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6세기 종교 개혁의 역사적 사상적 배경을 약술하라.
16세기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 정화운동일 뿐 아니라 당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사회ㆍ정치ㆍ문화적 변화와 함께 총체적으로 일어난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한다. 종교개혁의 배경으로는 문화적, 철학적 영향 등 6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14~15세기 르네상스는 중세시대에 억압되었던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주의를 강조했다. 인문 주의자들은 그리스ㆍ로마 시대의 철학과 예술을 연구했고, 교회의 부패와 사치를 공격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고전보다는 성경과 교부에게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연구했고, 교회의 부패와 사치보다 신학적 부패를 더 비판했다는 점이 인문주의자들과 다르다. 피상적으로 보면 르네상스의 인본주의가 신위가 아닌 인위를 조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르네상스의 인본주의가 한 측면에서는 중세종교의 부조리를 고발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촉발하였다. 철학적으로는 후기 스콜라주의(유명론)의 영향이 있었다. 오캄의 견해에 따르면 지식은 무엇 보다도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지식, 즉 경험적인 지식이다. 오캄은 자연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철학과 과학을 자율성이 영역에 국한시켰기 때문에 성경을 토대로 신학을 재건해야 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은 오직 믿음과 성경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의 성직구조와 성례에 입각한 구원론을 공격했다. 루터는 유명론에 큰 영향을 받아서 한 때 “나는 오캄학파 출신이다”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교회 일치와 개혁을 위해 공의회 운동이 일어났는데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권과 왕권이 충돌 하였다. 교황청은 분열되었다.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8)는 교회를 통일시키는 데는 성공 했으나 교회의 개혁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교회의 부패에 절망한 신도들중에는 신비주의에 경도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신비주의는 교권을 벗어나 하나님과 개인의 직접적인 만남과 접촉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성서를 직접 번역해서 배포된 영향도 컸다. 이와 함께 십자군 운동 이후 교황권의 권한이 약화된 가운데 유럽의 각 국가들 안에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루터는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독일 영주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이러한 민족주의 경향이 아니었다면 루터는 개혁을 이루기 전에 처형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14~15세기에는 과학이 발달하고 도시가 번창했다. 항해술과 과학의 발달로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사람들의 시야가 넓어졌다. 종교 개혁사상이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적 발전, 특히 인쇄술의 발달이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인쇄술이 성경의 보급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 큰 역할을 하였다. 구텐베르크 인쇄기의 최초의 중요한 생산이 바로 제롬의 ‘불가타역’(Latin Vulgata) 성경이었다고 한다.
2. 종교개혁의 5가지 종류를 약술하라.
16세기 종교개혁은 단일한 현상이 아니었고 유럽의 전 지역에서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대체로 5가지 종류로 나타나며 다음과 같다. 첫째, 마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으로 퍼져나가면서 루터교회를 형성했다. 그러나 북유럽의 개신교의 존재유무와는 상관없이 민족주의 세력이 너무 강력해서 가톨릭 경건의 많은 부분이 살아 남았다. 그 바탕은 루터파였지만 교회예배는 여전히 미사로 불렸다. 둘째, 스위스의 츠빙글리와 칼뱅을 따르는 개혁파는 스위스를 비롯하여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칼뱅주의가 가장 잘 뿌리 박힌 국가이다. 셋째, 영국에서는 헨리 8세(1491-1547)가 수장령을 발표하고 성공회를 영국의 국교로 정하였다. 그 후 영국 식민지에는 성공회가 전파되었다.
이상의 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 로마 가톨릭교회는 다 국가교회였고 유아세례를 실시했다. 넷째 재세례파(Anabaptist) 혹은 과격파 종교개혁(Radical Reformation) 운동은 국가의 교회 간섭과 유아세례를 반대하였고, 가톨릭교회와 주류 개신교회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다섯째, 로마 가톨릭 안에서는 종교개혁운동에 대응하고 자체 개혁을 하려는 반종교개혁운동(counter-reformation)이 일어났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 도도히 흐르는 탁류는 막을 길이 없었다. 개혁파는 스코틀 랜드에서 장로교회, 영국에서는 회중교회가 되었다. 이들은 북미대륙, 호주로 건너가서 그곳에 장로교회를 세웠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국, 호주, 캐나다를 통해 전파되었다. 개혁교회는 유럽에서는 주로 개혁교회(Reformed)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장로교회(Presbyterian)라고 부른다.
3. 종교개혁자 루터가 재발견한 복음은 무엇이었는가?
루터는 1521년의 어느 날 수도원의 탑에서 회심을 체험하는 ‘탑의 경험’(trumerlebnis)을 한다. 그는 로마서 1:17을 통해 구원은 공로가 아니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깨달았다. 루터 자신의 말처럼 탑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루터는 한갖 수도원의 수도사로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루터는 기독교 신학이 성립된 이래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용서의 기적이 갖는 의미를 체험하였다. 루터는 이성은 인간의 마음의 척도일 뿐이라고 규정하고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게 된다.
루터 신학의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루터가 재발견한 복음(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성경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해석을 했다. 그는 복음을 잘 표현하는 성경이 그렇지 못한 성경보다 권위가 높다고 보았다. 그래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선호했고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같은 성경”이라고 했다. 루터는 복음이 교회를 창조했기 때문에 성경은 전통보다, 교회보다, 신학자보다 더 권위가 높다고 보았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이 교회의 전통에 속한 것이기에 교회의 교도권(敎道權, magistrium, 가르치는 권한)을 옹호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은 스스로가 해석자이며, 성경 해석은 오직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이었다. 그는 율법의 역할을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 율법은 악을 방지하고 질서를 제공하는 시민법의 역할을 한다. 둘째, 율법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신학적인 역할을 한다. 율법은 본래 선한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사용하시면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지만, 마귀가 율법을 사용하면 절망과 증오로 이끌어 간다. 율법의 공격을 통해 죄의 공포를 경험한 사람만이 복음의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양 측면이며 이러한 그의 이론은 칼뱅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4. 루터 신학에 있어 복음주의 신학을 구성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ator)”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약술하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전가된 의를 통해 의롭게 인정을 받지만 죄성 때문에 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실존은 죄인이라는 의미이다. 루터는 어거스틴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루터는 그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아 인간의 본성 자체가 너무나 타락되어 있어서 근본적인 개조를 필요로 한다는 이유 때문에 범죄란 개별적으로 다룰 수 없고, 또한 아무리 훌륭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 특수한 경우가 요구하는 수준에는 미달되는 것으로 보았다.
루터는 인간의 의지는 죄로 구부러져 있어서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게 인정받는 길(칭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의가 믿음으로 전가될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 최고의 공로가 믿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는 것도 인간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전가된 의를 통해 의롭게 되기 때문에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 이라고 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지만 실존은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5. 루터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이중적 형태로서의 율법과 복음에 대하여 약술하라
루터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이었다. 그는 율법의 역할을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 율법은 악을 방지하고 질서를 제공하는 시민법의 역할을 한다. 둘째, 율법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신학적인 역할을 한다. 율법은 본래 선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율법과 마귀가 사용하는 율법은 같을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여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는데 반해 마귀의 율법은 우리를 스올로 인도한다. 율법의 공격을 통해 죄의 공포를 경험한 사람만이 복음의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나 칼뱅의 기독교강요에서 나오는 내용도 루터의 견해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전통이라고 보고 성경을 전통의 상위개면으로 올려놓은 데 이어서 그 성경 연구를 통해서 율법과 복음의 정의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사건을 목격하면서부터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였었는데 그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 중 하나로서 율법과 복음으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6. 루터와 칼뱅의 두 왕국( the Two Kingdoms) 사상은 무엇이며 각각 차이점에 대하여 약술하라
루터는 국가와 교회가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가는 율법의 시민적 기능에 속하며 교회는 복음에 속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국가를 주신 것은 악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신자들은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시민적 통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복음의 왕국은 국가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 루터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모든 형태의 혁명주의자들을 경계하였다. 그는 국가조차도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천년왕국론자들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무기는 칼이 아니라 십자가라고 주장하였다.
칼뱅도 루터처럼 두 왕국설을 지지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구세주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주권과 교회의 주권을 다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칼뱅은 국가 권력이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통치를 할 때에 성도와 교회는 국가권력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신앙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을 강요할 때는 교회가 저항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대표자를 통해서 질서 있게 저항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의 두왕국사상은 이것이 잘 못 발전되면 세상과 교회가 분리되는 결과를 낳는다. 두 왕국이 완전히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크리스천은 세속역사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두 왕국 사상은 성경에 기반해서 해석해야 하고 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명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7. 루터의 복음주의 신학은 설교의 신학과 함께 중세의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과 대조되는 “십자가의 신학(Theolgia Crucis)”을 주제로 한다. 루터가 주장한 설교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약술하라.
마르틴 루터는 무엇보다 자신의 소명을 설교자로 인식하였고 설교를 통해 종교개혁운동을 전개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교회를 “입의 집”이라고 할 만큼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루터에게 설교란 하나님의 음성이요 계시였고, 설교를 통해 청중은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한 강해설교요 주석 설교였다. 당대 그의 설교방식은 매우 혁명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설교에 대한 연구는 그의 신학과 사상의 다른 영역에 비해 그리 많은 연구물이 나오지 못한 실정이다.
한편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의 사변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영광의 신학이 타락한 이성의 사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십자가의 신학은 십자가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계시의 신학이다. 계시는 십자가에서 드러나므로 간접적이며 십자가 안에 숨겨져 있다. 계시는 피조 질서가 아니라 그리 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만 인식된다. 즉 누구나 쉽게 하나님을 보았고, 발견했다고 말한 모든 것을 거짓이었으며 우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영광’이요 자비라고 고백한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이상한 일(opus alienum Dei)’를 통해 인간이 절망 가운데 있음을 보게 한다.
8. 루터 신학에 있어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본래의 일(opus proprium)은 무엇이며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이상한 일(opus alienum)은 각각 무엇이며 그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인간이 겸손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는 것이므로, 그는 스스로 홀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설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그의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는데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 그의 자비가 작동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루터는 이것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시는 일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opus alienum (“하나님의 이상한 일”)과 opus proprium(“하나님의 올바른 일”)이 그것인데 이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이것은 결국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에 비추어 죄를 깨달아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한 뒤 은혜를 통한 구원 사역을 이루신다는 개념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으려면 반드시 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opus alienum Dei의 근본 의도는 사람이 전제 조건을 수행 할 수 있게 하여 그의 이상한 일에 숨겨져 있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가 있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불의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옮겨야 한다면, 먼저 자신의 무가치 함과 자신의 장치에 맡겨진 상황의 허무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opus alienum의 자비로운 의도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이것은 믿음으로만 인식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가혹한 판단을 내려서 그를 죄인으로 만들고 그에 따라 이상한 일을 정죄하지만 이로 인해 사람은 자비와 은혜를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은 opus proprium을 실행한다.
9. 로마 가톨릭과 스콜라주의의 성서관과 달리 루터가 성경을 판단하는 규준으로 삼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루터 신학의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성경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해석을 했다. 그는 복음을 잘 표현하는 성경이 그렇지 못한 성경보다 권위가 높다고 보았는다. 그래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선호했고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같은 성경”이라고 했다.루터는 복음이 교회를 창조했기 때문에 성경은 전통보다, 교회보다, 신학자보다 더 권위가 높다고 보았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이 교회의 전통에 속한 것이기에 교회의 교도권(敎道權, magistrium, 가르치는 권한)을 옹호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은 스스로가 해석자이며, 성경 해석은 오직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이었다. 그는 율법의 역할을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 율법은 악을 방지하고 질서를 제공하는 시민법의 역할을 한다. 둘째, 율법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신학적인 역할을 한다. 율법은 본래 선한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사용하시면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지만, 마귀가 율법을 사용하면 절망과 하나님에 대한 증오로 이끌어 간다. 율법의 공격을 통해 죄의 공포를 경험한 사람만이 복음의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양 측면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은 종교개혁의 5대원리를 도출해낸다. 즉, 오직성경(Sola Scriptur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가 그것이다.
10. 루터는 전승을 성서와 동등한 위치에 놓는 중세기 교회의 입장에 반대하여 오직 성서로만 (sola Scriptura)을 주장하였다. 루터의 말씀 이해에 대하여 약술하라.
루터는 성서를 전승보다 우위에 두는 이론을 전개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구원을 가르치는 권위는 성경과 거룩한 전승(聖傳)이라고 주장했으며,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로마 가톨릭은 성경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믿음과 실천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권위는 교황이 아니고 성경이라고 보았는데, 이 말은 성경 외에 다른 책이 필요 없다거나 성직자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최종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했지만,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을 자국 언어로 번역해서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가톨릭교회는 라틴어로 미사를 진행했고 평신도들은 예배에서 소외되었다. 종교개혁가들은 예배를 제 1차 개혁대상으로 삼았다. 예배 때에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했고, 미사보다는 말씀 설교를 강조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떡과 잔을 숭배하게 만든다고 해서 화체설을 거부하였고, 반복 희생제사 이론도 거부했다.
11.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뱅이 성서 해석의 해석학적 원리로 내세우는 것은 무엇인가?
루터는 인간이 선한 행위나 면죄부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즉 ‘믿음을 통한 은총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야 말로 루터 사상의 핵심이고 성서해석의 원리이다.
루터가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프로테스탄트는 사랑의 행함이나 거룩한 삶에 소홀하다는 비판에 대해 칼뱅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더불어 거룩한 생활을 통한 성화를 강조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결코 편향된 가르침이 아니라 균형잡힌 사상임을 부각시켰다. 칼뱅은 ‘성화의 신학자’라고 불릴 만큼 성서해석에 있어서 ‘성화’를 기준으로 삼는다.
12. 루터가 경전을 경전으로서 판가름하는 것으로 얘기하는 경전 속의 경전(Kanon im Kanon)은 무엇인가?
"경전속의 경전"이라는 표현은 19 세기에 처음 사용이 되었지만 실제 개념은 이미 18세기에 나타나 있다. 20 세기에 Ernst Käsemann과 Siegfried Schulz는 성서에 대한 그러한 이해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였는데 이들은 척도가 되는 경전은 바로 '신성'이라는 것이다. 바로 경전 안에 있는 신성이 그 기준이 된다는 이론이다. 루터에 의하면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가장 분명히 나타낸 로마서나 갈라디아서가 바로 Kanon im Kanon 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루터에게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신앙의 삶으로 인도하는 매일의 안내서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완전한 계시의 증언이다.
반면에 루터는 야고보서 등에 대해서는 혹평을 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믿음으로 의를 이룬다’는 이론을 강조하려다 보니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서와는 견해가 맞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놓고 비교해보면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인 것을 깨닫게 된다. 루터의 견해는 결국 그 발전적 계승자인 칼뱅에 의해서 행위를 강조하는 성화론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한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룰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13.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는 구원론을 전제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크리스도인의 생활 윤리를 만인제사장직으로 설명하라.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는 ‘만인제사장’ 교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루터는 이 교리를 통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개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존중하도록 만들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사제가 제사장이고 일반 교인들은 사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제사장이라고 가르쳤다. 전에는 사제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로 여겼으나, 루터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이라고 가르쳤다. 전에는 교회에서 성만찬을 할 때 사제들만 빵과 포도주를 취하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빵만 주었는데 이제는 모든 개인에게 빵과 포도주 모두를 분배하였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기능은 다를지라도 신분에 있어서는 똑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만인제사장 교리는 그의 3대 논문중 하나인 ‘독일 귀족에게 고함(1520.8)에 나타나 있는 사상인데 이 논문에서 그는 교황이 군림하는 것이나 교회가 국가권력 위에 군림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하였던 것인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중세의 집단적 세계관이 근대의 개인적 세계관으로 뒤바뀌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교리는 칼뱅에 이르러 그리스도인의 윤리라는 개념으로 발전되어 진다.
14. 루터가 예배의식의 개혁에 이비지한 점을 약술하라.
루터가 예배의식의 개혁에 이바지한 바는 무엇보다도 이신칭의에 비추어 성례전을 간소화한데에 있다. 또한 그는 모든 개교회가 스스로 판단하여 교역자와 교사들을 임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성서에 의해 확정되었고 증명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독일어로된 미사와 예배규범을 주장하였는데 미사는 제사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부터 죄사함을 받는 은혜라고 하였다. 루터는 교회가 성례전도 아니고 교직 제도도 아니고 '성도의 교제'라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하는 표지(signs)는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특징은 '사도적 계승'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고 듣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또한 '만인제사장설'(universal priesthood)을 주장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사람을 불러 목회사역을 맡기시는데 여기서 직분이 생기는 것이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7개 성례전에서 오직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로 인정했다. 그는 성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말씀), 표지(signs), 믿음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세례와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고, 물과 잔과 떡이라는 표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례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효력과 의미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15. 루터의 신학 사상은 뮌처의 그것과 어떻게 디른가?
토마스 뮌처(Thomas Muentzer)의 신학과 루터의 신학은 네 가지 측면에서 대조적이다. 첫째, 루터는 성경과 말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며 말씀을 통해 성령이 역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뮌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이 주관적으로 개인의 영혼에 말씀하시는 내적인 말씀이라고 보았다. 둘째, 루터는 신앙이란 말씀을 접하고 성령의 조명과 감화를 통해 내적인 결단에 이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뮌처는 내면의 영혼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함을 통해 신앙이 생기며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셋째, 루터는 교회를 이신칭의를 통해 이루어진 성도의 공동체라고 했다. 그러나 뮌처는 내적 경험을 통해 회심한 선민의 모임이 교회라고 보았으며, 이들이 메시아 왕국을 앞당기는 전위대가 된다고 주장했다. 넷째, 루터는 두 왕국 사상을 주장했다. 세상의 통치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뮌처는 세상의 통치는 메시아 왕국이 올 때 무너져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폭력 사용도 인정하였다.
뮌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새로이 다양한 형태의 신정정치를 주창했다는 데 있다. 뮌처는 개인의 예정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의 신정정치를 소개하였는데 그 성도들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 같은 사상은 후스파로부터 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보헤미아의 접경지역에서 살았으므로 그들로부터 선민들의 왕국(kingdom of the elect) 개념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루터는 신정정치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했고 성도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관리들을 통해 인간의 악한 성품을 억제하게 하자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당초 그 같은 노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뮌처는 강제적 방법을 사용하려 하였고 주님의 임박한 재림은 추수밭에 낫을 댐으로써 촉진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16.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에 대응하여 루터는 <노예의지론>을 썼다. 은혜와 자유의지의 관계에 대해 루터가 주장하는 노예의지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1524)과 루터의 노예의지론(1525)은 인간본성과 죄의 과격성이라는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루터는 인간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이성으로 제어가 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해결된다고 하였다. 또한 루터는 계시된 하나님과 감추어진 하나님이라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은 원래 드러내지 않는 분이신데 드러내시려고 작정하시면 적극적으로 드러내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다. 또한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변증적 관계와 두 왕국 사상을 제시하면서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을 반박하고 노예의지론을 주장한다. 처음에 긴밀한 관계였던 두 사람은 이후 사상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루터는 인간의 의지는 죄로 구부러져 있어서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게 인정받는 길(칭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의(義)가 믿음으로 전가(傳加) 될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 최고의 공로가 믿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는 것도 인간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전가된 의를 통해 의롭게 되기 때문에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했다. 그들은 의롭게 인정받지만 실존은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17. 루터의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과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의 역사는 각각 무엇인가?
감추어진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알 수 없다는 기독교적 개념이다. 루터는 1525 년 라틴어 작품 De servo arbitrio에서 Deus absconditus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이전에 시편과 로마서 강의에서 이러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또한 계시된 하나님 (라틴어 : deus revelatus)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자기 계시는 그의 은닉에 있다는 이론이다. 루터는 1518 년의 하이델베르그 논쟁에서 이러한 이론을 밝혔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루터는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면 적극적으로 드러내실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최근에 이 용어는 종교적 주제를 현대적으로 분석하는 데 사용되었다.
루터는 ‘감추어진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의 이론을 이사야 45장 15절 주석(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분)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성경이라는 특별계시 개념이 명확하고 강조되면서 성육신과 십자가사건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두 왕국 이론(regnum Christi et regnum mundi)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감추어진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루터는 성경과 신앙에서 명백하면서도 모호한 것이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18. 칼뱅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3중성은 무엇이며, 하나님 말씀의 이중성은 각각 무엇인가 약술하라.
하나님 말씀의 삼중성은 삼위일체에 비유하여 설교된 말씀, 기록된 말씀과 함꼐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또한 율법과 복음이라는 이중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구약과 신약의 해석학적 열쇠가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삼중적이면서도 이중적이다. 인간이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본질인 율법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나약함과 타락함을 직시한 뒤 하나님에게로 나아오게 한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이라는 이중성은 하나님 모습의 자기 계시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다루어야 하는 근거는 바로 성경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이 삶과 죽음이 성경에만 있으면 알지 못할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어야 한다. 이것은 훗날 칼 바르트 신학에서 다시 강조된다. 칼뱅은 이 이론을 체계화한 선구자로 볼 수 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많이 강조해서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했었지만 칼뱅은 선포되는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성경은 기록된 말씀인데 이것이 선포되어야만이 하나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3중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선포되는 설교 말씀 자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말씀의 프라이드를 가져야 한다. 기록된 말씀을 참 말씀으로 하는 것이 바로 계시된 말씀이고 기록된 말씀이 바로 계시된 말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것이 올바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선포되지 않으면 안되기에 선포되는 말씀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19. 루터와 달리 개혁교회의 신학전통으로 두드러지는 칼뱅의 하나님의 섭리론에 대하여 루터 계통의 신학들과 다른 점을 약술하라.
칼뱅은 창조와 섭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불신자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에도 배려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데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 안에 일어나는 사건들, 우연이나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격적인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모든 것이 진행된다고 보는 것이다. 일반섭리 만이 아니라 특수섭리까지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조정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예정론과도 일맥상통한다.
칼뱅은 만물 창조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당위로 선포하면서 나아간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가족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시는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시다. 이를 보여 주는 것이 창세기 창조 기사의 목적이다. 따라서 칼뱅은 하나님의 6일 창조 사역은 창조주 하나님을 계시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 준다고 강조한다.
만물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서 경영되는데, 이와 같은 경영은 당신의 자녀를 양육하시고 교육하시는 수단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믿음으로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칼뱅은 하나님을 실제로 경외하는 것과 상관없이 단지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채우려고 하는 유해한 지식적 사변에 대해서 경고한다. 모든 인간의 자유의지는 수동성을 면치 못한다는 측면에서 루터의 이론과 같으나 인간 역사 전체를 섭리한다고 주장하는 것 등이 루터의 이론 보다는 좀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20. 칼뱅의 율법의 제1, 제2, 제 3사용에 대하여 약술하라.
칼뱅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 400년이 지난 때에(갈 3:17),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갈망하며 지치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이 주어졌다고 한다. 즉 십계명과 더불어 모세를 통하여 주신 종교 체제 전체가 율법인데,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분류해 보자면, 첫째, 모세 종교 전체, 둘째 주로 십계명 형태의 도덕법과 예수님의 요약, 셋째, 각종 민사법과 재판법이 포함된 의식법 등이다. 그에 의하면 율법이야말로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일종의 거울이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과 이것에서 일어나는 사악을, 그리고 결국은 그 두 가지에서 오는 저주를 본다. 마치 거울이 우리 얼굴에 있는 얼룩들을 보여 주는 것과 같다”고 한다. 율법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의 제 1사용은 율법은 인류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연법으로 율법의 정치적 사용(usus legis politicus)이 된다는 것이고 율법의 제 2 사용은 숨겨진 죄를 고발하는 기능으로 율법의 신학적 사용(usus theologicus)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기능은 루터도 말한 것이다. 율법의 제 3사용이 칼뱅이론에서 중요한데 그것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율법의 사용이라는 것이다. 칼뱅과 개혁파들은 율법의 제3사용을 강조했다.
21. 칼뱅이 예수 그리스도의 3중직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혹은 화해 사역을 어떻게 논증하는지 약술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 우리의 구속주, 우리의 화목주,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 예수는 죽음을 삼키고 죄를 정복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연합해서 한 인격이 되신다. 칼뱅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성자가 육체 안에 갇혀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제2위격의 자리를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개혁주의 기독론의 특징은 '칼뱅주의 초월'(extra Calvinisticum)이라고 불리는 '높아진 기독론'(high Christology)이다. 반면, 루터는 말씀이 육신이 되실 때 성자는 완전히 초월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다고 보는 '낮아진 기독론'(Kenosis Christology)을 주장했다.
우리의 중보자가 될 분이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1) 이것은 절대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구원이 달려 있는 신적 작정에서 발원했다(flowed from the divine decree on which the salvation of man depended). (2)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면, 우리를 천국에서 완전히 격리한 죄악의 구름(사 59:2)을 제거하고 평화를 회복할 중재자의 일을 할 수가 없다. ① 아담의 후손은 같은 죄인이라 자격이 없고(창 3:8), ② (언약의) 머리의 연줄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했으므로 하늘의 천사도 자격이 없다(엡 1:21–22; 골 2:10).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신성에 우리의 인성을 연결하여 함께 성장하는 방법밖에 없다(사 7:14; 마 1:23).
(1) 사람이 본래 오점이 없다 할지라도 그의 처지가 중보자 없이는 완전히 순결한 분이신 하나님께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비천했을 것이다. (2) 그런데 더욱이 지금의 인간은 치명적인 타락으로 죽음과 지옥에 떨어졌고, 무수한 오점과 부패로 더럽혀져 모든 저주에 압도되었다. (3) 이로 말미암아 참 중보자이신 ‘사람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에게 오셨다.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예언자, 왕, 제사장이라는 삼중직을 수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자로서, 복음 그 자체가 되셨고, 성도들을 통치하시는 영적인 왕이시고, 제사장으로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다.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도 이 삼중직의 역할이 어느 정도 주어져 있다. 복음을 전할 직책, 죄의 권세를 이기는 권세, 그리고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 할 직책이 있다.
22. 칼뱅의 구원론을 약술하라.
칼뱅의 구원론은 그의 성령론과도 상당 부분 겹친다. 성도들이 누리는 모든 은혜는 예수님이 공로를 통해 이루어 놓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5천 명을 먹이셨지만 자신을 위해서 광야의 돌을 떡으로 만들지는 않으셨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렸지만 자신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말씀, 행동, 생각 모두가 성도의 구원과 교회의 영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를 연결시켜 예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신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합시킬 때 우리에게 이신칭의, 회개 성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신비적인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의 화해가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칼뱅의 성령론은 구원론이 되는 것이다. 칼뱅의 구원론에는 예정론이 들어있다. 칼뱅의 예정론은 그의 목회 경험에서 나왔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같은 은혜를 받고도 어떤 사람은 구원의 길에서 떠나고, 어떤 사람은 구원의 길로 들어오는 차이가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또한 칼뱅 당시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프랑스 개신교인)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화형을 당했는데, 예정론의 확신이 있는 성도들은 확신을 가지고 순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것이 칼뱅이 예정론을 강조하게 된 이유들이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나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정론은 신앙의 수준이 높은 성도들의 신앙고백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예정론을 전도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소화할 수 없는 음식을 주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23. 칼뱅의 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에 대한 바른 이해는 무엇인지 약술하라
칼뱅의 예정론은 대단히 어려운 개념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믿는자들을 선택하시어 구원에 이르도록,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떨어지도록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선택된 신자들에게는 특별한 소명이 있다는 것이다. 칼뱅의 구원론에는 예정론이 들어있다. 칼뱅의 예정론은 그의 목회 경험에서 나왔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같은 은혜를 받고도 어떤 사람은 구원의 길에서 떠나고, 어떤 사람은 구원의 길로 들어오는 차이가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또한 칼뱅 당시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프랑스 개신교인)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화형을 당했는데, 예정론의 확신이 있는 성도들은 확신을 가지고 순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것이 칼뱅이 예정론을 강조하게 된 이유들이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나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정론은 신앙의 수준이 높은 성도들의 신앙고백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예정론을 전도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소화할 수 없는 음식을 주는 것과 같다고 한다. 칼뱅은 그의 예정론을 신론이 아닌 구원론에서 전개한다. 이러한 순서에 주목하는 것은 인간 구원의 근거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가 구체적으로 선포되기 때문이다. 섭리 교리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교리의 완성이듯이, 예정 교리는 구속주 하나님에 관한 교리의 완성이다. 이때 예정 교리는 성도에게 확신과 위로를 준다. 성경을 대할 때 지나친 호기심은 금물이지만, 반대로 주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시고 보이신 것에 침묵하는 것도 금물이라고 역설하면서 칼뱅은 예정 교리를 말할 수밖에 없고, 선택 교리가 주는 위로, 확신, 그리고 선한 믿음의 열매들을 선포할 수밖에 없다.
24. 칼뱅 신학에서 교회의 표지(notae ecclesiae)는 무엇인지 루터와 비교하여 약술하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시려고 교회를 세우셨다. 하나님의 교회를 나타내는 표지(sign)는 말씀 설교와 성례이다. 교회 안에는 말씀 설교와 세례ㆍ성만찬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성경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지 않으면 그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세례와 성만찬은 주님이 제정하셨다. 믿음으로 받는 세례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연합하는 표식이다. 세례는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설교는 귀로 듣는 말씀이지만, 성만찬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느끼면서 더 친숙하게 느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뱅은 칭의와 성화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두가지 은혜로 보았다. 그는 세례를 칭의와 관련 시켰고, 성만찬은 성화와 관련시켰다. 세례와 중생(칭의)은 한 번만 받는 것이지만, 성만찬은 반복된다. 세례 이후 성만찬을 계속 받을 때마다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교회가 성례전도 아니고 교직제도도 아니고 ‘성도의 교제’라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하는 표지(signs)는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특징은 ‘사도적 계승’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고 듣는 것이다. 루터의 교회론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만인제사장설’(universal priesthood)인데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사람을 불러 목회사역을 맡기시는데 여기서 직분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나중에 칼뱅의 교회 직분론으로 발전한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7개 성례전에서 오직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로 인정했는데 그는 성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 표지(sign), 믿음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세례와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고, 물과 잔과 떡이라는 물질적인 표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례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효력과 의미가 발생한다고 한다.
25. 교회의 직분론에 있어서 루터와 칼뱅의 차이는 무엇인가?
칼뱅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을 돕기 위해 교회를 주셨고, 그 안에 직분을 세우셨다고 했다. 그는 성경연구를 통해서 목사, 장로, 교사, 집사의 네 가지 직분은 언제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직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직을 가지고 있으며 목사가 아니라도 필요한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고, 장로가 아니어도 다른 성도들의 영적인 문제를 살피고 도울 수 있다고 한다. 집사가 아니라도 이웃을 구제하고 봉사할 수 있고, 신학자가 아니어도 주일학교 교사로 섬길 수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와 분수에 따라 섬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며 자기 능력에 맞지 않는 직분을 고집하거나 기존의 직분을 무시하게 되면 교회 질서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성도는 전 교회의 화합과 질서를 고려하면서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고 한다.
반면 루터는 직분에 대해서 논문 ‘독일 귀족에게 고함’(1520.8)에서 만인 제사장론을 주장하면서 신도들은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이 되어 생활을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루터는 이 교리를 통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개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존중하도록 만들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사제가 제사장이고 일반 교인들은 사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제사장이라고 가르쳤다 전에는 사제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로 여겼으나, 루터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이라고 가르쳤다. 전에는 교회에서 성만찬을 할 때 사제들만 빵과 포도주를 취하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빵만 주었는데 이제는 모든 개인에게 빵과 포도주 모두를 분배하였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기능은 다를지라도 신분에 있어서는 똑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만인제사장 교리는 중세의 집단적 세계관이 근대의 개인적 세계관으로 뒤바뀌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26. 역사적으로 교회가 발전시킨 3가지 정치제도로 감독제, 회중제, 장로제가 무엇인지 약술하라.
교회는 역사적으로 세 가지 정치제도를 발달시켰다. 첫째, 가톨릭,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는 감독 (주교)제도를 가지고 있다. 감독제도는 감독이 예배와 설교 행정의 권한을 대표한다. 둘째, 회중 제도이다. 교회 행정과 지도자 선출에 성도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셋째, 장로제도는 의회 제도를 택하고 있다. 교인들의 투표로 장로를 뽑고, 중요한 결정들을 당회에서 하는 것이다. 칼뱅은 모든 교인들이 모여서 결정할 때 때로는 분위기와 기분에 좌우 될 수 있기 때문에 대표들이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는 귀족적 민주주의 정치를 선호했다.
칼뱅은 제네바 시 안에 컨시스토리(Consistory)라는 제도를 세웠다. 그것은 오늘날의 노회와 비슷한 제도였다. 그후 장로교회는 당회(session), 노회(presbytery), 대회(synod), 총회(assembly)를 발전시켰다. 개교회 안에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가 있다. 한 지역 안에는 그 지역의 목사와 장로들이 모여서 노회를 구성한다. 장로는 개 교회에 소속되지만 장로교 목사는 노회에 소속된다. 장로교회에서는 교인들이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 그 목사가 소속된 노회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 청빙이 된다. 주(state)나 도(province) 단위의 총회를 대회라고 한다. 그리고 전국적인 기관인 총회가 있다. 노회의 상위 기관은 총회이다. 그러나 장로교의 법을 어기기 않는 한 총회가 노회의 결정에 간섭을 할 수 없고, 노회도 당회의 결정에 간섭을 할 수 없는 독자권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칼뱅주의가 들어간 나라들, 특히 스코틀랜드, 영국, 미국, 네덜란드는 이런 장로정치제도의 영향으로 의회 민주주의가 일찍 발전했다. 대의제도(의회) 역시 종교적 영향(장로교)으로 발달된 것이다. 당시 종교의 위세는 사회, 정치, 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발휘되고 있었다.
27. 칼뱅과 개혁교회 전통이 강조하는 치리(Church Discipline)의 목적과 절차는 어떠한지 약술하라
칼뱅은 교회의 치리를 중시했는데 이 치리를 배격하는 사람을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개혁교회는 이러한 치리를 강조하는데 그 까닭은 루터가 이신칭의라고 하는 교리적 구원론의 가르침에 머무는 경향이 있어서 칼뱅은 개혁교회는 성화를 강조하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삶, 제 3 사역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는 이러한 교회의 치리를 너무 강조하였으며 루터는 이 부분이 조금 약했다. 칼뱅은 이 치리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이며 그 절차는 기독교강요의 교회정치에 언급된 대로 엄정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와 칼뱅도 지상에는 완전주의자들로 구성된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교회에는 질서가 필요하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칼뱅에 따르면 교회는 첫째, 교리에 관한 권세, 둘째, 입법에 관한 권세, 셋째, 재판에 관한 권세를 갖는다. 교리권에는 다시 신조를 제정하는 권세와 신조를 설명하는 권세 두 부분이 있다. 교회의 참된 권세는 교회가 얼마만큼이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느냐와 비례한다. 다시 말하여, 교회는 교리를 작성할 때에 성경에 근거해야 하고, 모든 반론들을 성경으로써 물리쳐야 한다. 교회가 진리를 권위 있게 가르치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의 규정과 표준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한도를 넘어선 로마 가톨릭은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는 것이 칼뱅의 분석이다.
28. 성만찬 교리에 있어서 루터와 칼뱅의 차이는 무엇인지 약술하라.
칼뱅은 외형적 수단의 사용에 인색했는데 성례전에는 참여하지만 루터와는 반대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성만찬에서 떡과 잔의 본질이 살과 피로 변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하신 몸은 신성과 인성 사이에 '속성의 교류'가 일어나서 우주 전체에 가득 찰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몸은 우리에게 주어진 떡과 즙 안에(in) 함께(with) 밑에(under) 실재(real presence) 한다고 보았다. 루터는 주님이 “이것은 내 몸이다 내 피다.”라고 말한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
칼뱅은 루터와 츠빙글리와 다르면서도 그 둘을 중재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칼뱅은 루터처럼 성만찬에 예수님이 실재로 임재(real presence)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츠빙글리처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의 몸이 직접 오실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대신 주님은 성령으로 성만찬에 오셔서(spiritually real presence) 우리를 주님과 연결해 준다고 보았다. 그래서 칼뱅은 기독론적으로는 츠빙글리와 일치했고, 실재 임재라는 면에서는 루터와 일치했다. 칼뱅의 성만찬론은 에큐메니칼 했다. 오늘날 장로교회의 성만찬론은 츠빙글리와 칼뱅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성경은 루터, 츠빙글리, 칼뱅의 성만찬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현대에도 성만찬론은 개신교인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 성만찬의 신비는 이성과 지성으로 논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영적으로 받아들일 때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29. 국가 이해에 있어서 루터와 칼뱅의 차이는 무엇인지 약술하라.
루터는 국가와 교회가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가는 율법의 시민적 기능에 속하며 교회는 복음에 속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국가를 주신 것은 악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신자들은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시민적 통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복음의 왕국은 국가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 루터의 두 왕국 사상은 오늘날처럼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시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장로교회는 다른 교회들에 비해 정의, 인권, 평화를 위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다. 독일에서는 루터교가 강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히틀러가 집권할 때에 루터교회가 히틀러를 지지했다. 왜냐하면 루터교회에서는 국가정부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권력에 복종하여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칼뱅도 루터처럼 두 왕국설을 지지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구세주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주권과 교회의 주권을 다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칼뱅은 국가 권력이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통치를 할 때에 성도와 교회는 국가권력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신앙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을 강요할 때는 교회가 저항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대표자를 통해서 질서 있게 저항해야 한다고 했다. 칼뱅에 따르면, 교회와 성례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정치 질서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사회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또 하나의 도움이다. 그러나 당시 재세례파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하여 혁명적이고 무정부적인 신앙관을 드러내 보였다. 그들은 세상의 권력과 법이 있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졌다. 하지만 칼뱅은 성경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적으로 다스리시는 동시에 세속 정부인 국가를 통해서도 우리를 통치하신다고 본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선양이 두 영역에 대한 통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므로 칼뱅은 비록 두 가지 통치를 구분은 하되, 서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고 못 박는다. 그리스도인은 국가 통치에도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0. 종교개혁의 두 왕국 사상은 참된 세속화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크리스찬은 의인이면서 죄인인 까닭에 두 왕국에 모두 예속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와 국가의 법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발전되면 세상과 교회가 분리되는 결과를 낳는다. 두 왕국이 완전히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크리스천은 세속 역사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두 왕국 사상이 성경에 기반하고 있다. 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명을 약화시키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세속화의 신학’에서 ‘직업소명설’이 도출된다. 중세교회는 교회의 일은 성직, 평신도의 직업은 세속직이라고 구분했으나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께 ‘소명’으로 받은 모든 직업은 성직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교회만이 아니라 세속 사회의 주권자이시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거룩해야 하는 것처럼 세속 안에서도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직업은 성직이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도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면 세속적인 것이다. 세속과 거룩성은 장소와 직업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로 구분되는 것이다.
31. 스코틀랜드의 국민언약(National Covenant)이 갖는 교회사적, 세계사적 의의를 약술하라.
찰스 1세는 교회법과 예배의식을 통일시키겠다며 스코틀랜드에 새로운 ‘공동기도서’를 강요 하였 는데 이에 대해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폭동을 일으키고 제 2의 종교개혁이라 불리우는 국민 언약을 선언한다. 163년 그레이프라이어 교회당에서 3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서명을 했고 그 사본을 전국에 돌려서 전 국민의 60%가 서명을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국왕이 종교를 존중하지 않으면 무력으로라도 저항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들은 장로교회 정치를 ‘하나님의 제도’라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12월 글래스고 총회 때는 공동기도서 불법이라는 결정과 함께, 주교제도를 아예 폐지하고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모든 비장로회적 요소를 제거하고 장로교회를 국교로 삼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장로교회 정치를 ‘하나님이 주신 제도’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동안 장로회 제도를 가장 잘 개혁된 교회라고 애둘러 표현했다면 이제는 신구약 성경의 근거와 함께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제도’였음을 명백히 표방한 것이다.
32.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구성하는 두 나라 한 교회 세 견해는 각각 무엇이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 약술하라.
두나라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의미하며 두 나라의 대표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통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제정하면서 같은 교리로 통일한 것을 의미한다. 세 견해라는 것은 장로교회파와 독립파, 주최측인 에라스투스파를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세 분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논쟁을 계속하면서도 마침내 합의에 도달하게 된다. 장로파는 다수라서 힘이 있었고, 의회를 등에 업은 에라스투스파는 주최측이라서 힘이 있었으며 독립파는 군부와 친했습니다.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크롬웰 장군이 독립파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5년여에 걸친 치열한 논쟁 끝에 종교개혁의 정수라고 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33. 이상적인 교회개혁의 원리와 방법에 대해 논술하라
우리는 이 시대 바람직한 교회개혁을 위해 종교개혁의 전통을 선별적으로 수용, 발전시켜야 한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한다. 최근의 사조는 하나님이 기록하신 성경을 거대담론을 언어와 상징으로 표현한 권력놀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실재와 부합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하면서 실용적 진리만이 유일한 종류의 진리라고 하는 종교적 상대주의를 표방한다. 교회는 이러한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힘을 잃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며 인간 실존에 침투해 들어오셔서 인류 구원의 원대한 계획을 실행해 가고 계시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능력과 지혜와 지식의 근원이시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악한 영들은 일곱 길로 달아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핵 시대를 살아가면서 삶의 온갖 변화와 불확실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여전히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하심을 지닌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성서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결하여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그들 주위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정돈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안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환경을 조정하신다는 생각은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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