그는 죄없는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이로써 우리 모두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고 인간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할 만큼 인간과의 일체감을 가지실 정도로 죄 많은 인류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는 것이다. 루터는 성서에 몰두하였으며 일천년 동안 그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던 사람들 중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용서의 기적이 갖는 의미를 체험하였으며 믿음과 신뢰, 오직 이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이야 말로 루터가 그토록 이성을 비하했던 이유이며, 이성을 인간의 마음의 척도로 이해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 루터의 개혁 ]

루터는 가톨릭 신학의 한 유형인 어거스틴주의와 또 다른 유형인 토마스주의를 서로 싸움 붙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가정했지만 그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부여한 능력으로 자기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 이성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루터는 교황과 교회회의의 무오성을 전부 부정하였다. 공로저축설의 경우는 교회법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결국 교회법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권위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중세 후기의 분파들로부터 종말론과 예정론이라는 두 파괴적인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보강되었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지칭하며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것이다. 다른 사상으로서 진정한 교회는 오직 예정된 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상이 있는데 그 사상은 오직 예정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방법이 있을 경우에만 위협적이 되는데 루터는 선택된 자들로 구성된 교회는 사람들에 의해 멸시와 거부를 당하고 세상에서 박해 받고 은폐될 수 밖에 없다는 점 이외에는 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가톨릭의 부패를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한 루터의 개혁은 점차 경직된 성서주의(Biblicism)의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에게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성육신, 십자가, 부활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의미하였다. 이 계시는 시간적으로 예수의 역사적 생애에 의해 제약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존하시며 또한 인간들의 마음 속에 항상 임재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의 현현은 성육신을 통해서였다. 미사의 경우 루터는 집요하게 이는 희생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성찬의 원어는 유카리스트(eucharist)인데 이는 곧 감사를 의미하며 그 원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루터는 화체설을 부정했는데 떡과 포도주가 하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하다는 것을 부정했으나 실질적이고 육체적인 임재는 부정하지 않았다. 중세 성기 이래로 성례의 숫자는 혼인, 신품, 종부, 견진, 고해, 미사, 세례의 7가지로 정해졌다. 루터는 성찬과 세례의 두 가지로 줄였는데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불가시적 은총의 외적 표지이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루터는 국가는 그 자체의 영역내에서는 교회의 간섭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상은 중세에 독일 황제들이 교황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지지했고 단테가 유창한 필치로 옹호했던 교회와 국가간의 병립이었다. 그의 실천가능 여부는 입증되지 않았다. 루터는 황제교황주의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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