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사(롤란트 베인턴 저)

홍치모/이훈영 역(크리스찬 다이제스트)

[ 제네바 개혁교회: 칼빈주의 ]

칼빈주의는 불어권 스위스인 제네바에서 시작되었는데 종교에 외형적 수단을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색하였고 성상이 거부되었으며 음악은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신성공동체의 개념을 좀 더 대규모로 이해했으며 성찬을 영적 교제의 통로로 이해한 점은 루터파와 비슷했고 또한 칼빈파의 시편 찬송은 루터파의 성가곡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를 확신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재세례파의 교회관과, 좀 더 뚜렷한 것으로 엄격한 치리를 요구하는 그들의 태도는 칼빈주의에게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 칼빈주의는 활동적이었다. 왜냐하면 칼빈주의자들은 행동해야 할 필요성과 행동 역량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 화약 이후에는 안정된 지위를 누리게 되면서 신앙적 긴장이 풀려 버린 루터파나 또한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나 간신히 살아남는데 급급했던 재세례파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었다. 칼빈주의는 앞서의 사상들을 취합하기도 하고 독자적인 주장도 했다. 그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수세기 동안 개신교의 상당한 지역에서 마치 가톨릭 세계에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Sentences가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Thomas Aquinas의 Summa 조차 이에 비견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장황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의 필체는 간결하고 종합적이고 명쾌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신론, 인간론, 교회론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칼빈주의가 개신교이 가장 활발한 교파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칼빈주의의 추진력은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낙관론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칼빈의 인간관은 루터파나 재세례파에 못지않게 어둡고, 심지어 더욱 파괴적인 감이 있다. 그는 인간을 타락된 존재로 묘사한다. 비록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 반드시 돼지우리같이 될 필연적 이유는 없지만 그것은 결코 낙원이 될 수 없다. 재세례파는 그와 유사한 분석으로부터 교회가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논리를 끌어냈고 루터는 단지 체념섞인 참여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사회 영역내에서 활동하도록 단호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용기에는 ‘예정론’이라는 낙관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서의 위대한 구절은 “네 죄가 사함을 입었느니라”라면 칼빈에게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였다. 칼빈과 루터는 모두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압도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만 루터는 이를 사죄의 기적을 강조하는데 이용했고 칼빈은 신적 계획의 견고성에 대한 확신의 원천으로 이해했다. 그 결과 기독교강요에서는 이신칭의 항목에 앞서 하나님의 주권 항목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주님의 신속한 재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최후의 대환난을 불명확한 미래의 일로 미루었다. 루터는 역상의 종말이 자신의 죽음 이전에 올 것을 열심히 기대하였고 재세례파는 종종 날짜를 정하곤 했다. 그러나 칼빈은 주님의 위대하고 임박한 날을 지상에서 실현될 신성공동체의 꿈으로 대체시켰다. 그 건립은 인간 곧 하나님이 선택한 도구인 선민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위대한 명령을 지키는 데 실패했고 하나님은 그들 대신 새로운 이스라엘인 기독교회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그 교회 역시 변절하였고 이제는 정선된 소수의 무리들, 즉 선민들에게만 소명이 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다시 한번 선택된 자들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지에 관한 방법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루터는 이를 아는 듯이 행세하지 않았다. 뮌처는 영으로 안다고 했고, 쯔빙글리는 믿음으로 안다고 했으며, 재세례파들은 생활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알 길은 없다고 하면서 재세례파처럼 가라지는 없이 오직 밀만 있는 교회를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쯔빙글리의 기준과 재세례파의 기준을 받아들였다. 그는 여기에 세번째 기준(성례전에의 참여)을 덧붙였는데, 이로써 루터와 심지어 가톨릭측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칼빈이 생각하기에 성례전은 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의 통로이자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교제의 표현이다. 인간의 주된 목적은 자기를 구원하거나 그의 구원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어쨌든 인간은 이미 구원받았든지 버림받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므로 이를 놓고 걱정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이었다. 칼빈으로서는 선택 교리는 형언할 수 없는 위안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체의 근심을 제거하고 인간을 자신에 대한 염려로부터 해방하여 주권자 하나님을 위해 불굴의 봉사를 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 자유신령파 ]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 유형들과는 상이한 또 다른 형태를 나았는데 그 특징은 신비주의와 합리주의였다.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중요성은 후대에 엄청나게 유행했던 사상들을 선도했다는데 있다. 이들 자유신령파가 지지했던 신비주의와 합리주의는 모두 기독교 전통속에 뿌리박은 것으로서 하나같이 성과가 크면서도 동시에 탈선가능성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신비주의를 단순히 따스한 개인적 신앙 체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생명력 있는 기독교의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좀더 전문적인 견지에서 신성과 인성이 합일을 목표로 삼는 하나의 종교 유형으로 볼 경우에는 기독교를 강화하는 동시에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공존하게 된다. 인간이 신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개념은 베드로후서에서 찾아볼 수 있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고 말한 한 이교 시인의 말을 호의적으로 인용할 수 있었다. 기욤포스텔은 고대 동방의 비전의 신비적 지식의 비밀을 구명하려는 열망으로 히브리어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행의 도중에 외경이 야고보 복음서를 발견했고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아람어를 익혔다. 모든 진리의 통합과 모든 신앙의 궁극적 조화를 꾀하는 르네상스적 신앙은 그로 하여금 모든 종교의 일치를 이룩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당시에 이단으로 의심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이 후대에 끼친 엄청난 영향으로 인해서 신학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폴란드는 반삼위일체론과 재세례주의가 다양하게 조합된 집단들의 일대 거점이 되었다. 아 나라에거 일어난 운동은 파우스투스 소치누스 또는 소지니의 이름을 붙여 소지니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분명히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폴란드 여왕보나 스포르차의 호의로 이탈리아인들의 이주가 촉진되었다. 자유신령파는 비록 조직된 운동의 형태로는 거의 남긴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탐구, 신비적 경건, 신앙의 자유 등에서 다른 개신교 단체들에 그 나름의 각인을 남겼다. 계몽주의 시대는 그들을 거의 자기들의 사상적 선배로 인정하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분명히 그들의 신세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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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롤란트 베인턴 저)

홍치모/이훈영 역(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 내용 요약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의 말기, 각 분야에서 큰 변란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발생하였다. 르네상스는 기독교적 고대보다는 고전적 고대에 대한 열심을 표방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출현한 민족주의는 신성로마제국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교황의 신권체제를 약화시켰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종교의 부흥운동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공격의 표적은 오직 교황의 신권 체제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그의 노력은 중세 초기의 교회를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할 경우 복원되어야 하는 교회의 본래 모습은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나 심지어 바울서신과 복음서에 나오는 모습이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근본적 논조는 타락하지 않은 원초적 기독교의 회복이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 국가의 쇄신자였다. 그러나 교회는 중세기간 동안의 모든 모순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중 면죄부는 교회 부패의 절정이었다. 잉여 공로는 하나님의 보물창고에 저장되어 있는데 교황은 이를 자기 죄의 값을 치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자유로이 전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교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민중을 착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 루터의 신앙 ]

가톨릭적 해석자들은 종교개혁은 중세 후기의 병폐들의 교정이 아니라 연장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은 규율을 부활시키는 대신 제거한 것인데 예컨대 성직자들의 축첩을 성직자들의 결혼으로 대체시켰다는 것이다. 다른 가톨릭 역사가들은 개신교를 탐욕과 정욕을 근절하려는 정직한 시도로 간주했지만 그 열심이 지나친 나머지 교권에 대한 불복종으로 끝났다고 보았다. 루터가 철학은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다고 항상 변함없이 주장한 게 사실이지만 종교개혁은 후기 스콜라주의의 철학과 이성에 대한 경시 사상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공격의 표적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병폐가 아니라 가톨릭교 그 자체가 복음에 대한 병폐로서 그의 공격의 표적이었던 것이다. 그의 판단으로는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성을 너무 낮게 생각하고 인간의 가치와 잠재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교회는 신자들이 지나치게 만족감에 빠지거나 은총의 수단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주눅들이 않도록 하기 위해 공포심과 소망을 번갈아 가면서 이용했다. 절망에 빠질 정도로 섬뜩한 색깔로 지옥을 묘사한 다음에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연옥이 소개되곤 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층인데 낙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서 정화작용을 계속하는 장소였다. 루터는 그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아 인간의 본성 자체가 너무 타락해 있어서 근본적인 개조를 필요로 한다는 이유 때문에 범죄란 개별적으로 다룰 수 없고 또한 아무리 훌륭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 특수한 경우가 요구하는 수준에는 미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넘친다거나 다른 데 전용이 가능한 선행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루터가 그 신학을 공부하였던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자신에게 법이 되신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운명은 불확정적이며 하나님의 결정은 종잡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인간의 운명은 선악간에 미리 예정되었지만 인간은 그 향방을 알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 정죄된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정죄된 것이다. 구원된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하든 구원을 받는다. 루터는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무죄하시나 인간은 추악하다. 하나님은 강하시지만 인간은 연약하다. 그에 대한 답변은 그는 죄없는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이로써 우리 모두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고 인간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할 만큼 인간과의 일체감을 가지실 정도로 죄 많은 인류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는 것이다. 루터는 성서에 몰두하였으며 일천년 동안 그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던 사람들 중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용서의 기적이 갖는 의미를 체험하였으며 믿음과 신뢰, 오직 이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이야 말로 루터가 그토록 이성을 비하했던 이유이며, 이성을 인간의 마음의 척도로 이해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 루터의 개혁 ]

루터는 가톨릭 신학의 한 유형인 어거스틴주의와 또 다른 유형인 토마스주의를 서로 싸움 붙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가정했지만 그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부여한 능력으로 자기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 이성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루터는 교황과 교회회의의 무오성을 전부 부정하였다. 공로저축설의 경우는 교회법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결국 교회법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권위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중세 후기의 분파들로부터 종말론과 예정론이라는 두 파괴적인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보강되었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지칭하며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것이다. 다른 사상으로서 진정한 교회는 오직 예정된 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상이 있는데 그 사상은 오직 예정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방법이 있을 경우에만 위협적이 되는데 루터는 선택된 자들로 구성된 교회는 사람들에 의해 멸시와 거부를 당하고 세상에서 박해 받고 은폐될 수 밖에 없다는 점 이외에는 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가톨릭의 부패를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한 루터의 개혁은 점차 경직된 성서주의(Biblicism)의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에게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성육신, 십자가, 부활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의미하였다. 이 계시는 시간적으로 예수의 역사적 생애에 의해 제약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존하시며 또한 인간들의 마음 속에 항상 임재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의 현현은 성육신을 통해서였다. 미사의 경우 루터는 집요하게 이는 희생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성찬의 원어는 유카리스트(eucharist)인데 이는 곧 감사를 의미하며 그 원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루터는 화체설을 부정했는데 떡과 포도주가 하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하다는 것을 부정했으나 실질적이고 육체적인 임재는 부정하지 않았다. 중세 성기 이래로 성례의 숫자는 혼인, 신품, 종부, 견진, 고해, 미사, 세례의 7가지로 정해졌다. 루터는 성찬과 세례의 두 가지로 줄였는데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불가시적 은총의 외적 표지이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루터는 국가는 그 자체의 영역내에서는 교회의 간섭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상은 중세에 독일 황제들이 교황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지지했고 단테가 유창한 필치로 옹호했던 교회와 국가간의 병립이었다. 그의 실천가능 여부는 입증되지 않았다. 루터는 황제교황주의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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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울다」

(제럴드 싯처 저/이현우역)

요약

이 책은 정상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한 사람이 큰 사고를 통해 가족을 잃고 상실을 경험한 뒤 자신에의 깊은 종교적 성찰을 통해 삶의 희망을 되찾아 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처음부터 배치함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궁금증과 함께 긴박감을 유지해간다. 이 책 전반에 기독교적 진리가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상실, 회복, 구원, 사랑, 용서, 이러한 모든 기독교적 성찰이 저자와 그가 예로 든 사람들의 상실의 고통에 녹아 들어 삶과 하나님이 하나로 엮인다. 저자는 워싱턴 스포캔에 있는 휘트워스 대학(Whitworth college)에서 종교ㆍ철학 교수로 1989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에는 아이오와 주 오렌지시티에서 대학 교목으로,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목사로 사역했다. 풀러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를 받았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자는 대부분 학생들이 기독교를 삶의 중심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극히 일부분(은사주의 신앙, 금욕 신앙)만 차지하는 것을 발견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은 귀납법적 논리로 읽어 갈수록 기독교적 세계관이 강화된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 1장 : 끝, 그리고 시작

어느 주말, 저자는 온 가족이 원주민인 인디언 마을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나들이를 다녀 오는 길에 음주운전자로 인해 큰 사고를 당한 뒤 모친, 아내, 아이까지 세명이 죽는 끔찍한 상실을 경험한다. 울부짖음, 비명,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구겨진 차체, 식구들의 찢겨진 몸뚱이, 그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고, 다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아직 책임져야할 세 아이가 남아 있었다. 삶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끔찍한 비극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그와 가족을 향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고통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서 거기에서 빠져나갈 여러 가지 대안들을 모색했다. 하나의 대안만이 남았다. 그는 그가 고통을 겪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 2장 : 상실을 비교할 수 있는가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상실로 고통 당한다는 의미이다. 상실은 또 순환한다. 변화란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엇인가를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겪은 상실은 치명적 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다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상실을 겪는다. 불치의 병, 이혼, 강간, 정서적인 학대, 오랜 실직 등 이런 상실이 일어났을 때 우리 삶은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맞이 한다. 그리고 그것을 수치화 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을 벗어난 잘못된 질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누구의 것이 더 나쁜가”가 아니라 “고통에서 어떤 의미를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고통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

제 3장 : 어둠 속으로 들어가다

가족을 죽게 만들었던 사고 장면은 마치 가장 잔인한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공포 영화처럼 계속해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면서 그는 미치기 직전까지 갔다. 그는 이전에 그와 같은 고뇌와 공허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비록 그 환상이 그의 최후에 대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그때 그라는 존재가 짙은 어둠 속에 갇혀 버렸 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맞닥뜨려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비록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지을 힘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상실이란 것이 피해가거나 회피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 도망치기보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가 경험한 상실이 그를 어디로 데리고 가든 무조건 피하려 들기보다, 상실에 따른 고통이 그를 어떤 모양으로 변하게 하든 순응하기로 했다. 고통을 마주 서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비록 죽음을 경험했지만, 또한 전에는 가능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여러 방식을 통해서 삶을 경험했다. 어둠이 지나고 난 다음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있을 때 고통속에 있으면서 그 고통 속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슬픔이 그의 영혼 속에 들어와 영구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고통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갈수록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삶,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는 걸 조금씩 배워갔다. 영혼은 고통을 통해 부쩍 자랄 수 있다. 영혼이 상실을 겪음으로써 한 단계 올라섰을 때, 우리 영혼은 다시금 커다란 기쁨과 힘과 평화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제 4장 : 소리없는 고통의 비명소리를 듣다.

고통은 살아 있다는 확실한 징표다. 죽은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영혼에서 똑같이 일어난다. 삶이 주는 기쁨이 지극했다면 상실에 따르는 고통도 그와 맞먹는다. 잃어버린 대상이 그만큼 가치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고통을 당했을 때 그것을 애써 피하려고만 하면 그들의 영혼은 궁극적으로는 고통에 반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장 가능성을 놓치고 만다. 그도 이런 반응이 자신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더욱이 그런 반응이 ‘회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단계”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진실이 아님을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다. 상실의 핵심부에는 우리가 유한한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두려운 진실이 존재한다. 우리는 티끌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제 5장 : 광막한 바다를 혼자서 항해하다

사고 첫 해 동안에 그는 승진이나 신망을 쌓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거나 일 자체에 진보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의 일을 감당했다.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추스르고,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방향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은혜의 선물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희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겪는 상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그러나 삶은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

제 6장 : 익숙한 자아와 결별하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은 대개는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자아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에 대한 인식은 마치 무의식적인 반사작용처럼 다가온다. 그는 그가 겪은 상실로 인해 그의 기대를 높게 유지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사고가 나기 전의 그의 삶을 더 좋아한다. 따라서 지금의 그의 삶 역시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데 별로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는 그가 처한 상황을 껴안으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정체성을 얻으려면 우리를 도울, 우리보다 위대한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능히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이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공적과 권력 위에 서지 않고 오직 은혜 위해 서는 사람이 되도록 도우실 수 있다. 우리는 비록 몸은 상하고, 생각은 혼란스럽고, 감정은 곤란을 겪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로서 사랑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삶이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복된 삶이 될 수 있는 희망을 여전히 품을 수 있다.

제 7장 : 일상이 멈춰버리다

우리의 삶은 연속적인 영화필름과 같다. 그런데 상실은 우리 삶을 스냅사진처럼 만들어 버린다. 움직임이 멈추고, 모든 것이 정지된다. 우리는 예전에는 존재했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우리 삶의 연속적인 활동사진을 회고하듯 날마다 사진앨범을 들여다 보게 된다. 삶은 과정이다. 삶은 한순간에 모두 일어나는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연속적 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상실은 일상을 갑작스럽게 정지시킨다. 모든 사람은 결점이 있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관계가 불완전한 한가지 이유인 것이다. 관계의 상실을 경험할 때, 그것은 소중하면서 동시에 불완전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한 되돌릴 수 없는 상실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구원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은 상실을 놓아줌으로써 상실이 그들 삶에 가져다주는 좋은 영향들을 껴안아야 한다. 그들은 뒤에 놓인 것들은 초월하고 앞에 놓인 것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변화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개인적인 변화를 꾀해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온다.

제 8장 : 상실은 아무 때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상실은 우리가 살아온 세상을 일순간 차갑고 악의 가득한 곳으로 바꾼다. 그것은 마치 아무런 예고나 사전 계획이나 타당한 이유 없이 무수한 원자들이 충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이 종종 무작위로 일어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임의성이 주는 공포는 하나님의 신비에 가득한 목적 속에 덮이고 만다. 결국 우리 삶은 좋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며, 거기까지 가려면 우리는 반드시 어려움을 만나야 하고 때로는 길을 돌아서 가야 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제아무리 끔찍한 경험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 사건들을 연쇄적으로 일어나도록 하는 방아쇠 역할을 함으로써 미래 세대들이 복을 누리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상실은 임의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을 뛰넘는 어떤 거대한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다.

제 9장 : 왜 나는 아닌가

상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공평함이라는 개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우리 대부분은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자기가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실제로 삶의 많은 시간 동안 그 일에 성공한다. 서구 문명 속에서 우리가 재주껏 소유하고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을 얻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고가 일어난 후 그는 곧바로 세상에 편만해 있는 고통과 비로소 접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완전하게 공평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기대감이 갖는 문제는 그런 세상속에서는 은혜도 없다는 것이다. 지난 3년간 그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또 갈망한다는 점이다. 은혜는 그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찾아왔다. 그날 사고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살아 계신 실체로 그에게 다가오셨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이전보다 잘 드러나지는 않아도 훨씬 강해졌다. 은혜가 있는 세상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 이상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할 것이며,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함 없다.

제 10장 : 용서하고 기억하라

정의는 항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쁜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고도 잘 지낸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분노, 슬픔, 또는 정의에 대한 갈망과는 다르다. 그것은 역병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용서는 상처를 주는 대신에 치유를 가져온다. 깨진 관계를 회복시킨다. 그러나 용서하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용서는 결국 그것을 베푼이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용서를 통해 우주를 운행하신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가해진 행악과 마주할 수 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는 상실을 겪은 뒤에는 어디로 향하든 매번 하나님께로 달려갔다는 걸 알게 된다. 그가 겪은 고통의 임의성을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그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안고 씨름했다.

제 11장 : 하나님이 침묵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다스리신다. 그분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철저하게 통제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 야웨(Yahweh)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 계시는 분이고, 궁극적인 실체이며, 주권자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다스리는 완전한 권세를 소유하고 계신다. 무신론이 의미하는 내용은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렵긴 해도, 무신론을 믿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무신론은 우리가 상실을 겪으면서 갖게 되는 느낌을 인정하는 데 필요한, 현실을 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우리에게서 앗아간다. 슬픔, 분노, 우울, 이런 감정들은 정당한 이유를 가진 채 영혼 에서 나오는 진실한 표현들이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한다. 그 선택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분이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당신에게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의심과 믿음을 모두 품을 수 있는 머리와, 슬픔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가슴과, 하나님을 맞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의지를 안고서 자유로이 나아간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던 절벽은 여전히 나를 압도하며 높이 서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곳을 바라보며 안전감을 느끼고 한편으로 경외감에 가득 차게 된다.

제 12장 : 죽음은 최후 승자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과 맞닥뜨렸을 때, 자신들의 운명과는 상관없이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 다른 이들은 가능한 모든 쾌락에 자신들을 내맡기거나 안전감을 얻으려고 되도록 많은 권력을 끌어모음으로써 오직 그 순간만을 즐기며 살아간다. 또 다른 이들은 삶이 허무하다고 보고 자살이라는 방법을 써서 삶을 순식간에 끝내 버린다.

어떤 기적도 최종적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지 못한다. 따라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 우리에게는 기적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삶을 영구적으로 새롭게 하는 부활이 필요하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원수가 결정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패배하고 말 그런 삶을 갈망한다.

제 13장 : 상처 입은 공동체

상실이라는 괴로움은 고독한 경험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혼자서 그것을 마주쳐야 하는 이유가 된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줄 수 없다. 우리를 대신할 수 없다. 또 우리 안에 있는 고통을 줄여줄 수 없다.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게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전의 상실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 깊이 사랑하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새로워진 기력과 헌신을 모아 사랑을 끌어안음으로써 자신들이 경험한 상실에 반응해야 한다. 상심한 상태에서 사랑하려고 하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실로 고통을 겪으면서 성숙한 사랑은 더욱 진실한 사랑이 될 수 있다. 상심을 겪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외부에서 사랑의 원천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본질상 사랑이기 때문이다. 상심과 사랑을 함께 묶는 것이 다소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함께 한다.

제 14장 :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음악은 그의 영혼을 달래주었다. 그는 이때 음악이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어루만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고 이후 몇 달 동안 그는 밤이 되면 포레와 바흐의 음악을 들었고, 어느 때는 동이 틀 무렵까지 듣기도 했다. 이들의 음악은 고뇌하는 그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 은유와 이미지로 구성된 시들은 그의 슬픔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유익했다. 하루는 어느 청교도가 자신의 아이를 땅에 묻은 후에 썼다는 시 한편을 한 학생이 들려주었다. 이 시의 저자가 자신의 슬픔을 형상화하는 데 사용한 단어들은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사람들이 상실을 겪고 나서 보다 원대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모습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음주운전을 반대하는 어머니 모임의 설립자는 음주 운전자가 일으킨 사고로 자녀를 잃은 부인이다. 수감자와 그 가족을 돕기 위해 결성된 “프리즌 펠러우쉽”의 설립자도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해본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다. 그들은 지금 우리만 외롭게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며 그 고통 또한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의 마지막 말은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 마지막 단어인 하나님 속에는 이 땅에서의 삶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삶도 들어 있다. 요한계시록은 고난 받고 죽임 당한 모든 이들을 예수님께서 친히 끌어안고 회복 시키시는 미래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고 상처를 싸매어 주신다. 그런 다음 지극한 기쁨과 눈부신 광채와 평화가 있는 그분의 영원한 나라로 맞아들이신다.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바로 천국임을 새삼 고백한다. 천국은 우리의 참된 본향이다.

제 15장 : 미래는 나에게 달렸다

지난날 어둠을 마주하고, 상실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죽음 한 가운데서 삶을 확인하기 위해 그 자신을 그토록 많이 쏟아 부어야 했던 때 느꼈던 자각과 원기를 지금은 많이 잃어버리고 있다. 그 때의 사고가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그때만큼 상한 심정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그토록 온전해지는 경험을 다시 해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가 얼마나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인지 그때만큼 절절하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전까지는 서로 상극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슬픔과 기쁨, 고통과 즐거움, 죽음과 삶이 거대한 하나의 총합체를 이루는 일부분이 되었으며 그의 영혼은 한층 성장했다. 살아있는 동안, 그는 가능한 한 기쁘게, 평화스럽게, 그리고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싶다. 그의 유업은 그가 살아가야 할 길을 알려줄 것이고, 그는 그것을 지켜나가는 걸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재앙처럼 끔찍한 상실을 당한 모든 이들이 느끼는 최고의 도전은 한편으로는 상실의 어둠을 마주하면서, 새로워진 생명력과 감사를 안고 살아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상실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다. 그분이야 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고,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유일한 분이다.

평가

저자는 본인이 직접 겪은 상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설파한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기억 뒤에 자학하고 중독되며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는 삶을 살 수도 있고 깊은 성찰을 통해 하나님께 귀의하는 삶이 있으며 이에 대한 선택은 자신과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숙독하면서 많은 공감을 느꼈으며 나에게 다가 왔던, 어쩌면 앞으로 숙명적으로 다가 올지도 모를 예정되어 있는 혹은 임의의 상실에 대해서 종교적 평안을 느낄수 있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서평자의 입장에서는 한편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객관성이 확보 되었는지의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1) 단점

저자는 상실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치료받는 과정을 차분하게 서술 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책의 줄거리에 공감하면서 그 논리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신도들의 경우라면 상실과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이 왜 결국 하나님으로 귀결되는지에 대해서 상당한 비약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기독교인이라 가져다 붙였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신도들의 관점에서도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 것이다. 자신이 당한 사고와 느꼈던 좌절, 상실감, 이러한 내용이 계속 반복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구성상 사고, 좌절, 상실감, 회복, 희망, 구원, 예수님의 고난, 하나님에 대한 신뢰 등 일련의 과정이 좀 더 체계적으로 구성이 되었더라면 훨씬 설득력 있는 스토리 전개가 되었을 것이다. 좌절과 상실 뒤 회복이 된 것처럼 서술되었는데 뒷 장 으로 넘어가면서 다시 좌절로부터 회복으로 되돌아 오는 등 중언부언이 되고 있다. 이것은 15개 장으로 이루어진 책의 구성을 큰 틀에서 1,2,3부와 같이 묶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복되는 부분도 있으며 꼭 다루어야 할 것이 빠진 경우도 있다. 전체적인 편집에서 상실과 좌절 대한 내용을 한 곳에 정리하고 다른 곳에는 이 것에 근거하여 절망에 빠지는 경우와 이를 딛고 희망을 발견하는 두 길을 제시 한 뒤 이러한 모든 고난은 우연이 아니며 하나님의 거대한 인류구속의 역사안에서 경륜적 섭리이고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는 큰 흐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2) 장점

이 책은 특이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독서를 하면서 우리는 마치 유체이탈을 한 상태에서 우리의 상실된 삶을 바라보는 느낌을 가지게 해준다. 우리의 삶이 객관적으로 우리와 괴리된 상태로 보여지는 것이다.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저자가 깊은 성찰을 통해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였더라면 이렇게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독백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처절한 좌절과 극복의 의지 속에서 어둠과 빛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만이 쏟을 수 있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 빛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한다. 저자의 말처럼 고통의 계곡은 곧 영혼을 빚는 계곡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불행이었을 개인적 사고로 인한 상실을 직면하여 고통스러운 성찰을 함으 로써 회복하고 한층 성숙하게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상실을 겪었던 독자라면 겪었던 대로, 아직 경험하지 못한 독자라면 필연적으로 훗날 겪게 될 일을 미리 겪는 간접경험으로 이 책은 독자들에게 유익을 주고 있다. 그리고 용기를 주고 있는데 그것은 본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한다. 히브리서 12장 8절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하고 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저자는 자신의 주변의 많은 상실의 예를 들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논리를 실증적으로 주장한다. 독자는 이러한 다양한 예로부터 상실이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상실이 닥쳤을 때 우리의 하나님 역시 고통을 몸소 겪으 셨고 그 고통을 잘 알고 계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조차도 주권적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 주권이 축복임을 알게 해주시는 것이다.

3. 적용

1) 자신에게 적용

저자는 8장에서 “고통은 그것이 아무 법칙 없이 임의로 찾아올 때 가장 격렬하다”고 하면서 위험한 등반을 하다가 추락한 경우를 예로 들면서 임의성이 가지는 공포를 설명하고 있다. 나는 과거에 겪었던 추락사고를 떠올렸다. 어느 주말 오전, 설악의 신선한 공기를 즐기면서 우리 팀은 작은 봉우리를 올랐다. 장비를 차고 오르는, “프리 등반”보다는 조금 쉬우면서, 자칫하면 큰 사고를 부르는 위험한 “인공등반”이라는 기법으로 절벽을 오르는 중이었다. 그때 돌 틈에 끼어 넣어 놓았던 지지대가 빠지면서 내 몸은 천길 계곡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목이 부러지면서 즉사할 수 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살 수 있는 확률은 아무리 따져 보아도 “제로(0)” 였다. 구사일생. 헬멧이 튀면서 목을 보호했고, 지면에 닿는 순간 오른 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손목은 부러진 대신 척추는 우그러지는 정도로 그쳤고, 돌이 널려 있는 계곡이었는데, 추락한 장소만큼은 알갱이 돌도 없는 상태였다. 긴긴 추락의 시간, 그 아뜩한 순간에 나는 아홉살 난 딸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다행히 6개월정도의 치료과정에서 완벽히 회복이 되지는 못했지만 척추가 으스 러진 상태에서 아문 정도로 해결이 되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대형사고, 이후 나는 이러한 임의의 상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생에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암벽등반은 위험하지만 가슴 벅찬 매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길이 내 길이 아니었음을 알리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더 큰 상실을 불러 오기 전에 나는 곧 그 길을 포기하였다.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다시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몇 차례의 사인(?)을 주셨다. 이렇듯이 우연으로 보이는 사고 및 상실 말고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상실을 마주친다. 급작스러운 죽음이든, 자연사이든 우리 모두는 죽음과 마주해야 한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아내가 먼저, 혹은 내가 먼저 죽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받아 들일 수 있다거나, 슬픔이나 불편이 덜 하다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젊었을 때 겪는 것과 똑같거나 그 이상으로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내 상실을 내려놓고 죽음이 최후 승자가 아님을, 우리의 구주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영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2) 가족에게 적용

아이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 성인보다도 훨씬 인간적이고 근본적인 고통들에 쉽게 노출된다. 욕망, 허무, 사랑 등에 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들이 납득 가능하도록 성경적인 설명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다른 세계관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느끼게 하여 그들이 평생을 살아 가면서 진정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어 올바른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믿는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비슷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기꺼이 자기의 목숨까지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부모는 때로 너무나 약한 존재이며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하여 자신들 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때로는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것이다. 자녀들에게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의 문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살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아내는 한 평생 남편을 의지하고 산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남녀관계 그 자체를 말한다고 한다.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모든 관계의 시발점이 되는 남녀관계가 그 만큼 인간에게 있어서 기본적이고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부부관계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금슬이 좋은 노부부가 한 편이 죽었을 때 따라 죽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게 보는 모습이다. 이러한 상실에 대한 지속적이며 숙명적인 위협과 그것을 성찰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문제는 핵가족으로서 자녀와 아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님, 형제, 친척과 친지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상실을 통해 하나님을 찾아 가는 과정임을 주변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바로 전도이다.

교회(사회))에게 적용

교회에서, 기도 모임에서, 성경공부의 강당에서 사람들은 상실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다. 사실 독실한 기독교인의 기도에 상실로 인한 고통의 치유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대교회는 이러한 상실 치유의 장으로서는 그렇게 활용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교회는 이렇게 비탄과 상심에 빠져 있는 교인들을 위한 체계적인 상담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상실을 경험하고 간절히 기도하여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어야 한다. 기독교는 교리상 공동체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개인의 경건과 집단적 예배라는 좁은 개념으로 정의되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읽어 보아도 혼자 독거하며 연구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얘기는 없다. 모든 교회는 중보기도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인의 상실을 치유해야 한다. 사실 사회에서도 이러한 상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구를 만들어서 도와 주는 기구들이 있다. 청소년 상담이나 자살 방지 상담 전화 운영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시스템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결국 종교적인 치유가 그 답이 될 것이다. 질곡의 심연에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선택의 과정 속에서 그분이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고 자신에게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맞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의지를 안고서 그분께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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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믿음의 최고가 되고 싶다」

(박민희 저)

요약

「나도 믿음의 최고가 되고 싶다」(부제: 영적 성숙을 위한 성찰)는 전체적으로 구성이 탄탄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논지가 분명하다. 목회자로서 삶에 녹아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수필형태로 잔잔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책을 파트별로 순차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 1부: 믿음은 확신이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명을 주실 때 자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이전부터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라는 종교적 함의가 담겨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며 우리를 포함한 모든 만물은 그가 지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뿌리가 되는 “성경”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반면에 창조론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 대부분 창조론과 대비되는 진화론을 신봉하지만 과학적으로 비교해보아도 진화론은 창조론보다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진화론의 핵심인 태초의 생명체가 탄생되는 것과 종간의 변이가 이루어지는 것을 화석으로도 이론으로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가설일 뿐인 것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그 근거로 삼기에는 그 책이 지닌 모순이 너무 많다. 사람은 관계적 존재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모든 관계의 토대요 출발점인 것이다. 이것이 관계적 삶과 관련하여 성서가 말하는 바다. 믿음은 하나의 증거인데 그것은 구체적이고 유형적이어서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이 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사랑, 행복 등이 그것이다. 믿음도 그와 같이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어떤 것이다. 영적 지식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믿음이라는 신앙 지식의 방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계를 지으셨다는 것을 안다. 성서는 그에 대한 증거이다.

익숙함은 계속해서 익숙해진 방향을 향해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익숙함은 신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익숙함을 향한 계속적인 여정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익숙해질수록 세상과는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세상과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익숙한 삶은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통해서 깊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삶의 연수가 더해질수록, 세상을 향해서는 익숙해지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향해서는 더욱 익숙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믿음의 줄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우리의 내명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정 존재하고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분이라면, 자신을 알리고 또 느끼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삶이 분명히 있다. 성서 속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증언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런 사실을 확증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느낀다. 느끼는 믿음이 커질수록 우리의 믿음은 깊어지게 된다.

건축은 신앙 생활에도 중요한 유비(analogy)를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건축이 집이나 건물을 짓는 일이라면 신앙생활은 믿음을 세우고 믿음의 집을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일종의 건축이며 믿음 안에서 우리의 매일의 삶은 믿음의 건축의 과정이다. 믿음의 관점에서 믿음의 건축환경은 신앙공동체이다. 믿음의 설계도는 성서,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위에 무리 자신을 건축하는 일보다 우리의 삶을 안전하고 의미 있고 보람있게 만드는 일은 없다. 믿음의 집을 짓는 일은 복되다.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는 믿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믿음 생각을 믿음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 그리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예배와 교제하는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들이며 하나님은 그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는 분이다. 발견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우리 인간은 발견의 객체이며 대상이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 되고 구원을 얻는 복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기 원한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 어떻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이 안에는 기독교 신앙의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온 마음을 다하여 신앙 고백적으로 드려야 한다. 그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로 기도하는 사람의 바른 태도이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우리의 기도가 당장 또는 살아가는 동안 응답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기도는 헛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최고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기도의 가치와 능력을 잘 알고 있다.

제 2부: 믿음은 행복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시는 계획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실천적 응답도 한 몫 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능력을 신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멍에를 메우셨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셨다면, 우리는 홀로 앉아서 잠잠히 기다릴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애굽을 나오기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두 가지의 책임이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것에 대한 예식을 지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신앙은 그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삶 속에 살아 있게 되었다. 기억은 충실한 신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또한 중요하다. 성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을 순례여행에 비유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중에서도 동행하고 계신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으면 예수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면서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 이보다 행복한 삶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훈련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훈련은 반복의 과정을 거친다.

지루하게 여겨질 만큼 한 것을 하고 또 한다. 그것이 몸에 밸 때까지 한다. 그래서 실전에 임할 때 자연스러워진다. 반복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하나의 자세를 형성한다. 그런 자세가 좋은 성과를 가져온다. 영적훈련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영적 훈련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열정은 희망이 있을 때 품을 수 있는 것이다. 희망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열정의 삶을 살 수 있다. 열정을 낳는 것은 바로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궁극적인 희망을 두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 희망은 가장 큰 절망이 된다. 그 희망너머에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에 궁극적인 희망을 두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 희망은 가장 확실하고 견고한 희망이 된다. 작은 일 하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성실히 행함으로써 우리 인생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 하나님은 매일 우리에게 하루의 삶을 선물로 주신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해 하나님께 충실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작은 일은 큰 가치를 지닌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작은 일 하나가 큰 일이 될 수 있다. 작은 실천 하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큰 실천이 될 수 있다.

제 3부: 믿음은 삶이다

코람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의 면전을 뜻하는 이 말은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성서가 말하는 피조물인 인간의 현실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늘에 계시며, 동시에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 존재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마주 대하여 서서 보고 계심을 의식하면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은 믿음의 최고가 되는 삶이며,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삶이다. 죄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그 생명의 수혜자인 우리와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다시 말하면,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떠나 죽음에 처하게 한다. 반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가 그 은혜에 바르게 응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 은혜에 맞게 바꿀 때 그 때부터 우리 안에서 바르게 작용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으로 눌린 사람들을 자유케 하셨다. 예수님은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자유와 해방의 사역이다. 성서에서 구원은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가? 하나님은 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다시 섬기고,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 살아 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인간의 자유는 본래 하나님 안에서 자유이며 하나님을 위한 자유이다. 그래서 그것은 책임적인 자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물으실 것이다.

제 4부 : 믿음은 희망이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시민권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그 나라의 왕으로 섬겨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다. 그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신앙생활에서 기본을 잘 닦고 또 기본에 충실해야 평생을 바르고 성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또한 실천을 필요로 한다. 믿음의 최고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기본을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 능숙하고 성숙한 신앙을 지향할 때, 비로소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삶에는 유혹이 있다. 우리에게 유혹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오는 유혹에 넘어가느냐, 그것을 물리치느냐 하는 것이다. 유혹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떠나도록 하기 위해 사탄이 사용하는 중요한 방법들 중 하나이다. 시험은 통과해야 하지만, 유혹은 물리쳐야 한다. 유혹을 통과하려고 그 유혹에 맞서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다. 요셉처럼, 유혹의 자리는 피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면,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계속될 수 있다.

무언가에 자신을 바치며 사는 삶은 고귀하고 아름답다. 복음에 자신을 바치며 사는 삶이라면 더욱 그렇다. 헌신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자기 몸을 드리는 것이다. 이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한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며 인정하신다. 복음에 헌신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들의 삶은 단연 믿음의 최고가 되는 삶이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기독교 신앙의 성서적, 신학적 바탕이다. 그것은 성서의 중심주제이며, 성서 이야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관통하는 핵심 적인 주제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지음 받았다. 인간이 자신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했을 때, 인간과 창조세계에 찾아온 것이 영적인 죽음과 고통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가까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회개와 믿음을 제시하셨다 회개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계심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평가

저자는 본인이 직접 삶에서 체험한 믿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것을 현실에 대입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설파한다. 우리는 아직 신학도의 입장에서 여러가지가 부족해서 그렇게 되기는 힘들지만 목회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고 역사는 경륜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인류 구속사의 일부라는 것이 다 보이고 그것을 글로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이 책을 숙독하면서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자신을 성찰해 나가며 자녀들에게 부모의 사랑보다도 훨씬 더 뛰어 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하는 한편 우리가 교회공동체와 함께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서평자의 입장에서는 본서가 기독교적 세계관에 치우쳐 논리의 오류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합리적 객관성이 확보 되었는지의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1) 단점

저자는 이 책에서 믿음 안에서 믿음은 확신이고 행복이며 삶 자체일 뿐만 아니라 희망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크리스천이라면 충분히 받아 들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줄거리이지만 비신자들이라면 별로 반갑지 않고 잘못된 종교적인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비신도들의 관점에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게 순차적으로 신앙의 강도를 높여나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권의 책으로 비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래전에 읽었던 미우라 아야꼬의 「신약성서 입문」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그 때 이후로도 15년 뒤에나 교회에 출석하여 세례를 받았으니까 당시는 전혀 기독교적 개념이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미션스쿨을 다니던 친구가 다른 일로 바쁘게 되어 학교에서 내준 독서보고 과제를 대신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한 적이 있다. 놀라웁게도 그 책을 읽으면서 어떤 한 대목에서 왜 크리스천들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고 비합리적인 것 같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되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인류를 위하여 값없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논리가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젠가는 교회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비로서 하게 되었으며 이후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아내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믿음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2) 장점

이 책은 구성적인 면에서 돋보인다. 내용의 짜임새도 탄탄하지만 4부 36장으로 정확한 나누기를 하고 있고 각 장이 길지 않고 부담이 없어서 적어도 크리스천이라면 편한 마음으로 기차여행을 하면서 읽어봄직한 책이다. 성경구절을 포함한 인용문이나 예시 등도 저자의 주장을 뚜렷하게 뒷받침해준다. 내용상 앞뒤 문맥이 연결성을 가지고 있어서 강의를 듣는 것보다도 저자의 의도가 훨씬 선명하게 전달이 된다. 전편을 통해 성경말씀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성경 읽기를 좋아하고 또한 신학도로서 공부로서 성경구절을 암송해야 하며 필요한 성경구절을 적소에 사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많은 도움이 된다. 이러한 신학 에세이는 영적인 측면에서 양식도 되지만 지적인 측면에서도 자산을 쌓아 나갈 수 있다. 신학교에 입학해서 3년간 공부를 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현실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성경구절이 떠오르는 일이 많아졌다. 정말감사한 일이다. 은퇴 후 다른 친구들이 모여서 화투나 당구로 소일하고 있을 때 우리는 감동하며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인 것이다.

이 책은 본 과목의 수강목표인 기독교적 성찰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신학적 성찰」의 기술을 번역한 권수영 교수는 “이 시대의 신학도들이 신학이라는 방대한 학문을 마스터하려는 무모한 생각보다 먼저 일상의 사소한 경험들을 신학적으로 사고하고 성찰하는 법부터 배워야 함은 우리 신학계의 절실한 과제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부터 오는 무궁한 지평과 내 자신이 현재 지금 자신이 선 자리에서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지평을 새로운 의미로 융합해내는 것이 바로 신학적 성찰”이라고 한다. 이런 개념을 이 책에 적용하면 전편을 통해 기독교적 성찰이 깔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의 삶의 모든 부분에 신학적 성찰을 통한 세계관의 구현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수필형식의 실제 체험담이므로 간증을 듣는 것 같이 곳곳에 감동이 있다. 아이가 사고로 입원하면서 부모로서 겪는 고통과 미지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극복해가면서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군생활의 식기 닦기를 마음 닦기와 비교하여 마음에 낀 때를 하나님 말씀으로 청결하게 닦아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군대를 다녀 온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라고 한다. 식기 세척으로 때를 벗은 식기처럼, 수건을 벗은 것같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바라 볼 그날을 기다려 본다.

3. 적용

1) 자신에게 적용

저자는 4장에서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믿음의 줄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내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이다”고 서술하고 있다. 삶에서 하나님이 임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뭔지는 모르지만 절대 존재가 있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 왔었다. 아마 유치한 단계의 종교적인 신앙이었을 텐데 지금 돌이켜 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절대자에 대한 숭배나 의식 등이 있다는 것이 신학적으로 증명이 된다. 참으로 그렇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절대자를 숭배하는 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람의 일생은 운명론에서 얘기하는 결정론이 아니고 자기의 운명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한다. 운명과 팔자가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인생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여 그 집은 이미 지어져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속박한다. 그 정해진 팔자를 고치려면 복채를 내라고 하고 굿을 해야 한다면서 금전을 요구, 사람들을 운명에 예속된 종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 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하나님께서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에베소서 1:4–5) 하신 것이다. 악령이 아닌 하나님께 우리를 의탁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자의반 타의반으로 캐나다에 오기 전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하는 것 같은 현상이 계속 있어 왔다. 그것은 설명하기가 좀 애매한데 생활하는 과정에서 같은 배열의 숫자가 늘 주위에 맴돌고 있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깨닫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쯤 전부터이다. 예를 들어서 자가 운전을 하는 중에 차량 번호판이 같은 배열로 구성되는 차량들과 수시로 마주친다든지 확률상으로 의도적이 아니고는 발생할 수 없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경험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물어본 적이 없어서 기회가 되면 이러한 경험을 공론화해 볼 생각이다. 나는 이때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고 생각도 해본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 1)라고 하는데 이러한 우연적인 번호의 배열은 과연 내가 모르는 어떤 실상을 암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2) 가족에게 적용

아직 아이가 어려서 아이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습관을 들여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한다. 특별히 예민한 시기의 아이라서 더욱 신경이 쓰인다.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은 물론 가족 전체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믿음을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믿음 생활을 굳건 하게 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도출해 보았다. 우선 삶의 모든 과정에서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여부를 묻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이 한 생은 흘러갈 것이고 우리는 본향에 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오랜 시간을 직장생활이나 개인사업을 하면서 금전을 추구해왔지만 그 추구한 금전도 풍족하지 않고 또한 사람의 일생에서 진정 으로 소중한 가치, 믿음, 사랑, 희생, 헌신 등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해결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지금과 같이 역병이 창궐하는 세상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다행히 신학교에 들어와서 성경을 펼치지 않는 날이 한 번도 없는 듯하다. 과제나 언어적인 차원이기도 하지만 항상 성경을 펼치고 부분적이라도 읽어야 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인생의 모든 해답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현재의 상황이 요한계시록의 7년환란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게 옳든 옳지 않든 우리는 성경에서 해답과 위안을 찾을 수 있다. 불안해 할 바에는 성경을 더 연구할 것이다. 세 번째로는 기도생활을 습관화해야 한다. 사실 혼자 기도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조금하다 보면 더 기도할 거리가 없어지는 건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라고 한다.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을 위해서라도 기도를 길고 간절하게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기도거리가 없을 때 성경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려움에 봉착할 때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그대로 순종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서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서원을 하고 순종하였을 때 그로부터 얻어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상급은 또한 엄청날 것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면서 가족들에게도 하나님을 믿는 굳은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교회(사회))에게 적용

27장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서술 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는 본래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이며 하나님을 위한 자유라는 것이다.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그에 따른 책임이 따라야 한다. 자유에 책임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그 자유는 방종으로 흐르게 되기 때문에 자유를 누리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 작금의 북한 및 매국노들의 죄악상을 바라보면서 자유사회에서 태어나 숨쉬고 살 수 있는 것에 대한 벅찬 기쁨을 가눌 수 없다.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우한폐렴은 매국노들이 세계 교란을 위해서 조작해낸 사건으로 보인다. 그 징후를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한 연구소에서 실수로 유출된 것도 아닌 것이다. 또한 거대한 우상숭배 덩어리인 북한의 지하교인들에 대한 탄압, 공산주의의 종교탄압 및 파룬궁 신자, 위구르족을 잡아놓고 저지르는 장기적출 등의 반인륜범죄 등 참혹한 실상에 대해 세계는 언제까지 침묵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런 침묵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인가.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정산을 하실 것이다. 우리의 자유는 억압 속에서 자유를 잃고 종 노릇 하는 사람들의 구속을 풀어주는 데도 사용되어야 할 것이며, 정치적으로 나라를 공산당에게 넘기려 하는 자들을 견제하고 색출해내는 데도 사용되어야 한다. 학창시절을 제외하고는 나는 의도적으로 정치를 멀리하여 왔다. 좌우 어느 쪽에서 정권을 잡던지 부패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조국의 현실은 우리가 알면서도 매국노들에게 나라가 넘어갈 것 같은 위기의식이 들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도 크리스천도 함구해서는 안될 이유가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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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저자는 사제이자 심리학자로서 활발한 사목활동을 하는 전문 상담가이다. 그는 전작 “상처 입은 감정의 치유”로 인간 감정을 둘러싼 오해와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은 데 이어 “상처 입은 관계의 치유”를 통해 특별히 한 개인의 친밀하고 개인적 관계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관계를 오늘의 세상 속에서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전달한다. 이 책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내용을 보면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7장까지는 “상처와 치유”에 내재한 구성요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8~13장에서 남녀의 결합과 가족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에 이러한 요소들을 적용하여 실질적인 치유에 대해 논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10장에 구성요소중 하나인 불안과 두려움을 넣음으로써 중요한 인간관계의 원인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얼마나 큰 작용을 하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마지막 장인 14장에서 이렇게 일생을 통해 일어나는 관계의 상실과 회복이 감사라는 해독제를 통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자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책은 특별히 가장 친밀하면서도 기본적인 관계를 남녀가 결합하여 구성하는 가족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남녀간의 상호 보완성이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남녀의 성별과 상호 보완성이 창조 질서 내에서, 신적이고 창조되지 않은 존재인 하나님께 해당하는 무언가를 반영하고 있음을 함축하는 듯하다.[1] 따라서 이 책이 대부분 결혼과 가족관계를 둘러싼 상처와 치유를 논하고 있는 것은 “인간관계”의 핵심을 통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교재 요약

1부: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인간 감정의 해부

< 소통, 듣기, 갈등, 친밀감 >

상처 입은 관계를 회복하려면 먼저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닌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은총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에게 당신을 드러냄으로써 당신과 관계를 맺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도 대부분 관계 맺기와 소통에 관한 것이었다. 긴밀한 관계에서 소통하려면 진지한 개방성과 정직성이 필요하며, 솔직하고 분명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꾸밈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것만이 내가 상대를 알고, 상대가 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독심술사가 아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분명히 말로 표현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관계가 가깝고 깊을수록 소통은 숨김없고 직접적이고 분명해야 한다. 서로를 깊이 나눈 사람들은 침묵속에서도 얼마든지 편안한 기분으로 함께 할 수 있다. 정서적 유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는 공고하며 거리가 없다. 서로를 신뢰 한다. 이들의 침묵은 수준 높은 침묵이다. 반면에 서로를 깊이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의 침묵은 공허할 따름이다. 바로 밑에는 두려움과 소외감이 짙게 깔려 있는 침묵이다.

소통이 상호 간에 자신을 드러내는 기술이라면 듣기는 상대방이 자신을 드러낼 때 우리가 그에게 가슴을 여는 기술을 말한다. 소통에는 기술과 정직과 훈련이 필요하다면 듣기에는 주의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또 듣기에는 놀라운 치유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타인의 고통과 욕구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면서 그의 고통을 함께 할 때 그러하다. 잘 듣는다는 것이 단순히 말만 잘 들어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침묵과 눈물과 고통 어린 신음, 감정의 분출도 기꺼이 받아 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복음서에 나오는 치유의 기적이 그 사람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무조건 감정을 실컷 표출하게 해 주면 치유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가까워진 듯한 소중한 느낌이 생겨날 것이다. 잘 들어 주는 일이 치유로 이어지는 이유는, 듣는 행위 자체가 말하는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사람은 대개 자기 자신에 나쁜 감정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들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은 연민을 가지고 부드럽고 따뜻하게 상처를 싸매 주는 일이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면서 그들은 내면에서 스스로를 갉아 먹고 있는 아픔의 근원이 무엇인지 보게되고 이 때부터 비로서 진정한 의미의 치유가 시작된다.

갈등은 삶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소통의 기술에는 적절히 갈등을 빚을 줄 아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건전한 관계를 이루는 데 대단히 핵심적인 요소다. 그동안 악덕으로 여겨온 분노가 사실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감정이다. 따라서 적절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긍정적 갈등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자각이다. 갈등은 사람이 모여 살 때 그리고 모든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갈등은 자기 성찰에서부터 해결해야 한다. 자기가 자라난 가정에 대한 통찰과 이해가 필요하다. 자신의 근본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친밀감은 누구와 가까이 연결되고 싶은 우리 모두의 내밀스러운 갈망이다. 궁극적으로 그 “누구”는 하나님이다. 이 같은 갈망은 우리 존재의 바탕에 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감을 유지하는 뿌리가 된다. 많은 이가 이 갈망을 식별하지 못할뿐더러 심각한 정서적 장애 때문에 갈망을 왜곡하거나 혼동하게 된다.

성공과 실패로 점철된 여정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친밀감을 향해 길을 나서야 한다. 그 길은 인간적이고 영적인 구도의 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타인과도 정서적 유대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과의 정서적 유대와 친밀감도 체험 하게 될 것이다. 사람간의 친밀감은 하나님과의 친밀감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와 조화로움을 만끽하고 싶다면, 하루 한 순간만이라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와 만나면 통찰력이 생겨난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게 된다. 자신에게 통찰력을 갖게 될 때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런 통찰력을 통해 우리의 신앙적 유산에 접근할 수 있다.

< 가장 중요한 관계, 용서와 화해, 상실 >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하면서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똑 같이 중요하다고 한다. 건강한 자기애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과는 다르다. 자기애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돌아보아야 하며, 온전한 자신을 찾는 헌신이 요구된다. 진정한 자기애는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균형 잡는 능력에 달려있다. 그러려면 부단한 주의가 필요하고 타인과 자신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존중하면서 타인의 개성도 존중하고 배려한다. 자기에 대한 흔들림 없는 사랑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고, 타인에게 신의를 지키는 데도 필요하다. 우리의 모든 관계, 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주는 정상적인 스트레스와 긴장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긴장을 이겨내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지켜 나갈 때 타인과의 관계도 더욱 좋아지고 건강해진다. 실패와 두려움을 적절히 다룬다면 자신감을 기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로부터 교훈을 얻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

용서에는 실천과 노력이 필요하다. 용서는 일종의 과정이며, 이 과정이라는 말은 앞으로 용서를 설명하면서 자주 다루게 될 심리학적 표현이다. 용서중에 가장 어려운 측면은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가 남들과 화해하는 데 그토록 시간이 걸리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기 용서는 건강한 자기애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자책이 무용한 짓인 데 반해, 스스로를 정직하게 비판하는 것은 건강한 행위이다. 기억을 묻어 보려고 부정하고 회피하기보다는 맞닥뜨려 처리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겠다고 결심하면서 이러한 고통스러운 감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죄의 실패에 대해서는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더라도, 이성적으로는 자기 죄를 이미 용서한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다.

용서가 놓아 버리는 과정이라면, 화해는 부서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치유의 과정이다. 화해가 이루어지려면 용서를 구체적인 말로 표현해야 한다. 예수께서도 내가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먼저 용서와 화해를 시도하도록 격려하시는 가르침을 남기셨다. 인생은 상실로 가득 차 있다. 상실에 맞닥뜨렸을 때 즉각 인정하고 대면하여 거기에 딸린 정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며 온전하게 자기 삶을 꾸려가고 있는 사람이다.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상실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사랑과 환상, 의존성, 불가능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상실에 따른 슬픔은, 상실의 경중에 따라 크고 작은 고통으로 슬퍼할 수 있는 시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감정의 단계이다. 우울증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상실감으로 인한 슬픔이 제때 해소되지 못하고 깔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실 앞에서 모순된 감정을 느끼는 것은 흔한 현상이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상실을 다루는데 곡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회피하거나 묻지 말고 대면해야 한다.

안도와 슬픔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감정이다. 이 때 안도하는 마음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애완견의 고통을 지켜보아 온 가족들의 고통을 덜게 되었고 개에게도 차라리 잘 된 일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무감하거나 무신경할 때가 많다. 슬플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마주하기가 꺼려지는 것은 그를 보는 것 자체가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유산이나 낙태 후에 스퍼할 시간이 필요하다. 낙태는 시술 후 곧바로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는 단순한 의료 행위가 아니다. 여자 스스로 선택한 일이지만 많은 경우 남자의 동의가 있었거나 남자의 압력으로 내려진 선택이기도 하다. 이 경우 두사람의 영혼을 꿰뚫는 신체적, 정서적, 영적 고통은 대단히 깊이 남게 된다. 낙태 직후에는 안도감이 들 수도 있으나 결국 에는 상실에 직면해야 한다.

2부: 가정을 둘러싼 상실과 치유

< 이혼, 사별과 애도, 불안과 두려움 >

정서적으로 친밀하던 관계가 회복하기 힘들 만큼 무너질 때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고통과 슬픔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정서적, 영적으로 치유되기를 참으로 원한다면, 얼마나 긴밀하고 오래된 관계, 단절된 모든 관계에는 충분히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다. 실패를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정서적, 영적성숙의 차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관계 단절이 결국에는 더욱 원만하고 건전한 관계를 도모하고 발전시키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다. 관계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고통스러운 사건이 이혼이다. 이혼은 금전적 으로나 정서적으로 재앙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섣불리 결정할 일이 아니다. 문제 있는 결혼생활은 으레 양측 모두에 책임이 있다. 일단 이혼을 했으면 결혼이 끝난 것을 충분히 슬퍼하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삶을 꾸려 가야 한다. 이혼은 삶을 극단적으로 바꾸는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이혼을 실행한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찾아내어 통찰함으로써 삶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이혼으로 무수한 사람과 사회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자녀의 삶은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이미 일어났거나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 아이들이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불안을 덜어주는 것이 필수이다. 누가 죽더라도 우리가 그와 맺었던 관계는 끝나는 것이 아니고 변화하는 것이다. 사랑하던 사람을 슬픔 속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도의 과정없이는 죽은 사람과의 관계가 완성되거나 치유될 수 없다. 애도는 삶의 일부이며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이다. 애도에 지름길은 없는 것이다.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 특히 제 또래의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도 우리 역시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죽어 가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면 우리 자신의 유한성, 우리도 머지않아 죽을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애도에는 지름길이 없다. 애도의 여정을 직시하고 똑바로 걸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자마자 되도록이면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슬플에 잠긴 상태에서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변 모두에게 최선의 결정이 무엇인지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야 하며 구성원들간에 오랫동안 논의해야 한다. 두려움이 장차 일어날 문제에 대한 고통스러운 경각심이라면, 불안은 곧 닥쳐올 사건에 대한 불길함에 사로잡혀 안절부절 못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의 아군이 될 수도 있으며, 장차 닥쳐올 위험을 경고해 주기도 한다. 물리적, 정서적, 재정적으로 해를 입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게 해준다.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이해하고 밑바닥까지 내려가 직면하면서 문제의 뇌관을 제거해야, 더 이상 파괴적 불안에 시달리지 않고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안감은 부정적 사고로 인해 나타나기도 한다. 부정적 사고는 불안감을 증대시키고, 불안감은 다시 부정적 사고를 강화한다. 부정적 사고를 변화시킴으로써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불안과 두려움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 자각하고 ② 수용하여야 하며 ③ 직면 해야 한다 ④ 또한 꼼꼼히 들여다 보고 ⑤ 현재에 충실하여야 하며 ⑥ 불안을 내려놓고 떠나 보낼 수 있어야 한다. 불안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루고자 노력하다 보면 우리 안에서 불안은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 재혼, 행복한 결혼생활, 가족 >

재혼을 할 때는 첫 결혼에서 왜,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통찰해야 한다. 자신의 실수를 직시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혼의 목적은 재혼이 아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평화와 만족과 행복을 찾으려는 것이다. 행복은 타인에게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찾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혼을 해도 2/3는 다시 실패를 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재혼을 할 때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우선된다. 독신으로 살기를 선택한다면 우선 독신생활이 결코 오점이나 결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독신은 하나의 삶의 방식이며 그 자체로 소명이다. 독신생활에서 얻어지는 자유를 통해 공부를 더 하거나 일에 몰두하거나, 사회봉사나 종교생활을 통해 남들을 도우면서 자기 삶을 확장할 수 있다. 이혼 후에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것은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이어야 한다. 이것은 정신적, 영적치유 이후에 가능한 것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 부부 각자가 제 몫의 책임을 다 할 것 ② 명확한 소통의 기술을 터득할 것 ③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은 유지된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견지할 것 ④ 용서하는 것 ⑤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는 의지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뢰는 결혼생활의 토대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두 사람이 함께 할 것임을 믿어야 한다. 완벽한 사람도 없고 완벽한 결혼도 없다. 이 다섯가지 조건은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가족은 사회 구성의 기본 단위이다. 사회의 저력과 내구력은 가족의 응집력에서 나온다. 원만한 가족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족 누구에게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갈등도 어느 가정에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원동력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꾸밈없고 정직하고 직설적이고 분명하게 소통할 때 갈등은 당연히 발생한다. 자신감도 가정 내 안전감의 토대이다. 사회적 가치관이 부모의 가치관에 반할 때, 부모는 자신감을 잃을 수도 있지만 그럴 때일수록 부부간 결속은 아이들에게도 좋은 모범이 되어 준다. 부모도 나름대로 실수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 확신이 있는 성숙한 부모는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부모를 신뢰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자녀가 부모에게 화를 내거나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자신감 있는 부모는 자신감 있는 아이를 길러낸다. 반대로 불안해 하는 부모 밑에서는 아이 역시 불안해하고 자신감을 읽을 수 밖에 없다. 아이가 건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부모의 분명한 지도가 필요하다.

3부: 감사

감사는 성숙한 인간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성이다. 감사에는 악과 불의가 존재하는 세상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감사는 우리가 갖가지 고난과 비극을 겪을 때 느끼곤 하는 절망감과 무력감에 대한 해독제로서,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러한 감사를 실천하여 자신의 말과 모범으로 주변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수한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더욱 깊이 자각할 수 있게 된다. 감사하는 태도는 가정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쳐야 한다.

비평: 본 교재의 독특성 및 장단점

저자는 종교 상담가로서 이 책에서 일차 집단으로서 가족관계를 둘러싼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생 전반에 걸친 조언을 담담한 필체로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본인이 직접 겪은 상담가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이것을 집필하였을 것이다. 사람이 일생을 통해서 체험하는 인간관계에서의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회복할 것이냐에 대한 충고적 서술이다. 이에 대한 극복은 결과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 자신과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숙독하면서 많은 공감을 느꼈으며 나에게 다가왔던, 어쩌면 앞으로 숙명적으로 다가 올지도 모를 예정되어 있거나 임의로 닥쳐올 상실에 대해서 종교적 평안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서평자의 입장에서는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객관성이 확보되었는지의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전체적인 책의 구성은 남녀간의 결혼으로 구성되는 가정으로부터 구성원간의 상처를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에 대해서 심리학적 틀을 사용한다. 즉,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구성요소로서 소통, 듣기, 갈등, 친밀감, 자신에 대한 사랑, 용서와 화해, 불안과 두려움, 상실 등을 설명 하고 있다. 그러나 상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요소들은 일생 동안 이루어지는 상실(상처)을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것이냐에 대한 고찰이라고 볼 수 있다.

장점

이 책은 인생 전반에 대한 충고를 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 동안 살아온 자신의 생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또한 번역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번역이 눈을 끈다. 역자의 이력으로 보면 오랫동안 영문 번역이나 저술을 해 온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저자의 견해가 가감없이 표현되었으리라는 믿음이 문체에서 묻어 나온다. 저자는 인간의 정신적 측면에 해당되는 부분들, 예를 들어 갈등, 친밀감, 용서와 화해, 두려움과 불안 등을 객관화, 구체화시켜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내놓는다. 이것은 아마 심리학의 테크닉일 것이고 오랫동안 상담 현장에서 사역을 한 저자의 노하우가 집대성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심리학이나 기독교 상담학 등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책을 읽어 가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다른 사람에 대한 상담 기술도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상실로 인한 치유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접근을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으로의 귀의, 즉 종교적으로 귀결한다. 사실 상처 입은 모든 이들을 끌어 안고 눈물을 닦아 주실 이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안 계시므로 이 책을 읽어 나감으로써 하나님께서 값 없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 위안을 갖게 된다.

단점

저자는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 주로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용어(“하느님” 등)를 사용하고 성경 구절도 “루카 12.51” 등으로 표시하여 산만한 느낌을 준다. 개신교 신자들이 읽어 나가기에 익숙치 않은 점이 있다. 또한 성경적 통계를 인용하는 구절(성경내에서 “두려워 말라”고 언급한 횟수 등)에서도 개신교 성경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해질 수 있다. 예화가 너무 부족하다. 저자는 전문 상담가로서 내용상 실제 사례가 다 녹아 있다고 추정되긴 하지만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화를 이끌어 가면서 예화가 없으므로 현실감이 좀 떨어 진다. 직간접적인 예화를 삽입하였더라면 훨씬 생동감 있는 저술이 되었을 것이다.

리뷰 :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관계는 창조질서의 기본이다. 본서는 남녀간 구성하는 가정을 관계의 기본으로 놓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심리학적인, 종교적인 세부 분석을 한다. 이와 관련 창세기 2장은 남성과 여성의 상호보완성을 관계라는 맥락에서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8)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맨 처음부터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다. 사람들 간의 수평적인 사랑의 관계는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인류 구원계획의 일부다. 그것은 결혼으로부터 시작되지만 확대되어 다른 모든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다. 그리고 타락이 인간 삶의 관계적 차원을 황폐화시킨 이후에는 건강한 사회적 관계가 죄로 인해 깨어진 곳에서 그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러신 것처럼 지금 여기에서 건강한 인간 관계(개인 간의, 가족, 직장, 교회 전체에서, 그리고 국가들 간의)를 회복하는 일에도 열정을 보여야 하지만[2],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일 것이다.

관계 회복에 장애가 되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이다. 저자가 밝힌 것과 같이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이 365회 나온다고 한다(물론 가톨릭 성경을 얘기하는 것이겠지만)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사랑이 충만하여 자비롭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종교적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다. 사람간의 관계가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이 그 원인일 수 있다. 불안과 두려움은 아마도 우리의 원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상대가 친근 하게 다가가도 사람은 그 죄성으로 인해 또 상처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주춤하고 멀리한다는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갖지 않고 사람을 대하게 되면 상처를 입을 확률은 줄어들며 설령 상처를 입게 되더라도 긍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열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원활한 소통을 해야 하며, 상대방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하고, 갈등의 원인분석과 그에 대한 현명한 해결, 친밀감의 유지, 자신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이타심 배양, 실천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과정으로서의 용서와 화해와 더불어 임의적 혹은 예정된 상실에 대한 극복 등이 있다. 결론적으로 상실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다. 그 분이야 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고, 그렇게 하기를 간절하게 원하시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에 창궐하는 전염병 사태,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을 통해서도 우리는 상실을 겪을 수 있다. 이렇듯이 우연으로 보이는 사고 및 상실 말고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상실을 마주친다. 급작스러운 죽음이든, 자연사이든 우리 모두는 죽음과 마주해야 한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아내가 먼저, 혹은 내가 먼저 죽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받아 들일 수 있다거나, 슬픔이나 불편이 덜 하다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젊었을 때 겪는 것과 똑같거나 그 이상 으로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내 상실을 내려 놓고 죽음이 최후 승자가 아님을, 우리의 구주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 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영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임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감사는 선한 동기를 더욱 강화하는 능력이 있고 잘못되고 악한 동기를 약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상처에 대한 치유가 쉽지 않은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에 있다. 감사는 상대방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더 큰 유익을 준다. 교육적으로 보면 감사하는 태도는 가정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일생을 통해 영혼을 치료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할 것이다. 감사를 통해 우리는 상실을 이겨낼 수 있다. 상처 입은 관계는 감사와 사랑이라는 해독제를 통해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인간적이고 근본적인 고통들에 쉽게 노출된다. 욕망, 허무, 사랑 등에 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들이 납득 가능하도록 성경적인 설명을 해줄 있어야 한다. 반면 다른 세계관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느끼게 하여 그들이 평생을 살아 가면서 진정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어 올바른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믿는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의 문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교회에서, 기도 모임에서, 성경공부의 강당에서 사람들은 상실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다. 사실 독실한 기독교인의 기도에 상실로 인한 고통의 치유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대교회는 이러한 상실 치유의 장으로서는 그렇게 활용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교회는 이렇게 비탄과 상심에 빠져 있는 교인들을 위한 체계적인 상담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상실을 경험 하고 간절히 기도하여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어야 한다. 사실 사회에서도 이러한 상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구를 만들어서 도와 주는 기구들이 있다. 청소년 상담이나 자살 방지 상담 전화 운영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시스템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결국 종교적인 치유가 그 답이 될 것이다. 질곡의 심연에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선택의 과정 속에서 그분이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고 자신에게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맞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안고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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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vin J. Vanhoozer, Owen Strachan/ 박세혁 역

제의 제기

그리스도인으로서, 신학도로서 신학은 실천을 전제로 하는 학문이다.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목회자의 사역에서 신학은 그 자체로서 신학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목회사역과 자신의 삶에서 목회자는 이미 공인이므로 그는 올바른 신학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을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삶에 찌든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게 하실 뿐 아니라 아침마다 나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 듣게 하신다고 하였다. 목회자의 사명은 이 세상을 신학으로 재해석해서 학자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신학으로 단련되지 않은 목회는 개인과 사회의 분리, 신앙과 실천의 분리, 삶과 죽음의 괴리만을 남길 뿐이다. 많은 목회자들은 신학교를 졸업하는 즉시 신학서적을 손에서 놓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교재 요약

1부 : 성서신학과 역사신학

< 예언자, 제사장, 왕 – 목회직에 관한 간략한 성서신학 >

목회현장에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침투해 계신 하나님과 현실의 왕들의 권세간에 벌어지는 일정 구역에서의 영적 전쟁이다. 예를 들어, 제사장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종결되고 성취되었다. 그러나 옛 언약에서 제사장과 예언자, 왕이 담당했던 사역의 핵심요소는 새 언약에서 목회직으로 이전되었다. 즉, 목회자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약 담당자로서의 직무를 맡고 있다. 제사장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종결되고 성취되었다. 그러나 옛 언약에서 제사장과 예언자, 왕이 담당했던 사역의 핵심요소는 새 언약에서 목회직으로 이전되었다. 즉, 목회자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약 담당자로서의 직무를 맡고 있다. 성서적 견지에서 제사장의 성별됨은 어떤 의미에서도 도피가 아니다. 사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사역에 뛰어들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봐야 것이다. 따라서 제사장의 목회는 소망의 사역이다. 제사장은 물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정화의 약속을 통해 민족에게 은혜를 제공했다.

우리는 예언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매개하는 사람,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 후히 베푸시는, 심지어깜짝 놀라게 하는 은혜의 전령이 바로 예언자였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선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하는 변하는 시대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는 지상의 권력을 행사하는 지위를 가짐으로써가 아니라 백성의 고통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들을 섬긴다. 온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인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은 신약의 목회자와 비견된다. 제사장의 사역은 율법을 가르치고 수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목회 사역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그분이 선한 목자임을 배운다. 목회자는 방어 작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양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음으로써 양떼를 보호한다. 목회자는 교회를 위한 성별된 삶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옛 언약의 제사장과 비슷하다. 목회자라고 해서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것은 아니다. 목회를 한다고 해서 개인적 불완전함이나 약점이 제거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더 커진다. 목회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기 전에 먼저 그 은혜를 구해야만 한다. 목회자는 사람들과 분리되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 살며 움직이고 그들이 세속적 삶이 아니라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상담하고 심방하고 훈련시킨다. 은혜의 목회는 목회자를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

피 흘림의 제사는 이미 끝났다. 하지만 설교와 교육, 상담, 훈련, 심방 등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목회자는 자신보다 먼저 은혜를 전했던 제사장처럼 사람들에게 은혜의 양식, 즉 모든 생명을 위한 그리스도의 전부를 제시한다.

제사장으로서의 목회자가 은혜를 전하였듯이 왕으로서의 목회자는 지혜를 전해야 하며 예언자로서의 목회자는 진리를 전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모든 목회자들은 그들을 제거하려시도하는 죄와 사탄이라는 원수의 위협 속에서 맡은 일을 한다. 어떤 경우든 모든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섬기고 이 진리로부터 위대한 소망을 얻는 특권을 누린다.

< 학자와 성인 – 목회직의 간략한 역사 >

북아프리카의 목회자 히포의 아우구스트누스는 교회사의 첫 500면에서 가장 중요한 주교 중 한 사람이었다. 목회의 일차적 대상은 복음이 필요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한가롭게 신학적 몽상을 즐길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목회하기 위해 공부해야 했으며 그가 보기에 목회란 곧 교육이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비밀을 맡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직업이라기보다는 직분이다. 직분이라는 말은 목회직을 귀하게 여기고 그 직분을 거룩하고도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 직분은 사람이 택하는 게 아니다. 이 직분은 주께 부름 받고 교회에 의해 임명 받는 것이다. 목회자의 일은 정말로 심각한 일인 동시에 생명을 주는 일이다. 율법과 복음을 잘못 이해한다면, 우리는 ‘참된 신학’으로부터 멀어져 그리스도를 모호하게 만드는 셈이다. 그분의 의로운 사역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모든 능력을 구한다. 칼빈은 목회직을 정의하면서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섬김의 효과와 능력을 성서와 연결시킨다. 목회자로서 그는 성서를 전적으로 신뢰했으며 세상이 권세를 지닌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성서 앞에서 책임져야 한다고 믿었다. 칼빈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주된 수단은 설교였으며, 그는 강해설교를 통해 성서의 여러 책을 연속해서 설교했으며 간결하지만 깊은 연구에 기초해서 본문을 해석했다.

청교도들은 목회사역이 신학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교회의 삶 속에서 성서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라는 부르심이라고 생각했다. 이 청교도의 후예로서 미국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인 에드워즈는 강력한 목회를 이끌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는 힘은 그분 안에만 있는 ’다양한 탁월성’과의 놀라운 만남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에드 워즈는 청중에게 그리스도와 친구가 되고 ‘최고 수준’의 감정과 행복을 경험하라고 말했다. 목회사역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목회직이 맞고 있는 현대의 위기는 신학적 후퇴라고 묘사할 수 있다. 신학자들도 이런 거대한 문화적 변화로 인해 고통을 겪었지만 목회자들은 그보다 훨씬 큰 어려움을 겪었다. 신학은 이전처럼 보편적인 지식인의 학문이 아니라 전문적인 학문이 되었다. 고백적 전통을 제외하면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목회직은 신학적 직분으로서의 성격을 대체로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변화 앞에서 일부 목회자들은 역사적인 목회자 모형을 회복하여 현대인이 떼어낸 것을 고쳐보려고 하였다. 헤럴드 존 오켕가는 논리적 교리에 기초한 길고 지적 야심이 큰 설교를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삶과 사상의 영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신학 사역을 중심으로 삼는 목회직의 역사적 모형을 회복하기 원했다. 그는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성서를 깊이 연구하고 해석하는 일에 집중했다. 말씀이 사람들을 영적으로 먹인다고 믿었으며 신학적 목회직에 전념했다.

오늘날 복음적인 교회들이 쇠락의 위협에 직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속화 하는 사회와 때로는 목회자의 상속권을 고기 한 점과 기꺼이 바꾸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안에도 위대한 희망이 가까이 와 있다. 불을 지닌 새로운 세대의 목회자들이 신학과 실천적 목회를 결합시키고 있다. 목회자로서 우리가 하는 사역과 교회로서 우리가 하는 사역은 우리 모두가 신학자라는 전제와 그렇다면 우리가 좋은 신학자가 되기 위해 마땅히 노력해야 한다는 확신에 기초한다.

2부 : 조직신학과 실천신학

< 복음의 기분 – 목회자/신학자의 목적 >

목회자-신학자는 기분을 바꿔주는 약이 아니라 기분을 바꾸는 현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셨으며 그 안에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복된 소식을 제공함으로써 영혼을 치유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전달하고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사람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성서적, 신학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말씀을 전달한다. 직설법은 세계가 특정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는 화자의 믿음을 표현한다. 신학에서는 많은 어법이 필요하지만, 복음은 직설법이다. 네 번째 복음서의 대부분은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행하셨는지에 대한 증언을 직설법으로 기록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요 20:31)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의 있음을 마치 있는 것처럼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종말론적 직설법이다.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온전히 존재하지는 않는 바를 가리킨다. 제자들이 아직 그리스도의 형상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성령 덕분에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을 누리고 있다.

신학자는 그리스도라는 특수한 한 가지와 관련지어 일반적인 것들(새로워진 창조질서)에 관해 말하는 보편적 지식인이다. 신학자는 음식을 대접하듯이 다른 이들에게 말씀을 대접하여 그들이 더 쉽게 그것을 소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을 하기 위해 목회자-신학자는 성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세상,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적용되어야 할 세상도 읽어야 한다. 문화 독해력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왕국을 위한 효과적이고 문화적인 참여자가 되기 위해 그들의 일상적 문화에 관해 알고 있어야 하는 바를 가리킨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세우기 위해 그들에게 이해 사역을 하는 공공신학자이다. 소설 읽기는 우리가 우리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동일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많은 목회신학 책보다 인류에게 감명을 준 소설을 읽음으로써 목회자의 삶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 소설은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문화 전체를 이해하게 해 준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목회자-신학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마음이나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바울은 겸손을 그 특징으로 꼽는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라 날마다 옛 자아에 대해 죽는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집의 장인들 : 목회자/신학자의 활동 >

목회자는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때문에 공공신학자이다. 그의 특수한 소명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 든든히 세우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교회를 기르는 사람,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베드로의 쌍둥이 고백의 형식과 내용, 즉, 영생의 근원인 예수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 그리스도는 모든 목회자-신학자를 위한 본보기이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영혼, 즉 한 사람의 자아나 내적 삶을 돌보는 감독이시다. 선한 목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으로서 우리는 하나의 모범적인 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목회사역의 자료는 양과 염소의 피가 아니라 말과 사람들이다. 목회자-신학자는 넓은 의미에서 전도자다.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자들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제자들이 복음의 낯설고 새로운 세상 안에 살도록 하기 위해서 말을 사용한다. 말과 삶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를 전하는 일이다.

목회자-신학자가 제공해야 하는 바는 그저 좋은 기분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소식,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풍성한 위로다. 설교는 말씀 사역의 유일한 형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목회자-신학자의 가장 특징적인 활동이자 가장 중요한 활동중 하나다. 설교는 목회사역의 총체가 아니지만 그 축소판이다. 모든 목회자는 교리문답 교사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령이 메스로 수술하듯거짓 가르침을 제거하고 교리문답의 정맥주사로 그것을 건전한 교리로 대체하는 수술실 이다.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를 새롭게 깨달은 교회라는 몸은 교리가 지성안 에서만 헛도는 대신 혈류를 타고 흐르게 된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 이야기의 요약이자 그분이 성취하신 현실의 맛보기이다. 주의 만찬을 집례하는 것은 동작은 단순하지만 그 의미는 너무나도 정교한 공공신학의 행위다. 목회자-신학자는 매주 주의 만찬을 집례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신학적 보물을 캐내어야 한다. 그것은 복음의 요약이자 현실의 목회, 교회에 관한 진리의 재현이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십자가의 지혜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실천해 보이는 공동체이다. 교회의 실존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에 관한 두 주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데 첫째로 기쁨에 찬 인내에 근거한 논증이며 둘째로 사귐의 확장에 근거한 논증을 구현한다. 교회의 공동생활이 얼마나 건강한가는 그 교회가 복음을 얼마나 온전히 증언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 본질을 구현할 때 교회는 실현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조물이 된다.

소감 : 목회와 신학의 조화(신학자로서의 목회자)

목회자가 목회 사역을 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현실 권력과의 영적 전쟁이다. 예를 들어, 제사장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종결되고 성취되었다. 그러나 구약에서의 제사장과 예언자, 왕이 담당했던 사역은 새 언약하에서 목회자에게 부여된 임무이다. 즉, 신약 시대 목회자는 공공 신학자로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를 중재해준다. 목회자로서 신학도 로서 우리는 구약의 제사장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그들의 장점을 흡수하고 또한 단점을 찾아내어 현실에 적용하여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준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재해석 하여야 한다. 고대 제사장이 일반 백성과 구별되었던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별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었다고 봐야 한다. 구별은 현실에서 괴리된 도피가 아니라 영적으로 다른 갑옷을 입고 구원사역에 뛰어 들라는 소명이었다. 성서적 견지에서 제사장이 백성들과 성별됨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 받은 자들의 실천적 사역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예언한다는 것은 창세전부터 변치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기반으로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백성들에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일 뿐인 목회자는 먼저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지하여 사역하여야 한다. 목회자로서 끊임없이 회개하지만 다시 순환되는 죄의 고리에 대한 참담한 자각을 하여야 하며 고대의 제사장을 본받아 자기를 희생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용서에만 의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어떻게 목회사역을 감당하려는가? “ 하고 묻는다면 오직 “그리스도”라고 답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야 하는 것이므로 그 사역은 목회자의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 스도의 것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목회는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존하여야 하는 것이다. 원래 종말이라는 개념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한 점 숨김없이 드러나는 상태를 말한 다고 한다. 그 앞에서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개하고 다시 범죄하고 하는 과정 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아주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죄성을 긁어 낼 때 비로소 회개나 참회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소명으로서 목회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가장 강하신 때가 바로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음을 했을 때였다. 그것은 자신을 번제로 드림으로써 새 언약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한다. 지혜 롭게 자신을 다 내려놓고 약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죽기까지 낮아지고 사랑함으로써 강한 자가 되시었듯이 목회자는 이것을 본보기로서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이 영광과 아름다움임을 알게 될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많은 목이 곧은 목회자들은 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목회를 곧 교육으로 간주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신학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필수적으로 여겼다. 이것이 직분이라는 용어와 결합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교육하고 전달하는 신분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목회자는 지혜로운 신학자였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거룩한 구별로 나타나게 된 사람들이었다. 배우는 것이 누적이 되면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위대한 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이자 신학자가 성서의 올바른 해독을 위해서 기울여야 하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일곱집사를 새로 뽑아서 그들에게 교회 일을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데 전념한다. 오직 성서만이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증언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고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그가 이룩한 대속 죽음과 부활이라는 엄청난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성서를 알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해 우리는 성서를 공부해야 하고 이것을 목회현장과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신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을 성서적으로 대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성서가 신학의 핵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성서를 무시한 작금의 북미 교회 목회의 부정적 결과를 살펴보라. 신학자는 그리스도라는 일반적인 차원과는 다른 특수한 원리를 새로워진 창조질서라는 보편적인 가지에 접목시키는 공공의 지식인이다. 신학자는 초대교회 이래 사도들의 전승으로 이어 지는 성서적 진리를 다른 이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녹여주는 역할을 한다. 목회자-신학자는 당대문화를 해독할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소설을 통해 인간 해독력을 양성해야 한다. 역설적 으로 세속적인 현대소설은 그리스도와 분리된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다. 선교사가 그 나라의 언어 뿐만 아니라 문학을 깊이 있게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게 된다.

목회자는 다양한 이유로 많은 분량의 독서를 하여야 한다. 목회자의 인생 경험이 모든 신도들을 아우를 수 있는 풍부함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는 힘든다. 목회자는 십자가의 복음을 일반 신도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해독하기 위해서는 신문과 잡지를 읽어야 하고 시와 소설을 통해서 동시대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많은 경우 설교는 하나의 예화로부터 시작한다. 노련한 설교자는 훌륭한 예화를 많은 소스로부터 공급받는다.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살았던 그 귀중한 자료를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신학자로서의 목회자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위선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아를 죽임으로써 스스로 죄를 감당할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변해야 한다. 그가 대중 앞에서 설교를 할 때 그가 죄에 미약할지라도 성령께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역사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정치가는 정치로, 시인은 시로, 장수는 전쟁의 승패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는 설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성서 해독력을 통해서 정경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밝힘으로써 신학을 해독한다. 설교는 보혜사로서 항상 곁에 계시지만 우리의 실존 너머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설교를 통해 목회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복음을 새겨 넣는 것이다.

진선미는 이러한 설교를 설명해주는 데 적합한 개념이다. 복음의 진리는 참됨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성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타락하였고 그것을 다시 하나님의 구원역사라는 원대한 경륜적 구속사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성서가 단지 합리적인 것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성서의 가르침은 분명 선에 근거하고 있다. 대속의 피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피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자비와 긍휼은 분명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이에 더하여 새 언약에는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도 내포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희생은 삶을 더할 수 없이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 이 아름다움은 자신을 희생하여 한없이 낮아짐 으로써 엄청난 기쁨으로 넘치게 하는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는 성서 계시라는 거대 담론을 통해 일직선적 종말론적 구속사를 선포하는 자이다. 목회자는 성서를 통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거대담론과 구별된 개별본문을 해석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신학을 떠난 목회자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이유다. 역사적으로 봐도 위대한 목회자는 지혜로운 신학자였다. 현대사회의 전문직종으로서의 목사직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니다. 소명을 받은 거룩한 직분으로서의 목회자는 올바른 신학으로 무장하여 그리 스도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자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신학적 지식이 부족하거나 교회가 신학을 가르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어떻게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게 할 것이며 복음으로 뭉쳐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게 할 것인다.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은 교리적 진실을 필요로 한다. 피상적인 이세상은 깊이 있는 예배를 필요로 한다. 선하고 거룩한 생각을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이 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많은 노력은 헛수고가 될 뿐이다. 목회자는 이러한 모든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신학을 통해 성서적으로 묵상하고 해석한다. 신학적으로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힘은 신학을 포함한 주변 학문에 대한 독서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힘이 드러날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의 선진들이 가졌던 신학적인 지혜를 통해 우리의 통찰을 발전시키고 검증하길 원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예배, 기도, 예전 등 모든 것이 신학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이렇게 신학적인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주시는 사랑을 인식하고 그의 한량 없는 사랑을 찬양하기 위해서다.

비평 : 본 교재의 독특성 및 장단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목회자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공동체를 위한 보편적 지식인, 공공신학자의 소명을 되찾고자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목회직을 정의하기 위해 초대교회부터 현대사회까지의 교회사를 비교, 분석, 비판하고 여러가지 현실적인 준거틀을 대입함으로써 신학자로 서의 목회자를 정의하려고 노력하였다. 초월하신 하나님, 즉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분으로서 그 분 안에서 모든 이성, 모든 선, 모든 소망, 모든 실재, 모든 구분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목회자가 신학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탁월한 논리로 주장하고 있다. 앞서 요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오늘날 복음적인 교회들이 쇠락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규정하고 세속화하는 사회와 비열한 목회자의 야합이 난무하는 교회안에도 위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불을 지닌 새로운 세대의 목회자들이 신학과 실천적 목회를 결합시키고 있는데 있다고 전제하면서 목회자-신학자는 기분을 바꿔주는 약이 아니라 기분을 바꾸는 현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셨으며 그 안에서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복된 소식을 제공함으로써 영혼을 치유한다고 통찰한다. 또한 저자는 목회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전달하고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사람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성서적, 신학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말씀을 전달한다고 하면서 신학과 목회는 결합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객관성이 확보 되지 않아 주관적인 생각에 그치고 있는지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

1) 단점

저자는 이 책에서 아주 다양한 신학자들과 협력하여 한 권의 책을 완성함으로써 넓은 스펙트럼으로 자신의 주장을 검증하고 있다. 그 중에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다양한 저자들의 글로 인하여 일관성이 없고 이리 저리 주제를 찾아 헤매게 하는 단점이 있다. 어쨌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목회자는 신학자로서의 소양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므로 한 두사람의 집중적이고 전문적인 논리 전개가 더 나았을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완전히 다르게 저술한 것에 비해 완성도가 아무래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독자는 책의 제목만으로 보아 저자가 목회자란 무엇인가를 논하면서 목회윤리라든지 소명이라든지를 논할 것으로 생각되기 쉬울 것인데 사실은 목회자가 신학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결론에 조금은 당황스러워 한다. 제목을 통해 어떤 신학도는 이 책을 읽고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판단해 보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논리는 폭이 좁아졌고 어쩌면 목회자가 신학적인 소양이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일 뿐이다. 여기에는 구성 및 논리상의 반전이라든지 플롯의 짜임새라 든지 하는 재미가 결여되어 있다. 또한 목회현장에서 실제로 사역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저자의 주장처럼 독서와 공부를 강조하는데 있어서 이 주장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결국 목회자-신학자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여 신선하게 자신의 논리를 주장한 장점이 있지만 결국 공부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조금 진부한 측면이 없지 않다. 목회윤리를 포함한 보다 포괄적인 주제를 설정하였더라면 더 호소력 있게 설명되었을 것 같다.

2) 장점

이 책은 현대 교회의 목회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다. 신학은 실종 되었고 윤리는 바닥에 떨어졌으며 교회가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줘야 하는 이러한 현실을 과거의 위대한 목회자들이 지혜로운 신학자 였음을 밝힘으로써 문제 해결을 정확하게 진단하였으며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본서는 목회자가 어떻게 인문학적인 소양을 길러야 하며 신학적인 성찰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아주 구체적으로 방향을 제시해준다. 예를 들어서 목회자가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을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을 하고 있다. 저자의 이야기처럼 현대 소설은 그리스도와 분리된 삶이 얼마나 처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문학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이고 목회자들에게도 문화 전체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목회자로 하여금 많은 독서와 학습을 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해 준다. 많은 목회자나 신학도들은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단지 목회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다고 볼 수 없음을 갈파한다. 목회를 한다고 해서 개인적 불완전함이나 약점이 제거되기는 커녕 더 악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목회자들은 도망치지 말고 그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서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목회자는 그가 보살피는 양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며 사람들에게 성서의 계시를 알려 주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회자는 원죄로 인해 완전한 인간일 수 없으며 끊임없이 죄를 짓고 또 회개하고 한 없이 낮은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 임을 알려줌으로써 죄인이라 할지라도 소명에 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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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활동등 제휴 문의: usedslr@gmail.com, YouTube: 다언어성경연구소

「목회현장 교육」 (Robert L. Kinast)

(로버트 L. 키내스트 저/권명수 옮김)

서론

신학적인 성찰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신학적인 성찰의 ‘신비스러운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신학적인 성찰 이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적인 성찰은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이 책은 목회의 경험에 집중한다. 신학적인 성찰은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을 돕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아주 광의적으로 혹은 세부적으로 진술될 수 있다. 각 장은 신학적인 성찰 방법의 기본적인 단계를 기술한다. 각 장의 전반부는 실제 예와 논평으로 방법론적인 절차를 간략하게 제시한다. 각 장의 후반부는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실제 예들과 논평들을 자세하게 다룬다. 그리고 각 장 마지막에서는 실천적인 제안 목록을 제시하고 그 장의 요점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짧게 서술할 것이다. 신학적인 성찰은 작은 집단에서 가장 잘 적용된다. 어떤 경험들은 다른 경험들보다 더 유용하다. 사람들은 많은 전망을 가지고 경험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다. 신학적인 성찰은 한 사람의 삶의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시작하고, 그 사건들로부터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도록 도와준다. 신학적인 성찰이 단지 이따금씩 행해진다면, 온전한 성과를 가져올 수 없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실천해야만 하는 기술이다.

무엇이 신학적인 성찰을 신학적이도록 만드는가?

신학적 성찰은 하나님에 관한 논리(theo-logical)이다. 이것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하나님이다. 이것은 사람이 바로 자신의 경험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학적 성찰은 기도나 영성 지도와 유사하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좀 더 직접적으로 만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데 관심을 갖는다.

신학적인 성찰을 어떻게 하는가?

신학적인 성찰을 행하기 위한 많은 방법과 모델들이 있다. 이것들은 각각 상이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단계들에 대해서 동의한다. 경험을 선택하기(1장)에서는 우리가 신학적인 성찰을 하기 위해, 의미 있는 순간에 중점을 두기 위해 이것들을 구분하는 것을 설명한다. 경험을 말하기(2장)는 경험을 묘사하는 것에 관련된 것이며, 경험으로 들어가기(3장)는 경험이 가르치는 것을 배우기 위해, 경험에서 배우기(4-6장)는 신학적인 성찰의 절정 부분이며, 배운 것을 실천하기(7장)에서는 이것을 규정하는 여러 자기 방법을 기술할 것이다.

신학적인 성찰의 기원은 무엇인가?

신학적인 성찰은 자신의 신학에 근거를 두고 행함으로써 교역의 실천을 강화하게 된다. 이러는 과정에서 신학적 성찰은 교역의 실천적인 배경 안에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신학을 생동감 넘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적 성찰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충실한 것이다. 신학적인 성찰의 출발점은 경험인 바, 온전하고, 심오하고, 의미 있는 삶으로 들어가는 경험이다. 하나의 방법으로서 성찰은 하나의 사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기, 그것에 이름 붙이기, 이를 다른 경험과 성찰에 연결시키기, 이를 통해 미래를 새롭게 형성토록 한다. 신학적 성찰의 과제는 신학을 경험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험은 우리 가운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관련된 진정한 경험을 말한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은 경험으로 반드시 비판되어야 하고, 경험 또한 신학 으로 반드시 비판되어야 한다. 일단 성찰이 일정한 수준의 신뢰성과 합의에 도달 하면, 이것은 규범적인 것이 된다. 이런 성찰이 원래의 경험에 대한 믿을 만한 지침으로 인식된다면, 그러한 성찰은 원래의 경험에 인도하는 유일한 안내나 원래의 경험과 동등한 것으로서 취급될 수 있다. 규범적 신학의 수호자들과 이것에 편승한 기관들은 경험에서 나오는 신학적인 주장에 매우 저항적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그리스도교 성찰의 주고받기(give—and—take) 방식, 추구하고 발전하기(search—and—find) 방식의 부분이다. 다른 의미에서 보면, 규범적인 신학은 지나치게 적대적이고 새로운 것을 방해한다. 신학적인 성찰은 바로 이러한 긴장 가운데서 일어난다. 신학적인 성찰은 예수가 처음 나타나서 시작했던 여정이 계속되는 삶의 방식으로 경험과 신학을 엮으려고 시도한다. 이 안내서는 이 여정의 동반자로 제공한다.

CHAPTER 1 신학은 어디에 있는가? – 목회 경험과 신학적인 성찰

신학적인 성찰의 독특한 특징은 성찰의 원재료가 인간의 직접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경험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또한 현재적이고 인격적이어야만 한다. 경험은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경험은 신호를 보내고, 힌트를 주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사람들이 어떤 사건의 신학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초청한다.

하나님 - 말씀으로서의 신학

신학은 하나님(theos)와 말씀(logos)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과 말씀과의 관계는 적어도 세 가지 방식에서 이해될 것이다. 곧 ‘하나님에게서 오는 말씀’, ‘하나님에 대한 말씀’, ‘하나님에게 향한 말씀’이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말씀은 전통적으로 계시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자연과 역사라는 두 가지 주요한 형태로 발생한다. 이 둘 모두에서, 하나님은 말씀보다는 행동을 통해 더욱 자주 자신을 드러낸다. 이의 특별한 형태는 사람들이 어떤 초월적인 영적인 힘에 의해 장악되고 사용되는 느낌을 가질 때 발생한다. 하나님에 대한 말씀은 전통적으로 믿음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말 씀의 빛 안에서 갖게 되는 인간의 자기 이해이자 자기 행동이다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말씀에 달려 있기 때문에, 비록 그 믿음이 효과적이기 위해 인간의 수용과 행동을 요구할지라도,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것은 신조(creeds)와 믿음의 공동체의 교리적인 진술인 신앙고백과 이 신앙고백에 대한 질문과 이러한 질문에 기초하여 일관성 있고, 이해 가능하게 믿음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하는 연구조사로 이루어진다. 연구는 정교화하고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님에게 향한 말씀은 본질적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통해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말씀에 대한 반응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반응은 기도와 예배, 도덕적인 행위, 교회의 생활과 사회와 문화의 참여와 같은 형태를 취한다. 사람들이 어떤 경험 안에서 단순하게 신학적인 의미를 찾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어떠한 경험에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가? 대부분이 경우 이 둘의 결합이다. 경험은 성찰을 촉발시키는 특정한 신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신학이 경험 안에서 발견되든지 혹은 경험을 일으키든지 간에, 성찰은 경험과 신학 모두에게 정직하고, 탐구적이어야 하며 또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 것 상황 안에서 찾아지거나 상황으로 인도한다.

평화로운 죽음 맞이하기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는 사람의 역할은 분명히 설명되었지만 목회자가 이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한 암시는 거의 없다. 그 목회자의 감정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중요하다. 모든 경험은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공존하며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 미친다. 이 두 측면이 없이는 경험이 제한되고, 그래서 이것들은 각각의 신학적인 성찰을 위한 잠재력이다. 동시에 강한 감정은 경험의 중요성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시사해 주고 중요성에 대한 이러한 감정은 신학적 의미에 대한 일차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목회자는 주관적인 측면보다 객관적인 측면을 더 많이 묘사한다. 목회자의 성찰에서 대두되는 몇 개의 질문들은 좀 더 폭넓은 이해를 목표로 하고 있는 듯 하다. 예를 들면, 언제 어디서 봉사란 용어를 써야 하는가, 에이즈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교회이 공식적인 신학을 명확하게 하기 보다는 개인적인 신학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것은 이러한 경험에서는 인격적인 질문들이 지배적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사례에서 목회는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보인다. 목회자가 편하게 느끼는 목회가 아니라 씨름하며 행해야 할 목회이다. 성찰 집단과 교육 감독자는 목회자에게 탐구의 과정을 보여달라고 요청할 수 있고, 후에 성찰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내도록 요청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러한 질문들에 관련된 성경적, 교리적, 목회적, 또는 다른 자료들을 제시하고 목회자가 그것들에 대해 공부를 한 뒤 보고서를 요구할 수도 있다.

의미가 큰 경험들은 친숙해 왔던 신학적인 이해에 대한 질문을 자주 제기한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해 답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제기된 질문을 결론 짓고자 하는 유혹이 존재한다. 이것은 불편한 결론을 회피하거나 자신의 목회 방식을 바꾸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신학적인 성찰이 더 깊은 탐구의 과정을 촉발시키지 않거나 종국에는 새로운 신앙고백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신학적인 성찰이 아니다. 신학은 공식적이기보다는 인격적이며, 행동보다는 현존이며, 편안한 것이기 보다는 갈등하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경험의 신학적인 의미가 주로 비언어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직접적인 주장들보다는 일련의 질문들을 제기한다. 질문들 그 자체는 경험의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차원을 탐색하며, 무엇이 중요한지 파악해야 한다.

실천적인 제안과 질문

다음의 요점은 신학적인 성찰집단을 조직하고 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 요점은 이 장에서의 자료들을 요약하고 그리고 특히 각 요점이 목회 훈련과 목회 형성 과정의 부분으로서 구조화된 환경에서 행해지게 될 때, 어떻게 신학적인 성찰을 더 유익하게 할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신학적인 성찰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신학이며, 신학적인 성찰자에게 기대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신학은 너무 좁게 정의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한 가지 자료에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제한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명백히 진술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열려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특히 하나의 사건 속에서 사용됐던 실제적 언어를 재현할 때, 신학은 친밀한 종교적인 언어나 상징으로 항상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앙고백으로 서의 신학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만약 신학이 인격적이어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개인적인 확신들이 질문이나 비평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질문들은 대답되거나 연구 조사하지 않고서도 신학적인 시사점을 내포할 수 있다. 대신에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얼버무려질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현존하셨습니다”이거나 “그것이 구원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입니다.” 신학적인 현안에 대한 탐색은 학생들이 신학 연구 교육과정에 있을 때 더욱 쉽게 할 수 있다. 신학적인 성찰은 학생들이 그들의 목회 활동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고 반응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기도와 유사하다. 학생들이 신학적인 성찰의 어떤 영적인 결과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는가? 프락시스(praxis)는 모든 신학적인 성찰의 의도된 결과이다. 특히 목회에 대한 성찰은 실천지향적이다. 신학은 어떤 경험 안에서 발견될 수도 있고, 혹은 경험에 대한 성찰로 인해 야기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실제로 일어났던 경험의 통합과 의미의 역사를 가진 신학의 통합은 존중되어야 한다. 어떻게 이러한 두 개의 통합이 당신의 성찰 집단에서 유지되고 있는가? 주요 함정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들이 인식되고 회피되는가? 예를 들면 한 학생이 일단 신학적인 논의가 시작되면 신학적인 의미를 그 사례에 관련시키기 보다 그 사례를 한 쪽으로 제쳐두는가? 신학성찰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학생이 성찰의 결과를 기록하기 전에 성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도록 하는가? 이러한 준비 과정을 혼자 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가? 학생이 다른 사람들의 제안을 어떻게 통합하고 그들의 조언에 반응하고 있는가?

이론적인 배경

이 책에서 다루는 신학적인 성찰에 대한 접근법의 주된 이론적인 기초는 과정 철학, 특히 화이트헤드가 형성한 것이다. 그는 물론 신학적인 성찰을 직접적으로 논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 체계는 내가 앞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신학적 성찰 작업에 매우 적절하다. 실재에 대한 과정적인 관점에서 가장 현저한 특징은 모든 것이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다. 만물은 앞으로의 생성의 활동에 관련되는 한에서 그것들이 존재 한다. 화이트헤드의 입장은 실재는 이미 본질적으로 구성되고 그들의 특정한 특징에 따라 행동하는 물질로 구성된다는 전통적인 관점과 대비가 된다. 하나의 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실제의 과정은 철저히 창조적이다. 곧 존재는 그 자신의 실존을 정의한다. 존재는 이용 가능한 요소를 파악하고 그 자체인 유일한 순간적인 계기로 그것들을 형성함으로써 정의를 내린다. 그의 철학은 유기체 철학이라고 묘사한다. 경험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간단하나 표현이다. 왜냐하면 발생하는 것은 매 순간 실재를 새로 구성하는 복잡하고, 대체적으로 숨겨진 자기 창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과정 그 자체는 현실적인 계기들의 생성을 구성하는 모든 파악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들 파악은 본질적으로 느낌의 행위들이다. 경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모든 경험의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과거,현재, 미래의 시간적인 차원 위에 놓여 있고, 연관의 뒤에 숨겨져 있다. 하나님은 모든 현실적인 계기들이 갖는 모든 지향의 창시자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하나님의 원초적인 본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미 발생했던 것들에서 출현할 수 있는 가능하고 새로운 모든 사건을 하나님이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모든 존재로부터 하나님을 구별되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은 모든 경험에 내밀하게 관여하시고 모든 일부이시다. 모든 경험의 근원에는 신적인 차원이 존재한다. 모든 계기의 실제적인 창조는 그 계기 자체의 작업이지만, 그것의 시작과 결과적인 활동의 가치는 하나님의 작업이다. 이미 명백해진 것처럼, 과정적인 세계관에서 모든 것은 정도의 문제이다. 전통적인 서구의 실재관과 연관된 양쪽으로 나눠진 양분됨과 이원론은 과정적인 관점으로 대체된다. 이 과정적인 관점은 일련의 내재적인 관계를 통해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다는 온전한 연속체라는 관점이다. 어떤 특정한 목회의 사건이 이와 연관된 전체를 더 많이 드러내면 낼수록, 이것은 더 중요한 것이 된다. 그 사건에 대한 개인의 신학적인 성찰이 더 포괄적이면 포괄적일수록, 이것은 더 중요하다. 더 큰 의미의 세계로 이동시키는 것이 바로 신학적인 성찰이다.

CHAPTER 2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가? – 신학적인 성찰을 위한 경험 설명하기

경험을 제시하는 데 쓰이는 도구들

신학적인 성찰의 경험을 서술하는 데 가장 널리 사용되는 도구는 축어록, 사례연구, 중요한 사건, 역할극, 면담, 일기 쓰기이다. 축어록은 목회임상교육과 일대일 관계를 포함하는 교육 감독 목회에 사용되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이것은 목회적인 돌봄의 교역, 목회상담, 영성 지도에 가장 적합하다. 축어록의 장점은 이것이 의사소통의 기술과 신학적인 성찰을 가르치기 위한 실제적인 대화를 신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례연구는 법률, 사업, 의료, 사회복지, 심리 치료와 같은 실천적인 분야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 이것은 특별히 의사 결정과 목회 계획, 목회자의 지도력 이란 의미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사례연구는 사람들이 복잡한 상황을 분석하는 기술을 발전시키도록 돕는다. 곧 개인이 개인적인 입장을 갖도록 돕고, 이것의 실천을 계획하는 일을 돕는다. 집단의 상황을 다루는 사례연구는 개인의 초점을 일대일 관계로부터 확장시킬 수 있고 집단과 활동하는 기술을 발전시키도록 돕는다. 중요한 사건은 축어록과 사례 연구의 결합에서 생긴다. 이것은 축어록과 같이 대화를 활용하지만, 사례 연구처럼 어떤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사건에서 중요한 요소는 그것의 본래 상황에 근거를 두고 주의 하는 것이다. 역할극은 교수 활동과 관리 기술이 상황을 진작시키기 위해 널리 사용된다. 역할극은 일대일 목회적인 만남에 가장 자주 사용되며,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가 소집단 활동에 적합하다. 역할극은 개인의 의사 소통과 분석 기술을 요구한다. 역할극은 경험의 직접성을 제공하며 그 사람의 자발성과 반응성을 시험한다. 면담은 전자 녹음 장치와 대중 매체에서의 대담 프로그램 확산으로 최근에 발전된 기술이다. 면담은 공식 발표를 하기 전에 사람들과 상담하는 방법으로서나 설교나 교육과 목회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한 준비로서 목회에 활용된다. 면담의 주된 한계점은 면담자가 관심을 갖는 것들만 질문함으로써 제한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로 하여금 신학적인 성찰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다른 관점들이 표현되는 것에 지장을 준다. 일기는 한 사람의 개인적인 발전을 계획하여 기록하고 일상의 사건들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하는데, 인기 있는 도구가 되어 왔다. 이처럼 일기는 영성 지도, 상담과 인격 성장 프로그램들에 유용하다. 일기의 주된 한계는 너무 자기 성찰적 이고 심지어는 자기애 적이 되도록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여섯 가지 도구의 가치는 참가자들이 얼마나 신학적인 성찰을 고무시키느냐에 있다.

연대, 권능 부여, 사회 정의

과테말라에서 온 난민인 토마스와 페리페는 최근에 그들의 ‘신분증’을 받고, 그들에게 일하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어느 날 그들은 내가 일하고 있는 사회단체에 찾아와서,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했다. 몇 주 전 나는 식당에 연락했다. --- 이 사건의 서술은 무엇이 발생했는지를 알기에 충분할 만큼 사실에 기초해 있다. 목회자는 이러한 사실들이 중요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로 엮음으로써 사건의 전모를 포착한다. 난민의 법적인 지위, 이들이 낯선 사람과 익숙하지 않은 체제에 의존되어 있음, 일거리가 절박하게 필요함, 고용에 대한 불안 등 이 모든 것이 이 이야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무감각하고 기계적인 서류가 통제한다. 미국 천주교 주교단의 경제 문제에 관한 목회 서신에서 사회 정의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사회정의라는 말이 함축하는 것은 사람들이 사회생활에서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참가자가 될 의무가 있다는 것과, 사회는 그들이 이런 방식 으로 참가할 수 있게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 이 사례는 이를 제시 하는 사람의 목회의 일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명백하게 신학적인 면이 없다. 주교단의 문서는 이에 대한 비판이나 구체적인 상황도 없이 주장하는 신앙고백으로서 제시되었다. 이 문서는 난민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주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 목회자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종의 개략적인 해석이나, 세심하나 신학적인 성찰을 방해한다. 이 주장이 신뢰할만한 신학적인 성찰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비판적인 근거를 갖고, 여기에 있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게 주장해야 한다. 나는 세 가지 부분에서 가능한 하나의 방법을 제안한다. 가난한이들의 ‘힘든 현실’과의 연대, 개인적인 권능 부여, 구조적인 권능 부여, 이 셋은 전형적으로 위에 서술된 순서를 따르지만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 그 목회자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일하기 위한 방법을 개괄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그 사건이 중요함을 받아들인다. 제시된 방법이 얼마나 신학적인가? 그리고 그것이 서술된 것처럼 그 사건에서 유래하는가? 연대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신학적인 지지가 충분히 존재 한다. 이 지점에서 목회자에게 적용되는 핵심 단어는 존엄성이다. 구조적인 권능 부여는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분명히 성경의 예언자 전통과 역사가 여기에 적절한 말씀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목회자는 난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지역의 교회에 말했는가를 서술함 으로써 이 사례와 분명하게 연결하고 있다. 이 사례처럼 본래의 경험과 접촉을 놓치는 것이 신학이 상황에 끌려갈 때 더 잘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실천적인 제안과 질문

다음에 제시되는 사항들은 이 장에서의 자료들을 재검토하고 신학적인 성찰을 위해 사용되는 경험의 서술을 향상시키기 위한 제안들을 제공한다. 신학적인 성찰을 위한 사건의 서술은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사실에 기반을 둔 서술이 비인격적인 서술이 될 필요가 없다. 신학적인 성찰을 하는 동안 필요에 따라 첨가되는 사실들이 서술에 덧붙여질 수 있다. 경험에 대한 서술은 다양한 도구를 통해 행해질 수 있다.

개별 도구는 각각의 장점과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이미 서술된 것처럼, 신학적인 성찰은 경험의 사실들과 계속 관련되어야 한다.

이론적인 배경

경험자료의 중요성

과정 사상은 영국의 경험론이라고 알려진 철학 학파에 속해 있다. 이 학파에 따르면, 실재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상식적인 경험의 확고하고, 틀림없는 사실들이다. 경험론자들 사이에는 이러한 사실들이 실제로 알려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기준이 알아가는 과정을 안내하고 정당화하는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경험론자는 경험적인 사실을 선험적이고 좀 더 근본적인 실재의 표현 – 정신이나 이성 – 이라고 여기는 이상주의자들에 반대한다. 경험적인 사실에 대한 주된 접근방법은 물리적 감각을 통해서다. 탐구하는 마음이 추구하는 것은 더 큰 그림이다. 하지만 이것에의 유일한 접근방법은 개별적인 계기의 정보를 통해서이다. 이것은 지루한 과정이다. 반면에 철학적인 관심은 사실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여 경험적인 사실들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이것은 실재에 대해 지나치게 좁고 결함이 있는 관점을 초래할 것이다. 경험적인 관심은 사색하는 이성을 위한 것이고, 경험적인 데이터가 가능하게 하는 실재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신학적인 성찰은 경험의 자료를 위와 같은 관점으로 접근한다. 신학적인 성찰의 궁극적 목적은 주어진 경험의 신학인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다. 개념상, 이러한 더 큰 의미가 사건의 사실들을 통해서만 가능할지라도, 이러한 의미는 경험 그 자체의 사실적인 서술을 넘어선다.

상징적인 내용의 기능

모든 유한한 계기(occasion)의 더 큰 차원, 곧 어떤 특별한 경험적인 사실들을 다른 실제들의 네트워크에 연결하는 것은 그것의 상징적인 내용(reference)이다. 모든 사실은 존재 그 자체에 의해서 그 자체 너머를 가리킨다. 사색적인 사고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신학적인 성찰의 관심은 그 사실들의 너머에 있다. 신학적인 성찰은 사실들이 드러내는 더 큰 전체를 인식하고 진술하기 위해 마음의 상징적인 전환을 이룬다. 이것은 바로 그 사건의 서술과 함께 이미 시작되고 그것은 사건이나 그의 의미와 다소 다른 어떤 것이다. 마음이 받아들이는 감각적인 데이터와 함께 마음이 하는 것은, 거의 즉각적으로, 감각적인 데이터를 상징적인 형태들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 상징적인 형태들은 사실상 세상을 재창조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마음으로 인식하고, 마음 안에서 기능한다. 신학적인 성찰은 상징적인 내용을 도출해내는 신중하고, 집중된 연습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의미의상징적인 세계에 하나의 사건이란 확실한 데이터를 적용시키고, 경험이 허락하는 가능한 연결을 통해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다. 이것은 환상이나 가공한 것 안에서의 연습이 아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의미의 특정한 방향에 맞추어진 모든 인간의 아는 것에 대한 확장이다.

잘못된 구체성의 위험

성찰의 형태 속에 있는 가장 큰 위험 중의 하나는 잘못된 구체성(misplaced concreteness)이다. 이것은 어떤 것에 대한 사람의 생각이 실재를 대리할 수 있다는 것과, 그러므로 이것들이 실제적인 것처럼 다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상징적 내용은 감각적인 데이터의 파악된 세계에 대한 해석이지만, 이것은 그 세계의 대체물이 아니다. 모든 성찰은 이것이 오는 실재에 의해 시험되어야 하고 측정되어야 한다. 잘못된 구체성의 오류는 신학적인 성찰을 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유혹이다. 그들이 자기들이 대리하는 실재인 것처럼 신학적인 개념들을 다룰 수 있다. 이것이 일어나는 가장 분명한 표지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구체적인 사건으로 성찰을 시작하고 그런 다음 신학 성찰이 일단 시작되면, 그 사건을 버릴 때이다. 잘못된 구체성의 오류는 마치 그 사건이 사건 그 자체의 독립적인 존재를 가정하기 위한 신학적인 성찰에 찌르는 하나의 가시이다. 과정의 관점에서 신학적인 성찰은 유전적으로 구체적인 사건으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사건은 앞서 진술된 신학적인 의미를 평가한다. 이것을 달성하고 잘못된 구체성을 피하기 위한 열쇠는 사실에 근거해서 사건을 서술하는 것이다.

CHAPTER 3 어떻게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 실제 경험 이야기

목회적인 돌봄 축어론

Keith는 25세로 지방대학에 있는 음악과 순수예술학과 대학원생이다. 그는 탁월한 음악가이며, 수많은 노래를 작곡해 왔고, 대학교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그는 지방 신학교의 예비 신학 프로그램에서 1년을 공부했으나 성직 임명을 받기로 결정했다. 지난 여름, Keith는 Europe으로 연수여행을 갔다. 거기에 있는 동안, 그는 병이 들었고 천천히 회복 중이다. 중간고사 기간에 키이스는 교목인 나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정했다. 그는 정각에 도착했고, 늘 그렇듯이, 처음의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후에, 나는 그에게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물었다. 일반적으로 사건의 세 가지 주요한 구성요소들에 해당하는, 성찰을 위한 세 가지 기입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등장인물들(players), 줄거리(plot)와 배경(place) 이다. 어떤 특정한 순서를 따르거나 이들 셋 모두를 활용할 필요는 없다. 소집단 성찰안에서는, 적어도 한 사람은 기입 항목의 각각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성찰 과정에 대한 실마리

신학적인 성찰의 목표는 인간의 경험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거의 자명(self-evident)하지 않고, 이것은 두 제자에게 예수를 나타내게 위하여 세례 요한이 필요했던 것에서 증명된다. 신학적인 성찰자는 세례요한 같이 누군가를 가까이 두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 임재의 매개체로서, 경험 그 자체는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실마리를 남겨 둔다. 모든 언어는 이것이 하나님 본래의 말씀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인 한에 있어서, 신학적인 특성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창조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가깝게 참여하는 언어는 창조적인 언어이다. 그리고 인간 언어의 가장 창조적인 형태는 상상력이 풍부하다. 물론 언어는 그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항상 말하는 사람의 의식적인 통제 하에 있지는 않다. 이것은 이미지가 특히 듣는 사람만큼이나 말하는 사람에게 계시인 의미를 종종 포함한다는 점에서 사실이다. 이것이 대화에서 사용하는 이미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이다. 때때로 몸짓들은 의도적이고, 어떤 말이나 대상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러한 몸짓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단어나 대상들을 취해야 하는 의미를 구현한다. 경험으로 들어가도록 돕는 실마리들은 경험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데이비드의 자전거

데이비드의 부모가 알코올중독증으로 데이비드를 버린 사건, 이 사건은 감독하는 일과 조력하는 일로서 목회자의 주요 업무 사이에서 발생했다. 데이비드의 경우 하나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실까? 하나님의 조치를 수행하는 데 있어 그 목회자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것들은 이 사건에 대해 신학적인 성찰을 하는 동안 논의할 수 있는 적절한 질문들일 것이다.

그래니 코디

이 이야기에서 목회자는 경험을 매우 창조적으로 묘사하는 재주가 있다. 각각의 짧은 이야기가 동반하는 신학적인 성찰은 일상적인 세부 사항들과 그래니의 삶의 언어로 신학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그래니의 삶의 언어로 신학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상당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래니는 그녀의 소유물들에 대한 명백한 유대감을 갖고 있다. 그래니의 수고양이 롤리에 대한 사랑은 목회자에게 깊은 의미를 갖는 몸짓이다. 그래니와 하나님이 성경적인 이미지 사이의 신학적인 유사점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니는 목회자의 사촌이 왜 서둘러서 그곳을 떠나려 하는지 궁금해 한다. 그래니는 서두를 수 없고, 아마 결코 그러지도 않았다. 항상 눈여겨보고 느끼고, 오랜 시간을 보낸 적이 많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와 너무 친밀해져 있어서 그곳을 신속히 처리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

식스토와 정의를 향한 희망

식스토를 테러한 경찰들은 발견될까봐 두려워 했고 사람들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경찰들이 은폐할 수 있는 경찰병원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했고 변호사들이 있는 ‘교회의 평화와 정의위원회’에 당장 알렸고, 그들은 이 사건의 증거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계속 이 사건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때때로 대상의 오용은 우리를 둘러싼 실재를 깨닫게 하며, 시야를 선명하게 하며 행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새롭게 한다. 이 설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식스토를 지키기 위해 찾아갔던 교회 직원이다. 이 사례에서 교회 직원은 식스토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으로 데려감으로써 그리고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퍼뜨림으로써 성서 시대의 여성들의 역할을 재현했다. 이 사건에 압력을 가해 경찰의 폭력에 제동 걸기 위해서는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가 통제권을 다시 얻어야만 한다. 이것은 체제 안에서의 행동을 요구한다. 곧 이 체제가 사람들을 위해서 작동하도록 법률적인 사건으로 압력을 가하면서 해야 한다.

엘리자베스를 심방함

엘리자베스와의 축어록에서, 존은 어떤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일상적인 심방을 말하고 있다. 이것에서 경험으로 들어가고 그것의 신학적인 교훈을 배울 수 있는 어떤 실마리가 있는가? 주저하는 사람의 몸짓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똑 같은 몸짓은 예수의 죽음 이후 다락방에 모인 예수의 제자들의 묘사를 상기시킨다.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새번역). 축어록은 엘리자베스가 실제로 두려워했다는 것을 나타내지는 않지만, 그녀는 분명 문을 잠가두고 있었다.

실천적인 제안과 질문

경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기 위해 인물, 줄거리, 배경이 제공하는 실마리에 따라 자신의 관점에서 경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장 깊이 느끼는 것이나 그들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지를 사용한다. 특히 그들이 그것을 좀 더 분석적으로나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때 더욱 그렇다. 대상은 인격적인 경험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구체화한다. 때때로 이것은 의도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행한다. 몸짓은 많은 단어나 대상들이 전달할 수 있는 것을 한 번에 모두 표현하는 행위이다. 신학적인 성찰은 하나님의 임재가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미리 알지 못하면서, 그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린다. 그들 자신의 방법에서 이미지, 대상, 몸짓들은 신적인 생명을 공유하고, 이것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론적인 배경

실재(reality)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관점은 다른 계기들의 파악을 통해 그것 자체를 끊임없이 창조하는 현실적인 계기들의 네트워크를 규정한다. 각각의 계기의 파악은 대상이 파악되는 특성을 느끼는 것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경험 속으로 실제로 들어감은 임의적이거나 무관심한 결정이 아니다. 각각의 완성된 경험은 바로 그런 것이고, 공유할 바로 그 자체의 분명한 특성을 가진다. 과정 실재에 대한 표준적인 설명은 종종 개개의 현실적인 계기들에 집중한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엄밀히 개개의 현실적인 계기는 아니다. 대부분의 것들은 결합이나 종합을 형성하는 몇몇 실제의 계기들로 구성된다. 주관적인 형태는 현실적인 계기가 생성을 가져오는 정보를 느끼는 특유의 정서적인 특징이다. 이 과정은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스스로 창조하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각각의 계기가 그것이 파악하는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을 그것의 주관적 형태라고 불렀다

CHAPTER 4 나를 상기시키는 것 – 사례로서 신학적인 성찰

조디의 난처한 입장: 사례 연구

조디는 시립종합병원에서 목회현장 실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성들의 기자회견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에 난감해 했다. 그들이 직면한 차별, 곧 같은 업무에 대해 남자들보다 낮게 받는 임금, 전문직으로서 존중이 부족 등의 문제였다. 이러한 사례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신학을 확인시켜 준다. 이것은 사람들이 왜 사례를 통해 분명히 보여지는 신학을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 사람은 어느 정도의 신학적인 의식을 이미 가지고 있고, 당면한 사례에서 그것이 제시되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조디의 동료들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눈에 동등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표시로서 실천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험이 신학을 어떻게 예시하는가

일반적으로, 경험은 신학을 세 가지 방법으로 예시한다. 일반적인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 역사적 사건에 동시대적 사례, 공동의 경험에 대한 개인적인 사례이다. 종종 경험은 일반적이고, 신학적인 주제에 대해 특별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때때로 경험은 성서, 교회의 역사, 그리스도교 교파의 전통, 또는 뛰어난 개인들이나 공동체들의 전기들에서 찾아질 수도 있는 역사적인 사건의 동시대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경험은 또한 공동의 인간 사건들을 개인적으로 만드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례의 가치

사례는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자기 자신에게 가치가 있는데 우선, 그는 자신의 신학에 대해 좀 더 확신하게 된다. 또한 모든 사례는 자신의 신학과 의사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학에 더욱 친숙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신학으로 더욱 신앙심이 깊어진다. 경험과 신학이 사례를 통해 만나면서, 이것들은 하나님과 더욱 신앙심 깊은 만남을 초청한다. 사례는 일반적으로 신학에 미치는 영향 이외에, 또한 그 자신의 신학에 대한 가치를 지닌다. 이것이 사례 등을 통해 분명히 보여질 때, 그 사람의 신학은 완성도가 높아진다. 일반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과거와 현재, 공통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에 관련성이 만들어질 때마다 신학적인 의미와 함축이 채워진다. 또한 특정인의 신학이 더욱 잘 인식될 수 있다. 사례는 매일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서 신학이 더욱 명백해질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특정인의 신학이 더욱 오래 지속한다.

사례에 대해 주의할 점

사례는 목회를 가르치는 데 가장 자주 사용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이 쉽거나 요구 사항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효과적인 사례는 우리가 경험으로 들어가서, 이전의 지식을 탐구하고 제안되거나 기억되는 자료들을 검토하며 신학을 경험과 면밀하게 비교하고 다른 사람들 판단에 사례를 제시하기를 요구한다. 사례를 통한 학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다음 사항을 기억하라. 신학적인 관점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경험을 강요하지 말라. 그리고 경험에 끼워 맞추기 위해 신학을 왜곡하지 말라. 사례를 날조하지 말라. 실제로 일어난 것을 발견하고, 경험이 그 자체의 적절한 사례를 제시하게 하라. 신학적인 성찰은 어떤 의견을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기 위해 사례를 찾아내는 교육적인 작업과 같지 않다. 마음에 떠오르는 첫 번째 사례에 그치지 말라. 첫 번째 사례는 경험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이라기 보다 그 사람의 가장 최근 독서나 가장 편안한 연상의 결과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거룩한 구세주 교회가 처음 피난처 교회가 되기를 고려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예수의 연민과 친절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사례에 그치지 말라. 가능한 많은 방법으로 경험이 가르치도록 하라. 예를 들어, 존의 교목 경험은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를 분명히 보여줄 뿐 아니라, 이것은 그의 직원 구성원들과 미래의 상호 작용에 적용할 것을 요청한다.

고메즈 씨에게 일어난 중요한 사건

요양원에서 고메즈 노인과의 축어록에서 기본적인 감정은 좌절이었다. 심방 가서 말을 거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그 당시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 밖에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신학적인 주제는 모든 것을 잃어 버렸을 때 누가 돌보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욥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목회자는 고메즈 씨의 사례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자신은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메즈씨에 대한 심방은 과거 사건의 동시대적인 대표 사례이다. 이 상황에서 고메즈씨는 욥과 같이 선한 사람의 외로움과 고통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목회 심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암시를 제공한다. 만약 욥의 이야기에 대한 성찰이 좀 더 심층적으로 발전되었더라면,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심방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을 더욱 주었을 것이다.

메리와의 축어록

가정부 메리와의 축어록에서 목회자는 메리와 함께 있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실제 명상과도 같다. 곧 축복받은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경험의 이러한 측면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은 메리가 그 목회자에게 무엇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목회자가 이것을 실제로 가장 최선으로 실천하는지를, 예를 들면 메리처럼 되는가를 명료화 할 수도 있다. 목회자는 메리에게서 “하나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회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상기시킨다. 누가복음 18:13에 나오는 여인은 죄인으로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겸손한 여인으로서 메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실천적인 제안과 질문

다음의 사항들은 목회가 사례를 통해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지를 요약한다. 질문은 신학적인 성찰 집단과 함께 사람들이 이 자료들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경험이 신학을 분명히 보여주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은 경험과 그것이 보여주는 신학에 충분히 친숙해야만 한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경험이 신학을 어떻게 분명히 보여주는지 인식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경험은 주제와 관련된 형태로 신학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례는 이것이 새로운 근거를 깨지 않거나 중요한 새로운 통찰로 나아가게 하지 않을지라도 신학적인 성찰의 타당하고 가치 있는 형태이다.사례를 알아차리는 것은 단지 출발점이다. 진정한 학습이 일어나려면, 사례는 반드시 기술되고, 연구되고 논의되어야만 한다. 사례는 개인들과 그들의 신학에 영향을 준다.

어떤 특별한 경험은 학생에게 친숙하지 않는 신학적인 관점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도자나 다른 성찰 집단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 것이다. 경험은 신학을 결코 완전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대개 유사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비유적이기 때문이다. 사례는 경험이 제공할 수도 있는 유일한 종류의 신학적인 배움이 아니다. 학생들이 가능한 많은 사례를 확인하고 그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추도록 격려한다.

이론적인 배경

경험이 신학을 예시하는 방법에 대한 이론적인 기초는 다음과 같은 신학사상의 세 가지 핵심사상에서 온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은 모든 현실적인 계기에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각각의 사건에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목적을 제공함으로써 모든 사건을 착수시키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존재의 자기 창조 전체의 과정을 통해서 지속된다. 하나님이 제공하는 본래의 지향(initial aim)은 주어진 계기를 구성하는 모든 단계를 통해 만족되는 목적으로서 남아있다. 하나님의 임재는 단지 전체 사건의 맥락에서만 포착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단순히 한 사건의 구성으로 들어가는 많은 요소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 장에서 제시된 목회경험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환경, 물리적인 대상, 사람, 대화, 느낌, 또는 결정과 행위와 같지 않다. 이것들은 이 경험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분명한 방식에서 파악되고 상호 관련된 별개의 요소들이다.

창조성과 반복성

신학적인 성찰의 실제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목적을 돕는 것이다.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설명이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질적 으로 새로운 경험을 향한 창조를 유혹하신다. 하나님은 새로움과 그 안에 있는 기쁨의 창조자이다. 하나님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신다. 신학적인 성찰은 진정으로 신학적인 한에서, 이것은 창조성과 새로움의 측면에서 경험으로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항상 하나님의 열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옛 것에서 온다. 그리고 그것이 오래된 것과 관련될 때에만 새로운 것으로 인식된다. 현재는 과거의 바탕 위에 존재한다.

인과관계의 효과

인과관계의 효과의 역할은 왜 사례가 경험이 가르치는 가장 자주 사용되는 방법인지를 설명한다. 새로운 경험은 본래 과거 사건들의 성찰이다. 새로운 경험은 실제로 과거 사건과 관련되고, 대개 그것을 초래하는 더 큰 전체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더 큰 전체는 위에서 설명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포함한다. 어떤 특정한 사건 뒤의 인과 관계의 관계망을 해명함으로써, 사례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해를 증가시키는 또 다른 예이다.

CHAPTER 5 나는 이제 보기 시작한다 – 적용으로서 신학적인 성찰

명료화하기

적용은 사람들이 할 수도 있는 신학을 실천에 옮기는 것과 같지 않다. 예를 들면 병원 직원들의 근무 관계를 구조화하기 위해 공동체의 이해를 이용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런 형태의 활동은 신학적인 성찰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적용이란 새로운 상황의 관점에서 자신의 신학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신학을 수정할 가능성을 수반한다. 적용은 자신의 신학을 추상적인 생각의 관례적인 맥락에서부터 어떤 특정한 상황의 새로운 맥락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우선권이나 강조점들의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수반한다. 사회분석은 단순한 사시의 보이지 않는 밑에 흐르는 것을 파악하려고 하고, 이것들을 일으킨 근원과 구조들을 보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어떤 상황이 실제로 구성된 방식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반면에, 그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을 떠나서, 객관적인 연구가 되도록 의도한 것이다.

사건들이 적용을 요구하는 방식

상황은 적용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상황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거나 개인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데 대한 자극은 한 사건에서 세 개의 주요한 요소, 곧 등장인물, 줄거리, 배경과 관련하여 세 자료 중 하나이다.

등장인물들

때때로 특정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것을 할 때 적용을 촉발한다. 고정관념을 깰 때, 역할을 바꿀 때, 숨겨진 자질을 보여줄 때 등이다.

줄거리

때때로 한 상황 속에서 현안들이나 가치들이 적용을 촉발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곳에 나타날 수 있다. 전문용어, 방법론, 결과가 그것이다. 때때로 어떤 상황의 배경이 적용을 촉발한다.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을 수 있다. 문화적배경이 있을 수 있고 정치적/성적인 배경이 있을 수 있는데 자신이 동성애 성향을 인정하는 한 학생이 성직 안수 승인을 거부당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급우들에게 자신들의 교역 신학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또한 사회적 배경으로는 수감자들은 동료들의 압박과 조롱 때문에 성서 연구수업의 참여를 기피한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자신의 교도소 교역 신학을 재평가하게 하였다.

적용의 가치

신학을 재확인한다.

적용은 새로운 상황을 반영한 신학을 재확인한다. 다른 말로 하면, 각 개인이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인 것으로 보이나, 적용의 신학의 요구로 수정 된 것이다.

신학을 재정립하다

이것은 자신의 신학에서 우선적인 내용과 다양하나 신학적인 입장의 적절성을 의미한다. 적용은 개인이 신학적인 진실의 척도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의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새로운 신학을 드러내다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새로운 통찰과 이해는 항상 가능하다. 특히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목회 경험을 제한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더욱 그렇다. 이 두 경우 중 모두에게 자신의 신학에 적용을 시도하는 것은 이미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첨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례 연구: 얼마나 많이 드러내야 하는가?

사회분석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은 동성애에 대해 문자적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고, 사람들이 이것을 하나님의 보복의 희미한 낌새로 여기며 경멸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문제는 지속적으로 두려움, 혼동, 혐오감, 회피 등과 같은 강한 반작용을 일으켜 왔다. 여전히 동성애적 성향의 기원은 이해되지 않고, 이것을 둘러싼 복잡성과 불확실성은 때때로 혼란스럽게 만든다.

신학적인 성찰

이런 공개는 일반적으로 목회의 역할과 성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약함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한다.

행동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합리적인 것을 요구하신다. 확실히,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최종 말씀이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뒤이어 일어나는 부활에 대한 놀랄만한 연결 통로이다. 만약 이렇게 알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 노출 역시 분명히 불가피하게 하실 것이다.

논평

결정해야 하는 것은 신학을 적용하기 위한 가장 일반적인 경우이다. 이 사건의 초점은 목회자의 딜레마이다. 이러한 설명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 목회자가 명백하게 사회 분석을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목회자는 사실적인 설명의 일부로 다루어지는 하나님의 보복이라는 개념을 포함해서 사회의 부정적인 태도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제공한다. 그 목회자는 사회분석 부분에서 설명된 딜레마를 재진술함으로써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학생들과의 좋은 관계와 효과성에 변화 없이 예언자적인 자세와 진정성의 이상을 자신의 상황에 적응시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약간의 변화는 항상 적용에 영향을 미친다.

중요한 사건: 무엇이 공동체인가?

수련회에서 이루었던 이상이 일상적인 현실에서 가능한가? 이 목회자는 이런 질문과 씨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한 부분에는 공동체의 정신이 살아 있고, 끊임없이 빛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현실은 삶 속에서 지속적인 ‘고양됨’을 기대하지 않음을 인정한다. 공동체는 좋은 날들, 나쁜 날들이 있는 개인들과 같다. 성찰이 시작되면서, 현실은 이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현실은 지금 목회자 에게 두 가지 질문과 씨름하도록 한다. 그 질문은 수련회에서 깨달았던 이상이 매일의 삶의 현실에서 가능한가와 무엇이 공동체인가이다. 이러한 잠재력을 보는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 목회자의 자기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들의 내면의 역동성과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공동체를 상기시키기 위해 그 목회자에게 새로운 역할을 제시한다.

실천적인 제안과 질문

적용함으로써 신학을 배우기 위해 경험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적용은 특정한 상황에서 신학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실천과 전략들로 쉽게 혼동될 수 있다. 신학을 적용하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신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적용을 통해 배우는 것의 열쇠는 그 자신의 표현으로 가능한 완벽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 줄거리나 배경이 학생들 자신들의 이전의 신학에 도전할 때, 상황은 적용을 촉구한다. 적용은 학생들이 이것을 재확인하고 재정립하고 또는 그 안에서 새로운 통찰을 드러냄으로써 신학을 배우도록 돕는다. 신학을 적용하는 것은 영적, 도덕적, 의례적, 곧 실천적인 의미들을 강조함으로써 적용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론적인 배경

적용을 통해 신학을 배우기 위한 이론적인 기초는 다음과 같은 과정 사상의 개념에 존재한다. 1) 전망의 중요성 2) 대비의 기능 3) 교리의 발전이다.

전망

전망은 화이트헤드의 개념에서 알아가는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알고 있는 사람의 주관적인 태도라기 보다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상태를 언급하는 것이다. 전망은 실재의 전체가 특정한 계기로 표현되는 방식이다. 모든 경험의 미학적인 특징은 주요한 주제이다. 미학적인 특질이란 자연이나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평가를 의미한다. 이것은 대비적 요소들이 어떻게 만족과 기쁨의 경험을 일관성 있는 전체로 합쳐지는지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

교리의 발견

교리는 일반적인 진실에 대한 명확한 진술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리는 어떤 신학적인 진술을 상징할 수 있다. 이런 명확한 진술은 학습과 삶 모두에 높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설득력은 단순한 그들의 표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선험적인 자각을 한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

CHAPTER 6 그것이 당신이 의미하는 것인가? – 배운 것을 실천하기

해석이론

어떤 사건도 해석되지 않는 사건은 하나도 없다. 모든 인간의 해석에서 순수하게 객관적인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은 다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의미는 어떤 사건들이 그 자체로 실제 그대로인 것 위에 놓여 있는 자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어떤 사건들이 그것을 구성하는 상호 작용들의 맥락에 있는지를 말한다. 비판적인 질문들은 미리 주어진 대답이 없는 질문들이다. 비판적인 질문들은 신학적인 해석을 포함하여 해석의 전형적인 틀에 맞지 않는 경험들에서 나온다. 모순이나 부조화는 극적이거나 극단적일 필요가 없다. 때때로 어떤 사건은 비판적인 질문을 제기하기 보다 대안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해석과 다원주의

해석은 변화를 야기한다. 사례는 한 개인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예를 덧붙이고, 적용은 사람의 지식의 유용성을 확장한다. 반면에 해석은 사람이 이미 아는 것을 변화시킨다. 사건들은 다른 관점으로 보이고, 보이는 것은 정말로 다르다.

실천적인 제안과 질문

목회경험이 신학을 해석하도록 하기 위해, 당신은 그 경험이 가능한 모든 의미를 제시하도록 허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대 해석이론은 해석되지 않는 경험이 없으며 모든 사건은 다중이 의미를 지닌다는 입장을 유지한다. 경험은 개념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질문을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사람들의 신학적인 가치, 성향, 정체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신학을 해석할 수 있다. 경험은 대안적인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그리고 사람들의 이전의 신학이해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의미를 그 설명과 함께 제공함으로써 신학을 해석할 수 있다. 어떤 경험은 그것이 다른 관점에서 해석될 때 다른 의미를 드러낼 수도 있다. 당신의 성찰 모임의 구성에서 다른 관점들을 환영하는가? 해석의 다원주의는 신학의 일치와 그것을 이루는 다양한 방법에 도전한다. 다원주의와 관련해 당신은 어떻게 신학적인 일치를 이루고 유지하도록 노력하는가? 이것이 신학적인 성찰을 위해 중요한가? 사건의 인격적인 의미에 초점을 둔, 해석의 다원주의는 진리에 대해 그리고 특히 종교적인 전통에 대한 정통의 가르침에 질문을 제기한다. 당신의 신학적인 성찰 모임은 정통적인 입장을 대화 상대자로 간주하는가?

이론적인 배경

해석으로 신학을 배우는 것의 기초는 과정 사상에 있는 다음의 관계성에서 유래한다. 1) 주체-객체, 2) 의미-진리, 3) 일자와 다자이다. 근대서구철학은 적어도 데카르트의 시대 이후로, 주체와 객체의 분리로 특징 지어져 왔다. 이러한 분리는 직접적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었지만 데카르트가 논쟁의 여지 없이 신뢰할 만한 지식의 출발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해석은 본질적으로 경험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고, 경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며, 해석은 이것이나 저것의 흥미로운 요소가 포함된다면 미래의 경험이 어떠할지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다.

신학적인 성찰은 성찰하는 제한된 경험의 지평 안에서 같은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고 일치를 알아차리려 노력한다.

CHAPTER 7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배운 것을 실천하기

인격적인 행동

인격적인 행동은 한 사람의 정체성, 자아상, 동기, 그 자신에 대한 생각을 언급한다. 결국 이들 요소들은 그 사람의 행동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인격적인 행동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떠한지와 관련이 있다.

중요한 사건의 인격적인 행동

에이브에 대한 심방결과 빌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통해 이 경험에 접근했고 그들은 이 이야기를 에이브의 상실감으로 해석했다. 아마도 에이브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상실을 다룰 수 있도록 돕는 입장에 빌이 있다고 생각했다. 빌에게 중요한 사건은 인격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빌의 에이브 심방은 기대치 않게 빌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에 대한 질문에 직면하게 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신학적인 성찰의 인격적인 행동인가? 이러한 인격적인 행동이 신학이나 목회의 다른 분야에 함축성이 있는가? 예를 들면, 예전에 빌은 그가 누구인지와 그가 무엇을 하는지 사이의 관련성을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목회적인 행동

목회적인 행동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곧 개인과 소집단, 공동체나 사회와 함께 일하면서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대체적인 기술들을 의미한다. 목회적인 행동은 목회자 개인에게 제한되지 않는다. 제니퍼의 경험에 대해 돌봄 목회 직원들이 공유한 신학적인 성찰은, 각각의 사람이 구별된 방식으로 목회를 실천했을지라도, 직원들 전체의 목회적인 행동을 풍부하게 했다.

면담을 통한 목회적인 행동

자치주에 있는 술과 약물 중독자 회복 센터의 돌봄 목회 인턴들인 레오와 자넷은 이 경험을 성찰 집단에게 제시했다. 이들의 출발점은 경험에 대한 구조적인 환경이었다. 면담은 이들이 성찰에 대한 목회적인 행동이 되었다. 자넷과 레오는 인간에 대한 그들의 신학의 사례로서 신학적인 성찰 집단에 그들의 면담 결과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교 인류학의 기술적인 단어가 아니라 그들이 면담한 사람들의 언어와 감정을 사용했다. 이 행동이 신학적으로 성찰된 새로운 경험인가? 예를 들면, 자넷과 레오는 인간의 인격에 대한 신학을 보여주는 새로운 목회 경험으로서 그들의 면담 결과들을 제시했다.

신학적인 행동

신학적인 행동이란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사람의 신학적인 전망과 선호도를 말한다. 모든 신학적인 성찰은 어느 정도의 신학적인 행동을 포함한다. 학위를 취득하고자 하는 학생들과 같이 폭넓은 신학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신학적인 성찰을 종종 신학적인 행동으로서 수행한다.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행동에 친숙해지면서 그들은 새로운 상황에 더욱 신중하면서도 창조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일기 쓰기를 통한 신학적인 행동

두 번의 심방을 성찰하면서 “친한 사람들의 반가운 방문과 달리, 무엇이 그것들을 목회자로 만드는 것인가? 표면적으로 이러한 행위는 내가 목회자이기 때문에 교역이 된다. 이것이 나의 역할이고 이것이 남이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피하고 싶어 하는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측면이다. 신학적인 행동은 교역의 이해에 영향을 주어야만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 뒤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친한 사람의 반가운 방문과 달리 “무엇이 목회자들의 심방을 하나님을 위한 봉사가 되게 하는가?” 이러한 성찰이 나의 신학을 확신시켜 주었는가? 이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간에 행동은 신학적인 성찰에서 직접적으로 나와야 한다. 실천적인 구체화로서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동은 프락시스라고 부르고, 습관과 충동과 구별된다.

행동과 플락시스

습관은 반복적인, 비성찰적인 행위이다. 어떤 자극이 발생할 때, 예상 가능한 반응이 뒤따른다. 그 상황에 대한 신중한 성찰이 없다. 이것은 습관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합리성이란 그것이 단순히 당연한 것으로 친숙할 수도 있다. 충동은 자발적인, 비성찰적인 행위이다. 특정한 자극이 발생할 때, 어떤 반응이든 반응이 뒤따를 수 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한 근거는 이후에 합리화나 정당화를 통해 제공된다. 충동은 비지성적인 태도이거나 반지성적인 태도가 바닥에 있다. 프락시스는 행동과 실천적인 관심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것은 직접적으로 성찰에서 나온다. 프락시스는 행동으로 나타난 성찰이다. 성찰 그 자체는 미리 결정된 생각이나 사후의 합리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 상황에 따라 구체화된다. 프락시스는 사람이나 집단이 그들의 습관적인 생각을 일괄하여 다루고 그들의 충동적인 반응을 통제하는 것을 요구한다. 다양하고 정직한 구성원들로 구성된 성찰집단은 이것을 이루는데 매우 귀중한 자산이다. 자원 봉사자인가, 교우인가? 최근에 평신도 선교회원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위원회는 지난번 회의에서 위임받아 생기게 되었다. 우리교회의 교역에 위와 같이 추가된 것을 어떻게 계획할 것인가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사회적인 분석이 필수적이다. 과거에는 평신도 교우들의 조직이 있었다. 이 위원회에서 특별한 역할이란, 어떻게 자원 봉사자와 교우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할 것인가 이다. 핵심 단어는 교우이다. 내가 이해하듯이, 교우는 교회와의 더 깊은 관계를 원한다. 교회론은 교회란 다양한 봉사를 통해 구성된 공동체이다. 교회에서 평신도 교우를 위한 프로그램을 설립할 가능성으로 들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그램이 무엇이고 또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 전체적인 공동체를 설득하고 교육하는데 관심이 있다. 매우 중요한 요소는 그들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영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질문을 하고 그것들을 명백하게 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많은 모험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목회 조직 안에 존재하는 친숙한 문제를 제시한다. 이 사례를 제시한 목회자는 평신도 교우들에게 매우 고마워하며 그들을 지지한다. 심층 분석은 이것들이 단순히 목회자의 선입견인지, 혹은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묘사인지 보여줄 것이다. 이 두 경우에서, 가치 있는 정보는 성찰의 부분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목회자의 간략한 신학적인 성찰은 자원봉사자와 교우들 사이의 구분과 핵심 문제들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간다. 이 일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예를 들면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이것은 교우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요청한다. 위원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목회자에게 명백한 실천적인 관심이 주어진다면, 이렇게 성찰이 목회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예를 들면, 대부분 공동체에게 그 프로그램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실제적이고 적절한 행동은 신학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목회자의 결론은 신학적인 행동에 대한 적절한 요약이다. 많은 질문과 설명, 모험이 시도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적인 제안과 질

다음의 사항들은 신학적인 성찰의 행동에 관한 이 장의 자료들을 요약한다. 성찰 과정의 결과가 행동으로 되지 않는 다면 신학적인 성찰은 완전하지 않다.프락시스는 특정한 환경에서 유래되고 똑 같은 특정한 상황이란 전망에서 실천되는 성찰의 구현이다. 목회 계획은 생각을 행동으로 전환시키는 핵심 기술이다.인격적인 행동은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 자아상, 동기들과 관련시키면서 성찰 에서 결론을 내린다. 신학적인 행동은 신학적인 성찰에 기초한 정보와 이해에 대한 재정립이다. 목회적인 행동은 목회의 기능들 중에서 신학적인 성찰의 행동적 표현이다.

이론적인 배경

신학적인 성찰의 행동은 다음과 같은 과정 사상의 주요한 세 가지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1) 양극적인 구조의 실재, 2) 성찰의 기능, 3) 세상의 창조적인 진보이다.정신과 물질의 구분은 많은 형태가 있다. 육체와 영혼, 자연과 초자연, 이성과 감정, 사간과 영원이다. 이러한 물리적인 극과 정신적인 극의 상호작용은 성찰의 기능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논의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성찰은 행동을 지향하고 행동은 성찰을 야기한다. 과정 사상에서 행동은 항상 구체화된 사고이다. 사고는 항상 행동의 발단이다. 신학적인 성찰은 새롭고 더 나은 삶을 향한 성찰적인 추구 안에 정확하게 위치하고 있다. 조화와 아름다움은 분명히 세상에 있는 유일한 실재들이 아니다. 또한 부조화와 추함이 존재한다. 이러한 명칭들은 주어진 목표를 만족시키는 데 있어 잘못된 요소들이 결합되었거나 혹은 결함 있는 방법으로 결합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학적 성찰 그 자체는 예술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완성된 사건과의 창조적인 상호작용이다. 그리고 내적인 조화와 진리가 출현하도록 고쳐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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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롤란트 베인턴 저)

신학서적 리뷰 2020. 6. 28. 07:24 Posted by forest38

종교개혁사(롤란트 베인턴 저)

홍치모/이훈영 역(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 내용 요약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의 말기, 각 분야에서 큰 변란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발생하였다. 르네상스는 기독교적 고대보다는 고전적 고대에 대한 열심을 표방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출현한 민족주의는 신성로마제국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교황의 신권체제를 약화시켰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종교의 부흥운동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공격의 표적은 오직 교황의 신권 체제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그의 노력은 중세 초기의 교회를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할 경우 복원되어야 하는 교회의 본래 모습은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나 심지어 바울서신과 복음서에 나오는 모습이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근본적 논조는 타락하지 않은 원초적 기독교의 회복이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 국가의 쇄신자였다.

그러나 교회는 중세기간 동안의 모든 모순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중 면죄부는 교회 부패의 절정이었다. 잉여 공로는 하나님의 보물창고에 저장되어 있는데 교황은 이를 자기 죄의 값을 치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자유로이 전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교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민중을 착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 루터의 신앙 ]

가톨릭적 해석자들은 종교개혁은 중세 후기의 병폐들의 교정이 아니라 연장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은 규율을 부활시키는 대신 제거한 것인데 예컨대 성직자들의 축첩을 성직자들의 결혼으로 대체시켰다는 것이다. 다른 가톨릭 역사가들은 개신교를 탐욕과 정욕을 근절하려는 정직한 시도로 간주했지만 그 열심이 지나친 나머지 교권에 대한 불복종으로 끝났다고 보았다.

루터가 철학은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다고 항상 변함없이 주장한 게 사실이지만 종교개혁은 후기 스콜라주의의 철학과 이성에 대한 경시 사상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공격의 표적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병폐가 아니라 가톨릭교 그 자체가 복음에 대한 병폐로서 그의 공격의 표적이었던 것이다. 그의 판단으로는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성을 너무 낮게 생각하고 인간의 가치와 잠재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교회는 신자들이 지나치게 만족감에 빠지거나 은총의 수단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주눅들이 않도록 하기 위해 공포심과 소망을 번갈아 가면서 이용했다. 절망에 빠질 정도로 섬뜩한 색깔로 지옥을 묘사한 다음에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연옥이 소개되곤 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층인데 낙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서 정화작용을 계속하는 장소였다.

루터는 그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아 인간의 본성 자체가 너무 타락해 있어서 근본적인 개조를 필요로 한다는 이유 때문에 범죄란 개별적으로 다룰 수 없고 또한 아무리 훌륭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 특수한 경우가 요구하는 수준에는 미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넘친다거나 다른 데 전용이 가능한 선행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루터가 그 신학을 공부하였던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자신에게 법이 되신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운명은 불확정적이며 하나님의 결정은 종잡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인간의 운명은 선악간에 미리 예정되었지만 인간은 그 향방을 알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 정죄된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정죄된 것이다. 구원된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하든 구원을 받는다.

루터는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무죄하시나 인간은 추악하다. 하나님은 강하시지만 인간은 연약하다. 그에 대한 답변은 그는 죄없는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이로써 우리 모두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고 인간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할 만큼 인간과의 일체감을 가지실 정도로 죄 많은 인류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는 것이다.

루터는 성서에 몰두하였으며 일천년 동안 그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던 사람들 중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용서의 기적이 갖는 의미를 체험하였으며 믿음과 신뢰, 오직 이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이야 말로 루터가 그토록 이성을 비하했던 이유이며, 이성을 인간의 마음의 척도로 이해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 루터의 개혁 ]

루터는 가톨릭 신학의 한 유형인 어거스틴주의와 또 다른 유형인 토마스주의를 서로 싸움 붙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가정했지만 그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부여한 능력으로 자기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 이성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루터는 교황과 교회회의의 무오성을 전부 부정하였다. 공로저축설의 경우는 교회법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결국 교회법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권위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중세 후기의 분파들로부터 종말론과 예정론이라는 두 파괴적인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보강되었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지칭하며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것이다.

다른 사상으로서 진정한 교회는 오직 예정된 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상이 있는데 그 사상은 오직 예정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방법이 있을 경우에만 위협적이 되는데 루터는 선택된 자들로 구성된 교회는 사람들에 의해 멸시와 거부를 당하고 세상에서 박해 받고 은폐될 수 밖에 없다는 점 이외에는 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가톨릭의 부패를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한 루터의 개혁은 점차 경직된 성서주의(Biblicism)의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에게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성육신, 십자가, 부활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의미하였다. 이 계시는 시간적으로 예수의 역사적 생애에 의해 제약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존하시며 또한 인간들의 마음 속에 항상 임재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의 현현은 성육신을 통해서였다.

미사의 경우 루터는 집요하게 이는 희생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성찬의 원어는 유카리스트(eucharist)인데 이는 곧 감사를 의미하며 그 원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루터는 화체설을 부정했는데 떡과 포도주가 하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하다는 것을 부정했으나 실질적이고 육체적인 임재는 부정하지 않았다.

중세 성기 이래로 성례의 숫자는 혼인, 신품, 종부, 견진, 고해, 미사, 세례의 7가지로 정해졌다. 루터는 성찬과 세례의 두 가지로 줄였는데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불가시적 은총의 외적 표지이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루터는 국가는 그 자체의 영역내에서는 교회의 간섭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상은 중세에 독일 황제들이 교황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지지했고 단테가 유창한 필치로 옹호했던 교회와 국가간의 병립이었다. 그의 실천가능 여부는 입증되지 않았다. 루터는 황제교황주의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 제네바 개혁교회: 칼빈주의 ]

칼빈주의는 불어권 스위스인 제네바에서 시작되었는데 종교에 외형적 수단을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색하였고 성상이 거부되었으며 음악은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신성공동체의 개념을 좀 더 대규모로 이해했으며 성찬을 영적 교제의 통로로 이해한 점은 루터파와 비슷했고 또한 칼빈파의 시편 찬송은 루터파의 성가곡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를 확신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재세례파의 교회관과, 좀 더 뚜렷한 것으로 엄격한 치리를 요구하는 그들의 태도는 칼빈주의에게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

칼빈주의는 활동적이었다. 왜냐하면 칼빈주의자들은 행동해야 할 필요성과 행동 역량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 화약 이후에는 안정된 지위를 누리게 되면서 신앙적 긴장이 풀려 버린 루터파나 또한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나 간신히 살아남는데 급급했던 재세례파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었다. 칼빈주의는 앞서의 사상들을 취합하기도 하고 독자적인 주장도 했다.

그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수세기 동안 개신교의 상당한 지역에서 마치 가톨릭 세계에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Sentences가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Thomas Aquinas의 Summa 조차 이에 비견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장황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의 필체는 간결하고 종합적이고 명쾌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신론, 인간론, 교회론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칼빈주의가 개신교이 가장 활발한 교파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칼빈주의의 추진력은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낙관론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칼빈의 인간관은 루터파나 재세례파에 못지않게 어둡고, 심지어 더욱 파괴적인 감이 있다. 그는 인간을 타락된 존재로 묘사한다.

비록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 반드시 돼지우리같이 될 필연적 이유는 없지만 그것은 결코 낙원이 될 수 없다. 재세례파는 그와 유사한 분석으로부터 교회가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논리를 끌어냈고 루터는 단지 체념섞인 참여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사회 영역내에서 활동하도록 단호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용기에는 ‘예정론’이라는 낙관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서의 위대한 구절은 “네 죄가 사함을 입었느니라”라면 칼빈에게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였다. 칼빈과 루터는 모두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압도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만 루터는 이를 사죄의 기적을 강조하는데 이용했고 칼빈은 신적 계획의 견고성에 대한 확신의 원천으로 이해했다. 그 결과 기독교강요에서는 이신칭의 항목에 앞서 하나님의 주권 항목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주님의 신속한 재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최후의 대환난을 불명확한 미래의 일로 미루었다. 루터는 역상의 종말이 자신의 죽음 이전에 올 것을 열심히 기대하였고 재세례파는 종종 날짜를 정하곤 했다. 그러나 칼빈은 주님의 위대하고 임박한 날을 지상에서 실현될 신성공동체의 꿈으로 대체시켰다. 그 건립은 인간 곧 하나님이 선택한 도구인 선민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위대한 명령을 지키는 데 실패했고 하나님은 그들 대신 새로운 이스라엘인 기독교회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그 교회 역시 변절하였고 이제는 정선된 소수의 무리들, 즉 선민들에게만 소명이 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다시 한번 선택된 자들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지에 관한 방법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루터는 이를 아는 듯이 행세하지 않았다. 뮌처는 영으로 안다고 했고, 쯔빙글리는 믿음으로 안다고 했으며, 재세례파들은 생활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알 길은 없다고 하면서 재세례파처럼 가라지는 없이 오직 밀만 있는 교회를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쯔빙글리의 기준과 재세례파의 기준을 받아들였다. 그는 여기에 세번째 기준(성례전에의 참여)을 덧붙였는데, 이로써 루터와 심지어 가톨릭측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칼빈이 생각하기에 성례전은 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의 통로이자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교제의 표현이다. 인간의 주된 목적은 자기를 구원하거나 그의 구원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어쨌든 인간은 이미 구원받았든지 버림받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므로 이를 놓고 걱정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이었다. 칼빈으로서는 선택 교리는 형언할 수 없는 위안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체의 근심을 제거하고 인간을 자신에 대한 염려로부터 해방하여 주권자 하나님을 위해 불굴의 봉사를 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 자유신령파 ]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 유형들과는 상이한 또 다른 형태를 나았는데 그 특징은 신비주의와 합리주의였다.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중요성은 후대에 엄청나게 유행했던 사상들을 선도했다는데 있다.

이들 자유신령파가 지지했던 신비주의와 합리주의는 모두 기독교 전통속에 뿌리박은 것으로서 하나같이 성과가 크면서도 동시에 탈선가능성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신비주의를 단순히 따스한 개인적 신앙 체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생명력 있는 기독교의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좀더 전문적인 견지에서 신성과 인성이 합일을 목표로 삼는 하나의 종교 유형으로 볼 경우에는 기독교를 강화하는 동시에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공존하게 된다. 인간이 신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개념은 베드로후서에서 찾아볼 수 있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고 말한 한 이교 시인의 말을 호의적으로 인용할 수 있었다.

기욤포스텔은 고대 동방의 비전의 신비적 지식의 비밀을 구명하려는 열망으로 히브리어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행의 도중에 외경이 야고보 복음서를 발견했고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아람어를 익혔다. 모든 진리의 통합과 모든 신앙의 궁극적 조화를 꾀하는 르네상스적 신앙은 그로 하여금 모든 종교의 일치를 이룩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당시에 이단으로 의심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이 후대에 끼친 엄청난 영향으로 인해서 신학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폴란드는 반삼위일체론과 재세례주의가 다양하게 조합된 집단들의 일대 거점이 되었다. 아 나라에거 일어난 운동은 파우스투스 소치누스 또는 소지니의 이름을 붙여 소지니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분명히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폴란드 여왕보나 스포르차의 호의로 이탈리아인들의 이주가 촉진되었다.

자유신령파는 비록 조직된 운동의 형태로는 거의 남긴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탐구, 신비적 경건, 신앙의 자유 등에서 다른 개신교 단체들에 그 나름의 각인을 남겼다. 계몽주의 시대는 그들을 거의 자기들의 사상적 선배로 인정하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분명히 그들의 신세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2. 리뷰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개념과는 다르게 다양한 형태의 종교개혁이 있었고 이러한 다양성은 현대 신학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패러다임들이 하나님의 복음과 어떻게 연결되고 또한 연결시켜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개혁을 어떻게 진행했으며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그들의 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선 종교개혁의 양대 거두라고 할 수 있는 루터파와 칼빈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면밀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루터가 처음에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잘못된 신앙을 교정하려는 것으로서 일이 그처럼 커지게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루터는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주이자들과 맞서야 했고 한편으로는 급진주의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자신들을 이미 ‘창세전부터 예정되어 있는’ 신도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보다 더 과감한 개혁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면서 이신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사랑의 행함이나 거룩한 삶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는 비난이 있는데 칼빈주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더불어 거룩한 생활을 통한 성화를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결코 편향된 가르침이 아니라 균형 잡힌 사상임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성화에의 강조는 그가 주장하는 ‘예정론’과는 논리적으로 배치되는 부분이 있어서 신학적으로 더 깊이 연구해야 하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가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성령에 의지하고 기독교적 확신으로 과감히 개혁하고 고쳐 나간 것은 참으로 위대한 공헌이라고 봐야 한다. 칼빈주의는 현실에 더욱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특별히 역사적으로는 소수파로 분류되고 있는 재세례파와 신비주의 등이 후대에 미친 엄청난 영향을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데 이들을 통해서 신학적 사상이 풍부해졌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수많은 이단교파가 이러한 이론 들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결국 이러한 선별적 능력은 이러한 좋은 서적을 광범위하게 탐독하여 지식을 함양해야 하는 것이다.

3. 생각의 충돌

저자인 롤란드 베인튼(R.H.Bainton)의 종교개혁사는 자신이 수십년간 강의한 것을 압축한 것으로 종교개혁의 역사가 녹아 있다. 그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해주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이번 강좌에서 중시하고 있는 루터파와 칼빈주의의 심화과정이나 비교 등은 상대적으로 많이 취급하고 있지 않아서 좀 아쉬운 감이 있다. 때문에 다른 교재로 보충을 하여야 했다.

역사적으로 루터파와 칼빈파가 대립이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루터의 입장에서는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당시 로마 가톨릭의 부패에 정면으로 맞섰던 것으로서 그러한 실제 행동의 와중에서 교리적으로 후대에 비판을 받는 부분은 어떻게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구원의 믿음에서 나온다는 그의 탁월한 안목이나 목숨을 건 소신 등을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칼빈주의는 교회와 학교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분야에 걸친 개혁운동이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부의 균등한 분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부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칼빈의 ‘직업소명설’도 이러한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입장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칼빈이 얘기하는 ‘섭리’란 결정론이나 운명론이 아닌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허용하고 이 자유와 책임과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는 것인데 이 이론은 결국 신도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끊임없이 성화과정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 과정은 죽기 직전까지라고 하는 조직신학의 논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독교강요는 오늘날의 신학으로 보아도 명쾌하고 탁월한 것이 틀림 없다. 아마도 그 때 당시로서는 참신한 신학이론이었을 텐데 단숨에 명쾌하게 신학 이론을 정립하고 제도적으로 완비된 교회조직의 이론적인 기반이 되었다.

그가 운영한 제네바 아카데미는 종교개혁 사상 특히 개혁교회 전통을 온 유럽으로 전파하는 요람이었는데 유럽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제네바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배운 개혁교회의 이상을 실현하였으며, 이를 통해 개혁교회 전통은 명실상부한 국제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 아카데미의 두드러진 특징중 하나가 인문학과 교양에 대한 강조였다고 한다. 특별계시뿐 아니라 일반계시도 중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4. 풀리지 않는 의문

로마가톨릭의 부패를 극복하고 새로이 탄생한 개혁주의적 신학이 여전히 분파 주의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일러니이다. 복음전파를 아직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내에 있는 갈등이다. 정통교단내에서도 통일되지 않는 수많은 논쟁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외적으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고민 해야 한다. 이 문제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개인 신앙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회의감하고도 연결이 된다. 교회는 개인 신앙의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공동체의 구원’을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종교개혁사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현대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많은 묵상과 학습, 그리고 실천적 삶까지 수반되어야 한다.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 스스로 부족한 점을 채우고 행실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지 자격이나 소명부터 점검해본 뒤 실천해야 한다.

또한 신학이론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칼빈은 ‘예정론’을 주장하면서도 또한 실천적인 ‘성화과정’을 강조한다. 교수님께서 강의에서도 설명 하신 바 같이 이것이 변증법적인 논리이며 결정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난해하다. 로마서 7장 8장을 읽다가 느끼던 논리의 비약을 다시 여기서도 마주하게 된다. 어떤 연결고리가 있어야 이 의문이 풀리는가.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결국 완성되지 않지만 인간적인 노력을 끝까지 기울여야 한다는 논리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결코 달성할 수 없지만 죽을 때까지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서 철학과 신학을 좀 더 공부해야 한다는 필요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고 현대 신학은 어거스틴에 대한 주석이라는 말이 있다. 철학과 신학이 플라톤과 어거스틴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는 말인 동시에 또 그들의 영향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일 것이고 또한 플라톤과 어거스틴을 모르고는 철학도, 신학도 기반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종교개혁사를 배우면서 어거스틴을 연구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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