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윤리의식 -  ③ 이단(heresy) 논쟁

이단(heresy)과 사이비(pseudo)의 문제는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도 한국사회에서 훨씬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한국교회의 폭발적 부흥의 이면에는 그 안에 기생하면서 더러운 개인적 이득을 챙기려는 사이비 세력들이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 대부흥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기독교 이단이라고 하면 누구나 떠오를 만한 단체들이 많이 있다. 현대교회의 이단의 계보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도 상당수 있다. 유튜브에서 '이단 계보'로만 검색해도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는 코너들이 여럿 있다. 이단적 신앙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잘못된 교리로 기독교를 믿으려면 안 믿는 것보다 더 큰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단의 계보를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나왔다 하면 멱살을 잡고 싸우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은혜만 강조하고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은 결과이다.  기독교 정통 교리를 연구하여 대처를 잘 하여야 신도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단, 사이비의 문제는 공부해보면 금방 잘못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단, 사이비에 미혹되는 교인들의 몽매함만 깨우치면 된다. 하지만 정통으로 분류되는 교단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고 복잡하다. 세계의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운동에 정통교단이 무분별하게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소속교인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교단차원에서 강제로 진행하고 있다. 또한 현대 교회의 대다수가 성령으로부터 온 것 같지 않은 방언(tongue) 기도를 묵인하고 있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그 영을 반드시 분별해야 한다. 또한 거의 모든 개별 교회는 신도들이 늘어나는 성장을 제일의 목표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교단간에 이기적인 분열에 익숙해져 있다. 교회내에서는 파벌싸움 등으로 공동체의 신앙생활은 곪아(festered)가고 있다. 사실 이렇게 혼란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이 있다. 필자도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은 후 본의 아니게 여러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해당 교파나 지교회 등이 적어도 반수 이상은 조금은 애매하지만 정통교리라고 보기 힘든, 이단적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한국 교회는 또 한 번의 쇄신을 하지 않고는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독교 신학이 교회를 중시하는 이유는 '공동체의 구원'이라는 조직신학적인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내용인 것은 맞다. 하지만 작금의 현대교회의 현실을 보면 우선 개인적인 신앙의 올바른 정립이 더 급선무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해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보다 많은 시간을 성경 읽기에 할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자체를 읽고, 주요부분을 암기하고 성경원어인 헬라어, 히브리어도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이 말하는 원래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읽기(암송 포함), 성경원어에 기초가 탄탄하면 그 위에 성경해석을 위한 여러 과목들은 독학으로도 가능할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성령을 간구해야 한다. 성경은 단지 지식으로만 습득될 수 있는 서적이 아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성령으로 인도된 성화되는 삶이 아니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신앙은 올바른 방향성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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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윤리의식 -  ② 임신중절(낙태)의 문제​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긴다“라고 한다. 의학적인 차원으로 수태하는 순간 사람으로서의 인권 존중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임신중절(낙태) 현황을 보면 2010년 34만회에서 2017년에 100만건이었으며 대개 12주 미만의 태아에 해당이 되었다고 한다. 이 수치는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 금지의 헌법 불합치 판정 후 통계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증하고 있다고 한다. 낙태와 관련하여 찬반양론이 거세다. 혹자는 낙태는 그 부모의 권리이므로 아무도 침범 못하며 태아는 의사표시를 할 수 없으므로 인격자가 아니라는 관점에서 부모가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우리 인간은 모든 권리가 허용된 것이 아니며 병원에서 의식을 잃고 있는 사람이나 갓 태어난 아이도 의사표시를 할 수 없다고 해서 부모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고 해도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임신중절(낙태)의 문제는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당사자(the person directly concerned)들에게는 큰 상실로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신학이라기 보다는 목회상담적 접근이라 문외한( those on the outside)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안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다. 단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법적인 문제는 시대에 따라 국가에 따라 달라지고 있으니 논외로 친다고 해도 윤리적으로는 마땅히 태아를 포함한 당사자(the person directly concerned)의 관계적, 상황적 현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주변적 논리 위에 성경 말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여러 구절을 통해 태아는 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인격성을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중심축으로 하여 다른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추스르고,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방향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처럼 당위적으로는 임신중절은 태아라는 인격체를 죽이는 것이라 안되는 일이므로 사전예방이 최선의 방책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실제 결과에 대해서는 사후대책, 즉 치유를 통해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낙태의 실행이었든지, 장애나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무릅쓰고 출산을 했든지 온전히 당사자(the person directly concerned)가 겪어야 할 고통이다. 그 현실을 직시하고 과감히 마주해야 한다. 어떤 불행이 엄습하고 난 뒤 극복은 쉽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든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임신당사자(the person directly concerned)들의 의견이 출산(불행이 예상되는)이나 낙태를 결정한다고 보았을 때, 그들에게 사후에 슬퍼하고 위로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낙태를 결정할 경우에도 그들은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자신들의 결정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여야 한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우선 인권보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그의 은혜와 자비를 구해야 한다. 이것은 이혼, 사별 등 다른 모든 상실과 함께 온전히 당사자(the person directly concerned)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다.  제럴드 싯처(Gerald L. Sittser)는 "이러한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위대한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이러한 심각한 상실에 대해 능히 대답하실 수 있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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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윤리의식 - ② 정의와 불의​

목회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강대상이나 교단에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나 자신도 목회자나 교수도 아니지만 오랫동안 정치적인 논의는 의도적으로 피해 왔다. 어떤 정파든지 선거운동기간에는 국가를 위해 순수한 열정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지만 집권후에는 본성이 드러나 정치권력을 유지하는데만 혈안이 되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투표조차도 참여하지 않는 냉소적인 유권자들이 증가한다.

이제 전세계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전세계적 유행병으로 인한 팬데믹(pandemic)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정치판도도 일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인류는 오랜 경험을 통해 민주주의를 최고의 정치체제로 인식하고 합의된 선거제도를 통해  이러한 이상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전세계의 절반은 아직도 전체주의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더구나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어떤 세력들의 세계 단일정부 수립 시도, 적그리스도의 등장, 종교통합 등이 이 세상을  '빅 브라더스'의 통제 아래로 몰아 넣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 지고 있다. 

한국에서 군사독재를 경험하고  1980년대를 전후해서 대학생활을 한 사람들은 급변하는 산업화 사회를 살아왔다. 경제적으로 그 당시 정권의 공과를 논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당시 학생들은 대체로 정치적으로 편향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민주화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정착이 되었다고 보지만 아직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요소는 의외로 많이 있다. 인류가 선택한 최고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극단적인 전체주의 정치가 아닌 한 이데올로기적 사상은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야 말로 우리가 수호해야 할 가치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의나 자유는 하나님안에서 성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의로움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선택은 이러한 의로움이 구현되는, 하나님을 믿는 자유를 보장받는 선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 세상을 위기의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있는 종교탄압자들은 종교자유의 최대 적이다. 정의와 불의의 문제를 현실정치에 대입하였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단합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종교적 순수성은 정치세력에 의해 이용당하고 유린되어 왔다. 신앙인들은 좀 더 영리해 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죄만으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고, 고문에 의해 불구자가 되며, 급기야 목숨을 잃는 신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다. 우리의 신앙을 교란하기 위해 적그리스도가 조작하는 사건들은 여러 정황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실수도 아닌 것이다. 백 번 양보하여 이것이 그들의 조작이 아니라고 해도 수억명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범죄들만으로도 이들을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북한의 인권문제와 더불어 세계는 언제까지 종교탄압자들을 두고 보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이에 대한 침묵의 대가를 하나님 앞에서 치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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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윤리의식(倫理意識) -  죄의 뿌리 

우리 안의 죄성을 극복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은혜만을 가지고 죄성을 덮으려고 하니 이것이 해결될 수 없다. 내가 스스로 자각하여 바뀌려고 하지 않는 한 죄성은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말이다. 이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연결시켜 보면 ‘목회자의 성 윤리의식’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자신 안에 있는 죄성을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1:23~26까지의 말씀에는 성적타락이 우상숭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구절이 있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 몇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5:31-32) 라고 한다. 바로 남녀의 관계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은 이 '남녀의 관계' 자체를 의미한다고 한다. 묵상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왜 수치와 두려움으로 하체를 가렸는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실제로 죄를 지은 것은 입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수치와 두려움으로 입을 가렸어야 했다. 이것은 모 이단교파가 제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명확한 반박논리를 정통교리로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도 연구대상이다. 영적인 간음과 육적인 간음은 어떤 관계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간음을 더 큰 범죄로 보시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상숭배를 영적인 간음이라고 전제하는 한도내에서의 논리이다. 앞서의 로마서 구절에서 영적인 간음을 범한 인간을 육체적 타락에 내던지셨다고 한 것을 생각해 보자. 이 구절은 선후로 보아 영적인 간음이 육체적 타락의 원인이 된다.  또한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라는 구절로 비추어 보아 원래 인간은 원초적으로 ‘정욕의 죄를 짓는 존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지만, 영적인 간음을 하지 않으면, 즉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바라보고 성령의 열매를 바라고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면 육체적으로 타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성령의 은사로, 이에 더하여 성령의 은사만이 인간의 육체적 타락을 막아 줄 수 있다고 해석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죄의 근원은 그릇된 정욕에 있으며 이에 대한 치료는 성령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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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무엇인가? --- 神學 斷想 3​

특별히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존 웨슬리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그의 신학의 성패가 달렸다고 생각된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humanity)보다 신성(divinity)을 더욱 중요시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루터파나 칼빈주의와도 견해를 달리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구분에 있어서 어느 한 쪽을 더 중시하는 것이 복음주의 정통신학에 비추어 가능한 것인지 알고 싶다. 구원론과 관련하여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설파한 로마서 7장의 '죄'를 살펴보면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로마서 7:5, NKSV)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Greek 원문을 포함한 여러 성경을 대조하여 분석하고 묵상해 보았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의 부분에 대해서 '죄가 그 하고자 하는 바를 율법을 이용하여 우리 지체중에 역사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경세적 삼위일체( the Governing Trinity)의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활동하신다. 이 하나님의 구원과정에서 성령(the Holy Spirit)께서는 인간 개개인의 구원에 있어서 역사하신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구원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동체적 역할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는 죄가 없었고 죄로 인한 소외도 없었으나 한 사람(Adam)의 죄로 인해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된 이래 사람들 사이에서의 소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소외를 가져 왔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소외를 치유하기 위한 대부분의 역할을 성령께서 인도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담당하고 있다.​

교회는 단순히 어떤 건물이나 사람들이라는 정태적 관계라기 보다는 계약, 하나님 나라의 표지, 공동체와 같은 동태적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교회는 현재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별한 계약 관계 속에 있는 백성들을 종말까지 인도하는 공동체이다. 즉, 교회는 종말론적 계약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계약 백성이 필수요소가 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 개념 정립에 선결되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시간적 순서가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이 시간이 있을 수 없고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미 인간세상에 들어와 계신다. 그 분께서는 우리의 현재적 실존속으로 뚫고 들어와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이미 현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들어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교회에서의 현재의 삶은 앞으로 도래할 영원한 세상을 위한 훈련도장이요 준비장소이다. 종말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류구속의 원대한 계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어디로 이끌고 계시는가. 지금의 세계는 하나님의 계획중에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묵상해 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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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무엇인가? --- 神學 斷想 2

인간 존엄의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찬양하도록 피조물을 지으셨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으므로 피조물 사이에는 연결점과 유사점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더불어 살아가야 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더불어 구원의 길로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섭리란 “종말을 향한 사물들의 질서의 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피조물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신다. 악을 징벌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역사의 완성 때에 삶의 모든 악과 불의들을 고치실 것이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목표의 근원이시며 그 목표의 완성을 향해 모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 세상의 역사를 종말론적인 구속사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짐으로써 공통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목적 하에서 지으셨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에게 의지해야 하는데 여기에 육체와 혼과 영이 따로 떨어져서 의지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 셋이 각기 기능을 달리할지언정 ‘통일된 전체’가 다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을지라도 마르틴 루터가 얘기한 것처럼 ‘말씀과 성령’으로 회복할 수가 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이고 그리스도이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점진적으로 회복된다는 루터의 이론을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완전한 형상의 회복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결론을 맺고 또 다른 삶에 가서야 완성된다고 본다.

하나님의 형상을 종말론적인 목적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리스도안에서의 공동체로 보아야 하며 그것은 교회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성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친히 “누구든지 자신의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3)라고 하시어 영생을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서 순교에 까지 이른 것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에 따라 순종하여 삶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야 하는 것이다. 기독론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지닌 분임을 인정해야 하고 한 인격안에서의 두 개의 완전한 본성을 발견하게 된다. 즉,  '말씀(Logos)이신 예수' 개념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및 계시적 측면을 강조하고 '아들이신 예수' 개념으로 예수의 역사적 측면을 조명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신적인 아들이며 인간의 욕정으로 부터의 결과가 아닌 '동정녀 탄생'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임을 성서의 증거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대속 죽음을 통한 인간 구원이었는데 이로써 우리는 구원론이 기독론을 근저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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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무엇인가? --- 神學 斷想 1

신학이란 신(theos)과 말(logos)의 결합어이다. 즉 신을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은 각 시대마다 그에 맞는 적절한 소명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소명을 정확하고 깊이있게, 역사 책임적 과제를 설정하고 구체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봉사할지에 대해서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성경을 정확하고 바르게 알기 위하여 신학을 공부한다. 일반적으로 신학은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실천신학으로 나누어서 학습하게 된다. ‘오직 성서로'라고 외친 복음주의자들의 의로움을 경외한다. 그들의 통찰력에 감사할 따름이다. 일점 일획 까지 성경전체가 성령의 역사로 기록된 것을 믿지 않고서는 성경을 통한 감동과 그에 따른 삶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이 쓰여진 이후 수천년동안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구절들까지 최근의 과학적 연구의 성과로 그 내용이 진실이었음이 속속 드러남을 보면서 성경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없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것이며 이것이 인간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인간 구원의 메시지임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관으로 일하고 있던 49세때 흉노를 토벌하던 이릉의 사건에 연루, 누명을 쓰고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는다. 이때 그는 "하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부르짖으면서 이후 여생을 전국을 돌며 자료를 수집, 역사상 최고의 사서 "史記"를 저술하는데 투신한다. 이른바 '사마천의 사기'이다. 그가 알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은 계시는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신가?'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마천이 만약 우리의 하나님을 알았다면 신학의 위대한 전제인 하나님께서 존재하고 계시며 하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신적인 말씀 속에서 계시하시면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공의롭고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시대는 다르지만 그가 성경을 접하고 읽고 연구했더라면 로마서 5장 3~4절 말씀에 큰 위안을 얻었을것 같다.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교회를 다니지 않던 때에(다니고 있었더라도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신앙의 단계가 초등학문의 수준에 머물고 있을때) 친구들과 종교문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지면 늘 등장하는 주제가 삼위일체론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AD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령의 온전한 신성을 선언하여 삼위일체론이 정통신앙으로 인정된 것과 관련해서 일종의 정치적인 회의에서 정통과 이단을 구획하는 것일 뿐 이런 문제들이 종교의 본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졌음과 그러한 공의회조차도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결과였던 것 같다. 지금도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규정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대표적으로 창세기 1:26의 '우리라는 복수개념' 요한복음 14:26에서 말하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등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성령의 신성과 관련해서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즉, 구속사역, 구원의 계획 속에서 성령 하나님을 이해하여야 하며, 성도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성령이 실제로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면, 우리가 성령에 참여함으로써 신적인 본질을 공유하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종교가 그 위에 설 수 없을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유의지이며 창조된 세상으로부터도 초월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즉, 창조의 교리는 성서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완성하시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바 ‘볼트만’은 특히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창조교리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들과 구별하게 해주며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창조교리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성서의 다른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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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을 개혁하라!

신학일반/교회의 개혁 2020. 7. 14. 01:12 Posted by forest38

 

종교개혁을 개혁하라 !

 

Ⅰ. 서론​

일반적으로 전통은 역사적으로 전승된 물질문화, 사고와 행위양식,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 인상, 갖가지 상징군으로 이해되고 개혁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 고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영어에서 reformation은 ‘변화’의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는 개념이라고 한다. 본 페이퍼에서는 이러한 전통과 개혁이라는 가치 판단을 종교개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Ⅱ. 본론​

전통의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는 역사적으로 전승된 물질문화, 사고와 행위양식,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 인상, 갖가지 상징군을 의미한다. 전통은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화를 주관적으로 재평가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단순한 인습이나 누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조의 좋은 전통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나쁜 전통에서는 과감히 탈피하여야 한다. 전통과 개혁의 논의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톨릭에 대항하여 벌인 종교개혁이 그 좋은 예이다. 종교개혁의 격랑 속에 로마 가톨릭은 자체 淨化를 한답시고 트랜트 공의회(1545~1563, 제 19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개최하여 나름대로 개혁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적 결정만 내렸을 따름이다. 로마 가톨릭은 7개의 성례전을 제정하고 주로 형식에 얽매이는 종교 제전을 행하다가 개혁주의의 공격을 받았으나 지금도 그 형식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그 전통을 개혁한 것이 개혁주의 신앙이었는데 그 개혁주의 신앙도 후대에 이르러 많은 변천을 하면서 16세기의 개혁주의의 모델은 그 이후의 신학사조가 보았을 땐 또한 전통이 되었다. 따라서 전통이란 어떠한 시대나 지역범위에서 결정되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끊임 없이 변화하는 문화나 제도에 속해 있는 어떠한 관념이나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전통에 대한 생각은 좋은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할 뿐 아니라 나쁜 전통을 현실에 대입하여 과감히 개혁하고 폐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례전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중요한 가치판단이었다. 부정적인 측면이 많았지만 로마 가톨릭은 사도시대의 전승을 나름대로 정립하여 의식을 만들었고 그것이 종교개혁가들의 눈에는 누습으로 비춰진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누습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결국 루터와 쯔빙 글리의 성만찬에 대한 해석도 또 다른 전통과 개혁이라는 다툼이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과 개혁이라는 구분선 보다는 올바른 준거기준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직분의 동등성(한 직분이 다른 직분을 지배하지 않는다)과 고유성(한 직분이 다른 직분을 침범하지 않는다)을 강조한다. 직분의 핵심은 ‘역할과 기능’에 있지 서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장로교의 전통은 목회자나 교사 등도 신도들 중 적임자를 선정하여 그 직을 맡기는 하나의 직분을 의미한다고 한다. 물론 그 경우에도 엄격한 선발 기준이 있다고 하지만 일반 성도들 중의 하나, 즉 보통 인간임을 전제하는 말일 것이다. 현대 한국교회는 이러한 장로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전통은 새로운 개혁에 의해 비판받고 교정받는다. 그러나 그 개혁은 전통, 곧 원래의 변형되지 않은 전통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노력일 뿐이다. 16세기를 발칵 뒤집어 놓은 루터의 개혁사상은 실상 알고 보면 오히려 초대교회의 전통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결국 그의 개혁 이론은 현실 정치세력에 의해 이용당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개혁이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 고치는 것을 말한다. 특별히 기독교 역사에서는 종교개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개혁이란 16세기 유럽에서 로마가톨릭 교회 교리의 오류와 윤리적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서 일어났던 신앙의 혁신운동이었다. 당시 종교개혁가들의 개혁운동은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칼”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목숨을 내어 놓고 도전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개혁하고자 했던 것은 새로운 종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의미의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종교 개혁에서 말하는 ‘개혁’이란 ‘처음의 올바른 것을 되찾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기존의 모든 신학사조를 전통으로 분류하고 현재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개혁으로 이해한다. 교리적으로 잘못되고 그릇된 것은 성경 안에서 개혁되어져야 하고 매일 매일 바뀌어져야 한다. 우리의 대부분의 개혁적 사고는 개별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신학을 정립하고 그것이 성경에 비추어 올바른 것인지를 끊임없이 점검하면서 교회공동체를 통해 검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신자들이나 신앙의 단계가 낮은 신도의 경우는 목회자의 지도에 따라 안내를 받아야 하지만 어느 정도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올바른 신학 정립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서의 개혁이란 것은 매일 죽고 매일 다시 태어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회심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이미 마음속으로라도 범죄한 인간들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단지 매일 죽고 다시 매일 그리스도안에서 태어남으로써 점차 변화 되어야 것이다. 한편으로는 개혁이라는 용어에는 ‘급진적’ 이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단번에 변화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 다시 뉘우치고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우리의 상황이라고 볼 때 매일 반복되는 뉘우침을 통해 어느 순간에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단번에’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내 직분에 대한 개혁은 먼저 말씀에 있어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주석과 묵상을 통해 바르게 이해하고 끝없는 공부가 이루어져야 한다. 목사의 계속된 공부는 그래서 중요하다. 또한 성례문제에 있어서는 치리장로의 역할이 강조되는데 누가 성찬과 세례에 참여할 것인지를 심사해야 하고 이에 따라 장로의 심방이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사실 지금의 교회에서는 성찬식 조차도 어떤 사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확실히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명확히 개념을 잡아주어야 할 것 이다. 종교개혁자 들은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신자들의 삶을 권면하고 때로는 비판을 했다. 이런 교회적 전통은 사실 고린도 전서를 읽어봐도 잘 나타나 있다. 권징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현대교회에서도 이를 엄격히 시행해야 하는 데 결국 개혁이란 초대 교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에서 개혁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우리는 개혁을 해야 하는가? 종교개혁은 서구에서 일어난 그들의 종교 개혁이었다. 우리 교회가 스스로를 개혁한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주 나중에 그들이 이룩한 개신교를 받아 들였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이를 개혁해야 한다. 복음을 기복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교회 성장에만 몰두하는 교단, 신앙인지 미신인지 분간이 안가는 기도 행태 등을 개혁해야 한다.​

Ⅲ. 결론​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빈처럼 순수한 신앙적 열정에서 시작되고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 화형이나 교수형을 감당한 사람들도 많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의 세속적 이익에 영합하기 위해서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혹자는 개신교 운동 자체를 라틴족에 대항한 튜튼족의 저항이라고 보기도 하고 로마에 대한 항거가 경제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아마도 종교 개혁은 다양한 요인들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일 것이다.

로마가톨릭의 역사를 보면, 7~8세기 이전부터 이미 초대교회의 신양적 열정이 변질되어 부패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면벌부는 그 부패가 종기처럼 부어 오른 것일 뿐이었다. 종교개혁의 씨앗은 4~5세기부터 뿌려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중세라고 해서 모두 부패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대표적으로 수도원운동이 있다. 루터도 수도사 출신임을 상기해야 한다. 루터와 칼빈 등 개혁주의자들의 개혁은 결국 현실적으로는 대부분 경제주체들의 이해관계로 귀결되었다. 진정한 의미의 개혁은 각 개별 신자들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결국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당시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정의 분야까지 총체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부산물이었다. 신앙과 경건은 일신 전속적인, 그것도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내적 성찰이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부패를 개혁하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분명 개혁가들은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개혁을 진행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개혁을 단지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산으로부터 근본 원리를 찾아내어 우리 상황 가운데 적응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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